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문경 가족나들이(1)/靑石 전 성훈
장마가 끝나자 햇볕이 뜨거운 열기로 온 땅을 달구어 세상이 펄펄 끓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등허리와 겨드랑이는 물론 얼굴에서도 땀이 물 흐르듯이 쏟아진다. 집안에서 에어컨을 켜놓고 꼼짝하지 말든지 아니면 산이나 계곡 또는 바닷가 어딘가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이다. 손녀와 손자 유치원이 일주일간 여름방학이다. 한 여름 더위에 아이들과 집안에서 어떻게 씨름할 것인지 걱정이 되어 경주와 문경 일대를 다녀올 계획을 세운 게 몇 달 전 일이다. 아내가 여행갈 때 짐을 넣을 가방을 사주겠다고 하자, 손녀는 키티 그림이 그려진 분홍색 가방을, 한 살 아래 손자는 붉은 색 스파이더맨 그림이 붙은 깜직하고 귀여운 가방을 선택한다. 해외직구 제품인 가방은 비행기를 타고 서울까지 날아와 아이들 마음을 사로잡는다. 신이 나서 들뜬 아이들 모습에 어른들도 덩달아 어깨춤이 절로 나온다. 3대가 함께 여름휴가를 즐기려고 새벽길을 나선다.
첫째 날(8월1일), 새벽 3시 반 알람소리에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 후 짐을 챙긴다. 갑자기 거실 창밖의 소란스런 소리에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빗방울이 굵어지면서 요란하게 떨어진다. 거실에서 잠자던 손자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고 잠시 후 손녀도 일어난다. 오전 4시 반 짐을 다 싣고 출발하여 5시15분 경 동서울터미널을 지난다. 비가 내리는 탓에 하늘이 어둡다. 빗속 운전을 조심스럽게 하며 도중에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는다. 자동차가 경주부근에 이르자 비는 오지 않고 고속도로에도 물에 젖은 흔적이 없다. 경주 톨게이트를 지나자 햇살이 쏟아진다. 드디어 본격적인 경주여행이다. 태풍 ‘송다’의 영향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 선선하다. 하늘엔 뭉게구름이 느긋하게 흐르고 곳곳에 보이는 커다란 무덤들은 녹색으로 덮여서 푸근함을 느끼게 한다. 경주 시내로 들어서니 가로수가 이중으로 된 곳이 많다. 이름 모르는 커다란 가로수 뒤에 키 작은 배롱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서 붉은 색 꽃을 뽐내고 있다. 경주 전체가 문화재답게 높은 건물이 보이지 않아서 탁 트인 시야에 멀리 산들이 이어진다. 교통신호를 기다릴 때도 길이 막혀 차량들이 줄지어 있어도 짜증이 난다든지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신록이 우거진 주변 경치에 파릇파릇한 나무와 산들이 마음에 여유로움을 주어 감사하다. 깊은 산 속이나 바닷가에 가지 않더라도 길거리를 여유롭게 걸어도 ‘치유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덥지도 않고 비도 오지 않아 여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이다.
첫 방문지는 경주엑스포대공원 ‘경주타워’이다. 경주타워는 신라 선덕여왕 시기 세계 최고 목조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을 실제 높이 82m 그대로 재현한 경주 보문단지의 랜드마크이다. 궁궐, 사찰 및 분묘 등 신라 왕경의 대표적인 복원 모습을 영상을 통해 볼 수 있다. 경주타워를 나와 자연사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만져보라’는 안내문에 따라 화석을 만져보기도 하고, 장난감 같은 새마을 관광열차를 타고 엑스포대공원을 둘러보는 이벤트 행사도 즐긴다. 마지막으로 ‘찬란한 빛의 신라’라는 제목의 미디어아트 전시체험공간에서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즐거워한다.
오후 3시반경 숙소인 ‘산죽한옥마을호텔’에 도착한다. 별도의 독채마다 한 가구씩 숙박을 할 수 있는 고풍스런 모습의 초가집과 기와집이 열채 이상 보인다. 초가집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당 가득히 잔디가 자라고 발을 딛을 수 있는 디딤돌이 있다. 마당 한 편에는 탁자와 파라솔이 놓여있고 수도시설이 되어있어 잔디에 물을 줄 수 있다. 아들이 호스로 손녀와 손자에게 물을 뿌리자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2014년 10월 중순에 대들보 상량식을 거행한 초가집, 툇마루에 서서 잔디가 가득한 마당을 바라보니 어린 시절을 보냈던 외갓집 생각이 난다. 깊은 산사의 풍경처럼 바람소리를 전해주는 투박한 풍경도 달려있다. 한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가을처럼 하늘의 구름은 높게 떠다니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산죽(山竹)한옥마을 음식점에서 저녁으로 피자, 파스타와 다른 음식을 주문하고 맥주 한 잔씩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 야경을 구경하려 숙소를 나선다. 첨성대와 꽃의 정원, 동궁과 월지(옛 안압지)의 아름다운 야경을 보려는 사람들이 많다. 서너 번 경주에 왔었지만 야경은 처음이다. 초승달이 뜬 밤하늘에 보라색 빛이 물든 첨성대를 바라보며 그 옛날 첨성대를 짓고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았을 신라인의 모습을 그려본다. 신라 왕궁의 별궁터로 쓰였던 동궁과 월지는 각종 연회를 하던 장소이다. 붉은 색 조명이 빛나는 연못을 보면서 왕궁의 그림자속에서 남모르게 사랑의 밀어를 속삭였을 이름 모르는 궁녀와 화랑의 애틋한 사랑의 모습을 그려본다. 휘영청 밝은 달밤에 그림자를 밟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이도, 육신의 꿈틀거리는 욕망의 전차를 타고 불장난이나 야합을 꿈꾸던 이들의 유희도 떠오른다. 야경은 불빛이 비치기에 사물의 실제 모습보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희미한 등불아래 연인을 바라보면 어느 누구라도 마음이 쿵쿵 울린다고 노래하지 않던가. 산죽한옥마을 야경도 그러하다. 시골집 분위기에 하늘에는 초승달이 뜨고 붉은 빛이 빛나는 초가집은 환상의 세계로 이끈다. 밤경치의 경주 모습에서 단 하나, 아쉬운 것은 밤하늘의 별들의 잔치를 볼 수 없는 것이다. 할아비 머리에 손가락을 쑤셔 넣으며 소리를 지르는 손자의 모습에서 행복이란 지극히 사소하고 하찮은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이야기가 맞는 것 같다.
둘째 날(8월 2일), 아침에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귀엽고 아담한 초가지붕과 기와지붕 집이 오밀조밀하게 꾸며진 동네, 어른 허리에 닿을 듯 말듯 얕은 울타리너머로 들어다 보이는 집안 풍경에 저절로 미소가 나온다. 마을 구경을 끝내고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울산 대왕암을 찾아간다. 대왕암 주차장에서 출렁다리 가는 길목의 소나무 숲에는 아름다운 보라색 꽃을 피운 맥문동 군락지가 사진을 찍으라고 손짓하며 유혹한다. 바다위에 만든 대왕암 출렁다리는 파주 마장호수 출렁다리보다 훨씬 길다. 다리 중간에서 좌우로 출렁거려 간담이 약한 사람은 도저히 밑을 내려다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체력이 좋은 일곱 살 손녀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데 여섯 살 손자는 먹기는 잘 먹어도 체력이 약한 지 다리가 아프다고 중간 중간 아빠 등에 업힌다. 게다가 아토피 증세로 온몸에 붉은 반점이 생겨 땀을 흘리며 힘들어한다. 울산의 낮 기온은 높지 않은 편이나 습도가 높아서 끈적끈적하다. 대왕암에서 나와 주차장 부근 아이스크림 집에 들려 원하는 것을 하나씩 입에 물고 더위를 식힌다. 우리가족 중에서 나 혼자만 상대적으로 더위를 덜 타는 편이다. 땀을 흘리지만 더워서 못 살 정도의 더위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 대신에 겨울에는 추위에 맥을 못 추고 쩔쩔맨다. 추울 때는 속옷을 껴입고 장갑을 끼고 목도리를 두르면 되니까 별 문제는 없다. 경주로 되돌아오니 습도가 높지 않아서 그늘에 들어서면 괜찮다. 길게 줄을 선 소문난 빵가게에 들려 빵과 냉커피 그리고 주스를 사가지고 숙소에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오후 4시 넘어 불국사를 찾아간다. 입장료는 6천원인데 만 70세 이상 무료이다. 안내문에 “어제로 만 70세 넘으신 분은 신분증을 보여주세요” 라고 쓰여 있다. 4년 전에 왔을 때에는 65세 이상 무료라고 하여 그냥 입장했는데 세월이 변했나 보다. 극락전 앞에 황금복돼지상을 만들어 놓은 모습이 너무 생경하다. 황금돼지해를 맞이하여 복을 빌어주는 길한 동물이라서 만들어 놓았다는 안내문을 보며 순간적으로 머리를 가로젓는다. 참으로 묘한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웅전 앞의 다보탑과 삼층석탑인 석가탑, 무영탑(無影塔)이라는 전설이 있는 석가탑, 백제 사람 아사달과 아사녀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떠오른다. 단청이 벗겨져서 퇴락한 모습의 대웅전은 기나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오늘도 중생들에게 부처님의가피를 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웅전 부처님 좌우 협시불 옆에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의 모습이 있다. 대부분 사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모습이다. (2022년 8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