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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8) 명도회의 설립 목적과 운영 방식
입회 방식과 활동 내용 모두 오늘날 레지오 마리애와 같아
- 대만 보인대학에 소장된 「명도회규」의 표지(오른쪽)와 입회시기를 규정한 대목.
명도회규와 설립 목적
명도회는 왜 설립되었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을까? 「사학징의」의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 중 윤현의 집 구들장 밑에서 나온 책자 목록 중에 「명도회규(明道會規)」 한문본 1책이 있다. 또 한신애의 집에서 압수한 사학 서적 목록 중에도 「셩모시ᄒᆡ명도희규인(聖母始胎明道會規引)」이란 책이 보인다.
중국의 명도회규는 오늘날 대만 보인대학(輔仁大學) 서회신학원(徐匯神學院)에 소장된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立聖母始胎明道會牧訓)」이 저본이다. 뒤에서 살피겠지만 ‘신공(神工)’, ‘보명(報名)’, ‘육회(六會)’, ‘성모시태’ 등의 주요 술어가 일치하고, 모임의 성격면에서 보더라도 당시 조선 명도회의 회규는 중국 것을 그대로 가져온 것임이 분명하다. 이 책의 전문은 「서가회장서루(徐家匯藏書樓) 명청천주교문헌속편(明淸天主敎文獻續編)」(臺灣 利氏學社, 2013) 제13책에 영인, 수록되어 있다. 성모시태란 말이 들어간 것은 명도회가 성모 마리아를 대주보(大主保)로 모신 단체였기 때문이다.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은 초기 교회와 관련이 깊은 북경 구베아 주교가 1791년 봉재(封齋) 전 1주일에 공표했다. 봉재는 사순절의 옛 표현이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명도회가 전부터 북경에 세워져 있던 모임을 본떴다고 했고, 설립 목적이 “자신들이 천주교에 대한 깊은 지식을 얻고, 그것을 교우와 외교인들에게 전파하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는 데 있다”고 썼다.
명도회는 교리 연구와 전교를 주목적으로 한 신심 단체이지만, 중국 쪽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의 「본회종향(本會終向)」 조목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종향은 궁극적 지향이란 뜻이다. 이 조목에서는 명도회의 설립 목적을 모두 8가지로 적시하였다. 첫째는 천주의 영광을 밝게 드러냄(明顯天主光榮), 둘째는 성모의 공덕을 찬송함(頌揚聖母功德), 셋째는 어리석은 이를 가르침(訓誨愚蒙), 넷째는 냉담자를 일깨움(提醒冷淡), 다섯째는 곧 죽을 어린이에게 대세를 줌(洗將死之孩), 여섯째는 임종의 어려움을 도와줌(助臨終之險), 일곱째는 이단의 주장을 물리침(闢除異說), 여덟째는 미혹한 길을 열어 인도함(開導迷途)이다.
명도회의 설립 목적 속에는 찬송과 예배, 전교와 교리 교육뿐 아니라, 어려서 죽은 어린이와 임종을 맞은 영혼의 구령(救靈) 사업을 포함하고 있었다. 전교 활동 전반에 걸친 보폭이 넓었던 셈이다. 요즘으로 치면 사목회 안에 전교 분과와 연령 분과, 전례 분과 등이 활동하는 모양새에 가깝다.
명도회 입회 절차와 보명의 의미
「추안급국안」의 1801년 10월 10일의 공초에서 명도회에 대해 심문관이 묻자 황사영은 이렇게 대답했다. “서양교에 명도회가 있습니다. 혹 3, 4인, 혹 5, 6인이 하나의 회가 되며, 먼저 이름을 신부에게 보고하고, 그 뒤에 신공을 합니다. 신공은 서양학을 살펴 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일 년 내에 신공이 부지런한 자는 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부지런하지 않은 자는 뽑아냅니다.”
이에 따르면, 명도회는 3, 4명 또는 5, 6명을 단위로 한 사랑방 모임 형태의 소규모 신앙 공동체로 운영되었다. 이 같은 세포 단위의 운영은 유사시에 전체 조직을 보호하고, 소속 지회원 간의 결속력을 강화시키기에 맞춤한 체재였다.
또 앞선 글에서 황사영이 전체 명도회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고 한 언급으로 볼 때 여성만으로 구성된 지회의 숫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사학징의」 중 비녀 복점(福占)의 공초에 나오는 “남대문 내창(內倉) 앞 손만호의 집에서 또한 여러 곳의 과부 7, 8명이 간간이 함께 모여 사서의 이야기를 강습한 것”이나, 김흥년, 이흥임, 이어린아기, 김경애 등의 청상과부들이 한방에 모여 지내며 몰래 사학을 익힌 것, 명도회의 회원이었다는 폐궁의 두 여인이 궁녀들과 함께 교리를 강습한 것도 모두 여성이 중심이 된 명도회 모임의 일단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위 「황사영백서」에 나오는 보명(報名)이란 용어를 알아보자. 보명은 모종의 활동이나 조직에 참가하려 할 때 주관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성명과 나이, 본관 등을 적어내는 것을 말한다. 일종의 입회 신청서인데, 중국에서는 이를 지금도 빠오밍, 즉 보명이란 표현으로 쓴다. 보명을 했다 하여 바로 명도회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일정 기간 신공을 통한 수련 과정을 거쳐 최종 심사를 통과해야 입회가 확정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레지오 마리애에서 정단원이 되기 전에 협조단원의 기간을 두는 것과 꼭 같다. 또 희망한다고 추천 없이 아무나 보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사학징의」 1801년 3월 28일 전라감사 김달순의 추고에서 심문관이 보명과 영세(領洗)에 대해 물었을 때, 유관검은 이렇게 진술했다. “보명은 배움이 부지런한 사람을 택하여 주문모에게 보명한 것을 넣으면, 주문모가 서양의 도가 높은 사람의 이름을 본떠 이름을 지어 보내는 것입니다. 매년 연말에 공부가 부지런한지 게으른지와 가르친 사람이 많고 적음을 가지고 주문모에게 보고합니다. 영세(領洗)는 주문모가 작은 병에 물을 채워놓고 여러 학도를 늘어 세워 앉히고는 무릎을 단정하게 꿇고 정수리를 드러내게 한 뒤에, 그 물로 정수리로 부어내리는 것입니다.”
문맥이 조금 어수선한데, 따져 읽으면 이렇다. 보명은 천주교 신앙에 부지런한 사람을 집행부에서 추천하여 이루어진다. 이어 예비 회원의 자격으로 천주교 교리 공부의 근면 태만 정도와 전교한 사람의 인원을 보명자 별로 표시한 보명단(報名單)을 연말에 신부에게 일괄 보고한다. 신부는 성과가 표시된 보명단을 보고 입회 자격 여부를 심사한다. 심사에 통과해 입회의 자격을 얻은 사람에게는 주문모 신부가 서양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지어주고, 영세를 준다.
이어지는 심문 기록에 “보명기(報名記)를 살펴보니, 나열하여 쓴 것이 7, 8명에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또 몇 사람을 권하여 입교시켰는지, 몇 사람을 밖에서 들어오게 했는지 기록한 것도 있다”는 말이 나온다. 보명기는 등록자 명단이고, 그 숫자는 7, 8명 이상이며 이름 옆에 입교시킨 사람의 숫자 등의 실적 수치가 적힌 양식지가 있었다.
입회 시기는 매년 네 차례로, 성모시잉모태(聖母始孕母胎)(12.8)와 성모영보(聖母領報)(3.25) 축일, 그리고 성모성탄(聖母聖誕)(9.8)과 성모몽소승천(聖母蒙召升天)(8.15) 축일이었다. 대주보인 성모 마리아 관련 축일을 입회일로 지정한 점이 특이하다. 원문의 ‘매년사일(每年四日)’은 위 네 날짜를 특정한 것이니, 이를 ‘매년사월’의 오기로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된다.
주보 성인의 전기
1811년 북경에 보낸 「신미년백서」에는 명도회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또 성교(聖敎)의 규례에 따라 명도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성 안에 각각 모임 장소를 두고, 각기 회장을 파견하여 나누어 관리하였는데, 남녀 교우로 하여금 구별을 두어 모두 법도에 맞았습니다. 오로지 남에게 권면하는 것을 임무로 삼아, 사람들이 모두 용맹하게 나아가 주보 성인의 전기를 받으니, 신공이 다달이 점차 증가하여 도성에서는 이미 볼만한 것이 있었고, 지방 또한 많이들 그 모범을 본받았습니다. 조심하여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비록 성사(聖事)를 널리 전하지는 못하였지만, 정성으로 교화로 향하여 돌아오는 자가 앞뒤로 거의 1만 명에 가까웠습니다. 장차 산골 마을까지 다니면서 관리하려 하였으나, 일의 기미로 인하여 제지를 받아 굳이 길을 떠나지는 못했습니다.”
1800년 4월에 설립된 명도회가 천주교 신자 수의 폭발적 증가에 결정적 기여를 했음을 말했다. 이 같은 성공에 고무되어 신부는 산향(山鄕), 즉 산골 마을까지 회장단을 파견하거나 자신이 영세를 주기 위해 직접 순방하려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1800년 12월 19일 밤에 장흥동 어귀를 지나던 형조의 나졸들이 길가 집에서 나는 박자 치는 소리를 듣고 투전판이 벌어졌다고 여겨 현장을 급습했다가 천주교 집회임을 알고는 최필공과 오현달 두 사람을 체포한 일을 계기로 다시 검거 선풍이 불어닥치면서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달레는 「조선천주교회사」에서 “주 신부는 시내에서 회합을 가져야 하는 장소를 정하고, 집회를 주관하는 지도자들을 임명하며, 남자들은 여자와 서로 떨어져 회에 참석하도록 정하는 등, 한마디로 모든 것을 무게 있고 절도 있게 조절하였다. 주 신부의 열성에 감화되어 모든 회원은 지도자들이 매달 각 회원에게 나누어 주는 표지를 받으러 서둘러 모여들었다. 그 표지에는 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 중의 하나를 주보로 지정하였는데, 그것이 주보의 표식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천은 차차 전국에 퍼져서 신기한 결과를 냈다.”
당시 서울 시내 여러 곳에 명도회 회합 장소가 정해져 있었고, 집회소에는 책임 회장이 임명되어 있었다. 지도자들은 매달 각 회원에게 주보의 표식을 정해주었고, 회원들은 이것을 받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들었다는 얘기다.
주보 성인의 표식 또는 전기를 받았다는 것이 매 모임 때마다 성인의 전기를 신심 자료로 주었다는 것인지, 사람마다 각각 세례명을 주었다는 것인지는 다소 모호한 점이 있다.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에는 “신부는 허락한 바의 바람을 거두어 바로 패성패(佩聖牌)를 주어서 은혜를 입은 증거로 삼게 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신자들에게 신부가 직접 세례명을 지어주고 세례를 주는 것은 실로 은혜로운 일이자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신부는 1800년 4월 명도회 설립 시 기존에 세례를 받은 기간 조직의 열성 신자를 중심으로 명도회 6회 조직을 구성하고, 모임 장소를 지정한 뒤 이들에게 회원 선발을 위한 보명 절차를 위임했을 것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59) 명도회 6회의 조직 구성
명도회, 6회 집단 지도 체제로 의사 결정권 가진 최고 기관
- 대전교구 신리성지 순교미술관에 전시된 이종상 화백의 순교 기록화 ‘손 요한의 신리 신자들에 대한 염습’. 박해시절 신앙을 지키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피난길을 떠났던 손 요한은 그때에 순교하지 못한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며 순교한 신자들의 시신을 염습하기 시작한다. 전염병에 걸리고 부패한 시신을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았지만, 정성스럽게 묵묵히 염습을 하며 묻어주었다. 이런 손 요한의 모습에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들의 삶을 존경하게 되었다.
혈당(血黨)과 집회 형태
명도회의 예상 밖 호응에 고무된 주문모 신부의 행보는 부쩍 바빠졌다. 주 신부는 주일마다 명도회의 지부를 돌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고해성사와 세례성사를 행하였다. 「사학징의」에는 한 동아리의 멤버를 일러 혈당(血黨)이나 동당(同黨), 사당(死黨)이라고 쓴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또 주요 거점 인물의 공초에는 예외 없이 함께 모임을 가졌던 4명에서 10명 내외의 이름들이 나온다.
이합규(李逵)의 공초에, “홍문갑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고, 각처에서 온 여인들과 함께 한 자리에 늘어앉아 주문모에게 강의를 들었습니다”라고 했고, “또 손인원, 정인혁, 현계흠, 오현달, 김이우 등과 함께 매달 7일에 김이우의 집에 일제히 모여 사서를 강론하였습니다. 작년 6월에 제가 김이우의 집에 갔더니 현계흠과 손인원, 김이우 등이 주문모를 모셔두고는, 첨례날이라고 하며 아래 사랑 벽장 속에 예수상을 걸어 장막으로 가리고, 방석을 깐 뒤 여러 사람이 사서를 강습하였습니다. 김이우 집안의 여인들은 창밖에 있으면서 엿들으며 강습하다가 파하였습니다”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이 기록 중에 매달 7일이라 한 대목이 특별히 눈길을 끈다.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 중 「회내총규(會內總規)」에 “매달 첫 번째 주일을 본회의 기일로 삼는다(每月第一主日, 爲本會之期)”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매달 7일에 김이우의 집에서 열린 모임은 다름 아닌 명도회 집회였고, 여기에 거명된 손인원 등 5명은 명도회의 한 지회를 구성하는 멤버였던 셈이다. 첫 보명 후 두 달이 지난 6월 집회 때 이들은 특별히 주문모 신부를 집으로 모셔서 미사까지 드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또 1801년 2월 최필제는 오현달, 충주 아이 구석이(具碩伊), 종현(鍾峴)의 이태량(李太良), 생민동(生民洞)의 이범이(李凡伊) 등과 사서를 강론하던 중에 체포되었다. 이름으로 보아 이들은 모두 앞서 명도회원의 3분의 1을 차지했다고 한 신분이 낮은 백성이었고, 멀리 충주 지역에서 온 구석이의 존재가 눈에 띈다. 그는 아마도 충주 쪽에 명도회 지부를 만들려고 수련 과정을 익히던 중이 아니었을까 싶다. 명도회는 이렇듯 계속 분화를 거듭하며 저인망식 전교를 계속하고 있었다.
홍정호는 “4, 5차례나 주문모를 제 집에 맞아와서 사술을 배웠고, 함께한 무리는 손인원, 현계흠, 최필제, 윤현, 박덕신, 최재도 등이옵고, 드나든 여자는 남판서 댁 여종 구월과 홍문갑의 여종 소명, 동의 어미라고 부르는 여자 등입니다”라고 했다. 대부분 대여섯 명의 인원이 모여 공부 모임을 가졌고, 남녀의 구분을 두어 참석했다.
육회(六會)에 대한 오해
「추안급국안」 1801년 10월 9일의 공초에서 황사영은 “육회(六會)는 홍문갑 집, 홍익만 집, 제 집, 김여행 집, 현계흠 집이고, 한 집은 알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명도회에 여섯 개의 지회가 있는데, 다섯 모임의 대표 이름을 대면서, 나머지 한 집은 모르겠다고 한 것이다. 이 모임 장소를 황사영은 육회라고 지칭했다. 이곳은 달레가 앞서 말한 주문모 신부가 정해준 “시내에서 회합을 가져야 하는 장소”에 해당할 것이고, 해당자는 주문모 신부에 의해 임명된 “집회를 주관하는 지도자”들이었을 터이다. 또 앞서 본 「신미년백서」에서 “성 안에 각각 모임 장소를 두고, 각기 회장을 파견하여 나누어 관리하였다”고 한 대목에 대한 부연 설명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황사영이 말한 다섯 집의 집주인은 각 지부의 회장격이라 말할 수 있겠다. 이곳은 기간 조직에 해당하는 중앙 지부(支部) 격의 공간이었을 것이다.
사실 황사영의 이 언급이 명도회 육회의 성격을 혼란스럽게 만든 점이 없지 않다. 당시 서울과 지방에서 활동하던 명도회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모임은 적어도 수십 개에서 수백 개에 이르는 규모였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명도회의 지회 모임이 이 6개 지부에 국한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 지회당 5, 6명 정도의 인원이 모였다면 많아야 36명이다. 이 인원으로 어떻게 큰 변화를 가져오며, 여자가 3분의 2이고 신분 낮은 남자가 3분의 1이었다는 식으로 쓸 수 있겠는가?
이렇게 볼 때 황사영이 육회의 장소로 지목한 다섯 공간은 각각의 산하에 수많은 지회 모임과 예비 모임 등을 구성해 두고, 구역별로 명도회 보명 작업과 보명단 작성 및 지속적 회원 관리를 집행하는 장소였을 것이다. 일종의 피라미드 구조처럼 하나의 정점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확산되거나, 그물망같이 하나의 벼리줄에 꿰어져 쫙 펴서 물고기를 잡는 식의 시스템을 갖추었던 셈이다.
「사학징의」 중 김일호의 공초를 보면, “매번 첨례일이 되면 교중의 무리들과 함께 육회에 참석하여, 오직 널리 행하는 것을 책무로 삼았습니다”라고 했고, 또 “육회의 첨례에 참석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때 육회는 명도회의 별칭으로 쓰였다. 명도회를 육회라고 한 것은 집회장소가 6곳이어서가 아니라 명도회가 6회(會)의 체재로 구성되고 운영되어서이다.
명도회의 6회장
명도회의 6회 체재는 그 연원이 중국 명도회에서 왔다. 정황상 조선 명도회의 틀이 중국 명도회의 회규를 그대로 가져왔으니, 그 골간이 되는 6회의 체재를 적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다만 조선 쪽의 기록 중에 6회 체재와 6회장의 존재를 언급한 것이 위 황사영의 기록뿐이어서 그 실상 파악이 어려운 점이 있다.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에 따르면 명도회 조직은 회를 관장하는 신부인 관회신사(管會神司)와 신부를 보좌해 회를 실제적으로 이끌어나가는 6회장이 있었다. 그 명칭은 총추회장(總樞會長), 장서회장(掌書會長), 종무회장(綜務會長), 계우회장(啓愚會長), 부위회장(扶危會長), 성미회장(醒迷會長) 등이다. 이중 앞쪽 3회장은 본부 임원격에 해당하고, 뒤쪽 3회장은 명도회의 설립 목적에 따른 역할별 분과를 맡은 회장들이다.
총추회장은 명도회의 총회장이고, 장서회장은 회의 서기에 해당한다. 명도회원들이 지극히 중시한 보명단의 관리와 제반 기록을 맡았다. 종무회장은 회계와 총무의 역할을 맡아, 명도회의 서무와 재정 관리를 담당했다. 매달 주보의 표식을 제작하거나, 회원을 위한 패성패(佩聖牌) 즉 휴대용 성패 제작 및 명도회 활동에 필요한 각종 기도문과 교리 책자 보급에는 상당한 비용이 투입되었을 것이고, 이는 회원들의 회비와 헌금으로 마련되었을 것이다.
계우회장과 부위회장, 성미회장은 명도회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위치다. 계우(啓愚)는 어리석은 이를 계몽한다는 의미로, 계우회장은 교리 지식이 없는 교우와 냉담 교우의 권면 역할을 맡았다. 오늘날 사목위 교육분과 위원장에 해당한다.
부위(扶危)는 위험에 처한 신자를 부조(扶助)한다는 뜻이다. 부위회장은 세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은 어린이에게 대세를 행하고, 병자나 망자를 돌보는 일을 맡았다. 오늘날 연령회나 연도회의 기능에 가깝다. 「사학징의」에서 한덕운 토마스가 사기그릇 장수로 상경 도중 길에서 빈 가마니에 싼 홍낙민의 시신을 보고 조문을 하고, 서소문 밖에 가서 최필제의 시신을 염습한 일은 그가 평소 부위과에 속한 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훗날 병인박해 당시 「박순집 증언록」에 나오는 장 베르뇌 주교를 비롯 7명의 시신을 염습한 박 바오로 같은 분의 존재도 그러하다. 신유박해 이후 밤중에 몰래 사형당한 사학죄인들의 시신을 반출해 염습하고 매장한 일은 대부분 명도회의 부위과에 속한 신자들이 맡아 행했던 일일 것이다.
성미(醒迷)는 미혹함에서 각성하게 한다는 의미다. 성미회장은 외교인을 권면하여 천주교로 입교시키는 일을 총괄했고, 오늘날 전교분과 위원장의 역할에 해당한다.
「입성모시태명도회목훈」에 따르면, 모든 명도회원은 반드시 계우과(啓愚科)와 부위과(扶危科), 성미과(醒迷科) 중 어느 한 부문에 소속되어야 했다. 소속을 결정하는 것은 총추회장 또는 장서회장이었다. 신부는 보명단이 올라오면 총추회장 또는 장서회장을 파견해서 개별 면담을 통해 그의 달란트에 따라 소속을 결정했다. 면담 시에는 당사자의 학문 소양과 「삼본문답(三本問答)」에 대한 숙지 정도, 세례 절차에 대한 이해와 수행 능력, 외교인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량 등이 고려되었다.
이들 각 부서의 역할과 활동 사항 및 각종 세부 규정들이 모두 꼼꼼한 세부 조항을 근거로 시행되었다. 앞서 황사영이 말한 육회의 다섯 곳 회소(會所)는 본부 6회장과는 별도로 운영한 중앙 지부 격의 모임 장소였을 것으로 본다. 무엇보다 총추회장인 정약종의 이름이 빠져있는 데다, 종무회장과 장서회장의 경우 본부 총괄 임원이어서 별도로 집회소 운영자의 역할을 맡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한다. 당시 조선 명도회는 주문모 신부의 지도 아래 정약종이 총추회장을 맡고 나머지 5회장이 역할을 나눠 운영하는 집단 지도 체제로 운영되었다. 모든 회원은 자신의 중심 역량에 따라 계우과 부위과 성미과 중 어느 하나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전교 활동에 열심하였고, 이를 위해 기도 생활과 교리 공부 및 봉사 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 같은 신공(神工) 활동은 얼마 못 가 교회 안팎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신심 단체가 따로 없었던 조선 교회에서 명도회는 그 의미가 단순한 하나의 신심단체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모든 전교 활동과 신앙생활의 지침이 여기로부터 지시되고 하달되며 실천되었기 때문이다.
명도회는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의사 결정권을 가진 최고 기관이었다. 주문모 신부는 조선 교회의 분권화와 평신도 조직의 활성화를 통해 사목의 공백을 메우고, 평신도 중에 지도자를 양성함으로써 차세대를 위한 준비를 갖추고자 했던 것이다.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 (60)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명도회, 신유박해 이후에도 암흑기 조선 교회 유지한 밑바탕
- 교우들을 격려하고 복음을 전하는 데 열심인 이경언이 한 과부에게 권면하고 있다. 이경언은 명도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서적이나 상본을 베껴 교우들에게 나눠줬다. 그림=탁희성 화백.
풀뿌리 교회의 든든한 토대
명도회는 일개 신심 단체가 아니었다. 주문모 신부에 의한 명도회 도입은 당시 조선 교회가 새로운 시스템을 마련한 것과 다름없었다. 기존의 전교 방식과 신자 교육 및 신앙 활동 전반에 걸친 혁신이 명도회를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명도회는 조선 교회 그 자체였다.
명도회의 출범 직후 정조의 급작스런 서거는 예상치 않게 명도회의 대성공을 도와준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은 불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신유박해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이때 뿌려진 명도회의 사랑방 공동체 모임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 순교 이후 세례와 성사를 줄 신부도 부재한 캄캄한 암흑의 상황에서도 명도회는 초기 교회 이래로 이어져 내려온 평신도에 의한 풀뿌리 교회의 전통을 굳건하게 이어갔다. 제대로 된 교리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었던 새 신자들은 박해의 폐허에서 살아남은 명도회 출신 회원에 의해 교리 교육을 이어갈 수 있었고, 조선 교회는 이들의 헌신 위에서 재건의 토대를 다시 쌓아 나갔다.
명도회는 초기 교회에서 중간 지도자층을 길러내는 엘리트 신자 양성소의 역할을 했다. 그 기간이 길지 않았음에도 명도회의 훈련 과정을 거쳐 수많은 추수하는 일꾼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점에서 주문모 신부가 중국 명도회의 시스템을 조선 교회에 도입하고 1년 만에 순교의 길을 떠났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주 신부는 처음부터 미구에 닥쳐올 자신의 죽음에 대비해 조선 교회에 자생의 방도를 마련해 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때 극적으로 불타올랐던 신앙의 행동과 기억들이 이후 조선의 지하 교회가 극악한 탄압을 버텨내게 만든 힘이 되었고, 당시에 습득한 방법들이 교회의 재건에 힘을 실어 주었기 때문이다.
- 복자 이경언 바오로.
명도회와 「주교요지」
명도회는 입회 과정과 절차 및 회원 관리가 대단히 엄격했고, 교육의 시스템도 합리적이고 효율적이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간과치 못할 점은 대부분의 회원이 여성이고 하층민이었던 만큼 명도회 회원들에 대한 교육 시스템을 어떻게 장착했느냐의 문제이다.
이 지점에서 초대 명도회장 정약종과 그가 집필한 교리서 「주교요지」에 눈길이 간다. 정약종은 이 책의 원고를 언제 탈고했을까? 정약종은 아버지 정재원과 신앙 문제로 극심한 갈등을 겪은 끝에 1791년 마재를 떠나 광주 분원 쪽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했다. 정약종의 분원 집은 1798년과 1799년 서울을 벗어나 지내던 주문모 신부가 들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 1799년 정약종이 서울 문영인의 집에 두 달간 머물러 있을 때에도 명도회 설립에 대한 논의가 오갔을 것이다.
일반 신자나 비신자를 대상으로 천주교의 교리를 전하려면, 기준으로 삼을만한 쉽게 쓴 한글 교리서가 무엇보다 요긴했다. 「주교요지」는 아주 쉬운 문답체의 한글 저술이어서 주문모 신부의 마음에 꼭 들었던 것 같다. 「황사영 백서」에서는, “일찍이 교우 중의 어리석은 자를 위해 동국의 한글로 「주교요지」 2권을 지었다. 성교(聖敎)의 여러 책에서 널리 채록하여 자기의 견해를 보태 지극히 명백하게 하기에 힘썼다.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이 또한 능히 책을 펴면 분명하게 알아서 하나도 의심을 품을 곳이 없었다. 본국 실정에 꼭 맞기가 「성세추요(盛世芻)」 보다 더 나았으므로, 신부가 이를 인가하였다”고 썼다.
책을 지은 때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명도회가 설립되던 시점에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주문모 신부는 이 책을 보고 중국 선교사 풍병정(馮秉正, 1669∼1748)이 쓴 교리서 「성세추요」보다 더 낫다고 인가했고, 이를 토대로 정약종을 명도회 회장에 임명했던 것이다. 이에 고무된 정약종은 이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김건순 요사팟과 함께 서학서의 요점을 종합적으로 간추린 「성교전서(聖敎全書)」의 대기획을 야심 차게 진행하기까지 했다. 다만 이 작업은 절반이 채 못 끝난 상태에서 신유박해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바람에 미완의 기획에 그치고 말았다.
당시는 형제인 정약전, 정약용과 이승훈 등 초기 교회의 핵심 집행부들이 속속 이탈한 상황이었다. 당시 총회장으로 교계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던 최창현이 가장 높여 우러르는 사람으로 정약종을 꼽았으리만치 그는 교계 내부의 신망이 높았다. 정약종은 1799년 교회를 대표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낸 편지를 직접 작성한 당사자이기도 했다. 정약종이 작성한 편지는 이존창의 지시에 따라 김유산을 통해 북경 교회에 전달되었고, 답장까지 받았다.
이경언이 명도회원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1801년의 신유박해는 명도회 회장단과 각처 지회를 이끌던 열성 회원 그룹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그래도 명도회의 명맥과 전통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경언(1792∼1827) 바오로는 이경도 가롤로와 이순이 루갈다의 막냇동생으로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에는 고작 9세의 어린이였다.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는 1827년 정해 박해 당시 복자 이경언이 옥중에서 명도회 회원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사형당해 죽기 며칠 전인 5월 25일 옥중에서 쓴 편지다. 달레는 이 편지를 소개하면서, “죽기 며칠 전 이경언 바오로가 명도회 회원들에게 편지 한 장을 보냈는데, 이 명도회라는 것은 천주교 활동을 위한 단체로서 그 중요한 회원 중의 하나였고, 어쩌면 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편지의 서두에서 이경언은 “36년이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중죄인인 나는 천주와 동정 성모 마리아께 버림을 받아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특별한 큰 은혜로 부름을 받았으니 이것은 나를 우리 회에 받아들이신 다음 가장 큰 은총을 쏟아주시는 우리 대주보, 죄 없이 모태에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은혜임을 의심치 않습니다”로 시작된다.
이어 그는 명도회 모든 회원들의 열성과 공로를 말하며, 자신이 명도회 회원으로 입회하고 활동했던 시간들을 성모 마리아의 은총으로 돌렸다. 천주의 섭리로 조선에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지어 몇몇 식구를 겨우 모아 놓았는데, 모진 비바람에 그 집이 다 쓰러지게 된 현재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성모님의 보호하심으로 이 집이 잘 보존되도록 기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경언은 또 두 회장과 각지의 회장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을 남겼다. 또 자기 집에 가면 지난달에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알 수 있을 것이라 하여, 당시 이경언이 명도회에서 모종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것은 회원의 보명단이나 각처의 활동 상황에 대한 기록이었을 것이다. 두 회장이라 함은 본부 육회의 회장 중 두 사람을 지칭한 것일 테고, 각 지역별로도 따로 분회 회장이 있었음도 보여준다.
또 다블뤼 주교의 「조선순교자역사비망기」에는 “북경 주교가 교리를 지도할 남녀 몇 명을 뽑으라는 지시에, 이경언은 그들을 양성하고자 매달 첫 번째 주일, 집에 모이게 한 뒤 그들에게 묵상 자료를 나눠주며 참된 신심을 기르도록 격려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 대목은 이경언 바오로가 당시 명도회를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매달 첫 번째 주일은 앞서 살핀 대로 명도회의 정기 집회일이었다. 1827년 당시 이경언은 명도회 총추회장의 직분을 맡고 있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이경언은 성인 현석문 가롤로와의 깊은 우정에 대해서도 편지에서 특별히 언급했다. 그는 황사영이 말한 명도회 육회 중 한 곳을 맡았던 현계흠의 아들이었다. 현석문 또한 아버지를 이어 명도회의 핵심에서 이경언과 함께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레는 이경언을 조선 천주교회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한 사람으로 기렸다.
여성이 주축이 된 명도회 활동
마지막으로 명도회 활동과 관련해 한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황사영은 당시 명도회 회원의 3분의 2가 여성이었다고 썼다. 그러고 보면 앞서 본 정복혜, 김연이, 윤복점 등 사학 매파 3인방이 다녔던 여러 집들은 모두 명도회의 활동과 관련된 모임 때문이었으리라는 짐작이 든다. 한신애가 자기 집 여종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려고 이합규 등을 초청해 자리를 마련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조선 교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특별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벼슬아치 집안의 부녀자들로 입교한 사람이 자못 많았다. 국법에 역적이 아닐 경우 형벌이 사족(士族)의 부녀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들은 금지하는 명령을 염려하지 않았다. 신부 또한 여기에 기대어 널리 포교하는 바탕으로 삼고자 해서 이들을 특별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그래서 교우의 대세가 모두 부녀 교우에게로 돌아갔다.”
양반의 부녀자에게는 대역부도의 죄가 아니고는 형벌을 가하지 않는 국법이 사대부가 여성들이 천주교 신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바탕이 되었고, 주문모 신부도 이 점을 적극 활용해 교회 내에서 여성들의 활동을 장려하고, 특별한 대우를 해주어 교회에서 여성 신자의 확산세가 특별히 명도회 창립 이후로 가파른 상승세를 띠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쳐 명도회의 설립과 활동에 대해 살펴보았다. 명도회는 1800년 4월에 설립되어 1년도 안 되는 기간 활동하다가 신유박해로 궤멸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렀으나, 이후로도 활동이 이어져서 신부가 없는 조선 교회가 그 빛을 유지하는데 든든한 밑바탕이 되어 주었다. 명도회라는 이름은 단순히 한때 존재했던 신심 단체의 하나로 기억해서는 안 된다. 명도회는 신부가 없었던 암흑기 조선 천주교회 그 자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