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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가 열린 사람의 특성
마가복음 14:43~52
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
45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
46 그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거늘
47 곁에 서 있는 자 중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
48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49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으면서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5분 후를 알 수 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요?
이런 상상으로 만들어진 단편 영화가 있었습니다. 골동품 가게를 턴 부부 강도단의 손에 여러 물품 중에 5분 후에 될 일이 찍혀지는 카메라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가지고 경매장에서 1등을 하는 예상 마를 찾아내어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운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안에 도사리고 있는 욕심이 결국은 파국으로 치닫게 하여 많은 돈을 뒤로 한 채 그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일화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죄로 인하여 바로 코앞에 될 일을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결코 행복한 결실을 볼 수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세계는 다릅니다. 내 인생의 흐름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은 로마 총독으로부터 “당신 나이를 생각해 봐라. 인제 그만 고집 피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라”라며 만일 끝까지 예수님을 유일한 주님, 큐리오스(Κύριος)라고 고백한다면 뜨거운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폴리갑(Polycarp)은 “내가 그분을 섬기는 86년 동안 한 번도 나를 배신한 적이 없는데, 어찌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붙인 불은 기껏해야 한 시간쯤 타다가 꺼질 뿐이오. 그러나 다가올 심판의 불을 모르는구려. 왜 망설이는가? 어서 당신 맘대로 하시오”라고 담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병사들이 장작더미 위에 선 폴리갑을 못 박으려 할 때 폴리갑은 이를 만류하면서 “내가 불을 견딜 수 있게 하실 분이 역시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장작더미 위에 남아있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기둥에 묶인 폴리갑은 하늘을 우러러 큰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당신은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성령의 불멸 안에서 영과 육의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그리스도의 잔 안에서 순교자들의 숫자에 포함되는 영광을 주셨습니다. 속이지 않고 진실하신 하나님이신 당신이 미리 준비하셨고 계시하셨으며 이제 성취하실 것을 믿습니다. 부요하고 받을만하신 제물로 오늘 순교자들 가운데 나를 받아주옵소서.”
폴리갑이 죽음 앞에서 담대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가 보여준 것은 신념에 의한 것도 의리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의 영원한 미래가 주님으로 섬겼던 예수님을 통하여 보였고, 그는 이것을 믿었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주님처럼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목숨을 어설픈 의리라든가 명분을 위하여 내어주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나와 하나로 엮으므로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렘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미래’란 단순한 시간적인 현재 이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말’에 대한 의미가 더 짙게 그려진 말입니다. 내 인생의 결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대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에 그치지 않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미래가 닫힌 사람과 열린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을 살펴보므로 미래를 바르게 열어가는 지혜는 무엇인지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미래가 닫힌 사람의 특성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였던 가룟 유다는 미래가 닫힌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닫혀 있습니다. 3년 반을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전혀 그 마음에 담겨 있지 않았고 믿음이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마귀가 그 마음을 점령하였습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예수님이냐 아니면 마귀에게 이끌려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말씀이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으면 마귀에 의하여 자신의 미래가 깜깜해집니다.
오늘 말씀에는 막 14:43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곧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라는 말씀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의 같은 내용으로 간절히 기도하신 후 깊은 잠에 취해 있던 제자들을 깨우시면서 막 14:42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의 다락방에서 성찬이 시작되기 전, 가룟 유다는 그곳을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넘겨주기 위해 대제사장들과 담합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잡기 위해 ‘큰 무리’를 파송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에게는 군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을 섬기는 아랫사람들과 성전의 경비병, 그리고 장로들도 무리를 지어 따라 나섰습니다. 게다가 천부장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였습니다.
미래가 닫힌 사람은 세상에서 주어진 권세와 힘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합니다. 오직 세상에서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닫힌 사람은 악한 꾀를 자랑합니다. 요 18: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고 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었기에, 보름달이 떠서 주변은 환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등과 횃불을 준비했다는 것은 혹시 예수님이 어디에 숨으시더라도, 샅샅이 뒤져서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막 14:44 “예수를 파는 자가 이미 그들과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아 단단히 끌어 가라 하였는지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동산에 들어가자 즉시 예수께 나아가 랍비여라고 인사하면서 그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뺨이나 손에 입 맞추는 것은 당시 제자들이 그의 스승에게 애정과 존경을 표하는 통상적인 행위였습니다. 얼마나 위선적이고 가증한 행위입니까? 그간 따랐던 예수님께 애정의 표현을 예수님을 넘기는 배신의 암호로 사용하였으니 말입니다.
미래가 닫힌 사람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세상에서 주어진 권세를 자랑하며 이를 통하여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어리석어 결국은 어둠으로 결론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 의하면 가룟 유다는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왔다”라고 하며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그 밭을 피밭이라 불렀다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7장에서는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나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돈을 성소에 던져주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어 가로되 이것은 피 값이라 성전고에 넣어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이 두 기록에서 가룟 유다의 최후를 입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유다가 돈을 대제사장들에게 던져주고 목을 매어 자살한 후 그 자살한 시체를 한동안 그대로 내버려 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소문이 넘쳐나고 있는 그 시기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떨어져 창자가 쏟아져 나오는 비참한 최후와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유다의 결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미래가 열린 사람의 특성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사람은 지나온 시간에서 얻어진 경험과 다양한 기억을 소재로 미래를 예측하려 하지만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미래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비밀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 나의 미래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 주님은 그 근거를 막 14:49 “이는 성경을 이루려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예언된 말씀에 정확하게 순종하여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그동안은 예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에, 자신이 잡히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지만, 이제는 허락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8장 6절 말씀을 보면, “내가 그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예수님을 잡으러 나왔던 무리가 다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감히 그 누구도 예수님에게 손을 대어 잡을 수 없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53절 말씀처럼, 예수님은 당장에라도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열두 군단은 7만2천명입니다. 열왕기하 19장 35절 말씀을 보면, 한 천사가 앗수르 군사 18만 5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니 열두 군단의 천사는 그 힘이 엄청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예수님은 무리에게 잡히셨습니다. 이는 성경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무력으로 자신을 잡으려 한 자들을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여 스스로 잡히셨습니다. 금요일 오후 세 시가 되면, 성전에서는 수많은 유월절 양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도 바로 그때 십자가에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셔야 했습니다. 바로 그 시각을 맞추시기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무리에게 잡히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라고 한 성경도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대로 사셨고, 성경대로 잡히셨고, 성경대로 죽으셨고, 성경대로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셨기에 그의 미래가 열린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이 당장은 고통과 수치를 가져다주지만, 결코 그의 죽음을 헛되지 않고 많은 사람을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주어질 하늘과 땅의 모든 영광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미래가 열린 사람에게는 어떤 고난도 시련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이면 살아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세 번째 미래가 열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무기력한 모습으로 군사들에게 잡히셨습니다.
이를 본 제자들에 대하여 막 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마음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1-52절에서는 한 청년이 벗은 몸을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서 오다가 무리에게 잡혀서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했습니다. 여기 베 홑이불은 세마포를 말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은 이것을 잠옷으로도 사용하였습니다. 이 청년은 이미 잠자리에 들었다가 누군가로부터 겟세마네 동산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을 듣고 예수님이 걱정되어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왔다가 사람들에게 잡히니 벗은 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참 의리 없는 사람들입니다. 선생님이 잡혀가는데 자기들은 살겠다 도망가고 있습니다. 옥에도 가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던 사람들이 두려운 환경에 이르게 되자 후다닥 도망을 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님이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건을 목격하면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로 담대히 나가셨음을 기억하는 순간 그들에게 임한 성령으로 인하여 미래가 활짝 열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부활 역시 자신에게 주어질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는 말씀이 기억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면 성경의 기록이 내 것이 된다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또한,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으로 그들이 예수님을 믿으므로 예수님의 가신 길을 가고 있음을 믿었습니다.
구약에서 미래가 열린 사람들의 모습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은 17세에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의 꿈은 보통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 꾸는 일반적인 꿈과 달리 계시적이었습니다. 첫 번째 꿈은 곡식을 묶은 열한 개의 단이 요셉의 단에게 절하는 꿈이요,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이었습니다(창 37:6-11). 꿈을 두 번이나 꾼 것은 그 꿈이 확실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루실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꿈에서 나오는 ‘절하더이다’(창 37:7, 9)는 히브리어로 ‘샤하’의 ‘히트파엘 형’으로서, 이것은 ‘자발적으로 꿇어 엎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절 받는 꿈은 예사로운 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인 존경과 복종의 표시입니다. 어떤 사람이 인격, 사상, 행위 면에서 위대한 삶을 살았거나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때,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경외하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절을 하게 됩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며 국민을 감동하게 하는 통치자에게 백성들은 진심 어린 마음으로 무릎을 꿇습니다. 또한, 패자는 승자의 발 앞에 자발적으로 엎드립니다.
요셉의 꿈은 앞으로 열한 형제가 요셉에게 자발적으로 존경하고 복종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이 형제들 가운데 장자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온 세계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된다는 예고였습니다. 이렇게 미래가 열린 꿈이 있었기에 요셉은 꿈을 통해 받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의 믿음은 그가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스테반 집사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주님이심을 전하다가 동족인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아 돌로 치려 할 때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습니다. 미래가 열린 스테반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에 넘겨지면서도 자기 영혼은 하나님께 맡기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목숨을 구걸하는 초라한 영혼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소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자신에게 이뤄질 미래에 의탁하는 모습이 얼마나 장렬하고 멋집니까? 미래가 열린 사람에게 예수님의 마음이 담기고 모든 것을 풀 수 있는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에게 나의 미래를 아는 지혜를 주십니다.
계 3:7에서는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약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열린 문을 통하여 내 영혼이 잘 되고 형통한 은혜를 누리고 생명을 얻되 풍성케 하시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함께 죽고자 할 때 미래가 열려지고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와 은밀한 일대일의 관계를 유지하시며 그분의 사랑의 터치로 인하여 사랑을 느껴지게 하시면 ‘에바다’ ‘열려라’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어져 믿음의 분량이 자라도록 하시는 섬세한 손길을 멈추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