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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에스라의 결심 말씀/ 에스라 7:1-8:36 요절/ 에스라 7:10 | 2023. 11. 5 | |
에스라 4강 |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지난주 우리는 1차 포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씀을 따라 중단된 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을 회복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7장 부터는 드디어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영화도 주인공이 등장할 때부터 더욱 흥미진진한 것처럼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인물입니다. 에스라는 어떤 사람이고 그의 결심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런 그를 하나님은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7장 1절에서 10절까지는 에스라를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느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이 일후는 성전 건축 완료 후 57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바사의 왕도 4대 다리오에서 6대 아닥사스다로 바뀌었습니다. 1-5절은 에스라의 족보에 대해서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도자의 권위를 먼저 그의 족보에서 찾았습니다. 에스라는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손으로 뼈대 있는 제사장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율법 학자요 제사장 이었고 왕에게 무한 신뢰를 받는 자였습니다. 학자라는 말은 율법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높은 벼슬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사 제국에 법무부 장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 2차 포로 귀환 때 약 5개월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그가 왜 대제국 바사의 장관으로 살지 않고 1500KM, 서울과 부산을 2번 왕복해야 하는 길을 걸어 예루살렘에 왔을까요?
10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율례과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서와 말라기서를 읽어보면 당시에 이스라엘은 영적 침체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전 건축만 마무리되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군사력도 강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대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말라기 1장 2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노라 하나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며 하나님께 대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포로 귀환과 성전 재건의 감격과 즐거움은 잊혀지고 이를 경험한 1세대들도 세상을 점점 떠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시 세속화되어 이방 여인들과 혼인하고 온전한 제사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고 개인주의화 되었습니다. 제사장들조차 옳은 길에서 떠나 율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말2:8)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은 큰 영적 위기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또 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과거의 수치가 반복될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런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고 놀라운 결심을 했습니다.
그의 결심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에스라는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연구한다’는 것은 원어적으로 ‘묻다, 찾다, 두드리다. 샅샅이 조사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찾기 위해서 더 간절한 심정으로 연구하고자 결심했습니다. 6절에서 그는 이미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라고 했습니다. 율법에 통달한 사람인데 무엇을 또 연구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지만 에스라는 말씀 앞에 겸손했습니다. 깊고 넓은 바다 같은, 거대한 광맥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인정하고 평생 말씀의 보화를 캐내고자 결심했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로 돌아가 ‘혁신위원회’를 조직하여 개혁운동을 열심히 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말씀을 연구하여 시냇가의 심은 나무처럼 늘 푸르고 시절을 쫓아 열매 맺는 사람이 되길 결심했습니다.
둘째로 그는 율법을 준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은 연구할 뿐 아니라 순종해야 생명을 얻고 세상을 이길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그가 이방 땅에서 고위직에 오르고 왕에게 무한 신뢰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율법을 준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연구한 말씀을 준행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스라는 당시 외식하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책망하고자 결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말씀에 준행하여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본을 보이는 삶을 살고자 결심했습니다.
셋째로, 에스라는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문제의 원인이 여호와의 율법에서 떠났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비록 성전을 재건하고 유월절도 지키지만 여호와의 율법에 견고히 서지 못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형식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에스라는 이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쳐 말씀 공동체를 회복하기를 소망했습니다. 느헤미야 8장에 보면 실제 에스라가 모든 백성앞에서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가르칩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이 울며 회개하고 초막절이 회복되며 언약 공동체를 이루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결심했다는 것은 NIV성경에 ‘devoted himself to’로 어떤 대상에 온 마음을 쏟아 부었다, 그 대상에 일생을 바치다라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말씀 연구와 준행, 그리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에스라의 결심을 축복하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에 귀하게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두운 시대에 말씀을 사랑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고자 결심하는 자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18세기 초 미국 사회는 청교도 신앙을 잃어버리고 영적, 도덕적으로 깊이 병들어 있었습니다. 특히 청년들의 방종은 극에 달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에스라와 같이 말씀에 헌신 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신학자요 철학자요 인디언 선교사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1차 대각성운동의 주역으로 크게 쓰셨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유명한 설교 "진노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 선포될 때 회중들은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가 심령이 떨리어 의자를 꽉 붙들고 말씀을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임도 하나님의 은혜로 건물이 리모델링 되고 학사 가정들도 든든히 서며 2세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외적인 성전을 세우고 사람이 있는 것에 안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캠퍼스와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말씀공동체, 제자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에스라와 같이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가르치고자 결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맨발 걷기도 결심이 필요하듯 말씀과 동행하는 삶도 구체적 결심이 필요합니다.
지난주에는 JBF들은 예배후 떡볶이 펠로우쉽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부터는 단순히 식사 펠로우쉽만 하지 않고 말씀을 암송하여 발표 하고자 방향을 잡았습니다. 식사후 차를 마실 때 저는 ‘혹시 성경암송 해온 사람 있나요?’ 반신반의하며 물었습니다. 그런데 재영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저 암송해 왔어요’하였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8절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말씀을 암송하고 요한일서 3장 18절도 암송했습니다. 재성이도 히 2:18을 암송했습니다. 아마 중간고사 기간 말씀을 붙들고 시험을 감당한 것 같습니다. JBF안에 말씀 암송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역사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우리 각자가 에스라와 같은 결심을 통해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공동체, 제자공동체를 힘써 이루어 갈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7장 11절 부터는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과 에스라의 귀환의 과정이 나옵니다. 아닥사스다는 에스라를 지도자로 하여 2차 포로귀환을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갈 때 그냥 내보낸 것이 아니라 자신과 일곱 자문관이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모은 은금도 가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제물을 사서 하나님의 성전의 제단에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또 더 드리고 싶은 것이 있으면 궁중 창고에서 내다가 드리라고 합니다. 심지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에스라가 구하면 신속히 내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모아 레위인에게 바친 예물의 합이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 은 그릇이 백 달란트, 금이 백달란트, 금잔 , 놋그릇 등이었습니다.(8:26) 금만 계산해 보아도 현 시세로 3000억 가까이나 됩니다. 또 아닥사스다는 가는 길에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물질적인 지원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으로 삼아 재판하고 율법을 모르는 자를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준행하지 않는 자는 엄하게 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읽고 있으면 이 왕이 바사 왕이 아니라 솔로몬 성전을 준비했던 다윗 왕과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아닥사스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넘치도록 드리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7:27을 보십시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에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의 성전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이방 왕을 쓰셨습니다. 오늘날 성전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요(요2:21), 주의 영이 거하시는 우리 각자의 몸이며(고전3:16), 함께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교회입니다. 우리가 주의 성전을 세상의 죄악으로 오염되지 않고 거룩하고 아름답게 되도록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8:1-14에는 2차 포로 귀환을 결심한 족장들과 함께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8장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레위인들은 제사장들을 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감당할 자들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레위인들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기에 족장들을 가비샤 지방으로 보내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레위인들 38명을 데려오고 레위인들을 도울 느디님 사람들도 220명 데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야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이제 사람도 준비되고 예물도 준비되었으니 ‘예루살렘으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에스라는 ‘모두 금식하며 기도하자’ 선포했습니다. 2차 귀환자들은 여자와 아이 포함 5천명 정도 되었습니다. 엄청난 예물을 가지고 어린 아이들도 함께 가는데 길에서 도적 때라도 만나면 낭패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안전을 위해 보병과 마병을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에 그가 왕에게 ‘우리 하나님의 손이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한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8:22)고 증거했기 있기 때문입니다. 에스라는 호위 군대를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했습니다. 에스라는 만군의 하나님만을 의지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합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여호와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귀환 길에서 보호하시며 평안히 예루살렘에 올라오게 하셨습니다.
본문에는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이 우리를 도우셨다’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에스라가 왕에게 신뢰를 얻게 된 것도, 왕이 조서를 내려 엄청난 예물을 드린 것도, 한 명도 없던 레위 사람들을 얻게 된 것도, 귀환 길을 안전히 지켜주신 것도 여호와의 선하신 손이 도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에스라는 말씀의 사람이었을 뿐 여호와의 선하신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라의 결심을 축복하시고 선하신 손으로 도우셔서 필요한 물질과 사람들을 주시고 안전을 친히 지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감동을 받아 새롭게 영적인 결심을 하고 실천하고자 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손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부모님의 허락이나 물질적인 지원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과중한 직장 업무나 돌발적인 가정사로 방해가 없어야 하기도 합니다. 동역자의 칭찬과 지원도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 결심한 자들에게 선하신 손으로 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제게는 에스라와 같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 주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원을 외적 내적으로 방해하는 것들로 인해 지속적인 헌신이 어려웠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매주 소감을 쓰고 나누고자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목요일에는 오후 출근이기에 사도팀 소감모임에서 나누는 것을 허락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매주 한편의 소감을 통해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가르치는 삶을 힘써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갈수록 개인주의화 되고 내적 성전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우리도 에스라와 같은 결심을 할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은혜가 넘치며 말씀공동체, 제자공동체를 이루는데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김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