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에 다녀오다 .
송하 전명수
가을이 한창 무르익어 가는 시월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을 주체하지 못하여 길을 나서게 되었다. 새벽안개가 자욱하니 낮에는 분명 맑은 날씨가 이어질 듯하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중앙고속도로를 달려 북안동 IC에서 내려 곧장 예천양수발전소로 향하였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선리에 자리 잡은 산정호수가 있으니 어림호(御臨湖)라 부른다. 이곳이 양수발전소의 상부 댐이며 해발725m에 위치하고 있다. 하부 댐은 예천군 하리면 송월리의 송월호이다. 양수발전소는 만수시에나 심야의 잉여 전력으로 펌프를 운전하여 발전소 하부에 있는 저수지의 물을 상부 저수지로 퍼 올려서 비상시에 저장하였다가 낙차를 이용하여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소를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청평, 무주, 양양, 산청, 청송, 삼랑진 등지에 양수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예천양수발전소는 7번째로 건설하였으며 설비용량이 80만kw로 단일호기 국내 최대의 용량이다. 이곳은 2003년 9월에 착공, 총공사비 7천470억 원을 투입하여 8년간의 공사 끝에 2011.12월에 준공하였다. 이곳의 어림호라는 명칭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와 이곳에서 전투를 하던 중 친히 지휘하였다는 뜻에서 전래된 어림성(御臨城)의 옛 지명을 본 따 지었다는 것이다. 이곳 산정호수의 최대 수심은 80m이며 총700만 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깊고 푸른 호소를 조성해 놓았다.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에 위치한 소백산 용문사(龍門寺)에 들렸다. 용문사는 신라시대에 창건한 천년고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이곳은 명종의 태자와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 정조의 문효세자의 태실이 있은 곳이기도 하며 대장전, 윤장대, 목각탱, 탱화, 교지 등의 수많은 보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보광명전, 대장전, 응향각, 명부전, 응진전, 회전문, 범종각 등 수많은 당우가 배치되어 있는 대가람이다. 불경을 보관하는 책장과 같은 윤장대는 꼭 한 번 살펴보아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예천읍으로 내려오는 길에 예천군 용문면 죽림리에 자리 잡고 있는 초간정(草澗亭)에 들려보았다. 이곳은 산지가 아님에도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울창한 나무숲이 우거져 있으며 암석이 기묘하고 수목원림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운치가 별다르다. 이 정자는 초간 권문해(1534-1591)선생이 세워서 심신을 단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권문해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 20권을 지은 사람으로 오랜 관직생활과 당쟁에서 벗어나 고향인 이곳에 내려와 자연과 벗하고자 이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두 차례에 걸쳐 소실된 것을 지금의 정자는 고종 7년(1871년)에 그의 후손들이 세웠는데 앞면 3칸, 옆면 2칸의 와가 팔작지붕이다. 2개의 방과 4칸의 대청마루 그리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마을 앞에 넓은 도로가 개설되어 있고 그 아래로 맑은 시내가 흐르고 있으며 그 한지점이 공원과 같은 숲이 조성되어 있고 개울이 휘돌아 흐르는데 그 위에 아름다운 정자를 세웠으니 그 운치 또한 대단하게 느껴져 온다. 고결하고 청렴한 선비의 멋 그리고 명당을 골라내는 혜안과 풍류가 엿보이는 것 같다. 언제 누구의 손길인지 알 수 없지만 개울을 건너다니는 출렁다리를 놓아두었다. 그냥 보고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재미삼아 오랜만에 출렁다리를 건너보았다. 예천은 지금도 양반의 고장이다. 초간 권문해선생은 예천 권씨이며 조선 말기에 안동김씨와 더불어 세도를 부리던 풍양 조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농부가 들일을 하러 가면서 의관을 별도로 챙겨가서 만약에 외래 인사가 일터 근처를 지나치게 되면 하던 일손을 멈추고 의관을 정제한 후 인사를 하였다는 곳이 예천지방인 것이다.
예천은 한우가 유명하다기에 육회비빔밥을 시켜 점심식사를 하였다. 용문사, 회룡포, 양궁의 메카, 양수발전소, 초간정, 곤충 생태원, 삼강주막 등으로 비교적 관광자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대형식당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다. 한천이 흐르는 동본교(東本橋) 북쪽의 민가 옆에 세워져 있는 동본동 삼층석탑과 석조여래입상을 찾아보았다. 2층 기단의 삼층 석탑은 높이 4m로 통일신라시대의 탑이며 보물 제426호로 지정되어있다. 그 탑 바로 뒤편에 석조여래입상이 서 있다. 이 불상 역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으며 높이 3.46m이며 하나의 돌로 조각된 불상이다. 신체는 평판적이고 큰 머리가 둔중해 보이지만 자비가 넘치는 모습이다. 풍만한 얼굴에 눈은 반쯤 뜨고 미소를 머금고 있으며 짧은 코에 귀는 적당하게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보물 제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들판에 세워진 오층 전탑을 돌아보았다. 우리나라에는 석탑, 일본에는 목탑, 중국에는 전탑이 많이 나타나는데 아마도 산재한 재료에 따라 각각의 탑을 세운 듯하다. 이곳의 전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기단부에만 화강암으로 만들어 중심을 흩뜨리지 않도록 하였다. 남면에는 감실을 파서 그 좌우에는 인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겼다. 1층 지붕부터는 문양이 있는 벽돌로 쌓았는데 보수를 거치면서 문양이 앞뒤로 뒤섞여 쌓은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2층과 4층의 몸돌 남쪽 면에는 형식적인 감실이 표현되어 있고 지붕돌에는 이 지방의 다른 전탑과 달리 기와가 없다. 이 탑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높고 5층의 몸돌은 너무 크기 때문에 조화를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나 보물 제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 한쪽으로 기우러지는 느낌도 들어 제대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같은 마을에는 아동문학가 권정생(權正生, 1937-2007)선생 생가가 자리 잡고 있어 방문해 보았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1946년에 청송으로 귀국하였으나 가난과 6.25전쟁 등으로 가족과 헤어졌다가 폐결핵, 늑막염을 얻어 생사를 넘나드는 가운데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교회 문간방에 살면서 종지기 노릇을 하였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였으며 1973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분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다. 장편으로는 1984년 ‘몽실 언니’가 있다. 그 외 동화집으로 사과나무 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점득이네, 밥데기 죽데기, 하느님이 우리 옆집에 살고 있네요, 한티재 하늘,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아저씨, 깜둥 바가지 아줌마 등이 있고 시집(詩集)은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수필집으로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들의 하느님 등이 있다. 옛날부터 문인은 가난해야만 하였는가. 찢어지는 가난과 질병으로 밑바닥 삶을 살아오면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연이어 발표한 그의 빛나는 작품은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귀감과 교훈을 주는 듯하다. 말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사그라지지 않는 창작활동을 엿볼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존경스러운 마음이 울어난다. 그리고 초라하기 그지없는 단 두 칸짜리 오두막집이 이름난 문인의 생가라 하니 그저 마음이 숙연해 질뿐이다.
오가는 들녘에는 벼 베기와 나락을 타작하여 말리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고 산야에는 전형적인 가을인 듯 울긋불긋 단풍이 곱게 물들어가고 있다. 이 좋은 가을에 이렇게나마 하루라도 바깥바람을 쏘이며 여행을 할 수 있음에 행복해 하는 것이다. 지난봄에 들려 보았던 고운사에는 또 다른 아름다운 풍광을 자아내고 있었다. 오월에는 붉고 하얀 철쭉이 눈길을 끌더니만 숲 길 따라 올라가는 주위에는 푸른 소나무와 붉은 단풍이 어우러져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느티나무, 참나무, 소나무 사이마다 낮게 심어 놓은 붉은 단풍은 최고조의 자기색깔을 내어 뿜고 있다. 우리의 산야가 이토록 아름다우니 어찌 집안에만 들어 앉아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라도 좋지만 봄과 가을이 더더욱 좋은 계절이다. (2012.10.26)
첫댓글 선생님의 세세한 묘사속에서 이 가을을 물씬 느끼고 갑니다.
나의 고향 예천을 자세하게 소개하여 주어 감사합니다. 송하님, 행복하고 건강하세요.
예천을 다녀오셧 네요.예천은 한우로 유명하죠.저도 육회를 좋아하기 때문애 전국각지 유명하다는 육회는 맛을 보앗습니다 만 예천 한우 육회 비빕밥은 감칠맛이 나며육질이
쫀득쫀득 하면서 그맛이 일품입니다. 송하님 예천 여행기 잘읽고 지나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