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은 발음하기가 좀 거북한 병신년(丙申年). 어감이 주는 뜻도 있으려니 생각해 보니 ‘남에게 뒤질세라 여유 없이 삭막하게 사는 삶, 조금은 뒤돌아보기도 하며 유유자적 살라’는 것 같기도 해 새해 첫 산행지로 이만한 곳이 없을 것 같아 결정한 산이 덕유산(德裕山)입니다.
정상인 해발 1,614m 북덕유산 향적봉(香積峰)은 또 어떻습니까? ‘향기가 쌓인 봉우리’란 뜻은 더 매력적이지요. 산을 타는 사람들에겐 우리나라 3대 종주 등산로로 유명한 향적봉에서 해발 1,507m 남덕유산을 잇는 20여 km의 주능선, 일반인들에겐 무주리조트 스키장에서 리프트로 쉽게 접근하는 정상 등산과 통영대전고속도로를 달릴 때 동쪽 차장 밖으로 펼쳐지는 장쾌한 고산 능선으로 눈에 익은 산이기도 하죠.
전라도(전북)와 경상도(경남)를 아우르는 산 경계도 그렇고, 밋밋하고 완만한 육산의 풍모이면서도 남한에서 네 번째를 이루는 높이도 그런, 외유내강형 산세와 우리나라 3대 계곡으로 꼽히는 33경의 무주구천동을 안은 너른 품으로 한국의 산하 인기명산 4위에 올라 있지요.
일반 산악인들이 주로 택하는 하루 코스는 이 산의 서쪽 무주군 안성면 안성탐방지원센터에서 동엽령으로 올라 백암봉을 거쳐 중봉을 밟은 다음 힘과 시간이 되면 향적봉까지 올라 11시 방향 설천봉탐방지원센터로 내려가 리프트로, 아니면 3시 방향 된비알 길로 백련사를 거쳐 구천동으로 하산하고, 중봉에서 힘과 시간이 부치면 바로 동남쪽 오수자굴 쪽으로 에둘러 내려가 구천동 상류를 따라 백련사를 거쳐 하산합니다.
저도 이번 산행은 이 코스로 산죽산악회원들과 함께 올랐습니다. 들머리부터 눈이 쌓여 있어 아이젠을 꺼내 차고 간만에 빠각빠각 눈 밟는 소리, 기분 좋게 산행을 시작합니다. 상고대까지는 아니지만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가지마다 눈옷을 걸치고 있어 서설을 느끼기에 ‘딱’입니다. 이 눈은 아마도 작년에 내린 것들이겠지요. 낙엽으로 떨어지지 않고 용케도 가지에 말라붙은 끝이 말린 붉은 단풍잎들에 하얀 눈이 얹힌 모습도 보기 좋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가지 위에 눈을 얹은 나무들도 참 아름답습니다.
정겨움 넘치는 팔도 사투리 경연장
새해 첫 주말 눈 내린 산을 오르며 한 해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보려는 사람들이 우리 말고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돌리기 힘들게 꽁무니를 물고 나고 드는 버스에서도 짐작은 했지만 산길로 들어서니 그 행렬 또한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단체와 단체가 겹쳐 누군지도 모르면서 설경에 기분이 좋아, 또 신년 산행의 설렘 등으로 스스럼없는 말벗이 되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오릅니다. 이럴 때 가장 바빠지는 게 커플로 온 사람들이지요. 둘 사이에 누가 끼어들지 못하게 애쓰는 모습에 웃음이 터집니다.
잠시 휴식하는 장소에서는 저마다 구사하는 말씨들이 팔도 사투리 경연장 같습니다. 사투리가 심할수록 뜨거운 음료며 간식을 더 많이 권하는 것 같고요. 그럴수록 더 정겨워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추위를 빙자하며 벌써부터 막걸리 병을 따기도 합니다. 객기로 공연히 그러는 것 같아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자신은 물론 남을 난처하게 만들까 싶어서죠. 아이젠을 찼다 해도 미끄러지기 쉬운 눈길이니까요.
가끔씩 높은 나무에서 떨어져 내리는 눈덩이들이 눈가루를 뿌리며 광경이며 그러면서 후두두둑 아래 잡목 가지들을 치는 소리들이 하늘의 축복 같기도 하고, 검불 속에서 산 짐승들이 뛰쳐나오는 상황을 연상케 해 유쾌하고 스릴까지 느끼게 됩니다. 또 새해 초두라 그런지 눈을 허리까지 뒤집어 쓴 대나무 푸른 잎들이 햇살을 받아 빛나는 모습은 산신령님이 우리의 새해 새 출발을 축원하는 장식 같아 한참을 들여다보기도 합니다.
서울에서 출발한 시각들이 비슷해선지 동엽령에서 점심을 드는 사람들이 인산인해 수준입니다. 정말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니 나무 데크 전망대 난간 바로 아래 혼자 앉을 만한 공간을 확보합니다. 점심을 함께할 만한 일행들은 지금 어디에 박혔는지 일단 허기부터 때워야겠다고 배낭을 푸는 순간 아차차! 이게 웬일? 점심으로 먹을 컵라면이 안 보입니다. 까만 비닐에 싸서 뒤에 묶어뒀다 여겼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버스에 그대로 두고 왔네요. 전후좌우를 둘러봐도 우리 산악회 아는 대원들은 보이질 않습니다. 순간 뱃속에서는 꼬르륵, 주변에서 나는 음식들 냄새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듭니다.
하는 수 없이 간식용 과일도시락과 비상식을 꺼내 입에 무는 순간 저쪽에서 “승국이 형님~, 형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앞서 간 줄 알았던 내 파트너 산악회 부회장이 어떻게 용케도 저를 발견하고 주저앉은 사람들을 비집고 곁으로 들어섭니다. 내심 얼마나 반갑든지 눈물이 글썽거려지기까지 합니다. ‘세상에 굶으란 법은 없다’ 싶기도 하고요. 보온병에 넣어온 뜨거운 물로 목을 축이고 부회장이 아는 주변 사람들의 점심에서 십시일반으로 거둔 음식이 2인분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음식도 고루고루. 이런 경우 직접 하긴 뭣해도 누굴 통하면 그림도 좋고 더 후하게 인심덕을 보는 전화위복 사례랄까요?
환상적인 향적봉과 중봉 가는 길
새해 첫 산행부터 점심을 얻어먹었으니 올해 먹는 신수 얻어먹을 복은 있겠다는 억측으로 자위하며 오후 산행을 시작합니다. 햇살은 따사로워도 바람이 차 재킷에 달린 모자를 쓰고 폴라 티셔츠 목을 입 위로 끌어올리고 능선 길로 올라섭니다. 서서히 높아지는 고도. 시퍼런 물을 쏟아 부을까 중간 중간 흰 구름으로 천을 드리워놓은 듯한 짙푸른 하늘과 눈부신 태양빛에 난반사를 해대는 은백색 설산. 오늘 날씨는 정말 축복입니다.
말이 고개지 동엽령도 해발 1,320m, 예사 높이가 아니지요. 그래선지 조금 오르자마자 진행 방향 동북쪽으로 듬직하니 우뚝 버티고 선 북덕유산 고스락이, 반대쪽으론 무룡산, 삿갓봉 너머 남덕유산이 선명하고, 남쪽으로는 거창 금원산, 기백산 너머로 봉긋하게 솟은 지리산 천왕봉까지, 동쪽 가까이로는 삼봉산과 멀리로는 김천 수도산, 남동쪽으로는 가야산으로 이어지는 줄기, 오늘의 시계는 근래 보기 힘든 ‘100퍼센트 탁 트임’입니다.
요즘 등산객들 옷차림들 얼마나 원색적이고 컬러풀한지요! 빨강, 노랑, 파랑 삼원색은 물론과 초록, 보라, 주황 같은 중간색 그리고 희고 검고 회색인 무채색까지 완전 하얀 설산을 배경으로 점점이 화사한 꽃들이요, 알알이 찬란한 보석들 같습니다. 게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낀 고글이며 색안경들은 하얀 설산과 푸른 하늘을 되받아 한밤에 빛나는 맹수들의 눈 같기도, 600만 불 사나이의 초능력 안구 같기도, 외계인의 눈 같아지기도 합니다.
더 눈길을 끄는 건 요즘 부쩍 심해진 완전 복면 무장 얼굴들입니다. 체격이 작은 남자이거나 체격이 큰 여자는 각각 여자와 남자로 오인하기 좋고, 뭘 물어보고 싶어도 말을 못 알아 듣게시리 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으니 다행이랄까요, 불행이랄까요?
그리고 저마다 든 카메라 아니면 휴대폰들을 셀카봉에 끼우기도 하고 아니면 팔을 뻗어 자신을 촬영하거나 모델로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느라 야단들인 모습. 카메라 앞에 서면 자동으로 표정이 굳어지던 우리 젊었을 때와는 너무도 대조적입니다. 그때 선진국에 출장이나 어렵게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그 나라 사람들은 증명사진도 웃는 얼굴’이라며 자연스럽고 밝게 웃는 그들을 부러워했는데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부류가 돼버렸는지.
바로 밑에서 보면 이게 정상인가 싶게 봉긋한 능선 상의 첫 봉우리 해발 1,500m 백암봉에 올라섭니다. 더 탁 트이는 조망, 경치도 더 환상적입니다. 북쪽으로 살짝 다가서는 중봉과 향적봉 마루금 그 아래로 거대한 북덕유산의 웅자가 시선을 압도합니다. 동엽령에서부터 걸어온 2.2km 구간이 내려다보니 지그재그 길입니다. 오를 땐 가팔랐었는데 내려다보니 거의 평탄한 길 같습니다. 올 한 해도 이렇겠지요. 하루, 한 주가 힘들고 한 달, 한 분기가 버겁겠지만 한 해가 다할 무렵 뒤돌아보면 언제 그랬나 싶어지겠지요. 상황이란 항상 변하는 것, 그 어느 것 하나 지나가지 않는 게 없으니까요.
덕유산 능선에서 백암봉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백두대간이 이 봉우리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부터 2.1km 북쪽에 솟아 있는 덕유산 주봉 향적봉은, 그러니까 백두대간에서 살짝 벗어나 위치하고 있다는 거죠.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 우리나라 전체의 뼈대를 이루는 백두대간에서 한 구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지만 그 현장을 확인하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널따란 평지로 이루어진 백암봉을 지나면 등산로는 다시 왼쪽으로 크게 꺾어지며 평탄하게 이어지다가 중봉 자락으로 스며 오릅니다. 중턱에서부터는 고산지대라 서서히 나무도 잦아들고 풀숲지대를 이루는데 봄, 여름철이면 온갖 야생화가 피어 천상의 화원을 이룰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여기서부터는 길 양 옆으로 말뚝을 박고 동아줄을 걸어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가파른 구간은 나무 데크 계단을 설치하기도 하며 자연 생태계를 최대한 보호하고 있어 보이는데 한겨울이라 눈이 덮여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해발 1,594m인 중봉도 덕유산에 앞서 백두대간에서 벗어나 있는 거죠. 오르면서 보는 중봉 중턱에서 올려다보는 동그마니 솟은 향적봉과 중봉 고스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산이 아니라 신선 세계로 올라가는 길처럼 환상적입니다. 저 길을 따라 오르면 그대로 새파란 하늘로 쑥 올라가버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중봉에 올라보니 신기하게도 발이 땅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중봉 정상에 설치된 전망대는 등산객과 하산객들로 초만원입니다. 차가운 바람도 세차게 불어 잠시 올라만 섰다 바람이 덜한 남동쪽 사면으로 내려서버립니다. 중봉 높이는 정상 향적봉과는 불과 20m 차. ‘중봉 도착이 오후 2시가 넘으면 억지로 향적봉으로 오르지 말고 무조건 오수자굴 쪽으로 하산하라’는 산행대장의 말이 생각납니다. 지금 시각이 오후 2시 30분. 잰걸음으로라면 다녀올 수도 있겠지만 향적봉은 이미 여러 번 오른 바 있고 무엇보다 이젠 어떤 산이든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린 지 오래라 별 아쉬움 없이 남동쪽으로 에둘러 하산하는 오수자굴 방향 하산로로 내려섭니다.
오수자굴 쪽 하산 길에서 바라보는 중봉과 향적봉 마루금이 설악산 끝청에서 보는 중청과 대청 같기도 합니다. 전체 산세는 판이하지만 정상부 모습은 아주 유사한 게 신기하네요. 이 두 봉우리 사이는 천년 주목 군락을 비롯해 고지대면서도 숲을 이룬 이색지대지요. 근데 그 사이 등산로는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빽빽하게 줄을 이은 게 어릴 적 시골 흙길에서 자주 보던 개미 떼 행렬 같습니다. 자세히 보니 두 줄로, 한 줄은 중봉에서 향적봉으로 올라가고 다른 한 줄은 무주리조트에서 리프트로 올라 설천봉을 거쳐 향적봉에 오른 이들이 중봉을 거쳐 우리처럼 오수자굴 쪽으로 하산하는 이들 같습니다.
이쪽 하산로는 에둘러 내려가는 코스인데도 처음 한동안을 제외하곤 급격히 내리꽂는 된비알 길입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적설량. 앞서간 사람들이 다져놓았다지만 아이젠도 소용없을 정도로 자주 미끄러져 길 가의 나무 등걸이나 가지를 붙들고서 속도를 조정합니다. 남녀공학 고등학교 동기라는 한 커플은 서로 잡아주면서 조심하더니만 아예 포기하고 엉덩방아 미끄럼을 타면서 내려갑니다. 커서는 서로 다른 남녀와 만나 가정을 이루고 각각 학부형이 되었으면서도 만나면 저렇게 격의 없이 장난기가 동하나 봅니다.
오수자굴을 겨울에 보긴 처음입니다. 들어가도 되나?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이미 몇몇 등산객들이 들어가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굴 속 천장에서 몇 방울씩 떨어지는 암반수가 말간 얼음기둥을 형성하고 있는 게 너무나 신기하고 아름답습니다. 크고 긴 것은 중학생 키만 한데 그게 한 둘이 아니고 수십 개 작은 것까지 합치면 수백, 수천 개는 될 듯합니다. 동굴 바깥 상단에 붙은 쌓인 눈이 조금씩 녹으면서 그대로 말갛게 언 고드름들도 볼 만합니다.
구천동계곡 최상류로 내려서는 지점 멀리 앙상한 나목 우듬지에 까치집 같은 겨우살이들이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항암 효과 성분이 있다는 보도로 야산에 있는 것들은 너나 없는 남획으로 이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고 이렇게 국립공원이나 깊은 골짜기 높은 산에나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요. 혹시나 싶어 이곳도 자세한 설명은 피하고 싶어지는군요.
올 한해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각오 다져
백련사를 잠시 둘러보고 차도 다닐 만한 큰 길로 내려서자 이젠 다 왔다 싶어 모두들 아이젠을 벗습니다. 그래도 아직 눈과 얼음이 남아 있어 보여 저는 아이젠을 찬 채로 걷습니다. 길가 계곡 쪽으로 빈터가 나오고 한쪽에 남녀 한 동씩 쓰게 만든 간이화장실이 있어 용무를 보고 갈까 한 층 댓돌을 올라섭니다. 순간 미끈, 이게 뭡니까! 제가 공중으로 붕 뜨더니 꽈당! 하고 그 아래 빙판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맙니다. 자연석 댓돌인 줄 알고 밟았던 한 층이 플라스틱 모조로 그 위에 살얼음이 낀 걸 몰랐던 겁니다. 너무 충격이 커 잠시 주저앉고 말았는데 지나던 사람이 보았는지 달려와 상태를 묻습니다.
잠시 넋을 놓고 있다 다리에 힘을 주니 일어서니 일어서지기는 하는데 엉치뼈 부분이 욱신거리고 다리도 절게 됩니다. 다 왔다고 방심했던 걸까요. 신년산행에서 점치는 한 해의 운수? 액땜이랄까요? 정신이 번쩍 들며 정말 삶의 어떤 순간에도 ‘방심은 금물’이다 싶습니다. 한낮을 땀 흘려 오르고 미끄러질 구간 다 잘 타내려 와놓고선 마지막 순간 미끄러져 산통 다 깨버린다면? 올 한해 시작과 중간은 물론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각오가 절로 서집니다. 산을 잘 탄 것보다 이렇게 실수하며 교훈을 얻은 게 오히려 다행 같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병신년 새해 내내 안전 산행하시길 <hanseungguk@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