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초기의 순교 성인으로, 최초의 복음서로 알려진 '마르코의 복음서'의 저자이자 훗날 초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여겨지는 인물인 ‘성 마르코’는 신약성서 곳곳에, 예루살렘 출신으로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제자였으며 베드로의 제자로 ‘요한 마르코’라는 인물이 묘사돼 있으나 이들이 동일 인물인지는 분명치 않다고 합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에서 공경하는 성인으로, 성경에 따르면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바오로의 동료 ‘바르나바’의 조카였으며, 보편교회의 성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을 가진 장소이자 예수 승천 후 사도들과 성모 마리아가 성령 강림을 맞이한 장소가 마르코의 집 다락방이었다고 합니다. 신약에 나오는 사람 중 가장 인지도와 영향력이 큰 두 인물인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특히 으뜸 사도인 베드로가 마르코를 깊이 신임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전서 5장 13절에는 베드로가 마르코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 또한 매우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녀 역시 베드로에게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이 집안이 초기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에서 상당히 명망이 있었는지, 사도행전에 의하면 베드로가 ‘헤로데’에게 잡혀가 처형당하기 전날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이 집안이었는데, 이때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야고보와 신도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요한이라 하는 마르코'라고 그의 이름이 처음으로 직접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후 삼촌 ‘바르나바’와 사도 바오로의 제1차 선교 여행 시 통역으로서 동행하지만, 키프로스 섬까지만 동행하고 정작 본무대인 소아시아 지역에 들어가기 전에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데, 이것이 훗날 ‘바르나바’와 ‘바오로’가 갈라서는 계기가 되고 맙니다.
마르코가 무슨 이유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후 바오로가 마르코를 '팜필리아‘에서 우리를 떠나 함께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비판적 태도를 보인 것으로 미루어, 당시 젊은 청년이었던 마르코가 바오로와의 선교 여행길에 모종의 이유로 자진 이탈해 바오로에게 실망을 안겨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오로가 바르나바에게 자신들이 세운 교회를 다시 돌아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바르나바는 마르코도 다시 데려가자고 했지만, 바오로가 반대했고, 두 사람이 이 문제로 "매우 심하게 다투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로 큰 싸움이 났었다고 합니다. 바르나바는,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했다는 이유로 평판이 좋지 못하던 바오로에게 가장 든든한 동료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는데도 둘이 이렇게까지 다투었다는 것에서 이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바르나바는 마르코를 데리고 따로 ‘구브로’로 가버리고, 바오로는 ‘실라’라는 새로운 동행자를 구하게 되는데, 이후 마르코는 로마 제국 선교 당시 사도 베드로의 일행으로 동행하면서 당시 베드로에게 직접 배운 가르침을 충실히 기록하여 마르코 복음서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후에는 바르나바와 베드로의 일행으로 성실하게 활동하고 다녔고, 사도 바오로의 말년에는 둘 사이의 감정이 풀려서 바오로도 누구보다 마르코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 따르면, 바오로가 감옥에 갇혀서 고초를 당할 당시 마르코가 바울로의 곁에서 끝까지 함께하며 그를 위로해 줬다고 합니다. 바오로 역시 지금 자기 옆에 바르나바 조카 마르코도 같이 있다고 그의 안부를 신도들에게 직접 전해주면서 마르코가 풀려나면 그를 잘 받아주라는 지시를 내리며 마르코를 챙겨주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티모테오 2서’에서는 바오로가 마르코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르코가 자기의 일에 매우 도움이 되는 사람이니까 그를 데려와 달라고 티모테오에게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기록에도 불구하고 마르코가 예수님 생전에 그분의 제자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다른 복음서에서 언급하지 않는 일화가 하나 등장하는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던 날 밤 제자들이 달아났을 때 아마포를 두른 젊은이가 예수님을 따르다가 사람들이 그를 붙잡자, 아마포를 버려두고 알몸으로 도망갔다는 내용(14, 51~52)이 나옵니다. 이는, 전후 맥락으로 보아 삽입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내용으로, 교회 일부에서는 당시 마르코와 그의 어머니가 예수님의 추종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젊은 시절 마르코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와 바오로가 순교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교회를 발전시키며 초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활동하다가 이집트 현지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체포되었고, 목이 줄로 묶인 채 거리로 끌려다니다가 참살당해 순교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몇 세기가 지날 때까지 이집트에서는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일부를 보존하고 있었는데, 9세기경에 이르러 베네치아 상인들이 이를 몰래 수습하여 베네치아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는 당시 이집트에 이슬람교가 서서히 퍼져나가던 시기로, 초기 이슬람교는 우상 숭배를 크게 경계하여 타 종교의 유산이라도 우상화의 대상으로 보일 경우엔 가차 없이 파괴했는데, 상인들은 성인의 유해를 계속 이집트에 두었다가는 머지않아 훼손될 것이 확실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상인들은 무슬림들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서 유해를 돼지고기 상자에 함께 넣어 옮겼다고 하는데,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의 유해가 베네치아 공화국으로 옮겨져 산 마르코 대성당에 안치되면서, 성 마르코는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현재 베네치아의 문장에는 날개 달린 사자가 라틴어로 “평화가 당신에게 있기를! 나의 복음사가 마르코여!”라고 적힌 책을 들고 있는데, 베네치아의 전승에 따르면 성 마르코가 베네치아를 지날 때 천사가 나타나 마르코에게 위와 같이 인사하며 그의 육신이 이곳에서 안식할 것이라 예언했다고 합니다. 1968년 6월 24일 바티칸에서는 교황 ‘바오로 6세’가, 이집트에서 온 콥트 정교회 대표단에게 수 세기 동안 베네치아에 보관되어 있던 성인의 유해 일부를 인도적 차원에서 반환하였고, 이 유해는 카이로에 새로 지은 콥트 정교회 성 마르코 대성당에 옮겨져 이콘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소에 안치되었습니다.
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복음을 전할 당시, 한 구두 수선공이 신발을 고치다가 큰 상처를 입자 그가 기도하여 상처를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게 되는데, 상처가 나은 구두 수선공 ‘아니아누스’는 즉시 회심하여 그리스도교인이 되었고 이후 마르코의 뒤를 이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성화에서 그의 상징은 복음서를 지닌 날개 달린 사자로 표현되곤 하는데, 세례자 요한이 황야에서 설교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마르코 복음서에서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예술가들이 사자의 울음소리로 비유한 데서 유래하고 있으며, 날개는 에제키엘서 1장 10절의 네 개 달린 생물체에 관한 환상을 네 명의 복음사가들에게 적용하여 이해한 데서 비롯하고 있습니다. 마르코 성인은 공증인과 안경사, 유리 기구 제작자, 동물 사육자, 번역가는 물론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