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 2021.2.14.일
■코스:
○백룡산(白龍山,347M): 백룡
제 저수지-백룡정(정자)-백룡산 정상-복룡회관길 우틀-팔각정
(태청지맥,313.7봉)-Back-백
룡산 정상-삼봉 정도전선생 유
배지 입구-백동마을-백룡제(원
점회귀)
*들머리 네비: 나주시 다시면 운
봉리 산76-21
○정도전선생유배지 관람
○나주 곰탕거리(나주북문 금
성관) 남평할매집 나주곰탕 매
식(9,000원×2)
○가야산(伽倻山,190.5M): 앙
곡교 앞 삼전수산 옆 등산로 입
구-불로마을 갈림길-생물산업
진흥공단 갈림길-체육공원-가
야산 정상-앙암정(앙암바위)-영천사 입구-나주공공하수처리
장-노거수 보호수-정랑마을(원
점회귀)
*들머리 네비: 나주시 운곡동 산 1-18
■구간거리/평균속도:
○백룡산:5.7KM/2.7KM
○가야산:5.3KM/2.7KM
■후기: 아침에 일어났더니 우
리 아파트 마당에 비가 내렸기
에, 나주 지역 일기예보를 보니 오후 12~3시경에 비 소식이 있
어, 가급적 비를 피해볼 요랑으
로 8시에 집을 나섰습니다. 먼
저 다시면/문평면 경계에 있는 백룡산을 먼저 선택해서 접근했
습니다.
두 산 모두 코스가 짧아서 다소 아쉽지만, 등산로 정비가 아주 잘 되어 있어서 수월하게 등.하
산할 수 있는 산이었습니다.
백룡산은 태청지맥으로 이어져 길게 이어서 탈수 있습니다만 백룡산만 타려면 다소 짧은 거
리였으며, 정상에서의 조망은 영광 불갑산과 나주 신걸산. 금
성산은 물론 주변 산군을 멀리 바라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
니다. 하산하는 길에 백동마을 갈림길에서 0.7Km 정도를 들
어가면, 조선 개국공신 '삼봉 정
도전선생유배지'가 있는데 다녀
와도 됩니다(저는 산행을 마친 후 승용차로 다녀왔음). '삼봉 정도전선생유배지'는 달랑 비
석과 초가집 한채만 덩그러니 있어서 초라해 보였습니다.
가야산은 영산포 홍어거리 근처
에 위치해 있는데 높이는 낮지
만, 2층 팔각정과 체육공원 등 중간중간에 쉼터를 잘 만들어 놓았고, 코스 관리가 아주 잘 되
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상 9부 능선에 있는 팔각정은 규모
도 크고 단청이 잘 되어 있었지
만 현판이 없었고, 정상엔 정상
석도 없이 주변 산군 설명판만 있어서 다소 아쉬웠습니다. 그
러나, 무등산. 영산강 줄기. 영
산포 홍어거리. 빛가람 혁신도
시. 금성산 등 주변 조망은 뛰어
났습니다. 들머리로 돌아오자 다행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아울러, 두 산 모두 주변 산과 연
계산행 하면 좋겠기에 적극 추
천합니다. '따라가기'는 다음카
페측에서 무료로 실행할 수 없
도록 금지시켜 앞으로는 첨부하
지 못합니다[1건당 사이버머니 10트랭(100원) 결제 필요].
■차기 산행: 선정중
■산소개
○백룡산(347m)은 전남 나주
시 다시면 운봉 · 청정리와 문평
면 오룡 · 학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노령산맥 태청산 자락
이 남쪽으로 내려서 문평 학교
리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충치를 거쳐 함평군 나산면과 경계를 이룬다. 문평 계로리와 북동리 경계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대도리에 이르러 남쪽으
로 연결되어 이 산지를 이룬다. 봉우리는 과거 기우제를 올린 제단은 없어지고, 헬기장이 만
들어져 있다. 북동쪽으로 내려
서면 용굴이 나오며, 영정굴 앞
까지 땅속으로 물길이 나 있다
고 전한다. 남쪽에는 치마, 줄바
우와 연소혈 명당이, 남동쪽 기
슭 백동 마을 어귀에 관바우가 서 있다. 대오개 안고랑에는 정
도전(鄭道傳, 1342~1398) 선
생이 유배 생활을 했던 소재사
(消災寺)터가 있으며, 소쿠리 명당이라 한다. 1375년(고려 우왕 1) 회진현(會津縣) 거평
부곡(居平部曲)으로 와 황연
(黃延)의 집에 거처하며, 1377
년까지 지냈다. 동쪽에 다시면 수리조합에서 축조한 백룡저수
지가 있다. 저수지 안에 20여 기의 고인돌과 용문장터가 있었
다.
○가야산(伽倻山,190.5m)은 전남 나주시의 이창동 관할 운
곡동과 진포동 경계 영산강변에 위치한 산으로 피라미드 모양으
로 솟은 산이다. 산세는 나지막
하나 영산강을 끼고 있어 나주
평야 전체를 바라볼 수 있다. 이
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
비고(增補文獻備考)》《나주
읍지(羅州邑誌)》 등에 모두 가요산(歌謠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80년판 나주군지에
서 처음 가야산으로 기록되고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하는 지형
도에도 가야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강 북쪽 기슭의 앙
암바위에는 남녀의 이루지 못
한 사랑에 대한 슬픈 전설이 전
해져 온다. 활성산 자락이 북서
쪽으로 치달려 영산강에 우뚝 서 멈춘다. 북쪽 작은 봉우리
(138m)와 쌍봉을 이룬다. 작은
봉 남쪽 기슭은 '텃골[基洞]' 마
을이 위치하며, 큰봉 북동쪽 기
슭에 영천사가 있다. 『여지도
서』에 "가요산(謌謠山)은 관
아 남쪽 10리에 있으며, 쌍계산
에서 뻗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북쪽 벼랑을 '앙암(仰岩)
'이라 부른다. 가야는 '갓[邊]'으
로 가장자리에 있다는 뜻이며, '개산'으로 부른다. 영산강 바로 곁에 우뚝 솟아 있어 일제강점
기 일본인들은 영산포의 '후지
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삼봉 정도전(鄭道傳,1342
∼1398)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
물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
던 성리학적 이상 세계의 실현
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
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 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태조 이
성계의 조선 건국의 기초를 닦
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고려 후기 과거 시험을 통해 중
앙 정계로 진출한 신진 사대부
중 역성 혁명(易性革命)을 추구
한 급진파에 속함. 고려 말 친원 배명(親元排明) 정책을 반대하
다가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
려난 후 후진 교육과 학문 연구
에 힘쓰다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정권을 잡자 그를 도와 토지 개혁(과전
법)을 실시하여 조선 건국의 기
초를 닦았다. 1394년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주장하여 이
를 실현하였고, <조선경국전>
을 편찬하여 조선 법제의 기본
을 이룩하였다. 저서로는 불교
를 비판한 <불씨잡변> 등이 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