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도 사람인지라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목사에게는 용인될 수 없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하나는 이성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돈 문제다. 그래서 대부분 목사가 강제로 옷을 벗는 경우는 두 가지 범주에 속할 가능성이 크다. 교회의 공금을 사취했거나 유용 혹은 횡령하면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다. 목사가 돈을 사랑하면 그의 목회는 끝이다.
그런데 돈을 좋아하지 않는 목사도 있는가? 돈이 많으면 많은 면에서 유리하다. 편리하게 살 수도 있고, 남들에게 여유 있게 쓰면서 살 수도 있다. 교인들에게 궁색하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서 떳떳하다. 하지만 돈이 없으면 여러 면에서 아쉬울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목사도 돈을 좋아하고 때론 돈 좀 많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하지만 돈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히13: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돈이 없어도 목회를 잘 할 수 있다. 그분이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돈으로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가 전하는 말씀으로 그 가치를 증명하는 사람이다. 스불론이 아닌 유다 베들레헴에 사는 한 유다 가족에 속한 레위인 하나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레위 지파였는지 아니면 레위인이면서 유다 가족의 양자가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레위인 아닌 떠돌이처럼 살다가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이르렀다.
(삿 17:8)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삿 17:9)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미가가 시작한 우상숭배가 돈을 사랑해 변절한 레위인을 만나면서 반역의 꽃을 피우고 결국에는 단 지파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그는 처음에 그의 변절의 결론이 어디에 미칠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변절은 엄청난 살육과 파멸이라는 결말을 불러오고 있었다.
종교인이 돈을 사랑해서 마음이 변절하면 그것은 그 자신만의 파멸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지도자의 타락은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기별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온다. 오늘 사사기 17장에서는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가 어느 가문에 속했었는지, 그는 어떤 사명과 직무를 가졌었는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오늘날 종교적인 직무를 수행해야 하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거룩한 직무를 위해 구별된 레위인인 것을 망각했던 유다 베들레헴의 이름 없는 레위인처럼 우리도 오늘날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돈을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사랑하기까지 함으로 불행의 씨앗을 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이 주신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 것 아닌 것을 탐하며 세상의 저잣거리를 방황하는 이 시대의 레위인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 봐야겠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으로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마땅히 세상과 구별되어야 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돈을 사랑함으로 자신의 길에서 이탈하여 영적 변절자가 되지 않도록 오늘 아침 새 결심과 새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자족하는 마음과 돈이 아니라 사명과 거룩한 직무에 충실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삯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르신 소명을 따라서 힘써 일하는 사명 인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