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2편]
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14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15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16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17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
18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높은 성소에서 굽어보시며 하늘에서 땅을 살펴 보셨으니
20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21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22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
23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24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25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셨사오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니이다
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28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
[설교]
어제 말씀에 이어서 오늘도 시편 102편을 묵상합니다.
어제 말씀에서 시인은 자신이 겪고 있는 여럿 고통에 의해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을 향하여 얼굴을 가리신 하나님께서 부디 자신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을 간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써, 오늘 본문은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본문 12~22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갑작스럽게 여호와를 향한 신뢰를 쏟아냅니다. 주로 시온을 건설하시고,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뭇 나라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자기 이름을 높이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이어진 둘째 부분에서는 또 다시 탄식이 시작됩니다. 본문 23~24절입니다. “그가 내 힘을 중도에 쇠약하게 하시며 내 날을 짧게 하셨도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앞서 1~11절과 달리 잠깐의 탄식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아주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쏟아냅니다. 특별히 여기서 시인은 지금 분명히 자신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중대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특히 이 표현,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중년에 데려간다는 것은 질병이든지 혹은 전쟁이든지, 지금 시인이 받고 있는 위협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간구합니다.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그러니 저를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그리고 끝으로 셋째 부분입니다. 본문 25~28절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이제 끝으로 다시금 여호와를 향한 신뢰를 쏟아냄으로 이 시를 마칩니다. 앞서 첫째 부분에서 시인은 시온을 건설하시고,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넓은 시각을 갖고, 더욱더 큰 확신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앞서 시인은 시온을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온 천지 만물입니다. 옛적에 땅의 기초를 놓으시고, 손으로 하늘을 지으신 하나님. 그런 하나님께서 이제 주의 종들의 자손을 보존하시고, 그의 후손을 주 앞에 굳세게 하실 것입니다. 찬송합니다. ‘온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굽어 살피실 것이다!’ 이러한 신뢰와 확신을 쏟아냄으로 시인은 이 시를 끝맺습니다.
이렇게 오늘 시편은 ‘신뢰’에서 시작했다가, 다시 ‘탄식’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다시 ‘신뢰’로 돌아가는 구조를 갖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기도할 때, 때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떤 삶의 어려움 속에서 울부짖다가,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쏟아져 나옵니다. 혹은 반대로 큰 확신 중에 기도하다가, 어느덧 내 속에 숨은 죄로 인해 깊이 탄식합니다. 기도란 게 본래 그렇습니다. 작심하고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이렇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는 그야말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관계는 오르락내리락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야 어떻겠습니까?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품었다가, 다음에는 죄로 인해 깊이 탄식하고, 또 그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자비로 인해 감사하고…. 이렇듯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오르락내리락하는 관계가 사실상 성경이 말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기도에는 사실상 왕도란 없습니다. 단지 우리는 기도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속 시인과 같이 우리는 늘 기도할 때 자신의 마음을 진솔하게 쏟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때는, 그 때 그 마음을 진솔하게 쏟아내십시오. 또한 반대로 삶에 여러 가지 말 못할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 때 역시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쏟아내십시오. 신뢰를 표현하든지, 탄식을 표현하든지,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언제나 기도에는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늘 진솔하게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한 가지 더,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겠습니다. 사실 신뢰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이는 불가합니다. 이때 믿는다는 게 무엇입니까? 내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정확히 누구신지를 아는 것입니다. 믿는다고는 하는데 정작 그 믿음의 대상을 모르면 어떻게 합니까? 맹신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반드시 내가 신뢰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사실이 아주 잘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에서 시인은 지속적으로 여호와를 일컬어 ‘영원하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내 힘은 쇠약하고 내 날은 짧지만,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영원하시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합니다. 나는 내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스스로 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영원하신 여호와를 의존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신뢰하는 대상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 입술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언지를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고, 또한 그분이 자기 자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아는 자들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삶에서 기도할 때, 언제나 이러한 하나님을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기도를 통해 고백함으로써, 보다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나아가, 우리 아버지와 깊은 사귐을 누리시는 복된 성도님들 되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