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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26일(주일) 주일설교 전도서 7:1~14 ‘지혜자로 살라’ 예산수정교회 이몽용목사
새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오늘은 전도서 7:1~14 말씀을 중심으로 ‘지혜자로 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솔로몬은 슬픔과 책망과 참음과 죽음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는다고 하며, 지혜자는 이것을 마음에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탐욕과 뇌물이 사람의 명철을 망하게 하고, 교만과 급한 마음으로 발하는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문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은 ‘지혜자’와 ‘우매한 사람’을 대조하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구약성경 가운데 "지혜서"라는 책들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3권의 성경책은 곧 ‘욥기, 잠언, 전도서’가 포함됩니다. 이 책들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삶 속에서 행복을 경험하게 되는지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난제들을 푸는 열쇠로서 지혜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자세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의 지혜 서적들과 성경에 있는 지혜서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며, 또한 지혜의 근본이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에 있는 지혜서이며, 그 지혜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세상적인 지혜서입니다. 지혜서인 잠언과 전도서는 B.C.10세기경 솔로몬이 왕위로 있을 때에 쓰여진 책인데요,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자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올라갔고 거기에서 ‘일천 번의 번제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번제를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나타나 무엇을 줄 것인지 요청하라고 했을 때에 솔로몬은 "나는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 모르니, 백성을 잘 재판할 수 있도록 ‘듣는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솔로몬의 그 요청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지라,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추가로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부귀와 영광과 장수’까지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실제적으로 솔로몬에게 지혜가 임하였고 그의 지혜는 놀랍게 나타났습니다. 오늘 살펴볼 ‘전도서’는 전도자인 솔로몬이 노년에 쓴 책으로서, 솔로몬의 유언집과도 같은 책인데, 그는 여기에서 자신이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았지만 다 헛되고 헛된 것들로서 바람잡는 것이었음을 고백하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경외하는 것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론으로 이정도로 소개하구요.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누려왔던 솔로몬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디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까에 관해 본문에서 세가지로 소개합니다. 첫 번째는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이구요(1~4절), 두 번째는 책망에서 얻는 지혜이구요(5~10절), 세 번째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얻는 지혜(11~14절)에 대해서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지혜의 왕인 솔로몬왕으로부터 한 수 지도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매한 자가 아니라 지혜자로 이 땅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초상집에서 얻는 지혜(1~4절)
첫 번째는 초상집에서 얻으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1절에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 보다 나으매”라고 했고, 2절에는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절 말씀에도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을 누려보았던 솔로몬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부와 명성을 가진 사람도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것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초상집’입니다. 초상집에서는 저마다 자신의 인생을 진지하게 돌아보며 성령이 주시는 근심을 하기에 유익한 생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무지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줄로 착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모든 사람의 끝인 초상집에서 부질없는 탐욕과 야망을 내려놓고 삶의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부교역자 생활을 15년하면서 장례식을 제일 많이 갔던 것 같습니다. 세보지는 않았지만, 장례식장에서의 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등 1달에 한 번 정도를 따진다고 해도 150여 차례에서 200번 정도의 장례식을 직접 집도해보았습니다. 반면에 결혼식 주례는 반드시 담임목사님이 하시드라구요. 그래서 부교역자시절에는 한 번도 주례를 하지는 못해보았습니다. 전북대 의대교수인 김형태교수는 그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본문 7장 2절을 묵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가 드니 상가집에 조문을 가야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교회에서 맡은 직분 때문에 조문을 가는 일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초상집에 가서 조문을 하는 일을 통해 인생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은 전도서 7장 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잔치집에서는 크게 감동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에서는 한 인생의 시작과 종말,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나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들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어 잔치집에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유익한 시간이 되는 셈입니다. 물론 유족들과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 조문을 간 나에게는 그런 유익한 시간이 되는 셈입니다. 삶에 대하여 더 진지하게 생각하고, 흩어진 마음을 다시금 추스리는 기회의 시간들이 됩니다. 인간 개개인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늘 고민하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짧고 시간은 빠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심각하게 살자는 뜻은 아닙니다. 인생을 어둡게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인생을 답답하게 살자는 것도 아닙니다. 보다 신중하게, 보다 밝게, 보다 현명하게 살자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히 9:27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죽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누리고 싶어했던 진시황제나 저 이집트 피라미드에 누워있는 애굽왕들은 이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이 말씀 하나로 세상에서 사라져갔습니다. 죽음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그것은 인생에게 주어진 숙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후의 일입니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사람들은 죽었으면 그만이지 무슨 심판이 있다는 말인가 의아해 할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일은 잘 모르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편안한 상태가 되는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 후의 심판을 말하면 당신은 죽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감히 죽음 이후의 일을 아느냐고 오히려 되묻습니다. 사실 우리가 남극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남극이 있을 줄 압니다. 가보지 않아도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때문이며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그 사실을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음 이후의 세계와 심판에 대해서 성경은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고 안 믿고는 각자 개인의 믿음에 달려 있습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는 자로 드러나 죽음 후의 심판까지도 이 땅에서 준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지혜로운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해보세요. 나는 장례식장에 가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 나는 평소 내 인생의 끝을 생각하며 나의 욕심과 미움을 내려놓습니까?
2. 책망에서 얻는 지혜(5~10절)
두 번째로 솔로몬은 책망에서 지혜를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5절에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책망'으로 번역된 히브리 원어 '게아라'는 지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에서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또한 그를 강하게 양육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권고나 견책을 가리킵니다(잠 13:1; 17:10). 이러한 지혜로운 자의 '책망'은 잘못을 지적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잘못에서 돌이키도록 하는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듣는 자에게 심히 유익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언에서 이러한 식의 ‘책망’을 '생명의 길'이라 표현했습니다(잠 6:23). 반대로 '우매자의 노래'는 일차적으로는 듣는 자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혼잡하게 하는 문자적 의미로의 '노래'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거짓된 위로나 형식적인 격려의 의미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우매한 자의 노래로 비유된 듣기 좋은 말을 경계하도록 교훈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자의 책망’은 해 아래 인생의 지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을 통한 지혜를 말합니다. 딤후 3:16절에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망’은 복음이 아닌 엉뚱한 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단들의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나 거짓 선생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바른 복음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책망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바르게 함’으로 인도하기 위함인데, 여기서 ‘바르게 함’은 성도들을 바른 복음의 길 바른 진리의 길로 인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조건 교회에 와서 열심히 일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고 깨닫고 진리의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자신만의 고집대로 엉뚱한 길로 가는데 열심을 내면 낼수록 하나님과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로 가는 것이 바른 길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성경이 최고의 길을 제시함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지혜를 깨달은 지혜로운 자들의 권면을 잘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 지혜를 따라가는 길임을 솔로몬은 우리들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믿음의 교회공동체에 기도를 요청하고 함께 의견을 물으며 가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삶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혼자서 그 길을 다 결정하고,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면 누구도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고 책망하시며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하늘의 지혜가 충만하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이 책망을 듣고 깨달아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고 돌이킬 때 나의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적용해보세요. 나는 책망하는 말과 칭찬과 격려하는 말 중 어느 것을 듣고 말하기를 좋아하십니까? 나는 혼자서 결정하는 독불장군입니까? 믿음의 공동체에 묻고 함께 기도를 요청합니까?
3.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얻는 지혜(11~14절)
세 번째는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에 지혜를 얻으라고 권면합니다. 14절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이와 유사한 말씀을 지난 주 주일에 살펴보았던 전도서 3장 11절에도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여기에서 ‘아름답게’라는 단어는 ‘조화롭게’라는 뜻입니다. ‘조화’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Harmony’이지요. 세상에 1년 내내 ‘낮’만 있다면 어떨까요? 아마 쉬지 못해서 엄청 힘들 것입니다. 최근의 여름처럼 30도 이상의 ‘폭염’만 있다면 사람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마찬가지로 세상에 ‘형통한 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꽃길’만 걷는다면 사람들은 쉽게 안일해지고 나태해지고 타락하게 것입니다. 또 오늘 본문에서 언급한 ‘곤고한 날’만 있다면 사람들은 낙심하고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시고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조화롭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이며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본문 14절에서는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 하지만, 이 말씀 속에는 놀라운 진리가 있습니다. 형통한 일이 있을 때 진정으로 기뻐할 줄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형통한 일이 있는데도 진정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건강해도 기뻐할 줄 모르고,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어도 기뻐할 줄 모른다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건강하기 때문에 기뻐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음에 기뻐하고, 부모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자녀 때문에 기뻐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았음에 기뻐하는 등 이런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난 주 수요일 새벽에는 너무 힘들어서 새벽예배를 드리지 못했는데요. 밤새 뒤척이며 잠을 한 숨도 자질 못했어요. 이리 누워도 아프고, 저리 누워도 아프고, 그래도 새벽에 간신히 일어나서 어떻게 든지 해볼려고 하는데, 양말도 제대로 신을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새벽기도를 쉰다는 문자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루를 치료받고 그 다음날 건강을 회복했을 때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는 형통한 날 뿐 아니라 곤고한 날에도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를 발견해야 합니다. 곤고한 날은 고통과 고난의 날입니다. 우리는 때로 병들어 몸이 아프고, 가정에 불화가 생기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고 사업에 어려움을 겪거나 취업에 실패하여 곤고한 날을 겪곤 합니다. 또한 성도들도 때로는 말씀대로 살다가 손해보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주시는 지혜는 바로 ‘되돌아보라’는 말압니다. 이 말씀은 그 곤고한 일을 통해서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합니다. 그 사건을 통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깊이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무엇을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일까요? 먼저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과 기도가 충분하지 못했음과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주님을 더 의지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충분히 대비하지 못한 방만함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이러한 곤고한 날에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깨닫고 회개하며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계기가 된다면 자신에게 다가온 이 곤고한 날은 화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될 것입니다. 전화위복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지혜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을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때에, 그것이 형통한 날이든, 곤고한 날이든 간에 하나님 말씀안에서 순종하며 일상을 믿음으로 잘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입니다. 고린도전서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당장 몇 초 후에 자신에게 일어날 일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지혜로운 인생은 자신의 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그 분의 때에 그 분을 의지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적용해보세요. 나는 형통할 때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십니까? 반대로 나는 곤고한 날에 자신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십니까? 아니면 곤고함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며 하나님을 멀리하십니까?
‘곤고한 날에’라는 장병준 형제님의 큐티인 간증 내용입니다. 몇 년 전, 저의 작은 아들은 불의의 사고로 아파트 3층에서 추락하여 약 2년 9개월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퇴원한 후 7개월간 통원치료를 받으면서 지냈습니다.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아들과 산책하는 것, 목욕시켜주는 것과 아들의 인지 능력의 회복을 위해 반복적으로 아들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저의 제일 큰 걱정은 ‘아들의 인지가 더 이상 좋아지지 않고 계속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아들이 혼자 어떻게 사나?’하는 것입니다. 이런 걱정은 저를 매우 슬프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절)라는 전도서의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아들의 사고 이후 세상 모임을 나가는 등의 즐거움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퇴근 후에도 아들의 산책과 목욕은 제가 책임을 져야 하기에 사람들도 시간이 맞지 않는 저를 더 이상 찾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나 자신이 낙동강 오리알처럼 여겨져 외롭기도 하고,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라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소그룹 모임이 저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저에게도 퇴임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돈의 그늘 아래 ‘퇴직하면 이제 뭐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하나?’하는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소그룹 모임에서 먼저 실직한 분들의 이야기를 미리 들어둔 것이 제게는 예방주사처럼 느껴집니다. 또 주님이 그날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앞으로의 시간도 공동체와 함께 ‘지혜의 그늘 아래’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12절). 작은 아들의 사고로 곤고한 날을 지내며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14절), 소그룹 나눔으로 위로와 지혜를 얻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말하는 성공으로는 근심과 걱정을 해결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지혜로만 미래의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으며,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길 소망합니다. 적용) 지인과 형제들에게 제가 큐티한 내용을 일주일에 한 번이상 SNS로 전달하겠습니다. 퇴사하기 저네 동료와 후배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형통한 날을 지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곤고한 날을 보내고 계십니까? 형통한 날이면 기뻐하시고 곤고한 날이면 자신을 되돌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는 솔로몬과 비슷한 말씀을 약 5:13에서 하고 있는데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고 했습니다. 형통한 날이면 찬송하시고, 곤고한 날이면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바라기는 솔로몬의 권면처럼 잔칫집보다 초상집에서 죽음을 통하여 지혜을 얻으시고, 사람의 칭찬보다는 책망에서 지혜를 얻으시며,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통해서도 주님을 더욱 의지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를 얻는 지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