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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묵상글 들 ( 부활 3주 목요일-고육지책 .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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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부활 3주 목요일-고육지책
어제 일종의 미술 치료를 하시는 수녀님과 얘기를 나누다가
남자들 중에는 미술 치료를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 않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시며 남자들은 자기표현도 잘할 줄 모르고 자기 힘으로
무엇이든 다 하려고 한다는 당신 생각을 말씀하시는 거였습니다.
남자들이란 자기 감정표현도 잘못하고 들어줄 줄도 모르며,
도움을 받을 줄도 모른다는 것인데 그것이 다 자기 힘으로
하려고 들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그것은 남자가 여자보다
더 교만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 관계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자들은 길을 가다가 모르면 잘 묻지만
남자는 모르면서도 잘 묻지 않아서 길을 그르치곤 하지요.
그런데 길을 묻지 않아 누굴 만나러 가는 길을 그르치고,
일 보러 가는 길을 그르치는 것은 우리가 인생길과 황천길을 갈 때
인도를 받지 않아 그르치는 것과 비교하면 사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요.
이런 면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이끌리다>는 표현을 주목합니다.
독서에서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 겐타케와 주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이치나 이 세상 인생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지와 같은 것은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어도 이해할 수 있고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상 이치나 천상길은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이 아니면 아무도 알려 줄 수도, 이끌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천상 이치나 천상길을 이끌어 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앞서 봤듯이 우리가 이끌림을 받으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 이유가 요한복음 6장에서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세상 양식이나 구하지 천상 양식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예수께서 그 천상 양식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시 어제 일인데 수녀님들이 빵을 구우셨고 저에게 권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같은 밀가루로 만드는 데도 국수는 좋아하지만
빵은 별로 좋아하지 않기에 배고파야지 먹지 그렇지 않으면
잘 먹지 않는다고 대답하니 여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멋이 있고 멋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의 멋쟁이라는 말처럼
맛이 있고 맛을 아는 사람이라는 맛쟁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지만 빵과 관련하여 저는 맛쟁이가 아닌데 그 이유가
어렸을 때 먹던 것을 커서도 고집하는 토종 맛쟁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으라고 하는데,
그런데 우리는 세상 맛쟁이이지 하늘 맛쟁이가 아니어서
하늘 양식을 맛 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쓰시는 방법이 고통이고 그렇지만
이 고통이 세상 것은 맛이 떨어지게 하고 천상 것은 맛 들이게 하는 거지요.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자기의 회개를 얘기하며
주님께서 자기에게 회개를 시작하게 해주셨다고,
나병 환자를 보는 것이 쓰디썼는데 주님께서 자기를 나병 환자에게
데리고 가심으로써 쓰디쓰던 것이 단맛으로 바뀌었다고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이끄시는 방법이 고통이라는 것이 유감이긴 하지만
그것이 고집 센 입맛을 당신께로 바꾸시기 위한, 그야말로 사랑의
그 고육지책苦肉之策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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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수사신부님.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요즈음 계속해서 빵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요, 믿는 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예언서의 말씀을 일깨워줍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
여기서, “마지막 날”은 육체적 숨이 멈추는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나기 직전의 날을 말해줍니다. 곧 생명의 주님을 만나면 이전의 자신이 죽고 나날이 변화되는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임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세상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는 일이요, “아버지”께로 이끄심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왔으니 역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1코린 15,2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떠올려 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여기서, “살아있는”이란 말은 당신의 실재성을 말합니다. 곧 죽어있지 않고 살아있다는 실재성입니다. 그 실재는 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생명의 빵이요, 건너와 관계를 맺는 활동 중인 빵임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있는 빵”은 자신을 죽여 타인을 살리고 있는 활동 중인 빵인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빵”은 “살리는 빵”의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곧 먹는 이 안에서 부활하는 빵인 것입니다.
이 빵은 다름 아닌 신성의 “당신의 살” 입니다. 살아있는 살이요, 떼어 나누어지는 살입니다. 그리하여 먹는 이에게서 살아있는 살이 되고, 우리의 살을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당신의 생명이 됩니다. 곧 영원한 생명이 되게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살은 우리의 생명을 변화시키는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증여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죽음을 몰아내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를 당신의 몸이 되게 하시고, 당신 생명이 되게 하시고, 당신 신성에 들게 하고, 우리에게서 부활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빵을 먹을 것인지 거부할 것이지는 우리 스스로가 응답해야 할 몫입니다. 만약 먹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인 것입니다. 이를 알면서도 먹지 않는다면 참으로 어리석음은 일입니다.
오늘도 분명, 우리는 살아있는 이 빵을, 하느님의 참된 사랑을 받아먹습니다. 곧 “그분의 살”을 먹습니다. 하느님의 이 큰 사랑 안에서 우리는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생명이 제 삶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제 생명이 당신의 생명으로 피어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먹혀서 저를 살리듯 저도 먹혀서 타인을 살리게 하소서.
오늘도 먹히는 빵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주님!
오늘도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당신 자신을 쪼개 떼어주십니다.
오늘 제가 저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건네주는 빵이 되게 하소서!
내가 만든 빵이 아니라, 당신이 주신 빵을 건네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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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신앙은 선물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 신앙생활은 신부님께서 상주하지 않으시는 공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주일이면 성당에 가라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어도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서 갔고, 밭에 나가서 풀을 뽑는다든지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때가 되면 그것이 하기 싫어서 성당에 갔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에게는 본이, 아니게 열심히 기도하는 착실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제는 잘 보이려고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주일이면 일찍 나서서 청소도 하고 주변 정돈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공소회장님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신부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아직 먼 미래의 일이었지만 저는 지금 신부가 되었습니다. 함께 어울리며 지내던 공소회장님 아들도 신부가 되었고, 한 자매는 수녀님이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은 시골 공소였지만 결코, 작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웃을 통하여 저를 신앙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순간, 순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우리를 신앙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믿음은 미처 나도 모르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하셨지만 강하게 이끌어 주신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먼저 불러주셨기에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부름을 주님의 초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야말로 은총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삶 안에서 나를 부르시는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의탁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선물을 통하여 생명의 빵으로 다가오시는 아들 예수님을 새롭게 영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6,47).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48,5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에 대한 ‘눈높이’ 사랑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참 하느님이시고 이 땅에 살과 뼈를 지니신 채 사셨던 분으로 우리 곁에 가까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성체성사를 통하여 영적 양식을 제공하여 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선포하시며 우리를 부르셔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비로소 효과 있는 은총으로 역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은 하늘이 되었고 하늘은 이미 여기서 열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총리 토마스 모어는 매일 미사참례를 하였고 영성체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수많은 국정의 임무를 맡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신경을 써야 할 일은 아주 많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가 쉽습니다. 하느님을 거스르게 될 기회들도 많지만 나는 매일 예수님께로부터 힘을 얻어서 그 악의 기회들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나는 매우 어려운 문제들을 처리하기 위해 빛과 지혜가 필요한데 매일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그것을 상의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나의 위대한 스승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주님을 모심으로써 그 안에서 빛과 지혜를 얻고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추구에서 벗어나 우리를 진정 살리는 것을 찾기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생명의 빵’은 살아있는 양식으로 모셔야 합니다. 살아있는 빵을 죽은 양식으로 모셔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미사 때마다 모시는 거룩한 성체는 우리의 영혼과 삶 안으로 모셔야 살아있게 됩니다. 그저 입 안으로 성체의 빵만을 먹으면 결국 이스라엘처럼 만나를 먹고도 죽은 백성이 됩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야 합니다”(함께야). 신앙의 삶은 예수님을 닮는 여정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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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四奇之恩, 영원한 생명의 실존적 현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해서 우리네 육신이 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이 잠자듯이
가만히 멈추는 것도 끝나는 것도 아니며 영적인 자유를 얻어
오히려 육신의 현실과 교감하며 더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영적인 몸으로 발현하여 보여주신 모습이야말로,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입증할 수 있는 모습이었는가 하면 믿는 이들
모두가 그분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현실이었습니다.
육신이 죽기 전에는 물론 육신이 죽은 다음에도, 이 육신의 죽음이라는
변수와 상관없이 이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영적인 권능으로, 하느님의 뜻이 관철되고
그분의 영광이 이루어지며 그 안에서 우리의 구원이 성취될 수 있는 그야말로
본시 좋도록 창조하셨던 인간 생명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현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바, 믿는 이들이 누릴 수 있다고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현실을 가톨릭 교리에서는 부활한 육신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네 가지 신기한 은혜, 즉 사기지은(四奇之恩)으로 풀이합니다.
즉, 손상되지 않고(impassibilitas), 빛나며(claritas),
빠르고(agilitas), 예민함(subtilitas)입니다(1코린 15,42-44).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즉 부활할 수 없다고 가르치셨는데 이는 믿는 이들이
누릴 것이라고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의 현실과 동일한 내용과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 이후 수 차례의 발현에서도 복습을 시켜 주셨지만 사실은
공생활 동안에도 이미 보여주신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믿음의 눈이 열리지 않아서 알아보지 못했고
가톨릭교회의 전통교리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육신이 죽은 다음에
일어날 현실로만 가르치는 바람에 전혀 입증될 수 없고 체험될 수도 없어서
신자들에게는 도무지 비현실적인 가르침으로 들리게끔 가르치고 있을 뿐입니다.
본래 이 사기지은의 교리는 사도 바오로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가르치고자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써서 보낸 편지에 나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4).
이미 생전에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고향 사람들에게 첫 복음을
선포하신 후 돌연 살벌하게 태도를 바꾼 고향 사람들에게 떠밀려 죽을 뻔한 위기에서
아무렇지도 않고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당신의 갈 길을 가신 적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나는”,
손상되지 않음 즉 impassibilitas의 은혜입니다. 또 타볼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하시며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신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나는”,
빛남 즉 claritas의 은혜입니다. 또 죽을 병에 든 사람들의 육신을 전혀 상하지 않는
깨끗하고 건강한 몸으로 바꾸어 주신 기적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고,
마귀가 들어와 괴롭히는 이들을 돕고자 마귀를 쫓아내어 주신 기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존재로서 육신의 질서를 다스리시는 모습인데 육신의 차원을 뛰어넘어
이곳저곳에서 때로는 동산지기로, 때로는 나그네 혹은 어부의 모습으로 발현하신 모습
역시,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나는”, 빠름 즉 agilitas의 은혜입니다.
배고프거나 목마른 본능의 욕구를 느끼면서도 사랑과 정의 같은 더 차원 높은 욕구에
끌리는 모습은,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나는” 예민함
즉 subtilitas의 은혜입니다.
대단히 아쉽게도 전통적인 교리에서는 이 사기지은을 죽은 다음에
부활한 선인의 육신이 지니는 네 가지 특성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만,
방금 말씀드린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살아 계시면서도
자유자재로 사기지은을 누리셨고 부활하셔서는 더욱 활발하게
누리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을 믿는 사도들에게도 같은 은혜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과연 오늘 독서에 보면 부제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고관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는
성령에 의해 잡아 채이듯이 가자로 내려가던 길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는 길로 공간을 이동하였다(사도 8,39)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이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만,
오늘날에도 믿는 이들이 선교하는 과정에서는 얼마든지 마귀나 세속의
영향으로부터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뜻과 기운을 보전할 수 있으며,
그런 지향으로 사람들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이들의 영혼과 인격과 마음은 얼마든지 빛날 수 있습니다.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의 눈이 문제일 뿐입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간격과 거리를 넘어 연대하고자 하는
믿는 이들의 뜻과 기운은 시공을 초월하여 빠르게 합해지고 전해집니다.
수평적으로 동시대인들과만이 아니라 우리보다 앞서서 의롭게 살아가신 분들과도
수직적으로 통공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5G 이상 빛의 속도로 빠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상 사람들이 목을 매는 물질적인 힘들 즉 돈이나 권력
그리고 명예를 숭배하지 않고 소박하지만 거룩한 가치들 즉 연민과 공감
그리고 섬김과 나눔을 소중히 아끼는 믿는 이들의 뜻도
언제나 예민함을 넘어 시퍼렇게 살아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는 실존적 현실이며,
손상되지 않는 뜻과 빛나는 의지와 빠르게 통공하고 연대하는 관계의 Network
그리고 진리에 대한 예민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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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6,44-51: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 가는 것도 아버지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 갈 수 없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선물 덕분에 그리스도께로 왔다. 그러나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그 가는 길에 있는 존재들이다. 이 하느님께 이끌리는 것은 사랑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다.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방법은 강요가 아니라 진리를 가르치심으로써 이끄신다. 이 이끄심은 하느님의 일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45절) 즉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로 온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우느냐? 바로 아드님에게서 배운다. 그분은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말씀’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다. 아드님은 그 말씀을 듣는 이를 끌어당기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47절) 이 영원한 생명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 영원한 생명이 죽음을 취하셨다. 생명이 죽음을 죽이도록 생명께서 돌아가셨다. 이 영원한 생명께서 당신께서 취하신 육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 그분은 죽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 그분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48절) 하느님께서는 살아 계신 당신의 ‘말씀’을 시켜 모든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시고 당신의 ‘말씀’을 우리에게 양식이요 생명으로 주신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언제나 갈망으로 배고파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사랑하는 이들이 이 음식을 갈망할 때, 그들은 한층 더 흡족해질 것이다. 우리는 이 빵을 통하여 그분과 한 몸, ‘그분 몸의 지체’(에페 5,30)가 된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50절) 이 빵은 성체성사이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하늘의 빵이 되게 하시며 생명을 주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51절) 그분은 아버지의 완전한 빵으로서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가 당신의 삶을 통하여 배우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고 마실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 아버지의 영인 불사의 빵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게 하셨다. 우리는 기도하며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 빵을 청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과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많은 밀알이 모이고 갈리고 섞여서 하나가 되어 빵이 되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빵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51절) 주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해 당신의 몸을 바치셨고, 그 몸을 통하여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생명을 주신 말씀은 육안에 머무르고 계셨기에 그 육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만드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몸은 그것을 먹는 모든 이에게 생명을 주신다. 그 몸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죽음을 몰아내고, 말씀으로 완전히 충만해진 그 몸은 부패를 사라지게 한다. 이 성체성사를 잘 준비하고 영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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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저는 단팥빵을 보면 코끝이 찡해집니다. 어린 시절 마당에서 동생들과 뛰어놀고 있으면 해 질 무렵 길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우리 맏손주 어디 있나?” 하고 저를 애타게 찾으시는 할머니 목소리입니다. 그러면 저는 놀던 것을 멈추고 곧바로 할머니에게 달려갑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달려오는 저를 향하여 엄지를 척 들어 올리시며 “우리 맏손주가 최고지!” 하시고는 몸뻬 바지 속주머니에서 단팥빵을 꺼내시어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새참으로 나온 빵을 챙겨 두셨다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맏손주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하루는 맛있게 빵을 먹다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는 안 드세요?” “응, 나는 욕지기가 나서 안 먹어도 돼.” 시간이 흘러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어느 날 단팥빵을 먹다가 할머니가 주신 빵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 종일 뙤약볕 아래에서 농사일하시느라 허기지셨을 텐데 손주에게 주시겠다는 생각으로 참으셨구나!’ 그 순간 목이 메어 그 빵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라고 하십니다. ‘내려온’이라는 단어는 과거 시제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당신의 목숨을 스스로 내어놓으신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속죄 제물이 되셨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당신의 살을 빵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나의 살”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어 당신의 생명을 바치신 희생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희생과 사랑으로 당신의 살을 내어 주시어 세상에 생명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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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 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요한 6,45).”
이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5장에 있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구약성경은 ‘메시아’를 예언한 책이고,
신약성경은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사실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가리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잘 읽고 연구한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 신앙의 순서는 ‘구약성경 먼저’가 아니라, ‘믿음 먼저’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구약성경을 읽어야
제대로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경우는 다른데, 신약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람들을 인도해 주는 책입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6,46).”
이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4장에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옛날에도, 또 오늘날에도, 자기가 직접 하느님을 만났다고 주장하거나,
하느님과 직접 통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나 율법을 통해서, 또는 어떤 수행을 통해서
그런 경지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체험하거나,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은총을 받은 일이지만,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자기가 하느님을 직접 만났다고 주장하거나,
하느님과 직접 통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단이고, 사이비입니다.
신약성경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1-3).”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요한 6,47).”
이 말씀을 해설한 것과 같은 말씀이 요한복음 11장에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여기서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은, 지상에서의 죽음을 면제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때의 ‘두 번째 죽음’을 면제받는다는 뜻입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죽음’과 ‘저승’ 자체가 소멸되기 때문에,
심판 후에는 죽음이라는 것이 없습니다(묵시 20,13-14).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48-51).”
이 말씀은 ‘성체성사’를 뜻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는 말씀은, “나는 생명의 원천이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어디 다른 곳에서 그 생명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 그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여기서 “나의 살이다.”는 “나 자신이다.”로 해석됩니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원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살아 있는 빵’이라는 말은 ‘지속적으로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뜻입니다.
(그 빵에 들어 있는 생명은 사람들에게 한 번 주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는
일회성 생명이 아니라, 결코 고갈되거나 소진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라는 말씀과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 빵을 먹으면”이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이 빵을 먹어야만”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만나’는 처음부터 ‘육신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기 위한 빵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만나’를 먹은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먹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만나’를 내려 주신 하느님을 제대로 섬겼다면,
그들도 ‘만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을 것입니다.
성체성사의 빵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빵이었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성체를 받아먹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받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성체성사의 뜻과 가르침을 생각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고, 그냥 형식적으로, 또 습관적으로 영성체를 한다면,
성체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날마다 영성체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자동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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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이야기입니다. 원효대사는 친구인 의상대사와 함께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으니 당연히 걸어서 갔습니다. 어느 날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밤에 목이 말라 그릇에 있던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꿀맛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일어나서 보니 어제 먹은 그릇은 사람의 해골이었습니다. 그렇게 맛있었던 물이었는데 일어나서 먹으려니 도저히 먹을 수 없었습니다. 원효대사는 문득 깨달았습니다. 깨달음은 장소에 있지 않았습니다. 깨달음은 마음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효대사는 유학을 중단하고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원효대사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것은 해골에 담긴 물이었습니다. 친구였던 의상대사는 가던 길을 계속 갔고, 당나라에서 불교의 가르침을 배웠습니다. 의상대사 역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로 돌아와서 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의상대사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것은 당나라의 고승이었습니다. 깨달음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번개처럼 다가오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이고 다른 하나는 가랑비처럼 다가오는 돈오점수(頓悟漸修)입니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이 있습니다. 한분은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예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베드로 사도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물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나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유혹에 빠지고, 나약함 때문에 십자가를 외면하려했던 베드로 사도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더 이상 두려움 때문에, 나약함 때문에 주님과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유혹을 이겨냈고,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갔습니다. 다른 한 분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에게도 깨달음의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 위에서 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치 번개를 맞은 것처럼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의 표징이었던 십자가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깨달음의 열쇠가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생명의 빵’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가르침이 너무 어렵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생명의 빵’을 잘못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물, 명예, 권력’을 생명의 빵으로 착각합니다. 불 속으로 날아드는 나방처럼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생명의 빵’을 번개처럼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가랑비처럼 깨달음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서 모욕과 굴욕을 받아들였습니다.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서 순교하였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나에게 생명의 빵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분에게 ‘생명의 빵’은 어떤 의미인가요?
영원한 생명은 지나간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오지도 않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충실한 삶이 과거가 되는 것이고, 지금의 행복한 삶이 미래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원한 삶은 신앙 안에서 지금을 충실하게 사는 것입니다. 물리학적인 시간, 생물학적인 시간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순간을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사는 사람은 신앙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끝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 끝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바로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매일 기도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 작은 물방울도 시간만 있으면 큰 바위에 구멍을 내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길을 찾으면 주님께서는 능히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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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부활 제3주간 목요일(2018년 4월 19일 )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사마리아로 갔던 필리포스의 또 다른 활동을 이어서 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자 쪽으로 내려가는 외딴 길로 가라고
하지요.
그곳에서 필리포스는 에티오피아 여와이 내시를 만나는데 그는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왔다가 돌아가는 수레에서 이사야 예언서 ‘수난받는 주님의 종 넷째
노래’(이사 53,7-8)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양처럼 도살장으로 끌려갔다.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린양처럼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굴욕 속에 권리를 박탈당하였다. 그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제거되어 버렸으니 누가 그의 후손을 이야기하랴?”
필리포스가 천사의 말대로 수레가까이 다가가 고관에게 성경의 그 내용을 이해하느냐고
질문합니다.
그러자 그가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라고 필리포스에게 대답합니다.
그 고관은 필리포스에게 예언자가 말하는 그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제야 필리포스는 그 고관에게 예언의 내용인 ‘주님의 종’이 바로 예수님에 해당된다고
설명하지요.
그러자 고관은 필리포스에게 세례 받기를 워하지요.
필리포스는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고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차채듯
다른 곳으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필리포스는 아스톳에서 카이사리아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합니다.
주님께서 오천 명을 위하여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베푸신 후에 계속 이어서 ‘생명의 빵’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과의 일치에 대해서 설명하시며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4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번에는 만나와 연결시켜서 생명을 주시는 빵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만나’라는 것은 조상들로부터 들어온 하느님의 놀라운 선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시나이 사막에서 유랑할 때 하느님께서
매일 일용할 양식으로 내려주신 것입니다.(탈출 16,35)
하느님의 대리자 모세의 말을 듣고 희망과 함께 이집트를 떠났던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에서 당장 생의 위협을 겪는 것은 마실 물과 먹을 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말합니다.
“아,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 (탈출 16,3)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들의 불평을 들으시고 모세에게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실 것인데,
매일 먹을 만큼의 양식만 거두어 들이라고 이르시며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십니다.
성경 본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14-15절)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음식을 ‘만나’라고 했는데 그것은 고수풀 씨앗처럼 하얗고
그 맛은 꿀 섞은 과자 맛이었다.
그리고 탈출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정착지에
도착했을 때까지 사십년 동안 만나를 먹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길갈에서 첫 파스카 축제를 지냅니다. 여호수아 본문을 그들이
먹던 만나와 연결해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 만나가 멎었다. 그 후로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당년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여호 5,10-12)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뜻을 가진 ‘만나’는 글자 그대로라면 ‘만 후’라는 발음일
것입니다.(탈출 16,13-15; 민수 11,9)
신명기 저자는 이 만나에 대한 하느님께서 주시는 깊은 의미를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인도하신 모든 길을
기억하여라. 그것은 너희를 낮추시고,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너희 마음속을 알아보시려고 너희를 시험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신명 8,2-3)
신명기 저자는 당장 생명을 부지하는 육신의 빵은 사라지지만 영혼을 살리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는 데에 바탕이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먹었던 만나와 당신이 주시는 생명의 빵과 비교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요한 6,49-50)
성체성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주님의 몸은 죄인을 살리시는 생명의 빵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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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님.
급한 일을 먼저 해야 할까요? 아니면 중요한 일을 먼저 해야 할까요? 급한 일이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급하다는 마음에 중요한 일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참 많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일까요? 아니면 별것 아닌 일일까요? 신앙인이라면 아마 100이면 100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핑계는 이렇게 말할 때가 참 많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도 없어요.”
세상일이 급하다고 말하면서 중요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번까지만, 여기까지만, 올해까지만, 이 일이 해결될 때까지만….’ 등의 말을 하면서 급한 불을 먼저 꺼야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까지만’이라는 급한 일은 도저히 끝나지 않으면서 정작 중요한 일을 못하게 만듭니다.
급한 일을 포기해야 하냐고 묻는 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있어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요? 특히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관점에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급한 일도 하면서 중요한 일을 행하는 멋진 삶을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나는 생명의 빵”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께서는 당신과 우리를 합쳐 하나의 빵 덩어리로 만들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반죽하시며, 이 결합을 통해 부패와 그 안에 숨어 있는 죽음을 파멸시키십니다. 그래서 성찬의 살아 있는 빵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먹은 만나보다 훨씬 위대한 것입니다. 이 빵은 영원한 생명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주시는 말씀께서 육이 되심으로써 당신의 육이 생명을 주게 하시어, 그것을 먹는 모든 이가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보다 급한 일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는 것이야말로 가장 급하고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우선순위를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것은 눈에 직접 보이기 때문에 더 급하고 더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어떤 것에 더 우선순위를 둘 것인가를 떠올려 보십시오. 더군다나 그분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시는 가장 힘센 분이십니다.
지금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모시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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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독학이 힘을 발휘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내 삶을 통틀어 가장 오래된 습관은 양치질과 공부, 두 가지다(와다 히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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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선생님이 말하는 나쁜 습관(‘격몽요결’ 중에서)
1. 마음은 게으르고, 몸은 함부로 놀려서, 그저 놀고 편한 것만 생각하고 구속받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2. 늘 부산스럽게 뭔가를 하고 가만히 있지 못해서 고요하게 자기를 추스르지 못하고, 분주히 움직이며 남과 수다 떠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다.
3. 남 따라 하는 걸 좋아하고 남과 다른 것을 싫어해서 세속에 잘 동화되어 자기 자신을 수양해서 변화해 보려 하다가도 남과 부딪히게 될까 두려워한다.
4. 문장을 잘 써서 한때의 명예를 얻는 데에 취하고, 경전을 표절해서 겉만 그럴싸하게 꾸민다.
5. 글씨와 편지에 공을 들이고, 악기 연주와 술 마시기를 일삼아 유흥을 즐기면서 이걸 스스로 ‘운치있는 삶’이라 말한다.
6. 한가한 사람들과 게임을 즐기고, 종일 먹기를 탐하고 내기를 일삼는다.
7. 부귀를 부러워하고 빈천을 싫어하며, 보잘 것 없는 옷과 음식을 매우 부끄러워한다.
8. 기호와 욕망에 절제가 없고, 돈과 이익과 놀이와 연애에 탐닉한다.
500년 전의 글이지만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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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꽃, 꽃같은 인생, 시(詩)같은 인생
- 사람이 꽃이다 -
어제의 선물 나눔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도반 사제님(조광호)으로부터 뜻밖의 카톡 사진 선물을 받았습니다. 한 그루의 그윽한 엉겅퀴 꽃이었고 즉시 답글과 함께 마침 예수님 성심상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드렸고 이어지는 다음 내용들입니다.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
-꽃
존재
자체가
희망이자 사랑이요
구원이네요-
예수님과 제 축복인사 받으시고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경애하올 신부님!”
이어지는 도반 사제의 시같은 답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태어날 때 까닭을 모르고 태어나지요
모진 세월 살아가면서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자연에 귀의하고 동화되면서
그 까닭을 깨닫는 게
꽃의 숙제가 아닐까요?-”
도반 사제의 답글을 보는 순간 ‘아, 사람이 꽃이구나!’ 하는 깨달음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답글과 시를 보냈습니다.
“신부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다시 이렇게 정리해 봤네요.
-사람이 꽃이다
꽃
존재 자체가 시詩요
희망이자 사랑
기쁨이자 평화
위로이자 구원救援이네요
제각기
고유의 모습, 크기, 색깔, 향기를 지닌
꽃같은 사람이네요-
꽃을 사람으로 바꿔도 그대로 통하네요. 우리의 삶자체가 시요, 희망이자 사랑, 기쁨이자 평화, 위로이자 구원이라면 참 좋겠습니다.”
어제는 이런 깨달음의 나눔이 저에게는 소확행의 구원이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말씀과 연결됨을 깨닫습니다. 도반 사제가 보내준 꽃 선물 사진이 저를 통해 참 의미를 발견했으니 꽃에겐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느님은 당신의 천사를 필리포스에게 보내 에티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를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께 이끌도록 하십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내시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필리포스입니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이어지는 주님의 일꾼 필리포스와 진리 탐구자 에티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와의 진지하고 흥미진진한 만남과 대화입니다. 그는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는 고관이었다 하니 얼마나 책임과 의무에 충실한 사람인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자기 책임과 의무를 다함이 진실이자 사랑이요 구원입니다.
바로 이런 내시에게 호감을 지닌 눈밝은 하느님은 그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자 당신의 사람 필리포스를 파견한 것입니다. 마침내 필리포스의 세례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구원받은 내시의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필리포스와 내시, 두 사람은 물로 내려갔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내시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 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
집착함이 없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주님의 성령 따라 제 갈 길을 가는 초연한 모습들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지요. 사도행전의 마지막 대목에서 복음 선포사명에 전념하는 필로포스의 멋진 모습이 참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필리포스는 아스돗에 나타나. 카이사리아에 이르기 까지 모든 고을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다.’
필리포스도, 내시도 주님의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꽃같은 인생, 시같은 인생입니다. 참 사람 둘을 만난 소감입니다. 둘 다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참 나를 발견해 구원받은, 주님의 꽃이된 사람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깊은 우정의 삶을 살 때, 필리포스처럼 우리의 삶자체가 시가, 희망이자 사랑이, 기쁨이자 평화가, 위로이자 구원이 되어 이웃을 파스카의 주님께 인도하는 역할을 하게 됨을 봅니다. 그러니 오늘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와 내시의 관계를 통해 오늘 복음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새삼 우리 삶에 우연은 없고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섭리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천사와 필리포스를 통해 내시를 파스카의 주님께 인도하셨듯이, 우리도 알게 모르게 주님의 천사와 주님의 사람들을 통해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 인도되어 참 나를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의 결정적 한 두 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평생 깊어지는 우정과 함께 날로 깊어지는 영원한 생명이요, 각자 고유의 모습, 크기, 색깔, 향기를 지닌 아름다운 참 나의 꽃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이런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되고, 이웃에게는 희망과 사랑, 기쁨과 평화, 위로와 구원이 되는 시詩같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같은 삶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 은총으로 당신과의 우정의 사랑을 날로 깊이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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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과정을 보여 주십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예수님께 온 이들은 자기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는 선택하신 이들을 불러 당신 아드님께로 보내어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 주십니다. 아버지 덕분에 아드님 앞에 나아온 이들은 아드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요한 6,51)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께서 당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십니다. 말씀이 반복을 거듭할수록 점점 더 깊이 들어가 드디어 진리와 맞닿습니다. 당신을,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빵으로 이해시키시면서, 영혼의 생명까지 주는 하늘의 빵이라고 하시더니, 결국 그 빵이 당신의 살이라고 맺으십니다. 모르는 이들이 들으면 가히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당신 생명을 내놓아 우리를 살게 하시겠다는 뜻이고, 이 세상의 끝에서 영원으로 이어질 성체성사를 준비시키시는 것이지요.
제1독서는 사도를 통해 복음이 전해져 한 인격의 핵심에 가닿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 8,31)
주님께서 천사를 시켜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필리포스를 에티오피아 사람에게 인도하십니다. 그는 여왕을 보필하는 고관이였지요.
이방인이면서 예루살렘까지 와 경배하고, 오가는 길에 성경까지 읽는 걸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는 꽤 열심한 사람입니다. 마침 이사야 예언서의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읽으면서 자신의 실존을 건드리는 대목을 만나 그 참 뜻을 깨닫게 해 줄 누군가가 간절했던 찰나였지요.
"필리포스는 입을 열어 이 성경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그에게 전하였다."(사도 8,35)
성경 말씀은 읽는 이의 실존을 건드리며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자신에게서 멈추지 않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연결되지요. 말씀을 읽고, 다가오신 말씀에 머무르는 건 말씀의 표면을 뚫고 진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기도의 여정입니다. 표면만 흝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진실을 깨닫게 되고, 또 새롭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로써 결국 새로운 피조물인 자신을 통찰하는 지혜와 주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게 되지요.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사도 8,39)
그는 필리포스를 만나 말씀을 전해 듣고, 세례까지 청해서 받습니다. 주님께서 사명을 마친 필리포스를 그의 눈앞에서 데려가셨지만, 홀로 남은 그는 아쉬움이나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기쁨에 가득차 "제 갈 길"을 가지요.
말씀의 정수에 닿은 이는 그렇습니다. 이제는 하느님께서 친히 그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주실 것이니 영원한 생명에 대한 기대로 기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다가오시는 말씀에 마음을 활짝 열고 주님 사랑에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완고하고 무딘 우리 마음을 뚫으시려고 주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빵, 사랑의 빵이심을 반복해 들려 주십니다. 우리 각자가 가진 결핍을 잘 아시는 그분은 우리를 살게 하고 풍요롭게, 충만하게 하시는 빵이십니다. 생명이신 그분을 놓지 않고 순례의 여정을 계속하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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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6,44)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고, 예수님 없이는 아무도 아버지께 다가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 아버지와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는 또한,
'우리는 나의 구원을 위해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주님께서 보내신 필리포스를 만난 에디오피아 여왕 칸타케의 내시는 필리포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사도8,31)
그 내시는 주님의 천사인 필리포스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
하느님과 너의 도움을 받아,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 내가 사는 길,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것이 오늘 독서와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또 하나의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생명의 빵이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요, 당신의 살이라는 중대 선언을 하십니다. 이 중대 선언으로 인해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됩니다.
"누가 나를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이끌어 줄 것인가?
이는 내가 먼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복음화 되고, 나도 누군가를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나의 구원과 너의 구원 그리고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또 하나의 필리포스'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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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기쁨은 초대 교회가 지닌 여러 모습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습니다!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은 초대 교회 7부제 가운데 성령이 충만했던 스테파노가 순교하자, 이어서 넘버2 필리포스의 행적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일곱 명의 부제 명단 가운데 두번 째로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필리포스는 바오로 사도가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동행하며, 카이사리아에서 루카과 첫만남을 가졌습니다.
4명이나 되는 여예언자들을 딸로 둔 것을 봐서 나이가 꽤 많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튿날 프톨레마이스를 떠나 카이사리아에 이르러, 일곱 봉사자 가운데 하나로서 복음 선포자인 필리포스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머물렀다.
그에게는 처녀 딸이 넷 있었는데, 그들은 예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사도행전 21장 8~9절)
필리포스는 주님의 천사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외딴 길, 황폐한 사막길을 걷게 되는데,
그 길에서 에티오피아 여왕 칸다케의 내시를 만납니다.
그는 여왕의 모든 재정을 관리하던 고위층 인사였습니다.
갑작스레 등장한 에피오피아 사람! 꽤나 의아스럽지 않습니까?
다른 대륙 아프리카 사람이 바다 건너 산넘어 예루살렘까지 멀고먼 영적 순례를 온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내시의 개종 사건은 초대교회의 비약적이고 폭발적인 성장을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멀고도 다른 대륙으로까지 퍼져나간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내시가 타고 가는 수레로 접근합니다.
필리포스는 내시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마도 내시는 여왕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요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예수님이란 사람에 대해 잘 알아보고 오라는 특명도 받았을 것입니다.
필리포스가 묻습니다. “지금 읽는 것을 알아듣습니까?”
내시는 자신이 읽고 있는 이사야서 본문의 의미가 너울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 이유로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내시는 필리포스를 자신의 수레 위로 올라와 설명해주라고 초대합니다.
필리포스는 수레 위에서 짧고도 강렬한 속성 예비자 교리를 실시합니다.
그가 읽고 있던 이사야서 수난 당하는 종이 곧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라는 것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필리포스의 초스피드 개인 예비자 교리에 깊은 감동을 느낀 내시는 기쁨에 넘쳐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 필리포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내시는 크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습니다.
내시의 속성 예비자 교리와 세례는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엄청난 스캔들이었습니다.
유다 율법에 따르면 내시는 구원의 공동체에 가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메시지에는 그런 장애가 조금도 없습니다.
오직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강한 믿음 뿐입니다.
초대 교회에 대한 박해는 이스라엘 전역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을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자나 도망자로서의 아니라 복음의 선포자요 구원의 설교자로 퍼져나갔습니다.
말씀의 기쁜 소식과 활활 타오르는 성령의 불길이 언제나 그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반대와 박해는 교회의 생명력을 파괴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가장 위협받고 공격받는 순간에 성장하고 발전합니다.
성령의 역동적인 현존 역시 가장 큰 위기 앞에 두드러집니다.
특히 기쁨은 초대 교회가 지닌 여러 모습들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모욕당하고 박해받는 것을 더없는 특권으로 여기고 기뻐하였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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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 태중에서 생존한다
오늘도 성체성사에 관한 예수님 설교의 일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역시 이것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리스도를 어머니처럼’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머니라면 아버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주신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겨 있는 어머니의 살을 먹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찌 믿겠느냐?”(요한 3,12)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의 것이 하늘나라의 비유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모의 자녀로 태어나는 일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 자녀로 태어나는 일의 비유입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났더라도 부모의 사랑과 가르침이 없으면 짐승처럼 살 수밖에 없기에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부모의 희생과 모범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자녀로 살려면 하느님의 희생과 모범이 필요한데, 하느님의 희생은 당신의 살과 피로,
하느님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모범으로 우리게 주어졌습니다.
이 지상에서부터 우리는 어머니로 상징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살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은 이 지상에서도 어머니의 살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사람이 엄마 뱃속에서 나오면 엄마에게 자유로워질까요? 사람은 하느님을 닮아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마치 아기가 엄마 태중에서 엄마의 영양분을 먹고, 또 태어나서도 엄마 품에서 젖을 먹는 것처럼 엄마의 살과 피를 통해 들어옵니다.
이것이 태중에서부터 단절되면 태어나서도 여전히 그 태중의 배고픔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실 어떤 누구도 어머니의 태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의 강의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많은 사람이 칭찬하고 영광을 주어도 항상 마음이 불안하고 공허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싫어하는 수녀님이 있다면 갖은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면 자신도 모르게 이불 속에서 그 수녀님을 욕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도자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이런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묵상을 했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엄마는 언니만 사랑해!”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다른 수녀님과의 관계가 분명 어머니와의 관계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수녀님은 묵상을 더 깊이 했습니다.
어머니가 수녀님을 잉태했을 때 부산에서 살다가 인천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곳으로 남편만 믿고 왔을 때 어머니의 마음이 매우 불안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불안함을 먹고 살았고 태어난 후에도 아직도 그런 불안함에 싸여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머니는 그런 불안함 속에서 아기를 낙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 태중에 있었던 아기는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겠습니까?
태어나서 그 불안함이 끝나면 모르겠지만 태어나서도 아기는 엄마의 사랑을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엄마에게 사랑받기 위해 3살 때 부뚜막에 올라가 설거지를 하려 했고 빨래와 심부름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언니만을 사랑했습니다.
학교 갔다 왔을 때 어머니가 언니를 반기는 표정과 자신을 반기는 표정이 사뭇 다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언니는 이미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사랑받았습니다. 그러니 태어나서도 사랑받습니다.
본래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녀님은 태중에서부터 어머니가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어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태중에서 벌어진 일이 태어나서도 이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장해서도 여전히 어머니의 살과 피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이런 묵상을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한쪽 팔에, 수녀님을 다른 한쪽 팔에 꼭 안아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품 안에서 어머니를 용서하고 그리스도 품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동안 막혀있던 무덤의 돌이 굴려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랬더니 얼굴도 사랑받을 준비가 된 얼굴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치 어머니에게 미운 감정이 있으면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구걸하듯, 다른 수녀님에게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를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랑받고 싶다면 지금 내가 잉태된 어머니에게 이미 사랑받고 있어야 합니다.
[출처: ‘희망기도로 내면 치유’, 김경희 루시아 수녀님, 유튜브 채널, ‘Bruce Lee’]
육체의 어머니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의 태중에서 사랑받으면 됩니다.
그 사랑의 양식이 당신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끼며 살게 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은 마치 그리스도의 태중에 잉태된 삶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리고 천국에 태어날 최상의 태교가 이뤄집니다. 천상에서 태어났을 때는 진정 그분이 차려주는 밥상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살과 피일 것입니다.
어느 세상이든, 태중이든, 이 세상이든, 나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것은 어머니의 살과 피입니다.
그리고 그 힘이 이웃을 사랑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실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는 한 청년 자매님의 예를 들었습니다.
아기는 태중에 있을 때 아이를 떼라는 아버지의 말에 “넌 살아야 해.”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말을 무의식중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이 상처가 세상에서도 살기 어렵게 만든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벗어날 수 없고, 여전히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상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그래야 천국에서 태어나도 살아갈 힘이 생깁니다.
사랑할 힘이 생깁니다.
어떤 피조물도 창조자가 아닌 이상 자력으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금 누군가의 태중에서 영양분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사랑으로 성장하고 있지 않다면 다른 존재의 태중에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탄의 태중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가리옷 유다는 성체를 영하면서도 사랑과 반대 방향으로 갔습니다.
만약 하느님의 태중에 있다면 하느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부모의 뜻과 반대로 살 수는 없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은 당신 태중에 살라는 뜻입니다.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은 어머니의 살과 피로부터 옵니다.
우리는 엄마의 살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성체성사를 세우실 때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는 말은 그리스도께 잉태되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존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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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강만연 베드로 형제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방랑 생활을 할 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양식입니다. 이집트의 속박에서 탈출해서 나온 후 2년 되었을 때, 신 광야에서 내리기 시작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간 후에 그친 것입니다. 광야는 죽음의 땅을 상징합니다. 그들이 생명도 없는 죽음의 땅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땅인 광야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이 만나이면, 이 만나는 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존재라고 봐야 할 겁니다. 이 만나는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상징(예표)한다는 것은 강론을 통해서 들어서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요즘 계속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인 예수님의 몸을 먹어야만이 영원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먹은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고도 죽었다고 하셨는지를 한번 묵상하고자 합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하니, 그들에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것입니다. 탈출기 16장 12절을 잠시 보시면,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나를 통해서 그들에게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31절에 보면 만나를 꿀 섞은 과자 같다고도 했습니다. 먹는 음식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신명기 8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광야를 돌게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을 보고 시험하신 거라고 했습니다. 그다음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는데,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 파란색 말씀과 관련해서 저는 좀 이색적인 묵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어제 수요일 오전에 잠시 교구청에 있는 바오로 서원에 가 책을 잠시 보고 왔습니다. 전주교구 신부님이 펴내신 책인데 사지는 않았지만 맨 마지막 표지에 이런 말씀이 하나 있었습니다. 복음 묵상에 관한 팁과도 같은 말씀이십니다. 복음을 묵상할 때는 많은 상상의 나래를 펼쳐라는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구약의 만나가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을 상징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만나를 이스라엘 조상들이 먹고도 죽었다는 사실을, 하필 왜 언급하셨는가가 제가 하는 묵상의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들이 먹었던 만나는 죽음의 땅인 광야 위에서 먹었습니다. 만나를 내려주시기 전에 먼저 하신 게 굶주리게 하셨습니다. 이 이유가 단순히 만나가 배고픔만 채워주시려고 내려주시는 게 아니고, 그와 함께 말씀으로 산다는 걸 알려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사실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걸 잘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만나가 예수님 당신을 상징함에도 그 만나를 먹고 죽었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은, 육적인 배고픔을 달래주시는 이면에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보면 앞에 언급한 파란 부분의 말씀이 없지만, 이 말씀은 사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하지만 예수님이신 생명의 빵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는 말씀 속에 숨어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 말씀은 단순히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만 하신 것처럼 보여지지만, 실제는 그 이전에 이 빵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 빵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암시하시려고,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 먹었던 만나는 먹고도 죽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신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결론은 이런 묵상으로 귀결됩니다. 전례로 비유하자면 성찬 예식에 앞서서 말씀의 식탁에서도 충분한 하늘의 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걸 오늘 복음을 통해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이건 저만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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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22. 부활 제3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사도8,26~40)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26)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그 무렵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기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 길이다."(26)
필리포스의 사마리아 선교와 베드로와 요한의 사마리아 방문 기사가 기록된 사도행전 8장 4~25절에 이어, 사도행전 8장 26절에서부터 40절까지는 필리포스의 에티오피나 내시 선교 및 서부 해안 지역 선교 기사가 보도되고 있다.
이처럼 복음은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를 넘어 더 멀리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필리포스에게 이러한 사명을 주기 위하여 등장하고 있는 '주님의 천사' 즉 '앙겔로스 데 퀴리우'(anggellos de kyriu)는 누구인가?
신약 성경에서 '주님의 천사' 혹은 '주님의 사자'는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루카 복음사가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천사'를 네 번 언급한다.
즉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5,19), 필리포스에게 지시하는 주님의 천사(사도8,26), 감옥에서 베드로를 풀어준 주님의 천사(사도12,7~10), 헤로데를 내리친 주님의 천사(사도12,23)이다.
그러나 본문의 '주님의 천사'는 다른 곳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를 가리키는 것과 다르다.
즉 사도행전 8장 29절과 39절에 다시 '성령','주님의 성령'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절의 '주님의 천사'는 '성령'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주님의 천사'는 사도들의 선교 활동을 위해 도와주는 같은 맥락에서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에서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등장하는 데는 특별한 선교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필리포스는 현재 사마리아에서 큰 성공을 이루었고, 계속해서 더 큰 선교의 역사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본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런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 혹은 '외딴길'이라고 일컬어지는 땅으로 보내지며, 복음을 증거하도록 부르심을 받는다. 이러한 일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필리포스는 성령의 완전한 주관하심 가운데 그분에게 이끌려 이제까지의 복음 선교의 터전 사마리아를 떠나 아무 기약도 없어 보이는 광야로 가야 했고, 그분의 인도하심에 순종했다.
'일어나 ~ 가거라'
'일어나'로 번역된 '아나스테티'(anastethi)의 원형 '아니스테미'(anistemi)는 신약 성경에서 108회 사용될 정도로 매우 자주 나타나며, 그 의미도 문맥에 따라 좌우된다.
본문에서는 '준비하라'(get ready)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주님의 천사가 필리포스에게 여행을 준비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 단어는 때로는 누워 있거나 잠을 자는 사람에게 보다 적당한 명령이다(마르1,35). 따라서 필리포스가 이 명령을 듣게 된 상황이 잠자는 동안의 꿈속이나 환상이었을 가능성도 클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명령형으로 되어 있는 본문의 두 단어는 시제가 서로 다르다. '일어나'는 부정(不定) 과거이며, '가거라'는 현재이다. 이것은 '일어나'동작은 일시적인 것이며, '가는 것' 즉 여행하는 것은 지속적인 일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필리포스의 복음 선교 활동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쉼없이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제 주님의 천사는 필리포스의 행로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지시를 하고 있다. 먼저 '남'(南)으로 번역된 '메셈브리안'(mesembrian)의 기본형 '메셈브리아' (mesembria)는 '중간의', '한가운데의'를 뜻하는 '메소스'(mesos)와 '날'을 뜻하는 '헤메라'(hemera)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남쪽'이라는 뜻과 함께 '한낮의'(midday), '정오쯤'(사도22,6)이란 의미도 있다.
따라서 '남쪽으로'로 번역된 '카타 메셈브리안'(kata mesembrian)는 '한낮에'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면, 필리포스가 받은 지시가 매우 특이한 것이 된다. 그는 한낮에, 즉 따가운 햇볕아래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벼려진 길을 가야만 했다.
또한 '외딴길'로 번역된 '에레모스'(eremos)도 '광야'나 '사막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길에 대한 설명으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버려진', '사람이 살지 않는'을 뜻하는 것으로서 '가자'(Gaza)지방에 대한 묘사로 보아야 할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볼 때, 특히 사도행전 8장 36절의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자'를 참조할 때, '외딴길','황폐한 길'이 더 자연스럽게 보여 대다수 번역본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오자 주님의 성령께서 필리포스를 잡아채듯 데려가셨다. 그래서 내시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하였지만 기뻐하며 제 갈 길을 갔다.'(39)
필리포스의 선교와 세례의 집전은 '주님의 천사'(26절), '성령'(29절), '주님의 성령'(39절)의 지시와 인도하심으로 되어졌다.
즉 필리포스와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는 내용은 그 전(全)과정에 있어서 성령 주도적이며, 성령이 세밀하신 간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잡아채듯 데려가셨다'에서 '잡아채듯 데려'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의미하는가?
원문상으로 볼 때 '헤르파센'(herpasen)는 '데려가다', '잡아채 가다'를 뜻하는 '하르파죠'(harpazo)의 부정(不定) 과거이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14회 쓰이는데, '빼앗아 감'(요한10,28), '파괴의 위험에서 구함'(유다23절), '신속히 잡아 데려가는 것'(요한6,15; 사도23,10), '한 사람을 신비롭게 혹은 매우 빨리 다른 장소로 옮김' (묵시12,5; 2코린12,2.4; 1테살4,17)등을 의미한다.
특히 테살로니카 전서 4장 17절의 경우,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에 대해서도 같은 동사를 쓰고 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필리포스는 단순히 길을 인도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초자연적인 붙들림에 의해 다른 장소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루카 복음사가가 사도행전 8장 39절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선교에 있어서는 그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적극적인 간섭,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끝으로, 에티오피아 내시는 자신에게 성경을 설명하며 그리스도를 소개해 주고, 세례까지 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는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기뻐하면서 자기 길을 갔다는 사실을 소개하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은 영적 기쁨이 그의 상황을 압도할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내시는 자신의 바로 곁에서 복음을 제시하고 세례까지 베풀어 주던 필리포스를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영적 기쁨에 흠뻑 젖어 기쁨으로 자기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는 삶>
놀던 물이 좋다고 사람이 자기가 살던 세상을 고집하면 그 세상과 함께 땅에 갇혀(지옥) 하늘의 존재가 될수 없습니다.
(요한6,41,44-51)
41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유다인들이 그분을 두고 수군거리기 시작하였다.
= 앞 29절에서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하셨는데 사람들은 보이는 표징을 계속 요구하며 믿겠다 합니다. 그래서 35절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로 답하시며 그들의 믿음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의 빵을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계속 육의 생명을 위한 빵으로 동문서답으로 요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수군거리기 까지 합니다. 수근 거리다- (공기죠) 불평하다 투덜거리다.
예수님은 하늘의 생명의 빵으로 말씀하시고 사람들은 그 하늘의 빵을 육을 위한 빵으로 계속하여 듣고 요구하는, 불평하는 그들이 안타까워~ 하셨던 말씀을 다시 반복하시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성경은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임을 다시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발 당신을 하늘의 생명으로 알아 먹으라고~~
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그리고 나에게 오는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릴 것이다.
=또 37절의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당신께 오는 사람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더 강화하신 말씀으로~
45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다.’라고 예언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은 누구나 나에게 온다.
= 성경을 올바로 깨닫게 되면,입니다.
(요한5,39)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46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 온 이 말고 누가 아버지를 보았다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이만 아버지를 보았다.
= 예수님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하심입니다.
47 내가 진실로진실로(진짜로) 너희에게 말한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 40절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의 반복입니다.
48 나는 생명의 빵이다. (=35절 내가 생명의 빵이다.)
= 부정함(빵5 물고기2)을 받아 짊어지시고 깨끗한 생명의 빵으로 돌려주신 그 빵입니다.
(이사53,4)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 우리의 부정한 고통, 병고(죄의식 두려움 불안), 그 저주를 짊어지시고 천대받은 자로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 받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 주신 그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의 빵입니다.
(요한5,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 그렇다고 믿는 이들에게 질병이 없어야 된다는 말리 아닙니다. 그렇다면 가시에 찔리는 질병, 그 고통을 달고 살았던 사도 바오로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까?
육의 고통은 고통의 우리, 곧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해~ 외아들을 대속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그 사랑으로 이끄시어 구원의 사랑과 하나 되게 하는 도구입니다.(히브12장참조)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 만나를 육을 위한 빵으로 먹었기에 죽었습니다.
(신명8,3) 그분께서는 너희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희도 모르고 너희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게 해 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50 그러나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 역시 33절의 반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결론입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 생명을 주는 빵이 살인데~ 앞 신명기 8장 3절에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 그 ‘말씀’이 생명을 주는 주님의 살입니다. 우리가 그 그리스도의 몸, 성체를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육, 내 뜻을 위한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영원한 생명을 위한 새 계약으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루기22,20)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만나와 하늘의 빵-‘그리스도의 몸을 하늘의 생명이 아닌 육의 생명을 위해 먹고 마시고 있음을 깨달아라’ 주신 오늘 말씀입니다.
본문 44절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 이끌어(헬피우)- 어부가 그물로 ‘끌어 올리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끌고 가시는 이끄심입니다.
물고기가 스스로 갑판 위로 올라올 수 없습니다. 그렇듯 하느님께서 세상 물에서 곧 육의 빵을 고집하는 그 삶에서 끌어 올리시는 그 구원으로 이끄심입니다.
(1코린15,19)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 육을 위한 보이는 현세만을 위한 신앙이 아닌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생명, 곧 말씀을 구원의 진리로 깨닫는 삶, 그것이 신앙 생활입니다. 아멘.
부활 제3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6,44-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 (51)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주실 빵이 당신 자신의 살이라고 주장하심으로써, 당신 몸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실 것을 내비치셨다(마르10,45).
하지만 이러한 선언은 영적 지각력이 결핍된 유다인들에게는 생소하기만 하고,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었다.
여기서 '내가 줄'에 해당하는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는 '나는', '내가'라는 뜻을 지닌 인칭 대명사 '에고'(ego)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세상의 생명을 위해 '살'을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 자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강조 용법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6장 51절 서두에 나오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에서 예수님의 신성(神性)과 자의식을 표현하기 위해 자주 사용되는 '나는~이다'의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가 사용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한복음 6장 51절 전체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유다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물인 모세보다 월등히 우월하심을 나타낸다.
모세는 하느님의 집에 종으로서 충성을 다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집안을 맡은 아드님으로서 자신의 직무를 행하신 것이다(히브3,5.6).
모세나 다른 어떤 사람도 하느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을 가지고 '에고 도소'(ego doso), 즉 '내가 준다'거나 '내가 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에고 도소'(ego doso; I will give)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의 소유자, 주인뿐이다.
여기서 '도소'(doso; will give)는 '디도미'(didomi)의 미래 시제로서 예고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진행적인 의미도 있다. 세상의 생명을 위한 빵은 예수님만이 지금 현재도 주시고, 앞으로도 주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즉 영혼의 구원은 우리를 위한 화해의 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상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사도4,12).
요한복음 6장 51절에서 당신 자신의 살을 빵으로 비유하고,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예수님의 언급은 성만찬에서 빵을 나누는 의미와 같다(마태26,26).
요한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성체성사 제정 기사를 생략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6장 51절과 더불어 55절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교훈으로 성체 성사 제정 기사를 대신한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서와 중복을 피하면서도, 자신의 독특한 기록 방법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수와 신비를 설득력있게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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