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세상을 담는 마음의 그릇이 있다. 흔히들 그릇의 크기로 보지만, 그릇의 종류와 모양과 색깔로도 본다.
둥근 혹은 세모 네모의 모양이 있고, 빨간 혹은 파랑 노랑의 색깔도 있다. 모두 다 담을 수는 없겠지만, 만족할 만큼이면 됐다.
그릇의 소용은 조리條理를 따른다. 부조리와 부조화는 소용을 무無로 만들고, 깨진 그릇에 담고자 애쓰면 균형을 잃게 된다.
우리는 무엇이든 규정하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남을 규정함으로써 자기를 이롭게 하려고 간교한 머리를 쓴다. 하지만 세상은 규정되어질 수가 없다. 불가능하다.
이런 규정되어질 수 없음을 노자는 물에 비유한다. 물은 정해진 바가 없으므로 언제나 물이다. 어떤 그릇에 담더라도 물이 아닌 적이 없다.
아래로 향하니 겸손이요, 막히면 돌아가니 지혜롭다. 때론 끈기있게 바위도 뚫는다. 우리가 2017년의 화두를 군주민수(君舟民水)에서 찾았던 것도 이와같은 이치다. 물은 띄우기도 뒤집기도 하지만, 사사로움은 없고 순수하다.
이러한 물을 그릇에 담는 이유는, 잠시 쉬어가게 하려는 것이지 붙잡아두려는 것은 아닐게다. 반자反者(되돌아옴)의 원리를 노자는 가르친다.
물은 멈춤이 아니라 변화를 내포한다. 그래서 反者, 道之動(반자, 도지동)이다. 즉, 내가 무언가를 하게 되면 그것은 다시 내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릇에 취해서 물을 잊게 되면 파국을 맞는다. 그릇은 소용所用이지 물 자체가 아니며, 또한 소용은 일시적일 뿐이다. 돈과 권력과 명예에 집착하면 언젠간 반드시 뒤집힌다.
그럼에도 그릇을 필요로 하게 됨은, 물의 성질(변화)을 이해하고, 물 가운데 살게 하기(적응) 위함이다.
일부러 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시지프스의 신화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과도 같다. 폭포는 그냥 내버려둬도 되지만, 분수는 계속해서 기계를 돌려야만 한다. 끊임없이 계속해서.
우리가 자유와 평등을 찾는 것도, 물의 자유로움(자연스러움)과 공평함(사사私私로움이 없음)을 익히 배워 알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은, 이치에 따르는 자유고 이치에 맞는 평등이다.
물을 가볍게 여기거나 그릇을 함부로 다루게 되면 언제나 그것이 부메랑으로 날아든다. 그물로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물도 그릇에 가둘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법복을 입은 자, 정치를 하는 자, 재물에 취한 자, 모두가 깊이 새겨두시라!
kjm / 2021.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