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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병자와 예수님
(요한복음 5장 < 1 >)
성경말씀을 공부할 때
성경지식으로 끝나지 않게 하시고
영적으로 거듭나는 삶이 되도록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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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못에는 햇빛이나 비를 피하여
쉬도록 지붕이 있는 정자인 행각이 다섯 개가 있었습니다.
행각 안에는 가족들 조차 포기한 중증 병자들로 가득찼습니다.
이들 모두가
절박한 상황입니다. 자신의 병이
나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베데스다 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병자들은 어떻게 하든 다른 사람을
물리치고 자신이 먼저 들어가기 위해서 기를 쓸 것입니다.
만약 38년된 병자가 남보다 빨리
움직일 수 있다면 소경의 눈이 되어주고, 앉은뱅이의
발이 되어서 그들을 먼저 못에 넣어주려고 봉사 하겠습니까?
38년된 병자 자신도
그럴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물에 넣어주지 않는 것에 대해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만 없으면 내가 먼저 못에
들어갈 수 있는데'라는 마음과 남보다
먼저 들어갈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경쟁 체제에서 살아가는
세상 현실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신보다
앞서는 자에 대해서는 원망과 시기를 보이는 것이 세상입니다. '
마치 38년된 병자가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한 원인은 자신을 못에 넣어주지 않고
자기보다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핑계와 같습니다.
베데스다 못의 현장은
지금 세상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데스다 못의 병자들과 유대인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방법은
단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병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야 산다고 믿었던 사람들 앞에서
말씀만으로 38년된 병자를 나아서 걸어가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베데스다 못에 있지 않고
인생들의 삶 역시 세상에서의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예수의 말씀으로 사는 인생이 참된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1.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요한복음 5 :1-2)
양문이란
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양은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릴 때 제물로 쓰는 짐승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인 양을 끌고 올 때 양문을 통해서 양을 들여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양문 가까이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양문은 이스라엘에게는 그냥 양이
들어오는 문이 아니라 양의 희생을 보여주는 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산 민족입니다.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아니었으면 애굽과 똑같이 장자의 재앙에서 죽어야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양의 희생은 생명의 은혜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문은 어린양의 희생과 은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양문 옆에
베데스다란 못이 있는데 베데스다란 이름 역시 은혜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요한복음 5 :3-4)
베데스다 못에 있는
다섯 개의 행각들 안에는 소경과
절뚝발이들 혈기 마른 자들 등의 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의 동함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것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이든지 낫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신기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과연 하나님의 자비의 집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긍휼이 많으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기 삼십팔 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요한복음 5 :5-7)
거기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는데 병 낫기를
간절히 사모하지만 물이 동할 때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낙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 5 :8-9)
예수님께서는 38년 된 그 병자에게
"일어나라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것은
38년 동안의 투병생활을 끝내게 하시는 치료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즉시 고침을 받았고 자리에서 곧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적 능력이
나타나셨습니다.그의 말씀의 능력은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던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하십니다.
2.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한대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요한복음 5 :10-13)
안식일에 짐을 지는 것은 성경에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영업과 관계된 운반을 금지시킨 것이고,
부득이한 휴대품을 운반하는 것까지 금지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바리새인들은, 머리털을 쪼개 듯이
번쇄하게 사람들의 행동을 정죄하는 일에 율법을 오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병자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는 것 조차 정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불쌍한
병자의 고침 받은 반가운 사실은
묵살하고,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게 한 사실만을 추궁하였습니다.
그들은 죽을 사람을 살린 긍휼보다, 사람들의
헛된 유전을 중대시 하였으며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사람을 헛되이 정죄하여 죽이는 것을 유쾌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병자를
고치신 뒤에, 많은 병자들이 고침 받기를
원하여 예수님께로 모여들 우려가 있어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 고쳐 주심보다 복음
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병 고침 받고
믿는 것보다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을, 예수님은 더욱 원하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말라 하시니"
(요한복음 5 :14)
예수님께서는
그 병고침 받은 자를 성전에서 만나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다시는 범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
를 핍박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아버지께서 이제
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한복음 5 :15-18)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예수님을 더욱 죽이고자 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얼마든지 유대인들과의
충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은 고의적으로
유대인들이 싫어하고 핍박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들고 나오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철저한 경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조차
불경하다는 이유로 정확하게 발음하지 않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친아버지라 하면서
하나님과 동등 되게 말하는 예수에 대해 조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정작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이유가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에 대해서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야
한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있고 그 율법을 잘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상고한다고 하면서
말씀이신 예수가 필요 없고 오히려 죽여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3.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요한복음5 :19)
아들은 아버지의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고 행한 다는 말씀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일하시는 것, 행하시는 것이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들의 일을 보는 자는 곧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일을 보는 자는 하나님의 일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봤을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알아야 아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전혀 이해
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들이 그들 앞에서 하나님의 일과 동일한
일을 한다고 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못한 것은 아들의 생김새에 대한 계시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한복음 5 :20-21)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셔서
자기의 행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이십니다.
그보다 더 큰 일도 보이시는데 그것은 영혼을 살리는 일을 가리키십니다.
아버지나 아들이나 동일하게
살리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은 자를
일으켜 살리는 것이 아버지의 일이었고 그 일을 아들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여주신 것이 38년된 비참한 처지의
병자에게 찾아오셔서 그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비참한 처지의 병자를 고쳐주심으로서, 이처럼
비참한 처지의 사람들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자신의 비참함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살리는 일을 하시는 아들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요한복음 5 :22-23)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실 수
있는 이유는 사람의 심판이 아들의 손에 맡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공경함 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들은
그가 보내신 아들을 공경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들은 그 아들도 공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베데스다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자기 병을 고칠 수 없다고 생각하며 전능하신 주님앞에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있는 어리석은 38년 된 병자를 통해
현대를 살고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이 병자가 베데스다 못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고침 받은 놀라운 사실을 보고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세상에는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계시기에 은혜의 집이 된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께 고침받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남은 생애를 힘있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생명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24. 5. 26. -샬롬- 예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