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증(愛憎)의 세월(歲月)〈18〉선악(善惡)
해마다 딸랑 한 장 걸려있는 달력을 바라보면 다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 앞에 못 다한 아쉬움의 회한과 나름대로 계획한 일을 서둘러 마무리
해야하는 조바심으로 인해 쫒기는 종종걸음 그리고 다가오는 미지의
새해에 대한 어렴풋한 소망 등 어제와 오늘 내일이 분명하게 교차하는
시간들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평소 일상적인 모임도 연말과 신년에 갖는
모임은 망년회 신년회라 이름을 붙여 특별한 모임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이중 망년회(忘年會)는 과거 식민지 시절 사용하던 표현으로 한 해(年)
를 잊는(忘) 모임(會)이란 뜻으로 한해를 보내는 송년회(送年會)라
부르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라며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나에게는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거리일 뿐 망년 송년 신년회의 의미보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한 살 더 늘어난다는 동지첨치(冬至添齒)를 맞아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태초에 조물주 야훼 하느님께서는 진흙으로 아담과 이브라는 남녀 한
쌍의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고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창조하시고
인류 최초의 낙원인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선(善)과 악(惡)을 구분하는 선악과(善惡果)나무를 심어 모든 생각과
행동의 기준으로 선악(善惡)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유로이
취사선택하도록 하였으며 판단은 창조주가 할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즉 선악의 자유로운 취사선택은 인간의 몫이며 판단은 신의 영역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선악을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탐욕스러운
인간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악을 선으로 판단하여 자행할 것이 불 보듯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브는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의 명을 어기고
사탄인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善惡果)를
따먹고 카인과 아벨 두 형제를 낳았고 이후 카인이 아벨을 살해하여
인류 최초의 악행인 살인행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사랑을
실천하여 선행善行)을 행함으로서 인간의 원죄(原罪)를 씻고 사후(死後)
에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동양철학의 근간(根幹)인 불교와 역경(易經)에서도 자비(慈悲)라는
행동 규범을 통하여 선행(善行)을 행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 적불선지가 (積不善之家) 필유
여앙(必有餘殃)이라 하여“선행을 쌓는 집안에는 자손 대대에 이르기
까지 반드시 경사(慶事)가 있고, 악행(不善)을 거듭하는 집안에는 자손
대대까지 반드시 재앙이 온다.”며 인간에게 악행을 금하고 선행을 행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겨울에는 따듯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남쪽으로 난 집에 살려면 3대가 선행(善行)을 베풀어야 한다.'
라는 말도 이런 근거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곧 선행은 신앙의 목표이며
행동규범이며 사후세계인 천국과 극락으로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
입니다. 선과 악의 사전적 정의는 선(善)은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이며 악(惡)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어긋나는 것 또는
양심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을 두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게 태어나
살아가면서 변질되어 악행을 행하기 때문에 본래의 선함을 잘 지키기
위해 몸과 마음을 수련해야 한다는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과
반대로 인간은 이기적 동물로 태어나 자기중심적 행동으로 인해 타인
에게 해악을 끼치는 악함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사회적 규범 등으로
규제하여 선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순자(荀子)의 성악설
(性惡說)이 있고 고자(告子)는 인간은 태어나면서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고 오직 성욕 식욕 등 본능만 지닌 백지상태로 태어나 교육과 환경 및
사회적 영향으로 선한 자와 악한 자로 나뉘어 선행과 악행을 거듭한다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하는 일종의 학설들이 있는데 다들
인간의 선한 행동을 위한 원초적인 노력이라는 점에서 공통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악(善惡)을 따질 겨를이 없었습니다.
인간은 태어나 교육과 사회규범을 통해 공통적으로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수오지심(羞惡之心)
그리고 사양하는 마음인 사양지심(辭讓之心)과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인 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인성(人性)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 후천적으로 교육이나 사회생활을 통하여 체득(體得)하는
것들입니다. 인간의 선악은 환경적 요인이 또한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환경적 요인은 난초(蘭草)가 있는 방에 들어가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 꽃향기가 저절로 몸에 배어들고 어물전에 오랫동안 앉아있으면
비린내가 배어드는 이치와 같습니다. 얼마 전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진범이 밝혀지면서 도대체 인간의 악행의 끝이 어디인가를 생각하며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인간의 악행과 선행의 끝이 없음은
일찍이 성서와 불경에서도 알려져 있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아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여 가족을 살해하는 극악무도한 악행을 행하였으며
석가의 제자“앙굴리말라”는 스승의 아내를 성폭행하였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격노한 스승으로부터“내일부터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죽여서 그 손가락을 잘라 꿰어 목걸이를 만들어서 100명의
손가락을 모았을 때 너의 수행은 완성될 것이다”라는 악행을
명하였는데 스승의 명령대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손가락을 잘라
모으기 시작한 앙굴리말라는 100번째의 대상이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인을 행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가 불행을 사전에
막기 위해 나선 석가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처럼 악행의
끝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어 때에
따라 부처가 되기도 하고 예수가 되기도 한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 안에 내재된 악과 싸우는 자기 성찰을 통해
자신을 정화해 나가야하겠습니다. 그것이 부처가 되고 예수가 되는
과정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나는
것이 보이지 않으나 나날이 더 늘어가며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돌이 갈리어서 닳아 없어지는 것이 보이지 않으나
나날이 더 이지러진다는 선인들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날마다 선행으로
풍성한 자신의 삶을 가꾸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뒤덮는 홍수가 일어나
모든 동물들이 짝을 지어 노아의 방주에 올랐습니다. 선(善)도 역시
노아의 방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제지로 방주에 오르지
못하였습니다. 노아의 방주에는 짝을 이루어야만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善)은 달려가 악(惡)을 데려와 방주에 오를 수 있었다는
탈무드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선은 항상 악과 함께 동행 합니다.
인간은 선악의 갈림길에서 자유로이 양자택일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선행을 선택하여 자라는 후손들이 남쪽으로 난 집에서 기거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종신행선(終身行善 : 한평생 착한 일을 행하여도) 선유부족(善猶不足 :
착한 것은 오히려 부족하고) 일일행악(一日行惡 : 단 하루를 악한 일을
행하여도) 악자유여(惡自有餘 : 악은 스스로 남음이 있느니라) 라는
말처럼 선행은 하면 할수록 부족함이 없고 악행은 단 한 번의 악행도
오랫동안 남아 자신은 물론 주위를 괴롭힌다는 말입니다. 교활한 인간은
불행이 닥치면 조상 탓 이라며 남의 탓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행은
자신이 뿌린 악행의 씨앗이 열매로 맺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겠습니다. 하찮은 악이라도 조그만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수적천석
(水滴穿石)이란 말처럼 나의 행복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명심 또 명심
해야겠습니다. 법구경(法句經)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허공도
아니요 바다도 아니요 깊은 산 바위틈에 들어 숨어도 일찍 내가 지은
악업의 재앙은 이 세상 어디서도 피할 곳 없나니”라고
Henrik Goldschmidt 덴마크 음악가 세계적인 솔로 오보이스트 이자 덴마크 왕립오케스트라 단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