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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유령처럼 떠도는 난중일기 조작글과 경상도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조작하여 경상도를 비방하는 것이 얼마나 근거없는 조작인지를
밝히고, 임진왜란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키고 장렬히 전사한 김해성전투 의병장과 의병들,
수많은 공훈을 세운 곽재우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장들과 의병들,
그리고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60전 60승의 정기룡장군과
관군들의 영령을 모독하고 짓밟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순신을 천거하였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들-시종일관 변함없는 후원자였던
서애 류성룡이나, 신구차(伸救箚)를 선조에게 올려 사형 직전의 이순신을 결사적으로
구명했던 약포 정탁 같은 인물들이 경상도 안동과 예천 태생임을 감안하면 이런 헛소리들도
전혀 근거가 없음은 물론이다. "
(신구차: 이순신 장군을 사형직전에 구한 정탁의 상소문. 이 상소문으로 인하여
이순신 장군은 백의종군하여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보면 자신을 천거한 경상도 출신 류성룡의 편지를 받고
그리움을 표현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류성룡을 나라 걱정에 류성룡만한 이가 없다고 난중일기에 적고 있다.
류성룡도 징비록에서 자신이 천거하고 지지한 이순신을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처럼 이순신과 류성룡은 서로를 향한 깊은 동지애를 가졌다.
하지만
1990년대 말부터 진보와 좌파가 만들어낸 추악한 '난중일기 한문조작글'이
아래처럼 경상도를 비방하기 위해 유포되고 있다.
◆ 인터넷에 떠도는 조작 글들로 이런 내용 자체가 없다.
1) 慶尙將卒 皆烏合之兵也 日日一斬卽 軍令保全 // "경상도 군졸은 모조리 오합지졸이라
하루에 한놈 목을 쳐야 군률이 보전된다"(충무공 난중일기) ->조작된 글
2) 慶尙徒 剃頭倭裝 導倭賊侵寇忠淸全羅 殺傷擄掠放火怯奸又諶於倭賊也 取老少婦女首及獻上倭將
"경상도놈들은 무리를 지어 머리를 깎고 왜옷을 입고 왜적의 앞장서서 충청전라지방에 침입하여
죽이고 뺏고 불지르고 강간함이 왜적보다 더 심한 바가 있다.노인 어린이 부녀자의 머리를 베어
왜의 장수에게 진상하기도 한다" (충무공 난중일기) ->조작된 글
3) 경상도인은 권세를 무한히 추종하고 아부하므로 능히 밑에 두고 부릴만하다....허나 일단
스스로 권세를 쥐면 무한히 그 힘을 휘둘러 무릇 뭍사람을 번민케 한다....입으로는 올은말 만
하면서도 뒷전으로는 온갖 못된짓을 먼저 하며 입으로는 대의와 도리를 부르짖으며 뒷전으로는
스스로의 사사로운 이득과 안위 챙길 궁리를 하니 자못 가증스러운 데가 있다.....성정이 포악하여
함부로 사람의 수족을 다침을 예사로 안다.....소매를 나누어 헤어질때는 반드시 해악을 입히고
떠나가니 평소에 멀리함이 가한 무리라 할것이로다. (이익의 성호사설) ->조작된 글
<1>지도자의 중요성
이순신장군은 감옥에 갇히고 반대로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칠전량해전에서
대패하므로써 조선 수군은 붕괴된다. 하지만 경상도 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도망친
판옥선 12척의 배가, 이순신 장군이 해전사에 남을 승리를 한 명량해전의 주력이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칠전량 해전에서 사람단위가 아니라 배 단위로 탈출한 것은 대부분 경상도 우수영 소속이었고,
이순신은 배설이 이끌고 온 12척의 선단과 개별적으로 탈출한 조선수군을 다시 수용하고,
후방에 잔류하고 있던 전라좌우수영 병력까지 수습한 후 명량해전에 임하게 된다. 따라서
당연히 명량해전 당시 병력이 경상우수영 병력만으로 구성됐다고 할수는 없겠지만 12척에
판옥선을 가동할 수 있을 정도의 병력은 타고 있었을 것이 틀림 없고, 그 점을 고려한다면
명량해전 당시 조선 수군의 최소한 1/2은 구 경상우수영 소속 병력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지도자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는 정기룡 장군도 경상도에서 60전 60승의 전과를 올린 것도
마찬가지다. 의병장 곽재우와 수많은 의병들은 또 어떤가.
지도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어려운 조건에서도 승리하고, 유리한 상황에서도 패하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2>임진란때 왜에 부역한 현상은 조선 전역에서 나온다.
문헌에는 전라도, 경상도 외에도 조선 전역에서 부왜 현상이 나타난다.
“경상도 일부 해안지역에서 왜인으로 변장한 가왜나 부역자가 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가왜나 부역자는 점령지역 전체에서 나왔을 뿐 경상도만의 현상도 아니었다.
심지어 함경도에서는 반란자들이 조선의 왕자들까지 왜군에 넘겨준 사례가 있다. 이순신이
장계 등을 통해 이같은 부역자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긴하나 위 구절과 같은 뉘앙스의 글은
아니다.” (조선의 두왕자를 왜군에 넘겨주고 작위를 받은 것은 전주출신 국경인이다.)
국난시기에 토적(土賊)과 가왜(왜옷을 입고 도적질하는 적들)는 본질상 차이가 없다.
왜에 부역한 자(부왜자)들은 경상도 만이 아니라 전라도 외에도 전국적으로 있었다.
아래는 그 예다.
“선조 수정실록 27년 12월 1일
호남·영남·기전(畿甸)의 토적(土賊)을 소탕하였다.
병란이 일어난 이후로 토적들이 험지(險地)를 점거하고 도발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부터 남원
회문산(回文山), 장성(長城) 노령(蘆嶺) 등 수십 개 군(郡)의 산골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는데,
적괴(賊魁)인 김희(金希)·강대수(姜大水)·고파(高波) 등이 나누어 점거하고 서로 내응하였으므로
관군(官軍)이 토벌에 나섰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와서 제군(諸君)의 병력이 사방에서
모여 수색 토벌하니 적들이 점차 해산하였으며, 관군이 끝까지 추격하여 주살(誅殺)하자 이에 평정되었다.
경기의 경우는 적괴(賊魁) 현몽(玄夢)이 광주(廣州)·이천(利川)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고, 이능(李能)이
양주(楊州)의 산골을 근거지로 하여 출몰하면서 노략질을 하였으나 오래도록 평정하지 못했었다. 이에
비변사가 변응성(邊應星)을 방어사(防禦使)로 삼고 성영(成泳)을 이천 부사(利川府使)로 삼은 뒤 서로 죽이고
투항하도록 현상금으로 모집했는데, 이능이 먼저 자기의 무리에게 죽음을 당했다. 현몽이 가장 사나웠는데
그의 무리는 항복하거나 흩어졌지만, 현몽은 도망하여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난중일기 1597년
10월 13일 [양력 11월 21일]
아침에 조방장 배흥립(裵興立)과 경상우후(이의득)가 와서 봤다.
조금 있으니, 탐망선이 임준영(任俊英)을 싣고 왔다. 그 편에 적의 소식을 들으니, "(전라도) 해남에
들어와 웅거해 있던 적들은 7 일에 우리 수군이 내려 오는 것을 보고, 11일에 몽땅 도망가버렸는 데,
해남의 향리 송언봉 신용 등이 적속으로 들어가 왜놈 들을 꾀어 내어 선비들을 죽였다.
통분함을 이길 길이 없다."
“선조 30년 11월 12일
전라 우수사가 왜군 앞잡이인 향리 사노 등의 실상과 그 처단법을 아뢰다
전라 우수사(全羅右水使) 이시언(李時言)이 치계하기를,
“해남(海南)•강진(康津)•장흥(長興)•보성(寶城)•무안(務安) 등의 고을은 인민이 거의 다 적에게 붙어
사족(士族)의 피난처를 일일이 가르쳐 주어, 거의 다 살륙되었습니다. 해남(海南)의 노직 향리(老職鄕吏)
송원봉(宋元鳳)과 가속 서리(假屬書吏) 김신웅(金信雄) 등은 혹은 좌수(座首)라느니 혹은 별감(別監)
이라느니 하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제멋대로 살륙하였으며, ”
<3>
“경상도 장졸에 대한 비판의 경우 원균에 대한 비판을 하는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경상우수영 수군을 비판하는 시각이 드러날 때가 있을뿐 위 인용구 같은 구절도 없을
뿐더러 그것이 경상도 장졸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는 사례는 전무하다.
더구나 원균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경기도 지역이 고향이다. “
더구나 이순신을 천거하고 후원하고 보호한 것은 류성룡을 비롯한 동인이었고,
원균을 지지하고 후원한 세력은 서인(? 동인 중 북인)이었다.
지도자의 중요성은 다음의 예로도 알 수 있다.
관원이 먼저 도망갈 궁리만 하는데, 제대로 싸울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이치다.
“선조 수정 30년 8월1일
적이 안음(安陰)의 황석 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다. 현감 곽준(郭逡)과 전 함양 군수(咸陽郡守) 조종도(趙宗道)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서생포에서 서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행장과 함께 남원을 공격하려고 했는데, 원수 이하가 모두 소문을 듣고 도망하였다.”
“선조 30년 8월 21일
그런데 남원은 우리 나라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도망함으로써 중국 장수로 하여금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혼자서 지키게 하다가 함락당하였습니다. 전주는 흉적이 아직 경내에 이르지 않았으니,
부윤 박경신(朴慶新)은 지극한 정성으로 군민을 개유하여 죽음으로써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겁을 먹어 도망할 계책만 생각하여,
~ 부윤은 백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자가 이처럼 동요되면 군사와 백성이 무엇을 믿고 필사의
각오로 지키겠습니까. 그리하여 마침내는 군사와 백성들로 하여금 반란을 일으켜 중국 관원 소속의
군량과 마초를 적치한 창고를 파괴하게 하여 중국 장수가 성을 지킬 수 없도록 하였으니, 군심(軍心)을
선동하고 성을 지키지 않고 버린 죄가 막대합니다.”
(전주성은 싸우기도 전에 도망쳐 왜군이 무혈입성 하였지만, 남원성은 위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일반 백성과 조선군과 명군이 힘을 합쳐 장렬히 싸웠다. 비록 패하였지만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
남원성에는 명군 3천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왜군이 접근함에 따라 외부에 구원을 요청해
조선군 약 천여명이 들어와 총 4천명의 병력이 있었다고 한다.)
“선조 30년 정유 9월5일
비변사가 아뢰기를,
“남원(南原)과 전주(全州)가 함락된 뒤로 적병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수령(守令)들이 먼저
도망하여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형세를 수습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감사(監司)는 한
도(道)의 주장으로서 마땅히 힘을 다해 국사(國事)를 돌보아야 합니다. 수령으로서
도망한 자에 대해서는 낱낱이 법을 시행하고 흩어진 사민(士民)을 다방면으로 수습하여
모집한다면 잘 해나갈 수 있는 형세가 없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풍문만 듣고는 멀리 도피하여 해안(海岸)에 가 있으면서 도내(道內)의 일에
대해서는 하나도 처리할 생각이 없습니다. “
“선조 30년 정유 9월6일
충청도 방어사(忠淸道防禦使) 박명현(朴名賢)이 치계(馳啓)하였다.
이달 2일에 적병이 금산(錦山)으로부터 회덕(懷德)·임천(林川)·한산(韓山) 등지에 침입하여 이곳 저곳에 가득 차 불지르고 약탈하였습니다. 이시발(李時發)이 군사를 가장 먼저 일으켰으나 과반수가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며, 이시언(李時彦) 및 신이 거느린 병사들은 모두 내포(內浦) 사람으로서 임천과 한산의 변을 듣고 역시 모두 도망하여 흩어져버렸으니, 지극히 안타깝고 염려스럽습니다.”
“선조30년 9월 18일
충청 관찰사 정윤우(丁允祐)가 장계(狀啓)하였다.
“병사(兵使) 이시언(李時言)의 치보(馳報) 내에 ‘왜적이 보은(報恩)과 직산(稷山) 등처를
침범해 와서 가득 진(陣)을 치고서 중국 병사와 대치해 있다. 내포(內浦) 각 고을에도 모두
왜적이 잔뜩 찼는데, 병사(兵使)가 거느린 장졸들은 모두 좌도(江道)로 피난하여 수풀 사이에 숨어버렸으므로 불러 모을 수가 없다. 이 때문에 변보(邊報)가 통하지 못하고, 또 수령(守令)
등이 간 곳도 까마득히 알 수 없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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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및 징비록 조작에 대한 반박글>
아래의 글은 두가지 버전이 있는데, <선조실록>버전이 하나이고, 두번째는<징비록>버전이다.
선조실록 조작버전이 먼저 나오고 징비록 조작은 그후다.
근거로 제시하는<선조실록>과, <징비록>을 국역한 책 3권에서 찾아보았으나,
저러한 내용은 없다. 거짓으로 타지역을 비방하는 것은 파렴치한 짓이다.
<역사조작 사례>
"倭亂終後, 局慶尙道頻生密體毛猿鳴兒. 上驚而命慶尙觀察使告由. 而奏告曰, 嶺南倭敵强姦極甚,
朝鮮純血長去也." (왜란이 끝난후 경상도에서는 온몸에 잔털이 덮이고 원숭이 흡사한 울음을
내는 아기가 태어 나는 일이 잦았다. 이에 주상께서 기이히 여기사 경상도 관찰사에게 연유를
알아 보라 분부한 즉 보고하기를, 경상도는 왜적의 강간이 극심해 조선의 순수한 혈통이 끊긴지
이미 오래 되었사옵니다 하였다) [유성룡 징비록 or 선조실록으로 거짓출처를 표기함]”
이글은 파렴치한 조작의 표본으로 류성룡 징비록, 선조실록 어디에도 저런 내용은 없다.
“■ 역사상 사대주의 문제를 특정 지역만의 문제로 보는 시각은 옳을까?
반대로 경상도를 욕할 생각도 없다. 임란당시 가장 먼저 의병 투쟁을 시작, 격렬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면서 왜군 정규군을 격퇴한 사례(고령)나 주요 도시를 수복(영천,경주)한 경상도 의병들의
고난에 찬 행적을 보면 오히려 경상도 의병들의 활약상은 곽재우 등 일부 신화적 인물의 전설에
가려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사대주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우리 역사상 사대주의의 모든 문제점을 경상도로 연결시키려 하는
시도 또한 그리 진지한 접근법이 아니다. 명 태조의 과격한 대조선 외교에 분노를 느끼고 오랑캐
중에 중원에서 왕 노릇한 자가 많다며 요동정벌을 꿈꿨던 정도전이 바로 경상도 출신이다.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를 뒷받침했던 정인지는 경상도 출신인데 비해 한자의 우위를 거론하며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는 황해도 출신이다. 임란 당시 명나라의 횡포에 분노를 느끼며
징비록을 통해서 명나라 원군을 혹평했던 유성룡은 바로 경상도 출신이다.
이에 비해 재조번방지처럼 명나라에 대한 절대 충성을 다짐하며 임란 극복의 모든 공이
명나라의 힘이었다고 주장하는 재조번방지의 저자 신경은 김장생·김집·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 서인 출신이다. 현실 역학적 문제를 고려한 실용적 사대주의가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이념적인 사대주의의 극한을 보여주는 송시열 또한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기호 지방 출신이었다.
이런 사례들은 사대주의 문제를 특정 지역 출신 인물들만의 문제로 연결시키려는 시각 자체가
근거가 없음을 보여준다. ”
<친일파 문제에 있어서도 유독 경상도를 거론하는 것은 조작 왜곡 비방에 가깝다>
일본의 침략에 맞서 국채보상운동을 펼친 발상지는 대구였다.
'을사오적, 정미7적, 경술국적 등 1905~1910년에 걸쳐 나라를 망하게 하는데 앞장섰던 주요 인
물들의 고향'은 대부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이고 경상도 출신은 거의 없다. 독립유공자 수에
있어서도 경상도는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다.
'3.1운동 참여자 수에 있어서도 도별 통계를 따져보면 경상도는 오히려 많은 편에 속한다.'
또한 3.1운동 사망자가 제일 많은 지역이 경상도이고 그다음이 평안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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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를 매국매족으로 비방하는데 대한 반박
=>
삼국시대는 민족관념이 없었다.
백제는 왜를 끌어들여 신라, 고구려를 공격했고,
고구려는 말갈족을 끌어들여 신라를 공격했다.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하여 발해가 건국될수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당은 신라에 이용만 당했다.
고구려가 망한건 연개소문이 왕과 온건파들을 몰살시켜 국론을 분열시켰고,
그 아들 연남생이 고구려를 팔아먹었다. 백제도 공주성 성주 예식진이 팔아먹었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민족의 범주가 굳어졌고 민족문화가 형성되었고,
왜와 말갈족은 우리와 멀어진다.
삼국 모두 700년간이나 서로 다른 국가로 존속해왔다.
고구려를 팔아먹은 것은 연개소문 아들 연남생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이었지 신라가 아니다.
백제인 예식진도 백제를 팔아먹었지만, 신라인들은 힘을 모아 국난을 극복하고 승자가 되었다.
조선말 세도정치 안동김씨로 경상도를 비난하는데 대한 반박
=> 안동김씨 일가는 영남과는 연고가 없는 기호지방 서인노론세력이다.
1800년대 이후 개혁군주 정조의 죽음으로 영남 남인세력은 완전히 배제되고,
서인노론이 계속 집권하여 조선을 말아먹는다.
성씨로 지역을 엮으면 충청도출신 김좌진 장군, 황해도출신 백범 김구선생도 안동김씨이다.
성씨를 본관으로 묶으면, 조선을 팔아먹은 을사오적 중 3개 성씨가 전라도 본관이다.
또한 전라도는 이완용의 묘지가 있었고,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이지용은 전라도이다.
그렇다고 조선을 팔아먹은 전주이씨가 되는가.
경상도를 비방하기위해 성씨로 엮고, 출신지역으로 엮고 하는 것이 모두 궤변임을 보여준다.
경상도를 친일매국으로 비방하는 부류들에 대한 반박
=>
역사적으로 신라역사 자체가 반일국가였고, 백제는 친일국가였다.
진흥왕은 백제, 왜, 가야 연합군을 물리쳤고,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바다의 용이되어 왜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했다.
조선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경상도는 없다.
1907년 대구에서는 주권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고,
1915년 가장 활발하게 전투적인 독립운동을 벌인 단체인 대한광복회가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일제강점기때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 경상도이다.(아래 도표참조)
3.1운동 사망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 경상도이다.
(사망자수 1.경상도 2,평안도 3.경기도 4.충청도)
참여자수도 전라도 다음으로 네번째이다.
(참여자수 1.경기도 2.평안도 3.전라도 4.경상도)
일제측 자료로는 경기도, 평안도 다음으로 세번째이다.
(참여자수 1.경기도 2.평안도 3.경상도 4.전라도)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에서 2006년~2007년에 발표한
악질 친일파 명단의 지역별 숫자로 봐도 경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적다.
1.서울.................79명
2.함경.................18명
3.경기.................16명
4.평안.................17명
5.전라.................10 명
6.경상..................8명
7.충청..................7명
8.황해..................4명
9.만주..................1명
출신지 미상........ 53명
진실이 이러함에도 경상도를 친일매국으로 모는 부류들은 악의적 비방을 하고 있는 것이다.
[표 3] 참가자수와 피해상황 (단위 : 명)<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경기 297 665,900 1,472 3,124 4,680 (72) (243) 황해 115 92,670 238 414 4,218 (36) (82) 평안 315 514,670 2,042 3,665 11,610 (231) (519) 함경 101 59,850 135 667 6,215 (39) (139) 강원 57 99,510 144 645 1,360 (23) (47) 충청 156 120,850 590 1,116 5,233 (49) (175) 전라 222 294,800 384 767 2,900 (10) (21) 경상 223 154,498 2,470 5,295 10, 85 (76) (211) 국외 51 48,700 34 157 5 계 1,542 2,023,098 7,509(536) 15,961(1,437) 46,948
구분
회집횟수
회집인수
사망자수
부상자수
피검자수
[표 1] 운동규모 (1919)<일제측 자료>
도 별 | 참가군 | 참가인원 | 운동기간 |
---|---|---|---|
경 기 도 |
22 |
약 47만 |
3. 1∼4.23. |
강 원 도 |
20 |
약 2만5천 |
3. 2∼4.21. |
충청북도 |
9 |
약 2만8천 |
3.19∼4.19. |
충청남도 |
13 |
약 5만 |
3. 3∼4.12. |
전라북도 |
14 |
약 1만 |
3. 3∼4.18. |
전라남도 |
18 |
수 만 |
3. 3∼4.18. |
경상북도 |
20 |
약 2만6천 |
3. 8∼4.28. |
경상남도 |
21 |
약 10만 |
3. 3∼4.29. |
황 해 도 |
17 |
약 7만 |
3. 1∼4.22. |
평안남도 |
15 |
약 6만 |
3. 1∼4.16. |
평안북도 |
18 |
약 15만 |
3. 1∼4.11. |
함경남도 |
15 |
약 2만5천 |
3. 1∼4. 8. |
함경북도 |
10 |
약 2만 |
3.10∼4.19. |
계 |
212 |
약 110만 |
3. 1∼4.29. |
[표 2] 운 동 상 황 (1919.3.1∼4.30.)<일제측 자료>
도 별 | 시위횟수 | 단순시위 | 시위충돌 | 일본관헌사 상 | 경찰헌병관서습격 | 일반관서습격 |
---|---|---|---|---|---|---|
경 기 도 |
288 |
180 |
108 |
24 |
29 |
51 |
강 원 도 |
74 |
53 |
21 |
7 |
8 |
9 |
충청북도 |
56 |
28 |
28 |
20 |
18 |
8 |
충청남도 |
75 |
35 |
40 |
8 |
5 |
5 |
전라북도 |
39 |
32 |
7 |
- |
3 |
5 |
전라남도 |
44 |
40 |
4 |
- |
1 |
- |
경상북도 |
62 |
36 |
26 |
13 |
12 |
6 |
경상남도 |
121 |
82 |
39 |
18 |
22 |
16 |
황 해 도 |
137 |
84 |
53 |
30 |
19 |
8 |
평안남도 |
85 |
59 |
26 |
14 |
15 |
1 |
평안북도 |
114 |
56 |
48 |
18 |
11 |
10 |
함경남도 |
75 |
57 |
18 |
9 |
12 |
1 |
함경북도 |
44 |
36 |
8 |
5 |
4 |
- |
계 |
1,214 |
778 |
426 |
166 |
159 |
120 |
<일제강점기 이후 국내외애국활동 독립유공자 지역별 현황조사 (자료 : 국가보훈처 기준)>
경상도를 통일방해세력으로 모는데 대한 반박
=>
한반도 통일방해세력은 북한의3대세습 김씨왕조와 국내의 그 추종세력들이다.
북한이 중국정도의 순조로운 권력이양 시스템과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면
벌써 동서독처럼 평화통일로 진입했을 것이다.
북한이라는 나라는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김씨왕조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통일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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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에 관한 불편한 진실>
<일본 혈액형 분포비를 보면 지역별 편차가 있지만, A형이 35% 미만은 소수이고 대부분 평균이 38% 정도이다.>
<현재 전국의 지역별 혈액형 분포 : 지역별 편차가 있지만 전라도는 A형이 37% 정도로 상대적으로 많다.>
(현대에 와서는 지역간 인구이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상당한 시간이 지나면
미래에 혈액형 분포가 변동될 가능성은 있다.)
<일제강점기때 지역별 혈액형 분포 : 일본과 전라도의 유사성을 통해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한편으로 조선인의 열등성을 연구함.>
<중국의 혈액형 분포 역시 지역별 편차가 있지만, 만주와 중국 북부는 B형이 상대적으로 많다.>
<세계 국가간 혈액형 분포 : 아프리카 부시맨이 O형과 A형이 대다수이고 B형은 9% 소수인 것이 특이하다.>
혈액형 분포가,
아프리카는 O>A>B>AB, 아시아는 O>A≒B>AB, 서구는 O≒A>B>AB라는 것을 이용하여,
‘나치 독일에서는 B형이 이민족의 특성을 가진 혼혈의 상징으로 보았고,
힐슈펠트는 진화한 민족일수록 A형이 B형보다 많다는 생각으로 '인종계수'라는 수치를 처음 만들어,
유태인과 동양인에게 많은 B형을 열등화하는 작업을 했다.
이는 결국 나치의 유태인 학살 등 '인종 청소'에 이용됐다.’
이러한 우생학적 인종주의를 일본이 받아들여와 식민지배에 이용했다.
즉 '조선은 일본보다 B형이 더 많아 열등하다.'는 식의 일제의 식민사관은,
'진화한 민족일수록 A형이 더 많다.’는 독일 나치즘의 우생학을 바탕으로,
‘경성제대 의학부는 1934년부터 5년간은 만주, 내몽고 지역의 동북아시아 민족에 대한 혈액형 조사를 벌여 조선북부와 만주, 몽고인 사이에 '인종적 열등성'을 공통으로 하는 연관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혈액형 분포는 혈액형 결정론이 근거가 없고 논리적 선후가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즉 '일본인은 A형이 많아 조선인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일제 식민사관이나,
A형이 우수하다거나 선진국이라는 논리는, 위의 <세계 국가간 혈액형 분포>에서 보듯이
아프리카 부시맨(Bushmen)이 O형과 A형이 가장 많고 B형이 극히 적다는
사실에서 근거없음을 보여준다. A형이 많아서 선진국이 된게 아니라
오늘날 세계를 주도하는 나라들에는 A형이 많다는 사실만 있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어 아시아에서 과거 몽골과 같은 세계제국이 등장하면
그런 나라들에는 B형이 많다는 사실이 있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다.
옛 고구려 지역인 만주와 한반도 북부 그리고 일제의 연구에서 보듯이
평안북도가 B형이 많은것은 몽골-북방계가 B형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한 것은 제주도가 B형이 유독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남이 일본과 혈액형 분포가 유사함을 알수 있다.
일제강점기때 조사는 조선인의 열등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조선남부에 대한 삼한정벌론과 임나일본부라는 조작된 역사를 뒷받침하여
내선일체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제의 논리대로라면 몽골이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하고 있었을 때는
몽골-북방계의 B형이 우월하다라는 인종학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결론은 혈액형 분류와 강조는 재미삼아 하겠지만 그 근원은 일제 식민사관이나
나치즘에 기반한 우생학적 인종주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주와 한반도 북부는 B형이 많으므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때는 B형이 우수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혈액형이 때와 장소에따라 시대따라 좋았다 나빴다 하는 고무줄은 아니다.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신라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칠때,
고구려는 B형이 상대적으로 많은 지역이었고(평안북도 혈액형 참조), 왜구는 A형이 많았다.
즉 고구려는 B형 국가, 왜(倭)는 A형국가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광개토대왕때 강대국이었던 것이 B형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듯이,
일본이 근대에 강대국이 것은 쇄국을 벗어나 개항을 먼저해 근대화에 성공했기 때문이지
A형이 많았기 때문은 아니다.
혈액형을 갖고 우열론이나 결정론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객관적인 과학에 불순한 의도를 덧씌운 것이다.
이것이 혈액형에 관한 불편한 진실이기에
그러므로 혈액형에 대해 선입견과 편견을 갖고 신봉할 가치가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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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조작, 징비록 조작과 같은 부류의 한문조작비방글로
경상도 임진왜란 왜놈 씨받이 운운하는 비방에 대한 과학적 진실은?>
단순명료한것이 진리이다.
일제의 혈액형 우생학은 '해석의 조작'이지만,
아래의 혈액형 통계분석은 자식의 혈액형은 부모의 혈액형을 따른다는
객관적 사실이 기준이다.
진보좌파가 거짓조작으로 경상도 왜구운운했지만, 실제는 혈액형 분포가
전라도가 일본과 제일 가깝다는 결론이다.
(혈액형까지 거론하는 이유는 경상도에 대한 악의적 조작비방에 대한
정당한 반박을 위함이다)
자녀는 부모의 혈액형을 따라간다.
A형과 O형 부모에서는 A형이나 O형만 나온다.
일본 혈액형 분포는 A형이 38%정도이다.
한국에 유일하게 이와 비슷한 지역은 전라도로 37%이다.
부산, 경남, 충남은 35%, 대구, 경북, 충북은 33~34%이다.
5~6세기 왜놈무덤들이 전라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고,
고려말 진포대첩 등, 왜구침략때 서남해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내륙을 휩쓸었고,
임진왜란 말 2년동안 전라도가 초토화되었다.
난중일기 조작하고 징비록을 조작하여
임진왜란 경상도 왜구 운운했지만 피가 섞였으면 혈액형 비율도 따라간다.
혈액형은 부모의 혈액형에 따라 결정된다.
실상은 일본이 많은 A형 비율은 전라도가 제일 가깝고, 가장 많다
만주와 평안도가 같은 A형 B형 비율을 보이고(27%,33%)
일본과 전라도가 같은 A형 B형 비율이다.(37~38%, 24~25%)
대구,경북 A형 B형 비율은 (33%,27%)이다.
위의 한국, 중국, 일본의 통계표를 보면 알수 있다.
즉 위의 혈액형 분포 도표에서 보면
일제가 연구한것이나. 현재 지역별 혈액형분포 및 세계 혈액형 분포를 보면
일본과 혈액형 분포가 가장 유사한 지역이 전라도 이다.
즉 도표를 바탕으로 혈액형 분포를 보면
일본 ≒전라도 > 부산=경남=충남 > 서울,경기 > 대구,경북,충북 > 강원 > 제주 > 평안북도
실제로 일제도 일본과 전라도의 혈액형 분포의 유사성에 관한 연구를 일반화 해서
내선일체를 강조하려 했었다.
일제가 식민사관과 우생학으로 조작된 해석을 한것이 나쁜것이지, 혈액형 분포는 객관적 사실이다.
(혈액형 분포비를 거론하는 이유는 경상도에 대한 조작비방에 대해 과학적 반박을 하기 위함이다.)
실제로는
백제의 동맹군으로 왔던 왜놈들이 전라도에 정착한 결과,
5~6세기 왜놈무덤들이 전라도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고,
(이는 일본의 한반도 남부지배설을 반박하고, 백제-일본의 군사동맹관계로 보는 관점이다.)
고려말 진포대첩 등, 왜구침략때 서남해쪽으로 전라도로 들어와 내륙을 휩쓸었고,
임진왜란 말 2년동안 순천왜성을 거점으로 남원성, 전주성 등 전라도가 초토화되었다.
임진왜란때 경상도가 가장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전라도 역시 그에 못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서울과 평양 등 전국토가 유린된 사실을 거론하지 않고,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조작하여 경상도, 왜구 운운하는 프레임을 씌워 비방하였고,
한문을 조작한 글로 경상도 왜구 씨받이 운운하는 프레임을 걸어 경상도를 비방하고 있지만
혈액형 분포비를 보면 전라도가 왜와 가장 밀접함을 알 수 있다.
다시말해 '경상도 임진왜란 왜구 씨받이' 조작비방이 맞다면
혈액형 분포도에서 일본하고 가장 가까운곳이 경상도 이어야 하지만,
실제는 전라도가 일본과 혈액형 분포도가 가장 유사하다.
고대에 수많은 사람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 갔는데,
1차 도래인들이 신라,가야계였고,
2차 도래인들이 백제, 고구려계였다는 걸 가만하더라도,
혈액형 분포의 유사성을 보면(A, B, O, AB형의 분포비)
일본≒전라도 > 부산≒경남≒충남 > 서울,경기 > 대구 경북,충북 > 강원 > 제주 > 평안도≒만주
전라도가 일본과 가장 유사하고 그다음이 부산, 경남, 충남이다. 서울,경기가 세번째이다.
(혈액형 분포비를 거론하는 이유는 경상도에 대한 조작비방에 대해 과학적 반박을 하기 위함이다.)
이는 역사적 내력과도 상관성을 볼 수 있다.
즉 전라도가 일본과 가장 가깝고, 대구 경북은 서울,경기보다 일본과 거리가 더 멀다.
한마디로 진보와 좌파가 난중일기와 징비록을 조작하여 임진왜란 경상도 왜구 운운하는 것은,
(세계 2차 대전때 프랑스가 독일에 5년간 점령당했다고 해서 이런 궤변이 나오겠는가?)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더하여 이순신을 천거하고 후원한 사람도 동인인 류성룡이고,
사형직전에 이순신을 구한 사람도 경상도 예천출생 정탁이다.
동인은 이순신을 후원하였고, 서인(? 동인 중북인)은 원균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조작비방과는 정반대의 진실이 있음을 알수 있다.
<결론>
조선시대 학자들 정약용, 이익, 이중환 등이 경상도에 대하여 평한 것과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경상도에 대한 여러 평을 보면 대부분이 긍정적인
좋은 평판을 받아왔다.
조선후기 근대민족정신의 시원인 동학은 경주에서 시작되어,
동학혁명 그리고 3.1운동으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도 영남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을 일으켰고,
보훈처 기준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독재에 항거한 4.19혁명은 대구 2.28학생의거가 발원점이 되고,
마산 3.15의거가 도화선이 되어 일어났다.
경상도는 역사적으로 반일(反日)이었다.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인 김해성(金海城)의 의병과 의병장들이,
홍의장군 곽재우에 앞서 있었고 조선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 정미칠적에 경상도는 없다.
1907년 대구에서는 주권수호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고
1915년 가장 활발하게 전투적인 독립운동을 벌인 단체인 대한광복회가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경상도는 3.1운동 사망자가 제일 많은 지역이고
참여자수도 전국 3~4위(우리측 및 일제측 자료)이다.
경상도는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국가 보훈처 자료기준)
또한 경상도가 민주화에 기여가 없다는 사람도 있는데,
경상도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기여한 지역이다.
4.19 혁명은 대구 2.28 학생의거와 마산 3.15의거에서 시작된것이고,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전에
1979년 10월 부산 마산 민주화 운동인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곧 경상도는 현재 세계 7대 무역강국의 산업화와 민주화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한 지역이다.
저급한 한문조작(난중일기 조작글, 성호사설 조작글, 징비록 조작글,
선조실록 조작글등)으로 타지역을 비방하는 것은 중범죄이고 사라져야 할 악습이다.
이런 류의 조작비방글들은 1990년대 말부터 나타났었고,
진보좌파사이트 남프라이즈 등에서 익명성 뒤에 숨어서 폭발적으로 유포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 여파가 확대 재생산되어 다음 아고라와 대형포털 기사댓글에 추천 베플이
되고 있고,한문을 조작하여 경상도를 비방한 역사조작글들이 마치 진실처럼 유포되고
있다. 지역감정해소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렇게 장문의 정당한 반박글을 쓰는 이유는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역사조작왜곡글들은 방치하는것은
거짓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출처 :영남지리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 松河 李翰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