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초 ‘기후 소송’ 최종 공개 변론
‘기후 소송’ 청구인으로 선 어린이
“대부분 어른들은 어린이들이 세상을 잘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어린이다움을 강조하면서, 기후위기 해결과 같은 중요한 책임을 미래의 어른인 우리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한제아 어린이가 5월 21일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아시아 최초 ‘기후 소송’의 마지막 공개 변론에 나섰다. 2020년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불충분해 미래 세대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며 청소년 활동가들이 제기한 헌법 소원으로 출발한 ‘기후 소송’은 2023년까지 이어진 비슷한 헌법 소원 4건을 병합해 4년간 진행돼왔다. 1차 공개 변론은 4월 23일에 있었다.
이번 ‘기후 소송’은 영유아 62명을 포함해 총 255명의 시민이 청구인으로 참여했다. 헌법 소원 청구인 한제아 어린이는 최종진술에서 “61명 동생들과 사촌동생 아윤이를 대신해” 이 자리에 섰다며 “가족, 친구, 사람들 그리고 동물이 위험 없이 살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한제아 어린이는 2022년 8월 폭우가 오던 날 살고 있는 집 1층이 물에 잠겼을 때 엄마를 기다리며 무서웠던 경험을 떠올렸다. 그는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들이 물에 잠길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변화를 다음 세대가 해결하라는 것은 공평하지 않으며, 다음 세대는 꿈꾸는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고도 덧붙였다.
함께 최종진술을 한 청구인 황인철 공동운영위원장은 2019년 시민들과 폭염 모니터링을 진행한 적이 있다며, 참가자 가운데 가스검침원, 비닐하우스 농민, 배달노동자, 택배기사도 있었다고 말했다. “에어컨이 나오는 실내에서 체감할 수 없는 수치들이 이들의 온도계에 찍혀 있었습니다. 어느 한 분이 말했습니다. ‘빙하의 북극곰이나 아스팔트의 노동자나 그 처지가 하나도 다를 게 없군요.’”
이상 기온으로 사과 농사를 망쳐버린 농부, 바닷속 미역이 사라져 한숨짓는 해녀, 태풍이 오면 밤잠을 못 이루는 반지하방 주민 등을 만나왔다는 그는, 흔들리는 목소리로 변론을 마무리했다.
“이들은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우리 모두의 공동체를 지키고자 분투하는 이 나라의 주권자들입니다. 헌법재판소가 이들에게 희망과 버팀목이 되는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사진: 청소년기후행동 제공
‘기후 소송’의 쟁점들
파리기후협정 당사국인 한국 정부는 2021년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탄소중립기본법)을 제정했다. 2016년 체결된 파리기후협정은 지구의 평균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 대비 2도 이하로 억제하고, 나아가 1.5도까지 제한하자는 목표를 약속한 국제사회의 합의다. 당사국이 감축 목표를 자발적으로 결정해 제출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의 탄소중립기본법과 동령 시행령은 2050년 탄소중립을 이루기 위해 2030년까지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퍼센트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명시하고 있다(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
청구인 측은 시행령이 내세운 감축 목표가 한국의 탄소 예산(온실가스 배출 허용량)을 고려할 때 “현저히 부족한 수치이며, 현행 NDC는 지구 평균기온을 3도에 이르게 할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날 쟁점이 된 ‘국가별 탄소 예산’은 ‘기후변화에 관한 유럽과학자문위원회’가 제안한 개념으로, 파리협정에서 내건 ‘공통의, 그러나 차별화된 책임’(CBDR·Common but Differentiated Responsibility) 원칙에 따라 잔여 탄소 예산을 인구 비례로 나눈 뒤, 선진국과 개도국, 과거 누적 배출량과 현재 소득수준을 고려해 조정하는 방식이다.
청구인 측 박덕영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탄소 예산 등의 방식으로 국가 온실가스 배출량 한도를 정량화하지 않은 채, 기후변화에 대한 효과적 규제 체제를 마련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해 유럽 인권재판소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고 짚었다. 이에 정부 측 참고인 유연철 사무총장(전 외교부 기후변화대사)은 “탄소 예산은 전 지구적 개념이지 이를 국가마다 배분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합의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청구인 측은 탄소중립기본법에 대해 2031년도부터 2050년까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치를 규정하지 않았으며, 온실가스 감축 목표의 집행을 보장하는 방법도 불충분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정부 측은 파리협정에 근거해 한국의 탄소중립기본법 또한 5년마다 NDC를 수정 및 보완해 제출할 것을 규정하고 있으며, 철강·시멘트·석유화학 등 한국의 산업구조가 변화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유 사무총장이 “파리협정에 따라 2030년은 2050년으로 가는 길의 첫 번째 단계이며 아직 기회가 네 번 더 남아있다”고 발언하자, 청구인 측은 “향후 10년간 대응이 인류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분석이 담긴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 6차 보고서를 언급하며 “2030년 이후를 살아갈 세대에 대한 차별”이라고 답했다.
유 사무총장은 탄소포집활용저장 기술(CCUS) 등이 발전하면 온실가스 미래 감축 여건이 달라질 수 있다고도 말했다. 김형두 헌법재판관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술을 믿고 낙관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던졌고, 유 사무총장은 CCUS의 경우 기술 개발 우선순위에 따라 많은 재원이 흘러가고 있다고 했다.
기후위기와 십계명
마지막 공개 변론이 끝나고 청구인들의 소송대리인 이병주 변호사(기독법률가회 공동대표)에게 기독 법률가로서 느낀 바를 물었다. 2019년 하반기부터 기후 소송 공동대리인단에 참여한 이 변호사는 지금까지 4년간 이 소송에 매달려왔다.
“‘기후 소송’을 맡기 전까지 기후위기에 관심이 많지 않았고, 처음엔 소송에 끼고 싶지 않았어요. 환경 소송은 보통 승소하기 어렵고 캠페인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서요. 그런데 2019년 조천호 박사님(전 국립기상과학원장) 강의를 듣고 기후 문제가 자연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 정치적인 문제와 연결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청소년들이 기후 소송을 제기하면 상당한 호소력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병주 변호사는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영향을 받아 2019년 청소년기후소송단(현 ‘청소년기후행동’)이 주최한 토론회 및 심포지엄에 참여했다. “우리에게도 미래를 달라! 어른 세대들은 우리 청소년 세대들이 앞으로 살아갈 기회를 빼앗지 말라!”는 외침이, 아들이 아빠인 자신에게 전하는 말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굉장한 아이러니예요. 부모들이 자녀를 위해서는 기를 쓰잖아요. 그런데 자녀 세대가 앞으로 위험한 세상에 살도록 내버려두는 것에는 전혀 신경을 안 써요.” 이 변호사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입장에서 기후위기 대응에 본격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변호사는 기후위기에 대한 현세대의 안일한 태도를 두고, 십계명 중 4·5·6·8계명 등을 위반했다고 보았다. 하나님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4계명)며 자연과 노동의 쉼을 명령했는데, 인간은 오히려 감속 없는 문명을 자랑해왔다. 기후위기는 ‘네 부모를 공경하고, 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5계명)는 명령을 심각하게 묵상하도록 요청하고 있으며, 인간은 이를 거슬러 ‘세대와 세대 간의 집단적 살상’을 자행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살인하지 말라’(6계명)는 명령도 집단적·세대적으로 위반하고 있다. 무엇보다 현세대는 신앙적·사회적 태만으로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미래 세대 권리를 빼앗고 있다는 점에서 ‘도둑질하지 말라’(8계명)까지 계명을 어기는 중이다.
그러나 그는 기후가 악화되는 속도도 굉장히 빠르지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속도도 빨라지는 것을 체감한다고도 말했다. “국제적으로는 파리협정이 만들어졌고 금융기관들에서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산업에는 투자하지 않겠다는 제도를 만들어 산업계도 적극 대응하고 있죠. 네덜란드·독일·한국처럼 기후 소송도 세계적으로 일어나는데요. 입법부나 행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을 확실히 못 하고 있으니, 사법부가 기후위기 대응 기준을 잡아주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거예요.”
네덜란드와 독일도 환경단체들이 각국 정부를 상대로 ‘기후 소송’을 진행한 바 있다. 네덜란드 대법원은 2019년 네덜란드 정부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가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21년 독일 연방기후보호법에 대해 일부 위헌 판결을 내렸다. 올해 4월에는 스위스 여성 노인들이 유럽인권재판소에 낸 ‘기후 소송’에 승소했다. 한국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이번 소송 결과는 아시아 최초로서 국제적 파급력을 지닌다. 올해 여름경 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
첫댓글 기독교인들이 기후위기 대응에 본격적으로 참여해야 함이 절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