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 독립전쟁(이하 청산리전쟁)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청산리 전쟁이 단일의 독립군부대가 치른 전투가 아니라, 홍범도부대 중심의 독립군연합부대가 군사이동을 하는 과정 중에 '총체적독립군'과 '일본군 만주토벌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벌인 크고 작은 전투를 총괄하는 개념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한편 일제의 탄압을 피해 서간도 삼원포를 떠난 서로군정서는 1920년 7월경 안도현(安圖縣)에 도착합니다. 서로군정서가 백두산 자락의 안도현으로 향한 이유는 그곳이 대삼림지대로 운신하기가 쉬웠고, 국내로도 진공(進攻)하기가 좋은 위치였기 때문입니다. 또 서로군정서는 북간도 지역의 독립군과 공동행동을 취하기 위해 안도현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서로군정서는 30여권의 군사서적을 북로군정서에 보내며 양 진영의 통합을 모색한 바 있으며, 이미 북로군정서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파견되었기 때문입니다.그 대표적인 인물로 신흥무관학교 교관 이장녕(李章寧)이 북로군정서의 참모장을 맡은 외에도 이범석, 박영희 등이 북로군정서의 교관 또는 전투원으로 청산리전쟁에 참여합니다. 또 소대장으로 청산리전쟁을 치르고 이후 중국대장정에 참여한 김훈(중국명 양림)도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김훈은 청산리전쟁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상해임정으로 파견되어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북로아군실전기(北路我軍實戰記)-김훈씨담(金勳氏談)’을 연재하며 청산리전쟁을 세상에 널리 알립니다.하지만 서로군정서가 청산리전쟁에서 합동해 싸운 부대는 북로군정서가 아니라 대한독립군을 이끌던 홍범대부대였습니다. 홍범대부대는 봉오동전투(1920년 6월)를 승리로 이끈 이후 북간도의 무장단체들과 대규모의 ‘항일군사단체’를 만들고자 백두산 인근으로 이동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안도현에서 훈련 중이던 서로군정서도 홍범대부대로부터 무기를 받아 대일항쟁에 나선 것입니다.한편 무기 공급이 지연되고 일본군에 추적당하던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청산리 지역의 백운평(白雲坪)과 천수평(泉水坪)에서 최초로 일본군과 교전을 하며 승리를 거둡니다. 하지만 일본군 주력부대와 접전한 어랑촌(漁郞村)지역의 전투에서 북로군정서가 포위공격을 당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며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 때 완루구(完樓溝)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한 홍범대의 독립군연합부대가 군사이동 중 ‘우연히’ 어랑촌 전투에 합류하면서 커다란 전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뒤 홍범도부대와 서로군정서, 흥업단(興業團) 등이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편성되고 고동하(古洞河)지역에서의 전투를 끝으로 청산리전쟁의 승리를 마무리 짓습니다.
이와 같이 청산리전쟁의 최전선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전투원으로 또는 홍범도부대와 합류해 항일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전보를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