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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권 정조조 4
10년(병오, 1786)
○ 1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반찬수를 줄였다.
○ 의열궁(義烈宮)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봉작(封爵)된 지 60주년이 된 때문이었다.
○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을 행하였다. 재변을 그치게 할 방도에 대해 널리 묻고, 문(文)촹음(蔭)촹무(武) 백관 이하로부터 각사의 관생(官生), 위사(衛士), 액정(掖庭)에 이르기까지 생각을 써서 올리라고 하였다. 모두 직접 보고 비답을 내렸는데, 권면하는 내용을 진달한 것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일에 대해 말한 것은 묘당과 해조에 내려 품처하게 하였다. 내각 제학 오재순(吳載純) 등이 연명으로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국가의 권력을 모두 총괄하는 것이 군주의 성절(盛節)이기는 하지만 지나치면 폐단도 따르게 마련입니다. 전하께서는 독자적으로 총명에 모든 것을 맡기시어 크고 작은 일을 다 직접 처리하고 계십니다. 게다가 인재가 나오지 않아 전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음으로 해서 강학을 하면 가르치시고 일을 하면 지도만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임금의 도리는 날로 높아지고 조정의 기상은 날로 못해지게 되었습니다. 위에서도 실로 낮게 보지만 아래에서도 스스로 경시하여 묘당, 대각, 전조(銓曹), 변방의 장수, 여러 집사(執事)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히 자신의 직책을 책임지려 하지 않으니, 전하께서는 장차 누구와 더불어 천직(天職)을 다스려 나가시겠습니까."
하고, 이어 어진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자를 물리치며 관원을 임용하여 성취하도록 요구하는 방도에 대해 진달하면서,
"국가의 권력을 모두 총괄하는 실질은 여기에 있지 저기에 있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임금의 잘못을 언급하면서 권력을 모두 총괄한다는 말로 귀결시킨 것은 실로 나의 병통을 정확히 지적한 것이다. 경들이 가까운 반열의 직책에 있으면서 이렇게 훌륭한 경계를 진달하였으니, 실로 가상하다."
"근래 연경(燕京)에서 사들여온 책은 대부분 상도(常道)에서 벗어난 서적들입니다. 이단(異端)이 크게 성행하고 사설(邪說)이 유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이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바라건대 엄히 금지하소서."
하니, 따랐다.
○ 충의(忠義) 김응두(金應斗)와 내금위 신익녕(辛翊寧)을 조용하라고 명하였는데, 품은 생각이 절실하고 널리 미친 때문이었다.
○ 노인직(老人職)의 가자(加資)를 세수(歲首)에 하비하는 규정과 대소과(大小科) 회방인(回榜人)을 가자하는 규정을 정하였다. 또 잡과(雜科)도 일체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 2월. 이에 앞서 상이 직접 관왕묘(關王廟)의 비명(碑銘)을 지어 묘정(廟廷)에 세웠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비명을 분장(分章)하여 악가(樂歌)로 만들도록 명하고, 음악은 3장(章)을 쓰도록 하였다. 관왕묘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다.-영신(迎神)에는 왕재장(王在章)을 연주하고, 전폐(奠幣)와 초헌촹아헌촹종헌에는 힐향장(??章)을 연주하고, 송신(送神)에는 석가장(錫?章)을 연주한다. 악공(樂工)은 개주(介?)를 착용하고, 오방(五方)의 기치를 세운다. 악기는 중고(中鼓)가 하나, 장고(杖鼓)가 둘, 필률(??)이 둘, 대금(大?)이 둘, 태평소(太平簫)가 둘, 대금(大金)이 하나, 소금(小金)이 하나, 가(歌)가 둘, 해금(奚琴)이 둘이다.-
○ 한성부에 신칙하여 효자와 열녀 및 행실이 두드러지게 훌륭한 사람을 찾아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풍속과 교화를 돈독히 숭상하는 것은 왕정(王政)에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였다.
○ 경외에 신칙하여 시기가 지나도록 결혼하지 못하거나 장례지내지 못한 자를 찾아서 비용을 보조해주게 하였다.
○ 희릉(禧陵)과 효릉(孝陵)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전배하면서 성후(聖后)와 성조(聖祖)의 거룩한 덕과 지극한 선을 우러러 생각하였으니, 슬픔과 그리움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사판(祠版)에 치제하고, 사손(祀孫)을 조용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고 유신 김인후(金麟厚)의 계우(契遇)는 천고에 드물었던 것이라고 할 만하다. 날을 잡아 치제하고, 그 후손을 본 능의 참봉에 의망해 들이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인성왕후(仁聖王后)께서는 육순(六旬)의 수를 누리시어 선묘(宣廟) 을사년(1605) 군현(群賢)이 신원(伸寃)되던 때까지 살아계셨다. 더구나 어제가 인종(仁宗)의 탄신일이었으니, 이 날 이 능에 전배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어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의 사손을 조용(調用)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정치달(鄭致達)의 처에게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병하였다. 옥당이 상차하여 논하니, 답하기를,
"법은 법이고 은혜는 은혜이다. 시절(時節)에 맞추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질병이 있을 때 돌보아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너희들이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는 이상 나더러 하라고 권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연명으로 상차하여 논란한단 말이냐. 애석하게도 선배(先輩)들의 주차(奏箚)를 전혀 읽지 않은 모양이구나."
하였다.
○ 과장(科場)에서 글씨를 바꾸어 쓰는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상이 대신 및 시관(試官)에게 물었다. 모두들 경비만 축낼 뿐이지 부정한 짓을 막는 데는 무익하다고 하였는데,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아뢰기를,
"옛 법을 가볍게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정존겸의 말을 옳게 여겼다.
○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장씨(張氏)의 사친(私親) 봉사손(奉祀孫)이 상언(上言)하여, 집안이 가난해서 향불을 마련하지 못하니 돌보아 달라고 청하였다. 호조가 은혜를 요구하는 행위라고 하면서 그만두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先朝)에는 대빈의 사친가(私親家)에 다달이 미포(米包)를 지급하고 해마다 제수(祭需)를 지급했었다. 병신년 이후로 감파(減罷)되었던 듯하기에 다달이 지급하는 문제는 갑자기 논의하기 어렵지만, 해마다 제수를 내리는 것에는 일정한 규정이 있어야 하겠다. 저경궁(儲慶宮)과 육상궁(毓祥宮)의 사친가에 대해 복호(復戶)한 규례에 의거하여 그 반을 지급하도록 하라."
하였다. 나중에 또 대빈의 묘를 2년마다 보수하고 봄가을로 살펴볼 것과 기제(忌祭)를 묘에서 행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 3월. 용천(龍川) 신도(薪島)에 국경을 넘어와서 거주하는 중국인이 있었다. 지방관 및 진장(鎭將)이 들어가서 수색하니 초사(草舍)가 40여 곳 사람이 600여 명, 어망(漁網)과 선박이 셀 수 없을 정도였는데, 불을 놓아 태우고 모여 사는 사람들을 내쫓았다. 감사가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니, 상이, 조정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불태웠다고 하여 감사, 수신(帥臣), 읍진(邑鎭)의 신하에게 죄를 주었다. 하교하기를,
"국가에 기강이 서면 변방의 금령은 엄하게 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엄해질 것인데, 지금 단지 우리쪽의 힘이 강하다는 것만 믿고서 일시적으로 보고 듣기에 통쾌하도록 하는 데만 힘을 썼다. 지나가는 곳에는 개 돼지도 남아 있지 않게 하여 수백 명의 상인으로 하여금 발을 구르며 달아나 숨게 만들었으니, 충신(忠信)의 가르침이 어찌 이와 같겠는가."
하고, 한 달에 세 차례 수색하여 토벌하는 규례를 다시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 경외(京外)에서 수직(壽職)으로 가자(加資)된 사람 가운데 100세가 넘은 사람은 모두 가설(加設)한 동지중추부사에 단부하도록 명하고,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은 당해 도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지급하게 하였다.
○ 지중추부사 강항(姜杭)을 불러 보았는데, 과거에 합격한 지 60주년이 된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대과(大科)의 회방(回榜)은 무척 드문 일이다. 더구나 과명(科名)이 바로 선조(先朝)께서 등극하신 후 처음 설행한 식년(式年) 방목(榜目)이었으니, 슬픈 감회를 어찌 금할 수 있겠는가. 모레가 마침 식년시에 새로 합격한 사람들의 사은(謝恩)을 받는 날이니, 삼가 숙묘조에 회방을 맞았던 고 판서 이광적(李光迪)의 고사를 따라 화모(花帽)와 공복(公服) 차림으로 와서 사은하게 하고, 호조에서 쌀과 베를 하사하라."
하였다. 사은함에 미쳐서 상이, 숙묘가 이광적(李光迪)에게 하사했던 어제시(御製詩)의 운(韻)에 차운하고, 각신에게 명해서 소리내어 읽어 주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 뜻은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고 옛 방목을 생각하고자 하는 데 있으며, 또한 계술(繼述)하려는 뜻을 붙인 것이다."
하고, 또 내구마(內廐馬)촹내취(內吹)촹무동(舞童)촹일산(日傘)을 하사하였다. 상이 말을 청하는 뜻으로 영외(嶺外)의 인재에 대해 묻자, 강항이 아뢰기를,
"안동(安東)의 인사 유규(柳)는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의 손자인데, 지조와 행실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감사에게 명하여 사실인지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고, 유규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 4월. 서부(西部) 옹막리(甕幕里)에 화재가 나서 가옥 340여 채가 불탔다. 보고하는 일을 지체하였다 하여 특별히 한성부윤을 추고하고, 김계락(金啓洛)을 위유어사(慰諭御史)로 삼아 보내어 하유하기를,
"옛날에 하내(河內)에 불이 나자 한 무제(漢武帝)가 급암(汲?)으로 하여금 부신(符信)을 가지고 가서 살펴보게 하였는데, 급암이 편리한 대로 창고를 열어 진대하였으므로 한 무제가 가상하게 여겼었다. 급암은 일개 사신에 지나지 않는데도 오히려 그 직임을 저버리지 않았으니, 임금된 자가 어떻게 한 사람의 지아비나 지어미라도 살 곳을 잃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방역(坊役)을 3년간 면제해줄 것과 호조에서 재목(材木)을 보조해줄 것과 진휼청에서 쌀과 돈을 넉넉히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또 어사에게 명하여 팔강(八江)을 돌아다니면서 고충을 물어 오게 하였다.
○ 고(故) 궁인(宮人) 묵세(墨世)가 살았던 옛 동네에 정표하게 하였는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굳센 절
○ 특별히 여제(?祭)를 설행하도록 명하였는데, 홍진(紅疹)이 크게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 크게 유행하는 외방 고을에서도 일체 기도할 것을 명하였다.
○ 처음에 상이 경외의 해골을 묻어주도록 명했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오부(五部)에서 거두어 묻기를 부지런히 하지 않았다 하여 당해 관원을 엄히 문책하고, 하교하기를,
"미관 말직에 있는 관원이 남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반드시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고 선유(先儒)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런 부관(部官)에게 어떻게 앞으로 백리(百里)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비변사의 낭관과 선전관을 보내어 살펴 보고하게 하였다. 또 누차 여러 도의 감사와 지방관에게 신칙하는 하교를 내려 읍진(邑鎭)의 근만(勤慢)을 성적으로 매겨 보고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이 끝났는데, 경외에서 해골을 묻어준 것이 모두 37만 979군데였다. -진휼청에서 회감(會減)한 각곡(各穀)이 1344곡, 목면이 20필, 베가 193필, 돈이 1만 7538민(緡)이었다.-
○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조종조에는 백성을 보호해주고 돌보아주는 정사에 최선을 다하였다. 전의감(典醫監)을 설치하고 또 혜민서와 활인서를 설치하여 병이 나면 진찰하여 구제하고 약제를 지급하여 도와주었는바, 혜택을 베풀어 소생시키는 은혜가 빈궁한 자에게 먼저 미치고 장수를 누리는 교화가 온나라에 미쳤었다.
근래에 듣건대, 홍진이 크게 번진데다 치료하는 방법마저 잘 모르는 어두운 탓으로 치료할 시기를 놓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근심이 없지 않다고 한다.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하소연할 곳조차 없는 가난한 선비와 궁한 백성들을 그 누가 구제할 것인가. 생각하노라면 그러한 광경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한성부로 하여금 동네마다 타일러서 약물을 스스로 마련하지 못하는 자는 의사(醫司)에 가서 고하게 하고, 의사에서는 병을 진찰하고 약을 지급한 다음에 5일에 한 번씩 보고하게 하라.
지금 이 하교는 오로지 백성을 구휼하신 열성조의 거룩한 덕을 계술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로 인해서 한 명의 지아비나 지어미라도 살아날 수 있다면 품어주고 보호해주는 데 한 가지 도움은 될 것이다. 유사로 하여금 착실히 뜻을 받들어 거행하게 하라."
하고, 내제(內劑)인 안신원(安神元) 2만 9000환(丸)을 대궐 안팎의 각처에 내려주었으며, 또 2000환을 양의사(兩醫司)에 나누어주었다. 하교하기를,
"백성들에게 두루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대개 작은 양에 불과하더라도 골고루 나누려는 뜻이다."
하였다. 또 홍진을 앓는 사람들이 대부분 피직(皮稷)촹메밀 따위를 먹는다고 해서 사복시로 하여금 수송하게 하였다. 전의감과 혜민서 제조를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홍진이 발생하는 원인은 전적으로 중운(中運)의 객기(客氣) 때문이다. 옛날 의술에 정통했던 의원 가운데에는 반드시 운기(運氣)를 먼저 살펴 홍진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통행될 처방을 만들어 앞으로의 쓰임에 대비한 자가 있었고, 발생한 후에 세운(歲運)을 살피고 시후(時候)를 참고하여 한 가지 처방을 내어 만백성에게 돌려보인 자도 있었다. 지금이라고 어찌 유독 이러한 사람이 없겠는가. 만약 성심을 다해 널리 찾아서 증상에 맞는 좋은 처방을 얻어 《두진방(痘疹方)》과 《구황전서(救荒全書)》를 인쇄한 옛 규례를 그대로 따름으로써 과연 중생들을 널리 구제하는 효과가 있다면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옛날에는 없어진 책을 찾으면서 그 책을 바친 사람에게 관직을 제수한 일이 있었다. 실로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좋은 처방을 구해서 시행하여 분명한 효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 공을 어찌 없어진 책을 가지고 와서 바치는 것에 견주겠는가."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여러 도에서 통용될 만한 의방(醫方)을 올리니, 가장 훌륭한 것들을 뽑아서 중외에 반포해 보이도록 명하였는데, 6월에 이르러 홍진이 점차 수그러들었다. 양의사가 치료한 병든 백성의 수가 남녀를 합해 8149명이었다.
○ 《갱장록(羹墻錄)》이 완성되었다. 처음에 영종이 재신(宰臣) 이세근(李世瑾)에게 명하여 성조(聖朝)의 《갱장록》을 편찬해서 올리게 하였으니, 바로 순(舜)이 늘 요(堯) 임금을 본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하교하기를,
하고, 대신 이복원(李福源)에게 명하여 그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책이 완성되어 올렸는데, 그 조목이 20가지로, 창업(創業), 경천(敬天), 독효(篤孝), 치곤(治梱), 유곤(裕昆), 돈친(敦親), 전학(典學) -회덕량(恢德量)이 첨부되었음-, 내간(來諫), 용인(用人), 근민(勤民) -권농상(勸農桑)이 첨부되었음-, 비사(毖祀) -예전대(禮前代)가 첨부되었음-, 정제(定制), 우문(右文) -척이단(斥異端)이 첨부되었음-, 힐융(詰戎) -유원인(柔遠人)이 첨부되었음 -, 화속(化俗) - 변숙특(辯淑慝)이 첨부되었음-, 무공(懋功), 휼형(恤刑), 이재(理財) -숭절검(崇節儉)이 첨부되었음-, 접하(接下), 건중(建中)이었다.
○ 5월. 왕세자가 세상을 떠났다. 복제(服制)를 논의하여 기년(朞年)으로 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상복 제도는, 국가의 제도에는 전하께서 재최복(齊衰服)을 1년간 입도록 되어 있지만 《상례보편(喪禮補編)》에는 전하께서 참최복(斬衰服)을 3년간 입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신과 유신에게 문의 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정존겸(鄭存謙)이 의논드리기를,
"재최복을 1년간 입는 것이 이미 국가의 제도이고 또 무신년(영조 4, 1728)에 이미 거행한 전례(典例)가 있는 만큼 예로 볼 때 응당 이를 따라야 할 듯합니다. 《상례보편》을 편집할 때에 두루 하문하는 조처가 있기까지 하였으나 논의하는 자들이 모두 어렵게 여겼습니다. 신은 감히 단정지어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였고, 판중추부사 서명선(徐命善),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 판중추부사 이복원(李福源)촹김익(金?)의 논의도 이와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재최복을 1년간 입는 제도를 무신년에 이미 거행한 전례가 있기는 하지만, 그후 《보편》에 참최복을 3년간 입는 것으로 개정하였으니 지금 응당 《보편》을 따라야 하겠다. 그러나 정체(正體)의 설은 주소(註疏)에서 나와 선정(先正)이 감정(勘定)한 것인데, 수교(受敎) 중에는 원래 명백히 지적하지 않았으니, 성의(聖意)가 어디에 있는지 감히 알지 못하겠다. 정체라는 이 두 글자를 미루어 보면 의리에 관계되는 바가 매우 크다. 체부정(體不正)과 정불체(正不體)는 오늘에 있어서 모두 혐의가 없을 수 없으니, 수교를 받드는 것은 과인이 오늘날 갑자기 논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닌듯하다."
하였다.
○ 최복에 사용하는 신하들의 신발 제도를 바로잡을 것을 명하였다. 처음에 예관(禮官)이 무신년의 규례에 따라 백피화(白皮靴)를 쓰려 하였는데, 대사간 이숭호(李崇祜)가 상소하여 옳지 않다고 말하였다. 상이 대신, 유현(儒賢), 관각(館閣)의 당상에게 물은 후에 마구(麻?)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 6월. 삭녕(朔寧)과 연천(漣川)의 민가에 불이 나서 가옥 수백 채가 불탔다. 선전관을 보내어 창고를 열어 진휼하고 보리 환자곡의 상환을 감면하게 하였다.
○ 시호 및 능(陵)촹전(殿)촹궁(宮)촹원(園)촹묘(廟)촹묘(墓)의 칭호를 논의하여 정할 때 봉상시의 도제조와 제조, 대사헌, 대사간, 부제학이 일체 참석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윤시동(尹蓍東)의 말을 따른 것이다.
○ 이때 노비를 때려서 죽게 만든 자가 있었는데, 노비의 아들이 일부러 다른 사람을 무고해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그 일이 발각되게 하려 하였다. 상이 형조에 명하여 노비가 주인을 고발한 데 대한 법률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노비와 주인의 분의(分義)는 하늘과 땅처럼 준엄한 것이니, 한 번이라도 능멸하고 범하는 일이 있으면 윤리와 기강이 무너지게 된다. 우리 조정에서는 제도를 확립하는 때에 오로지 명교(名敎)를 숭상하여 기강을 부지하고 윤리를 확립하는 정사에 최선을 다해왔으니, 모든 일은 조짐이 보이는 때부터 경계해야 하고 천지의 큰
하고, 또 하교하기를,
"미천한 조례(?隷)가 관장(官長)을 알지 못하고 노복의 무리가 집주인을 두려워하지 않아 가난한 선비나 한미한 집안이 능멸과 모욕을 당하는 실정이다. 이는 지나치게 억눌러서 그 폐단이 완고함을 키우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게다가 또 분명히 정해진 율명(律名)을 애당초 개괄적으로 볼 수가 없었으니, 이 어찌 왕자(王者)가 형벌을 제정한 뜻이겠는가. 경들은 널리 법전을 참고하고 대신들에게 의논해서 일관성 있는 규례를 정하도록 하라."
하였다. 의논해서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소민(小民)은 율문(律文)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기 쉽다. 이러한 율령은 인명에 관계되는 것이니, 경들은 율문 가운데 분의를 범하거나 강상을 무시하는 것에 관계되는 조항들을 조목조목 한 통에다 적어서 방방곡곡에 반포해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도목정사에 직접 임하였다. 고 상신(相臣) 정홍순(鄭弘淳)과 고 유선(諭善) 박성원(朴聖源)의 후손을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살았을 때 예(禮)로써 부렸더라도 죽은 후에 불쌍히 여겨 구휼하지 않는다면 시종 일관 은혜로 돌보아주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 7월. 상이 일찍이 내수사에 남아있던 전포(錢布)를 호조에 지급하여 경비에 보태쓰게 했었는데, 이것을 두고 훌륭한 조처라고 말하는 연신(筵臣)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문성(李文成)이 내수사의 일에 대해 누차 진달했던 것은 실로 올바른 논의였다. 그러나 일단 혁파하고 나면 내수사에서 담당했던 온갖 비용들을 호조가 책임져야 할 것이니, 그 폐단이 필시 대동미(大同米)를 내기 이전에 방납(防納)하고 퇴짜를 놓았던 병통과 같게 될 것이다. 나는 내수사가 임금의 개인적인 재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옛말에 '천하를 위하여 재물을 지킨다.'고 하였는데, 나는 과연 아껴서 저축하고 감히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근래에 전보다 조금 여유가 생긴 것은 대개 애당초 개인적인 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휼고(補恤庫)의 비축으로 말하자면 전적으로 예기치 못한 수재나 한재를 위해서 대비한 것으로, 등극한 이후 여러 차례 흉년을 당하면서 쓰여진 적이 많았다. 그러니 선현(先賢)으로 하여금 논하게 하더라도 기필코 혁파하자는 논의를 내세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 8월. 승지 서형수(徐瀅修)가 아뢰기를,
"강동현(江東縣)에 둘레가 410자 되는 무덤이 있는데, 고로(故老)들이 단군묘(檀君墓)라고 전해왔고 유형원(柳馨遠)의 《여지지(輿地志)》에 실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감사가 수리한 후에 부근의 민호(民戶)를 영원히 수호(守護)로 정하고 고을 수령이 봄가을로 가서 살펴보게 할 것을 명하였다.
○ 근시를 보내어 민회빈(愍懷嬪)의 묘소에 제사지내고, 국내(局內)에 있는 민회빈 사친(私親)의 분묘에 벌목을 금하지 말 것과 묘소를 수리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제사를 설행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 강석기(姜碩期)의 후손을 조용하도록 하였다. 본 묘소의 보토(補土) 역사로 인해 이 명이 있은 것이었다.
○ 9월. 정릉(貞陵)에 행행하여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성대한 의식을 미처 행하지 못하다가 현묘조(顯廟朝)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의식을 거행했었다. 오늘 와서 전배(展拜)하니 추모의 감회가 더욱 깊다."
하고, 이어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 무안대군(撫安大君), 의안대군(宜安大君)의 묘지를 찾아서 아울러 치제하고, 혜신옹주(惠愼翁主)의 묘소에도 치체할 것을 명하고, 지방관을 신칙하여 그 묘소를 수리하게 하였다. 직접 제문(祭文)을 지은 후 승지를 보내어 익안대군(益安大君)의 영당(影堂)에 치제하고, 영당 및 사우
○ 호남 유생이 상언하여 충장공(忠莊公) 정본(鄭?)을 충렬사(忠烈祠)에 배향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이르기를,
"살아서는 지조를 같이하고 죽어서는 절개를 같이하였다. 두 정승과 여섯 신하는 모두 제사지내는 곳이 있는데 충장공만 지금까지 누락되어 있으니, 기리고 장려하는 조정의 뜻에 크게 어긋난다."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 각 고을에 유배된 죄수가 10명에 가까운 때에는 다른 고을로 옮겨 유배시키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10월. 거듭 복상(卜相)하여 봉조하 김치인(金致仁)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조정의 기상이 풀어졌으니, 반드시 묘당의 위에서 화합시키고 조정하도록 하라."
하니, 김치인이 선왕(先王)의 성헌(成憲)을 거울삼아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힘써 나가라는 말로 권면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오랜 시일 동안 점진적으로 힘써 나가려고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이룩하신 치화(治化)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미칠 수 없는 점이 있어서 마치 계단을 통해서 하늘에 오를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공효(功效)를 오랫동안 이룩하지 못했으니, 경과 같은 노성(老成)이 협력하고 도와야만 앞으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내가 처음에 삼대(三代)를 따라잡으려고 마음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세도(世道)와 인심이 날로 못해져서 나라일을 어떻게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당(漢唐)의 평범한 군주에 비교하더라도 오히려 부끄러울 정도이니, 한밤중에 생각하다 보면 막막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였다.
○ 12월. 은신군(恩信君) 이진(李?)으로 하여금 연령군(延齡君)의 제사를 받들게 할 것을 명하였는데, 영종의 명을 따른 것이었다.
○ 충익공(忠翼公) 김종서(金宗瑞)의 사판(祠版)이 백악산(白岳山) 기슭의 옥함(玉函)에서 노출되었는데, 그 후손이 이미 친진(親盡)된 상황이었다. 대신이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충익공이 비록 훈신(勳臣)은 아니지만 변방을 개척한 공적은 오늘날까지도 칭송되고 있다. 더구나 그의 절의(節義)는 여섯 신하에게 뒤지지 않으니, 특별히 부조(不?)하게 하라."
하고, 해조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찾아서 조용하게 하였다.
11년(정미, 1787)
○ 1월. 경기와 양남(兩南)에 기근이 들었다. 경기에 곡식 1만 8000곡, 호남에 7만 7000곡, 영남에 6만 9000곡을 지급하여 기민(饑民)에게 먹였다.
○ 왕대비에게 '명선(明宣)'이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였다. 직접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올렸으며,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2월. 원춘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순안현(順安縣) 관아에 인원왕후(仁元王后)께서 심으신 밤나무가 있는데, 단을 쌓고 문을 세우고 붉은 빛깔의 흙을 덮고 현판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선대왕의 어제(御製)는 관아 안의 소사(小舍)에 걸어 놓아 체모가 엄하지 않으니, 율원(栗園) 안에 다락집을 지어서 봉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수빈(綏嬪) 박씨(朴氏)의 가례(嘉禮)를 행하고, 궁호(宮號)를 가순(嘉順)이라고 하였다.
○ 우의정 조경(趙璥)을 새로 재상 직책에 임명하였는데, 강경하게 사양하면서 명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상이 누차 돈독히 신칙하는 글을 내렸다. 원릉(元陵)에 행행할 때에 미쳐서는 대가를 주정소(晝停所)에서 멈추고 조경을 불러 입시하게 한 다음 직접 명소(命召)를 주었다. 그런데도 조경이 물러가서는 도로 바치고 끝내 취임하지 않자 상이 교지를 내려 크게 꾸짖고 삭직시켰다. 후에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성인(聖人)은 작록을 사양할 수 있는 것을 칼날을 밟는 데 비유했으며, 추밀원(樞密院)을 사양한 것은 오직 송(宋) 나라 사마광(司馬光) 한 사람뿐이었다. 조경이 의리를 지닌 채 은거하여 지내면서 의연히 자신을 지키고 있으니, 만년의 절개는 뛰어나서 미치기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 암행어사를 나누어 보내어 삼남(三南)과 양서(兩西) 지방을 안찰하게 하고, 살펴보아야 할 백성들의 고충에 대해서 별도로 봉서(封書)를 내려 유시하였다. 진휼 정사에 대해 유시하기를,
"감사는 곡식을 아끼라고 수령을 억누르고 수령은 사람 수를 줄여서 감사에게 잘 보이려 하는 탓으로 굶주려 부황이 든 부류가 도리어 누락되어서 구덩이에 뒹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먼저 눈에 고이곤 한다. 그대들은 나의 지극한 뜻을 헤아려서 마음을 다해 자세히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 3월. 쌀값이 폭등하여 도성 백성들이 끼니를 이어가기 어려웠다. 상이 선혜청에 명하여 공물(貢物)에 대한 전포(錢布)를 쌀로 대신 지급하게 하고, 또 공미(貢米) 1만 곡을 미리 내렸으며, 또 내수사의 쌀을 내어 싼 값에 발매하게 하였다.
○ 하교하기를,
"묘정(廟庭)에 배향된 자를 공신(功臣)으로 칭한다는 것은 《오례의(五禮儀)》등 여러 책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더구나 그렇게 뛰어나고 위대한 업적이 어찌 평범한 공으로 기록된 사람보다 못한 것이겠는가. 지금부터 배향된 공신의 자손에 대해서는 녹훈(錄勳)의 규례에 따라 대대로 사면하는 법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순창군(淳昌郡)에서 삼군문(三軍門)에 바치는 지물(紙物)이 7000속(束)이나 되어서 백성들이 큰 폐를 입었다. 상이 혁파하도록 명하고, 당해 군문으로 하여금 값을 주고 사서 쓰게 하였다.
○ 좌의정 이재협(李在協)이 상에게 아뢰기를,
"고 참판 이이장(李?章)은 문학과 경술(經術), 정사와 계책으로 한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그가 수립한 우뚝한 절개는 옛사람에게도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관직을 추증하고 시호를 하사하소서."
하니, 따랐다. 얼마 있지 않아서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시호를 충정(忠正)이라 하였다.
○ 사간 이사렴(李師濂)이 등연(登筵)하여 시무(時務) 14개 조항을 진달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그대가 아부하는 세상에 살면서 속된 투식을 따르지 않고 한 번 대(臺)에 나가자마자 곧바로 소매에 넣어둔 초고(草稿)를 가지고 진달하였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고, 이사렴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인재는 옛날과 지금의 차이가 없고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인도하느냐에 달렸을 뿐이다. 대체(大體)를 취하는 자도 있고 한 가지 능력을 취하는 자도 있지만, 어진 자와 불초한 자,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가 제각기 제자리에 쓰이게 한다면 쓸 수 없는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 5월. 《문원보불(文苑??)》이 완성되었는데, 국조(國朝) 사원(詞苑)의 대찬 문자(代撰文字)를 모은 것이다. 상이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수집하게 한 후에 활자로 인쇄하여 널리 반포하였다.
○ 간성(杆城)의 진공 삼(蔘)으로써 약원에 바치는 것을 3분의 1 감해주도록 명하였는데, 승지 서정수(徐鼎修)의 말로 인하여 특별히 시행한 것이었다.
○ 6월. 비가 대단히 많이 와서 경외(京外)의 인가(人家)가 상당수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는데, 삼남 지방이 특히 심하였다. 상이 누차 각부(各部)와 각도(各道)에 신칙하는 하교를 내리는 한편 별도로 은혜로운 휼전을 베풀었다. 경기, 관동, 삼남의 보리 환자곡의 상황을 정지시키고,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근도(近道)의 농사 형편을 살피게 하였다.
○ 상이 거처하는 연실(燕室)의 도배지가 검게 변하고 기둥과 서까래가 썩자 연신이 유사로 하여금 수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열흘 이상 비가 내려 여러 도에서 수재를 보고해왔다. 가난한 백성들의 오두막집이 크게는 무너지고 작게는 비가 샐 것을 생각할 때마다 불쌍한 생각이 들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 7월. 원주(原州)의 적당(賊黨) 김동익(金東翼) 등이 요사스러운 말로 민심을 선동하였다. 의금부에서 국문하면서 다수의 사람을 체포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어리석은 백성이 유언비어에 현혹되었을 뿐이지 반역하려 한 것이 아니다. 공초에 따라 체포한다면 더욱 소란스럽게만 만들 뿐이다."
하였다. 곧이어 여러 죄수들을 본 지방으로 내려보내도록 명하고, 찰리사(察理使) 이시수(李時秀)를 파견해서 심리하여 판결하게 하였다. 상은 국문하는 죄수가 다른 사람을 끌어다가 고할 때마다 재차 삼차 캐물어 증거가 되는 자취를 명확히 알고 나야만 비로소 잡아다가 조사하도록 허락하였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걸려드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일찍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근래에 여러 차례 큰 옥사를 겪으면서 매번 크나큰 은전을 베푸는 데 힘썼던 것은, 비록 거만하고 포학한 자를 변화시키거나 법망(法網)을 없애는 정사를 보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였다.
○ 장흥부(長興府)에 큰물이 져서 민가 180여 채가 떠내려가거나 무너지고 60여 명의 사람이 빠져 죽었다. 상이, 빨리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사를 엄중히 추고하고, 문신 비변사 낭관을 파견하여 위유하고 병폐를 물었으며, 환자곡의 상환을 탕감하고 조세를 견감하였다.
○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이상(李?祥)이 상소하여 삼을 무역하는 폐단에 대해서 진달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탱하기 어려운 강계 백성들의 고충에 대해서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절실하고 급박한지는 몰랐다. 그대의 상소를 촛불 밑에서 여러 차례 읽다보니 이산(離散)하고 나뒹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앞으로는 밥도 달게 먹지 못하고 잠도 편히 자지 못할 것같다."
하였다. 이어 삼을 3분의 1 감해주도록 명하고, 또 그 값을 올려주게 하였다.
○ 《논사록(論思錄)》은 바로 고 승지 기대승(奇大升)이 아뢰었던 말을 선조조(宣祖朝)에 사관에게 명해서 모아 기록하게 한 것이다. 상이 보고 하교하기를,
"훌륭한 말을 부연하여 진달하고 선류(善類)를 도와 보호한 공이 너무나도 크기에 책을 어루만지며 몇 차례 반복하여 읽었으니, 어찌 흠앙하고 감탄하는 마음을 금하겠는가. 이 책을 보는 데 빠져서 밤이 이미 깊어 초를 여러 번 바꾼 줄도 몰랐으니, 열 차례 야대(夜對)를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하겠다. 연전에 《사칠왕복원류(四七往復源流)》를 손수 추려서 《사칠속편(四七續編)》이라고 이름붙이고 수시로 펴보아 적지 않은 도움을 받았었다. 더구나 이 책이 다스림의 본체에 더욱 깊이 관련되는 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고, 치제하고 사손을 조용하도록 명하였다.
○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하였다.
○ 8월. 장진진(長津鎭)을 부(府)로 승격시켰는데, 함경도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당해 진의 면적이 400여 리나 되고 인구도 많다고 하면서 청한 때문이었다.
○ 명릉(明陵)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는데, 이날이 숙종(肅宗)의 탄신일인 때문이었다. 고양(高陽) 행궁(行宮)으로 돌아와 머물렀다. 이튿날 소녕원(昭寧園)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내고, 기임각(祈稔閣)에 나아가 벼베기하는 것을 살펴보고 술을 내려 농부를 위로하였다. 영종(英宗)의 어제시(御製詩) 칠언절구에 차운하여 게시하고, 네 고을 -양주(楊州)촹파주(坡州)촹장단(長湍)촹고양(高陽)이다.- 의 유생과 무사를 시험보였다. 다시 군원(郡園)의 사단(射壇)에 나아가 소후(小帿)를 2순(巡) 쏘아 10발을 맞히고 그 후를 고을의 관사에 보관하도록 명하였으니, 선조(先朝)의 고사를 본뜬 것이었다. 부로(父老)들을 불러 본 후에 특별히 양주와 고양 두 고을의 묵은 환자곡의 상환을 감해주었으며, 사서인 가운데 80세 된 사람은 가자하고 70세 된 사람에게는 음식을 하사하였다.
○ 어떤 시골 백성이 몰래 종각(鐘閣)에 들어가 종을 쳐서 원통함을 호소하였는데, 유사가 조사하여 다스리기를 청하였다. 상이 용서해주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옛날에는 모두 세 곳에 종을 설치했으니, 첫째가 광화문, 둘째가 누가(樓街) -즉 지금의 종각이다.-, 셋째가 종현(鍾峴)이었다. 경향의 사민(士民) 가운데 억울한 일을 당한 자는 모두 종을 치도록 허락하고, 종소리가 나면 종을 맡은 자가 아뢰도록 하였었다. 그러다가 종을 폐지한 후에는 합문(閤門)과 궐문(闕門)에 오고(午鼓)를 두어 첩종(疊鐘)을 대신하였다. 과거 선조(先朝)에 오고를 친 자가 있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때 처분하신 하교를 나도 우러러 들었었다. 지금 이렇게 종을 친 일은 예(禮)를 아끼는 뜻으로 보면 변상(變常)으로 논해서는 안된다."
하였다.
○ 내각(內閣)에서 어제(御製)를 편차(編次)하여 올렸는데 모두 60책이었다. 상이 가다듬고 편집한 고 직제학 정지검(鄭志儉)의 노고를 생각하여 내각의 관속(官屬)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이어 영종조의 어제를 편차한 신하들을 생각하여 고 봉조하 이철보(李喆輔)촹원경하(元景夏), 고 판서 조명리(趙明履)에게 치제하고, 능은군(綾恩君) 구윤명(具允明)에게 옷감과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 상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세상에서 경학(經學)에 밝은 자를 보기 힘든 것은 사장(詞章)의 학문이 해를 끼친 때문이다. 나는 이별하는 사람에게 주거나 기쁨을 기록하거나 옛날을 회상하는 때말고는 일찍이 함부로 시를 읊은 적이 없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봉모당(奉謨堂)에 소장된 선대왕의 신장(宸章)이 수천 첩(帖)에 가깝지만 지엽적인 자구(字句)에 뜻을 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때때로 글을 지을 적에 마음이 문사(文辭)에 끌리는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하니, 이것은 선대왕의 크나큰 계책에 내가 절대로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다."
하였다.
○ 금문단절목(禁紋緞節目)을 인쇄하여 반포하였다. 이에 앞서 영묘(英廟) 병인년(1746)에 문단을 금하는 영이 있었으나 그 후에 점차 해이해지고 말았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거듭 금한 것이었다.
○ 상림(上林)의 벼가 익었으므로 소사(小?)에 나아가 관예(觀刈)하였다.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관예는 흥미있는 일인데도 오래 앉았으니 피곤함을 느끼겠다. 그런데 직접 추수하는 사람은 어떻겠으며, 여름에 땀흘리며 김매는 사람은 어떻겠는가."
"비를 맞으면서 일하는 노고를 생각하면 어떻게 한 알이라도 땅에 남겨둘 수 있겠는가."
하였다.
○ 11월. 하교하기를,
"추위가 몰아쳐서 무명 옷고름이 꺾일 정도이니, 갖옷을 껴입고 화로를 낀 채 따뜻한 아랫목 깊이 들어앉아 있어도 오히려 매서운 바람이 염려스럽다. 숙위(宿衛)하는 군사가 추위에 얼 것이 염려되어 특별히 살펴보게 했더니 과연 솜옷으로 몸을 가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겹옷을 입고 있는 자가 있었다. 이래서야 갑작스럽게 동사할 염려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어 극한(極寒) 때에는 입직한 병조 당상이 옷을 얇게 입은 숙위 군사가 있는지를 몸소 살펴본 후에 당해 군문으로 하여금 지급하게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동짓날 밤에 동룡문(銅龍門)의 입직 군사에게 팥죽을 먹였다. 하교하기를,
"향군(鄕軍)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있는 것을 늘 불쌍히 여기고 있다."
하고, 이어 고통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 12월. 덕원(德源)의 용주리(湧珠里), 경흥(慶興)의 적도(赤島)와 적지(赤池), 함흥(咸興)의 귀주동(歸州洞)에 기적비(紀蹟碑)를 세웠다. 용주리는 목조(穆祖)가 집터를 잡았던 곳이고, 적도는 익조(翼祖)가 오랑캐를 피해 숨어지냈던 곳이고, 적지는 도조(度祖)가 왕업을 일으킨 곳이고, 귀주동은 환조(桓祖)와 태조가 옛날에 살던 곳이자 정종(定宗)과 태종(太宗)이 탄생한 곳이었다. 상이 모두 직접 비문을 지었다. 하교하기를,
"선조(先朝) 을해년에 태조께서 탄생하신 회갑년을 맞이하여 친필 어제(御製)로 영흥(永興)의 흑석리(黑石里)에 비석을 세웠었다. 올해는 태종께서 탄생하신 회갑년인데 귀주의 옛 마을에 비석을 세우게 되었으니, 계술(繼述)하는 일에 꼭 들어맞는다고 하겠다."
하였다.
○ 상이 합문(閤門)의 매화를 가리키면서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중음(衆陰) 가운데 한 가닥 생의(生意)가 사랑스러우니, 버들을 꺾지 말라던 정자(程子)의 말을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사직(社稷)의 기곡제(祈穀祭)를 올려서 대사(大祀)의 대열에 넣었다. 과거에는 기곡제를 대사의 대열에 넣지 않았고, 친행(親行)이 아니면 단헌(單獻)과 소뢰(小牢)로 제사지내고 악무(樂舞)가 없게 했었다. 상이 대신에게 물어본 후에 하교하기를,
"우리 조정의 기곡은 숙묘(肅廟) 때 시작되었는데, 선조(先朝) 갑오년(1774)에 희생을 늘리라고 하교하신 것을 보면 성의(聖意)를 우러러 알 수 있다. 또 예전에 부족했던 단의(壇儀)를 지금 구비한 것은 본사(本祀)의 의식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춘추 및 납향 대제의 서계(誓戒)에 친림하는 의식이 없다가 선조에 이르러 비로소 중국의 옛 제도를 회복했었다. 시향(時享)의 의식도 오히려 그러한데 기곡 대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내년 봄 상신(上辛)의 기곡제부터 춘추(春秋) 및 납향(臘享) 대제의 의식을 사용하라."
하였다.
○ 영남 관찰사가 안동(安東) 백성 박정걸(朴丁乞)의 옥안(獄案)을 가지고 아뢰었는데, 박정길이 소 한 마리를 놓고 다투다가 사람을 때려 죽게 만들자 그의 처 김 여인이 남편이 감옥에 들어간 것을 슬퍼하다가 마침내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판부하기를,
"제영(??)이 상서(上書)하자 태창(太倉)이 형을 받지 않았고 길분(吉?)이 대신 갇히자 원향(原鄕)이 죽음을 면하였다. 부자(父子)와 부부(夫婦)는 모두 삼강(三綱)에 속하는 것이다. 지금 김 여인의 일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양심에서 함께 나온 것인데, 맹세코 자신의 몸을 바치면서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제영이나 길분보다 도리어 더 훌륭하다. 어찌 차마 열녀의 지아비를 상명(償命)하게 해서 곧고 의로운 혼백이 구천(九泉)에서 방황하며 눈물 흘리게 하겠는가. 법이 비록 가볍지는 않지만 삼강은 더욱 막중하다. 박정걸을 살려주고 김 여
하였다. 이어 지방관으로 하여금 이 처분의 뜻을 민간에 선포하게 하였다.
12년(무신, 1788)
○ 1월. 상이, 북도(北道)의 능관(陵官)인 별검(別檢)을 직장(直長)으로 개정하여 영(令)과 함께 음관(蔭官)의 자리로 만들도록 명하였다. 이는 문관(文官)이 공연히 오랫동안 근무하느라고 수고하고 참봉이 천전(遷轉)할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 이조 참판과 이조 참의는 경연관과 대사성에 통의(通擬)된 사람이 아니면 통망(通望)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옛 규례를 회복해야 한다는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2월. 상이, 교단(郊壇)의 수리와 소제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다 하여 해조에 하교하여 신칙하였다. 이어 사맹삭(四孟朔)에 예조 낭관을 파견해서 살펴보게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3월. 윤음을 내리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선대왕께서 무공(武功)을 드날려 난리를 평정하신 해와 달이다. 당시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섬찝하다. 국가의 형세가 한 가닥 머리카락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으니, 귀신같은 결단과 죽이지 않는 성무(聖武)로 연석(宴席)에서 승리를 제압함에 하늘이 돕고 사람이 따라주는 것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사납고 포악한 무리를 거두어 변화시켜 눈깜짝할 사이에 나라를 태산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겠는가. 옛 해가 돌아왔으나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니, 돌이켜 생각하며 감회에 젖는 소자의 마음으로 보면 어찌 그 충성과 수고에 보답해서 지난날 국가를 안정시킨 아름다운 공에 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가닥 힘으로 나라를 붙잡은 자로는 고 봉조하 최규서(崔奎瑞)가 있고, 한마디 말로 담판을 지은 자로는 고 대사헌 홍경보(洪景輔)와 고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있고, 동시에 순절(殉節)한 자로는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충장공(忠壯公) 남연년(南延年), 증 참판 홍림(洪霖)이 있으며, 이 밖에도 여러 훈신(勳臣)이 모두 협력하여 계책을 세우고 있는 힘을 다해서 요기(妖氣)를 소탕하였다. 영원히 보존해주겠다는 맹세가 훈적(勳籍)에 실려 있으니, 나는 그 공적을 훌륭하게 여겨 절대로 잊지 못한다. 고 봉조하 최규서,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 풍릉부원군(?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집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라. 충신을 포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명을 받들었으니, 옛날을 기념하는 측면에서 어찌 남다른 은전을 아끼겠는가. 영성군(靈城君) 박문수(朴文秀)의 집에 일체 치제하고, 홍경보와 오광운에게는 유사로 하여금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게 해서 그 충성을 빛내도록 하라. 청주(淸州) 표충사(表忠祠)는 바로 세 신하를 아울러 배향한 곳이니,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고 그 자손들을 녹용하라. 풍원부원군(?原府院君) 조현명(趙顯命)의 집에 불행하게도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공신의 집안을 대대로 용서해주는 뜻에 크게 위배된다. 적장파(嫡長派)를 사면하고 그 관직을 회복시키라. 고 영남 관찰사 황선(黃璿)은 밤낮없이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침내 영남 지방을 보전하였으므로 그의 죽음을 나라 안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슬퍼하고 있다. 그의 후손을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조용하라."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증 대사헌 이술원(李述原)의 포충사(褒忠祠)와 증 승지 신명익(愼溟翊)의 향사(鄕祠)에 아울러 사제(賜祭)하라. 훈신들의 적장가(嫡長家)에 음식물을 하사하고, 지방관 및 사민(士民)으로서 힘껏 싸우다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차등 있게 음식을 내리거나 녹휼(錄恤)하도록 하라. 출정한 장사로서 지금까지 생존해 있는 자와 창의(倡義)하여 순절한 사람 가운데 민멸되어 포상받지 못한 자를 경외로 하여금 찾아내게 하라. 그리하여 생존한 자는 가자하거나 음식물을 지급하되, 모두 본도로 하여금 잔치를 열어주고 음악을 연주하여 음식을 권하게 하
하였다. 또 좌의정 이재협(李在協)으로 하여금 훈신과 충신의 자손을 데리고 와서 대령하게 하였다. 상이 불러 보고 지필묵(紙筆墨) 및 궁자(弓子)를 하사하였다. 이재협 등이 신하들을 데리고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니,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직접 받았다. 신하들을 불러 보고 찬을 내렸으며, 어제시(御製詩)에 차운해서 올리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조(先朝)께서 만약 이때를 만났더라면 공적을 기록하고 노고에 보답하는 크나큰 은전이 어떠했겠는가. 내 마음의 감회와 슬픔을 가눌 길이 없다."
하였다.
○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의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고쳐 내렸다. 이에 앞서 상이, 일신의 위태로움을 생각하지 않고 나라를 보호한 이종성의 충성을 돌이켜 생각하여 시호를 고치도록 명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이해에 창의(倡義)하여 나아가 토벌한 공을 생각하고는 즉시 고쳐 의논할 것을 명하였다. 선시(宣諡)하는 날에는 특별히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하사하고, 직접 제문을 짓고 승지를 보내어 제사지냈다.
○ 상이 후원(後苑)에서 꽃을 감상하였다. 선인(膳人)이 뜰의 풀이 우거진 곳에서 숯을 피웠는데, 하교하기를,
"빨리 뻗어가려는 생의(生意)를 머금고 쑥쑥 자라고 있는데 어찌 차마 불길 속에 넣어서 워버린단 말인가."
하였다.
○ 연침(燕寢)에 깔아 놓은 자리가 떨어져서 연신이 여러 차례 바꾸기를 청하였는데도 따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뜰을 정리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순필(舜弼)이 병산(屛山)을 유람하고 돌아와서 동산이 매우 아름답더라고 말하자,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동산은 아름답더라도 사람의 뜻은 황폐해질 것이다.' 하였다. 지금 이 뜰은 저절로 가다듬어진 것인데 어찌 반드시 더 정리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 6월. 이때 전염병이 점차 극성을 부리고 있었다. 각 군문 및 진휼청에 명하여 가난한 자는 넉넉히 도와주어 천막을 짓게 하고 죽은 자는 별도로 휼전을 시행하게 하였으며, 자주 비변사 낭관을 보내어 살펴보고 신칙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 하교하기를,
"궁핍한 부류는 기(氣)가 허해서 병에 걸리고 병에 걸리면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백골을 묻어주는 쪽으로 돌보아주는 것이 어찌 먼저 굶주림을 구제해서 사망을 면하게 하는 실질적인 정사만 하겠는가."
하고, 별도로 부황이 든 부류를 뽑아서 몇 순배에 걸쳐 쌀을 지급하다가 전염병이 차차 가라앉으면 그만두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또 묘당에 명하여 영남과 호남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물어본 후에 별도로 굶주린 자를 구휼하고 죽은 자를 거두어 묻는 정사를 펴도록 신칙하였다.
○ 강릉(江陵)에서 공물로 바치던 엽치(獵雉)를 특별히 혁파하였다. 하교하기를,
"털끝만큼이라도 백성에게 보탬이 된다면 어공(御供)인들 어찌 구애되겠는가."
하였다.
○ 우통례 우정규(禹禎圭)가 상소하여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에 대해 진달하고, 이를 모아 만든 《경제야언(經濟野言)》이라는 책자를 올리니, 상이 특별히 현궁(弦弓)을 하사하였다. 답하기를,
"그대가 소외된 미관(微官)으로서 이렇게 40여 조항의 경륜(經綸)에 대한 말을 진달하였다. 위의 9개 조항은 모두 마음과 몸에 절실하고 긴요한 것이었으니, 체념하도록 하겠다. 제10조 이하는 묘당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회계하게 하겠다."
하였다. 이어 묘당에 하교하기를,
"복주(覆奏)하는 이외에 유(類)를 인하여 유를 찾아서 백성을 넉넉하게 하고 국가에 편리한 정책을 더욱 강구해 나간다면 미루어 시행하는 바가 광대해질 것이다. 그러면 그 효과가 뼈를 사들여서 천리마를 구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 7월. 장용영(壯勇營) 관할 구역인 가평(加平) 둔토(屯土)에 충장공(忠莊公) 홍처후(洪處厚)가 살았던 옛터가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당종(唐宗)이 위 정공(魏鄭公)의 집을 사서 돌려준 고사를 본받아야 하겠다."
하고, 본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였다.
○ 상이 연신을 소대하였다. 영묘(英廟)가 50년 동안 수립한 공적과 교화에 대해 언급하고, 이어 힘을 합해 다스리는 도리를 대신에게 요구하면서 이르기를,
"내가 10여 년 동안 오매불망 근심하며 선대왕의 고심을 우러러 체득하려 했던 생각이 조금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나의 본심은 어리석고 용렬한 군주가 되고 싶지 않은 것인데, 온갖 사변(事變)을 겪으면서 이미 10여 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다 보니 내 나이도 많아지고 말았다. 그래서 놀라움과 부끄러움에 두렵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부터 반드시 뜻과 기상을 분발하여 규모를 정립시키고자 한다. 조정의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알아서 모두 구태의연한 습속을 버리고 새로워지기를 도모하여 함께 왕실을 도울 방도를 생각하게 하고자 한다."
하였다.
○ 8월. 반수당(泮水堂) 흙 속에서 석경(石磬) 두 개를 발견했는데, 전각(篆刻)이 떨어지고 부스러져 협(夾)이라는 글자와 계축(癸丑)이라는 글자만 남아 있었다. 대사성이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경쇠에 계축이라는 관지(款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세종조에 박연(朴堧)이 만든 것인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영묘 임술년에 얻은 경쇠와 함께 장악원에 보관하게 하고, 제조 및 대사성으로 하여금 각각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였다.
○ 죄적(罪籍)에 이름이 실린 자 이외에 문관, 음관, 무관으로서 통망(通望)의 길이 막힌 사람들을 별단(別單)에 써 들이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죄를 지어 통망의 길이 막힌 사람들도 이렇게 용서해주는 마당에, 죄도 없이 한 번 벼슬이 떨어진 후 다시 임명되지 못하고 먼 시골에서 야위어 가는 자가 몇백 명이나 되는지 모르니,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하고, 먼 지방의 사람으로서 벼슬이 떨어진 자를 차차 조용하되, 망단(望單)에다 벼슬이 떨어진 지 가장 오래 된 사람이라고 주를 다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등극한 이후에 문관으로서 한 번도 모자를 써보지 못한 자가 왕왕 있어서 임금과 신하가 아직도 얼굴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전조에 신칙하는 전교를 내린 것이다."
하고, 적체된 인사(人士)를 소통시키는 정사에 대해 하문하였다. 대신 이성원(李性源) 등이 대답하기를,
"문관이 이렇게 적체된 것은 화기(和氣)를 침범하는 한 가지 일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성상의 생각이 이렇게까지 곡진하니, 저들이 반드시 모두 감격하여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일찍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소통시키고 탕척하는 것은 저들을 위로하려는 것이 아니다. 천지(天地)의 큰 덕을 생(生)이라고 하니, 겨울에 동면에 들었던 벌레가 봄이 되면 잠에서 깨어나는 것은 천시(天時)의 자연스러움이다. 더구나 사람의 부류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하였다.
○ 전 원춘도 관찰사 김재찬(金載瓚)이 상에게 아뢰기를,
"목조(穆祖)의 국구(國舅)인 천우위(千牛衛) 장사(長史) 이숙(李肅)과 돌산군부인(突山郡夫人) 정씨(鄭氏)의 묘소가 평창군(平昌郡)에 있는데, 태조께서 전지를 지급하여 본 고을 호장(戶長)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셨고, 복두(?頭)촹단령(團領)촹옥권(玉圈)촹서대(犀帶)를 하사하여 복장을 갖추고 제사를 행하게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이 병란(兵亂)을 겪는 바람에 묘소의 표지가 없어져서 근년에는 고을의 청사에서 제사를 설행
하니, 상이 별도로 사당을 세워 사판(祠版)을 봉안하고 국초의 수교(受敎)에 따라 제사를 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사제(賜祭)하고, 또 엄흥도(嚴興道)의 마을에 사제하였다.
○ 9월. 정릉(靖陵)에 행행하여 작헌례를 행하고 나서 선릉(宣陵)에 나아가 전배(展拜)하였는데, 이 해가 중종이 탄생한 해이고 선조(先朝) 때의 배알도 이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 어가가 서빙고(西氷庫) 나루 머리에 이르렀는데, 상류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 하류에 있는 선창(船艙)이 범람하여 해가 기울 때까지 건너지 못하였다. 신하들 가운데는 대가를 돌리기를 청하는 자도 있고 강가의 정자로 옮기기를 청하는 자도 있었으나 상은 모두 답하지 않았다. 우의정 채제공(蔡濟恭)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경은 어찌하여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가?"
하니, 채제공이 화난 목소리로 아뢰기를,
"대소 신하가 누구 하나 앞장서서 계책을 내놓지는 않으면서 단지 시끄럽게 떠들어대기만 하여 해가 저물 때까지 대가가 야차(野次)에서 멈추고 있도록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나라의 체모이겠습니까. 유사(有司)의 신하 및 감사와 장신(將臣)을 독책하여 수리하게 하고, 게을리하는 자는 군율로 다스리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선창의 작은 일에는 유사가 있으니, 내 어찌 번거롭게 명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가를 수행한 군병 및 광주(廣州)와 과천(果川)의 백성들이 한꺼번에 달려나가니, 잠깐 사이에 공사가 끝이 났다. 대가가 돌아오는 때에 강가에 이르러서 상이 두 고을 백성들을 불러 위유하기를,
"한 가지 은혜로운 정사도 백성에게 미치지 못했는데 백성들이 나를 부모로 여기고 자식처럼 달려나와 일하였으니, 내 마음에 실로 부끄럽다."
하였다. 이어 두 고을 백성의 환자곡에 대한 모곡(耗穀)을 면제하고 군병을 시상하고 선졸의 조세를 견감할 것을 명하였다.
○ 온릉 영(溫陵令) 최창국(崔昌國)이 상소하여, 중묘(中廟)에 배향한 박원종(朴元宗)촹성희안(成希顔)촹유순정(柳順汀)을 출향(黜享)하기를 청하였다.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는데, 대신들 중에는 신중히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출향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세 사람의 죄가 역사에 기록되고 야사(野史)에 전해져서 대부(大夫)와 나라 사람 모두가 출향을 지금까지 지체한 것을 궐전(闕典)으로 여기니, 인정(人情)이 동일한 것에서 공의(公議)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선조의 하교에 '훈신의 이름을 남겨두면서 배식(配食)을 제거하는 것은 반쯤 올렸다가 아래로 떨어뜨리는 격이니, 과거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안 될 일이다.'고 하셨다. 더구나 복위(復位)한 후에는 세 신하를 묘정에 배식하는 것으로 그쳤다. 두려운 마음은 의당 세 신하에게 있을 것인데 높고높은 곳에 계시는 신령이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성후(聖后)의 넓은 도량과 아름다운 덕으로 보면 어찌 이런 일에 마음을 쓰시겠는가. 뒤를 이은 왕의 도리에 있어서도 중흥의 업적을 중시하고 넓고 아름다운 덕을 몸받는다면 계술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없이 크나큰 성왕의 정책이 기주(記注)에 밝게 남아 있으니, 세 신하를 출향하는 일을 말도록 하라."
하였다.
○ 《동문휘고(同文彙考)》가 완성되었다. 상이, 사대문자(事大文字)가 모두 흩어졌다면서 승문원 제조 정창순(鄭昌順) 등에게 명하여 모아 편찬해서 인쇄하게 하였다.
○ 우의정 채제공이, 서북 변방의 수졸(戍卒)들에게 유의(?衣)와 지의(紙衣)를 보내는 때에 폐단이 있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우리 선대왕께서 늘 나 소자에게 타이르시기를, '엄동설한의 매서운 추위를 당하여 멀리 변방에서 파
하였다.
○ 10월. 부녀자들의 다리[?]에 대한 금령을 시행하였다. 처음에 영종조에 다리를 금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시행되지 못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우정규(禹禎圭)가 상소한 내용 중에 그 폐단을 강경하게 논한 부분이 있었다. 상이 대신에게 묻자, 신하들이 모두 금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말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대왕께서 50년 동안 이룩하신 법 가운데 위대한 것이 다섯 가지 있으니, 감필(減疋), 준천(濬川), 금주(禁酒), 호혼(互婚), 금체(禁?)이다. 앞의 두 가지는 수십 년 동안 시행되어 백성들이 보살펴주는 은택을 입고 사람들이 수재를 당하는 환란을 면하였다. 뒤의 세 가지를 잠시 시행하다가 그만둔 것은 선왕의 본뜻이 아니었다. 그러나 술을 통행시킨 것은 사전(祀典)을 중시한 때문이고 백성들의 목숨을 중히 여긴 때문이었으니, 금한 것도 성덕(聖德)이고 통행시킨 것도 성덕이었다. 호혼의 이해에 대해서는 감히 단정지어 말하지 못하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개혁해야 마땅하고 제거하기 쉬운 것으로는 다리를 들 수 있으니, 그러므로 다리를 금지하는 것은 바로 성지(聖志)를 밝히고 성렬(盛烈)을 계승하는 한 가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다리의 모양이 예경(禮經)에 보이는가, 법서(法書)에 보이는가? 그 근본을 따져보면 본래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을 묶는 모양이었던 것이 문득 머리를 무겁게 하는 장식이 되어서 앞을 다투어 과시하기 위해 크게 만들다보니 점점 값이 뛰어 올랐다. 그리하여 사치스러운 자는 가산(家産)이 기우는 것도 돌아보지 않고 가난한 자는 거의 인륜을 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폐단이 극에 달하여 구제해야만 하겠으니, 나라 안 부녀자들의 다리를 일체 없애도록 하라. 부녀자의 복식은 정치와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지금부터 사치한 데서 검소한 쪽으로 들어가고 문명으로 야만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니, 금석(金石)은 부서지더라도 이 금령은 늦추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절목을 만들어 인쇄해서 중외에 나누어주라고 명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사족(士族)의 처첩(妻妾)과 여염 부녀자들이 편체(編?)를 머리에 얹거나 제머리를 머리에 얹는 것을 일체 금지한다.
2. 다리 대신 사용하는 형식은, 낭자(娘子)의 쌍계(雙?)나 사양머리[絲陽?]는 결혼 전에 쓰는 제도여서 사용할 수 없으니, 머리를 땋아 뒤에다가 쪽을 찌고, 머리 위에 쓰는 것은 예전처럼 족두리를 사용하되, 무명으로 만든 것이나 대나무로 만든 것을 막론하고 모두 검은 천으로 겉을 싼다.
3. 이번의 이 금령은 전적으로 사치를 금하려는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대신 사용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족두리에 칠보(七寶) 따위를 여전히 수식한다면 제도를 고쳤다는 명목만 있고 검소함을 밝히는 실질은 없을 것이니, 모든 머리 장식에 금옥(金玉)촹주패(珠貝) 및 진주당계(眞珠唐?)촹진주투심(眞珠套心) 따위를 일체 금지한다.
4. 어유미(於由味)와 거두미(巨頭味)는 명부(命婦)가 항상 하고 있는 머리이지만 일반 백성들의 잔치와 혼인에 쓰는 것은 금지하지 않는다.
5. 족두리의 수식이 이미 금지하는 조목에 실려 있으니, 혼인에 쓰는 칠보 족두리를 세놓거나 세내는 것부터 먼저 금지한다. 지금 이후로 금령을 범하는 자는 수모(首母)나 여쾌(女?)를 막론하고 모두 법사(法司)로 이송해서 조율하여 정배한다. 여쾌가 잡패(雜佩)의 매매를 칭탁하면서 벌이는 가지가지 악습은 통렬히 제거해야 하는바, 옛 법을 거듭 밝혀 포도청에 회부해서 규찰하여 금지한다.
6. 상민(常民)이나 천민(賤民)의 여인으로서 길에 다닐 때 얼굴을 드러내놓는 무리 및 공사천(公私賤)은 모두 제머리를 얹는 것을 허락하되, 다리를 붙이거나 얹는 제도는 각별히 금지한다. 각 궁방의 무수리촹의녀촹침선비(針線婢)와 각 영읍(營邑)의 기녀들은 제머리를 머리 위에 얹고 가리마를 덮어 등위(等威)를 구별하는 뜻을 보이는데, 내의녀는 그대로 모단(冒緞)을 사용하고 나머지는 검은 삼승포(三升布)를 사용한다.
7. 서울은 동짓날을 기한으로 하고, 외방은 동짓날에 맞추어 관문(關文)을 발송해서 관문이 도착한 뒤 20일을 기한으로 하여 일제히 준행한다.
8. 기한을 정한 후에도 금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 때에는 적발되는 대로 그 가장(家長)을 엄중히 다스린다.
○ 북관(北關)에 큰 기근이 들었다. 남관(南關)의 곡식 3만 곡과 영남의 곡식 2만 5000곡을 옮겨 보내고, 내탕고의 돈 2000민, 면포 100필, 호초(胡椒) 30두를 내려 기민을 진휼하였다. 윤음을 내리기를,
"아, 너희 북방의 백성들아. 농사일이 끝나고 한 해도 저물어가니 지금은 바로 마을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즐거운 시절을 노래부르며 서로 화답할 때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이산(離散)하고 나뒹구는 고난을 만났단 말인가. 관(關) 이북 수천여 리에 들판에는 남은 볏단이 없고 집에는 묵은 양식이 없어 수천 수만의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처럼 신음하고 있으니, 밤중의 잠자리가 하루라도 편안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산과 바다로 막혀 무역해서 옮겨갈 길마저 없어 한창 수확할 가을에 유망하는 자도 있고 겨울이 되기 전에 부황이 든 자도 있으니, 허물은 실제로 내게 있는데 백성이 무슨 죄란 말인가.
그러므로 규장각 직각 정대용(鄭大容)을 위유어사(慰諭御史)로 명하여 보내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머물러 진휼 정사를 관할하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이 사람에게 의지하고 내가 멀리 있다고 여기지 말라. 너희들의 굶주림은 나의 굶주림이고, 너희들의 배부름은 나의 배부름이며, 너희들의 곤궁함은 나의 곤궁함이고, 너희들의 편안함은 나의 편안함이다. 내가 너희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데 너희들이 비록 나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려 한들 되겠는가. 촛불을 밝혀놓고 신신 당부하는 글을 쓰는 것은 진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상이 우의정 채제공에게 명하여 윤음을 읽도록 명하니, 채제공이 아뢰기를,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우니, 어찌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너희들의 굶주림은 나의 굶주림이고 너희들의 추위는 나의 추위이다.'는 등의 하교는 나의 진심이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힘쓰고 계시는데, 어제는 신들이 퇴궐한 후에 또 북도의 별부료(別付料)를 불러 보시고 밤이 깊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으셨다 하니, 신은 민망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에게는 힘들여 일하는 것보다 마음을 쓰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다. 백성들이 안정되게 살도록 해줄 수 있다면 힘들여 일한들 무엇이 해롭겠는가."
하였다. 정대용에게 하교하기를,
"선왕께서는 진휼을 감독하는 사람을 보낼 때마다 말씀을 간절히 하시면서 눈물을 흘리곤 하셨다. 그런데 나는 백성을 위하는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기에 부족하여 이렇게 거듭 기근이 들게 만들어 놓고 연석에서 명이나 내릴 뿐이다. 그대의 마음도 감동시키지 못하면서 북도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북관의 물선(物膳)과 여러 공헌(供獻) 및 군전(軍錢)촹삼가포(蔘價布)를 전부 정지하거나 감면하고, 우심(尤甚)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포(大同米布)를 감면하도록 명하였다.
○ 여러 도의 목화 농사가 흉작이어서 바쳐야 할 포를 모두 돈으로 대납하게 한 지 2년이 되었다. 이에 서울의 면포값이 뛰어올라 백성들이 옷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위 군사들이 입은 옷을 보면 서울의 허다한 서민들이 추위에 떠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공평 무사한 정사를 이들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소는 보고 양은 보지 못했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고, 호조, 선혜청, 각 군문의 면포를 싼값에 산매(散賣)하도록 명하였다. 신하들 가운데는 전방(廛房)을 지
"백성들이 고마워할 줄 알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조정의 뜻은 장차 면포값이 저절로 안정되어 백성들이 고루 혜택을 입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구를 뽑게 되면 허실(虛實)이 뒤섞이기 쉽다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만약 허실을 조사하면 또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백성에게 돌아가는 점에 있어서는 대략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또 발매해서 거두어들인 돈을 풀어서 시장 백성들에게 빌려주도록 명하고, 호조와 선혜청의 공물가 10여 만 민을 내려 전황(錢荒)을 구제하였다.
○ 전 현감 박상춘(朴尙春)이 상소하여 북도의 폐단 8개 조항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상이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려 장려하고, 박상춘을 불러 조목조목 물었으며, 또 대신을 불러 조목별로 헤아려 확정짓게 하였다. 사치하는 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북도의 풍속은 평소 순후하다고 일컬어졌는데, 질박함을 버리고 사치를 추구하여 가죽옷을 입고 나물 반찬을 먹는 풍속을 보지 못한다고 하니, 모두다 교화가 행해지지 않고 제대로 이끌어주지 못해서 비롯된 일이다.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성심을 다해 권면하고 신칙하게 하여 먼 지방의 인사들로 하여금 이렇게 하는 것이 옳고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임을 알게 하라. 그리하여 차츰차츰 감화되어 해마다 조금씩 나아지게 하라."
하고, 동과 은의 광산에 대한 일로 인하여 하교하기를,
"광점(?店)을 엄히 막는 것은 바로 백성을 위하려는 나의 고심이다. 동은 왜(倭)에서 구하면 되고 은은 연경에서 구하면 되는데 어찌 반드시 땅속의 광물을 남겨놓지 않아야만 비로소 우리나라가 부유해진다고 하겠는가."
하고, 규정을 설치하여 엄히 금지할 것을 명하였다.
○ 상이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탐오(貪汚)한 풍조를 바로잡으려면 반드시 먼저 청렴결백한 사람을 택해야 한다."
하니, 연신이 대답하기를,
"지금 세상에서는 쉽게 얻지 못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한 세상을 속이는 말이다. 그 속에서도 그런 사람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만약 없다면 그런 사람의 아들이나 손자를 써서 고무시키고 권면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11월. 영릉(永陵) 기신제를 대신을 보내어 대리로 행하게 하였는데, 돌아가신 구갑(舊甲)인 때문이었다.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감회가 더욱 간절한데, 더구나 공신을 책봉한 것이 또 이해에 있지 않았던가. 풍릉부원군(?陵府院君)의 손자 조운익(趙雲翊)을 초사(初仕)에 조용하라."
하였다.
○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에게 선시(宣諡)하는 날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하고, 제문을 써서 사원(祠院)에 게시하였다. 그의 유고(遺稿)와 수적(手蹟)을 호남 관찰사로 하여금 모각(摸刻)하고 인쇄해서 반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의 글을 읽고 그의 필적을 보니 생동감이 넘쳐서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였으며, 한 글자를 읽을 때마다 감탄스러워 나도 모르게 책을 덮고 말았다."
하였다. 한참 후에 또, 충장공 형제와 부부가 필적할 만한 충성과 효성으로 나라를 위해 몸바쳤다 하여, 그 마을에 비석을 세우고 '충효의 마을'이라고 쓰게 하였다. 일찍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하였다.
○ 연신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지은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진적(眞蹟)이 임영(臨瀛)에 있다고 아뢰니, 상이 그 본을 가져오도록 명하여 열람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7세에 이 책을 읽고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었는데, 지금 진본을 보게 되니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일어나는 것을 깨닫겠다. 연전에 퇴계(退溪)-이황(李滉)의 별호(別號)임-가 직접 교감한 《심경(心經)》초고를 보았을 때 필획이 순수하고 바르더니 이 본 역시 이러하다. 그러니 두 선정의 마음을 징험할 수 있겠다."
하고, 그 책에 발문을 써서 돌려주었다.
○ 의열궁(義烈宮)의 궁호(宮號)와 묘호(墓號)를 선희(宣禧)로 고쳐 의논하였다.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시호를 그대로 궁과 묘의 칭호로 삼는 것은 전례를 고찰해 보아도 근거할 곳이 없다고 하니,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이성원(李性源)촹채제공(蔡濟恭) 등이 아뢰기를,
"고쳐 의논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73권 정조조 5
13년(기유, 1789)
○ 1월. 상주(尙州)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고 상신(相臣) 황희(黃喜)의 서원에 사액(賜額)하고, 선액(宣額)하는 날 치제하였다.
○ 대간이나 시종으로서 70세 이상이면서 등과(登科)한 지 30년 이상 된 사람과 무과에 합격한 지 50년 이상 된 사람, 음관으로서 70세 이상이면서 벼슬길에 나온 지 40년 이상 된 사람을 모두 가자하고, 문관촹음관촹무관으로서 작산(作散)된 자들을 을미년 12월 이전부터 뽑아내어 선발해서 복직시키고, 참외(參外)의 음관촹무관으로서 벼슬이 떨어진 지 30년 된 자는 모두 사과(司果)로 올려 부직(付職)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어찌 나이와 자급에 관계되겠는가마는, 나이 많은 사람과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일반적인 규례를 뛰어넘어 발탁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2월. 영릉(永陵)에 행행하여 작헌례를 행하고, 이어 장릉(長陵)에 나아갔다. 하교하기를,
"고향의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오히려 공경하는 법인데 손때가 남아 있는 나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선조(先朝) 신해년에 본 능으로 천장한 다음 효묘(孝廟)의 고사(故事)에 따라 손수 소나무와 삼나무를 심으셨던 것이 지금은 울창하게 자랐다. 만약 표시하지 않는다면 뒷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선조 때 손수 심으신 잣나무에 구리로 울타리를 치고 '수식(手植)'이라는 두 글자를 새기도록 하라."
하였다. 교하(交河)촹파주(坡州)촹고양(高陽)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보고, 교하의 금년 전세의 반을 하사하고 세 고을의 묵은 환자곡의 상환을 모두 감면하였다. 교하의 70세 이상 된 사서인에게 음식물을 하사하고, 80세 이상으로서 세 차례 행행을 겪은 사람에게는 각각 한 자급을 하사하였다.
○ 하교하기를,
"진안대군(鎭安大君)이 태백(泰伯)과 같은 덕을 지녀 지위를 피하여 함흥(咸興)으로 물러가서 지냈기 때문에 정묘(定廟)께서 제 2대군으로서 들어가 대통을 계승하셨다. 진안대군이 세상을 떠난 후에 함흥으로부터 제릉(齊陵) 가까운 곳으로 이장하였으니, 어찌 황폐한 채로 버려두겠는가."
하고, 어제(御製) 묘갈문을 내렸다. 이어 별도로 무덤을 지키는 민호(民戶)를 둘 것과 제청(祭廳)을 지어주고
○ 3월. 관서(關西)의 청남(淸南)과 북도(北道)의 남관(南關) 무사(武士)에 대해 청북(淸北)과 북관(北關)의 규례를 그대로 따라 별도로 부료(付料)하는 자리를 설치하였다.
○ 새로 급제한 서영보(徐榮輔)를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그의 조부인 고 상신은 바로 기묘년에 책봉 의식을 거행하던 때의 유선(諭善)으로서 여러 해 동안 수학(受學)했었다. 그 노고와 공적을 길이 생각하면 어찌 남 보양(南輔養)이나 박 유선(朴諭善)보다 뒤떨어지겠는가. 승지를 보내어 고 영상 서지수(徐志修)에게 치제하라."
하였다.
○ 4월. 태묘(太廟)의 하향 대제(夏享大祭)를 대리로 행하게 되었다. 상이 의관을 정제하고 촛불을 밝히고 앉아 기다리면서 승지와 사관을 향소(享所)로 보내어 예가 이루어지면 돌아와 아뢰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예전에 선조께서는 여든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매번 제향을 대리로 행하는 저녁이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난간 밖에 엎드린 채 의식이 끝나기를 기다리셨다. 이것은 내가 우러러보았던 것인데 지금 어찌 편안하게 밥 먹고 잠자겠는가."
하였다.
○ 5월. 문희묘(文禧廟)에 나아가 전작례(奠酌禮)를 거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달이 다가옴에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여 미칠 수 없다. 무진년 이전에 보호해준 공을 내가 감히 하루라도 가슴속에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화평옹주(和平翁主)의 사우(祠宇)에 임하여 전작(奠酌)하고, 연령군(延齡君)의 사우에 임하여 또 직접 전작하였다. 은신군(恩信君)의 사당에서는 소리 없이 흐느껴 울어 어의(御衣)의 소매가 다 젖었으므로 좌우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 이에 앞서 통어영을 강도(江都)로 옮겨 설치하고 교동현감(喬桐縣監)을 부사(府使)로 승격시켜 방어사를 겸하게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조정 신하들이, 교동은 해방(海防)의 요충지이므로 삼도(三道)를 관할하지 않을 수 없다고 논의하니, 수사와 통어사의 옛 규례를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 윤5월. 양전(兩銓)에 있는 예전의 망통(望筒) 가운데 선조(先朝)의 어휘가 기재된 것이 있으면 선조의 고사에 따라 깨끗이 단장해서 첩자(帖子)로 만들어 봉모당(奉謨堂)에 봉안하고, 열성조 때 낙점(落點)한 망통은 비변사, 당후(堂后), 양전을 막론하고 각각 궤에 담아서 제각기 본 관청의 벽이나 문미(門楣)에 보관하라고 명하였다.
○ 각도의 도류안(徒流案)을 들이도록 명한 후에 직접 소결(疏決)을 행하였다.
○ 법성(法聖)과 군산(群山)의 두 진장(鎭將)을 모두 변지 이력(邊地履歷)으로 만들어 천전(遷轉)하는 계제로 삼을 것을 명하였는데, 조운(漕運)과 해방(海防)의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 상이 궁궐에 비가 새어 그릇으로 받는 것을 하교하기를,
"온 나라 안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도성 안팎의 빈한한 사서인으로서 형편없는 꼴을 면한 자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고, 오부(五部)의 집이 무너진 호구에 대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 6월. 평안도 관찰사가, 대동강 물이 비로 인해 넘쳐서 민가가 떠내려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했다고 아뢰니, 입직한 선전관을 파견하여 역마를 타고 가서 위유하게 하였다.
○ 7월. 명천(明川) 등 고을이 수해를 입었다. 단(壇)을 설치해서 물에 빠져 죽은 민호를 제사지낼 것과 재해 입은 백성의 환자곡과 신포(身布)를 모두 탕감할 것과 명천에 대해 1년간 급복(給復)할 것을 명하였다.
○ 상은 처음 등극했을 때부터 영우원(永祐園)의 형국(形局)이 좁아서 길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지사(地師)에게 분담시켜 여러 산을 두루 살펴보게 했었는데, 기해년에 잡았던 수원(水原) 화산(花山)의 옛터가 가장 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빨리 대례(大禮)를 거행하기를
"도위의 상소는 실로 종묘 사직의 무궁한 대계(大計)입니다."
하였다. 상이 울면서 하교하기를,
"산릉(山陵)의 이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야 내가 어찌 단정지어 말하겠는가마는, '이곳이 편안하고 저곳이 편안하다.'는 선유(先儒)의 말로 보면 이런 이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음양가(陰陽家)의 말만 믿고 경솔하게 묘소를 옮기는 것은 일반 백성이라도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의식임에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나의 지극한 슬픔과 한이 일찍부터 가슴에 맺혀 있었으니, '흙이 시신에 닿는다[土親膚]'는 세 글자를 생각하게 되면 차라리 죽고만 싶다. 지금 다행히도 나의 뜻이 먼저 정해짐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동의하였다. 옮겨 봉안할 장소를 구하고자 하면 수원의 화산보다 나은 곳이 없으니, 신해년의 의궤(儀軌) 및 고인의 문자에 이미 정론(定論)이 있었다. 수원의 한 구역을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기면서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어찌 사람의 힘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이어 대신과 여러 신하에게 명하여 먼저 영우원을 봉심하게 하니, 모든 사람들의 견해가 도위의 상소와 일치하였다. 또 수원에 새로 잡은 땅을 봉심하게 하였는데, 모두 하늘이 만든 좋은 자리라고 말하였다. 이에 영우원의 능침을 화산 계좌(癸坐)의 언덕으로 정하고, 계축년 영릉(寧陵)을 천장할 때의 의궤와 신해년 장릉(長陵)을 천장할 때의 의궤를 가져다 참작하고 본떠서 행하였다. 총호사(摠護使) 김익(金?)에게 이르기를,
"'천하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어버이에게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있는 힘을 다해야 할 나의 도리로써 최대한 아름답게 하고 싶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은 영릉조(寧陵朝) 이후로 사용하지 말도록 명하였으나, 지금 성의를 다하는 뜻을 본받아서 병풍석, 와첨(瓦?), 상석(裳石)은 모두 사용하고 난간석만 없게 하라. 이는 대개 감히 격식대로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뒷날 사왕(嗣王)이 만약 오늘날을 보고서 다시 제도를 넘게 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나의 본뜻이 아니다."
하였다.
○ 8월. 새 원소(園所)의 칭호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올렸다. 수원부 소재지를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옮기도록 명하고, 이어 행궁(行宮)을 설치하였다.
○ 영우원(永祐園)에 나아가 시복(?服) 차림으로 계원례(啓園禮)를 행하였다. 상이 사초(莎草)를 부여잡고 통곡하면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여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였으므로 좌우의 신하들이 부축하여 모시고 재실(齋室)로 돌아왔다. 조금 진정된 후에 하교하기를,
"슬프구나! 자궁께 근심을 끼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고 종사(終事)에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바 아니지만, 슬픔이 치솟는 때는 나 자신도 슬퍼하는 줄을 모르게 된다."
하였다. 어떤 사람이 논의하면서 본생친(本生親)에 대해서 시복을 입는 것은 예(禮)에 없는 일이라고 하자, 상이 듣고 울면서 이르기를,
"내가 옛날에 상복을 입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뒤미처 입는 뜻을 붙여 조금이나마 지극한 슬픔을 풀려 하는 것인데, 예에 무엇이 어긋난단 말인가."
하였다.
○ 상이 임오년 이전에 분의를 다했던 신하들을 추념(追念)하여 전후로 모두 드러내어 장려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또 고 재신 한광조(韓光肇)의 시호를 논의하도록 명하고, 고 승지 임성(任珹)촹정순검(鄭純儉), 고 현령 김이곤(金履坤)에게 증직하였다.
○ 10월. 원소(園所)에 나아가 현궁(玄宮)을 들어내는 일을 직접 살펴보았다. 재궁(梓宮)을 받들어 내자 상이 가슴을 치며 곡하기 시작하여 새벽이 되도록 그치지 않았다. 기도(氣度)가 위태로운데도 발인 등 여러 가지 일과 신원(新園)의 역사에 대해 지시하여 가다듬고 신칙>지 않는 것이 없었다. 상이 신하들에게 울면서 이르기를,
하였는데, 말과 함께 눈물이 흘러내렸다. 성빈(成殯)하는 날부터 아침저녁의 상식(上食)과 주다례(晝茶禮)를 모두 직접 행하고 제물만 대신 올리게 하였으니, 이는 국전(國典)의 상제(喪制)를 따른 것이었으며, 또 예(禮)에 우제(虞祭)가 아니면 목욕하지 않는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대여가 출발하자 상이 걸어서 따르려고 하다가 대신이 힘껏 간하자 말을 타고 뒤따랐다. 처음에는 발인 행차를 따르려 하였으나 자궁의 간절한 만류 때문에 강에 이르러서 환궁하였다.
○ 신원(新園)에 나아가 현궁을 내리고 우제(虞祭)를 행하였다. 이날 밤 직접 원상(園上)의 공역(工役)을 살펴보았다. 계광(啓壙)할 때부터 이날까지 하늘이 맑고 겨울 날씨가 풀려 따뜻하였다. 그러다가 환궁하던 날 저녁에 크게 눈보라가 치고 추위가 몰아닥치니, 대개 하늘이 보살핀 것이었다.
○ 직접 지문(誌文)을 지었다. 신하들에게 하교하기를,
"지문이란 장차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차마 쓰지 못할 것을 글로 쓰고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말한 것은 양궁(兩宮)의 자애와 효성을 밝혀서 나 소자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이다. 유궁(幽宮)에 넣어서 백세를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 《원행정례(園幸定例)》를 편찬하도록 명하였다. 교량(橋梁)을 만드는 데 경비를 많이 들이지 말고 기용(器用)과 추두(芻豆)를 저치(儲置)에서 요구하지 말게 하였으며, 수행하는 백관 및 군병은 수를 정하고 관에서 받는 노자를 줄이도록 하였다. 나루를 건너는 것을 계기로 주교(舟橋)의 제도를 창설하고 주교사(舟橋司)를 설치하여 관할하게 하였으며, 상이 직접 연구하여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어 시행하였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 절목(節目)이 이루어졌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주교의 나루길은 노량(露梁)으로 한다. 선릉(宣陵)촹정릉(靖陵)촹장릉(章陵)촹현륭원에 행행할 때 및 온천에 행행할 때는 모두 이 길을 이용하고, 헌릉(獻陵)촹영릉(英陵)촹영릉(寧陵)에 행행할 때는 광나루로 옮겨 설치한다.
2. 언덕의 좌우에다 잡석(雜石)을 모아 고기 비늘처럼 맞물려 높이 쌓고 석회로 그 틈을 메운다.
3. 현재 있는 경강(京江)의 큰 선박 80척 중에서 교량에 소요될 36척을 제외한 나머지 배들은 모두 주교의 좌우에 나누어 세워서 끈으로 묶어 호위하는 곳으로 삼는다.
4. 주교의 제도는, 배치하여 연결시키는 때에 먼저 몸체가 가장 크고 삼판(杉板)이 가장 높은 것을 골라 강 한복판에 정박시켜서 중앙을 표시한 다음에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배를 차례로 좌우에 나누어 연결시켜서 주교의 형태가 중앙이 높고 양쪽이 낮게 한다.
5. 선박은 먼저 상류를 향해 닻을 내리게 하고 가룡목(駕龍木)을 어긋나게 배열하여 맞물리도록 해서 곧바로 이 배와 저 배의 삼판에 닿게 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그런 다음에 남북의 선창에 먼저 큰 끈으로 선박의 머리와 꼬리를 나누어 묶어서 언덕 위의 못에 잡아매고, 다음으로 종량(縱梁) 및 탱주(?柱)를 묶는다.
6. 별도로 장산곶(長山串)에서 길이가 35척, 사방의 넓이가 1척 되는 소나무를 구해다가 포판(鋪板)의 길이를 참작해서 배마다 각각 5주(株)씩 분배하여 세로로 묶되, 두 쪽 끝이 배의 밖으로 나가도록 한다. 두 배의 양두(梁頭)에는 말목을 마주 세워 박은 다음에 칡밧줄로 단단하게 묶는다. 또 탱주목을 배 판의 위에 세워놓는다.
7. 양호(兩湖)에 나누어 정한 긴 송판으로서 넓이가 1척, 두께가 3촌 되는 것을 고기 비늘처럼 나란히 종량의 위에 가로로 깔고, 두 판자가 맞닿는 곳에 엄정(掩釘)을 써서 맞물리게 한다. 또 아래쪽에는 견마철(牽馬鐵)로 두 판자가 맞닿은 곳을 걸쳐 박고, 또 판자의 양쪽 끝에는 보이지 않게 구멍을 뚫은 다음 삼 밧줄을 꿰어서 왼쪽과 오른쪽의 종량에 묶는다.
8. 깔판의 좌우 양쪽에 먼저 중방목(中方木)을 설치하고, 다음으로 짧은 기둥을 한 칸마다 한 개씩 나열해 세
9. 노량은 조수(潮水)가 드나드는 곳이므로 선창이 조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데 따라서 갑자기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여 길의 형세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니 조교(弔橋)의 제도를 대략 모방하여 판교(板橋)를 만들되, 세로로 종량의 머리를 배치한 다음에 깎아서 요철(凹凸) 모양을 만들고, 서로 잇대어 끼워서 둥글게 돌고 굽혀지고 펴지게 한다. 이럴 경우 조수가 밀려오면 교량의 머리가 배를 따라 들려져서 가파른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고, 조수가 밀려나가면 평평해져서 도로와 연결될 것이다.
10. 남북의 선창에 각각 하나의 홍살문을 만들어 주교의 경계를 표시하고, 중앙의 가장 높은 선박에 또 홍살문을 세워서 강물의 중앙을 표시한다.
11. 대장은, 대가를 수행한 이외에 유영(留營)하거나 유진(留陣)한 군영의 대장을 병조에서 이망(二望)으로 의망해 들여서 낙점을 받는다. 만약 당해 군영의 대장이 대가를 수행하게 되면 인원을 갖추어 의망할 수 없으니, 수어사나 총융사로써 때에 임하여 계청하고 의망해 들인다.
12. 노량의 진사(鎭舍)를 본사의 관청으로 삼고, 그대로 행행 때의 대차(大次)로 삼는다.
13. 선주(船主) 가운데 부지런하고 일을 잘 아는 사람으로 도감관(都監官) 1명, 감관 2명, 영장(領將) 10명을 차출해서 주교를 만들고 철거하는 일을 감독하게 한다.
14. 본사의 도제조는 삼공(三公)이 예겸(例兼)하고, 제조는 삼군문의 대장이 예겸하며, 주관 당상 1명은 비국에서 별도로 계하받되 준천사의 당상을 겸하여 맡는다. 도청 1명은 삼군문의 천총이나 별장 중에서 뽑아서 계하받되 역시 준천사의 도청을 겸하여 맡는다.
15. 선창의 앞면에 모래가 쌓여 맨 앞에 있는 배와의 거리가 현격해질 경우에는 형편에 따라서 선창을 물려 만들어야 한다. 앞면에 먼저 몸체가 크고 길이가 40척 되는 방목(方木) 두 개에 다섯 군데 구멍을 나누어 뚫어 다섯 개의 기둥을 박되, 기둥 양끝에는 각각 가로로 비녀장을 박는다. 하방목(下方木)을 물 속으로 내리되 깊이는 3척으로 한정하고, 기둥 나무 사이사이 네 곳에다 각각 8, 9척 되는 작은 말목 두 개의 상단에 구멍을 뚫어서 하방목의 좌우에 박고, 비녀장을 말목 상단의 구멍에 가로질러서 하방목이 떠다니거나 떠오르는 폐단을 막는다. 그런 다음에 모래를 빈 가마니에 넣어서 방목의 상단 양편에 쌓아 석축(石築) 밑을 누르게 한다. 뒤쪽에는 기둥나무를 세우고 나서 그대로 건너지른 종량을 얹고, 네 면을 두 층으로 나누어 가로 세로로 중방목(中方木)을 박고, 다시 몸체가 큰 가목(駕木) 중에서 가장 긴 것 두 개를 좌우 깔판 가장자리에 눌러서 움직이지 않게 한다.
○ 수원촹시흥(始興)촹과천(果川) 백성들에게 하유하기를,
"이 고을은 바로 나의 조상이 묻혀 있는 곳이고, 너희들은 이 고을의 백성이다. 내가 너희들을 한집 식구처럼 보고 있으니, 먹을 것이 풍족하고 생활이 넉넉하게 해주어 삶을 편안하게 여기고 생업을 즐거워하도록 해야만 나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되고 나의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때 행차가 지나는 곳에도 은택을 베푸는 법인데 더구나 이 고을 이 백성들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어루만지는 나의 고심을 알아서 너희들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함께 원침(園寢)을 보호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명하기를,
"수원 전체 고을에 대해 1년간 급복(給復)하고 묵은 환자곡의 상환을 탕감하라. 원소 부근의 면리(面里)와 거주지를 옮긴 백성들에 대해서는 10년간 급복하고 새 환자곡의 상환을 탕감하라. 수원과 과천의 부로(父老) 가운데 온천에 행행하는 행차를 두 번 본 자로서 70세 이상의 조관(朝官)과 80세 이상의 사서인을 가자하라. 두 해에 걸쳐 어가가 지나간 연로의 민호에 대해서는 1년간 급복하라."
하였다.
○ 11월. 교리 윤광안(尹光顔)이 아뢰기를,
"군신(君臣)의 분의(分義)가 비록 준엄하지만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반드시 제각기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성상께서 신료들에게 매번 '분의'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독책하고 몰아세우시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자들이 대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처음에 천망하는 자리에 이조 낭관이 배석하는 규정을 회복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혁파할 것을 명하였다. 이르기를,
"분발하는 성과는 보지 못하고 분경(奔競)의 문만 열어주었다."
하였다.
○ 12월. 숭의전(崇義殿)을 수리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전우(殿宇)를 설치하여 대대로 제사를 계승하는 것은 바로 주(周) 나라 삼각(三恪)의 유의(遺意)를 본뜻 것이니, 열성조의 거룩한 뜻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다."
하고, 이어 근시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수호하는 관원을 처음에 감(監)으로 임명하였다가 감으로부터 영(令)이 되고 수(守)가 되게 하였다.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지덕사(至德祠)에 사액(賜額)할 것을 명하였다.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어제(御製) 사기(祠記)를 게판(揭板)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청권사(淸權祠)에도 아울러 치제하고, 사손(祀孫)을 조용(調用)하도록 하였다.
○ 상이 면포(綿布)로 숙위 군사를 시상하였다. 하교하기를,
"옛사람이 '알알이 괴로움이다.'는 말을 했는데, 여기는 올올이 모두 괴로움이다. 두보(杜甫)의 '궁궐에서 나누어주는 비단은 본래 가난한 여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네 [침庭所分帛 本自寒女出]'라는 시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근심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 《국조보감》을 진강하였다. 상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께서 문무(文武)의 덕으로 대명(大命)을 받들어 태평을 이룩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우리 조정의 무궁한 기업(基業)을 열었었다. 그런데 지금 조정의 신하들은 어찌 그대들의 조상이 선왕을 섬겼던 것으로써 오늘날 나를 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나 스스로를 경각시키고자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 신하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 상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세상에는 한 가지 능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없으니, 만약 백 사람을 모아서 제각기 그 장점을 쓰게 한다면 문득 모든 능력을 갖춘 인재가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세상에는 버려진 사람이 없고 사람은 재주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다."
하였다.
14년(경술, 1790)
○ 1월. 약원이 입진하였다. 도제조 채제공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덮으신 이불을 보건대 검소한 덕이 여기에까지 이르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장복(章服)에 있어서는 간혹 정결한 것을 취하지만, 평소 거처할 때는 거칠거나 품질이 나쁜 것을 따지지 않는다. 이는 검약을 숭상해서라기보다 우리 집안의 가법(家法)을 따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였다.
○ 상의 기후가 편찮다가 한 달 가량이 지나서야 회복되었다. 대신이 하례의식을 거행하기를 청하니, 답하기
"뜻하지 않은 질병을 조심하라는 경계를 소홀히 하여 자식의 병을 염려하는 근심을 자궁께 끼쳐드렸으므로 스스로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진하의 요청을 어찌 전례(典禮)에 있다고 해서 들어줄 수 있겠는가."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2월. 태묘(太廟)와 영희전(永禧殿)을 배알하였다. 운종가(雲從街)에 대가를 멈추고 관동(關東), 관북(關北), 양서(兩西)의 유민(流民)을 불러 위로하고 어루만졌다. 이르기를,
"환자곡의 상환을 정지하고 신포(身布)를 탕감하고 진휼하도록 하겠다. 농사일이 막 바빠지려는 때에 어찌하여 경작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고 도로에 떠돌아다니는 것인가."
하고, 대가 앞에서 쌀을 지급하고, 옷이 얇은 자에게는 옷을 지급하였으며,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양식을 지급하였다.
○ 현륭원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내고 좌우의 산기슭을 두루 살펴보았다.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운주당(運籌堂)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경진년 온천에 행행하던 때 어가를 산성에서 멈추었는데, 진남루(鎭南樓)에 올라가 활을 쏘아 네 발을 명중시키고 백성들의 고충을 물었었다. 내가 31년이 지난 지금 이 산성에 올라 이 당에 앉아서 백성들을 불러 보고 옛일을 자세히 물어보자니 나도 모르게 슬픈 감회가 인다. 뜰에 들어온 부로와 승려들을 모두 가자하고, 성 안 민호에 대해서는 집집마다 미포(米包)를 지급하라."
하였다.
○ 충주(忠州) 유생이 상언하여 영풍군(永?君) 이천(李?)의 묘소를 수리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숙묘(肅廟)께서 장릉(莊陵)을 추복(追復)하시면서 절개를 바친 왕자들을 모두 개장(改葬)하고 시호를 내리게 하셨는데, 영풍군 집만은 아직 연시(延諡)하지 못하였다. 근래에 듣건대, 영풍군의 묘소는 고양(高陽)에 있고 부인의 묘소는 충주 박팽년(朴彭年)의 선영 곁에 있다고 한다. 경기와 호서 관찰사로 하여금 무덤을 수리하고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게 하라."
하였다. 또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수령에 차임하고 선시하는 날 영풍군의 묘소에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묘소를 찾지 못하여 그 지역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지냈는데, 호조로 하여금 제사에 필요한 물품을 획급하게 하였다. 영풍군은 바로 박팽년의 사위로서 부인과 동시에 절개를 세운 자이다.
○ 상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차천로(車天輅)는 이처럼 문장이 훌륭한데도 아직까지 문집이 간행되지 않았다. 경이 수집해서 완질을 이루도록 하라."
하였다.
○ 영남 관찰사가 함양군(咸陽郡) 환자곡의 폐단에 대해 아뢰니, 상이 탄식하기를,
"불쌍하고 근심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앉은 채로 밤을 꼬박 새웠다. 10만 포(包)나 되는 백성의 곡식이 포대마다 먼지와 흙이고 낱알마다 쭉정이라니, 함양 백성에게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허위 곡식과 허위 장부를 모두 불태우고, 최현중(崔顯重)을 사정어사(査正御史)로 차임하여 보내어 바로잡게 하라."
하였다. 또 거창(居昌), 안의(安義), 산청(山淸)의 허위 곡식과 허위 장부도 함양의 예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 문묘(文廟)의 작헌례(酌獻禮)를 직접 행하였는데, 공자(孔子)와 주자(朱子)가 태어난 해이기 때문이었다. 먼저 계성사(啓聖祠)로 가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였다.
○ 대사성 이면긍(李勉兢)이 본관의 서적이 구차스러운 것에 대해서 진달하니, 하교하기를,
"존경각(尊經閣)을 설치하도록 법을 제정한 데는 뜻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완질의 서적이 없다고 하니 어찌 태학에 수치를 끼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북한산성에 있는 경서를 인쇄하여 존경각에 보관하고, 서적령(書籍令)을 구임시켜 전적을 담당하게 하라."
하였다.
○ 3월. 관서(關西)와 해서(海西)에서는 철전(鐵箭)을 200보 내지 150보 떨어진 거리에서 쏠 수 있는 자를, 북관(北關)에서는 기추(騎芻)에서 매번 4, 5개 맞추는 자를 뽑아 아뢰고, 관서의 무과 출신 자제에게 관청에서 포(布)를 거두는 규정을 북관의 예에 따라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서북 지방은 무예를 숭상하는 지역이다. 그런데 흥기시키고 권면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니, 이 어찌 좋은 말은 기북(冀北)에서 구하고 대나무는 형남(荊南)에서 바치게 하는 뜻이겠는가."
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에, '저정(樗亭)은 선원전(璿源殿) 좌측 기슭에서 200여 보 되는 곳에 있다. 옛날에 가죽나무가 있었는데 밑둥의 둘레가 10여 아름이나 되고 가지가 100여 이랑을 덮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태조대왕께서 일찍이 그 나무 아래에 거둥하셨으니 표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감사가 장계한 대로 지형에 따라 석축을 두르도록 하소서."
하니, 따랐다.
○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에게 부조지전(不?之典)을 시행하고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을 초사에 조용하도록 명하였는데, 양호(兩湖) 유생들이 상소하여 청한 때문이었다.
○ 관서 관찰사에게 하유하기를,
"관서 지방의 습속이 말단의 이끗을 추구하고 잡된 술수를 숭상하는 것을 크게 염려하여 윤음을 인쇄하여 반포하기도 하고 전교를 새겨서 게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간곡히 가르치고 타일러서 기필코 감화시키려 했었다. 10가구밖에 되지 않는 고을에도 자신의 몸을 깨끗이 하려는 선비가 있는 법인데, 더구나 넓은 면적의 본도에 어찌 사치를 버리고 실질적인 데로 나아가며 궁색하게 살면서도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겠는가. 먼저 찾아내어 조정에 보고한다면 어찌 수용하는 데 인색하겠는가. 각별히 뜻을 다하여 거행해서 서쪽 지방을 고무하고 장려하려는 조정의 지극한 정성과 간절한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옥안(獄案)을 판하하였다. 하교하기를,
"문건을 한 번 살펴본 후에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밥 먹을 시간도 놓치곤 하였으니, 이는 억울하게 형벌받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러고 나서야 금석(金石)과 같은 문안을 이루었는데, 법을 헤아려서 살려줄 수 없으면 정리(情理)에 돌이켜보고, 정리와 법으로 따져보아도 관대하게 처리할 수 없으면 또 반드시 범죄의 조그마한 흔적과 공초(供招)의 뜻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스스로 조금의 의심도 없게 되어야만 비로소 붓을 대었다. 확고한 이 마음은 억울함이 밝혀지지 않는 일이 없고 살인한 자는 반드시 상명(償命)하게 해서 처벌하거나 처벌하지 않거나 모두 바른 도리를 잃지 않기를 기약하는 것이다."
하였다.
○ 어정(御定)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무예보(武藝譜)》에 실린 곤봉(棍棒), 등패(?牌), 낭선(狼?), 장창(長槍), 당파(??), 쌍수도(雙手刀) 등 6기(技)는 선묘(宣廟)가 훈련도감 낭관 한교(韓嶠)에게 명하여 동정(東征)한 유격(游擊) 허국위(許國威)에게 물어서 편찬, 간행하도록 한 것이다.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대리 청정하던 때에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劒),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劒), 권법(拳法), 편곤(鞭棍) 등 12기를 더 넣어 도해(圖解)로 엮어서 《신보(新譜)》를 만들었으니, 18기의 명칭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상이 즉위한 초기에 신구《도보》를 아울러 취하여 무예를 익히고 시취하도록 명하고, 곧이어 내각 관원 이덕무(李德懋)촹박제가(朴齊家), 장용영 장관 백동수(白東脩) 등에게 명하여 모아서 한 책으로 엮게 하였다. 또 기창(騎槍), 마상월도(馬上月刀), 마상쌍검(馬上雙劍), 마상편곤(馬上鞭棍), 격구(擊毬), 원기(猿騎) 등 여섯 가지 말타는 기예를 더 넣어 모두 24기가 되었다. 직접 서문을 지어 책머리에 붙이고, 인쇄하여 경외의 군영에 나누어주었다.
○ 6월. 정묘일(18일)에 창경궁의 집복헌(集福軒)에서 원자가 탄생하였다. 직접 자전과 자궁에게 진하(陳賀) 전문(箋文)을 올리고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중외의 신서(臣庶)에게 하유하기를,
나는 천명을 향유할 덕이 없고 사람을 얻을 만한 정사를 하지 못했건만, 나 한 사람의 기쁨을 하늘이 기뻐하고 사람이 기뻐하니, 내가 장차 어떻게 하늘과 사람에게 보답해야 하겠는가. 나는 듣건대, 하늘은 마음이 없어서 사람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이 모두 그러하면 하늘의 마음도 그로 인해 기뻐한다고 한다. 그러니 하늘에 보답하고자 하면 또 사람에게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은전을 시행하여 전에 없던 혜택을 널리 베풀고 만고에 드문 밝은 운수를 드날려야 하지 않겠는가.
사면령으로 말하면 이름이 죄안에 기록된 1152명을 모두 용서해주는 것이다. 일을 담당한 신하는 경비가 고갈되었다고 하지 말라. 사람이 화합되면 하늘의 마음도 화합하고, 하늘의 마음이 화합되면 기후가 적절하여 만물이 풍성해지고 풍년이 들게 되는 법이다. 더구나 경술년은 예로부터 자주 풍년이 들지 않았던가. 여러 도의 묵은 환자곡으로서 병신년 봄 이전에 장부를 조사한 것과 증열미(拯劣米)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 1년치를 모두 면제하겠노라. 결세(結稅), 어세(漁稅), 염세(鹽稅), 선세(船稅), 장세(場稅), 사세(寺稅) 등 세로서 조세의 총 수량에 나열되어야 할 것은 수를 나누어 감면하고, 서울의 각 공계(貢契)의 묵은 유재(遺在) 2만 곡(斛), 시민의 요역(?役) 2개월치, 성균관에 딸린 하례(下隷)의 푸줏간 속전 30일치를 모두 탕감하노라.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함께 기뻐하기 위한 것이니, 모든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면서 어찌 노인들과 유생과 무사를 도외시하겠는가. 날을 잡아 과거를 베풀어 인재를 뽑고, 조관으로서 나이 70세 이상 된 사람과 사서인으로서 나이 80세 이상 된 사람은 각각 한 자급 가자할 것이며,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지급하라. 너희 팔방의 백성들은 잘 들으라."
하였는데, 경외에서 가자받은 사람이 모두 2만 5810명이었다. 대신, 각신, 문무관 2품 이상, 초계문신, 태학생에게 밥과 국을 내리고, 또 공시인(貢市人) 등을 불러모아 쌀을 지급하였다.
○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자궁께서 분부하시기를, '예전에는 내가 생일을 맞아도 기쁘거나 즐거운 생각이 없었으나, 내년 이날부터는 장차 먹고 마시면서 즐기려 한다.' 하셨다. 내가 40년 동안 자궁을 봉양하면서 자궁의 마음을 우러러 위로해드린 일이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다가 오늘 비로소 이 분부를 받들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더욱 기쁘고, 자궁을 뵐 면목도 서게 되었다."
하였다.
○ 7월. 도목정사에 직접 임하였다. 전관(銓官)에게 신칙하기를,
"금년의 이 정사에서는 경사를 맞이하여 탕척하는 은전이 있어야 하겠다. 사람을 관직에 임용하는 것이 어찌 복을 맞이하는 바탕을 삼으려는 것이겠는가마는, 본래부터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탕척하는 정사에 더욱 마음을 써왔다. 이는 조정에서 남과 내가 뒤섞이고 멀고 가까운 사람이 힘을 합하여 모자를 쓰지 않은 사람이 없고 벼슬을 하지 않은 겨레가 없으며 작록을 받지 않은 집안이 없게 하고자 함이었다. 출신하여 사적(仕籍)에 이름이 오른 부류로 하여금 따뜻한 봄바람과 같은 화기(和氣)에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게 한다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사람이 화합하면 천지의 화합이 응하게 될 것이니, 영원한 복록을 구하는 근원이 오로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였다.
○ 8월. 경외의 중죄수 202명을 심리하여 195명을 살려주었다. 이어 그대로 가둔 죄수 가운데 70세 이상 된 자를 여러 도의 감사로 하여금 장계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하였다.
○ 결성(結城)의 어떤 여인이 지아비를 구하기 위하여 입으로 사람을 깨물어서 죽게 만들었다. 법관이 옥안을 갖추어 상명(償命)하기를 청하니, 판하하기를,
"자식이 아비를 보호하고 아내가 지아비를 위하는 것은 한가지 일이다."
하고, 즉시 풀어주도록 하였다.
○ 어떤 연신이 감로(甘露)가 내렸으니 사책(史冊)에 쓰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하교하기를,
"임금은 풍년이 드는 것을 상서(上瑞)로 삼는다. 이 밖의 상서는 구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 도류인(徒流人)의 처나 첩으로서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는 율문(律文)대로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 10월. 태묘(太廟)의 북쪽 담장에 나아가서 북쪽 담장문을 고쳐 세우는 역사를 살펴보았다. 시신에게 이르기를,
"북쪽 담장문의 설치는 태종조에 있었는데, 초하루와 보름에 전배(展拜)할 때마다 이 문으로 출입하였고, 내전(內殿)의 묘현례(廟見禮)를 행할 때도 이 문으로 출입하였었다. 지금의 월근문(月覲門)은 대개 이 문을 모방한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북문을 고쳐 세우는 것은 내전의 묘현례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초하루와 보름에 전배하였던 옛일을 따르고자 함이다."
하였다.
○ 11월. 육상궁(毓祥宮)의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직접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 이날에 이 궁에서 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바로 하늘이 낸 선조(先朝)의 효성을 몸받고 회갑년을 맞이한 오늘의 큰 경사를 기뻐하고자 함이다. 성인을 낳아 기르신 공과 덕이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근본을 추모하는 나의 생각을 어떻게 표시해야 하겠는가. 증 영의정 최효원(崔孝元)의 집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하라."
하였다.
○ 12월. 하교하기를,
"이 경술년을 맞이하여 내가 옛 해가 거듭 돌아온 것을 보고서 감히 선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달 경모궁에 전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루(西樓)를 바라보고는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었으니, 계술(繼述)하는 일을 어찌 해를 넘기겠는가. 문신 가의(嘉義) 가운데 나이 70세 이상이면서 이미 아경(亞卿)을 지낸 사람을 모두 지중추 부사로 올려 제수하고, 그믐날 저녁에 기영관(耆英館)의 서루에서 숙배하게 하라."
하였다.
○ 상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침실에다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고 새로 써서 걸었는데, 탕평이라는 두 글자는 바로 우리 성조(聖祖)께서 50년간 이룩하신 성대한 덕업이다. 나의 일념은 오직 선대의 공렬을 추술(追述)하는 데 있으니, 사람만을 보아 택하고 재주만을 보아 취하여서 온 세상이 힘을 합해서 대도(大道)에 함께 이르도록 하겠다."
하였다.
○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성인(聖人)은 일정한 마음이 없고 백성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다고 한다. 내가 평생토록 이 말을 가슴에 새겨왔기 때문에 이것을 써서 벽에다 붙여 좌우명을 대신하였다."
○ 빈연(賓筵)에 나아갔다. 대신에게 이르기를,
"균역법을 시행하여 군포(軍布)를 줄인 것은 바로 선왕의 거룩한 덕이건만, 일을 담당한 신하들이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하였다. 선왕께서 매번 '어세(漁稅)와 염세(鹽稅)는 도거리에 가깝고 선무포(選武布)는 백성을 속이는 데로 귀결된다.'고 하교하셨으므로 내가 한번 바로잡아서 계술하는 방도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인재가 그때보다 못하고 변경하는 때에 폐단이 도리어 심할 수도 있으므로 결단을 내려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15년(신해, 1791)
○ 1월.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권농 윤음을 내렸다. 이르기를,
"내가 이해 이달에 더욱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이 있다. 세자가 나라의 근본이듯이 소민(小民)도 나라의 근본이다. 백성이 편안해야만 나라가 편안한 법이니,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서 조그마한 간격도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사랑할 자가 백성이 아니며, 공경할 자가 백성이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소민을 화합시켜 영원한 명을 비는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들의 식량을 중요시하여 권농을 첫 번째 급선무로 여기고 있다. 안으로는 공경(公卿), 밖으로는 장리(長吏)가 마음을 다해 받들어 도와서 우리의 황천과 조종이 돌보아주고 보우하는 새로운 기쁨과 큰 명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갔다. 대가가 노량(露梁)을 지날 때에 승지를 보내어 육신묘(六臣墓)와 사충사(四忠祠) 및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의 서원에 치제하였다.
○ 상이, 단묘(端廟)의 복위(復位)와 온릉(溫陵)의 복위가 모두 신규(申奎)의 말로 인한 것이었다고 하여, 신규의 후손을 조용하도록 명하였다.
○ 각 궁방(宮房)이 도서(圖署)를 가지고 외방 고을을 침탈하는 폐단을 금하였다. 하교하기를,
"임진년 이후로 경계가 문란해져서 주객(主客)을 분별하기 어렵고 토호들이 겸병을 일삼아 공전(公田)이 날로 줄어들었으므로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이 건의하여 절수(折受)의 제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제 200년이 지나 경계가 정해졌으니 절수라는 칭호를 지금까지 답습하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는 일이다. 세금을 내게 하는 법까지도 중간에 포기하여 절수라는 명목만 있으면 곧바로 면세를 허락하므로 항상 매우 개탄스럽게 여겨왔다. 지금 궁방의 도서에 관한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다른 여러 가지 폐단을 알 수 있다. 지금부터 더욱 엄히 신칙하여 토지를 절급하는 공문이 만약 계하된 것이 아니면 발견하는 즉시 계문하라."
하였다.
○ 2월. 경기 유생이 상언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을 창절사(彰節祠)에 추향(追享)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성군(錦城君)촹화의군과 같은 절의(節義)가 종실에서 나온 것이 어찌 더욱 기특하고 장하지 않겠는가. 그 밖에도 사육신에 뒤지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으니, 이번에 추배할 때 함께 시행한다면 실로 절의를 장려하고 충성을 기리는 은전에 부합될 것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조사해서 여쭙게 하라."
하였다. 마침 영월부(寧越府)에 화재가 나서 민가가 불탄 자리에서 자규루(子規樓)의 옛터가 드러났는데, 바로 단묘(端廟)가 일찍이 지냈던 곳이었다. 감사가 중건하였다고 보고하자, 상이 이르기를,
"참으로 이상도 하구나. 갑자기 불이 나서 민가를 태우더니 옛날 기왓장이 흙 밑에서 나타나고 무늬 있는 주춧돌이 터 위에서 드러났으며, 깊은 겨울 외떨어진 산골짜기에 큰비가 사흘 동안 내려서 찬 눈을 다 녹여버려 돌을 캐고 나무를 벨 수 있었다. 정월에 터를 닦고 2월에 기둥을 세웠으니, 일이 신속하게 진행된 데서 신령의 이치가 사람의 마음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누각의 체모는 도리어 정자각보다 더 낫다. 배식
하였다. 이어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도총관 성승(成勝), 별운검 박쟁(朴?),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에게 시호를 하사하고, 박계우(朴季愚)촹하박(河珀)을 증직하고, 절의를 다한 신하들을 배식하는 전례를 정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여섯 종실, 다섯 외척, 세 상신(相臣), 세 중신(重臣), 두 운검(雲劒), 육신(六臣)과 육신의 아비나 자식 가운데 탁월한 자, 허후(許?)촹허조(許?)촹박계우 등 문경(文敬)과 문헌(文獻)의 아들이나 손자 가운데서 뛰어난 자,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도진무사 정효전(鄭孝全) 등 31명을 배식할 사람으로 정하라. 일이 자세하지 않은 조수량(趙遂良) 등 12명, 연좌되어 죽은 의춘군(宜春君) 등 224명은 별단(別壇)에 제사지내라. 목숨을 내걸고 의리로 분발하여 장례지내는 데 힘을 다한 자는 오직 엄 호장(嚴戶長) 한 사람뿐이었으니, 절의로 죽은 반열에 있지 않다하여 홀로 배식하는 데서 누락시키겠는가. 증 참판 엄흥도(嚴興道)를 31명의 위차(位次) 다음에 두도록 하라. 고 처사(處士) 김시습(金時習)과 태학생 남효온(南孝溫)을 함께 창절사에 붙여 배향하라. 32명의 제단에는 응당 축문(祝文)이 있어야 할 것이며, 사판(祠版)에는 '충신지신(忠臣之神)'이라고 쓰도록 하라. 별단에는 세 개의 사판을 만들어 계유년, 병자년, 정축년에 죽은 사람들을 쓰라. 제사지낼 때에는 지방(紙?)에다 성명을 나열해 쓰고, 축문은 없게 하라."
하였다. 이어《배식록(配食錄)》을 편성하고 《장릉지(莊陵誌)》를 증수할 것을 명하였다.
○ 홍릉(弘陵)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는데, 성후(聖后)께서 탄생하신 지 10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 각 능원(陵園)의 전사관(典祀官)을 삼사의 관원 중에서 차출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3월. 문의(文義)에서 살고 있는 지중추부사 신의청(申義淸)이 100세 노인으로서 상경하여 사은(謝恩)하였다. 특별히 도총관에 제수하고 불러 보았다. 신의청이 아뢰기를,
"신은 시골에서 태어나고 살아왔기 때문에 민생의 고락(苦樂)이 오직 관찰사와 수령의 현부(賢否)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백성을 사랑하시는 성상의 거룩한 덕을 모르는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지방을 맡은 신하들이 대부분 그러한 뜻을 잘 받들어 따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청렴하고 검소한 사람을 신중히 택해서 지방관으로 임명하소서. 신은 미나리를 바치던 고사를 흉내내어 신의 나이와 자손의 수(數)를 가지고 전하께 바치고 또 원자궁께 바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 '노인에게 말을 청한다.'고 하였는데, 경의 말이 매우 좋다. 오늘 만난 100세 노인은 '장수하고 부유하고 아들이 많다.'고 이를 만하다. 이는 옛날에도 드물게 있었던 일로서 국가의 상서로운 징조이기도 하다. 먼저 백성들을 위해 감사와 수령을 신중히 택하는 방도를 진달하고, 다음으로 자신의 나이와 많은 자손을 가지고 헌수(獻壽)하였다. 말을 청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올바르고 진실된 말을 진달하였으니, 내가 응당 보답해야 하겠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 지방관으로 하여금 쌀과 고기를 수송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잔치 비용을 보내주고, 전조에 명하여 그의 아들을 조용(調用)하게 하였으며, 또 직접 서문(序文)을 지어서 주었다. 후에 연신에게 이르기를,
"명(明) 나라 초기에 100세 된 사람이 있어서 그가 사는 곳을 인서방(人瑞坊)이라고 명명했었다. 신의청은 실로 고금에 드물 만큼 완전한 복을 누리고 있으니, 그 상서가 한당(漢唐) 이래의 신작(神爵), 보정(寶鼎), 감로(甘露), 영지(靈芝) 따위보다 더 낫지 않겠는가."
하였다.
○ 좌의정 채제공에게 하유하기를,
"천하에 고할 곳 없는 불쌍한 자로는 우리나라의 내시노비(內寺奴婢)보다 더한 경우가 없을 것이다. 옛날 성조(聖朝) 때부터 그들의 원통함과 괴로움을 진념하시어 2필이었던 노공(奴貢)을 1필 반으로 줄이고 1필 반이었던 비공(婢貢)을 1필로 줄였고, 선조(先朝) 때에 또 반필을 줄였으며, 갑오년에 이르러 비공을 없애고 구전(口錢)만을 남겼으니, 이에 노공과 양역(良役)이 균등하게 되고 노비의 경우는 신역(身役)이 없게 되었다. 내가
하고, 이어 여러 도에 두루 묻도록 명하였다.
○ 4월. 태묘(太廟)에 나아가 재계하며 밤을 지냈다. 상이, 제향 때 악장(樂章)을 등사하는 것은 착오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고 하여, 장악원에 명하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촹《악학궤범(樂學軌範)》 및 영묘가 편찬한 악장을 활자로 다시 인쇄하게 하되, 매 장마다 그것이 어느 조(朝)의 공덕을 송축한 노래라는 것을 주(注) 달게 하였다.
○ 상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서얼을 소통시키라는 하교가 있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선조(宣祖)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바라기가 해를 향하는 데는 곁가지도 다를 바 없는데, 신하가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 어찌 반드시 정적(正嫡)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는가.' 하셨으니, 성인의 말씀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규범은 명분을 중시하고 문벌을 숭상하여 요직(要職)은 허통(許通)시켜도 청직(淸職)은 허통시키지 않는다는 것으로 이미 옛사람이 논의를 정해 두었다. 몇 해 전에 대각에 통청(通淸)한 것은 실로 선왕의 고심에서 나온 일이었으나 도리어 유명무실한 데로 귀결되고 말았다. 허다한 서얼 가운데 어찌 나라를 위해 쓰여질 만큼 뛰어난 선비가 없겠는가."
하였다. 이어 소통시킬 방도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안으로는 삼조(三曹) 낭관 및 판관, 밖으로는 군수와 병우후(兵虞侯)에 수용하도록 명하였다. 또 영남의 서얼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면서도 사판(仕版)에 오르지 못한 자를 먼저 유임(儒任)과 향임(鄕任)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성균관 대사성 유당(柳戇)에게 이르기를,
"일반 백성 중에서 뛰어난 사람도 모두 태학에 입학시켜 왕공 귀인(王公貴人)이 그들과 더불어 나이에 따라 차서를 정한다. 서얼은 지위는 비록 낮지만 그래도 양반의 족속인데 어찌하여 그들만 별도로 남쪽 줄에 앉게 하는 것인가. 바로잡아 개혁하는 것은 경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5월.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였다. 이에 앞서 임인년(1782) 봄에 숙묘(肅廟)의 고사에 따라 무예 출신(武藝出身) 및 일찍이 영문(營門)의 장교를 지낸 자 가운데서 30명을 선발하여 번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행랑에 입직하게 하였다. 을사년(1785)에 와서 이를 장용위(壯勇衛)라고 칭하고, 또 척계광(戚繼光)의 남군(南軍) 제도를 모방하여 오사(五司) 25초(哨)를 두었었다. 이해에 금군 1번(番) 50명을 감하여 옮겨서 장용위를 설치하였고, 액외 내금위(額外內禁衛)의 규정을 준용하여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 10명을 두고 사부(士夫)로써 채워넣었으며, 또 선기대(善騎隊) 3초를 두어 훈련도감과 경기의 승호(陞戶)를 옮겨서 소속시켰다. 경향(京鄕)의 마군과 보군이 모두 3450명이었는데, 병조의 별부료병방(別付料兵房)의 규례를 써서 병방(兵房)을 설치하여 군무를 처리하게 하였다. 백성에게서 많이 거두어들이던 내수사의 장전(庄田)을 힘써 혁파하고 양서(兩西)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으며, 내외의 쓸데없는 비용과 인원을 감하고 내탕고의 돈을 내주어 여러 도에 곡식을 쌓아두게 했다가 장용영의 경비로 쓰도록 하였다. 또 제조를 설치하고 일찍이 호조나 선혜청 당상을 지낸 사람을 차임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용영을 신설한 데는 내 나름대로 깊은 뜻이 있었으니, 숙위(宿衛)를 엄중히 하려는 것도 아니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절약해서 경상 비용을 축내지 않고서도 단속이 대략 이루어지고 시설이 바야흐로 넓혀졌다. 내 뜻은 대개 앞날을 기다리려는 것인데, 속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어찌 나의 고심을 알겠는가. 장차 내 뜻을 이루는 날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 문양공(文襄公) 양성지(梁誠之)의 유고(遺稿)를 간행하고 사손(嗣孫)을 조용할 것을 명하였다.
○ 6월. 시전(市廛) 백성들이 내의원 및 호조의 시무(市貿)로 인하여 피해를 입는 경우가 더러 있었으므로 묘당이 바로잡기 위한 방책을 올렸다. 하교하기를,
"도성 안이 모두 놀고 먹는 사람들이고 힘을 다해 일하는 자는 시전 백성뿐이다. 이들은 나라의 근본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자들이니, 만약 그들에게 이로운 일이라면 살갗인들 어찌 아끼겠는가. 시전에서 무역하는 모든 법을 영원히 혁파하라."
하였다.
○ 장원서 봉사 조유선(趙有善)이 아뢰기를,
"본서는 바로 고 충신 성삼문(成三問)의 옛집입니다. 자손이 없으므로 속환(贖還)을 논의할 수는 없지만 증거가 될 문자는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니, 옛날에 있었던 사실을 기록해서 청사(廳事)에 걸어놓으라고 명하였다.
○ 원자의 돌날 온갖 장난감을 담은 소반을 집복헌(集福軒)에 차려 놓고 대신(大臣)과 경재(卿宰)에게 들어와 보도록 명하였다.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이 아뢰기를,
"삼가 원자께서 입으신 의복을 보니 절검(節儉)하려는 거룩하신 뜻을 흠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복의 길이가 3, 4세 아이와 진배없으며 놀이할 때면 걸음을 떼놓기도 하고 말하려고도 하니, 숙성하다고 할 만하다."
하자, 신하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튀어나온 이마와 제왕의 용모가 참으로 대성인의 기상이니, 실로 우리 동방의 끝없는 복입니다."
하였다. 신하들로부터 서리, 하례(下隷), 군졸, 거리의 백성들에게까지 떡을 내렸고, 특별히 조관(朝官)과 사서인(士庶人)으로서 유배 이하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사람의 죄명을 씻어주었다.
○ 7월. 이보다 먼저 경영(京營)에 엽치군(獵雉軍)이 있었으니, 바로 예전의 응사계(鷹師契)이다. 매번 제멋대로 사냥하면서 10명 내지 100명이 무리를 지어 산골짜기를 횡행하므로 민간이 소란스러웠다. 그래서 상이 특별히 그 폐단을 염려하여 꿩 사냥을 혁파하도록 명하고 대봉(代捧)을 허락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도에서 납육(臘肉)으로 돼지, 노루, 사슴을 사냥해서 바치는 규례까지 혁파하도록 명하고, 경청(京廳)에서 공물(貢物)로 정하게 하였다.
○ 궁인(宮人) 이씨(李氏)는 일찍이 경모궁(景慕宮)에게 은총을 받았던 자인데, 백발이 되도록 누추한 집을 지키면서 사람들을 접하지 않았다. 상이 듣고 감동하여 '수칙(守則)'이라는 작호를 내리고, '정렬(貞烈)'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였으며, 그가 사는 곳에 '수칙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는 편액을 걸게 하였다.
○ 8월. 부총관 이관(李灌)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얼굴을 보지 못한 지 이제 20년이나 되었다. 늙은 신하에게 말을 청하는 것은 옛부터 있어온 일이니, 그대는 진달하도록 하라."
하니, 이관이 아뢰기를,
"《중용》에, '성(誠)은 하늘의 도이고 성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하였으니, 성이란 진실된 마음으로 노력해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하려고 노력하는 도리는 오로지 정신을 보존하고 아껴서 정미하고 전일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문체(文體)는 세도(世道)에 관계되는 것이다. 잘 다스려진 시대의 음악은 느리면서 완만하고 어지러운 시대의 음악은 조급하면서 빠른 법이다. 문체를 교정하는 것은 과장(科場)의 시관(試官)에게 달려 있으니, 대사성 자리에 적합한 사람을 얻어서 구임시킨다면 반드시 배양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이조 참
하였다.
○ 호조가 연분 사목(年分事目)을 가지고 아뢰었는데, 판하하기를,
"백성들이 일년 내내 힘써 일하고서야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밭종자이다. 그런데 저렇게 피해를 입었으니 고통이 내게 있는 것만 같다. 수재를 입은 밭에 대하여 목화밭의 예에 따라 급재(給災)하라."
하였다.
○ 9월. 전라감사에게 하유하기를,
"호남은 명현(名賢)과 절의(節義)의 고장이다. 이름난 석학의 자손으로서 글을 읽으며 자신의 행실을 닦아온 사람과 힘이 세고 헌걸찬 사람을 일반적인 격례에 구애되지 말고 등급을 나누어 장계로 아뢰라."
하였다.
○ 사직(司直) 신기경(愼基慶)이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진달하였는데, 답하기를,
"경이 늙은 신하로서 한 번 등연하여 면대한 이후로 자주 숨김없는 말을 진달하니, 그 정성이 가상하고 그 마음이 사랑스럽다. 그래서 당해 도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이후로도 말할 만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전과 같이 하고 태만히 하지 말라."
하였다.
○ 전주(全州)의 김계손(金啓孫)촹성손(聖孫) 형제가 복수하고 자수하였다고 충청감사가 아뢰었는데, 하교하기를,
"그 효성은 너무도 감동스럽고, 그 사정은 너무도 측은하고, 그 마음은 너무도 구슬프고, 그 정성은 너무도 가련하고, 그 뜻은 너무도 장려할 만하다. 이 중에서 한 가지만 있어도 법의 측면에서 용서해주어야 하는데, 더구나 형제 두 사람이 다섯 가지 뛰어난 행실을 겸비하였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마음대로 원수를 죽인 데 대한 율문을 의례적으로 끌어다 쓴다면 세속을 인도하여 풍속을 돈독히 하는 정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원수를 죽이고 나서 나란히 자수하여 법으로 다스려 죽여주기를 청하였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비분강개하여 죽기는 쉽지만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이 김계손 형제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륜행실(二倫行實)》에 싣더라도 지나치다는 혐의는 없을 것이다. 즉시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 사릉(思陵)에 행행하여 직접 제사지냈다.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 정미수(鄭眉壽)의 묘에 관원을 보내어 전작(奠酌)하기를 장릉(莊陵)에 배식(配食)하는 규례대로 하고,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 내외의 묘에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부원군의 묘소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부인의 묘소에 함께 제사지내고, 경기 감사에게 명해서 작은 표석을 세우고 묘지기 두 가구를 지급하게 하였다.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의 묘에 제단(祭壇)을 세우고, 경혜공주(敬惠公主)의 묘소에도 일체 치제하였으며, 여량부원군의 후손과 영양위의 사손(祀孫)을 조용하였다. 또 국내(局內)에 있는 정씨(鄭氏)의 11개 분묘를 능관이 검찰하고 구호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어진(御眞) 두 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경모궁 망묘루에 보관하고 한 본은 현륭원(顯隆園) 재전(齋殿)에 보관하였다. 이것은 조석으로 문안드리는 예를 대신하고 우러러보고 의지하는 마음을 붙이고자 함이었다.
○ 고 상신 김익(金?)의 마을에 정문을 세우라고 명하였는데, 효행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 좌의정 채제공이 차자를 올려 사학(邪學)을 배척하니, 비답하기를,
"이단(異端)이라는 것은 노담(老聃), 석가, 양주(楊朱), 묵적(墨翟), 순황(荀況), 장주(莊周), 신불해(申不害), 한비자(韓非子)만이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로서 올바른 법과 떳떳한 도리에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어서 선왕(先王)의 법언(法言)이 아닌 것들은 모두 해당된다. 정학(正學)을 밝혀 드러내고 사학을 물리치는 책임은 우리 당(黨)의 젊은 사람들에게 있지 않겠는가. 내가 일찍이 연신에게 말하기를, '서양 학문을 금하려고 하면 먼저 패관잡기(稗官雜記)부터 금해야 하고, 패관잡기를 금하고자 한다면 먼저 명(明) 나라 말엽 청(淸) 나
하였다. 이듬해 연경(燕京)으로 가는 사신에게 하교하기를,
"패관소설은 말할 것도 없고, 경서(經書)나 사기(史記)라도 중국 판본에 관계되는 것은 절대로 가지고 오지 말라."
하였다.
○ 11월. 하교하기를,
"형벌을 써서 다스리는 것은 덕으로 인도하는 것만 못하다. 내가 장차 그 책을 불태우고 그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겠다."
하고, 경외에서 서양 책을 집에 감추어둔 자는 관아에 자수하고 관아에서는 그 책을 모아 불태울 것이며, 사술(邪術)을 하는 모든 자는 형벌을 가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해서 기필코 감화시키라고 명하였다.
○ 상이, 영남과 해서 지방에 사술에 물든 사람이 없는 것은 선정(先正)이 남긴 교화라고 하여, 승지 이정규(李鼎揆)를 아경(亞卿)에 발탁하고 첨사(僉使) 이항림(李恒林)을 곤수(?帥)에 제수하였다. 이정규는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후예이고, 이항림은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후손이다. 또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사손(祀孫)을 조용하도록 명하였다.
○ 12월. 정경(正卿)을 보내어 고 상신 서명선(徐命善)에게 치제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고 상신이 한 통의 상소를 가지고 대궐 문에서 호소함에 선대왕께서 크게 장려하고 특별히 벼슬을 올려 발탁하셨다가 이어 정려(旌閭)로 대신할 것을 명하고 그 집안의 선조에게 제사를 내리신 날이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우리 정성성후(貞聖聖后)께서 탄생하신 날인데, 금년으로 꼭 100년이 된다. 나 소자가 태어난 해가 마침 성후의 회갑년이었으니, 이날을 맞이하여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하고,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와 잠성부부인(岑城府夫人)의 사판에 치제하고 사손을 발탁하여 등용할 것을 명하였다.
○ 대신과 비국 당상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이 일찍 올 줄 알고 나도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났다. 숙묘조(肅廟朝)에는 빈대(賓對) 때마다 이른 새벽에 옷을 찾으셨고, 선왕조에도 치평(治平)을 이룩한 50년 동안 근심하며 힘쓰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하루도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든 적이 없으셨으니, 이는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이다."
하였다.
○ 봉상시에서 진봉하는 제물(祭物)은 제조가 감봉(監封)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교서관이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을 올렸다. 이보다 먼저 어제(御題)를 성균관에 내려주면서 관학 유생 및 여러 음관으로 하여금 제술해서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제술에 응한 자가 3000명이었다. 상이 직접 시권(試券)의 성적을 매기고, 이어 모아서 간행할 것을 명하였다.
○ 상이 일찍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나는 기후에 대해서 잠시도 마음을 놓은 적이 없다. 2월부터 가을이 끝날 때까지는 하루도 노심초사하지 않는 날이 없다가 겨울과 이른봄 해동(解凍)되기 전에만 조금 긴장을 풀곤 한다."
하였다.
○ 어정(御定) 《악통(樂通)》이 완성되었다. 상이, 주희(朱熹)와 채원정(蔡元定)의 율려(律呂)가 관현(管絃)으로 연주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서 다시 손질하여 이 책을 만든 것이었다.
16년(임자, 1792)
○ 2월. 우의정 박종악(朴宗岳)이 소를 올려 7개 조항을 진달하였다. 1. 성체(聖體)를 보호하고 아낄 것, 2. 원자(元子)를 보양(輔養)할 것, 3. 징토(徵討)를 엄히 할 것, 4. 언로(言路)를 열 것, 5. 탐욕스러운 풍조를 징계할 것, 6. 인재를 양성할 것, 7. 기강을 진작하여 엄숙히 할 것 등이었는데,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영릉(永陵)에 전알하였다. 파주목(坡州牧)의 전결(田結)과 묵은 재결(災結)에 대한 조세를 영원히 탕감할 것을 명하였다.
○ 3월. 가락국(駕洛國) 시조(始祖)의 능에 봄가을로 제사지내는 의식을 정하였다. 하교하기를,
"가야(伽倻) 시조는 158년 동안 나라를 향유하였으며, 위대하고 신령스러운 공적이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해져 칭송되고 있다. 그 궁궐과 묘소가 김해부(金海府)에 있는데, 조정에서 사전(祀田)을 획급하고 수호군을 두었으며 돌을 세워 경계를 표시해서 백성들이 침범하거나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대개 역대 능묘(陵廟)에 경의를 다하는 것은 바로 제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앞으로 봄가을 제향 때에 향과 축문을 보내주고, 고을 수령이 전작(奠酌)할 것이며, 감(監) 1명을 이 고을에 본관을 둔 사람으로 채워넣으라."
하였다. 또 문화(文化) 삼성사(三聖祠), 평양(平壤) 숭령전(崇靈殿), 경주(慶州) 숭덕전(崇德殿)의 예에 따라 봄가을 중삭(仲朔)에 제사를 행할 것을 명하였다. 또 각신 이만수(李晩秀)를 보내어 치제하게 하고, 돌아오는 길에 숭덕전(崇德殿)에 치제하고 신라의 여러 왕릉을 봉심하게 하였으며, 각각 묘지기 세 가구를 두었다.
○ 온릉(溫陵) 국내(局內)에 신씨(愼氏) 외손인 성씨(成氏)의 무덤들이 있었는데, 그 옆에 울창한 수목을 경기 감사로 하여금 베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국내의 수목은 신중히 다루어야 하지만, 사릉(思陵)에 이러한 조처를 내리고 본릉도 이렇게 하는 것은 성후(聖后)의 마음으로 내 마음을 삼고자 함이다."
하였다.
○ 내원(內苑)에 나아가 꽃을 구경하고 고기를 낚았다. 여러 각신 및 각신의 자제로서 관례(冠禮)를 치른 자들을 불러 짝을 맞추어 활을 쏘고 시를 짓게 하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끝마쳤다. 일찍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군신(君臣) 관계이면서도 가정의 부자(父子)와 같은 의리를 겸해야만 정과 뜻이 서로 통할 수 있는 법이다."
하였다.
○ 4월. 경외에 신칙하여 기민(飢民)이 입에 풀칠하고 몸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각별히 지급하게 하였는데, 전염병이 크게 번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 간성(杆城)촹양양(襄陽)촹고성(高城) 등 고을의 민가에 불이 났으므로 어사 홍대협(洪大協)을 보내어 위유하였다. 화재를 당한 가구는 환자곡을 견감하고 조세를 감면해주도록 명하고, 간성 백성 중에서 다시 돌아온 자나 새로 이사온 자는 10년 동안 요역(?役)을 면제해 주게 하였다.
○ 윤4월. 영흥부(永興府) 산사(山社)의 진전(陳田)에 대한 조세를 견감하게 하고, 다시 돌아온 유민(流民)에 대해서는 공사(公私) 조세와 요역을 일정 기간 동안 면제해 줄 것을 명하였다.
○ 예조 판서 서호수(徐浩修)를 보내어 북도(北道)의 능침(陵寢)을 봉심하게 하고, 이어 함흥(咸興)과 영흥의 두 본궁 및 준원전(濬源殿)의 작헌례(酌獻禮)를 대리로 행할 것을 명하였다. 돌아오자 상이 서호수에게 이르기를,
"이번 제사는 내가 정(情)에 따라 예를 제정한 것이었다. 길이 멀어서 어쩔 수 없이 경을 보내어 대리로 행하게 하였으나, 경이 내려가던 날부터 지금까지 어디에서건 경건히 치재(致齋)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이제 경이 복명(復命)하였으니 조심스럽던 내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릴 수 있겠다."
하였다.
○ 6월. 상이 승지와 각신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오늘이 바로 원자의 생일이다. 경들은 들어와서 보라."
하였다. 원자가 소반의 진기한 과일을 집어서 신하들에게 하사하니, 신하들이 일제히 아뢰기를,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러러 큰 복을 빌고 고개 숙여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바, 기쁨을 표시하려면 함께 기뻐하는 조처가 있어야 하겠다."
하고, 경외의 100세 이상 된 사람, 조관으로서 80세 이상 된 사람, 사서인으로서 90세 이상 된 사람에게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조관과 사서인으로서 도류(徒流) 이하에 해당되는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명을 씻어줄 것을 명하였다. 죄인 중에 사대부를 욕보인 사람이 있었는데, 하교하기를,
"이는 중죄(重罪)가 아니지만 분의(分義)에 관계되는 것이니 그냥 두라."
하였다.
○ 상이 입은 모시 적삼이 여러 차례 세탁하여 올이 성글어졌다. 어떤 연신이 이것에 대해서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어찌 옷 한 벌이 없겠는가. 모름지기 다 입지 않고 남겨두는 것이 있어야만 먼 후손에게까지 물려주려는 뜻에 부합될 것이다."
하였다.
○ 8월. 내섬시 주부 김수증(金守曾)과 강릉 참봉(康陵參奉) 최규정(崔奎晶)을 불러 보았다. 김수증은 곽산인(郭山人)이고 최규정은 삭주인(朔州人)인데, 여러 세대가 함께 산다고 해서 특별히 조용(調用)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몇 세대가 함께 사느냐고 묻자, 김수증은 6대가 함께 산다고 대답하고, 최규정은 7대가 함께 산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여러 세대가 함께 살려면 반드시 그에 관련된 도리가 있을 것이니, 그대는 상세히 진달하라."
하니, 최규정이 아뢰기를,
"신의 선대 때부터 옛사람이 화목하게 지내던 뜻을 본받아 왔습니다. 후손들은 그럭저럭 여풍(餘風)을 지키는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지내던 원구단(?丘壇)이다. 예(禮)에, 사서(士庶)는 오사(五祀)에 제사지내지 못하고 대부(大夫)는 사직(社稷)에 제사지내지 못하며 제후는 천지에 제사지내지 못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건국은 단군(檀君)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역사책에 '하늘에서 내려왔으므로 돌을 쌓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후로도 모두 그대로 따른 것은 중국의 모토(茅土)를 받지 않는 것이 크게 참람된 데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 조정에 이르러서 혐의를 구별하고 은미함을 밝히고자 하여 원구단의 명칭을 남단으로 고쳤으니, 대개 군국(郡國)과 주현(州縣)이 제각기 풍사(風師)촹우사(雨師)에게 제사지내는 제도를 쓴 것이었다. 그러나 지극히 경건하고 지극히 정결하게 하는 정성이 어찌 원구단과 남단의 명칭이 다르다고 해서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나 문헌이 없어져서 근래에 행해지는 규정은 도리어 농잠(農蠶)이나 석채(釋菜)만도 못하게 되고 말았다. 옛날에 정1품이었던 헌관(獻官)의 작품(爵品)이 지금은 종2품이 되고 옛날에 3색(色)으로 했던 대갱(大羹)촹화갱(和羹)이 지금은 새끼양과 돼지의 2색이 되어 《오례의》에 기재된 내용과 크게 어긋난다. 대신에게 의논해서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 이어 남단, 우사단(雩祀壇),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의 헌관을 《오례의》에 정한 품계대로 차임하라고 명하였다.
○ 전조(銓曹)에 신칙하여 경술(經術)과 행실이 뛰어난 선비를 뽑아 아뢰게 하였다.
○ 서울의 쌀값이 뛰어오르자 대신(臺臣)이 유사로 하여금 금지시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무역해서 옮기는 방도에 있어서는 돈과 곡식이 모두 화천(貨泉)이다. 평준화시키는 법에 힘써서 요컨대 모든 하천이 도도히 흐르는 것처럼 해야 하겠는데, 그 방술은 근원이 되는 물을 인도하는 데 달렸을 뿐이다. 지금 금령을 설치하여 그 이익을 막는다면 이익은 막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배와 수레에 싣고 한강을 건너온 자들
하였다.
○ 특별히 영남의 재해 입은 고을에 휼전을 시행하였다. 하교하기를,
"모든 일은 미리 대비하면 제대로 되는 법이다. 지금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반드시 거주지에 안주하여 살아갈 수 있게 할 대책을 강구해야만 백성들이 정말 믿을 곳이 있게 될 것이고 나 역시 밥을 먹으면 목구멍에 넘어가고 잠자리에 들면 눈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9월.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영돈녕부사 홍낙성(洪樂性) 등이 아뢰기를,
"탄일(誕日)의 진하는 바로 전례(典禮)에 실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년 권정례(權停禮)로 하시니 울적한 심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조에는 50년 동안 매번 권정례를 명하셨고, 보령(寶齡)이 높아지신 후에야 간혹 한두 번 사람들의 뜻을 따라주셨다. 더구나 나는 매사를 거창하게 하려 하지 않는데 어찌 이날이라고 해서 진하를 받겠는가."
하였다.
○ 광릉(光陵)에 전알(展謁)하였다. 윤음을 내려 양주(楊州)와 포천(抱川)의 백성에게 하유하고, 특별히 그해의 군향(軍餉)과 환자곡에 대한 모조(耗條)를 견감하였으며, 70세 된 조관(朝官)과 80세 된 사서인으로서 선조 병진년과 을해년의 행행을 우러러본 사람은 모두 한 자급 가자하고, 100세가 넘은 사람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지급하였다.
○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배향한 도봉서원(道峯書院)에 사제(賜祭)하였다.
○ 10월. 처음에 고 대사헌 공서린(孔瑞麟)과 참봉 공덕일(孔德一)의 후손을 거두어 쓰라고 명하고, 이어 중국 조정에서 연성공(衍聖公)의 작위를 대대로 세습하게 한 예에 따라 두파(派)의 후예를 대대로 녹사(祿仕)하도록 명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공씨가 동쪽으로 건너와서 수원(水原) 땅에 처음 정착하였던 사실이 《읍지(邑誌)》에 실려 있기에 감사로 하여금 그 터를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게 했는데, 과연 궐리(闕里)의 사당이 있고 은행나무가 있었으며 대대로 살아온 후손들이 있었다. 또 궐리에서 수십 리 떨어진 곳에 새로 세운 영당(影堂)이 있다고 하니, 감사로 하여금 옛터에다 집 한 채를 지어 성인의 초상을 봉안하게 하라."
하고, 이어 이를 '궐리사(闕里祠)'라고 부르도록 하고 친필로 편액을 써 내렸으며,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내렸다.
○ 전강(殿講)에 직접 임하였다. 특별히 공윤항(孔胤恒)에게 급제를 내리고, 이어 풍악을 하사하였다. 성균관 관원으로 하여금 인도해서 반궁(泮宮)에 이르게 한 다음에 명륜당 주위를 돌게 하였다.
○ 11월. 영남에 곡식 12만 곡, 호남에 6만 곡, 호서에 2만 곡을 획급하여 각각 본도의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12월. 상이 태묘(太廟)의 납향(臘享)을 직접 행하였다. 서계(誓戒)를 마치고 나서 하교하기를,
"납일(臘日)이 바로 온릉(溫陵)의 기신일(忌辰日)이다. 납향은 시향(時享)과 달라서 날짜를 당기거나 물릴 수 없다. 태묘의 제5실 이상도 참으로 중요하기는 하지만, 영녕전(永寧殿)의 인종실(仁宗室)과 명종실(明宗室)에 계신 거룩한 영령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희생을 바치는 제향에 놀라지 않겠는가.
태묘의 제향은, 맹춘(孟春)과 맹추(孟秋)에 지내는 제사를 제외한 여름 제사와 겨울 제사 및 납향의 경우에는 직접 제사지낼 때만 영녕전까지 아울러 거행하게 되어 있다. 지금 납향을 만약 대리로 거행한다면 자연히
태묘 제7실 이하의 제향은 제례(祭禮) 절차를 상고해보면 분명히 근거할 바가 있고, 더구나 생전에 섬겼느냐 섬기지 못했느냐 하는 데 따른 가르침이 경전에 분명히 실려 있다. 신도(神道)가 있는 곳이 바로 인정(人情)이 있는 곳이니 태실(太室)에서 행하는 것이 십분 지당할 것이다. 또 만약 태묘에서만 직접 행한다면 감히 하지 못할 단서가 두 가지 있으니, 이미 직접 제사를 올리면서 영녕전의 제향만 빼놓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겠고, 주원(廚院)에서는 소선(素膳)을 올리는데 태묘에서는 제육(祭肉)을 받는 것을 감히 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음복주와 제육은 모두 제1실의 제물에서 받아서 그 체모가 존엄하니, 제육을 감히 받지 않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그렇다면 제사를 대리로 행했을 때 정리와 예절에 부족함이 있는 것은 작은 일이고, 조종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는 것은 큰 일이 된다. 태묘의 납향을 대신을 보내어 대리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이에 앞서 상주(尙州) 유생들이 상소하여 임진년에 절의(節義)를 다하고 죽은 세 충신 윤섬(尹暹)촹이경류(李慶流)촹박지(朴?)를 서원을 건립하여 제사지내고 김준신(金俊臣)을 배향(配享)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은 서원을 건립하는 것이 나라의 금령에 관계된다고 하여 곤란하게 여겼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나중에 들으니, 상주의 인사들이 충성을 바친 곳에다가 단(壇)을 세워 제사지내고, 또 별도로 제단을 쌓아 장졸들을 제사지낸다고 한다. 만약 이곳에 이런 단이 있는 줄 알았다면 민충단(愍忠壇)의 고사(故事)를 따라 그 단에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이 어찌 편리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어 '충신의사단(忠臣義士壇)'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단 뒤에 작은 비갈을 세웠다. 또 감사 정대용(鄭大容)의 말에 따라 의사(義士) 김일(金鎰)을 배식(配食)하였다.
○ 하교하기를,
"내가 자나깨나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생각은 영촹호남의 가난한 백성들에 대한 것이다. 지금 꽁꽁 얼어붙는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고 해가 바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뒤주는 바닥이 났는데 조세 독촉에 곤욕을 치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느 겨를에 밥이 달겠으며, 베틀에 북은 비었는데 부세를 바치느라 초췌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어찌 감히 따뜻한 옷을 찾겠는가. 삼남(三南) 중에서도 영남이 가장 심하니, 각 고을에서 바칠 내년 봄 대동 목면을 특별히 다 돈으로 대납하도록 허락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은 임금이 뭇 신하를 대하여 성명을 드러내어 부르는 적이 없고 기록하는 관원들도 반드시 관직을 부르는 것이다. 사관이 명을 전하는 때에 왕왕 관직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데, 이는 규례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새로 벼슬에 나온 연소한 자들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상이 직접 임하여 죄수를 심문하였다. 연신에게 이르기를,
"죄인을 국문할 때 함께 모의한 자와 미리 알고 있었던 자가 누구인지를 으레 묻곤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 번 입에서 말이 나와버리면 임금의 권한을 가지고도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을 베풀래야 베풀 방도가 없다. 신하들이 힘껏 청하였으나 내가 끝내 이로써 묻지 않은 데는 뜻하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 상이 활을 10순(巡) 쏘아 49발을 명중시키고 한 발은 쏘지 않고 남겨두었다. 연신이 그 까닭을 우러러 묻자, 상이 웃으면서 하교하기를,
"진요좌(陳堯佐)는 소유기(小由基)라고 불렸는데도 사관이 '10발을 쏘아 8, 9발을 명중시켰다.'고 일컬었으니, 그 어려움이 이와 같다. 어찌 반드시 다 쏘아야 하겠는가."
하였다.
○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다. 곡식 1만 곡을 옮겨 진대하고, 직접 제문을 지어 배가 출발하는 곳과 도착하는 곳의 해신(海神)에게 제사지내게 하였다.
74권 정조조 6
17년(계축, 1793)
○ 1월. 초하루에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상은 등극한 이후로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반드시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였는데, 이날은 영종(英宗)의 보력(寶歷)이 꼭 100세가 되는 해라고 하여 대신(大臣), 경재(卿宰), 시종(侍從)들로 하여금 반열에 참석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진전의 예가 이루어졌다. 올해가 어떤 해인가. 문 안으로 들어가 주선하노라니 솟구치는 그리움을 더욱 금할 수 없었다. 무엇으로써 이날을 기념해야 하겠는가. 경외의 100세 이상 된 노인을 각각 한 자급씩 가자하되, 지방에 있는 사람은 감사로 하여금 쌀과 비단을 하사하게 하고, 지방관을 보내어 풍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어주도록 하라.
오늘 축문(祝文)에 '설날 공경히 절하니 새벽에 문안드리는 듯하고, 뜰에 나온 백발 중엔 기구(耆舊) 신하 많도다.[元正祗拜 若問寢晨 來庭皓髮 亦多耆臣]'라는 구절이 있었다. 옛날을 생각하고 감회를 일으키는 뜻이 의당 선조를 모셨던 경대부(卿大夫)에게 베풀어져야 할 것이다. 아경(亞卿)으로서 병신년 이전에 작질이 오른 자와 하대부(下大夫)로서 본 품계에 있으면서 반열에 참가한 사람을 모두 가자하라."
하였는데, 품계가 오른 사람이 모두 21명이었다. 이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한 것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계축담은록(癸丑覃恩錄)》이라고 이름하였다. 공인(貢人)의 유재(遺在)와 시민의 요역(?役)을 견감하고 여러 도의 병신년 이전 묵은 환자곡의 상환을 탕감해줄 것을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정월 초하룻날 경건히 묘궁(廟宮)을 배알하였으니 의당 선왕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야 할 것이다. 연(輦)을 홍화문(弘化門)에 세우고 수계(隨計)의 관리를 불러 보았던 것은, 첫째는 이 문이 선조 때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였던 문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안에서 내리는 진휼 밑천을 각각 돌아가서 장리(長吏)에게 펴게 하고자 함이었다."
하고, 내탕고의 전(錢) 4000민(緡)과 호초(胡椒) 500근을 삼남 감사에게 나누어주어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만포진(滿浦鎭), 옥동(玉洞), 상토진(上土鎭), 마령(麻嶺)을 백성들이 경작해서 먹도록 허락하고 종포진(從浦鎭) 황수덕(黃水?)의 험준한 곳에 백성을 모집하여 경작하도록 허락하라고 명하였는데, 강계 부사(江界府使) 권엄(權)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현륭원에 전알하였다. 수원 부사(水原府使)를 유수 겸 장용외사 행궁정리사(留守兼壯勇外使行宮整理使)로 삼고 대신(大臣)과 무장(武將)만으로 특지를 받아 제수하도록 명하였으며, 또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또 장용영병방(壯勇營兵房)을 장용사(壯勇使)로 삼고 호위대장을 합청(合廳)해서 그에 속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 2월. 안동(安東)의 사인(士人) 유홍춘(柳弘春)이 기한 안에 환자곡을 상납하지 못했다고 해서 형벌을 받고는 뜻하지 않게 죽었는데, 그의 아내 김씨(金氏)가 손가락의 피로 글씨를 써서 원통함을 폭로하고 남편을 따라 죽었다. 일이 보고되자 하교하기를,
"죽은 자가 품은 한은 우선 논하지 않더라도 따라 죽은 사람의 원통함을 무엇으로 위로하고 풀어주겠는가."
하고, 김씨가 살던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부사 김이익(金履翼)을 먼 곳에 정배할 것을 명하였다.
○ 소민(小民)이 상언(上言)하기 위해 북을 치는 것은 매우 외람되고 난잡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연신이 있었
"저 말할 곳 없는 자들이 억울함을 가슴에 품고 달려와 하소연하기를 어린 자식이 부모에게 하소연하듯이 하니, 그렇게 만든 자가 잘못이지 저들에게는 정말 죄가 없는 것이다."
하였다.
○ 4월. 장연(長淵)의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에 백성을 모집하여 경작을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 5월. 특별히 고 충신 김후손(金厚孫)에게 좌승지 사옹원 부제조를 증직하였다. 김후손은 강서인(江西人)이다. 선조(宣祖) 계사년(1593)에 대가가 본 고을에 머물렀는데, 이때는 병란을 당하여 고을의 주방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김후손이 외방의 동네에서 쌀을 날라오고 먼 곳까지 가서 수륙(水陸)의 반찬을 구하는 등 정성을 다해 어주(御廚)를 마련하기를 60일간 하였다. 고을 사람들이 그 충성에 감격하여, 분주히 오갔다고 해서 앞 시내를 '천도천(千渡川)'이라고 이름붙였다. 감사가 《읍지(邑誌)》를 조사해서 아뢰니, 상이 가상히 여겨 그의 행적을 비석에 기록해서 천도천 가에 세우게 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제품(祭品) 중에서 보(?)촹궤(?)촹변(邊)촹두(豆)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변에 담는 12가지 제품 가운데 하나가 포(脯)인데, 옛날에는 8치 남짓하던 길이가 지금은 1자 3치이고, 1치 반이었던 너비가 지금은 3치 반이며, 2푼이었던 두께가 지금은 1치 3푼이다. 척도(尺度)의 길이를 예기척(禮器尺)을 써서 8치 남짓하게 하는 것은 《의례(儀禮)》의 '포는 길이가 1자 2치이다.'는 글을 근거로 한 것인데, 주척(周尺)의 1자 2치는 바로 예기척의 8치 남짓인 것이다.
열성조에서 예를 제정할 때는 하찮은 제품이라도 모두 질서가 있었다. 효묘(孝廟) 신묘년에 옛 제도를 다시 정비하였고, 숙묘(肅廟) 을유년에는 신칙하는 전교를 내렸으며, 선조(先朝) 갑자년에도 유시가 있었다. 지금부터 포의 규격을 《의례》 및 선조 때 정한 척도에 따르는 것으로 거듭 규정을 밝히고, 호조에서 놋쇠로 표준을 만들어 나누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 태창(太倉) 관원을 자벽(自?)하여 구임(久任)시키는 규정을 정하였는데, 호조 판서 심이지(沈?之)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교동부(喬桐府)에 기근이 들었다. 어사 윤치성(尹致性)을 보내어 위유하고, 곡식 2000곡을 옮겨서 진휼하였다.
○ 해서(海西)의 연안(延安) 등 고을에 기근이 들었다. 어사 홍대협(洪大協)을 보내어 위유하고, 별도로 윤음을 내렸으며, 진휼 곡식 7000곡을 조처해서 지급하였다.
○ 10월. 하교하기를,
"대간의 일은 실로 개탄스럽다. 대청(臺廳)이 오래도록 잠겨 있고 빈대(賓對)를 걸핏하면 어기곤 한다. 일이 징토(懲討)에 관계되면 상소가 날로 쌓여가지만, 그것이 아니면 관원들이 서로 바로잡아주는 말까지도 들을 수 없다. 위로는 임금의 옳고 그름과 아래로는 백성들의 괴로움과 즐거움에 대해 어찌 말할 것이 없겠는가. 그런데도 여전히 침묵만을 지킨단 말인가. 차대(次對) 때 패초를 청하지 못하도록 일찍이 하교한 바 있었는데, 지금 이후로는 절대로 패초를 청하지 말라."
하였다.
○ 행 사직 이문원(李文源)이 아뢰기를,
"공사복(公私服)의 창의(?衣)를 이미 청색만 사용하게 하였으니, 사복(私服)에 사용하는 백화(百靴)도 의당 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 100세 노인 김선걸(金善傑)을 불러 보았는데, 금산인(金山人)이었다. 하교하기를,
"태어난 해를 묻자 갑술년이라고 대답하였으니, 나이 많은 사람을 높이고 노인을 우대하는 도리에 있어서 의당 특별히 뜻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특별히 숭정의 계급을 초자(超資)하고 오위장에 차임하라. 호조로 하여금
하였다.
○11월. 관상감과 한성부에서 역서(曆書)를 올리는 때와 인구수를 조사해서 바칠 때 영사(領事)와 판윤이 직접 바칠 것을 명하였는데, 경건히 올리고 절한 후에 받으려는 뜻이었다.
○ 대신과 예조 당상이, 이듬해는 자전의 보령(寶齡)이 오순이 되고 자궁의 보령이 육순이 되는 해라고 하면서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안에서 말씀을 드려보았으나 매번 완강히 거절하는 분부만 내리셨다."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정월달에 하례(賀禮)만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신하들이 세자 책봉을 청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은 7, 8세가 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려는 것이다."
하였다.
○ 장령 강봉서(姜鳳瑞)는 제주인(濟州人)인데, 상소하여 목사 이철운(李喆運)이 곡식을 도적질하고 백성을 학대한 죄를 논하였다. 상이, 그 지역 사람으로서 지방관을 탄핵하는 것은 풍속과 교화에 관계된다고 하여 홍봉서를 귀양보내고, 교리 심낙수(沈樂洙)를 어사로 삼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철운은 죄를 받고 유배되었다. 제주 백성에게 윤음을 내려 하유하기를,
"귤이 소반에 올라오면 너희들이 고생하며 재배한 것을 생각하고, 말들이 떼지어 대궐 뜰에 들어오면 너희들이 분주히 기른 것을 생각한다. 또 찬바람이 매섭게 불고 눈이 펄펄 날릴 때면 공물을 실은 배가 염려되어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데, 너희들은 이렇게 잊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아느냐?
지난해에 곡식 1만 곡을 내려서 부황이 들어 위급한 너희들을 특별히 구제하였는데, 배를 띄우려 할 때 감사에게 거듭 하유하여 해신(海神)에게 복을 빌게 했더니 바람과 물결이 고요하여 무사히 일을 마치고 돌아왔었다. 봄볕이 따사로운 때에 진휼을 시작하면서부터 너희들 때문에 근심하지 않는 날이 없다가 곧바로 5월이 되어 진휼이 끝났다는 보고를 접하게 되어서야 남쪽으로 향하는 근심이 조금 풀렸었다.
아, 양(陽) 하나가 비로소 생겨 만물이 장차 소생하게 될 것인데, 너희들은 환자곡을 창고에 다 상환하고 집에서 편안히 쉬면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부모를 봉양하고 옷을 만들어서 아이들에게 입히고 있는가? 보리 농사가 곳곳에 큰 풍년이 들고 배를 타는 사람들은 모두 순조롭게 바다를 건너기를 바라며 너희들에게 깊은 축원을 보낸다."
하였다.
○ 12월. 자신보다 직급이 높은 조관(朝官)을 만났을 때 길을 양보하고 회피하는 법식을 신칙하였는데, 행 사직 이문원(李文源)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내각과 홍문관이 상신(上辛)의 기곡제(祈穀祭)를 입춘(立春) 전에 하는 것이 옳은지 후에 하는 것이 옳은지를 널리 조사해서 아뢰었다. 대신 및 관각(館閣)에 물었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았는데, 하교하기를,
"경(經)에 이르기를, '천자는 원일(元日)에 곡식이 잘 되기를 빈다.' 하였는데, 원일을 상신이라고 해석한 것은 정현(鄭玄)의 주(註)에서 시작되지만 해석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오조지(吳操之)촹진팽년(陳彭年) 무리들이 억측으로 만들어낸 논의는 실로 경중을 따질 것도 없다. 약(?)촹사(祠)촹증(烝)촹상(嘗)은 계칩(啓蟄)이나 폐칩(閉蟄), 춘분촹추분촹하지촹동지로 한정하지 않고 반드시 상순(上旬)으로 날을 잡는데, 옛 경서를 조사해 보면 명확한 증거가 부족하지만 통상적인 의리로 구하여 보면 명확한 근거가 충분히 있다. 더구나 제후의 예는 천자와 달라서 사(社)에는 제사지내고 교(郊)에는 제사지내지 않는다. 빈(?) 땅 사람들은 섣달에 풍년을 빌어도 해마다 풍년이 들어서 송축하는 노래가 누차 넘쳐흘렀으니, 신명이 굽어살펴 자손들에게 경사를 주는 것이 정성과 공경에 달려 있지 어찌 입춘 전에 하느냐 후에 하느냐에 달려 있겠는가. 기곡제를 정월 상신에 지내는 현재 규정을 그대로 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고 처사 유형원(柳馨遠)의 《반계수록(磻溪隨錄)》에 수원(水原)의 형편을 논한 곳이 있는데, 고을 소재지를 옮겨야 한다는 계책과 성을 쌓아야 한다는 책략은 마치 100년 전에 살면서 오늘날의 일을 환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책을 보고 그 말을 썼더라도 오히려 크나큰 감응이라고 할 것인데, 그 책을 보지 않았는데도 본 것과 같고 그 말을 듣지 않았는데도 이미 썼으니, 그 사람이 품은 생각은 실로 대단하였다. 지금 화성(華城)의 한 가지 일로 보면 나에게 있어서 그는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 성균관 좨주를 가증(加贈)하고, 그의 사손(嗣孫)을 방문한 후에 보고하라."
하였다. 나중에 또 이조 참판을 가증하였다.
○ 행 사직 정민시(鄭民始)가 아뢰기를,
"법전에는 본래 장오죄(臟汚罪)를 다스리는 조문이 없으므로 장리(贓吏)가 있으면 곧바로 감수자도율(監守自盜律)로 다스립니다. 장오죄를 범한 경우 40관(貫)이 차지 않은 자는 없는데, 이 수를 넘으면 천만 금에 이른다 하더라도 같은 조문을 적용합니다. 법관으로 하여금 대신에게 의논해서 장오의 다소에 따라 형률의 경중을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대신들이 이미 정해진 율문 이외에 다시 조문을 세울 필요는 없다고 하니, 상이 의금부로 하여금 의견을 통일해서 품처하게 하였다. 의금부가 아뢰기를,
"재결(災結)에서 사사로이 쓰거나 환곡을 가지고 입본(立本)한 자는 걸핏하면 유용한 죄로 귀결시켜서 조율하기 때문에 법을 시행하지 못하고 맙니다. 재결에서 사사로이 쓴 것이 100결 이상이거나 환곡을 가지고 입본한 것이 1000곡 이상인 자는 모두 엄히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상이 일찍이 법부의 심리 문건을 보다가 죄는 무겁지만 정리상 사형시킬 수 없는 사례를 보고는 연신을 돌아보며 탄식하기를,
"이 사람이 실로 무슨 잘못인가. 세상에는 본래 반드시 죽여야 할 사람은 없는 법이니, 단지 윗사람이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는 것이다. 명도(明道)가 이른바 '우리들이 분발시켜서 이루어주어야 한다.'는 말은 실로 천고의 격언이다."
하였다.
○ 나주(羅州)의 백성 이봉운(李鳳運) 형제가 사람을 때려서 죽게 만들었다. 옥안이 갖추어지자 판하하기를,
"형제가 서로 죽으려고 하는 것에서 본연의 양심이 민멸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 사건에 범인이 둘일 경우 대부분 가벼운 형률을 적용해왔다. 더구나 정범(正犯)을 구별하기 어려운데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법과 윤리는 서로 대등한 것이니, 특별히 사형을 감하는 것으로 논죄하라."
하였다.
○ 고 이조 판서 송언신(宋彦愼) 집에 옛날부터 보관해온 선조(宣祖)의 어찰(御札)이 있었는데, 이는 선조가 용만(龍灣)에 주필(駐?)하였을 때 송언신을 북도의 관찰사로 임명하면서 친필로 쓴 글을 내려 북도의 일을 맡긴 것이었다. 상이 가져오게 해서 깊이 음미해가며 읽은 후에 지방관에게 명하여 그 집으로 가서 받들어 봉안하게 하고, 송언신에게 시호를 내렸다.
18년(갑인, 1794)
○ 1월.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행하고, 교지를 반포하여 대사면을 행하였다. 70세 이상 된 조관(朝官)과 80세 이상 된 사서인(士庶人)을 모두 가자하고, 자궁(資窮)된 자는 세찬(歲饌)을 적절히 지급하였으며,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遺在)와 시민(市民)의 요역(?役)과 반인(泮人)의 푸줏간 속전을 차등 있게 견감하였고, 여러 도의 묵은 환자곡 10만 곡과 증렬미(拯劣米)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도치를 모두 탕감하였다. 상이 직접 내각의 축하 전문(箋文)을 받을 때 원자가 입시해 있었다. 산호(山呼)를 부른 것이 다섯 번이었는데, 각신이
"네 번 천세(千歲)를 부른 것은 사전(四殿)을 위하여 송축한 것이고, 그 다음은 나 또한 천수를 누리도록 송축한 것이다."
하니, 신하들이 일제히 경하드렸다.
○ 태묘(太廟)에 제물(祭物)을 받드는 법식을 다시 정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상을 제사지내는 도리에 있어서는 정성과 공경이 독실해야만 신명을 감응시킬 수 있는 법이다. 체(?) 제사에서 이미 강신(降神)한 이후로는 성인도 그 태만함에 대해 탄식하였다. 지금 태묘 대제의 봉조관(捧俎官)은 수가 많아서 신중히 택할 수 없으며, 더구나 섬돌에 올라가서 바삐 움직이는 때에 마구 뒤섞여 엉망이 되어버려 제물을 올리는 일이 지체되곤 한다. 또 억만년 유구히 이어갈 계책으로 말하더라도 재량하고 참작할 일에 대해서 더욱 뜻을 쏟아야 할 것이다.
소촹양촹돼지의 적대(炙臺)를 담은 세 상자를 바깥의 큰 상자에 담은 후에 봉조관(捧俎官) 한 사람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천조관(薦俎官)에게 전하게 하고, 천조관이 받아서 대축(大祝)에게 주면 대축이 묘사(廟司)와 함께 조상(俎床)에 놓도록 하라. 이것을 춘향 대제부터 법식으로 삼으라. 봉조관은, 친향(親享) 때는 각실(各室)에 1명씩, 섭행할 때는 통틀어 5명을 차출하라."
하였다.
○ 현륭원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낸 다음에 화성(華城) 성지(城址)를 살펴보았다. 영중추부사 채제공에게 이르기를,
"원소(園所)는 화산(花山)이고 이 고을은 유천(柳川)이다. 화인(華人)이 성인을 위해 축원한 뜻을 취하여 이 성을 화성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화(華)와 화(花)의 글자 음이 서로 통한다. 화산의 뜻은 대개 800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둘러싼 채 보호하는 것이 꽃송이와 같다고 해서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의 형상을 남북이 조금 길게 만든다면 또한 버들잎과 같은 뜻이 될 것이다."
하였다. 대가가 환궁하여 경모궁에 전배하였는데, 이튿날이 장헌세자의 탄신일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지나치게 슬퍼하였고, 그대로 재전(齋殿)에 머물렀다가 새벽이 되면 예를 행하려 하다가 자궁의 하교로 인해서 환궁하였다.
○ 2월. 하교하기를,
"관동(關東) 경공생(經工生)들이 대책(對策)한 십삼경(十三經)의 강의(講義)를 차분히 살펴보느라고 밤이 깊은 줄도 몰랐으니, 참으로 경의(經義)에 밝지 않았다면 어찌 이렇게 분석할 수 있었겠는가. 전 참봉 안석임(安錫任)과 전 주부 박사철(朴師轍)을 모두 올려서 돈녕부 도정에 제수하고, 각각 영동과 영서의 분교관(分敎官)에 차하해서 선비들을 가르치게 하라. 그리고 진사 최창적(崔昌迪)은 동몽교관에 의망해 들이라."
하였다. 대책한 경의를 모아 편찬해서 간행해 올리도록 명하고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이라고 이름붙였다. 후에 또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촹《풍패빈흥록(?沛賓興錄)》촹《관서빈흥록(關西賓興錄)》이 있었다.
○ 응제(應製)에 합격한 유생들에게 장전(帳殿)에서 식당(食堂)을 베풀어주고, 내탕고의 쌀 30포와 돈 100민을 특별히 성균관에 내려 인재를 양성하는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 3월. 승지를 보내어 고 상신 유성룡(柳成龍)의 사판(祠版)에 치제하였다. 이에 앞서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사명을 받들고 영남에 갔다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편지 및 문원공(文元公) 이언적(李彦迪)의 《대학속혹문(大學續或問)》을 가지고 왔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 머리에 어제(御製) 서문(序文)을 쓰고, 승지에게 명하여 두 서원에다 보관하게 하였다.
○ 황해 수영에 우후(虞侯)를 두도록 명하였는데, 곤수(?帥)가 행영(行營)에 머무를 때 편비(?裨)가 본영(本營)을 지키는 관계로 방비가 매우 엉성하기 때문이었다.
○ 태묘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서계(誓戒)를 직접 행하려 했는데 마침 그날이 명릉(明陵)의 기신(忌辰)이었다. 하교하기를,
"비록 음악을 연주하지는 않지만, 능향(陵享)을 행하는 때에 성대한 복장으로 전각에 나가는 것은 정리(情理)
하였다.
○ 4월. 제주 어사(濟州御史)가 가는 편에 논(論)촹책(策)촹시(詩)촹부(賦)촹명(銘)촹송(頌)의 각 어제(御題)를 주어 보내어 선비를 시취하고, 각 글제에서 수석한 사람 및 81세로 합격한 사람을 모두 사제(賜第)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제주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미곡 1만 곡을 지급하여 진휼하였다. 또 본도의 상부(常賦)와 공화(公貨)를 곡식 5000포만큼 본도에 덜어 두어 안에서 내리는 진휼 비용을 대신하게 하였으며, 진헌에 관계되는 모든 물건을 견감하였다.
○ 5월. 즉시 계품해서 처리해야 할 민사(民事)는 재계하는 날을 만났더라도 묘당에서 초기(草記)하고 회계(回啓)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고 예문관 제학 유몽인(柳夢寅)을 복관(復官)하고 곧이어 이조 판서를 가증(加贈)하였다. 하교하기를,
"유몽인이 읊은 백주(栢舟)와 남록(南麓)은 실로 천고(千古)에 뛰어난 작품이다. 혼조(昏朝)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反正)한 후에도 한번 먹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기자헌(奇自獻)은 함께 무고를 당했지만 곧바로 복관되었는데, 유몽인만은 이러한 절개를 가지고도 끝내 논하지 않는 데로 귀결되고 말았으니, 길재(吉再)촹김시습(金時習)과 같은 사람들을 대우한 성의(聖意)가 아니다."
하였다.
○ 7월. 날씨가 가물었다. 반찬수를 줄이고 풍악을 거두었으며 바른말을 구하였다. 대신이 시무(時務)에 관한 5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1. 명분과 의리를 부지하여 세울 것, 2. 기강을 진작시킬 것, 3. 염치를 장려하고 탐욕을 징계할 것, 4. 옥사를 심리하고 형을 바르게 쓸 것, 5. 명기(名器)를 아낄 것 등이었다.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8월. 증 판서 김륵(金?)과 충정공(忠定公) 권벌(權?)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근래에 김륵이 중국에 갔을 때 상제가 하사한 《대학연의》와 선조(先祖)께서 하사하신 향본(鄕本) 《연의》 및 어제시(御製詩)를 보았다. 이 어찌 한 사람 한 집안이 사사로이 보물로 간직할 것이겠는가. 권벌이 중묘(中廟)의 성대한 시절에 경회루에서 열린 잔치에 참석했다가 몸에 지니고 있던 《근사록(近思錄)》을 자리 밑에다 떨어뜨린 것을 성조께서 권벌에게 돌려주도록 명하셨었다. 이 일은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선조께서 향본 1벌을 하사하시면서 그 일을 써서 기록하였는데, 내가 지금 가져다 보니 감회가 이는 것을 스스로 깨닫겠다."
하였다.
○ 9월. 각도의 구관 당상에게, 당해 도의 민사(民事)를 각별히 살펴서 고문(顧問)에 대비하라고 신칙하였다.
○ 상이 이해가 크게 경사스러운 해라고 하여 자전과 자궁에게 하례드렸고, 경외의 노인에게 차등 있게 관작을 하사한 것이 모두 7만 5145명이었다. 이어 기구 신하와 육경 (六卿) 이상을 불러서 의의와 범례를 지정해준 후에 모아서 한 책을 만들고 《인서록(人瑞錄)》이라고 이름붙였다. 기구 신하 홍낙성(洪樂性)촹채제공(蔡濟恭)촹구윤명(具允明)촹이민보 (李敏輔)촹홍억(洪檍)촹홍양호(洪良浩)촹김지묵(金持?)촹조환(趙?)촹변득양(邊得讓)촹홍수보(洪秀輔)촹김상집(金尙集)촹신사운(申思運)촹정존중(鄭存中)촹한광계(韓光?)촹유당(柳戇)등이 전문(箋文)을 올리고, 각각 그 아들촹조카촹손자촹증손자를 데리고 자리로 나갔다. 예가 이루어진 다음에 상이 기구 신하를 앞으로 불러서 인견하였는데, 이때 원자가 입시해 있었다. 홍낙성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모두 기로소의 신하로서 손에 《인서록》을 받들고서 문폐(文陛) 앞으로 나와 7만여 명의 수명을 모두 합친 50여억 년을 우리 성상 및 우리 원자궁께 바치며, 이것으로써 화서국(華胥國)의 기년(紀年)을 삼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장수를 누리는 노인들이 모두 한 당에 모였는데, 따라 들어온 아들촹손자촹증손촹현손을 통틀어 계산하면
하였다. 채제공이 이르기를,
"연석의 기구 신하들은 모두 장수를 누리고 지위도 재상을 지낸 자들인데, 혼인한 지 60주년이 된 자와 과거에 합격한 지 60주년이 된 자도 많이 있으니, 지난 역사에 없었던 상서라고 할 만합니다. 시인이 일컬은, 장수를 누렸던 문왕(文王)의 교화를 과연 오늘날에 비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기로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면서 이르기를,
"이것은 자궁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경들은 각각 배불리 먹고, 남는 것은 자손들에게 주도록 하라."
하니, 기로 신하들이 일어나서 사례하기를,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은덕에 배불렀다'는 시를 신들이 일찍이 읽으면서 1000년 전의 일을 흠앙하고 부러워했었는데, 오늘 직접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기로 신하의 손자와 증손 가운데 관례를 치르지 않은 자는 나아가 원자를 뵙도록 하라고 명하니, 원자가 엿, 과일, 주머니, 띠 등을 하사하였다. 기로 신하들이 차례로 나아가 원자에게 절하자 원자가 답배(答拜)하였다. 홍낙성 등이 천세를 세 번 부르자, 이에 전(殿)의 아래위가 모두 천세를 세 번 불렀다. 상이, 이 일은 기록함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어제시(御製詩) 한 수를 내렸다. 시에 이르기를,
남극성이 두 줄기로 비춰 무녀성 창성한데/南極雙輝寶?昌
인서록을 나눠주어 중광을 송축하네/錫敷人瑞頌重光
하였다. 연석에 참석한 자들이 모두 화운하여 짓고, 이것을 모아 한 첩(帖)으로 만들었다. 이어 기구 신하들에게 법악(法樂) 1부(部)를 하사하여 집까지 인도해 가게 하였다.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전례에 따라 수정해서 인쇄하여 사고(史庫)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하교하기를,
"듣건대, 여러 도의 감사들이 내년은 다른 해와 다르다고 해서 감히 진휼을 논의하지 못한다고 한다. 천년에 한 번 만난 경사스러운 때에 우리 백성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도리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천보(天保) 구여(九如)에서는 그 임금을 송축하면서 반드시 '뭇 백성들이 모두 그대의 은덕을 입는다' 하였고, 맹자(孟子)는 임금에게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하면서 반드시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과 백성과 더불어 음악을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임금을 인도하여 도리에 맞게 하는 일에 어찌 그리도 상반된단 말인가."
하였다.
○ 10월. 검교직각 서영보(徐榮輔)를 강진(康津) 촹해남(海南) 촹장흥(長興)촹영암(靈巖) 등 고을의 위유사로 삼았는데, 네 고을에 제주로 곡식을 옮겨보내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영운(領運)을 감독하고 네 고을 백성들을 위유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달 13일은 바로 제주로 가는 배를 띄우는 날이다. 정성을 다해 묵묵히 비는 것은 오직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는 데 있다. 이 곡식이 비록 관(官)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연로의 백성들이 먹어야 할 곡물이다. 이쪽에서 빼앗아다 저쪽에 주자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사람이 지고 말에 실어서 배가 있는 곳으로 운반하여 다른 사람의 배를 채워주기 위해서 도리어 내 몸이 고생하는 상황을 상상하면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하고, 이어 명하기를,
"네 고을의 쌀, 포, 돈으로서 몸에서 나와 경외(京外)로 바치는 것을, 극심한 민호는 전부 탕감하고 그 다음은 반을 탕감하라. 진상에 속하는 모든 조항은 내년 가을까지 모두 감면하라. 그리고 흥양(興陽)과 진도(珍島)도 위와 같은 예를 적용하라."
하였다. 신하들이 연석에 입시한 채로 시간이 오경(五更)에 이르렀다. 잠자리에 들기를 우러러 청하는 자가 있자, 상이 이르기를,
하였다.
○ 표류해 온 유구국(琉球國) 사람이 경기에 이르렀다. 하교하기를,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직임을 맡았던 유구국 사람이 있었다. 특별히 총관에 제수하고 보검(寶劍)을 가지고 차비문(差備門) 근처에서 시위하게 했었으니, 이는 불과 200년 전의 일이다. 먼 나라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측면에서 특별히 돌보아줌이 있어야만 의리상 옳은 일이 될 것이다. 승지가 경기 순영으로 가서 감사와 함께 위문하고, 술과 음식을 대접하고 몸을 가릴 물건을 넉넉히 지급하라."
하였다.
○ 비변사 당상 조진관(趙鎭寬)에게 명하여 《혜정연표(惠政年表)》를 편성하게 하였는데, 황정(荒政)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었다.
○ 11월. 화성(華城)의 성(城) 역사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삼남과 경기 지방 백성이 한가을에 굶주림으로 쓰러지고, 서북의 변방 고을도 양곡을 대기 어렵다고 보고해왔다. 자전과 자궁의 어공조차도 정지한 판국에 성의 역사가 비록 중요하다고 한들 이것은 정지하면서 저것은 정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굶주리다 쓰러져서 나뒹구는 근심이 온 나라 안에 한창 급한 마당에 한 고을에는 건축 현장에서 힘쓰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면, 처자식을 부양해야 할 저 쇠잔한 백성들이 '우리 임금은 어찌하여 성을 쌓는 데 쓰는 마음을 백성들에게 베풀지 않으며, 성을 쌓는 데 드는 재물을 백성들을 살리는 데로 옮기지 않는가.'라고 하지 않겠는가. 또 '구중 궁궐의 밝은 불빛이 가난한 백성들은 비추지 않고 단장한 누각과 성가퀴만 비춘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내 어찌 감히 옛날 선왕께서 백성들을 사랑하고 돌보시어 행차하는 길에 곡식을 밟지 못하게 했던 덕스러운 뜻을 본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의논하는 자들은, '흉년에 토목 공사를 일으키는 것은 실제로 구휼을 겸하는 것이니, 주자(朱子)가 남강군(南康軍)에서 구황 정책을 행한 고사와 범중엄(范仲淹)이 절서(浙西)에서 기민을 구휼한 자취를 상고하여 다시 시행할 수 있다.'고 하지만, 이는 한 고을이나 한 진영의 정사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지금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한 나라 백성들에게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해 놓고는 부황이 든 저 많은 백성들을 억지로 끌어모아 한 성을 쌓는 역사에서 품을 팔아 먹고살게 한다면, 그곳에 이를 자와 살아날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지금의 방도로는 황정(荒政)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쏟는 것이 가장 좋다."
하였다.
○ 이익운(李益運)을 영남 위유사로, 홍대협(洪大協)을 호서 위유사로 삼았다. 조세를 견감 하고 구휼하는 윤음을 내렸다.
○ 선희궁(宣禧宮)의 동지제(冬至祭)를 직접 행하였는데, 이듬해가 바로 본궁이 꼭 100세가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 하교하기를,
"매년 대정(大政) 때 태학에서 천거한 한 사람을 초사(初仕) 자리에 임용하도록 한 것은 법의 뜻이 매우 아름답다. 그런데 근래에 태학생으로서 관리가 된 사람이 있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으니, 어찌 전조(銓曹)만의 책임이겠는가. 성균관의 수치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매년 섣달에 생진시(生進試), 응제(應製), 어고은사(御考恩賜)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자를 대사성이 내각에 보고하면 전조에다 천거하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동지(冬至)와 정조(正朝)의 진하(陳賀) 절목(節目)을 《오례의》에 따라 조하(朝賀)로 개칭하도록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관북(關北)에 곡식 5000곡(斛), 영남에 13만 곡, 호서에 3만 5000곡, 호남에 9만 곡, 관서에 5500 곡, 경기에 1만 5000곡을 조처해서 지급하여 각각 본도의 진휼 밑천에 보태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정리소(整理所)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내년 봄의 경사를 수식하고 기쁨을 기록하는 일은 나에게는 천년에 한 번 있을 성대한 순간이 될 것이다.
하였다.
○ 새로 간행한 사서(四書)와 삼경(三經)을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도록 명하였다. 각신에게 이르기를,
"잘 지키도록 하라. 옛날에 영릉(寧陵)에는 《심경(心經)》을 순장하고 병신년 산릉(山陵)에는 《소학(小學)》을 순장하였는데, 내가 장차 그 뜻을 계술(繼述)하려 한다."
하였다.
○ 어정(御定)《주서백선(朱書百選)》이 완성되었으므로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교하기를,
"오늘날의 선비 중에서 주자(朱子)의 글을 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내 장차 이 편을 가지고 한 세상을 크게 변화시키는 권여(權輿)로 삼고자 한다. 백선(百選)을 한의도는 오늘날 사람들의 병통이 널리 공부하면서도 요지를 알지 못하거나 골라 읽으면서도 정밀하지 못한 데 있기 때문에 먼저 간략한 곳에서부터 손을 대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는 또 높은 곳에 오르려면 낮은 데로부터 오르고 멀리 가려면 가까운 데서부터 출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였다.
19년(을묘, 1795)
○ 1월. 60세 이상 된 대신과 경재(卿宰)에게 특별히 세찬(歲饌)을 하사하라고 낭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자궁이 회갑을 맞는 경사스러운 해이기 때문이었다.
○ 자전과 자궁이 장차 경모궁에 나아가려 하였으므로 신하들에게 의식 절차를 물었다. 내각이 아뢰기를,
"여러 의논들을 서로 참고해 보건대, '자전의 행례(行禮)는 선조(先朝) 때 종묘에 배알하셨던 의식을 써야 합니다.'라고 헌의한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의 논의가 가장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자궁의 행례는, 삼가 살펴보건대 도서집성(圖書集成)《대정기(大政記)》에 이르기를, '가정(嘉靖) 5년에 황제가 태후(太后)를 모시고 흥헌묘(興獻廟)에 배알하였는데, 당(唐) 나라 개원(開元)에 황후가 사당에 참배할 때의 의식을 인용하였다.' 하였으니, 장성(章聖)이 흥헌묘에 배알할 때는 태묘에 배알할 때의 의식을 사용하고 동등한 신분이라고 해서 의식을 간략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살펴보건대, '만력(萬曆) 8년에 황제가 두 황태후를 모시고 후비 들을 거느리고서 영릉(永陵)에 배알하였는데,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소릉(昭陵)으로 가서 영릉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행하였다.' 하였으니, 효정(孝定)과 효안(孝安)이 소릉에 배알할 때도 능에 배알할 때의 의식을 쓰고 동등한 신분이라고 해서 의식을 강등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궁이 의식을 행하실 때는《명사(明史)》의 묘현례(廟見禮)를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절을 몇 번 하느냐 하는 문제는, 묘현례의 의식에 따르게 되면 재배(再拜)를 해야 하겠고 능을 배알하는 의식에 따르게 되면 사배(四拜)를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사당에 임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달리 어긋나는 의견이 없다. 자궁이 배례(拜禮)하는 장소는 묘현례의 옛 의식을 써서 섬돌 위에 자리를 설치하도록 하라. 배례도 현재 쓰는 제도를 써야만 선대의 제도를 따르는 도리에 맞을 것이다."
하였다.
○ 왕대비에게 '수경(綏敬)'이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는 존호를 추상(追上)하였으며,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써서 혜경궁(惠慶宮)에게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때에 고사(?師)와 여령(女伶)을 생략하도록 명하였는데, 자궁의 뜻을 체념(體念)한 것이었다. 명정전에 나아가 자궁의 회갑을 진하하는 치사(致詞)촹전문(箋文)촹표리(表裏)를 올
○ 상이 자전과 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나아갔는데, 이때 중전도 함께 나아갔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니 이날이 장헌세자의 회갑날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매번 월근문(月覲門)을 통하여 한 달에 한 차례 전배하였는데, 이해에는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여 오향(五享) 및 속절(俗節)과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를 모두 직접 행하였으며, 간혹 며칠 동안 재전(齋殿)에 머물기도 하였으니, 1년 동안 전배한 것이 모두 50여 차례였다.
○ 윤2월. 상이 장차 자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려 하였다. 태복시(太僕寺)가 자궁의 가교(駕轎)를 만들었는데, 편전(便殿)의 앞뜰로 가져오도록 명하여 수레의 덮개, 발, 휘장 등을 하나하나 직접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또 직접 가마 안으로 들어가서 간살이 넓은지, 구조가 편리한지를 시험해보았다.
○ 상이 자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나아갔다. 화성(華城)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자궁에게 음식상을 올리는 때에 칠작례(七爵禮)를 행하였다. 대신, 경재(卿宰), 종척(宗戚), 내외 명부(命婦)에게 명하여 들어와 참석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락궁(長樂宮)에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낙남헌(洛南軒)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경건히 북두(北斗) 자루로 술을 따르고 남산(南山)처럼 장수하시기를 빌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또 너희 노인들을 섬돌과 뜰로 불러들였다.
아래에서 이미 화봉인(華封人)의 축원을 올렸는데 위에서 어찌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선물을 아끼겠는가. 노인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이하 70세 이상 및 61세가 된 사람에게 비단 한 필씩을 하사하고, 또 황색 명주를 주어 구장(鳩杖)에 매게 하라. 본 고을에서 연회에 참석한 사람은 한 자급을 가자하라.
한 고조(漢高祖)는 풍패(?沛)에 대해서, 광무제(光武帝)는 남양(南陽)에 대해서 탕목읍(湯沐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히 급복(給復)의 은전을 내렸었다. 이에 앞서 이미 급복한 이외에 원소(園所) 아래에 거주하는 백성에게는 특별히 2년을 더 급복하고, 성 안팍에 사는 백성에게는 1년을 더 급복하라."
하였다. 이튿날 상이 신풍루(新?樓)에 나아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조금 떨어진 마을에는 승지를 파견하여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에게 먹이게 하였다. 정리소(整理所)의 남은 돈 1만 민을 제주로 보내어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고, 또 1만 민으로 화성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또 2만 민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곡식을 마련해서 환자곡으로 삼게 하고, 이를 정리곡(整理穀)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 무오년에 전부 화성부로 옮겨 쌓은 다음 방출했다가 거두어들이게 하되 모곡(耗穀)은 영원히 없애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화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천년 만년 유구히 자전의 은혜와 자궁의 덕을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 낙남헌에 나아가 양로연(養老宴)을 행하였다.
○ 하교하기를,
"매번 원소를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이르게 되면 걸음을 멈추고서 멀리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했었다. 이번 행행 때 미륵현 위에 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臺) 형태와 같은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다음부터는 행행하는 노정에 지지대를 추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 평안도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의 장계로 인하여 예조가 계청하기를,
"정주(定州) 달천(?川)의 태조가 개선하고 선조(宣祖)가 주필(駐?)하였던 곳에 비석을 세워서 사적(史蹟)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르기를,
"호남의 팔량치(八良峙), 해서의 약마지(躍馬池), 관서의 이화정(梨花亭), 북관의 독서당(讀書堂)촹치마대(馳馬臺)에 비를 세우거나 누각을 세워서 먼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붙였던 것은 열조께서 이미 행하신 자취이다. 지금 달천의 승전(勝戰)하고 주필하셨던 곳에만 어찌 사적을 기록하는 일을 빠뜨리겠는가."
하였다.
○ 환조대왕(桓祖大王)과 의혜왕후(懿惠王后)를 영흥 본궁(永興本宮)에 추제(追?)하였는데, 이해가 환조가 탄생한 여덟 번째 회갑 해이기 때문이었다. 정릉(定陵)에 대신을 보내어 작헌례를 행하였다. 마침 함흥(咸興) 유생들이 상소하여, 영흥 본궁에 전사청(典祀廳)의 옛 자취가 있으니 제향(?享)의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진달하였다. 상이 느껴 깨닫고는 진전(眞殿)에 참배하고 대신을 불러들였는데, 신하들이 모두 '실로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에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과 예관을 보내어 고례(古禮)에 따라 본궁에다 위판(位版)을 만들고 날을 잡아서 제향하게 하였다.
국초부터 함흥과 영흥에 두 본궁을 두어 선왕과 선후(先后)의 위판을 봉안하였으니, 이는 원묘(原廟)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옛날에는 내수사의 별차(別差)가 제향을 맡았는데, 제기(祭器)와 의품(儀品)이 법식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다. 상이 각신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어 살피고 물어 오게 한 후에 특별히 바로잡도록 명하고, 의식(儀式)을 책으로 엮어 간행해서 본궁에 보관하게 하였다. 해마다 의대(衣?)촹폐백촹향촹초 등을 봉할 때 반드시 재숙한 후에 전해주고, 각신과 경기 감사가 배종(陪從)하여 동문(東門) 밖까지 가서 지방관에게 전해주도록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았다. 함흥과 영흥의 1년 조세를 감면하고, 두 고을 유생과 무사를 시험보여 사제(賜第)하였으며, 70세 이상 된 조관(朝官)과 80세 이상 된 사서인을 가자하고, 연로(沿路)에 있는 세 도의 고을에 대해서는 묵은 환자곡의 상환을 탕감해 주었다.
○ 3월. 이에 앞서, 천문가(天文家)의 서적을 모아 필요없는 부분은 삭제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은 다음 1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참고하기에 편하게 할 것을 명했는데, 모두 22편(編)으로,《협길통의(協吉通義)》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간행하였다.
○ 4월. 영변(寧邊)과 정평(定平)에서 금을 채굴하는 폐단을 거듭 금지시켰다. 하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보배를 간직한 채 쓰지 않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광점(鑛店)의 설치라는 것은 바로 하나의간사한 구멍이다."
하였다.
○ 비변사 당상 조진관(趙鎭寬)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선경(先卿)이 일찍이 만든 조창사목(漕倉事目)에 대해서 경은 필시 익히 듣고 보았을 것이다 . 옛날에는 병력을 농사짓는 데 붙여두어 일이 없을때는 농사꾼이 되고 일이 있을 때는 군사가 되게 했었으니, 조선(漕船)과 전선(戰船)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이 어찌 무의미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부터 변통하여 바로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처 하지 못했다. 황정(荒政)에 관한 책은 경이 지금 막 편집하였다만 수정(水政)에 대해서는 더욱 징험할 곳이 없다. 경은 되도록이면 문헌을 널리 참고하여 모아서 책을 만들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장차 국가의 중대한 문헌이 될 것이다."
하였다.
○ 온양(溫陽) 행궁(行宮)에 세 그루 홰나무가 있는데, 장헌세자가 경진년에 행차하였을 때 손수 심은 것이었다. 상이 듣고서 이르기를,
"지금 36년이 지나는 동안 뿌리가 뻗고 가지가 번성하여 뜰에 그늘이 가득하며, 감사와 수령이 축대를 쌓아 보호하게 했다 하니, 슬픔과 감회가 교차하여 어떻게 심정을 표현하지 못하겠다."
하고, 영괴대비기실(靈槐臺碑記實)을 직접 지어 축대 옆에 세웠다.
○ 6월. 공조 판서 이석조(李奭祚)가 시무(時務) 12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1. 성(誠)을 돈독히 할 것, 2. 경서(經書)를 바탕삼을 것, 3. 역사를 거울삼을 것, 4. 현재(賢才)를 양성할 것, 5. 관방(官方)을 바로잡을 것, 6. 향약(鄕約)의 제도를 정할 것, 7. 백성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줄 것, 8. 군정(軍政)을 다스릴 것, 9. 백성들의 재정을 해결해줄 것, 10. 풍교(風敎)를 돈독히 할 것, 11.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할 것, 12. 제도를 통일할 것 등이었다. 역대 선유(先儒)의 말을 가져다가 적절히 빼고 보태어서 모아 책으로 만들어 《집설(輯說)》 이라고 이름붙이고, 이것을 소와 함께 올렸다.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발탁하여 지충추부사로 삼았다.
○ 혜경궁의 탄일에 안에서 직접 치사(致詞)촹전문(箋文)촹표리(表裏)를 올리고, 또 연희당(延禧堂)에서 음식상을 올렸다. 직접 노래의(老萊衣) 5장(章)과 만년(萬年) 5장을 지어 전후로 노래부르는 악장을 삼았으며, 술
○ 하교하기를,
"이렇게 경사스러운 해를 맞이하였으니 살 곳을 얻지 못한 지아비가 반드시 한 명도 없게 하고 싶다. 외방의 고을에도 진대를 베풀었는데 서울을 빠뜨릴 수 있겠는가."
하고, 총융청의 환자곡을 가구를 뽑아서 나누어주되 모곡은 전부 받지 말도록 명하였는데, 오부(五部)에서 환자곡을 받은 대상이 5800여 가구였다. 홍화문에 나아가 모두 500여 가구의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였다.
○ 입직한 각신이 누각 위에서 책을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하리(下吏)가 부르면서 '중사(中使)가 곧 이를 것입니다.' 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나가 맞이하였는데, 중사가 들고 오는 소반에 금원(禁園)의 복숭아 수십 개가 담겨 있고 전교를 쓴 붉은 보자기가 덮여 있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후원의 작은 복숭아가 마침 익었다. 듣건대 신선의 복숭아는 사람을 장수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지금 이렇게 하사하는 데는 각별히 기대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소반은 남겨 두어 규장각의 고기(古器)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각신이 절한 다음에 맛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 7월. 자궁을 모시고 선희궁(宣禧宮)에서 작헌례를 행하였는데, 중전도 함께 나아갔다.
○ 수찬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여 사학(邪學)을 배척하니,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대사간에 발탁하였다.
○ 8월. 옥당 엄기(嚴耆)가, 부모의 나이가 회갑이 되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고을에 보임해서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고, 경연의 신하로서 엄기와 같은 정리(情理)를 가진 자는 모두 자리가 비는 대로 차송함으로써 은혜로써 돌보아주는 조정의 뜻을 보일 것을 명하였다.
○ 제주의 세 고을에 단을 설치하여 제사지냈는데, 지난 겨울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수어 경청(守禦京廳)을 혁파하고, 수어사(守禦使)를 남한산성에 출진(出鎭)시켜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삼았다.
○ 9월. 대신과 대간이 사형 죄인의 옥사를 처결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내각에 명하여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를 인쇄해서 나누어주도록 하고, 이어 책을 간행하는 데 든 비용을 하사하였다.
○ 광주부에 있는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으로 칭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관원을 보내어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에게 치제하고, 이어 부조지전(不?之典)을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박 문간에 대해 실로 별다른 감회를 가지고 있는 것은, 큰 충성과 높은 절개에 일찍이 감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과 행동에 나타난 말과 의논, 뜻과 기개는 필부가 일시적으로 갖는 비분강개한 생각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 뇌변(雷變)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방금 관상감의 보고를 보니 진시에 경미한 우레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듣지 못하였다. 만약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대하였다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인데, 태학생이 들은 것을 내가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더구나 수장(收藏)의 계절을 당하여 이렇게 은미한 우레 소리가 있었으니, 《중용(中庸)》에서 말한 계구(戒懼)의 공부가 지금 당장 맹렬히 반성해야 할 첫 번째 의리에 속하는 것이다. 감추어져 있다가 정령(政令)을 내고 일을 시행하는 때에 드러나는 나의 잘못을 너희 후설(喉舌)과 논사(論思)와 언책(言責)의 직책에 있는 신하들은 숨김없이 다 말하여 어둡기만 한 나의 생각을 열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소현묘(昭顯墓)의 국내(局內)에 나무를 심도록 신칙하였다. 경기 관찰사로 하여금 경비를 지원하고
○ 첨지 양주익(梁周翊)이 상소하여 시무(時務) 12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뜻의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이조 참의에 제수한 다음 불러 보았다.
○ 12월. 강계(江界) 백성 김막손(金莫孫)의 처 이씨(李氏)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큰딸은 18세이고 둘째딸은 15세였다. 그 어미가 행인이 얼음 위를 건너다가 빠진 것을 보고 가서 구하다가 빠졌는데, 큰딸이 달려가서 구하려다 또 빠졌다. 그러자 둘째딸이 또 달려들어가서 왼손에는 어미를 잡고 오른손에는 언니를 잡았으나. 결국 손을 잡은 채로 나란히 앉아서 죽고 말았다. 감사가 보고하니, 하교하기를,
"김씨 세 모녀는 옛날의 조아(曺娥)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들이다. 특별히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고을에다 정문을 세우고 '효녀지문(孝女之門)'이라고 쓰게 하라."
하였다.
19년(을묘, 1795)
○ 1월. 60세 이상 된 대신과 경재(卿宰)에게 특별히 세찬(歲饌)을 하사하라고 낭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는데, 자궁이 회갑을 맞는 경사스러운 해이기 때문이었다.
○ 자전과 자궁이 장차 경모궁에 나아가려 하였으므로 신하들에게 의식 절차를 물었다. 내각이 아뢰기를,
"여러 의논들을 서로 참고해 보건대, '자전의 행례(行禮)는 선조(先朝) 때 종묘에 배알하셨던 의식을 써야 합니다.'라고 헌의한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의 논의가 가장 근거가 있습니다.
우리 자궁의 행례는, 삼가 살펴보건대 도서집성(圖書集成)《대정기(大政記)》에 이르기를, '가정(嘉靖) 5년에 황제가 태후(太后)를 모시고 흥헌묘(興獻廟)에 배알하였는데, 당(唐) 나라 개원(開元)에 황후가 사당에 참배할 때의 의식을 인용하였다.' 하였으니, 장성(章聖)이 흥헌묘에 배알할 때는 태묘에 배알할 때의 의식을 사용하고 동등한 신분이라고 해서 의식을 간략하게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살펴보건대, '만력(萬曆) 8년에 황제가 두 황태후를 모시고 후비 들을 거느리고서 영릉(永陵)에 배알하였는데, 사배례(四拜禮)를 행한 다음 소릉(昭陵)으로 가서 영릉에서와 마찬가지로 의식을 행하였다.' 하였으니, 효정(孝定)과 효안(孝安)이 소릉에 배알할 때도 능에 배알할 때의 의식을 쓰고 동등한 신분이라고 해서 의식을 강등시키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자궁이 의식을 행하실 때는《명사(明史)》의 묘현례(廟見禮)를 그대로 따라야 하겠습니다.
절을 몇 번 하느냐 하는 문제는, 묘현례의 의식에 따르게 되면 재배(再拜)를 해야 하겠고 능을 배알하는 의식에 따르게 되면 사배(四拜)를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서 사당에 임하는 절차에 대해서는 달리 어긋나는 의견이 없다. 자궁이 배례(拜禮)하는 장소는 묘현례의 옛 의식을 써서 섬돌 위에 자리를 설치하도록 하라. 배례도 현재 쓰는 제도를 써야만 선대의 제도를 따르는 도리에 맞을 것이다."
하였다.
○ 왕대비에게 '수경(綏敬)'이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장헌세자(莊獻世子)에게 '장륜융범기명창휴(章倫隆範基命彰休)'라는 존호를 추상(追上)하였으며, 옥책(玉冊)과 금인(金印)을 써서 혜경궁(惠慶宮)에게 '휘목(徽穆)'이라는 존호를 가상하였다. 존호를 올리는 때에 고사(?師)와 여령(女伶)을 생략하도록 명하였는데, 자궁의 뜻을 체념(體念)한 것이었다. 명정전에 나아가 자궁의 회갑을 진하하는 치사(致詞)촹전문(箋文)촹표리(表裏)를 올리고,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문관 시종, 무관 장수, 음관 준직(準職) 이상으로서 61세가 된 사람의 품계를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 상이 자전과 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나아갔는데, 이때 중전도 함께 나아갔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니 이날이 장헌세자의 회갑날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매번 월근문(月覲門)을 통하여 한 달에 한 차례 전배하였는데, 이해에는 그리움이 더욱 간절하여 오향(五享) 및 속절(俗節)과 초하루와 보름의 제사를 모두 직접 행하
○ 윤2월. 상이 장차 자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행행하려 하였다. 태복시(太僕寺)가 자궁의 가교(駕轎)를 만들었는데, 편전(便殿)의 앞뜰로 가져오도록 명하여 수레의 덮개, 발, 휘장 등을 하나하나 직접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또 직접 가마 안으로 들어가서 간살이 넓은지, 구조가 편리한지를 시험해보았다.
○ 상이 자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나아갔다. 화성(華城) 행궁(行宮)에 머물면서 자궁에게 음식상을 올리는 때에 칠작례(七爵禮)를 행하였다. 대신, 경재(卿宰), 종척(宗戚), 내외 명부(命婦)에게 명하여 들어와 참석하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장락궁(長樂宮)에서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낙남헌(洛南軒)에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경건히 북두(北斗) 자루로 술을 따르고 남산(南山)처럼 장수하시기를 빌었다. 그리고 이튿날에는 또 너희 노인들을 섬돌과 뜰로 불러들였다.
아래에서 이미 화봉인(華封人)의 축원을 올렸는데 위에서 어찌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선물을 아끼겠는가. 노인 영의정 홍낙성(洪樂性) 이하 70세 이상 및 61세가 된 사람에게 비단 한 필씩을 하사하고, 또 황색 명주를 주어 구장(鳩杖)에 매게 하라. 본 고을에서 연회에 참석한 사람은 한 자급을 가자하라.
한 고조(漢高祖)는 풍패(?沛)에 대해서, 광무제(光武帝)는 남양(南陽)에 대해서 탕목읍(湯沐邑)이라는 이유만으로도 특별히 급복(給復)의 은전을 내렸었다. 이에 앞서 이미 급복한 이외에 원소(園所) 아래에 거주하는 백성에게는 특별히 2년을 더 급복하고, 성 안팍에 사는 백성에게는 1년을 더 급복하라."
하였다. 이튿날 상이 신풍루(新?樓)에 나아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조금 떨어진 마을에는 승지를 파견하여 창고를 열어서 백성들에게 먹이게 하였다. 정리소(整理所)의 남은 돈 1만 민을 제주로 보내어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고, 또 1만 민으로 화성에 둔전(屯田)을 설치하였다. 또 2만 민을 여러 도에 나누어 보내어 곡식을 마련해서 환자곡으로 삼게 하고, 이를 정리곡(整理穀)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후 무오년에 전부 화성부로 옮겨 쌓은 다음 방출했다가 거두어들이게 하되 모곡(耗穀)은 영원히 없애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화성의 백성들로 하여금 모두 천년 만년 유구히 자전의 은혜와 자궁의 덕을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 낙남헌에 나아가 양로연(養老宴)을 행하였다.
○ 하교하기를,
"매번 원소를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미륵현(彌勒峴)에 이르게 되면 걸음을 멈추고서 멀리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에서 내려 서성이곤 했었다. 이번 행행 때 미륵현 위에 자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臺) 형태와 같은 곳을 보고는 지지대(遲遲臺)라고 명명하였다. 다음부터는 행행하는 노정에 지지대를 추가하도록 하라."
하였다.
○ 평안도 관찰사 김사목(金思穆)의 장계로 인하여 예조가 계청하기를,
"정주(定州) 달천(?川)의 태조가 개선하고 선조(宣祖)가 주필(駐?)하였던 곳에 비석을 세워서 사적(史蹟)을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르기를,
"호남의 팔량치(八良峙), 해서의 약마지(躍馬池), 관서의 이화정(梨花亭), 북관의 독서당(讀書堂)촹치마대(馳馬臺)에 비를 세우거나 누각을 세워서 먼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을 붙였던 것은 열조께서 이미 행하신 자취이다. 지금 달천의 승전(勝戰)하고 주필하셨던 곳에만 어찌 사적을 기록하는 일을 빠뜨리겠는가."
하였다.
○ 환조대왕(桓祖大王)과 의혜왕후(懿惠王后)를 영흥 본궁(永興本宮)에 추제(追?)하였는데, 이해가 환조가 탄생한 여덟 번째 회갑 해이기 때문이었다. 정릉(定陵)에 대신을 보내어 작헌례를 행하였다. 마침 함흥(咸興) 유생들이 상소하여, 영흥 본궁에 전사청(典祀廳)의 옛 자취가 있으니 제향(?享)의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진달하였다. 상이 느껴 깨닫고는 진전(眞殿)에 참배하고 대신을 불러들였는데, 신하들이 모두 '실로 정리(情理)와 예문(禮文)에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신과 예관을 보내어 고례(古禮)에 따라 본궁에다 위판(位版)을 만
국초부터 함흥과 영흥에 두 본궁을 두어 선왕과 선후(先后)의 위판을 봉안하였으니, 이는 원묘(原廟)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옛날에는 내수사의 별차(別差)가 제향을 맡았는데, 제기(祭器)와 의품(儀品)이 법식에 맞지 않은 것이 많았다. 상이 각신 서영보(徐榮輔)를 보내어 살피고 물어 오게 한 후에 특별히 바로잡도록 명하고, 의식(儀式)을 책으로 엮어 간행해서 본궁에 보관하게 하였다. 해마다 의대(衣?)촹폐백촹향촹초 등을 봉할 때 반드시 재숙한 후에 전해주고, 각신과 경기 감사가 배종(陪從)하여 동문(東門) 밖까지 가서 지방관에게 전해주도록 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았다. 함흥과 영흥의 1년 조세를 감면하고, 두 고을 유생과 무사를 시험보여 사제(賜第)하였으며, 70세 이상 된 조관(朝官)과 80세 이상 된 사서인을 가자하고, 연로(沿路)에 있는 세 도의 고을에 대해서는 묵은 환자곡의 상환을 탕감해 주었다.
○ 3월. 이에 앞서, 천문가(天文家)의 서적을 모아 필요없는 부분은 삭제하고 잘못된 부분은 바로잡은 다음 1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참고하기에 편하게 할 것을 명했는데, 모두 22편(編)으로,《협길통의(協吉通義)》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간행하였다.
○ 4월. 영변(寧邊)과 정평(定平)에서 금을 채굴하는 폐단을 거듭 금지시켰다. 하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 '보배를 간직한 채 쓰지 않는 것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계책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광점(鑛店)의 설치라는 것은 바로 하나의간사한 구멍이다."
하였다.
○ 비변사 당상 조진관(趙鎭寬)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선경(先卿)이 일찍이 만든 조창사목(漕倉事目)에 대해서 경은 필시 익히 듣고 보았을 것이다 . 옛날에는 병력을 농사짓는 데 붙여두어 일이 없을때는 농사꾼이 되고 일이 있을 때는 군사가 되게 했었으니, 조선(漕船)과 전선(戰船)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이 어찌 무의미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일찍부터 변통하여 바로잡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처 하지 못했다. 황정(荒政)에 관한 책은 경이 지금 막 편집하였다만 수정(水政)에 대해서는 더욱 징험할 곳이 없다. 경은 되도록이면 문헌을 널리 참고하여 모아서 책을 만들도록 하라. 그렇게 한다면 장차 국가의 중대한 문헌이 될 것이다."
하였다.
○ 온양(溫陽) 행궁(行宮)에 세 그루 홰나무가 있는데, 장헌세자가 경진년에 행차하였을 때 손수 심은 것이었다. 상이 듣고서 이르기를,
"지금 36년이 지나는 동안 뿌리가 뻗고 가지가 번성하여 뜰에 그늘이 가득하며, 감사와 수령이 축대를 쌓아 보호하게 했다 하니, 슬픔과 감회가 교차하여 어떻게 심정을 표현하지 못하겠다."
하고, 영괴대비기실(靈槐臺碑記實)을 직접 지어 축대 옆에 세웠다.
○ 6월. 공조 판서 이석조(李奭祚)가 시무(時務) 12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1. 성(誠)을 돈독히 할 것, 2. 경서(經書)를 바탕삼을 것, 3. 역사를 거울삼을 것, 4. 현재(賢才)를 양성할 것, 5. 관방(官方)을 바로잡을 것, 6. 향약(鄕約)의 제도를 정할 것, 7. 백성들의 생활 터전을 마련해줄 것, 8. 군정(軍政)을 다스릴 것, 9. 백성들의 재정을 해결해줄 것, 10. 풍교(風敎)를 돈독히 할 것, 11. 상황에 맞게 일을 처리할 것, 12. 제도를 통일할 것 등이었다. 역대 선유(先儒)의 말을 가져다가 적절히 빼고 보태어서 모아 책으로 만들어 《집설(輯說)》 이라고 이름붙이고, 이것을 소와 함께 올렸다. 너그러운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발탁하여 지충추부사로 삼았다.
○ 혜경궁의 탄일에 안에서 직접 치사(致詞)촹전문(箋文)촹표리(表裏)를 올리고, 또 연희당(延禧堂)에서 음식상을 올렸다. 직접 노래의(老萊衣) 5장(章)과 만년(萬年) 5장을 지어 전후로 노래부르는 악장을 삼았으며, 술잔을 올리고 예를 행할 때마다 원자가 나아가 발 안으로 들어가서 술잔을 올리고 곧바로 배위(拜位)로 가서 예를 행하였다. 조관(朝官)으로서 61세가 된 사람을 대궐 뜰에서 선온(宣?)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렇게 경사스러운 해를 맞이하였으니 살 곳을 얻지 못한 지아비가 반드시 한 명도 없게 하고 싶다. 외방의 고을에도 진대를 베풀었는데 서울을 빠뜨릴 수 있겠는가."
○ 입직한 각신이 누각 위에서 책을 보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하리(下吏)가 부르면서 '중사(中使)가 곧 이를 것입니다.' 라고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나가 맞이하였는데, 중사가 들고 오는 소반에 금원(禁園)의 복숭아 수십 개가 담겨 있고 전교를 쓴 붉은 보자기가 덮여 있었다. 상이 하교하기를,
"후원의 작은 복숭아가 마침 익었다. 듣건대 신선의 복숭아는 사람을 장수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지금 이렇게 하사하는 데는 각별히 기대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소반은 남겨 두어 규장각의 고기(古器)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각신이 절한 다음에 맛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다.
○ 7월. 자궁을 모시고 선희궁(宣禧宮)에서 작헌례를 행하였는데, 중전도 함께 나아갔다.
○ 수찬 최헌중(崔獻重)이 상소하여 사학(邪學)을 배척하니,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대사간에 발탁하였다.
○ 8월. 옥당 엄기(嚴耆)가, 부모의 나이가 회갑이 되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고을에 보임해서 봉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허락하고, 경연의 신하로서 엄기와 같은 정리(情理)를 가진 자는 모두 자리가 비는 대로 차송함으로써 은혜로써 돌보아주는 조정의 뜻을 보일 것을 명하였다.
○ 제주의 세 고을에 단을 설치하여 제사지냈는데, 지난 겨울에 기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수어 경청(守禦京廳)을 혁파하고, 수어사(守禦使)를 남한산성에 출진(出鎭)시켜 광주 유수(廣州留守)로 삼았다.
○ 9월. 대신과 대간이 사형 죄인의 옥사를 처결하는 데 참여하는 것을 법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내각에 명하여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 를 인쇄해서 나누어주도록 하고, 이어 책을 간행하는 데 든 비용을 하사하였다.
○ 광주부에 있는 백제(百濟) 시조(始祖)의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으로 칭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관원을 보내어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에게 치제하고, 이어 부조지전(不?之典)을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박 문간에 대해 실로 별다른 감회를 가지고 있는 것은, 큰 충성과 높은 절개에 일찍이 감복하였을 뿐만 아니라 글과 행동에 나타난 말과 의논, 뜻과 기개는 필부가 일시적으로 갖는 비분강개한 생각에 비교할 바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 뇌변(雷變)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방금 관상감의 보고를 보니 진시에 경미한 우레가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듣지 못하였다. 만약 내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상제(上帝)를 대하였다면 소리가 나지 않는 곳에서도 들을 수 있었을 것인데, 태학생이 들은 것을 내가 어찌 듣지 못했겠는가. 더구나 수장(收藏)의 계절을 당하여 이렇게 은미한 우레 소리가 있었으니, 《중용(中庸)》에서 말한 계구(戒懼)의 공부가 지금 당장 맹렬히 반성해야 할 첫 번째 의리에 속하는 것이다. 감추어져 있다가 정령(政令)을 내고 일을 시행하는 때에 드러나는 나의 잘못을 너희 후설(喉舌)과 논사(論思)와 언책(言責)의 직책에 있는 신하들은 숨김없이 다 말하여 어둡기만 한 나의 생각을 열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 11월. 소현묘(昭顯墓)의 국내(局內)에 나무를 심도록 신칙하였다. 경기 관찰사로 하여금 경비를 지원하고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 첨지 양주익(梁周翊)이 상소하여 시무(時務) 12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뜻의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이조 참의에 제수한 다음 불러 보았다.
○ 12월. 강계(江界) 백성 김막손(金莫孫)의 처 이씨(李氏)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큰딸은 18세이고 둘째딸은 15세였다. 그 어미가 행인이 얼음 위를 건너다가 빠진 것을 보고 가서 구하다가 빠졌는데, 큰딸이 달려가서
"김씨 세 모녀는 옛날의 조아(曺娥)에게 부끄럽지 않은 자들이다. 특별히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고을에다 정문을 세우고 '효녀지문(孝女之門)'이라고 쓰게 하라."
하였다.
20년(병진, 1796)
○ 1월. 하교하기를,
"금년의 사일 득신(四日得辛)은 풍년이 들 점괘이다. 첫 번째 신일(辛日)이 드는 날 몸소 사직단으로 가서 곡식이 잘 되기를 빌고자 한다. 서계(誓戒)하고 재계하여 마음속의 정성이 신을 감격시키기를 바라니, 너희 감사와 수령들은 각각 나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농사일에 마음과 힘을 다 쏟아서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풍년의 기쁨을 맛보게 하라."
하였다. 또 여러 도의 감사와 사도(四都) 유수에게 신칙하기를,
"이제 막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노래를 짓게 하였다. 정원으로 하여금 써서 보내게 하니, 작년에 있었던 강계(江界)의 예에 따라 포정사(布政司)의 문미(門楣)에 써서 붙이라."
하였다.
○ 특별히 냉탕고의 돈 1만 5000민을 내려 곡식으로 바꾸어서 제주로 보내어 진휼에 보태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 겨울에 한 지아비가 굶어 죽을 경우 하룻동안 밥을 먹지 않겠다고 여러 감사에게 신칙한 이후로 장찬(掌饌)촹상의(尙衣)의 수요에서부터 날마다 쓰는 경비에 이르기까지 각별히 절약하여 한 창고에 따로 비축하였으니, 이는 백성들에게 신의를 보이고자 함이었다." 하였다. 또 별도로 보축조(補縮條)를 내려서 연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하교하기를,
"이는 백성의 부모된 자로서 열 손가락을 다 아끼는 뜻이다."
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의 사판(祠版)에 치제하고, 사손(祀孫) 기인(基仁)을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하였다. 이어 화성(華城) 수령에게 명하여 집 한 칸을 사도록 향불을 받들게 하였다.
○ 2월 하교하기를,
"고 의관 박태균(朴泰均)의 공로를 잊을 수 있겠는가. 근래 온천에 배종한 사람을 수록(收錄)하는 일과 관련하여 물었더니 박태균의 집에 늙은 아내와 어린 손자밖에 없다고 하였다. 해조로 하여금 음식물과 옷감을 지급하게 하고, 그 손자에게는 다달이 쌀을 지급할 것이며, 나이가 들기를 기다려서 내의원에 곧바로 부직하라."
하였다.
○ 내탕고의 면포 500필, 돈 4000민, 호초(胡椒) 100두, 단목(丹木) 300근을 제주에 내려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3월. 선공감 봉사 위백규(魏伯珪)가 상소하여 6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상이 뜻을 확립할 것, 보필할 사람을 뽑을 것, 염치를 장려할 것,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을 것, 탐오한 행동을 다스릴 것, 옛 제도를 따를 것 등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이미 초고(草稿)에 근거하여 지니고 있는 뜻을 알았었고, 또 대면하여 포부를 알아보았다. 10년 동안 연구하여 지은 만언봉사(萬言封事)가 있다는 말을 듣고 또 호조에 명하여 붓과 종이를 지급하게 했었다. 지금 그 글을 보니 참으로 대단하고 훌륭하다. 그대 나이 70세에 기다렸다가 벼슬을 시키고자 하면 노년에 중랑서장(中郞署長)을 지낸 풍당(馮唐)보다 더 늦은 감이 있을 것이니, 한 고을을 주어 지니고 있는 역량을 펼쳐보게끔 하겠다."
○ 정릉 직장(靖陵直長) 신사준(愼師浚)이 상소하여 시무(時務) 10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전제(田制)를 정립할 것, 재용(財用)을 절약할 것, 양역(良役)을 균등하게 할 것, 수령을 잘 택할 것, 교화를 돈독히 할 것, 과거(科擧)의 폐단을 혁파할 것, 학교를 정비할 것, 정도(正道)를 숭상할 것, 벼슬아치의 선발을 신중히 할 것, 간쟁을 받아들일 것 등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요즈음처럼 언로(言路)가 열리지 않고 관잠(官箴)이 들리지 않은 적이 어디 있었겠는가. 이는 필시 내가 거만한 태도로 임한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조정에 한 사람의 충성스럽고 뜻있는 선비가 있어서 나를 버리지 않고서 좋은 말을 하고 바른 논의를 펼친다면 나는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일 것이다. 지금 내가 그대에게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리는 것은 먼저 곽외(郭?)로부터 시작하는 뜻이기도 하다."
하였다.
○ 상이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이르기를,
"근래 훈련원을 수리하는 일을 계기로 생각해 보았는데, 만약 무성묘(武成廟)를 세운다면 무학(武學)이 크게 갖추어질 듯하다."
하니, 윤시동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에 대해 실로 흠앙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주자(朱子)가 일찍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예악(禮樂)에 거의 통하였다고 하였으니, 공명이야말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하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하니, 윤시동이 아뢰기를,
"담박명지 영정치원(澹泊明志寧靜致遠)'이라는 여덟 글자는 후학(後學)에게 큰 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명 나라에서도 가정(嘉靖) 연간에 일찍이 문묘에 종향하였습니다."
하였다.
○ 우리 동방에서 활자로 책을 인쇄하는 법은 국초에 시작되었다. 태종조에 경연청에 소장된 고주본(古註本)《시(詩)》촹《서(書)》촹《좌전(左傳)》을 본으로 하여 이직(李稷) 등에게 명해서 10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계미자(癸未字)이고, 세종조에 이천(李?)등에게 명하여 고쳐 주조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경자자(庚子字)이다. 갑인년에는 경자자가 조밀하다는 이유로 경연청에 소장된《효순사실(孝順事實)》촹《위선음즐(爲善陰?)》등 책을 본으로 하여 김돈(金墩) 등에게 명해서 20여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갑인자(甲寅字)로서 300년간 사용되었다. 상이 동궁에 있을 때 대조(大朝)에 우러러 청하여, 안에서 내려준 갑인자로 인쇄된 《심경(心經)》촹《만병회춘(萬病回春)》두 책을 본으로 하여 5만 자를 주조하였으니, 이것이 임진자(壬辰字)이다. 원년인 정유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갑인자를 본으로 하여 15만 자를 주조하게 하였고, 또 임인년에 관서 관찰사에게 명하여 본조(本朝) 사람 한구(韓構)의 글씨를 본으로 하여 8만여 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임자년에 명하여, 중국 사고전서(四庫全書) 취진판식(聚珍板式)을 모방하여 자전(字典)의 글자체를 모아서 나무로 크고 작은 32만여 자를 새기게 하고는 이를 생생자(生生字)라고 이름하였고, 또 생생자를 본으로 해서 글자를 주조하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일이 끝나니, 큰 글자가 16만, 작은 글자가 14만여 자였는데, 이를 정리자(整理字)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는 일곱 개의 서가(書架)에 나누어 꽂아 규영신부(奎瀛新部)에 보관하였다. 감인소(監印所)를 주자소(鑄字所)로 개칭할 것을 명하였는데, 국초에 처음 설치했던 때의 옛 명칭을 따른 것이었다.
○ 흰 무지개가 해를 가로질렀다. 하교하기를,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은 20년간 불러들이지 않은 재앙이 없고 이르지 않은 요기가 없었지만, 흰 무지개의 재변은 즉위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몸둘 바를 모르며 자신을 나무라는 모든 방도를 강구해야 할 마당에 감히 예사로운 것을 따르고 겉치레로 응할 수 있겠는가. 신하들을 불러서 도움을 구하는 뜻으로 묻겠으니, 각각 바른말로 생각을 적어 대답함으로써 옛사람이 재변에 대비한 뜻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그리고 여러 도
하였다.
○ 5월.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하였다.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 판서 윤용(尹容), 판돈녕부사 정형복(鄭亨復), 좌윤 한덕필(韓德弼), 병사 허정(許晶)이 선발에 들었다.
○ 무고(武庫)로 하여금《자초방(煮硝方)》을 인쇄하여 중외에 널리 보급하게 하였다.
○ 금천(金川)의 두 남면(南面)과 장단(長湍)의 송서면(松西面) 및 백치진(白峙鎭)을 송도(松都)로 옮겨 소속시킬 것을 명하였다.,
○ 빈대(賓對)를 행하였다. 끝나자마자 곧바로 공사(公事)를 들이도록 명하였는데, 이때는 한여름철로 성후(聖候)가 회복된 직후였다. 대신이, 급하지 않은 일은 우선 두어 조섭에 편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참(常參)을 이미 정지하고 빈대도 오래도록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까지 행하지 않는다면 모두들 나를 편안하게 놀기만 하는 임금으로 여길까 두렵다."
하였다.
○ 6월.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진관(趙鎭寬)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고려조의 능침에 대하여 일찍이 현묘조(顯廟朝)에 희생과 폐백을 늘려주고 왕씨(王氏) 자손으로 하여금 수호하도록 했었다. 지금 얼마나 되는가?"
하니, 조진관이 아뢰기를,
"그 수가 매우 많지만 모두 중엽 이전의 자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서에 이르기를, '우(虞) 나라 손님이 자리에 있으면서 제후들과 더불어 덕으로써 양보한다.' 하였고, '그 나라에 있어도 미워하는 이 없고 이곳에 있어도 싫어하는 이 없네.' 하였으니, 지금의 송도 사람들이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이름이 조정의 사적(仕籍)에 올라 있는 자가 거의 없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에서 공평하게 돌보아주는 뜻이겠는가. 문관이건 무관이건 논하지 말고 경은 반드시 널리 인재를 찾아서 수용할 수 있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고려 태조는 삼한(三韓)을 통일하는 공을 이룩하였다. 어제 유수의 보고를 듣건대, 왕릉 앞의 제각(祭閣)이 비바람도 막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지방관에게 분부하여 수리하게 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라. 또 봄가을 제사 때 향과 축문을 보내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
하였다.
○ 직접 자궁(慈宮)에게 표리(表裏)를 올리고, 이어 음식상을 올렸다.
○ 우의정 윤시동(尹蓍東)에게 늙은 모친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대신이 기로소에 들어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100세에 가까운 대부인(大夫人)이 정정하다니, 고 상신 홍섬(洪暹) 이후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또 정경부인(貞敬夫人) 셋째 아들의 회갑이 이달에 있다고 하니, 이렇게 기쁘고 경사스러운 때에 어찌 효자에게 상을 내리는 은전이 없겠는가. 대신의 노친에게 쌀과 비단을 지급하고, 회갑을 맞은 그 아들은 관직을 회복시키라."
하였다.
○ 7월. 태묘의 제향을 지낸 후에 날이 밝기를 기다려서 다시 봉심한 다음에 수리하고 소제하는 것을 규정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 고 만호(萬戶) 정운(鄭運)에게 병조 판서를 증직할 것을 명하고, 시호를 하사하고 아들을 녹용하도록 하였다. 이는 정운이 임진왜란 당시 몰운대(沒雲臺)에서 전사 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을 권면하여 흥기시킨 공이 있기 때문이었다.
○ 8월. 증 참판 양대박(梁大樸)에게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를 가증(加增)하고 시호를 하사할 것, 그 아들 태상시 정 양경우(梁慶遇)를 한 자급 가증할 것, 그 마을에 '부자충의지문(父子忠義之門)'이라고 정표할 것을 명하였는데, 양대박은 의병장으로서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고 양경우는 혼조(昏朝) 때 절개를 세웠기 때문이었다. 또 양대박 및 충렬공(忠烈公) 고경명(高敬命)에게 치제할 것을 명하였다.
○ 어정(御定)《규장전운(奎章全韻)》이 완성되었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 운서(韻書)에서 삼운(三韻)을 모으고 입성(入聲)을 따로 둔 것은 운이 사성(四聲)에 근본하는 뜻에 어긋난다. 증운(增韻)과 입성에 압운(押韻)하지 않는 것도 통운(通韻)과 협음(?音)의 격식을 알지 못한 것이니, 더할 수 없이 엉성한 일이다. 그래서 널리 조사하고 증명하여 이 책을 편성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앞으로 공사(公私)의 압운은 이 의례(義例)에 준하도록 하라."
하였다.
○ 직각 이시원(李始源)을 의주부 위유어사로 차임하였다. 삼강(三江)으로 달려가서 재해 입은 민호를 안집(安集)시키게 하고, 강가에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빠져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고 그 처자들을 위로하게 하였으며, 조세를 견감하고 구휼하는 은전을 두텁게 시행하도록 하였다.
○ 9월.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사손(祀孫)이 사판(祠版)을 받들고 부임하였다. 서울에 들어오는 날 유생들이 강 머리로 나가서 맞이하고 예관(禮官)이 위차(位次)를 정돈할 것을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우의정 윤시동이 아뢰기를,
"고 영의정 김육(金堉)은 인조와 효종을 차례로 섬겨 뛰어난 명신(名臣)이 되었습니다. 대동법과 상정법(詳定法)은 지금까지도 백성들이 혜택을 입고 있는 것이니, 특별히 부조(不?)의 은전을 내린다면 실로 공로를 포상하고 충성을 장려하는 도리에 부합되겠습니다."
하니, 따랐다.
○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묘에 종사(從祀)하였다. 상이 일찍이 하교하기를,
"제일 먼저 성리학을 밝혀 근원을 환히 본 것은 오직 김 문정공 한 사람뿐이었다. 그 시에,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공자가 원기라면 주자는 진수일세[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라고 하였으니, 뭇 학자보다 학식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관학 유생들이 상소하여 청한 것을 계기로 이 명이 있었다, 또 시호가 행실에 비해 부족함이 있다고 하여 '문정(文正)'으로 고쳐 내렸다.
○ 상이 문장공(文莊公) 정경세(鄭經世)의 학식과 사업, 문정공(文貞公) 조식(曺植)의 정묘한 학문을 생각하여, 직접 제문을 짓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 10월. 이문원(?文院)에서 대신과 각신을 불러 보았다. 상이 원자로 하여금 대신에게 절하게 하자 대신들이 일어나 절하였다. 상이 원자에게 하교하기를,
"대신들이 모두 등연하였는데, 그 세파(世派)를 하나하나 들 수 있겠느냐?"
하니, 원자가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대신들이 아뢰기를,
"총민과 예지를 타고나시어 보통 사람을 크게 뛰어넘으시니, 실로 우리 동방의 억만년 끝없는 경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뿐만 아니라 송(宋) 나라의 여섯 군자와 우리나라에서 문묘에 종사한 사람 및 상신록(相臣錄)도 모두 알고 있다."
하였다. 좌의정 채제공 등이 원자에게 청하기를,
"하나하나 자세히 가르쳐주시겠습니까?"
하니, 원자가 별호(別號)와 성명을 하나하나 들었는데 차례가 뒤섞이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종사(從祀)하는 데 누락된 한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원자가 즉시 대답하기를,
하였다, 윤시동이 아뢰기를,
"예학(睿學)이 이렇게 탁월하신데도 외부(外傅)에게 나아가지 않으시므로 사람들이 답답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봄까지 기다리려고 한다."
하였다. 상이 원자에게 글을 읽으라고 하자 원자가 꿇어앉아《대학》경문(經文) 제1장을 읽었는데, 소리가 낭랑하고 구두가 명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가르쳤던《소학》은 능숙하게 외며, 《대학》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혼자서 외운 것이다, 며칠 전에는 내가《시전(詩傳)》보전장(甫田章)을 읽는 것을 옆에서 한 번 듣고는 그 자리에서 외웠었다."
하였다.
○ 상이 여러 조(曹)와 사(司)에 죄인을 구류하는 장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부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것은 법에 없는 일이니, 참으로 성인의 가르침에 이른바 '형벌을 적절히 쓰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 사옹원에서 광주(廣州)에 분사(分司)를 설치하고 오지 그릇을 구웠다. 그 중에서 정교한 것은 맑고 깨끗하기가 기름이나 옥과 같았는데, 이를 갑번(甲燔)이라고 하였다. 상이 재물을 낭비한다고 하여 법을 세워서 금단하도록 명하였다. 얼마 있다가 각신을 불러 접견하였는데, 마침 들고 있던 수랏상의 그릇이 모두 이지러진 것이었다. 상이 가리켜 보이면서 이르기를,
"법만 세운다고 해서 저절로 행해지지는 않고, 말로 가르치는 것은 몸으로 가르치는 것만 못하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대개 자신이 그렇게 하지 않은 다음에 남을 비난하려는 뜻 이기도 하다."
하였다.
○ 12월. 내각에 명하여 주자(朱子)의 《소학(小學)》을 중간(重刊)하고 의례(儀例)를 교정하였다. 또 붙여놓은 훈의(訓義)를 소주(小註)에 실은 것은 잘 보존하는 뜻이 아니라고 하여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과거 선조(先朝)께서 《소학》의 가르침에 늘 마음을 두셨으므로 내가 9세 이전에 이 책을 다섯 번 강독하였는데, 매 차례마다 규정을 두어 100번 이상을 읽었었다. 그러므로 36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구두를 점검해 보아도 처음 배우던 그때처럼 생생하기만 하다. 중외에 거듭 하유하여 익히게 하는 방도는 교감하여 인쇄한 다음에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우의정 윤시동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편찬과 교감에 대한 일을 총괄하고 지훈련원사 이경무(李敬懋)는 그 일을 감독할 것을 명하였다.
○ 남매가 서로 죽으려고 하는 사형 죄수가 있었는데, 하교하기를,
"상천(常賤)도 이러한 윤리와 의리를 아니, 이는 교화가 아래로 퍼질 기회이다. 형법을 실시하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하고, 참작하여 유배보내도록 명하였다.
○ 춘추 삼전(春秋三傳)이 모두 십삼경(十三經)에 열거되지만 《좌씨전(左氏傳)》이 역사에 대해서 가장 상세한데, 유독 경문(經文)과 전(傳)이 서로 연결되지 않아서 학자들이 병통으로 여겼다. 상이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주자(朱子)《강목(綱目)》의 범례에 따라 경문을 강(綱)으로 삼고 전을 조목(條目)으로 삼아 간행하게 하였다.
75권 정조조 7
21년(정사, 1797)
○ 1월. 윤음을 내렸다. 이르기를,
"내가 듣건대, 공자(孔子)는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보고 왕도 정치가 쉽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정사는 조정에서 보고 풍속은 민간에서 보아야 한다. 정사가 미치는 바는 얕지만 풍속에서 얻어지는 것은 깊기 때문에 남의 나라를 잘 살피는 자는 반드시 민간을 먼저 본 다음에 조정과 저자를 보는 것이다.
내가 하늘의 복에 응하여 삼가 자궁의 회갑을 맞이하였으므로 팔방의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고자 노인을 높이고 선한 사람을 포상하는 등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정을 보면 기록할 만한 정사가 없고 민간을 보면 일신된 풍속이 없으니, 이는 나 한 사람이 부덕 하여 감히 선왕에게 비교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생각에 잠겨 한밤중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주 일어나서는 근래의 풍속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당초에 먹었던 마음을 많이 저버리게 된 것을 개탄스러워한다. 내가 스스로 기약한 바가 어찌 이 정도에 그치는 것이었겠는가.
사람의 마음은 편안하다 보면 안일하게 되고 안일하다 보면 즐기게 되고 즐기다 보면 방종해져서 마침내 방탕한 생활에 빠지고 만다. 오랫동안 태평의 즐거움을 누려온 속에서 호강하다 보니 어려서는 올바르게 길러지지 못하고 자라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여, 검약한 것을 현실과 동떨어졌다 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삼는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하늘이 정한 질서와 법도를 알지 못하니, 삼배읍양(三杯揖讓)은 말할 것도 없고 풍류(風流)를 돈독히 하는 것마저도 한 번 변화시키기가 어려운 판국이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이 감히 남을 미워하지 못하고 어버이를 공경하는 사람이 감히 남을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은 공경을 미루어나가고 근본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虞)촹하(夏)촹상(商)촹주(周)가 서로 이어받았던 때는 부(富), 덕(德), 친(親), 작(爵) 등 숭상하는 것에 차이가 있었으나 나이만은 빠뜨리지 않았으니, 대개 나이 많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어버이를 섬기는 다음으로 귀중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개 오늘날의 사람들은 나이 많은 사람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오륜을 따르지 않는 폐단이 생기게 되었다. 《효경(孝經)》에 이르기를, '선왕은 지극한 덕과 중요한 도를 지녀 천하를 따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충성을 임금에게 옮길 수 있고 순종을 어른에게 옮길 수 있고 다스림을 관(官)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였고,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사람마다 그 어버이를 친애하고 그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천하가 편안해진다.' 하였으니, 공경을 넓히고 근본을 따르는 책임에 대해서 내가 바야흐로 반성하기에 겨를이 없다.
만물은 계절에 따라 변화하기를 다하면 본 모습이 나타나고, 옳지 않은 버릇을 없애면 참된 마음이 드러나는 법이니, 날로 새롭게 하는 기틀이 오늘에 시작될 것이다. 《소학(小學)》한 책은 바로 학교에서 가르침을 시작하는 차례와 절목에 관한 것이다. 나처럼 변변찮은 사람도 선대왕께서 이끌어주신 은혜에 힘입어 어린 시절에 날마다 강독한 효과를 대략 거두었으니, 세상의 자제들이 비록 육경(六經)을 두루 통달하지는 못하더라도 사람이 되기 위한 도리를 힘써 따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는 학문이 날로 투박해지고 가르침이 날로 해이해져서 이 책마저 시렁 위에 묶여 있다. 나는 이것이 두려워서 내각의 신하에게 명하여 훈의(訓義)를 가지고 고증하게 하였고, 또《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등 책이 다스림을 돕고 세상을 권면하는 도구가 되는 측면에서 《소학》책과 마찬가지로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 정리하여 한 책으로 묶어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라고 명명하였다.
내가 또 생각건대, 하루에 예를 행하여서 사방에 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는 향음주례(鄕飮酒禮)가 근사할 것이다. 이 예는 노인을 쉬게 하고 농민을 위로하며 기쁨을 인도하고 나이를 구별지으며 귀천을 밝히고 높낮음을 분별하는 것이니, 몸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요지가 대부분 이를 통해서 일어난다. 우
그러나 향약(鄕約) 역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데에 많은 힘이 되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일찍이 초하루에 향약을 읽으면서 삼대(三代)의 제도를 다시 볼 수 있을 듯이 여겼다. 나는 그러므로 오늘의 백성을 옛날의 풍속으로 변화시켜 인의(仁義)로 덮어주고 근본과 실질을 보여주는 데는 향약의 효과가 향음주례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규례도 강구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으므로 여가 시간에 향음의식(鄕飮儀式)과 향약조례(鄕約條例)를 만들었는데, 자세하고 극진하며 형식과 본질을 구비하여 우리 동포 백성들과 함께 뭉클하게 감동을 느끼고 엄숙히 질서를 알게 하는 데 뜻을 두었다. 만약 이 일이 법이나 말에만 그치지 않는다면 어떤 고집쟁이가 감히 대항하겠으며 어떤 바보가 현명해지지 않겠는가.
아, 너희 대중들은 옛 가르침을 업신여기지 말고 나의 말이 사리에 어둡다고 여기지 말아서 부지런히 노력하여 이 향음주와 향약을 강구하고 따르도록 하라. 그리하여 군자는 마치 삼대에 태어나서 주례(周禮)를 지키듯이 하고, 소인들은 네 개의 화살을 잡고 확상포(?相圃)에 노닐듯이 하라. 그러면 모두가 곡식은 버릴 수 있어도 어버이를 친애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는 도리는 잠시도 버리지 않아야만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느 겨를에 다른 것을 구하겠는가. 이렇게 하면 백성들의 뜻이 한결같아지고 세상의 교화가 바로잡혀서 나와 너희 대중들이 함께 무궁한 복을 누려 천지의 밝은 빛을 대하고 우리 조종의 공렬을 받들게 될 것이다. 여기에 정성을 다해나간다면 영원한 앞날이 보장될 것이다. 조정과 민간을 살펴봄에 모든 면이 새로워져서 풍성한 복을 받고 공훈을 누리게 되는 것이 여기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노인을 노인 대접하면 백성들이 효도하게 된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우리 노인을 노인 대접하여 남의 노인에게까지 미친다라고 하였다. 아름다운 새해 첫날을 맞이하여 자궁의 만수를 축원하고 우러러 아름다운 얼굴을 뵈니 늙지 않으신 것이 매우 기쁘다. 이를 미루어 넓혀서 모든 노인들을 기쁘고 편안하게 해주고자 하는데, 모든 노인들이 기쁘고 편안한 것은 풍년이 들어 많은 수확을 거두는 데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농민을 위로하는 것은 노인을 쉬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사일 득신(四日得辛)이면 곡식이 잘 익고 십일 득신(十日得辛)이면 곡식이 잘 영근다고 하였다. 잘 익는 것을 이미 작년에 징험하였으니 올해에도 잘 영글 것을 점칠 수 있겠다. 하늘이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으니 나도 농사일에 부지런히 힘써야 하겠다. 최선을 다하고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면 그에 대한 보답을 장담할 수 있는 법이니, 해마다 풍년을 거두어 만년이 가도록 변함이 없을 것이다. 농부의 경사는 자식된 자의 경사요, 자식된 자의 경사는 조정의 경사이다."
하였다. 이어 관찰사와 유수에게 하유하여 각각 준행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대사성으로 하여금 유생들에게 보이게 하고, 한성 판윤으로 하여금 방방곡곡에 반포하게 하였다. 책이 인쇄되기를 기다려서 여러 본을 모두 올리게 하고, 또 경외에 선포하였다.
○ 예조가 아뢰기를,
"향음주례는,《국조오례의》에 실린 의주(儀註)를 고금의 전장(典章)과 대조해 본 결과 밝은 시대의 법이 되기에 충분하였으니, 실로 별도로 찬정(撰定)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향약의 법은 송유(宋儒) 여대균(呂大勻)에게서 시작되었는데, 주자가 그 글을 가져다가 더하기도 하고 삭제하기도 하였으니, 실로 만세에 통행될 훌륭한 법입니다. 그러니 중묘(中廟)와 선묘(宣廟)께서 반포한 향약이 이 본인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향음주를 실시하는 날 별도로 문사(文辭)가 있는 자를 정하여 향약문을 한 번 읽게 하면 되겠습니다. 경성에 향약을 실시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중묘의 가르침이 《국조보감》에 분명히 실려있고,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도 '서울에 대해서는 향약이라는 명목을 붙일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관례(冠禮)와 혼례(婚禮)의 경우는 시골에서 예를 갖추는 자가 없으니, 삼가 연교(筵敎)대로 사마광(司馬光)의《서의(書儀)》, 주자의《가례(家禮)》,《국조오례의》를 편(編) 아래에다 덧붙여 실어서 강구하여 밝힐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한 책으로 묶어서 간행하여 널리 반포하고, 이름을《향례합편(鄕禮合編)》이라고 하였다.
○ 영의정 홍낙성(洪樂性)에게 궤장(?杖)을 하사하고 이어 석연(錫宴)을 명하였는데, 나이가 꼭 80세가 되었
○ 마조제(馬祖祭) 날짜를 금년부터 중춘(仲春) 중기(中氣) 이후의 강일(剛日)로 택하고 축문은 《오례의》에 실려있는 것을 쓰도록 명하였다.
○ 전생서 주부(主簿)를 판관(判官)으로 승격시키도록 명하였는데, 희생을 살피는 일을 직접 행할 때 희생을 관장하는 관원이기 때문이었다.
○ 2월. 함흥 유생이 흰 꿩을 바쳤는데 물리치고 받지 않았다.
○ 3월. 직접 경모궁의 제향 의식을 살펴보고, 병풍에다 그려서 재전(齋殿), 재실(齋室), 전사청(典祀廳), 궁사(宮司), 직소(直所)에 나누어 보관하게 하였다. 이어 태묘와 사직의 제향 의식도 그려서 병풍을 만들어 항상 보고 준행할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 4월. 주강(晝講)하였다. 원자의 사부(師傅) 송환기(宋煥箕)를 불러 보고 《중용》을 진강 하였다. 상이 송환기에게 이르기를,
"경의 집안 두 선정이 모두 성조(聖祖) 때 권강(勸講) 직임을 맡았었다. 그런데 경이 또 이 직책을 맡아 올라왔으니, 경에게 있어서도 영광되고 다행스러운 일일 것이다. 경은 아직도 9품관의 장복(章服)을 입고 있는가. 일찍이 듣건대, 선정의 장복은 집에서 새로 지을 겨를도 없이 안에서 계속 내려졌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져서 경 집안의 고례(古例)가 되었으니, 금권(金圈)의 장복과 품대(品帶)를 안에서 내리겠다. 장복은 자궁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하였다.
○ 원자의 사부와 유선(諭善)에 대한 상견례(相見禮)를 행하고, 이어 서연(書筵)을 열었다. 상이 사부와 유선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비록 절하고 읍하는 의식을 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강독하는 소리를 들으니 내 마음이 기쁘다. 경들은 잘 보도(輔導)하라."
하였다.
○ 문정공(文正公) 송시열의 사손(祀孫)이 사판(祠版)을 받들고 부임하였다. 서울을 지나가는 날 성균관 당상이 유생을 거느리고 나가 강가에서 맞이하도록 명하고,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였다.
.○ 6월. 하교하기를,
"과거 선조(先朝) 때에는 농사를 중히 여겨서 밭갈고 김매는 일을 새벽부터 나가서 직접 살피시느라고 매번 성 남쪽 들판에 계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기쁜 표정으로 깃발을 바라보면서 기꺼이 농사일에 달려나갔으며, 그곳에 대(臺)를 쌓고 성경대(省耕臺)라고 이름을 붙였다. 추술(追述)해야 할 나의 도리상 어찌 표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그 터에 가서 살펴보게 하라."
하고, 이어 대를 더 쌓도록 하였다.
○ 윤6월. 예조 판서 민종현(閔鍾顯)이 상소하여 영성(靈星)과 수성(壽星)에 제사를 거행하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시경》사의장(絲衣章)에 대해 주자(朱子)가 대지(大旨)를 해석하기를,' 이 또한 제사지내고 술을 마시는 시이다." 하였는데, 제사는 바로 영성에 제사지내는 것으로서 농사의 상서를 위해 제사지내는 것이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수성은 각수(角宿)와 항수(亢宿)이다.' 하였으니 바로 노인성(老人星)으로, 추분일에 제사지내기도 하고 천추절(千秋節)에 제사지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두 별에 다 제사지냈던 것은 제후가 나라안 분야(分野)의 별에 제사지낼 수 있었기 때문이며, 우리나라에 한라산이 있어서 항상 노인성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영성에 제사지내는 것은 천하가 공통적으로 행하는 제도이다. 사령(祀令)의 의절(儀節)이 모두 《오례의》에 실려 있으니,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널리 조사해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규장각이 아뢰기를,
"하해(何楷)의《세본고의(世本古義)》에 이르기를, '영성에 대한 제사는 오직 농사가 잘 되기를 빌기 위한 것으로서 역대에 통행되었다.' 하였습니다. 수성의 경우는 추분에 나타나는 것이 실제로 기성(箕星)과 미성(尾星)
하고 , 홍문관이 아뢰기를,
"제법(祭法)에 이르기를, '왕궁(王宮)에서는 해를 제사지내고 야명(夜明)에서는 달을 제사지내고 유종(幽宗)에서는 별을 제사지내고 우종(雩宗)에서는 수성(水星)을 제사지낸다.' 하였는데, 우리 조정이 이미 우사를 행하고 있으니 유종은 실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조정의 가법(家法)은 이러한 제향에 특별히 경의와 삼감을 다하는 것이다. 예조 낭관으로 하여금 대신, 유신, 문임(文任)에게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대신 홍낙성 등이 옛 전례를 다시 밝히는 것이 타당하다고 헌의하였으나. 일이 끝내 행해지지 않았다.
○ 상이, 평음후(平陰侯) 유약(有若)을 곁채에서 제사지내는 것에 대해 일찍이 의문을 품었었다. 하교하기를,
"《논어》에 유자(有子)의 말을 기록한 부분이 세 곳인데, 모두 증자(曾子)와 함께 특별히 '자(子)'라고 칭하였다. 또《맹자》에는 '유약이 성인(聖人)과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인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 언행과 기상을 감히 공자에게 비교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성인인의 영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는 것이 뚜렷이 드러난다. 근래에 듣건대, 중국 조정의《회전(會典)》에는 유자와 주자(朱子)를 대성전에 올려 배향하여 십이철(十二哲)로 삼고, 유자를 자하(子夏)의 다음에, 주자를 자장(子張)의 다음에 두었다고 한다. 지금 중국 조정에서 미처 하지 못한 오현(五賢)은 두루 거론하면서 중국 조정에서 이미 행한 유자를 도리어 빠뜨렸으니, 이것은 유독 무슨 말인가. 유자를 성전(聖殿)에 올려 배행해야 하겠다."
하였는데, 이미 전교하였으나 끝내 행하지 못하였다.
○ 8월. 장릉(章陵)에 행행하여 직접 제사지내고, 길가에서 김포군(金浦郡)의 부로(父老)들을 불러 보고 고통을 물었으며, 현륭원으로 가서 직접 제사지냈다. 또 민회빈(愍懷嬪)의 묘소에 가서 전작례(奠酌禮)를 행하고, 승지를 보내어 고 상신(相臣) 강석기(姜碩期)의 묘소에 치제 하였다. 김포에 대해 1년간 급복(給復)하고, 어가가 지나간 10개 고을에 대해 차등 있게 조세를 견감하였으며, 짓밟힌 벼와 곡식은 그 값을 절급(折給)하였다.
○ 상이, 참찬 구종직(丘從直)의 묘소가 어가가 지나는 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하교하기를,
"신하가 성군(聖君)을 만나 뜻이 맞은 예가 예로부터 어찌 한정이 있었겠는가마는, 우연히 거리에서 만난 것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이 가장 성대한 경우일 것이다. 어진이를 등용하는데 일정한 형식을 두지 않았던 성덕(聖德)이 지금까지도 크게 일컬어지고 있다."
하였다.
○ 11월. 경모궁에 나아가 동향 대제(冬享大祭)를 행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전악(典樂) 김응삼(金應三) 등을 데리고 들어오게 하였다. 승지를 시켜묻기를,
"종과 경쇠를 연주하는 때에 더디고 느린 점이 부족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김응삼이 아뢰기를,
"매번 예를 행하는 절차에 좇아 연주하기 때문에 예가 천천히 진행되면 음악을 느리게 연주하고 예가 빨리 진행되면 쉬 마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앞으로는 더디고 느리게 연주하도록 하라. 그러나 그 중에서도 느리고 빠른 차이가 없지 않다. 영신(迎神)할 때는 느리게 하면 안 되고, 송신(送神)할 때는 빨리 해서는 안 된다. 초헌 및 아헌과 종헌의 예를 행할 때도 느리고 빠르게 해야 할 곳이 있으니, 초헌은 9장으로 연주하되 중간 정도의 빠르기로 연주하고, 아헌과 종헌은 9장을 반으로 나누어서 연주해야 한다. 변두(?豆)를 거둘 때는 거두기를 지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보아 느리게 하면 안 된다."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변두를 거두는 때와 송신하는 때에 악장을 합하여 연주하라고 명하고, 또 폐백을
○ 12월. 하교하기를,
"먼 지역 사람들이 녹사(祿仕)의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이 100여 년 이래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말았다. 고을과 도에서 천거하는 때에도 두루 찾아내는 방도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 어찌 유사의 잘못이며 조정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영남의 고 유신 조위(曺偉)촹조식(曺植)촹정구(鄭逑)촹장현광(張顯光), 호서의 고 유신 유계(兪棨)촹윤황(尹煌)촹김경여(金慶餘)촹김홍욱(金弘郁), 호남의 고 유신 박상(朴祥)촹기대승(奇大升),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촹김천일(金千鎰)의 자손을 감사가 찾아서 보고하라. 고가 세족(故家世族) 가운데 실로 천거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일체 천거하라. 그렇게 한다면 의당 전(殿) 위의 주첩(柱帖)을 대신할 것이다."
하였다.
○ 오은군(鰲恩君) 이경일(李敬一),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의 8대손 장현손(張顯孫),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의 7대손 정한철(鄭漢喆)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경일에게 이르기를,
"경이 오성부원군의 손자로서 금남군의 후예를 데리고 입시하였으니, 일이 우연하지 않다."
하고, 정한철에게 이르기를,
"장 옥성(張玉城)의 뛰어난 충성과 위대한 공적은 내가 크게 감동한 바인데, 옥성부원군에 버금가는 큰 공을 세운 사람이 그대의 조부이다. 안현(鞍峴) 전투가 벌어지던 때에 금남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위기를 넘기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 그 자손이 이렇게 영락하였으니, 이 어찌 충성과 공로에 보답하려던 성조(聖祖)의 뜻이겠는가. 의당 수령에 제수하여 관에서 사판(祠版)에 제사지내도록 하겠다."
하였다.
○ 호남에 진휼 곡식 4만 곡을 조처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22년(무오, 1798)
○ 1월. 공시(貢市)의 폐단을 물은 것에 대하여 비변사가 품처하니, 하교하기를,
"사방으로 통하는 길에 대가를 멈추고서 고통을 물어놓고 결단을 내려야 할 곳에 이르러서는 별로 소생시키는 말이 없다면 진실하지 못한 데 가까울 것이다. 한 점포나 한 공인에 대해서라도 반드시 조처가 있어야만 일의 모양이 옳게 될 것이다. 다시 한 가지로 의견을 모아 품처하라."
하였다.
○ 상이 기곡제(祈穀祭)를 직접 행하려 하는 때에 큰 눈이 내렸다. 영중추부사 홍낙성이 차자를 올려 취소하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시절을 알고 내리는 좋은 비와 기곡제를 지내는 날 아침의 상서로운 눈은 삼농(三農)과 만 백성을 위해 마음으로 기뻐할 일이다. 제사지내는 저녁에는 날씨가 개어 밝고 청명하니 다시 마음속의 정성을 구해야 할 것이다. 어찌 행여라도 대신 행하도록 명하겠는가."
하고, 마침내 단에 나아가 직접 행하였다.
○ 2월. 현륭원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다. 대가가 돌아오다가 청천평(淸川坪)에 이르렀을 때 대(臺)를 쌓은 곳에서 말을 내려 대 가까이 사는 백성들을 불러들였다. 하교하기를,
"을묘년에 자궁의 수레가 잠시 머물렀던 곳을 너희들이 쌓아서 대로 만들었으니, 민정(民情)을 크게 볼 수 있다. 내가 가상하게 여긴다."
하고, 과일과 술을 나누어 먹이라고 명하였다.
○ 고려의 충신 김주(金澍)에게 시호를 하사하고, 직접 제문을 지은 후 승지를 보내어 제사지냈으며, 또 길재(吉再)의 오산사(吳山祠)에 치제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김주의 형 김제(金濟)가 평해(平海) 수령으로 있다가 벽에 시를 지어놓고 배를 타고 떠나서는 이름을 제해(齊海)라고 바꾸었으니, 대개 바다로 달아난 노중련(魯仲連)과 같고자 함이었다. 시호를 의논하도록 하라."
○ 3월. 건원릉(健元陵) 동구 밖에 있는 오래 된 못을 파서 물이 통하게 할 것을 명하고, 이후로는 승지 및 감사가 봉심할 때 본 대로 계문하라고 하였다.
○ 상이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에게 이르기를,
"옛날에는 돈이 크고 두꺼웠는데 근래에 오면서 점차 얇고 작아진 것은 어째서인가? 옛 역사에서도 아안전(鵝眼錢)촹연환전(?環錢) 등의 돈은 가벼워서 물에 떴다고 하는데, 그때는 모두 잘 다스려진 세상이 아니었다. 이러한 제작(制作)도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이니, 어찌 오래도록 쓸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 문무과 신방(新榜) 중에서 70세 이상 된 사람을 전(殿)에 오르게 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는 모두 수를 누리신 선조(先朝)의 교화이다."
하고, 문봉익(文鳳翼) 등 6명을 모두 첨지에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사마시(司馬試) 방목 중에서 70세 이상 된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진휼청에서 양식과 여비를 대주고 여로의 역참에서 말을 지급하게 하였다.
○ 4월. 우유선(右諭善) 이직보(李直輔)가 부름을 받고 이르렀다. 상이 좌우 유선 및 요속(僚屬)을 인견하였다. 이직보에게 이르기를,
"강학하는 이외에도 매사를 권면하도록 하라."
하고, 요속 신대우(申大羽)에게 이르기를,
"유선의 직책은 현묘조(顯廟朝)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본래 정해진 품계가 없었다. 내가 춘저(春邸)에 있던 때에 박성원(朴聖源)은 당하관으로서, 고 상신 서지수(徐志修)는 정경(正卿)으로서 이 직책을 맡았었다. 요속의 설치도 이 뜻을 본뜬 것인데, 지금 요속을 택하면서 음관을 우선으로 하고 문관을 뒤로 한 것은 대개 유학을 숭상하는 뜻이다."
하였다.
○ 주강하였다.《중용》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직보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요순(堯舜)처럼 되지 못하는 것은 한 생각의 털끝만한 차질에서 말미암는 것이다, 천도(天道)가 심원(深遠)하여 다함이 없고 문왕(文王)의 순수함이 또한 그침이 없는 것은 성(誠)이다. 가령 1년 359일 동안 하루에 11시간은 이 마음을 항상 보존하고 1시간 혹은 1분의 짧은 순간 동안만 중단하더라도 이 짧은 순간으로부터 성인의 도가 이미 그치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그릇 가득 물을 담아서 소거(?車) 위에 올려놓았을 때 잠시도 정지함이 없이 소거를 돌려야만 그릇 속의 물이 조금도 새나가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한순간이라도 멈춘다면 땅에 물이 쏟아져서 이미 다시 거두어들일 수 없게 된다. 한가한 시간에 때로 스스로 점검해보면 한 해에 한 번 이르기도 하고 한 달에 한 번 이르기도 하는 것이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조수(潮水) 정도만이 아니니, 공적이 저렇게 낮고 규모가 저렇게 좁은 것이 모두 여기에서 말미암는다. 이것을 바로잡는 방도는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니, 이직보가 아뢰기를,
"군주는 바로 하나의 하늘이니, 털끝만큼이라도 하늘과 부합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이것이 바로 공부가 이르지 못한 부분입니다. 하늘을 바라는 도리는 오직 순수함이 또한 그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하였다.
○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변사를 설치한 것이 법의 뜻이기는 하지만, 조정이 높여지지 않고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엄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권한이 가벼운 데 있다. 고 상신 최명길(崔鳴吉)의 상소에 이미 비변사를 혁파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서사(署事)의 법을 지금 갑자기 행할 수는 없더라도 만약 조금씩 정부의 고사(故事)를 회복해서 육조(六曹)를 전담하여 관할하게 한다면 매우 아름다운 제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하였다.
○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나의 평생 공부는 1부(部)의 주자서(朱子書)에 있다. 주자에게서 나온 한두 마디의 말이나 글자를 모아 묶어서 한 질의 책으로 만들고자 한다. 책이 완성되기를 기다려서 주합루(宙合樓) 근처에다 판본을 보관하고, 주자의 진상(眞像)을 봉안하여 우러러 참배하는 장소로 삼고자 한다. 나는 주자에 대해서 실로 스승을 섬기는 듯한 정성이 있다."
하였다.
○ 어정(御定)《사부수권(四部手圈)》이 완성되었다. 상은 정무를 보는 여가시간에 항상 책을 가까이 하였다. 삼례(三禮), 《사기(史記)》,《한서(漢書)》, 송 오자(宋五子)의 문집,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 육지(陸贄)의 글에 직접 비권(批圈)을 가한 다음 이를 모아 한 질의 책을 만들었다
○ 경주(慶州) 집경전(集慶殿)의 옛터에 친필 비석을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여 보호하였는데, 예전에 태조의 영정(影幀)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하교하기를,
"벌레가 벼와 묘소의 나무를 해치고 있으니 어떻게 잡아 없애지 않을 수 있겠는가.《주관(周官)》의 서씨(庶氏)와 전씨(剪氏)의 직책은 모두 이를 위해서 설치한 것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태워서 묻는 것은 당(唐) 나라 때 요숭(姚崇)에게서 시작되어 역대가 이를 인습하였다. 근래에 원소(園所)와 능침의 뽕나무와 가래나무에 충해(蟲害)가 발생하여 잡아 없애게 하였으나, 나의 마음에 편안하지 않은 점이 있다. 이 벌레도 꿈틀거리는 생물(生物)인 이상 살려주는 덕을 그에 대해서도 아울러 행해야 하겠으니, 몰아서 늪으로 내쫓는 것이 불질러 태우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일찍이 듣건대, 벌레가 날아 바다로 들어가서 물고기와 새우가 되었다고 한다. 복파(伏波)가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분명한 징험이 지금까지 전해지니, 지금부터는 주워서 구포(鷗浦) 해구(海口)에 던지도록 하라. 여주(驪州)의 능수(陵樹)에도 충해가 있다고 하니, 화성(華城)의 예를 그대로 따라 강물에 던지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어정(御定) 《오경백편(五經百篇)》이 완성되었다. 상이 《주역(周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예기(禮記)》에서 99편을 취하되 《중용》과《대학》을《예기》에다 놓고, 《맹자》책의 뒤에다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인 뜻을 본떠서 주자의 장구서(章句序)를 그 아래에 실어 간행하였다. 처음에 삼경(三經), 사서(四書),《춘추좌씨전》의 경해(經解)를 새로 인쇄하여 태학의 존경각(尊經閣)에 보관하였는데, 이 책이 완성되자 함께 보관할 것을 명하였다. 직접 글을 지은 후에 대사성을 보내어 성묘(聖廟)에 고유(告由)하니, 이는 주자가 장주(?州)를 맡았을 때의 고사를 모방한 것이었다.
○ 하교하기를,
"근래에 수령의 천거법이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으니, 장오죄에 연좌된 부류에 대해서는 법전을 그대로 따라야 하겠다. 수령이 잘 다스리지 못한 경우에는 지레 체차 하여 보내고, 전조의 당상에게는 잘못 천거한 데 대한 율문을 적용하도록 하라. 어람(御覽)하는 관안(官案)에는 당해 수령의 이름에 찌를 붙이고, 그 옆에다 천거한 당상의 성명을 쓰도록 하라."
하였다.
○ 이때 날씨가 오랫동안 가물었다. 상이 이르기를,
"모든 일은 실질적인 데 힘쓰는 것이 귀중한 법이다. 수성(修省)하는 방책은 실질적인 일로부터 행하여야 할
하고, 형조 당상과 낭관이 모두 본조에 직숙하면서 경외의 사형 죄수를 재차 심리하여 계속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어람을 거쳐 판하된 것이 모두 100여 건이었는데, 살려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상은 처음 즉위했을 때부터 형옥의 처리에 신중을 기하였다. 가련히 여기고 불쌍해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와서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형을 받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여러 도에서 수안(囚案)을 올릴 때마다 반드시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직접 열람하였으며, 매번 재계하는 때에 반복해서 생각하고 차분히 강구하였다. 더러는 수십 건을 판하하느라고 아침부터 시작하여 해가 기울고 또 밤이 깊어지기도 했지만 한 번도 피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나는 옥안에 관련된 사람의 성명은 잊어버리지 않는데, 이는 내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정성이 이르러서 그런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형벌은 다스림을 돕는 도구이다. 사람의 목숨이 중요하지만 일이 윤리와 기강, 교화에 관계되면 단지 법에만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전후로 정상을 참작하여 특별히 용서한 사형 죄수가 매우 많았다. 어제집(御製集)에 심리록(審理錄) 26책이 있다.
○ 상이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한(漢) 나라의 400년 기업(基業)은 풍류(風流)가 돈독하고 법망(法網)이 성근 데 있었다. 나는 지금 세상을 조정에는 죄에 걸리는 사람이 없고 민간에는 형벌 받는 집안이 없게 만들고 싶다. 이 어찌 화기(和氣)를 맞이해서 하늘의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전 호조 판서 김화진(金華鎭)이 상소하여 당오전(當五錢)과 당십전(當十錢)을 주조하여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리고, 편리할 것인지를 비변사 신하들에게 일일이 물었는데, 논의가 일치되지 않았다. 호조 판서 조진관(趙鎭寬)이 아뢰기를,
"신은 듣건대, 국가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는 방도는 경비를 절약하고 근본에 힘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돈은 본래 통화를 위한 것이지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익을 취한다면 실로 중전(重錢)만큼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폐단이 또 그와 같습니다. 이를테면 오(吳)의 당천전(當千錢), 촉(蜀)의 당백전(當百錢), 민(?)의 당십전, 원(元)의 당오전과 같은 것은 임시방편으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주조했다가 곧바로 폐지하였습니다. 더구나 물산(物産)은 한정이 있는데 전화(錢貨)가 날로 증가한다면, 온갖 경비가 뛰어올라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기화(奇貨)를 만들어내는 것은 백성들에게 질박함을 보여주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다.
○ 충청감사 한용화(韓用和)가 각 고을에서 비를 빌었다고 아뢰니, 하교하기를,
"온 도가 비를 빈 것은 또한 드문 일이다. 도내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풀지 못한 채 어둠 속에 가리워진 자가 있는 것은 아닌가? 성심을 다해 찾아내어서 기필코 화기(和氣)를 해치던 일이 화기를 인도하는 일로 전환되게 하라."
하였다.
○ 날씨가 가물었으므로 근시를 보내어 비를 빌었다. 하교하기를,
"향소(享所)에 진배(進排)하는 각사의 관원이 반드시 일일이 재숙(齋宿)하지는 못할 것이니, 밖에서 진배하는 물종은 대령하지 말도록 하고, 이것을 그대로 규정으로 삼으라."
하였다.
○ 우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원자궁이 지금 《고경중마방(古鏡重磨方)》을 강독하고 있는데, 예학(睿學)이 날로 진보되므로 신은 실로 기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선정(先正) 이 문순(李文純)이 편찬한 책이다. 열성 이래로 드러내어 밝히고 소중히 보관해 두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선조 때도 경연에 사용하고 한 달에 세 번 있던 성균관 유생의 고강(考講)에 사용하였다. 지금은 날씨가 덥기 때문에 간략한 것부터 시작하고자 먼저 이 책을 강독하게 하였으며, 또 가끔씩 시를 읊조리는 뜻을 취하여 시가(詩歌)를 끼워 넣은 것이다."
하였다.
○ 7월. 갑산(甲山)에 큰물이 져서 백 명이 넘는 인명이 빠져 죽었다. 홍원 현감(洪原縣監) 이명연(李明淵)을 겸춘추에 차하하여, 빠져 죽은 곳에 단을 설치한 다음 제문을 읽어 제사지내고 그 처자를 위유하게 하였으며, 재해 입은 민호의 환자곡과 신역(身役)을 탕감해주었다.
○ 8월. 화성 유수(華城留守)에게 하유하기를,
"공자께서는 '한 그루 나무를 베고 한 마리 짐승을 죽이는 것도 시기가 아닌 때에 하면 효도가 아니다.' 는 가르침을 남기셨다. 지난번 벌레를 잡는 일을 처음으로 규정을 만들어 행하였었다. 벌레 잡는 일도 그런데 나무를 베는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맹자》에 이르기를, '때가 되면 도끼를 들고 산림으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주자는 초목의 잎이 진 뒤라고 해석하였고, 공영달(孔潁達)은 왕제(王制)에서 해석하기를, '초목의 잎이 떨어진 뒤에 산림에 들어간다는 것은 10월을 말한다.' 하였다. 지금부터 나무를 베는 것은 반드시 10월을 기다려서 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라."
하였다.
○ 경릉(敬陵)과 창릉(昌陵)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는데, 덕종(德宗)이 탄생하고 안순왕후(安順王后)가 승하한 해이기 때문이었다.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한확(韓確), 남양부부인(南陽府夫人),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황려부부인(黃驢府婦人), 청천부원군(淸川府院君) 한백륜(韓伯倫), 서하부부인(西河府婦人)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고, 청천부원군의 사손(祀孫)을 본릉 영에 차임할 것을 명하였다. 직접 제문을 지어 월산(月山)촹인성(仁城)촹제안(齊安) 세 대군과 현숙귀주(顯肅貴主)의 묘소에 제사를 설행하도록 하고, 경릉에 배장(陪葬)한 명숙귀주(明淑貴主)의 묘소를 수축하고 후손으로 하여금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의 이 조처는 모두 우리 성묘(成廟)의 효성을 우러러 계술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 호서의 방물(方物), 물선(物膳), 삭선(朔膳)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또 전궁(殿宮)의 진헌을 정지하여 진휼 밑천에 보태도록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자궁의 하교를 받았으니 이 또한 뜻을 따르는 한 가지 방도이다."
하였다.
○ 10월. 장용 외영(壯勇外營)에 오위(五衛)의 제도를 창설하였다. 화성(華城)의 마군(馬軍)촹보군(步軍) 편제는 훈련도감의 제도를 대략 모방한 것이었는데, 계축년에 영(營)으로 승격한 후로는 국초에 영안도(永安道)의 마군을 친군위(親軍衛)라고 일컬었던 제도를 따라서 친군위 300명을 두고 보군 26초를 두었으며, 또 용인(龍仁) 등 5개 고을 속오군 중에서 정예하고 건장한 자를 뽑아서 12초를 더 두어 1영(營) 5사(司)를 만들었다. 또 본부 및 고을 민병으로 성을 지키게 하는 제도를 처음으로 만들어 돌려가면서 나누어 소속시키게 하였다. 마침내 사(司)와 초(哨)의 명칭을 고쳐서 위(衛)촹부(部)의 법을 정하였는데, 1영을 5위로 나누고 5위는 모두 25부로 편성하여 내외의 영군(營軍)이 모두 5000명이었다. 비변사가 절목을 완성하여 올렸다.
○ 11월. 영남에 진휼 곡식 3만 8000곡, 호서에 2만 곡, 호남에 4만 5000곡을 조처하여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 12월.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면하고 농서(農書)를 구하였는데, 이듬해 기미년이 바로 영묘(英廟)가 직접 적전(?田)을 갈았던 해인데다 그달의 월건(月建)이 축(丑)이었으므로 토우(土牛)로 풍년을 비는 뜻이었다. 경외에서 농서를 올린 자가 40여 명이었다.
○ 외금부와 형조의 유배 죄인 가운데 부모의 나이가 이미 돌아가 봉양해야 할 연한에 이르렀거나 연한은 되지 않았더라도 정리가 매우 불쌍한 자는 모두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특별 하교로 정배한 자라도 부모의 나이가 돌아가 봉양해야 할 연한에 해당되면 사유를 갖추어 뜻을 여쭙고, 부모의 나이가 연한이 되지 않아서 유배지로 떠났다가 유배지에 도착한 후에 연한이 차게 된 자는 대신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였다.
○ 성균관에 어제(御題)를 내려 유생들을 시험보이고, 수석한 사람을 불러 법온(法?)을 내렸다. 세종조에 화종(畵鍾)을 하사하고 효종조에 은배(銀盃)를 하사했던 고사를 따라서 특별히 늘 사용하던 은배를 거두어 하사하였는데, 술잔의 배 부분에다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고 전서(篆書)로 썼으니, 대개 녹명편(鹿鳴篇)에서 빈객에게 연향을 베풀었던 예로써 선비를 예우한 것이었다. 이어 경연에 참여한 신하와 응제한 유생들에게 명하여 시가(詩歌)를 지어 그 일을 노래하게 하고, 직접 명(銘)과 시(詩)를 짓고 책머리에 서문을 실었으며, 이름을 《태학은배시집(太學銀盃詩集)》이라고 하였다.
○ 도목 대정을 행하기에 앞서 하교하기를,
"전한(前漢)에서 관리 선발을 중요시했던 것은 바로 근본을 돈독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이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시종이 도리어 음관이나 무관보다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조세를 관장하는 관원이 되지 못하고 외방으로 나가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직임도 맡지 못한다. 또 더러는 낮은 직책에서 끌어올려서 묘당의 계책에 참여하게도 하지만, 참으로 이른바 '등용된 자가 찾던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다. 만약 새로 임용된 문신들로 하여금 지방 고을에서 관리의 일을 익히게 하고 역참의 일까지 겸하게 함으로써 민생의 질고 를 익히 알게 한다면 그가 부름을 받고 왔을 때 조정에서는 말을 하고 물러가서는 글을 올려 폐단을 제거할 방책을 낱낱이 진달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중 궁궐이 비록 깊어도 사방의 들판을 가까이에서 살펴보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순(舜) 임금의 뜰에서 널리 아뢰고 분명히 시험했던 것도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 묘당은 별도로 대양할 방책을 강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문관, 음관, 무관을 섞어서 임용하는 정사에 대해 신칙하였다.
○ 하교하기를,
"사람을 쓰는 길이 날로 좁아지고 있으니, 초야에서 발탁되기를 기다리는 선비가 있다고 한들 어디를 통해서 나올 수 있겠는가. 옥당의 직책은 다른 관직과는 다르므로 살고 있는 지명(地名)으로 구별하여 제수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관록(館錄)은 반드시 먼 지방에 살고 있어서 드러나지 않은 사람을 우선적으로 찾도록 하라."
하였다.
23년(기미, 1799)
○ 1월. 팔도와 사도(四都)에 윤음을 내려 농사에 대한 경륜(經綸)을 올리게 하고, 지방관 에게도 신칙하여 의견을 진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는 대개 신하는 의견을 진달하고 임금은 분명히 시험하고자 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말이 채택할 만해야만 실제로 시행하여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니, 진달한 말로 우열을 정하여 출척(黜陟)을 시행하겠다."
하였다.
○ 하교하기를,
"병들어도 치료하지 못하고 죽어도 장사지내지 못하는 성 안팎의 가난하고 잔약한 백성을 뽑아서 진휼청에 보고하여 구휼하도록 각부에 신칙하라. 그리고 여러 도도 일체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 이때 전염병이 돌았다. 서로(西路)에서 발생하여 전국에 번져나갔는데, 그 증상은 감기와 유사하였으며,
○ 호서 지방에 기근이 들었다. 해서의 각 곡식 2만 곡을 배로 운송하여 진휼하였다.
○ 금위영과 어영청에서 성 밖의 민전(民田)을 사들여서 표지를 세워 경계를 정한 다음에 가난한 백성들이 그곳에 장례지낼 수 있게 해줄 것을 명하였다.
○ 3월. 좌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유선(諭善)을 가려 택하여 차임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좋은 말이다. 내가 강서원(講書院)에서 공부하던 때에 박 유선(朴諭善) 외에 또 좌우 겸유선이 있었으니, 지금도 경재(卿宰) 중에서 명망이 있는 자를 가려 뽑아 겸유선으로 삼는 것이 좋겠다. 효묘조(孝廟朝)에는 선정(先正)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좌유 유선으로 있었고 김좌명(金佐明)이 겸유선으로 있었다. 경은 전례를 인용해서 규정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선조(先朝)에서 옥당과 양사를 거쳤으면서 지금까지 당하관으로 있는 사람들을 모두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 5월. 차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실로 덕이 없어서 이렇게 가뭄을 부른 것이다. 주자(朱子)는, 해촹달촹별이 온전하고 봄촹여름촹가을촹겨울이 조화롭고 산이 벌거숭이가 되지 않고 못이 마르지 않는 것을 위육(位育)의 공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나의 책임이다. 신해년 이후로 강수량을 반드시 기록해두게 했는데, 1년치 통계를 내보았더니 작년 이달은 측우기의 수심이 한 자에 가까웠으나 올해 이달은 겨우 2치밖에 되지 않았다. 수확이 어떨지 미리 헤아릴 수는 없지만 백성들의 당장의 형편은 매우 안타깝다."
하였다.
○ 상참을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 조정의 태평 시절로 말하자면 숙묘 때가 가장 성대했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날씨를 염려하는 마음을 조금도 누그러뜨린 적이 없으셨다. 일영(日影)촹풍간(風竿)을 대궐 뜰에 두루 설치한 것이 모두 이때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경자년의 가뭄에 이르도록 근심하시는 성념(聖念)을 감히 누그러뜨리지 못하셨다. 선조께서 하교하실 때 매번 숙묘의 고사를 거론하시면서 우러러 계술하지 못한다고 하셨으니, 더구나 부덕한 내가 어찌 감히 견주어 논하겠는가. 매년 가뭄을 당할 때마다 이 때문에 애가 타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다."
하였다.
○ 대신을 온릉(溫陵)으로 보내어 작헌례(酌獻禮)를 대리로 행하게 하였는데, 복위(復位)한 해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승지를 보내어 신도공(信度公) 신수근(愼守勤)의 묘소에 치제하고, 그 고을에 정문을 세워주었으며, 사손을 본릉의 참봉에 제수하였다.
○ 6월. 내수사에서 빚돈을 놓는 폐단을 엄히 금하도록 명하고, 그 문서를 불태우게 하였다.
○ 자궁(慈宮)에게 음식상을 올렸다. 상이 연신에게 이르기를,
"자궁께서는 건강이 여전히 좋으시고 눈, 귀, 정신은 거의 내가 우러러 미칠 수 없을 정도이다.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경사(經史)의 구절 및 고사를 우러러 묻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처럼 찌는 더위에도 밤이 되도록 책을 읽으시고, 등잔불 아래에서 손수 100여 장의 책자를 쓰셨다. 정신과 근력이 이렇듯이 도리어 좋아지시니, 이것이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이다. 지금 경들을 만났기에 이렇게 기쁘고 다행스러운 심정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였다.
○ 어정(御定)《대학유의(大學類義)》가 완성되었다. 《대학》경문(經文)에다 진덕수(眞德秀)의《대학연의(大學衍義)》와 구준(丘濬)의《대학연의보절(大學衍義補節)》중에서 절실하고 긴요하여 거울삼을 만한 내용을 요
○ 명하기를,
"초계문신(抄啓文臣)의 친시(親試) 때 옥당과 춘방에서 고사를 써 올리는 규례를 본떠서 '고식(故寔)'이라고 제목을 명하고, 날짜를 넉넉히 줘서 조용히 연구하여 자신의 뜻을 진술하게 하되, 강론한 뜻을 부연하여 권면의 내용을 덧붙이고, 의심나는 부분을 분석해내어 토론의 뜻을 붙이도록 하라. 경사자집(經史子集) 및 국조의 문헌을 달별로 나누어 배정해서 시험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7월. 태묘의 헌관(獻官)에게 제호탕(醍?湯)과 계강환(桂薑丸)을 하사하였다. 하교하기를, "여러 향관이 나 대신 수고한 것을 생각해서 이 약물(藥物)을 내려 더위를 씻게 하려는 것이니, 되도록이면 여러 집사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며, 아래로 일무(佾舞)와 공인(工人)들에게까지 미치게 하라."
하였다.
○ 8월. 상이 장차 능을 배알하려 하였다. 어로(御路)에 함부로 농작물을 심은 곳과 미처 익지 않은 곡식을 먼저 수확한 곳에 대해서는 급대(給代)하고, 대가가 지나갈 길을 편리한 대로 만들되 동원시킨 백성에게는 적절히 그 비용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헌릉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민제(閔霽)와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송씨(宋氏)의 묘소에 정경(正卿)을 보내어 치제할 것과 사손(祀孫)을 본릉 재랑(齋郞)에 의망할 것을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새벽에 주교(舟橋)를 지나오다 보니 송추(松楸)가 눈에 들어왔다. 연전에 제사를 지내기는 했지만, 올해는 바로 회갑년이 거듭 돌아온 해이다. 그런데 나 소자가 감히 선묘(宣廟)의 마음으로 마음을 삼아 전대의 공렬을 어루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창빈(昌嬪)의 묘소에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행하고, 대원군의 제사를 받드는 직계손을 목릉 참봉(穆陵參奉)에 의망해 들이라. 승지를 보내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묘소에 치제하고, 해창위(海昌尉) 오태주(吳泰周)와 명안공주(明安公主)의 묘소에도 일체 치제하라. 충훈부로 하여금 훈신(勳臣)의 적장손(嫡長孫)을 찾아서 아뢰게 하라."
하였는데, 영묘조의 고사를 따른 것이었다.
○ 9월. 차대(次對)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바라는 바는 공맹(孔孟)을 배우는 것인데, 주자(朱子)는 바로 공맹 이후의 제일가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찾는 사람은 바로 주자의 글을 읽은 선비이다."
하고, 외방에 있는 유신에게 하유하여 주자의 글을 읽은 사람을 천거하라고 명하였다. 유선 이직보(李直輔)가 명을 받들어 상소하니, 비답하기를,
"근래에 내가 주자의 글을 천명한 것은 천리를 밝히고 인륜을 바로잡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단(異端)과 사학(邪學)이 따라서 물리쳐지는 것도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책이 한 세상에 밝게 드러나야만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하고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경들은 각각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도록 하라. 그러면 조정에 있는 자들도 천거하는 글을 올리게 될 것이다."
하였다.
○ 어정(御定)《아송(雅誦)》이 완성되었다. 상이 시(詩) 삼백편(三百篇) 이후로 사무사(思無邪)의 뜻을 얻은 것은 주자의 시뿐이라고 생각하여, 손수 추려 뽑아서 인쇄하여 나누어주었다. 이를 경연과 주연(?筵)에서 강독하고 존경각(尊經閣)에 보관하였으며, 팔도와 사도의 교궁(校宮)에 나누어주었다.
○ 문묘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고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다.
○ 11월. 이에 앞서 상이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본집이 있었던 옛터를 알아보도록 명했었다. 예조가 아뢰기를,
"곡산부(谷山府)에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옛날 이름은 신류산(神留山)이고 지금은 당저산(堂底山)이라고 불립니다. 이곳이 바로 국구(國舅)가 옛날에 살았던 곳입니다."
"성후(聖后)의 본관은 상산(象山)인데 상산은 바로 곡산이다. 또 이달 글피는 바로 성후께서 탄생하신 날이다. 이때 보고가 올라온 것이 마치 서로 연관성이 있는 듯하니, 직접 비문을 써서 경건히 옛 사적(事蹟)을 기록해야 하겠다. 일찍이 듣건대, 본부에 치마곡(馳馬谷)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가람산(?嵐山)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말을 달렸던 몇 리 길이 산꼭대기에 있는데, 고을 부로들이 이곳을 두고 태조께서 말을 달렸던 곳이라고 전한다고 하였다. 감사로 하여금 직접 살펴보고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편전에 나아가 성후의 옛 집터에 세울 비본(碑本)과 말을 달리던 길에 세울 성적비본(聖蹟碑本)을 직접 받았다.
○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저술 중에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가 있었는데, 상이 직접 교열하여 3책으로 편성하였다.
○ 연신에게 하교하기를,
"선조 때는 시종 중에 조복(朝服)을 입은 자가 반이 채 되지 않았었고, 또 목홍(木紅)촹공단(貢緞)촹광직(廣織) 등 조복이 있었다. 그래서 중신(重臣) 박종갑(朴宗甲)도 목홍과 광직을 입었었는데, 근래에는 전부 항라(杭羅)를 사용하고 간혹 홍저(紅苧)를 쓰기도 한다. 대개 사람의 덕행이 속에 쌓여야만 얼굴과 몸에 아름다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지, 이 덕이 없이 의복만 화려하게 입었다가는 도리어 옷이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조롱이 있게 된다."
하였다.
○ 상이, 화성부에서 인근 고을 사람들이 묘소 주변에 심어 가꾼 나무를 베어가서 교량을 만든다는 말을 듣고 금지하도록 명하였다. 이르기를,
"원소와 능침에 나무를 심어서 그곳의 울창한 모습을 보고자 하는 조정의 마음을 가지고 제각기 자기 선조의 무덤을 아끼는 이웃 고을 사서인의 마음을 유추해 본다면, 저 사서인의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 12월. 편전에서 신하들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새로 인쇄한 《춘추》를 이제야 다 읽었다. 자궁께서 내가 어렸을 때 책을 떼면 음식을 차려주시던 일을 생각하시고 지금도 음식을 차려서 기쁨을 표시하셨다. 그래서 경들과 함께 맛보려 한다."
하고, 어제시를 써 내리면서 신하들로 하여금 화운(和韻)하여 올리게 하였다.
○ 고 상신 정홍순(鄭弘淳)에게 사제 하였는데, 시호를 내리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 규장각이 어제(御製) 선사본(繕寫本)을 올렸다. 춘저(春邸)에 있던 때부터 기미년에 이르기까지의 저술을 4집(集)으로 나눈 것이었는데, 그 목(目)이 30가지로 모두 191편이었다. 제목을 《홍재전서(弘齋全書)》라고 하였다.
○ 상이 직제학 이만수(李晩秀)에게 이르기를,
"내가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으로 자호(自號)을 삼았는데, 그 뜻은 자서(自序)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 서 가운데 '달은 하나이나 물(水)의 부류는 만 가지이다. 물은 세상 사람이고 달은 태극(太極)이니, 태극이란 나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조정 신하 수십 명으로 하여금 각각 써서 올리게 한 다음에 새겨서 연침(燕寢)의 여러 곳에 걸어 두었는데, 점을 찍고 획을 그은 것을 보면 그 사람의 규모와 기상을 상상할 수 있으니, 이것이 실로 이른바 만천명월(萬川明月)이라는 것이다."
하였다.
○ 대제학 홍양호(洪良浩)가 북관(北關)의 흥왕 고적(興王古蹟)을 모아 4편(編)의 책을 만들고 《흥왕조승(興王肇乘)》이라고 이름붙였다. 상차하여 올리니,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리고 내각으로 하여금 인쇄해서 보관하게 하였다.
○ 겨울 날씨가 따뜻하였다. 상이 하교하기를,
"겨울 날씨가 지나치게 따뜻하여 이렇게 계절의 질서를 잃고 있다. 사람이 정력과 성심을 다해 부지런히 힘
하였다.
○ 하교하기를,
"시장 백성은 도성 백성 중에서도 근본이 되는 사람들이다. 지전(紙廛)의 화재가 즉시 진압되기는 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생활 근거지를 잃는다면 이는 바로 나의 수치이다."
하고, 안도시킬 방도를 묻고 구휼하는 정사를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상이 상경한 수령들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농사에 대해서 물으면 비교적 작황이 괜찮은 해라도 항상 부족한 듯한 뜻으로 대답하는 것이 바로 지방관의 본색이다. 근래에는 물을 때마다 풍년이라고 대답하니, 이 또한 습속 중의 한 가지이다."
하였다.
24년(경신, 1800)
○ 1월. 편전에서 대신, 각신, 예조 당상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오늘은 바로 정월 초하룻날이다. 새벽에 진전(眞殿)을 참배하고 종묘와 경모궁을 전알하였기에 국가의 전례(典禮)에 대해 경들에게 물어보려 한다. 원자의 나이가 이미 10세가 넘었는데도 내가 정중하게 지금까지 기다린 것은 대개 오래오래 기다렸다가 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오늘 새벽 이전까지만 해도 감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삼가 종묘와 경모궁을 전알할 때에 영령이 매우 가까이 계시는 것처럼 느껴지더니 주선(周旋)하고 문을 나올 적에 내 마음이 저절로 감응된 것이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는 것 이상이었다. 그래서 환궁한 이후에 비로소 자전과 자궁께 우러러 여쭈었다."
하고, 관례(冠禮), 가례(嘉禮), 책례(冊禮)를 아울러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세 가지 선을 모두 얻는다는 것이 치학(齒學)을 가지고 말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세 가지 큰 전례를 아울러 거행하는 것은 단장취의(斷章取義)가 되기에 충분하다. 또 의식이 간략하고 번잡하지 않기 때문에 쉬운 것으로 주관하고 간략한 것으로 이루는 건곤(乾坤)의 도리에도 부합된다."
하였다.
○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춘방(春坊)의 겸보덕은, 지난날 선조 때 하문하신 것을 인하여 고 상신 서지수(徐志修) 등이, 세종조에 윤상(尹祥)이 당상으로서 겸임했던 전례를 끌어다 우러러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예에 의거하여 당상 요속 중에서 차출하소서."
하니, 따랐다.
○ 상이 직접 각릉의 대궁(?餘)을 살펴보았다. 하교하기를,
"진배한 각종 제품(祭品)이 이렇게 고른 것은 공인(貢人)들이 정성을 다해 정갈하게 마련한 덕분이다. 어찌 단지 전사관(典祀官)과 숙수(熟手)에게만 상을 베풀겠는가."
하고, 태상시 공인의 묵은 유재(遺在) 300곡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 현륭원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내고 재실(齋室)에서 밤을 보냈다. 사원례(辭園禮)를 행하고는 상이 오열을 진정시키지 못하였으므로 대신과 각신이 번갈아 청하여서 재실로 돌아왔다. 상이 이르기를,
"이번의 경사스러운 예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일인가. 일을 만나 사모의 정이 북받친 데다가 또 지극한 슬픔이 가슴속에 있으니, 장차 어떻게 차마 억제하겠는가."
하였다. 약방 제조가 차를 들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물리치고는 또 엎드려서 울었는데, 이러기를 몇 차례 반복하였다. 환궁할 때 상이 지은 시에,
지지대 주변에서 발걸음 또 더디어라/遲遲臺上又遲遲
하였다.
○ 각신을 불러 보았다. 하교하기를,
"세종대왕은 실로 우리 동방에 태평 만세의 터전을 이룩하신 분이었는데도 왕위를 전수하는 때에 대보(大寶)를 직접 전하지 않으셨고, 훌륭한 임금이 대대로 이어져 가만히 앉은 채 태평을 누린 것으로는 우리 현묘(顯廟) 시절 만한 때가 없었는데도 세자 책봉의 하례 의식을 권정례(權停禮)로 하셨다. 선조께서는 나 소자를 사랑하시는 뜻이 더할 수 없이 지극하셨지만 모든 의식 절차는 한결같이 간략한 쪽을 따랐었다. 이는 영원한 명을 빌고 많은 복을 누리는 근본이 오르지 여기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빈(賓)을 명하고 책문(冊文)을 전하는 절차에 모두 친림하지 않겠다. 진하도 권정례로 하라."
하였다.
○ 2월. 시골에서 상경하여 반열에 참여한 문관촹음관촹무관은, 서울에 있는 동안은 부록(付祿)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60세 이상 된 사람에게 역마와 양식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원자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집복 외헌(集福外軒)에서 관례를 행하였다. 70세 이상의 조관과 80세 이상의 사서인으로서 당상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모두 가자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도의 묵은 환자곡 30만 곡, 공인의 묵은 유재 1만 곡, 시장 백성의 요역 30일을 탕감하고, 군전(軍錢), 결전(結錢), 승역(僧役), 세전(稅錢), 공전(貢錢)을 수를 나누어 감면하였다.
○ 하교하기를,
"지금 이렇게 경사스러운 때에 황발(黃髮)의 노인들이 반열에 나와 우리 빈료(賓僚)의 위의를 빛내 주었다. 겸찬선 송환기(宋煥箕)를 종1품으로 올려 제수하고, 찬선 이직보(李直輔)를 정2품으로 올려 제수하라."
하였다.
○ 혜경궁이 부스럼병을 앓아 열흘 가량 편찮았는데, 상이 밤낮으로 애태우면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몸소 약을 바르느라고 손이 붓기까지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병이 다 나았으므로 신하들이 경하하는 의식을 거행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은 자궁의 뜻이 크게 벌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면서 하유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 상이 왕세자와 함께 진전(眞殿), 태묘, 경모궁을 배알하였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울면서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예를 행함으로 해서 종묘 사직이 무게를 더하게 되었다. 오르내리시는 영령도 반드시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이지만, 나의 심정은 더욱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동궁이 예를 잘 행하였다. 네 차례의 배례(拜禮)와 여러 실(室)의 봉심은 나도 하기 어려운 것이건만 나이가 어려서인지 힘들어 하지 않았다."
하니, 예조 판서 이만수가 아뢰기를,
"추창하고 오르내리고 절하고 무릎을 꿇는 절차가 모두 법도에 맞는데다 근엄함이 몸에 배어 있었으니, 실로 기쁘고 다행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 없습니다."
하였다.
○ 3월. 하교하기를,
"지금 이 경사는 바로 우리 선왕께서 내려주신 것이다. 오르내리시는 영령이 하늘에서 기뻐하시면서 나 소자가 와서 절하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만 같다."
하고,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전배하고 원릉(元陵)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낸 다음에 국내(局內)의 여러 능에 전배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와서 전배하자니 그리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능 주위를 둘러보노라니 옥음(玉音)이 들리는 것만 같다. 이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을 도운 신하들에게 상을 베풀어야 하겠다."
○ 경모궁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재실에서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선조께서는 보령이 여든을 바라보는 때에도 작은 글자를 쓰셨고, '팔순 시안(八旬試眼)'이라는 네 글자를 모각(摸刻)하기까지 하셨다. 나는 시력이 점점 못해져서 안경을 써도 조정에 임하여 바라보는 데 지장이 있다. 10세 이전에는 앉을 때 반드시 무릎을 꿇었는데, 그 때문에 바지의 무릎 부분이 반드시 먼저 떨어졌었다. 지금은 오래 앉아 있는 것도 점점 힘들어지니, 공부가 철저하지 못하고 정력이 점차 나태해진 것이다. 어릴 때는 밥을 매우 적게 먹었고 조석 때마다 무[蘿蔔]만을 먹었다. 기름진 음식을 지금까지 많이 먹지 않은 것도 반드시 효과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근력이 점차 쇠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였다.
○ 4월. 바다에 빠져 죽은 간성(杆城)의 어민을 위해 단을 설치하여 위령제를 지내줄 것을 명하였다. 또 양양(襄陽)과 간성 두 고을에서 진공하는 은어(銀魚)를 영원히 견감할 것을 명하였다.
○ 5월. 수원 유수 서유린(徐有隣)에게 하유하여 도랑을 파고 땅을 개척하는 정사를 신칙하였다. 이르기를,
"일만 석의 물이 흐르는 도랑을 성 북쪽에 트고 아홉 길 높이의 보루를 성 서쪽에 쌓아서 서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마침내 온 경내에 미치고 온 경내로부터 멀리 팔도에까지 두루 미쳐간다면 말로 하지 못할 이로움이 어찌 크고 넓지 않겠는가. 팔달문(八達門) 밖에서부터 유천(柳川) 이포(泥浦)에 이르기까지는 그 토지가 넓은데도 경작이 미치지 않으니, 이는 경기 백성이 농사에 게을러서 힘들여 경작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漢) 나라 때 조과(趙過) 등 여러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농사를 권면하면서 농기구와 소를 모두 관에서 마련해주고 수령된 자가 손수 삼태기와 삽을 들고 밭두둑을 밟고 다니자 묵혔던 토지가 옥토가 되고 놀고 먹던 사람이 농부가 되었었다. 이것이 이른바 더불어 성공을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 6월. 상의 병이 크게 악화되었다. 대신과 신하들이 누워 계신 곳으로 들어가 병세를 살폈는데, 상이 이미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신하들이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수정전(壽靜殿)'이라는 세 글자로, 수정전은 바로 왕대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대개 상의 뜻은 자성(慈聖)에게 우러러 말씀드릴 것이 있었던 듯하나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왕세자가 관원을 보내어 종묘 사직, 경모궁, 산천에 두루 기도하였다. 이에 유교(遺敎)를 선포하고 대보(大寶)를 왕세자에게 전하였다. 28일 유시에 상이 창경궁의 영춘헌(永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깊은 산골 외떨어진 골짜기에 사는 농부, 아낙네와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자신의 부모를 잃은 것처럼 울부짖었다. 상이 이해에 경사를 만나 더욱 슬퍼하느라고 자주 편찮았다. 게다가 또 탕약을 시중들다가 피로가 쌓여 이달 초부터 부스럼 증세가 생기더니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농사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내 병 때문에 지체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병시중을 드는 사람은 대신, 각신, 승지, 사관뿐이었고 환관이나 궁첩은 한 사람도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그로부터 6일째 되는 갑신일에 왕세자가 즉위하였다. 신하들이 상의 덕행과 공업을 의논하여 시호를 '문성무열 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로 올리고 묘호를 정종(正宗)이라 하였다. 이해 11월 1일에 건릉(健陵)의 해좌(亥坐)에 장례지내니, 바로 현륭원 동쪽의 두 번째 산등성이었다. 그로부터 21년이 되는 신사년(1821) 9월 13일에 현륭원 오른쪽 산등성이 자좌(子坐)에 천장하였다.
76권 순조조 1
순조 연덕현도 경인순희 체성응명 흠광석경 계천배극 융원돈휴 의행소륜 희화준렬 대중지정
홍훈철모 건시태형 창운홍기 고명박후 강건수정 계통수력 건공유범 문안무정 영경성효 숙황제(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體聖凝命欽光錫慶繼天配極隆元敦休懿行昭倫熙化峻烈大中至正洪勳哲謨乾始泰亨昌運弘基高明博厚剛健粹
휘는 공(?)이고 자는 공보(公寶)이다. 경술년(1790) 6월 18일(정묘)에 창경궁의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고, 34년간 재위하였으며, 갑오년(1834) 11월 13일(갑술)에 승하하였다. 수는 45세였고, 인릉(仁陵) -광주(廣州)에 있음.- 에 장례지냈다.
즉위년(경신, 1800)
○ 정종대왕 24년(경신) 6월 기묘(28일)에 정종대왕이 창경궁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고, 그로부터 6일째 되는 갑신일에 왕세자가 창덕궁의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 왕대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王大妃)를 대왕대비로 높이고, 왕비를 왕대비로 높였으며, 종묘에 고하고 하례를 받고 교지를 반포하여 대사면을 행하였다.
수빈(綏嬪) 박씨(朴氏)가 실제로 상을 낳았는데, 그날 즉시 정종대왕의 명으로 왕대비가 취하여 아들로 삼고 원자의 칭호를 정하였다. 임신했을 때 상서로운 용꿈을 꾸었고 수빈의 신채(神彩)가 평소에 비해 날로 맑아졌으므로 이미 크게 경사스러운 조짐을 알았었다. 탄생하던 날에는 무지개가 종묘의 우물에 흐르고 상서로운 광채가 환히 비쳤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달려나가 자랑하고 축원하였다. 급기야 탄생함에 커다란 울음소리, 우뚝한 코, 튀어나온 이마, 네모난 입, 겹친 턱 등이 정묘(正廟)가 탄생하던 때와 같았다. 정묘가 와서 보고 무척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 아이의 복록은 나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두 돌이 되던 날 정묘가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것을 대견스러워하며 새 달력을 하사하였는데, 상이 품에 안긴 채 펼쳐서는 병풍 위의 글자와 같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8세에 유선(諭善)에 대한 상견례를 행하고 과정을 정하여 강독하였다. 경신년 1월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이어 관례(冠禮)를 행하였는데, 주선(周旋)하는 것이 법도에 맞고 예의(禮儀)가 볼 만하였다. 의식을 마친 후에 대가를 배종하여 종묘와 경모궁을 전알하였다. 이때 정묘가 발[簾]을 걷도록 명하여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우러러보게 하였는데, 우뚝이 앉아 있는 상의 모습이 거인(巨人)과 같고 주위를 돌아보는 데 법도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정묘가 승하함에 미쳐서는 상이 어린 나이로 양암(諒陰)에 있었는데, 예를 어기는 점이 하나도 없었고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이 많이 수척해졌다. 신하들이 나아가 뵐 때 선왕에 대해서 말이 미치면 문득 주르륵 눈물을 흘리면서 북받치는 슬픔에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지극한 효성에 감복하였다. 국조의 옛 전례를 준용하여 대왕대비가 발을 드리우고 함께 정사를 듣게 되니, 크고 작은 정사를 상이 모두 여쭈어 결정하였다.
○ 7월. 상이 명하여, 정원에서 대신 글을 지어 우찬성 송환기(宋煥箕), 대사헌 이직보(李直輔), 전 자의(諮議) 송치규(宋穉圭)에게 하유하여 조정에 나오게 하였다.
○ 8월. 옥당이 연명으로 상차하여 강연을 열기를 청하기를,
"어린 나이에 날로 광명의 경지에 나아가는 공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더욱 시간을 아껴야 합니다. 예경(禮經)에, '장례지내기 전에는 상례(喪禮)에 관한 글을 읽는다.'는 구절이 있으며, 옛날의 효자는 실로 상례(喪禮)로 인해서 학문을 중단한 적이 없었습니다. 영묘 갑진년에는 공제(公除)가 지나자마자 즉시 소대를 행하였고, 대행조(大行朝) 병신년에는 공제 후 며칠 만에 《예기》를 진강하도록 명하였으니, 이 어찌 우리 전하께서 거울삼고 법삼아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내각에 명하여 익정공(翼靖公) 홍봉한(洪鳳漢)의 주고(奏藁)를 인쇄해 올리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 대행조께서 손수 엮으시고 장차 인쇄하여 세상에 반포하려던 것이다. 인쇄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그 책을 가지고 사우(祠宇)에 치제하라."
○ 9월. 장령 오한원(吳翰源)이 상소하기를,
"신은 듣건대, 성 서쪽의 오래된 사찰에 어떤 무당이 복을 빈다고 칭탁하면서 참람되게 노부(鹵簿)의 의장을 설치했다고 하니, 전해지는 말이 매우 놀랍습니다. 성묘(成廟)께서 편찮으시던 때에 성균관이 가까운 곳에서 무녀가 기도하는 것을 유생들이 쫓아내었는데, 성교(聖敎)에 이르기를, '선비들의 기상이 이와 같으니 나의 병이 낫는 듯하다.' 하셨습니다. 이일은 지금까지도 성대하게 칭송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처음 즉위하신 청명한 날인만큼 이와 같이 불경(不經)한 일을 더욱 통절히 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지금 막 내사(內司)로 하여금 엄히 조사하여 통절히 금하게 하였고, 무당은 유사에게 명하여 붙잡아서 멀리 내쫓도록 하였다. 대각이 이렇게 말을 하니 내가 매우 기쁘다."
하였다.
○ 11월. 정종대왕을 건릉(健陵)에 장례지냈다.
○ 정종대왕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았다. 상호군 송환기가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선왕께서는 상성(上聖)의 자질로 군사(君師)의 지위를 맡으셨는데, 임어하신 24년 동안 치적과 교화를 크게 밝히셨습니다. 멀리 요순(堯舜)의 도리와 공맹(孔孟)의 학문을 거슬러 올라가면서도 그 표준은 반드시 주자(朱子)로부터 시작하여,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근원을 연구해 밝히고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의 가르침을 흥기시켰습니다. 문장은 여사(餘事)였으나 저절로 크고 아득한 경지를 이룩하여 저술한 바가 경전(經典)의 우익(羽翼)이 되었습니다. 정학(正學)을 부지하여 사설(邪說)을 없애고 선악(善惡)을 밝혀 세도(世道)를 안정시켰으니, 정대한 규범과 순수한 행실은 모두 백세(百世)의 모범이 될 만한 것이었습니다. 인의(仁義)의 도리를 세움에 천리(天理)가 밝아지고 인심(人心)이 바로잡히고 천서(天敍)가 바로잡히고 오전(五典)이 돈후하게 된 것으로 말하자면 실로 우리 효묘(孝廟)의 뜻과 사업을 계술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 해와 별처럼 밝은 가르침을 내걸었고, 1부(部)의 《명의록(明義錄)》이 《춘추(春秋)》처럼 밝게 빛났으니, 공적과 덕망은 실로 흠잡을 것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덕을 높이고 숭상하여 묘의(廟儀)를 더욱 융성하게 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성대한 사업이니, 우리 선왕에 대한 부조(不?)의 예(禮)는 백 년을 기다리지 않고 의논해 정해야만 할 듯합니다. 과거 숙묘조(肅廟朝)에 신의 선조 송시열(宋時烈)이 의견을 아뢰고서 효묘(孝廟)의 세실을 청한 것을 계기로 마침내 성대한 전례(典禮)를 정했었습니다. 선왕의 성대한 공렬이 성조(聖祖)와 짝할 만한 이상 이 어찌 오늘날 우러러 계술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선대왕의 세실에 대한 청을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여러 사람의 의견이 모두 일치하였다. 선왕을 추모하여 보답하려는 경의 정성에 매우 감탄하는 바이다."
하였다.
○ 장용영에서 관할하는 양서(兩西)의 곡식을 작전(作錢)하도록 명하였다. 관서(關西)의 14만 1000여 민(緡), 해서(海西)의 4만 4000여 민을 당해 도의 민고(民庫)에 특별히 붙여주었다.
○ 홍국영(洪國榮)의 관작을 추탈(追奪)하였다.
○ 바다에 빠져 죽은 북청(北靑) 등 고을 백성에 대하여 휼전을 시행하고, 이어 당해 수령으로 하여금 바닷가에서 제사를 지내주게 하였다.
1년(신유, 1801)
○ 1월. 호조에 명하여 이해의 경비를 장용영에서 가져다 쓰게 하였다.
○ 정종의 어진(御眞)을 처음에는 현륭원 재실(齋室)에 봉안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전각을 세우고서 행궁의
○ 내노비(內奴婢)와 시노비(寺奴婢)를 혁파하고, 이어 내수사, 각 궁방, 각사의 노비안(奴婢案)을 돈화문 밖에서 불태우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궁시 노비(宮寺奴婢)를 혁파하려던 것은 선조(先祖)의 뜻이었으니 내가 의당 계술해야 하겠다. 장용영으로 하여금 급대(給代)하게 하라."
하였다. 이어 문임(文任)으로 하여금 윤음을 대신 지어 효유하게 하였다.
- 내수사에 소속된 각도의 노비, 함흥(咸興)촹영흥(永興) 두 본궁에 소속된 노비, 육상궁(毓祥宮)촹선희궁(宣禧宮)촹명례궁(明禮宮)촹수진궁(壽進宮)촹어의궁(於義宮)촹용동궁(龍洞宮)촹영빈방(寧嬪房)에 소속된 각도의 노비는 모두 3만 6974명이었고 노비안의 책수는 160권이었으며, 종묘서촹사직서촹경모궁촹기로소촹종친부촹의정부촹의빈부촹돈녕부촹충훈부촹상의원촹이조촹호조촹예조촹형조촹의금부촹도총부촹좌순청(左巡廳)촹우순청(右巡廳)촹장용영촹내시부촹장례원촹사간원촹성균관촹홍문관촹예문관촹종부시촹내섬시촹사옹원촹시강원촹익위사촹사포서촹중학(中學)촹동학(東學)촹남학(南學)촹서학(西學)에 소속된 각도의 노비는 모두 2만 9093명이었고 노비안의 책수는 1209권이었다. -
○ 약방에서 각도에 별복정(別卜定)하는 해산물과 과실 등 여러 물종을 지금부터 영원히 없애라고 명하였다.
○ 서양학이 점차 만연하였으므로 크게 다스려 근절하였는데, 그 중에서 특별히 깊이 빠져들어간 자는 처형하고 마음을 고쳐먹은 자는 용서하였다. 이어 여러 도에 명하여 항상 단속하고 다달이 보고하게 하고, 이것을 법식으로 삼게 하였다. 주문모(周文謨)는 본래 소주인(蘇州人)인데, 사행(使行)을 따라 몰래 들어와서 멋대로 남녀를 꾀어 설법하고 교습하였으므로 군문으로 하여금 효시(梟示)하여 대중을 경각시키게 하였다. 황사영(黃嗣永)은 사술(邪術)에 깊이 빠져서 주문모를 맞이하였고, 체포하려 하자 기미를 알고 망명하였다. 몰래 옳지 않은 생각을 품고 백서(帛書)를 써내었는데, 거기에 해박(海舶)을 보내주기를 청하려는 모의가 있었다. 장차 그것을 서양인에게 전해주려 하였으니, 그가 세운 계획은 다른 적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황사영에게는 대역률(大逆律)을 사용하였다.
○ 7월. 정종(正宗)이 어정(御定)한 《사부수권(四部手圈)》을 간행하여 반포하였다.
○ 9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임장서원(臨?書院)에 추배(追配)하라고 명하였는데, 경기 유생이 상소하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임장서원은 바로 주자(朱子)를 제사지내는 곳이며, 아울러 정종이 편찬한 《양현전심록(兩賢傳心錄)》을 봉안한 곳이다. 정종의 어제 서문(御製序文)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에 선정이 있는 것은 송(宋) 나라에 주자가 있는 것과 같다. 심법(心法)의 동일한 바는 천지도 어기지 못하는 것인데 더구나 사람이겠는가. 세도(世道)를 안정시키고 사설(邪說)을 종식시켰다면 그것은 여기에서 힘입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 10월. 뇌변(雷變)이 있었다. 반찬수를 줄이고 자신에게 책임을 돌렸다. 하교하기를,
"겨울철의 우레는 재변에 속하는 것이다. 나이 어린 내가 우러러 자성(慈聖)의 크나큰 보호를 받고 두세 명 대신의 노성(老成)함에 의지하면서 밤낮으로 두려워하였지만, 내가 처음 즉위한 때에 하늘이 훌륭한 왕이 되도록 명할 것인지를 감히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수장(收藏)의 계절에 갑자기 우르르 하는 우레 소리가 있었으니, 하늘이 경고를 보이는 데는 반드시 그럴 만한 허물이 있을 것이다. 두렵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어디에도 비유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2년(임술, 1802)
○ 1월. 장용영을 혁파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장용영을 장차 혁파하려 한다. 지난날을 돌이켜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장용영을 이미 혁파한 마당에 창고의 저축을 어찌 반드시 내부(內府)에 유치해 두어야 하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가 이에 모든 저축을 호조로 귀속시킬 것을 명하였다.
○ 2월. 영남 관찰사가 의령현(宜寧縣)의 창고와 민가가 불탔다고 치계하니, 상이 비변사 낭관을 보내어 위유하고, 구휼할 방도를 마련하여 농사철을 만난 백성들이 머물러 살 수 있게 하라고 감사에게 신칙하였다. 상이, 타고 남은 곡식을 민호(民戶)에 방출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탕감하도록 명하면서 이르기를,
"가련하구나, 백성들의 실정이여."
하였다.
○ 4월. 소대(召對)를 정지한 때에는 옛 규례에 따라 고사(故事)를 조목별로 써서 올리도록 명하고, 강연에서 물러간 후에 미진한 뜻을 거듭 아뢸 것이 있는 경우에도 아울러 적어 올리게 하였다.
○ 고 상신 홍명하(洪命夏)를 기천서원(沂川書院)에 배향(配享)하도록 명하였다.
○ 임인년(경종 2, 1722)에 화를 당해 죽은 김용택(金龍澤)촹이희지(李喜之)촹이천기(李天紀)촹심상길(沈尙吉)촹정인중(鄭麟重)에게 특별히 증직을 내리고 그 후손을 녹용하도록 명하였으며,궁인(宮人) 묵세(?世)의 옛 집을 돌려주고 정문(旌門)을 옮겨 세우도록 하였다.
○ 5월. 정종대왕을 장차 태묘(太廟)에 부묘(?廟)하려 하였는데, 대신이 옛 전례에 따라 대왕대비전과 왕대비전에 존호를 올리기를 청하였다. 상도 누누이 우러러 청하였으나, 왕대비는 선조께서 존호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물리치고 울기까지 하였다. 대왕대비도 받지 않으려 하면서 언문 교지를 내리고 연석에서 신하들을 타일렀는데, 그 말뜻이 간절하였다. 대신이, 전례가 비록 중하지만 뜻을 따르는 것이 더 큰 일이라고 하여,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만을 올렸다.
○ 6월. 관상감 및 여러 도의 감사와 외방의 사관에게 신칙하여, 재이(災異)에 속하는 일은 크고 작은 것을 따지지 말고 그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 8월. 각신(閣臣)과 승지와 사관이 매년 사맹삭(四孟朔)에 봉모당(奉謨堂)을 봉심할 것을 명하였다.
○ 태묘에 부묘하였다. 예가 이루어지고 나서 하교하기를,
"하례 의식을 이미 거행하였으니, 계술하는 도리로 보아 의당 지난날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던 거룩한 덕을 몸 받아야 하겠다."
하고, 이어 팔도의 묵은 환자곡 및 공인(貢人)의 묵은 유재(遺在), 시민(市民)의 요역(?役), 푸줏간의 속전(贖錢)을 모두 무술년의 예대로 견감하라고 명하였다.
○ 9월. 고 태학생 윤지술(尹志述)을 사현사(四賢祠)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3일 동안 반찬수를 줄이고, 대신(大臣)과 언책(言責)의 신하로 하여금 수성(修省)의 요지를 남김없이 진달하게 하였다.
○ 김씨(金氏)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공인의 묵은 유재 및 여러 도의 증렬미(拯劣米)를 기묘년의 예대로 탕감하고 시민의 요역과 푸줏간의 속전을 경신년의 예대로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 승지를 보내어 고 상신 김창집(金昌集)의 사판(祠版)에 치제하였는데, 자교(慈敎)를 받든 것이었다.
○ 11월. 인정전에서 하례(賀禮)를 행하였는데, 진후(疹候)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3년(계해, 1803)
○ 1월. 진강(進講)에 나아갔다. 《시경(詩經)》 연연편(燕燕篇)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선군(先君)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과인을 권면하도다[先君之思 以勖寡人]'라는 구절은 오늘날 군신 상하가 서로서로 힘쓸 곳이 아니겠는가."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까지 미치니 우러러 흠앙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2월. 하교하기를,
"봄추위가 한겨울이나 다를 바 없고 눈이 거의 매일 내리고 있으니, 우리 가난한 백성들이 어찌 땔나무와 쌀값이 폭등하는 것에 대한 탄식을 면할 수 있겠는가. 바람에 부러져 저절로 말라버린 사산(四山)의 나무는 비록 함부로 베어가도록 허락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백성이 이미 극도로 곤궁한 마당에 흩어서 널리 구제하는 것이라면 무엇인들 불가하겠는가. 각영으로 하여금 베어내게 해서 도성에 땔감이 귀한 걱정거리를 해결하도록 하라."
하였다. 공조 참의 박명섭(朴命燮)이 상소하기를,
"도성의 사산은 교외의 수택(藪澤)을 꼴베고 나무하는 자들과 함께하는 데에 견줄 것이 아닙니다. 크게 보호해주는 은혜는 아마도 두루 미치지 못하고 벌목을 금하는 법은 반드시 이로부터 점차 해이해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바람에 부러진 경산(京山)의 나무를 팔도록 허락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그대는 혹 모르는가? 모든 물건은 흔해지고 나면 혜택을 입는 대상이 저절로 많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이렇게 따져야 하겠는가. 그러나 그대의 말은 직분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겠으므로 매우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다.
○ 윤2월. 궁방(宮房)과 아문(衙門)에서 장토(庄土)라고 진고(陳告)하는 습속을 금하도록 명하였다. 수령으로서 암행어사의 장계에 든 자와 전최(殿最)에서 하(下)를 맞은 자는 기록하여 책자로 만들어서 열람하는 데 대비할 것을 명하고, 탐오한 관리를 폐고(廢錮)하는 법에 대하여 거듭 엄히 신칙하였다.
○ 4월. 평양부의 민가에 불이 나서 가옥 1000여 채를 불태웠다. 불탄 민호의 환자곡과 신역(身役)을 탕감하고 신역이 없는 자는 곡물을 대신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 사관 서유순(徐有恂)을 보내어 재해 입은 백성들을 위유하고, 집을 지어서 머물러 살게 할 방도로써 감사에게 신칙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함흥부 민가에 불이 났다는 보고가 또 이르자 하교하기를,
"피해가 관서보다 배나 더 크고 인명의 손상이 10여 명이 넘으니,놀라운 마음에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도 달갑지 않다."
하고, 또 내국에서 진상하는 녹용을 정봉(停封)하고, 안에서 내려준 단목(丹木) 1만 근, 호초(胡椒) 2000두와 더불어 집집마다 고루 나누어주게 하였다. 가구마다 쌀 1곡을 지급하고, 불에 타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원휼전 이외에 1곡을 더 지급하였으며, 아울러 민호의 환자곡과 신역을 탕감하였다. 또 진헌(進獻) 물선(物膳)을 정지하도록 명하고, 감사에게 신칙하여 집을 지을 재목을 갖추어 지급하게 하였다. 교리 홍석주(洪奭周)를 위유어사로 삼아 달려가서 위유하게 하였다.
○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다. 문과(文科)촹무과(武科)를 설행하여 시험보이고,성균관 당상과 재임(齋任)을 시상하였다. 하교하기를,
"처음으로 석채(釋菜)를 행한 것은 나름대로 입학(入學)의 뜻을 붙인 것이다."
하였다.
○ 좌의정 서용보(徐龍輔)가 아뢰기를,
"얼마 전 자전의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시종으로서 군함(軍啣)을 가진 사람이 능(陵)촹원(園) 촹묘(墓)의 향관(享官)에 차임될 경우에는 호조로 하여금 도로의 원근을 헤아려 반전(盤纏)을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헌관(獻官)으로서 군함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와 같이 하도록 명하였다.
○ 8월. 건원릉(健元陵)과 원릉(元陵)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다. 지돈녕부사 이언식(李彦植)을 보내어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묘소에 경건히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묘소가 연로(輦路)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 예관을 보내어 도봉서원(道峯書院)과 석실서원(石室書院)에 치제하였다.
○ 고 상신 이이명(李?命)촹이건명(李健命)촹조태채(趙泰采)에게 특별히 부조지전(不?之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관원을 보내어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의 사판(祠版)에 치제하도록 명하고, 그 후손을 녹용하게 하였다.
○ 10월. 특별히 단목 3000근과 호초 300두를 심도(沁都)에 내려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12월. 진강에 나아갔다. 상이 어제(御製) 순재 과정(純齋課程)을 내보이고, 이어 영사 서용보(徐龍輔)로 하여금 군덕편(君德篇)을 읽게 하였는데, 덕에 힘쓸 것, 어버이에게 효도할 것, 하늘을 공경할 것, 조상을 법삼을 것, 백성을 사랑할 것, 어진이를 등용할 것, 재물을 절약할 것,정사에 힘쓸 것, 공손하고 검소할 것, 작은 일에도 삼갈 것 등 모두 10개 조목이었다. 서용보가 과정의 뜻을 우러러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정으로 정해놓고 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근래 소대에서 《강목(綱目)》을 진강 하였는데, 격언이 있을 경우 더러 논의를 세우고 찬술한 것이다."
하였다.
○ 어제에 군도편(君道篇)이 있었는데, 상이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었다. 그 조목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1. 하늘을 공경할 것, 2. 백성을 사랑할 것, 3. 제사를 소중하게 여길 것, 4. 효성을 돈독히 할 것, 5.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할 것, 6. 어진이를 임용할 것, 7. 간언을 받아들일 것, 8. 형벌을 삼갈 것 등이었다. 하늘을 공경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하늘을 공경하려면 정성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정성을 다하면 진실하게 된다. 임금이 하늘을 법삼아 다스림을 펴고자 한다면 정성을 두고 무엇으로 하겠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임금에게 경고하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꾸짖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는데, 경고하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이다. 영묘(英廟)께서는 임어하신 50년 동안 '경천(敬天)'이라는 두 글자를 마음에 새겨두셨다. 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비가 많이 내리는 날 및 일기가 고르지 못한 때는 밤이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반듯이 앉아 계셨고,좌우에게 이르기를, '혹 나에게 잘못이 있어서 이렇게 경고가 이른 것이 아닌가?’하고는 나지막이 기도하셨으니, 이는 모두 스스로 경계한 것이었다.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에도 자주 신하들을 침실 안으로 불러들여 만나셨는데, 하늘에 대해서 언급될 때마다 부축해 일으키게 해서 경건함을 다하셨으니, 나 소자가 밤낮으로 계술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열성께서 서로 계승해오면서 백성 사랑하는 것을 국가의 법으로 삼으셨다. 백성은 지극히 어리석으면서도 신령스러우니, 구중 궁궐 속에서 지내는 임금이 인의(仁義)를 행하여 사심(私心)이 없으면 백성들이 귀의하고, 임금의 행실이 조금이라도 미진하면 백성들이 이반(離叛)하게 된다. 이것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서 막을 수 없다. 임금은 하늘의 아들이고 백성은 임금의 아들이다. 어린 아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면 부모된 자는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게 해줘야 한다. 사람이 반드시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업신여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나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왕(文王)은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아주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제왕이 백성들을 사랑하면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가장 먼저 불쌍히 여겼으므로 그 나라가 다스려진 것이다."
하고, 제사를 소중하게 여기는 조항에 이르기를,
"지성을 다해 제사지내면 그 선조가 반드시 흠향하는 법이다. 우리 영고(英考) 및 선조께서는 제향하는 때만 되면 비록 작은 제사라 할지라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계시다가 제사가 끝난 다음에야 잠자리에 드셨다. 이것은 내가 일찍이 선조에게서 우러러본 바이니, 감히 계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효성을 돈독히 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효도는 온갖 행실의 근원이다. 세상 사람이 효도를 버리고는 사람이 될수 없는 법인데, 더구나 임금이겠는가. 우리 열성조께서는 지성스러운 효성을 지니셔서 봉양할 때는 뜻을 받들고 상을 당해서는 애통해하셨다. 영묘께서는 탄신일에 보경당(寶慶堂)에서 《시경》육아장(蓼莪章)을 읽으셨는데, 보경당은 바로 영묘께서 탄생하신 곳이다. 선조(先朝)께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자전과 자궁을 섬겼고, 선원전과 경모궁의 전배는 조용히 조
하고, 절약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임금이 절검해야만 천하 사람들도 절검하게 된다. 사치는 중간 수준의 임금이 수치로 여기는 것이고 성스러운 군주가 배척하는 것이다. 우리 열성조께서 절검을 가법(家法)으로 삼아오셨기에 나 또한 이것을 체념(體念)하고 있다."
하고, 어진이를 임용하는 조항에 이르기를,
"임금이 어진이를 쓰지 않으면 소인이 나오고 어진이를 쓰면 소인이 물러가는 법이니, 국가의 치란(治亂)이 여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조항에 이르기를,
"임금의 마음이 먼저 바로잡혀야 비로소 말을 들을 수 있다. 군자의 말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린다 해서 도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소인의 말이 임금의 마음에 맞는다 해서 충성을 다한다고 여긴다면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 간언을 받아들이는 도리는 자신을 비우는 데 있고,자신을 비우는 방도는 겸양하는 데 있다. 순 임금은 온화하고 공손했기 때문에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말라.'는 경계를 받아들여 천하를 평치(平治)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 한 사람은 이를 계술하고자 한다."
하고, 형벌을 삼가는 조항에 이르기를,
"형벌은 성스러운 군주가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조심해서 오직 형벌을 삼갈지어다.'라고 한 것이다. 우리 선조께서는 형관이 심리한 문건을 아뢸 때면 반복해서 생각하고 반드시 신중히 살피셔서 4경, 5경이 되도록 잠자리에 들지 않고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죄가 가벼운 자는 용서해주는 실상이 있고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오직 가벼운 쪽으로 처벌하는 뜻이 있으셨다."
하였다.
○ 상은 우애가 독실하였다. 누이 숙선옹주(淑善翁主)가 결혼할 때 직접 여훈(女訓) 7편과 여계(女戒) 6장을 지어 하사하였다.
○ 진강에 나아갔다. 《시경》 빈지초연편(賓之初筵篇)을 진강하였다. 영사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이 시는 위 무공(衛武公)이 술을 마시고 후회하여 지은 것입니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이 이르기를,
"만약 이것이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여 지은 것이라면 실덕(失德)을 후회하는 말이 있어야 할 듯하다. 그런데 한 편 속에 스스로 반성하는 구절이 전혀 없으니, 이것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여 지은 것이 아니라 경계하는 시이다."
하니, 이시수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 인정전에 불이 났다. 하교하기를,
"보잘것없는 나 소자가 외람되게 사업을 계승하는 책임을 이어받아 항상 두려워하면서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지금 화재의 변고가 즉위 의식을 거행했던 장소에서 발생했으니, 첫째도 내가 덕이 없어서이고 둘째도 내가 덕이 없어서이다. 놀라움에 이어 송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 뿐이다. 이렇게 비상한 재변을 어찌 감히 태연스럽게 봐 넘기면서 스스로 용서하겠는가. 5일 동안 반찬 수를 줄이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풍악을 거두도록 하겠다. 논사(論思)하고 간쟁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점을 진달하여 어리석은 나를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음을 내려 경외의 신민들에게 하유하고, 이듬해 봄의 진하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 대왕대비전이 하교하기를,
"주상은 춘추가 장성한데다 성왕의 자질을 타고나서 덕성이 날로 진보되고 학문이 날로 정진되고 있으니, 모
하였다.
4년(갑자, 1804)
○ 1월. 권농 윤음을 반포하였다. 이르기를,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농사를 근본으로 삼는다. 그런데 농사의 근본은 부지런한 데 있으니, 사람의 힘을 다하지 않고서 풍년을 이루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 경작을 살펴서 부족한 것을 보조하고 백성들이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않는 것은 장리(長吏)의 부지런함이고, 남쪽 들판에서 농사를 시작하여 깊이 갈고 자주 김매는 것은 백성들의 부지런함이다. 사람의 힘을 부지런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해야만 하늘이 풍년을 내려 우리에게 풍성한 수확을 주는 것이니, 너희 감사, 유수, 수령들은 조심하여 각자 너희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라. 식량이 넉넉한 것은 오직 농사의 때를 어기지 않는 데 달려 있다."
하였다.
○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았는데, 직접 모든 정사를 총괄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2월. 대왕대비전에 '광헌(光獻)'이라는 존호를 가상(加上)하였다. 진하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3월. 평양부에 불이 나서 공해(公?)와 여염집을 거의 다 불태우고 숭녕전(崇靈殿)과 숭인전(崇仁殿)까지 번져갔다. 상이 크게 놀라 하교하기를,
"두 전각에 불이 번진 것만도 이미 매우 놀랍고 송구스러운 일인데, 불쌍하고 죄 없는 평양 백성들이 거주지를 마련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혹독한 화재를 당하였으니, 어떻게 집을 마련하고 어떻게 생활을 꾸려가겠는가. 부호군 이상황(李相璜)을 위유사로 삼아서 달려가 위유하게 하고, 이어 향과 축문을 받들고 두 전각 및 향교에서 위안제를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강릉(江陵)촹삼척(三陟)촹양양(襄陽)의 민가에 불이 나서 가옥 수백 채를 불태웠으며 사망자가 10명이 넘었다. 안타까워하는 뜻의 교서를 내리고, 교리 홍석주(洪奭周)를 위유어사로 삼아 보내었다. 얼마 있지 않아서 통천(通川)과 고성(高城)에 불이 났다는 보고가 또 이르니, 어사에게 하유하여 일체 위유하게 하였다. 이어 명하기를,
"불탄 여러 고을 민호의 환자곡과 신역을 탕감하고, 매 가구당 1곡의 쌀을 지급하도록 하라. 불탄 창곡(倉穀)은 모두 탕감하고, 백성에게서 거두는 삼전(蔘錢)도 아울러 정지하라. 불탄 어선(漁船)과 염분(鹽盆)에 대해서는 영원히 조세를 감면하고,진상하는 물선(物膳)은 특별히 정봉하도록 하라."
하였다.
○ 관동 위유어사 홍석주가 아뢰기를,
"강릉 고검(高儉)의 처 권씨(權氏)와 원주(原州) 박형명(朴亨明)의 처 이씨(李氏)는 시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함께 죽었습니다. 정려(旌閭)를 시행하소서."
하니, 따랐다.
○ 충렬공(忠烈公) 하위지(河緯地)의 사판(祠版)에 부조지전(不?之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8월.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냈다.
○ 9월. 대사간 박윤수(朴崙壽)가 상소하기를,
"신유년(순조 1, 1801) 여름 권유(權裕)의 상소에 덧붙여 진달한‘도인(都人)’이하 등의 구절에는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는 비유가 있기까지 하였는데, 말이 매우 부도(不道)하고 괴상한 의도를 감춘 것이었습니다.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캐내소서."
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기를,
"그대의 말은 일반적인 논의이고, 내가 통절히 미워하는 것은 선왕(先王)에게 배치된 죄이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반찬수를 줄이고 바른말을 구하였다.
○ 11월. 고 찬선 김원행(金元行), 참판 김양행(金亮行), 장령 민익수(閔翼洙), 판서 윤봉구(尹鳳九)의 시호를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 우의정 이경일(李敬一)이 아뢰기를,
"증 이조 참의 박재원(朴在源)이 무술년(정조 2, 1778)에 올린 한 통의 상소는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켰던 옛날의 충신과 의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정경(正卿)을 증직하고 시호를 하사하소서."
하니, 따랐다.
○ 12월. 인정전(仁政殿)이 완성되었다. 뭇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중외에 교지를 반포하였다.
5년(을축, 1805)
○ 1월. 인정전에 나아가 대왕대비전과 혜경궁에 직접 치사(致詞),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리고, 이어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이는 대왕대비전의 보령(寶齡)이 회갑을 맞고 혜경궁의 보령이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대왕대비 김씨(金氏)가 승하하였다.
○ 2월. 옥당이 연명으로 상차하여 공제(公除) 후에 강연을 열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리고 따랐다.
○ 3월. 상의 두질(痘疾)이 회복되어 장차 하례 의식을 행하려 하였는데, 예조 당상이 상소하여 인산(因山) 이후로 물려 행하기를 청하였다. 대신과 유신에게 의논한 후에 하교하기를,
"이미 경상(經常)의 법을 지키는 것인데 어찌 다른 논의를 허용하겠는가. 여러 논의대로 물려서 행하라. 그러나 우상의 논의 가운데 '위에 고하는 것은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말도 옳다. 고유문을 이미 계하하였으니 그대로 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윤6월에 이르러서 비로소 하례를 행하고 교지를 반포하였다.
○ 지난해 겨울에 대왕대비전의 존호를 '융인(隆仁)'으로 의논해 정하였으나 성대한 의식을 미처 거행하지 못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빈전(殯殿)에 옥책과 금보를 올리고, 이어 교지를 반포하였다.
○ 7월. 소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敬)은 마음을 한곳에 두어 다른 데로 가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시독관 강세륜(姜世綸)이 아뢰기를,
"학문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전 가운데 치도(治道)를 말한 것이 많은데, 어디에서부터 착수해야 일용(日用)과 행사(行事)에 이로움이 있게 되는가?"
하니, 강세륜이 아뢰기를,
"뜻을 세우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자와 소인의 나뉨은 실로 분별하기 어렵다. 충성스러운 말이 귀에 거슬린다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귀에 거슬리는 말이 충성스러운 말임을 알 수 있다. 소인은 아첨하는 태도를 지으므로 쉽게 분별할 수 있을 듯하지만, 실제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분간하는 데 어두워짐을 면치 못한다. 어떻게 하면 분명히 분별할 수 있겠는가?"
"충직과 아첨을 가지고 분별해야 합니다."
하였다.
○ 소대하였다. 《강목(綱目)》위기(魏紀)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 나라에서 초치한 자 가운데 고윤(高允)과 같은 무리는 실로 훌륭하지만, 이 밖의 사람들도 과연 으뜸이 될 만큼 훌륭한 인물이었는가?"
하니, 옥당 강준흠(姜浚欽)이 아뢰기를,
"모두 이름이 알려진 선비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을 불러서 이르게는 했지만 마음을 다해 임용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고윤과 같이 훌륭한 사람을 태자(太子)의 요속(僚屬)으로밖에 임명하지 않아 믿고 쓰는 것이 최호(崔浩)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사람들도 함께 중서 박사(中書博士)에 임명하는 데 불과하고 다시 진용하지 않았으니, 불러들였다고 한들 무슨 보탬이 되었겠는가. 현인은 스스로 이르는 법이 없다. 비록 좌우의 가까운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훌륭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재능을 다 발휘할 수 없다. 어떻게 하면 인재를 모두 알고 모두 써서 초야에 버려진 인재가 없겠는가?"
하니, 강준흠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까지 이르니 흠앙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 소대하였다. 시독관 김상휴(金相休)가 아뢰기를,
"임금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도는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는 데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한 무제(漢武帝)가 경술(經術)을 좋아하자 동중서(董仲舒)의 무리가 나왔고, 문학을 좋아하자 매고(枚皐)촹사마상여(司馬相如)의 무리가 나왔고, 해학을 좋아하자 동방삭(東方朔)의 무리가 나왔고, 신선을 좋아하자 오리장군(五利將軍)촹문성장군(文成將軍)의 무리가 나왔다. 이것을 보면 과연 임금의 호오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였다.
○ 9월. 규장각이 정종이 어정(御定)한 《대학유의(大學類義)》를 인쇄해서 올렸다.
○ 10월.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과거 제도는 바로 치교(治敎) 중의 한 가지 일이다. 과장(科場)이 엄하지 않은 것은 유사(有司)가 적임자가 아닌 데 원인이 있고, 선비들의 습성이 바르지 못한 것도 유사가 적임자가 아닌데 원인이 있다. 그러니 어찌 신중히 하지 않겠는가."
하고, 이어 시관(試官)을 잘 가려서 의망하도록 해조에 신칙하였다.
6년(병인, 1806)
○ 1월. 비록 날씨가 따뜻하지 않더라도 이튿날부터는 상참과 경연에 대해 여쭙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직접 제사지낼 때 축문(祝文)의 어휘(御諱)를 읽는 것에 대해서 선조(先朝)께서 누차 하교하셨다. 지금부터는 축문을 읽을 때에 어휘를 읽으라는 뜻으로 대축(大祝)에게 신칙하라. 그리고 술을 따를 때에는 울창주(鬱?酒)를 반드시 가득 채우도록 하라."
하였다.
○ 주강에 나아갔다. 《논어》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니, 검토관 김상휴가 아뢰기를,
"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습니다."
하였다.
○ 3월. 소대하였다. 《강목》을 진강하였다. '형혹성(熒惑星)이 남두(南斗)를 침범하자 동성(東城)을 옮겨 쌓아서 형혹의 기운을 누르려 했다.'는 부분에 이르러서 상이 이르기를,"형혹성이 남두를 침범했는데 덕을 닦아서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는 생각지 않고 성을 쌓아서 기운을 누르려 한 것은 옳지 않다.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한 생각이 선하면 경성(景星)과 경운(卿雲)이 이르고 한 생각이 악하면 질풍(疾風)과 뇌우(雷雨)가 몰아친다.'고 하였다. 대개 두려워하며 자신을 반성하는 것이 재앙을 그치게 하는 요지인데, 다만 이 마음은 오래되면 소홀해지기 쉬운 것이다."
하였다.
○ 4월. 소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임금은 예(禮)로써 신하를 부려야 한다. 군신 사이에는 엄경(嚴敬)이 예가 될 뿐만 아니라 화락(和樂)한 것도 예가 된다. 대개 엄경에만 주안점을 두면 정과 뜻이 통하지 않게 되고, 화락에만 주안점을 두면 설만한 데에 가깝게 된다. 엄경과 화락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면서 함께 행해져야만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 김달순(金達淳)을 사사(賜死)하도록 명하였다. 김달순이 재상 직책에 임명된 후에 청하기를,
"박치원(朴致遠)촹윤재겸(尹在謙)을 포상함으로써 간언을 받아들였던 경모궁의 덕을 밝혀서 드러내소서."
하였다. 상이 두 사람이 올린 글을 가져다 보고 하교하기를,
"《정원일기(政院日記)》를 세초(洗草)하는 데 넣도록 선조(先朝)께서 우러러 청하고 영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것은, 대개 차마 볼 수 없고 차마 제기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문적(文蹟)을 세간에 남겨놓지 않고자 함이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손자는 본래 한 몸이다. 영묘와 선조께서 차마 하지 못했던 일에 대하여 만약 포증을 시행한다면 죄를 짓는 듯할 뿐만 아니라 두 성조(聖朝)의 뜻을 저버리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하였다. 형조 참판 조득영(趙得永)이 상소하여 징토하고 양사가 합계하여 법률로 다스리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송 나라 조정은 너그럽고 인자하여 대신(大臣)을 죽이지 않았고, 우리 조정에서도 죄가 의리에 관계된다고 해서 모조리 사형시키지는 않았다."
하였다. 그러다가 빈청이 누차 아뢰자 비로소 윤허하였다.
○ 좌의정 이시수(李時秀)가 아뢰기를,
"우리 조정은 오로지 사대부를 근간으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비록 악역(惡逆)의 죄를 범한 자라 하더라도 그 지속(支屬)과 부녀자는 법으로 연좌시킬 뿐이지 한 번도 욕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근래에 연좌된 부녀자가 유배지로 출발하기 전에 해부 혹은 포도청에 가두어 두는데, 이는 법전에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는 연좌된 자가 자기 집에서 유배지로 떠나게 하는 것을 길이 법식으로 삼으소서."
하니, 따랐다.
○ 5월. 소대하였다. 《국조보감》을 진강하였다. 세종조에 형옥(刑獄)의 일을 논한 부분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형옥은 실정을 알아내기는 어렵고 중도를 잃기는 쉽다. 형옥을 맡은 관원이 법에만 구애되어 그 억울함을 알더라도 감히 법을 굽혀 용서하자는 논의를 내세우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문안(文案)을 통해서 그 억울한 정상을 살펴낼 수 있겠는가. 고어에 이르기를,‘고요(皐陶)는 죽이자고 하고 순 임금은 용서하자고 하였다.’하였으니, 이는 대개 고요가 죽이는 일을 주관하였음을 이른 것이다. 그러나 장석지(張釋之)가 정위(廷尉)가 되어
하니, 각신 홍석주(洪奭周)가 아뢰기를,
"한 번 녹계(錄啓)에 오르게 되면 철안이라고 합니다. 신이 일찍이 본 바에 의하면, 선조께서는 한여름에 반드시 심리를 행하시어 이를 연례적인 일로 삼으셨습니다. 경외의 문안을 가져다가 반복해서 철저히 궁리하시느라고 하루를 다 보내고 또 밤까지 계속하시면서도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셨으며, 비록 이미 자백을 받고 이미 결안(結案)하여 뒤집을 수 없는 안건일지라도 의심이 없는 데서 의심을 일으키고 반드시 죽을 사람을 살려내셨습니다. 그리하여 한 번 어람(御覽)을 거치면 억울함이 반드시 밝혀졌으니, 실로 그 덕은 하늘과 땅처럼 위대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살인 옥사뿐만 아니라, 혹 청단(聽斷)이 명확하지 못하여 감옥에 체류된 부류가 있다면 어떻게 화기(和氣)를 손상시키는 일을 부르지 않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우리 세종조의 성덕(聖德)과 치공(治功)은 삼대(三代) 이후로 처음 있었다고 할 만한데도 일을 과단(果斷)하는 것이 옛사람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실로 성심(聖心)의 겸양이라고 하겠지만, 후세 임금의 과단은 반드시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더욱 두려워하며 경계하지 않겠는가. 후세 사람은 과단이 실로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니, 미치지 못하는 점에 더욱 노력하여 미칠 수 있기를 바라야 할 것이다. 만약 옛사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보아 다시 노력하지 않는다면 이 어찌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라고 하는 뜻이겠는가."
하니, 홍석주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실로 지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고어에 이르기를, '임금은 천 년에 한 번 훌륭한 재상을 만나고 신하는 천 년에 한 번 훌륭한 임금을 만난다. '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만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운 일이어서 광무제(光武帝)와 등우(鄧禹)의 만남과 같은 경우도 많이 보지 못하였다. 신하는 있어도 임금이 없는 경우는 실로 많지만, 세상에서 간혹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다. '고 하는데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홍석주가 아뢰기를,
"임금은 있어도 신하가 없다는 탄식이 옛날에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 집밖에 되지 않는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는 법인데 어찌 한 사람을 얻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또한 찾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좋아하기를 독실히 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로(甘露)가 내리고 백작(白鵲)이 나타나고 또 그 이전에도 상서가 있었지만 세종조는 겸양하며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간혹 재앙이 변하여 상서가 되기도 하고 또 상서가 변하여 재앙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상번(上
番)이 진달한 '조정이 청평(淸平)하고 백성이 편안한 것이 상서(上瑞)이다. '는 말은 과연 좋다. 순 임금의 세상에도 별과 구름의 상서가 있었는데, 신하들이 화답하며 노래하자 순 임금도 받아들여 상서로 여겼던가?"
하니, 홍석주가 아뢰기를,
"신하들이 서로 화답하였다고만 했지 순 임금에게 진하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용도(用度)를 절제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더 거두고 미리 거두는 폐단은 옛날에도 이와 같았는데 오늘날이
하니, 옥당 이노익(李魯益)이 아뢰기를,
"남용하는 폐단은 실로 사치에서 비롯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사치만이 아니다. 급하지 않은 비용과 쓸데없는 공역(工役)은 애초에 꼭 사치에 뜻을 두지 않았더라도 자연히 용도를 절제함이 없는 데로 귀결되는 예가 많다. 고어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면 사방이 한 자 높이의 상투이고, 궁중이 긴 소매[袖]를 좋아하면 사방이 한 필짜리 소매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위에서 좋아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에서는 반드시 더욱더 좋아하게 되는 법이다. '하였다. 사치와 검약의 풍속은 대부분 어떻게 인도하고 이끄느냐 하는 데 달려 있다. 용도를 절제하지 않는 폐단이 없다고는 실로 말하지 못하겠으나, 자신에게 돌이켜서 사치를 경계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도 사치 풍조가 이렇게 날로 심해지니, 알지 못하는 가운데 도리어 더욱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였다.
○ 소대하였다. 《국조보감》을 진강하였다. 문종조(文宗朝)에 사헌부 신하가 상소하여 언로를 열 것을 청한 부분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위의 은택이 아래로 흐르고 아랫사람의 심정이 위로 전달되는 것은 이른바 '천지가 교태(交泰)하는 때 '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교태한 때는 항상 적고 비색(否塞)한 때는 항상 많았다. 임금으로서 마음을 비우고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모를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책을 놓고 일일이 헤아려보면 중간 수준 이상의 군주라고 하더라도 어렵지 않게 여긴 자가 드물었으니, 어떻게 하면 마음을 비우고 흔쾌하게 받아들이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역대의 임금이 모두 잘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언로가 통하게 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언로를 열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신하로 하여금 감히 말하지 못하게도 하였으니, 이런 사례를 하나하나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니, 홍석주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까지 미친 것은 사직과 백성의 복입니다. 충성스러운 말뿐만 아니라 경솔하고 어리석어서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라도 곡진히 용서하고 다 받아들여야만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작위(爵位)는 국가의 공기(公器)이다. 임금된 자는 천하의 호오(好惡)를 공변되게 하여 천하와 함께하고, 한 나라의 호오를 공변되게 하여 한 나라와 함께해야 한다."
하였다.
○ 소대하였다. 《국조보감》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이 이르기를, '어진이를 찾기 위해서 수고하고 사람을 임용함으로 해서 편안해진다. '하였다. 조종조에는 어진이를 찾기 위한 정성이 독실했기 때문에 인재가 많았었다. 지금은 선발한 사람 중에 두세 명의 유현(儒賢)이 있기는 하지만 성의가 부족한 탓으로 불러들이지 못하였고, 감사가 천거하고 수령이 천거한 부류도 거두어 쓰는 실상을 보지 못하였다. 어떻게 하면 인재가 무리지어 나오게 할 수 있겠는가? 이미 거주(擧主)가 있으면 상벌(賞罰)의 법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 글에서는 어진이를 얻어서 쓴다면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지내도 된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러나 현재(賢才)를 얻었더라도 반드시 그 말을 들어 써서 실행하고 천하의 이목(耳目)으로 자신의 총명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나라를 다스려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베개를 높이 베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현재가 조정에 늘어서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그러한 공을 거두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은 청화직(淸華職)이 모두 명문 대가(名門大家)로 돌아가고 소원한
하고, 또 하교하기를,
"사람을 쓰는 도리는, 다스림을 보필하는 데 장점이 있는 사람도 있고 무사(武事)에 뛰어난 사람도 있고 전곡(錢穀)에 능숙한 사람이 있으니, 이들에게 각각 능한 부분의 일을 맡겨야만 그 직임을 다할 수 있는 법이다. 만약 장수로 삼아야 할 사람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재상으로 삼아야 할 사람을 장수로 임명한다면, 쓰는 점이 그의 소장(所長)이 아니어서 모든 일이 좀스럽게 될 것이다. 이와 같다면 비록 어진이를 찾기 위해서 수고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임용함으로 해서 편안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 김한록(金漢祿)에게 역률(逆律)을 추급하여 시행하였다. 도승지 김이양(金履陽)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영묘(英廟) 신사년(1761) 이후로 김한록이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할 작정으로 당(唐) 나라 중종(中宗)의 일에 대해 논한 호인(胡寅)의 말을 가지고 한두 명 지구(知舊)에게 물었는데, 마침내 주자(朱子)가 장경부(張敬夫)에게 답한 정론(正論)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식자들은 이미 그의 그러한 마음을 주벌하고 진심으로 거절했던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빨리 천토(天討)를 행하소서."
하였다. 상이 대신과 신하들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지금 막 도승지의 상소를 보고서 놀랍고 애달프고 슬프고 분통스러운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김한록은 바로 나에게 있어서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노적(?籍)을 추급하여 시행하지 못하도록 한 두 조정의 수교(受敎)가 이미 있으니, 김상로(金尙魯)의 예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 6월. 영의정 이병모(李秉模)가 아뢰기를,
"고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은 영묘조의 명신으로서 벼슬아치와 사림(士林)에 큰 명망을 떨쳤습니다. 김한록이 흉언(凶言)을 떠벌리던 때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주장을 내세우고 엄한 말로 물리쳐서 흉당들의 기를 꺾었으니, 이것이 어찌 한때 사직을 호위한 공일뿐이겠습니까. 특별히 이조 판서를 증직하고 이어 시호를 하사하는 은전을 베푸소서. 수찬 김이교(金履喬)는 그 할애비의 손자로서 오랫동안 배척당하였다가 이제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적체된 인사를 발탁하고 의리를 붙들어 세우는 성조(聖朝)의 정사에 있어서 특별히 가자를 명한다면 세도(世道)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따랐다.
○ 김귀주(金龜柱)에게 역률(逆律)을 추급하여 시행하였다. 김귀주가 여덟 글자의 흉언을 내세웠다는 이유로 대신 및 삼사가 추율(追律)을 청하니, 따랐다. 하교하기를,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떻게 하면 하늘에 계신 효안전(孝安殿)의 영령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경들의 말이 이와 같고 대간의 말이 이와 같으니, 이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효안전을 바라보면 배나 더 큰 슬픔으로 목이 메인다. 고유(告由)가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대신이나 예조 당상을 보내어 삭제(朔祭) 때 고유를 겸하도록 하라."
하였다.
○ 영의정 이병모가 아뢰기를,
"백성을 보호하는 요지는 적임자를 얻어 관리로 삼는 데 있고, 적임자를 관리로 얻는 요지는 추천하는 방도가 제대로 되는 데 있고, 추천하는 방도가 제대로 되는 것은 잘못 추천한 죄를 다시 엄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대로 수령이 만약 장오죄를 범하면 거주(擧主)를 아울러 연좌시키고, 자주 범하는 자는 한 등급을 강등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옛 전례를 밝히는 것이니, 경의 말대로 하라."
하였다.
○ 8월. 과거(科擧)의 폐단에 대해 신칙하였다. 하교하기를,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는 모두가 공경 대부 집안의 자제이고, 또 모두 훗날 공경이 될 사람들이다. 선비로 있을 때에는 각각 몸가짐을 삼가고 법을 알아서 사방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것인데, 시끄럽게 다투고 분잡스러운 폐단이 날로 조정에 들리고 있으니 이 어찌 선비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옛날 선조(先朝)의 초년(初年)에 과거 규정을 거듭 엄하게 하였는데, 칙령이 한 번 내려지자 선비들의 풍조가 크게 변하였다 한다.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는 단정한 걸음걸이로 시끄럽게 떠들지 않았고, 문필(文筆)이 없는 자는 감히 시권을 바칠 마음을 먹지 못하였으며, 시관(試官)이 된 자도 감히 요로에 있는 자에게 청탁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다. 나는 이 말을 어릴 때부터 늘 들어왔었다. 돌아보건대, 내가 부덕하여 비록 군사(君師)의 책임을 다하지는 못하였지만, 한결같은 마음으로 계술하려는 정성이야 어찌 다름이 있겠는가. 감시(監試)가 눈앞에 닥쳤으니, 공경 대부로부터 각자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어 함부로 법을 범하거나 기강을 저촉하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 9월. 뇌변이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일음 일양(一陰一陽)이 순서를 잃는 것도 오히려 두려워하며 수성(修省)해야 하는 법이니, 9, 10월이라고 해서 감히 차이를 둘 수는 없다."
하고, 3일 동안 반찬 수를 줄이도록 명하였으며, 중외의 신하들로 하여금 임금의 잘못과 현재의 정치에 대해 숨김없이 다 말하게 하였다.
○ 별강(別講)하였다.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위징(魏徵)이 소를 올려 간언하고 직접 면대하여 간함에 있어 시비(是非)가 칼로 자른 듯이 곧았으니, 임금 섬기는 도리를 다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태종(太宗)이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도량이 있었기 때문에 위징도 숨김없이 다 말하였던 것이다. 대개 간언을 올리는 것은 신하의 책임이고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은 임금의 도리이다. 어렵기로 말하자면 임금이 어렵겠는가, 신하가 어렵겠는가?"
하니, 승지 이문회(李文會)가 아뢰기를,
"임금과 신하가 모두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태종은 영명(英明)한 임금이다.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 점은 한 문제(漢文帝)보다 못하지 않지만, 학문에 뛰어남이 없어서 기질(氣質)에 따라 행동하였다. 다만 그 다스림이 성왕(聖王)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있어서 당(唐) 나라 왕가로만 그쳤으니, 이 점이 애석하다."
하니, 이문희가 아뢰기를,
"실로 본받을 대상이 아닙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옛사람을 논할 때는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야 한다. 본원(本源)은 비록 부족함이 있으나 정치는 거울삼을 만하다. 그러나 요 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순 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송(宋) 나라 신종(神宗)이 일찍이 '어찌 감히 요순을 당하겠는가. '라고 하자, 정자(程子)의 얼굴 표정이 근심스러워졌었다. 대개 임금이 정치를 할 때에는 스스로 요순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 학문의 공부는 반드시 아래로 인사(人事)에서 배워 위로 천리(天理)에 통달해야 하며 단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입지(立志)는 반드시 요순보다 한 등급이라도 낮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 11월. 별강하였다.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자(仁者)는 보고서 인(仁)이라고 하고 지자(知者)는 보고서 지(知)라고 한다 하였는데, 어찌하여 인자는 인이라고 하고 지자는 지라고 하는 것인가?"
하니, 시독관 권식(權?)이 아뢰기를,
"타고난 품성에 치우치거나 온전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모두가 인촹의촹예촹지촹신 다섯 가지 성품을 받는데, 단지 물욕(物欲)에 가려져서 본연의 온전함을 보전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타고날 때에 어찌 지를 부여받고 인을 부여받는 차이가 있겠는가."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태극(太極)이 동(動)하여 양(陽)을 생성하되 동이 극에 달하면 정(靜)하게 되고, 정하여 음(陰)을 생성하되 정이 극에 달하면 다시 동하게 된다. 한 번 동하고 한 번 정하는 것이 서로 그 근간이 되니, 동하여 양을 생성하였다가 동이 극에 달하면 다시 음을 생성하는 것인가?"하니, 권식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수(水)촹화(火)촹목(木)촹금(金)촹토(土)를 생성하는데, 《서경(書經)》에서 말한 '수촹화촹금촹목촹토촹곡(穀)을 무엇보다도 잘 다스린다. '는 뜻과 같은가, 같지 않은가?"
하니, 권식이 아뢰기를,
"여기의 오행(五行)은 생성되는 순서를 말한 것이고 《서경》의 육부(六府)는 쓰임이 됨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늘의 관점에서 말하면 명(命)이 되고 사람의 관점에서 말하면 성(性)이 된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하늘에 있으면 명이라고 하고 사람에게 있으면 성이라고 하는 것인가?"
하니, 검토관 김계하(金啓河)가 아뢰기를,
"하늘에서 부여한 것을 가지고 말하면 명이 되고 물(物)이 처음 부여받은 것을 가지고 말하면 성이 됩니다."
하였다.
○ 별강하였다. 《성학집요》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품은 서로 가까운데 습성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모두 그다지 다르지 않다가 선을 익히면 선하게 되고 악을 익히면 악하게 되는 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에 대한 주(註)에서 사씨(謝氏)가 말하기를, '극기는 반드시 성품이 편벽되어 이기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이겨나가야 한다. '고 하였다. '반드시 부터[須從] '라는 것은 스스로 성품의 편벽된 부분을 아는 것을 가리켜 말함이고, '이겨나간다[克將] '는 것은 힘써 행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이다. 주자가 이르기를, '자아의 사욕이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성질의 편벽됨이고, 둘째는 이목구비(耳目口鼻)의 욕구이고, 셋째는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시기하고 내가 남을 능가하려는 사사로움이다. '하였다. 성질의 편벽됨은 기질의 성품을 말한 것이고, 이목구비의 욕구는 좋은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고 사령(使令)이 앞에 충분히 있는 따위이며, 남이 나보다 나은 것을 시기하고 내가 남을 능가하려는 사사로움은 자기보다 나은 자를 미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겨나가는 공부는 과연 어떤 것인가?"
하니, 각신 박종훈(朴宗薰)이 아뢰기를,
"세 가지 중에도 각각 치우친 곳이 있게 마련인데, 치우치기 때문에 이기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기기 어려운 것도 이긴다면 쉬운 것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 12월. 별강하였다. 《성학집요》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은(殷) 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너의 마음을 열어서 짐의 마음을 계발(啓發)하여라. '하였다. 너의 마음이란 바로 부열이 스스로 그 마음을 여는 것이고, 짐의 마음이란 부열이 고종의 마음에 부어 넣기를 하라는 것이다. 임금의 덕을 성취하는 것은 내가 힘써야 할 바이므로 신하들에게만 책임지울 필요가 없지만, 신하들로서는 계옥(啓沃)의 책임이 있으니, 반드시 계옥이라는 두 글자를 범범히 보지 말도록 하라."
하니, 옥당과 각신이 일제히 아뢰기를,
"도움을 구하는 성의와 면려의 책임을 맡기는 뜻이 절실하고도 정중하니, 실로 깊이 흠앙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하니, 박종훈이 아뢰기를,
"임금이 마음을 툭 터놓고 받아들인다면 반드시 사람마다 부열이 되어야만 계옥할 수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77권 순조조 2
7년(정묘, 1807)
○ 1월. 홍낙임(洪樂任)을 복관(復官)하도록 명하였다.
○ 2월. 죽은 판돈녕부사 박준원(朴準源)에게 특별히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날로 시호를 의논하였으며, 대신의 예에 따라 예장(禮葬)하였다. 하교하기를,
"경술년(정조 14, 1790)부터 지금까지 할아버지로서 손자를 보호하고 보도(輔導)하는 스승의 역할까지 겸하였다. 경신년(순조 즉위년, 1800) 이후의 위대한 공적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오늘날이 있고 나라가 태평을 누리는 것이 과연 누구의 덕인가."
하였다.
○ 수원 유수 조진관(趙鎭寬)이 부모의 나이가 매우 많다면서 상소하여 사정을 진달하고, 해직되어 돌아가서 부모를 부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려 허락하면서 이르기를,
"직임이 비록 가볍지 않지만 사정도 돌보아주어야 하겠다."
하였다.
○ 경기촹호서촹해서에 해일(海溢)이 있었다. 특별히 선전관을 보내어 재해입은 민호(民戶)를 위유하였다.
○ 8월. 승지를 보내어 죽은 우찬성 송환기(宋煥箕)에게 사제(賜祭)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정(先正)의 후손이자 소자의 사부(師傅)로서 학문과 덕망을 조야(朝野)가 존경하였으며, 예우하는 측면에서는 일의 체모가 더욱 중하였다."
하였다.
○ 화성(華城) 연로(輦路)의 지지대(遲遲臺)에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였는데, 승지 신순(申絢)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김종수(金鍾秀)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묘정(廟庭)의 배향(配享)에서 내치도록 명하였다. 삼사 및 빈청이, 김종수가 남몰래 김귀주(金龜柱)촹김한록(金漢祿)의 흉언(凶言)을 전습하여 어지럽히고 속이는 죄를 지었다고 하면서 일제히 성토하고 합사하여 누차 청하였으므로 따른 것이었다.
○ 9월.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 충숙공(忠肅公) 이세화(李世華), 문열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에게 부조지전(不?之典)을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상이 병조 판서 한만유(韓晩裕)에게 이르기를,
"곤수(?帥)는 국가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바이고, 영장(營將)은 토포사(討捕使)이다. 만약 평민을 도적으로 잘못 안다면 백성들에게 상당한 해를 끼칠 것이다. 반드시 이러한 뜻을 알아서 자리가 날 때마다 잘 가려 뽑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내가 듣건대, '하늘의 노여움을 경건히 받아들여 감히 즐겁게 놀지 말고, 하늘의 이변을 경건히 받아들여 감히 멋대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 하였다. 근래에 혜성이 재변을 고하니, 나 소자가 만약 힘껏 분발하여 하늘의 마음에 보답하였다면 인애(仁愛)한 하늘이 반드시 이러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못나서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고 인순과 고식만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어젯밤 번쩍거리는 번개와 우르르 하는 천둥 소리가 있었던 것인데, 그 날은 입동(立冬)의 날이고 그달은 수장(收藏)의 달이었다. 스스로 그 원인을 돌아보면 죄가 나의 몸에 먼저 있다. 나라일이 엉망이 되고 기강이 해이해진 것이 나의 죄이고, 백성들이 곤궁하고 풍속이 무너진 것이 나의 죄이니, 하늘이 어떻게 위엄을 보이고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3일 동안 반찬수를 줄이겠다. 대관(大官)으로부터 초야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숨김없이 다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 상이 영화당(暎花堂)에 나아갔다. 각신촹승지촹사관을 불러 보고, 활을 쏘아 다섯 발을 명중시켰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짝을 맞추어 쏘게 하고, 표피(豹皮)촹궁시(弓矢)촹동개(筒箇)로 시상한 다음 선찬(宣饌)하였다. 이날 모시고 활을 쏘았던 신하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하자 상이 직접 받았다.
○ 11월. 상이 밤에 《논어》욕기장(浴沂章)을 읽었다. 상직(上直)한 정원과 규장각의 신하들에게 각각 자신의 뜻을 말해보도록 명하였다. 신하들이 대답하고 나자 상이 친필을 정원에 내렸는데, 이르기를,
"현신(賢臣)과 석보(碩輔)가 나라의 동량(棟樑)이 되고 맹장(猛將)과 지사(智士)가 나라의 조아(爪牙)가 되어 안으로는 군신(君臣)의 잘못이 없고 밖으로는 백성들의 질고가 없으며 마을에서는 배불리 먹는 소리가 들리고 변방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는 것, 이것이 큰 바람이다."
하였다.
8년(무진, 1808)
○ 3월. 내탕고에 면포(綿布)가 고갈되자, 병조의 면포 50동(同)을 들여놓을 것을 명하였다. 병조 판서 김이익(金履翼)이 상소하기를,
"국가의 경비는 백성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약할 생각을 하지 않으면 해가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 이 때문에 한 문제(漢文帝)가 백금(百金)의 재물을 아까워하여 천고의 어진 임금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지출하는 비용이 타당한지에 대해서는 감히 알지 못하겠으나, 절약해 쓰고 백성에게 보태어주는 정사에는 어긋남이 있는 듯합니다. 바라건대 성명(成命)을 취소하소서."
하니, 상이 면포를 즉시 돌려보내도록 명하였다. 비답을 내리기를,
"경이 법을 지키고 직책을 수행하여 이렇게 소를 올렸으니, 조정에 사람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궐내의 경비가 비록 구차스럽지만 어찌 한 필이라도 남겨놓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이에 앞서 사서(邪書)를 금지시키는 일로 인하여 연경에서 서적을 사오는 것까지 금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사(經史) 및 순유(醇儒)의 문집은 허락하도록 명하였다.
○ 대신(臺臣)이 경계하는 말을 올린 것을 인하여 하교하기를,
"입지(立志)는 학문을 하는 긍경(肯?)이고, 거경(居敬)은 이치를 밝히는 추기(樞機)이며, 명리(明理)는 내 마음의 거울이고, 극기(克己)는 공성(孔聖)의 심법(心法)이며, 기강은 한 나라의 안위(安危)가 매인 것이고, 절용(節用)은 한 몸의 사치와 검소가 달려 있는 것이다. 뜻을 세운 후에야 학문이 진보되고 덕이 닦여져서 경(敬)을 생활화하는 효과를 바랄 수 있고, 경을 생활화한 후에야 마음이 한군데로 집중되고 뜻이 흔들리지 않아서 자신의 사욕을 이기는 공부를 기약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사욕을 이긴 다음에야 천하 사람이 모두 그 인을 함께하여 만물의 사사로움이 감히 공변됨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기강이 진작되고 진작되지 않는 것과 용도를 절약하고 절약하지 않는 것은 단지 조처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 이것이 이른바 만물의
하였다.
○ 5월. 우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고 부제학 이병태(李秉泰)의 맑고 곧은 절개는 옛 염리(廉吏)의 풍채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시호를 내리고 배식(配食)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윤5월. 대사헌 이직보(李直輔)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지금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알려진 선비를 먼저 음직으로 불러서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강독하는 자리에서 주선하게 함으로써 그의 역량을 다하게 한다면 반드시 성학(聖學)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말대로 하자면 널리 선발해야 할 것이니, 경이 먼저 즉시 올라와서 우리 조정을 빛내도록 하라. 그러면 선발된 선비들도 장차 서로 이끌고 벼슬길에 나올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이다."
하였다.
○ 7월. 옥당 임백희(任百禧)촹홍의영(洪儀泳)이 고사(故事)를 써 올리자 친필로 비답을 써 내리기를,
"상번(上番)은 송주(宋主)의 관대함과 엄격함이 적절하였다는 비유를 진달하였고, 하번(下番)은 역대(歷代)에 걸쳐 한 번 다스려지고 한 번 어지러웠다는 말을 인용하였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한 마음은 만 가지 교화의 근원이다. ' 하였는데, 관대함이 지나치면 백성을 사랑하는 듯하지만 도리어 해가 있게 되고, 엄격함이 지나치면 백성을 어지럽히는 듯하여 또한 해가 있다. 오직 관대하게 해서 인자함을 보이고 엄격하게 해서 위엄을 보여야만 한 번 다스려지는 단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명리(明理)가 아니면 인자함과 위엄이 지나치게 어긋나는 탄식이 있게 되고, 학문이 아니면 나라가 위태롭고 어지러워질 수 있다. 내가 지금 두 유신이 올린 말을 참작하고 체념해서 더욱 학문에 힘쓰려 하니, 그대들도 성심껏 인도하는 책임을 다할 것을 생각하라."
하였다.
○ 9월. 황해 감사 이희갑(李羲甲)이 아뢰기를,
"곡산(谷山) 가람산(?嵐山)의 태조대왕 치마기(馳馬基)와 수라천(水刺泉)에 정종(正宗)의 어필(御筆) 비석이 있으니, 비각을 세워 보호하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 10월. 평안감사 서영보(徐榮輔)를 불러 보았다. 상이 이르기를,
"성심을 다해 대양(對揚)하고, 폐단이 있으면 반드시 없앨 방도를 생각하라. 강계(江界)의 인삼(人蔘)은 여러 해 동안 폐단이 누적되어 왔으니, 백성들의 실정을 널리 알아내어서 좋은 쪽으로 바로잡도록 하라. 또 전최(殿最)가 엄하고 엄하지 못한 것은 감사의 책임이다."
하니, 서영보가 아뢰기를,
"본도의 강역(疆域)은 한 줄기 물을 사이에 두고 피지(彼地)와 인접해 있습니다. 풍속이 예로부터 무예를 숭상해왔으니 만약 다시 권장한다면 긴급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이를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관서는 과연 관방(關防)의 측면에서 중요한 지역이다. 문사(文事)를 폐할 수는 없지만 무비(武備)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 호조 판서 이만수(李晩秀)가, 중국에서 문단(紋緞)을 사오지 못하도록 한 금령을 다시 밝히기를 청하였다. 하교하기를,
"영묘조와 선조 때 정한 법식은 칼로 자른 것 이상으로 엄중하였다. 근래에 기강이 땅에 떨어졌다고는 하지
하였다.
○ 소대하였다. 《국조보감》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실하지 않으면 물(物)이 없다는 말은 성인(聖人)의 격언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성실이 아니고는 해나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공부를 해야만 성실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가? 격물치지 성의정심을 공부해야 하는가?"
하니, 각신 이만수가 아뢰기를,
"성실하려고 힘쓰면 자연히 성실하지 않음이 없게 됩니다. 성실은 실로 성인의 지극한 공부이지만, 격물치지 성의정심을 능히 한다면 성실은 그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11월. 상이 보문각(寶文閣)에 나아갔다. 야대(夜對)하였다. 《역대군감(歷代君鑑)》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겨울밤은 참으로 길고 연석은 조용한데 밤기운이 청명하고 정신이 전일(專一)하니, 책을 읽으면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 좋고 일을 논하면 깨닫기 쉽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야대가 낮에 묻는 것보다 낫다. ' 하였으니, 이 말은 참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고금을 격렬하게 논하면서 오늘밤을 새우는 것도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예모(禮貌)를 간략하게 하고 마음을 열어 정성을 다해서 숨김없이 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역대의 치란(治亂)과 득실(得失), 인물의 현부(賢否)에 대해 토론하고, 또 여염의 어려움과 민생의 질고에 대해서 상세히 물었다. 하교하기를,
"오늘밤의 모임이 너무도 즐거워서 피곤한 줄도 모르겠다."
하고, 어전(御前)의 촛불을 거두어 신하들을 인도해서 승정원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시간이 이미 새벽을 향하고 있었다.
○ 12월. 옥당 관원을 소대하였다. 글뜻을 진달하는 것으로 인하여 상이 이르기를,
"《시경》의 '우리 공전(公田)에 비가 내려 마침내 사전(私田)에까지 미쳤도다 '는 것에서 치세(治世)의 기상을 볼 수 있다. 신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공(公)을 앞세우고 사(私)를 뒤로 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윗사람이 은혜를 앞세우고 의리를 뒤로 하지 않는다면 아랫사람에게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하라고 요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 소대하였다. 《시경》황황자화(皇皇者華)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범씨(范氏)가 이르기를, '신하가 선을 따른다면 임금을 선하게 만들 수 있고, 신하가 간언을 받아들인다면 임금에게 간언할 수 있다. ' 하였으니, 대개 스스로 다스려지지 않고서 임금을 바로잡을 사람은 없음을 이른 것이다. 신하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도리는 실로 이러해야 하겠지만, 말을 받아들이는 임금의 도리로 말하자면 그가 스스로 다스려졌는지 여부는 물을 필요가 없다."
하였다.
9년(기사, 1809)
○ 1월.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증 집의 서덕수(徐德修)는 달성부원군(達城府院君)의 손자로서 신임 무옥(辛壬誣獄) 때 가장 혹독한 화를 입었습니다. 고 상신 민진원(閔鎭遠)은 상차하여 진달하기를, '흉도들이 서덕수를 무고한 의도는 성궁(聖躬)을 무고하는 데 있었습니다. ' 하였고, 고 중신 이태중(李台重)은 연석에서 아뢰기를, '서덕수에게 크나큰 은전을 특별히 시행해야만 신축촹임인년의 의리가 비로소 펴질 것입니다. ' 하였습니다. 특별히 가증(加贈)과 사제(賜祭)
하니, 상이 따랐다. 김재찬이 또 아뢰기를,
"올해는 바로 기사년입니다. 성상(星霜)이 몇 번째 돌아왔지만 충렬(忠烈)은 어제의 일과 같으니, 선정신 송시열(宋時烈), 고 상신 김수항(金壽恒), 고 충신 오두인(吳斗寅)촹이세화(李世華)촹박태보(朴泰輔)의 집에 사제하소서. 고 참의 이후정(李后定)이 그 당시에 올린 상소는 세 충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치제하소서."
하니, 따랐다.
○ 2월. 이에 앞서 상이 연석에 임하여 하교하기를,
"이해는 혜경궁께서 관례(冠禮)를 치른 지 회갑년이 되는 해이다. 의당 휘호(徽號)를 천양하는 거조가 있어야 하겠지만, 겸양하시는 자궁의 덕을 우러러 체념하여 단지 음식상만 올리려 한다."
하니, 대신 김재찬이 아뢰기를,
"자궁께서는 겸양을 덕으로 여기시고 전하께서는 뜻을 받드는 것을 효로 여기시니, 이 일은 실로 역사책에 빛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경춘전(景春殿)에 나아가 혜경궁에게 음식상을 올렸는데, 정묘(正廟) 을묘년 연희당(延禧堂)에서 음식상을 올리던 때의 의식을 따랐으니, 이로써 지난날의 효성을 몸받고자 함이었다.
○ 3월. 이에 앞서 상이 빈연(賓筵)에서 대신에게 하교하기를,
"영묘조(英廟朝)는 여러 도의 수령에게 명하여 농사짓기 위해 고생하는 형상을 시로 지어 갖추 기술하게 하셨고, 선대왕께서도 책자를 지어 올리게 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다 진달하도록 하셨다. 지금 두 조정의 고사를 본받아 수령으로 하여금 시문(詩文)을 지어 올리게 해서 살펴보고자 하는데, 과연 대양(對揚)하는 실효가 있겠는가?"
하니, 김재찬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시니 이는 실로 백성들의 복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전적으로 대양을 위한 것이다. 만약 형식에 그친다면 하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하니, 김재찬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요사이처럼 곤궁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우리 성상께서 만약 하소연할 곳 없는 우리의 사정을 아신다면 반드시 우리를 살려줄 방도를 강구할 것이다. '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교지를 내려 정성스러운 뜻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보여준다면 신뢰하고 감동하는 효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팔도와 사도(四都)에 윤음을 내리기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하다. 예로부터 명철한 임금은 모두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전해주어 이로써 하늘에 영원한 명을 비는 근본을 삼았었다. 백성은 임금의 하늘이고 먹을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 만약 다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온갖 고생을 하는데도 위에 진달할 길이 없다면, 임금된 자가 비록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보전해주려 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나 소자가 어린 나이에 외람되게 지극히 어려운 사업을 계승하여 한 가지 덕망과 은택도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고 한 가지 은혜와 교화도 팔방에 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썩은 끈으로 여섯 마리 말을 모는 것처럼 밤낮으로 두려워하며 감히 한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과거 영묘조에 60여 년 동안 태평한 정치를 이룩하였던 것은 오로지 백성을 사랑하고 탐오한 관리를 징계하는 데에 있었는데, 수령에게 명하여 민은시(民隱詩)를 지어 올리게 하고는 그 중에서 백성에게 절실한 폐단을 제거하셨다. 우리 선조께서도 백성들의 괴로움이 위에 보고된 것이 있으면 즉시 제거하도록 명하셨고, 또 일찍이 감사와 수령에게 신칙하여 서장(書狀)이나 대책(對策)으로 농사일과 백성들의 실정을 낱낱이 진달하게 했
아, 너희 감사, 유수, 수령들은 민생의 곤궁함과 여항의 어려움에 대해서 그 사유를 갖추 진달하고, 또 구제할 방도를 함께 아뢰도록 하라. 만약 성심을 다하지 않는다면 실로 허물이 될 것이다."
하였다.
○ 5월. 병조 정랑 김병연(金秉淵)이 상소하여 8개 조항을 진달하였는데, 1. 법령을 신중히 할 것. 2. 인재를 진용할 것, 3. 사치를 억제할 것, 4. 군정(軍政)을 바로잡을 것, 5. 전부(田賦)를 고르게 할 것, 6. 환자곡 상납에 관련된 폐단을 바로잡을 것, 7. 포제(砲制)를 정할 것, 8.변방의 정사를 신중히 할 것 등이었다. 답하기를,
"그대는 언관(言官)이 아닌데도 말한 내용이 시무(時務)에 절실한 것이었다. 받아들일 만한 것이 있으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겠다."
하였다.
○ 6월. 날씨가 오랫동안 가물었다. 상이 남단(南壇)에서 직접 비를 빌었는데, 보여(步輿)를 타고 산개(?盖)를 제거하였으며, 축문에 친압(親押)하고 재계를 엄히 할 것을 신칙하였다. 강신(降神)과 천신(薦新)을 거행하자마자 신령스러운 비가 쏟아져서 곤의(袞衣)가 다 젖었으므로 둘러서서 바라보던 도성 백성 중에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 백성들에게 권하여 다른 곡식을 대신 뿌리게 하라고 여러 도에 신칙하고, 이어 전세를 감면하였다. 하교하기를,
"잡곡이 비록 벼만은 못하지만 하늘의 신령함에 힘입어 잘 거두어들이게 된다면 우리 백성들이 먹을 수 있을 것이니, 이는 큰 다행이다. 더구나 우리 선조 무오년에도 전세를 견감하라는 명이 있었으니, 또한 오늘날 계술해야 할 한 가지 일일 것이다."
하였다.
○ 7월. 묘당이, 중외로 하여금 곡식을 다른 지방으로 내보내는 것을 막고 값을 낮추어 팔게 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백성을 이주시키고 곡식을 옮기는 일에 대해서 대답한 맹자(孟子)의 말은,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말단만 다스리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지 곡식을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아니다. 지금 만약 이곳에서 나는 곡식을 저곳에 팔 수 없다면 이것은 곡식의 판매를 막는 것이다. 한 고을을 놓고 본다면 경내의 백성이 이웃 고을보다 중하겠지만, 조정의 관점으로 보면 내외 팔도의 백성이 모두 우리의 적자(赤子)인 것이다. 옛날의 장수 중에는 막걸리를 강물에 던져서 삼군(三軍)을 먹인 자가 있었다. 지금 고을마다 모두 곡식을 경외(境外)로 내보내지 않는다면 이웃 고을 백성들이 장차 더욱 궁색하고 다급해질 것이니, 이 어찌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루 누리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는 뜻이겠는가. 이익이 달려 있는 문제는 형법으로도 금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약 강제로 값을 낮추어 팔게 한다면 명령이 행해지지 않게 될 것이다. 또 부유한 자가 곡식을 쌓아두려 하겠는가. 이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철저하게 방법을 강구하여 공연히 백성들만 소요시키는 일이 없게 하라."
하였다.
○ 중외의 사형 죄수로서 오랫동안 결안(結案)되지 못한 옥안(獄案) 60여 건을 심리하였는데, 살려준 자가 3분의 1이었다.
○ 도목정사를 하였다. 하교하기를,
"탐람한 풍조가 생겨서 백성들이 곤경에 처하여도 기탄하는 바가 없고, 기강이 날로 해이해져서 명분이 도치되어도 진정시키지 못한다. 더구나 올해는 가뭄의 재변까지 당하였으니 삼남의 민사(民事)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그 근본이 수령을 잘 선택하는 데 있지 않겠으며, 또 정관(政官)이 성의를 다하는 데 있지 않겠는가. 수령이 그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잘 가려뽑지 못한 죄를 정관이 먼저 받게 될 것이다."
하였다.
○ 8월. 9일(정유)에 원자가 탄생하였다.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왕대비전, 혜경궁, 가순궁(嘉順宮)에 직접 치사(致詞)촹전문(箋文)촹표리(表裏)를 올리고, 이어 백관의 진하를 받았다. 가순궁에 전문을 올리는 것이 이때에 시작되었는데, 중외의 모든 거행을 혜경궁의 예대로 따를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의 경사는 바로 국조(國朝)에서 100년 이래로 처음 있는 경사이다. 직접 자전과 자궁께 하전(賀箋)을 올리고 이어 조정의 진하를 받았는데, 날씨가 맑고 화창하여 신인(神人)이 모두 기뻐하였다. 이때에 견감하고 돌보아주는 정사가 의당 중외 백성들에게 미쳐야 하겠으니, 여러 도의 묵은 환자곡 및 증렬미 5분의 1, 각 공인의 묵은 유재 1만 곡, 시민의 요역 1개월, 푸줏간의 속전 30일치를 탕감함으로써 기쁨을 표시하고 함께 경축하려는 뜻을 보이라."
하였다.
○ 9월. 하교하기를,
"양호(兩湖)에 닥친 참혹한 흉년을 밤낮으로 걱정하다 보니 밥도 달지 않고 잠자리도 편치가 않다. 흉년을 구제하려면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일이 가장 급하고, 부담을 덜어주려면 부세를 느슨하게 하는 것이 가장 급하다. 이를테면 환자곡, 군향, 신포를 정지하거나 견감하거나 대봉(代捧)하는 등의 일을 결정하면서 만약 일정한 격식에 구애된다면, 아래에서는 조목조목 거론하지 못하고 위에서는 변통할 방도를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황이 든 저 무리들이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는가. 백성에게 편리하고 백성에게 이로운 모든 일은 관례가 있건 없건 논하지 말고 일체 곧바로 진달하여 청하라."
하고, 이어 명하기를,
"각 전궁(殿宮)에 진상하는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 삭선(朔膳) 및 여러 공헌(貢獻) 물종을 모두 정봉하고, 이 밖에 백성에게서 거두어 위에 올리고 고을에 바치는 것들을 모두 감면하라."
하였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자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바른말을 구하였다.
○ 11월. 내탕고의 돈 2만 민, 호초 1000두, 단목 5000근을 내려서 호남, 호서, 경기, 화성에 나누어주어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
○ 소대하였다. 《시경》소민편(召旻篇)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장에서는 소인(小人)을 임용하여 기근을 부른 것에 대해 말하였다. 소인이 나라에 끼치는 해가 실로 이렇게까지 극심하기 때문에 제갈량(諸葛亮)은 군자와 소인을 가까이하고 멀리한 것이 전한(前漢)촹후한(後漢)이 흥기하고 망한 근본 원인이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소인을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마는, 진용하고 물리치는 때에 어떻게 하면 틈을 타서 나오는 염려가 없게 되겠는가?"
하니, 시독관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취사 선택하는 때에 공명무사(公明無私)함으로 임하면 어진이와 바르지 못한 사람을 쉽게 분별할 수 있어서 섞여 나오거나 잘못 쓸 염려가 없게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근은 난세(亂世)에 이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성인의 세상에도 더러 이런 근심이 있었다. 그러나 임금된 자는 기근을 당했을 때에 성인의 세상에도 면하지 못하였던 일이라는 것으로 은연중 스스로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니, 정원용이 아뢰기를,
"치세(治世)에는 기근이 드는 해가 있더라도 정령을 내고 인정(仁政)을 펴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습니다."
하였다.
10년(경오, 1810)
○ 1월. 하교하기를,
"외방 고을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뽑아 올리는 때에 누락되는 사람이 있을 염려는 없는가? 고르게 베푸는 방도는 오로지 수령에게 달려 있으니, 성심껏 진휼한다면 백성들이 구렁에서 뒹굴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조정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발각되는 대로 엄히 처벌하겠다."
하였다. 이어 발매(發賣)하여 도성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에 대해 신칙하고, 호적에 누락된 자도 뽑아 들이도록 하였다.
○ 2월. 관서 곡식 4만 5000곡과 해서 곡식 2만 9000곡을 호남과 호서에 옮겨서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는데, 비변사가 호조와 선혜청의 돈을 대신 보내기를 청하자, 허락하였다. 하교하기를,
"백성들은 곡식을 먹지 돈을 먹지 않으니, 만약 곡물이 없다면 어디에서 사서 옮기겠는가. 또 춘궁기를 당하여 뒤주가 모두 바닥난 마당에 상납할 곡식을 장차 어떻게 마련하여 바치겠는가. 면포를 돈으로 대신 바치게 한 것은 골고루 혜택을 입게 하기에는 부족한 조처였다. 호남의 극심한 고을에 대해서는 대동미의 3분의 1을 가을이 되기를 기다려서 받아들이라. 곡식을 옮기는 것을 돈으로 대신한 것이 비록 관서 백성들의 폐단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양호에서 얻어먹기를 기다리는 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이겠는가? 곡식을 판매하는 배를 양호에 왕래하게 하여 마음대로 매매하게 한다면 또한 남쪽 백성들에게 보탬이 될 것이다. 감사에게 신칙하라."
하였다.
○ 3월. 소대하였다. 《맹자》를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 선왕(齊宣王)이 벌벌 떨면서 끌려가는 소를 불쌍하게 여겨 선한 마음이 잠깐 일어났으니, 이 마음을 가지고 백성을 보호했다면 왕도 정치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가 그 선단(善端)을 인하여 은혜를 미루어 나가는 방도로써 개도(開導)한 것이다. 제 선왕은 측은한 마음이 잠시 일어나기는 했지만 항상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정령을 내는 때에 가슴속에 되새기는 효과가 없었던 것이다. 맹자가 제나라에서 불우(不遇)했던 것은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지사(志士)들에게 깊은 한이 되었다."
하니, 시독관 신재명(申在明)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애틋한 인심(仁心)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는 실로 백성들의 복입니다."
하였다.
○ 대사헌 김이도(金履度)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근래에 듣건대, 새로 무예청 군병을 뽑아 들이는 조처가 있다고 합니다. 숙위(宿衛)가 소홀한 것을 염려해서입니까, 아니면 외관상 보기 좋게 꾸미기 위해서입니까? 삼가 보건대, 숙위의 성대함은 국전(國典)에 상고해 보아도 나으면 나았지 손색이 없으니, 이번의 이 조처는 전하께서 먼저 하실 일은 아닐 듯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공사(公私)가 모두 바닥이 나서 국가의 재정 상태가 애통한 실정입니다. 쓸데없는 비용을 없애서 간략한 쪽으로 추진하지는 못할지언정 또 어떻게 일없이 비용을 늘려서 급하지 않은 일에 정신을 쓰고 쓸데없는 곳에다 내탕고의 비축을 소비하겠습니까. 누가 됨이 이미 크고 손해됨이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르기를,
"액례(掖隷)를 선발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과거 선조 때도 별기군(別技軍)촹무예 출신(武藝出身)이라는 명색이 있었으나 장용영의 혁파로 인하여 없앴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를 따라서 행한 것이니, 보고 듣기에 거창하게 하고 군대의 위엄을 장대하게 하려는 뜻이 아니라 옛 제도를 복구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경이 숨기지 않고 다 말하여 내게 과실이 없게 하려 한 것은 또 경의 충성이다. 조정에 바른말을 하고 강력히 간하는 신하가 있다는 것이 실로 기쁘니, 어찌 한 부대의 병력을 아까워하겠는가, 지금 막 훈련도감에 도로 붙이게 하였다. 옥당과 양사에서 나를 위해 감히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은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경은 간쟁하는 책임을 다하는 데 더욱 힘쓰라."
하였다.
○ 5월. 하교하기를,
"여러 도의 진휼이 끝나고 보리도 익어가고 있다. 백성들의 다급한 실정은 과연 어떠하며 몸이 수척해진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는가? 보리 농사가 풍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이 배불리 먹을 만큼의 여유가 있겠는가? 기후가 적절하여 기근을 겪고 남은 힘으로 전답을 다 개간하게 할 수 있겠는가?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이 서로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갔는가? 전염병이 이미 다 사라져서 병에 걸려 죽을 근심이 없겠는가? 이것은 모두 밤낮으로 근심하는 일이다. 죄없는 저 가련한 백성들이 참혹한 흉년을 겪으면서 다행히 죽음을 면한 것은 첫째도 하늘의 인자함 덕분이고 둘째도 하늘의 인자함 덕분이다. 하늘의 인자함에 힘입어 이미 천신만고 끝에 겨울과 봄을 지내고 목숨을 건졌지만, 지금 만약 보호하는 방책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미 살았던 목숨이 다시 죽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천심(天心)을 저버리고 인화(人和)를 잃지 않겠는가. 감사와 수령들은 진휼이 끝났다고 방심하거나 보리가 익었다고 걱정을 늦추지 말고 위로하여 이르게 하고 품어 보호해주는 방도에 더욱 힘쓰라. 그리하여 살아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삶을 편안히 여기고 생활 터전을 회복하게 하라."
하였다.
○ 사관과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교외의 보리 농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 6월. 호군 이지영(李祉永)이 상소하여 《오례통편(五禮通編)》초본을 올렸는데, 비답하기를,
"이 책의 편찬을 명하신 것은 바로 열성조의 제작(制作)을 계술하여 만세의 법이 되게 하려는 선대왕의 뜻이었다. 지금 경의 상소를 보니 슬픔과 그리움을 주체하지 못하겠다. 경이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편집하는 일을 마쳤으니, 내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다. 원 책은 내각으로 하여금 다시 고증하여 올리게 하였다."
하고, 이어 호피(虎皮)를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 7월. 행행할 때 진강할 책자를 가지고 가는 규정을 회복하라고 명하였다.
○ 8월. 하교하기를,
"문을 지키고 명을 전하는 것이 바로 직분이니, 만약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뒷폐단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늘 전교가 내려짐에 중관 무리가 '사직 '이라고 말한 것은 너무도 한심한 작태이다. 이것을 징계하지 않는다면 조짐을 막는 뜻이 장차 완전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당해 중관을 정배하라."
하였다.
○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직접 제사지내고, 이어 화령전(華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으며, 신풍루(新?樓)에 나아가 굶주린 백성에게 쌀을 하사하였다.
○ 9월. 고려의 충신인 찬성사(贊成事) 박문수(朴門壽)를 표절사(表節祠)에 배향하라고 명하였는데, 유생들의 상소와 대신의 청으로 인한 것이었다.
○ 옥당 서장보(徐長輔)가 고사(故事)를 써 올렸는데, 송 태조(宋太祖)가 예모(禮貌)를 갖추지 않은 데 대해서 두의(竇儀)가 규간(規諫)한 말을 인용한 것이었다. 상이 답하기를,
"위의를 존엄하게 하는 것은 첨시(瞻視)를 보이는 것이고, 용모를 엄히 하는 것은 장경(莊敬)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 있는 때에도 노력하여 으슥한 곳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함으로써 사벽한 기운이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실로 학문의 지극한 요지이다. 그래야만 수신(修身)의 방도를 차례로 볼 수 있고, 격물치지의 공부도 효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 열성조의 큰 공적과 성대한 업적, 성스러운 정책과 아름다운 규모는 모두 소자가 밤낮으로 몸받아 힘써야 할 것이지만, 신하를 예로 대한 것은 더더욱 오늘날 힘써 본받아야 할 일이다. 어찌 일개 송 태조를 가지고 그 위대한 덕을 엿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 부교리 김계하(金啓河)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하께서 신민(臣民)에게 임어하신 지 이제 12년이 되어가는데, 분발하신 일은 무엇이며 진작하신 사업은 무엇입니까? 날로 진보한다는 말은 들리지 않고 날로 퇴보한다는 말만 들리며, 점차 번창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점차 피폐해지는 것만 보게 됩니다. 묘당은 문서를 제때에 처리하는 것을 음양을 섭리(燮理)하는 근본으로 여기고, 전조(銓曹)는 이쪽 저쪽을 안배하는 것을 격양(激揚)하는 정사로 여기며, 송옥(訟獄)은 왜곡되어 청탁이 날로 성행하고, 과거는 뒤섞여 뇌물이 멋대로 행해지며, 대각은 침묵을 가법(家法)으로 삼고, 수령은 가렴
주구를 능력 있는 일로 일컬으며, 사치를 다투어 숭상하여 비축된 곡식이 고갈되고, 기강이 모조리 추락되어 모발까지 병들고 말았습니다. 이 중에서 한 가지 폐단만 있더라도 재앙을 초래하기에 충분한데, 전부 다 있는데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약 오늘 분발하신다면 내일은 반드시 효과가 있을 것이고, 한 가지 일이 진작되면 만 가지 일이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려워 하지 않으십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전에는 분발하라는 말을 나에게 진달하는 사람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다. 천 마리 양의 가죽이 한 마리 여우의 겨드랑이 가죽보다 못하다고 옛날 임금이 말했었는데, 지금 그대가 감히 말하는 것이 이와 유사하다. 실천하는 공부에 대해 그대들과 더불어 서로 경계하겠다. 특별히 내탕고의 명주 10필을 하사하여 그의 곧음을 나타내라."
하였다.
○ 12월. 고 유신 이간(李柬)에게 증직과 사시(賜諡)의 은전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78권 순조조 3
11년(신미, 1811)
○ 2월. 통신사 김이교(金履喬), 부사 이면구(李勉求)가 일본 대마도로 가기 위하여 사폐(辭陛)하였는데, 상이 불러 보고서 권면하고 신칙하였다.
○ 3월. 소대하였다. 《시경》녹명편(鹿鳴篇)과 천보편(天保篇)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보 한 편은 대부분 송축하고 기원하는 뜻을 말한 것이다. 대개 임금이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면서 백성을 사랑으로 돌보아주고 신하들을 예로 대우하면 아랫사람들도 임금의 덕을 권면하여 우리 임금이 요순과 같은 경지에 이르기를 기대하고 바랄 뿐이다. 또 수(壽)와 복록이 하늘에 달려 있는데, 하늘의 감응은 단지 임금의 덕이 어떠하냐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런데 시인이 권면하고 경계하는 말을 먼저 하지 않고 반드시 일(日)촹월(月)촹송(松)촹백(柏) 등의 말로 송축한 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삼대(三代)이전에도 이와 같았는가?"
하니, 시독관 이지연(李志淵)이 아뢰기를,
"신하가 충애(忠愛)의 마음으로 복록을 송축한 것으로, 후세의 아첨하는 기풍과는 다릅니다."
하였다.
○ 상이 일찍이 강연에서, 향군(鄕軍)이 번상(番上)하는 폐단에 대해 강관이 말하는 것을 듣고 하교하기를,
"먼 고을의 가난한 백성이 가산(家産)을 다 털어 행장을 꾸려도 대궐을 수위(守衛)하는 때에 추위와 더위를 면하지 못하니, 마음이 항상 안타까워서 잠자리도 편치 않고 밥도 달지 않다. 수위는 사체가 중하므로 폐지할 수 없지만, 어루만져주고 편안히 지내게 해주는 것은 병조의 책임이다."
하고, 본병(本兵) 신하에게 신칙하여 늘 소교(小校)를 보내어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살피게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묘당으로 하여금 번화한 길에 개좌(開坐)하여 시골 백성으로서 위사(衛士)에 소속된 자를 모아놓고서 일일이 효유하고 어루만진 다음 여러 가지 폐단을 자세히 물어서 체계적으로 보고하게 하였다. 이는 위사를 불러 질고를 물은 영묘(英廟)의 뜻을 우러러 몸받은 것이었다.
○ 하교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갈대가 희끗희끗한데 흰 이슬은 서리가 되었도다. '라고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신의가 없어서는 안 된다. 연래로 각도에서 천거한 자들을 전조가 즉시 발탁하지 않고 있으니, 실로 매우 안타깝고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고, 이어 전조에 신칙하였다.
○ 관상감에 명하여 재이(災異)를 살펴서 사실대로 보고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하였다.
○ 하교하기를,
"열성조의 어제(御製)와 어훈(御訓)은 실로 뒤를 이은 임금이 거울삼고 법삼아야 하는 것이다. 요순을 법삼고자 하면 조종을 법삼아야 하는 법이니, 너희 내각과 홍문관의 유신들은 강연하는 자리에 나오는 때에 반드시 열성조의 가르침을 들어서 글뜻을 설명하도록 하라."
하였다.
○ 하교하기를,
"태학(太學)은 어진 선비가 말미암는 곳이고, 덕성은 몸을 수련하는 근본이다. 세상은 훌륭한 선비가 없으면 유지되기 힘들고, 사람은 덕성이 없으면 남들보다 뛰어날 수 없다. 지금 태학의 선비들 중에는 과연 국가에서 의뢰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자가 있는가? 경각하고 분발하여 글을 읽고 행실을 가다듬으라는 말을 특히 많은 선비를 위해서 외우는 바이다."
하였다.
○ 숭인전(崇仁殿)에 제사를 설행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관서(關西)는 예의(禮義)의 고장이다. 팔조(八條)의 가르침이 시행되어 오늘날까지 백성들이 따르고 믿는 것이 어찌 기자(箕子)의 공이 아니겠는가. 우리 조정의 의관(衣冠)과 문물(文物)이 찬란히 갖추어지고 성대히 빛나는 것이 또한 어찌 기자의 공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팔도 감사와 사도 유수(四都留守)로 하여금 민폐를 알아내어 글로 지어 올리게 해서 여가 시간에 늘 볼 수 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 윤3월. 숭정전에 나아가 혜경궁에게 음식상을 올렸다.
○ 4월. 주강에 나아갔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열성조의 고사를 진달하게 하였다. 시독관 김계온(金啓溫)이 간언을 받아들였던 영묘조의 덕을 가지고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가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것은 바로 《서경》의 '단주(丹朱)처럼 오만하지 마십시오. '라는 뜻이다. 우리 조정에 성자(聖子)촹신손(神孫)이 잇달아 나와 인정(仁政)이 두루 미쳤으니, 실로 요순의 덕과 짝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또 명현(名賢)과 석보(碩輔)가 배출되었던 것은 바로 임금이 어질면 신하가 곧아지기 때문이다."
하였다.
○ 특별히 윤음을 내리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재해 입은 여러 도의 백성들을 위유하였다.
○ 5월.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성균관 유생들을 불러 선온(宣?)하였다.
하교하기를,
"선비들을 대우하는 나의 지극한 뜻을 표시하고자 함이다."
하였다.
○ 6월. 덕유당(德游堂)에 나아가 양사 신하들에게 선온하였다. 하교하기를,
"대각을 대우하는 나의 간절한 뜻을 표시하고자 함이다. 경들은 우리 조정 400여 년의 공고한 기업이 대관의 직간(直諫)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라."
하였다.
○ 경현당에 나아가 조관으로서 77세 이상 된 노인에게 어물(魚物)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하교하기를,
"내일은 바로 자궁의 천추경절(千秋慶節)이다. 장수하시기를 비는 소자의 정성이야 어느 해인들 그렇지 않았
하였다.
○ 7월. 감옥에 있는 중외의 죄수 가운데 죄가 무거운 자는 참작하여 처리하고 죄가 경미한 자는 풀어주어 심리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감옥에 가두어 두는 일이 없게 하라고 신칙하였다. 도성 백성을 진휼하는 정사에 대해 신칙하고, 가난한 민호를 널리 뽑아서 직접 임하여 쌀을 나누어주었다. 시골 백성으로서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도 없이 서울에서 떠도는 자들을 불러 모아 쌀을 하사하였다.
○ 12월. 관서의 토적(土賊) 홍경래(洪景來)가 패거리를 불러모아 가산군(嘉山郡)을 겁탈하였는데, 그 와중에 군수 정시(鄭蓍)가 죽임을 당하였다. 감사의 보고가 이르니, 상이 대신들을 불러 보고서 적을 토벌할 계책을 묻고, 경영(京營)의 군사를 조발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장수로 삼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니, 좌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아뢰기를,
"장신 중에서는 이요헌(李堯憲)이 임용할 만합니다."
하였다. 이에 이요헌을 양서 순무사로 삼고, 상방검(尙方劍)을 하사하면서 이르기를,
"절도사 이하로서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참수하고, 군무(軍務)는 모두 편리한 대로 처리하라."
하였다. 곧이어 이요헌에게 명하여 경영(京營)에 개부(開府)하게 하고, 서능보(徐能輔)촹김계온(金啓溫)을 종사관으로 삼았으며, 중군 박기풍(朴基?)을 먼저 보내어 군사 4초(哨)를 거느리고 출정하게 하였다.
○ 병조 참판 정만석(鄭晩錫)을 관서 위유사로 삼았다. 불러 보고서 보내고, 이어 군무(軍務)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도록 명하였다.
○ 관서의 감사촹수신(帥臣) 및 사민(士民)에게 하유하기를,
"이번에 토적(土賊)의 변란이 일어나 청북(淸北)의 몇만 백성이 도탄 속에서 참살당하였으니, 이것은 나의 죄이다. 풍속이 무너지고 기강이 해이해졌는데도 내가 진작시키지 못하였고, 민생이 곤궁해지고 탐관 오리가 멋대로 날뛰는데도 내가 살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한 가지 정사와 한 가지 일도 하늘의 명을 맞이하여 이어나가고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될 만한 것이 없었다.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만방(萬邦)의 죄는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 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용서하겠는가.
저 적의 괴수는 스스로 하늘의 주벌을 자초하였으니 내가 감히 용서하지 못하겠으나, 추종하는 무리는 태반이 나의 백성들이니, 그 마음을 캐어보면 어찌 흉악한 괴수를 추종하여 대역죄를 범하고자 하였겠는가. 단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흉악한 괴수가 협박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만약 죄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칼날에 맞아 죽게 한다면 어찌 하늘의 토벌을 행하여 백성들의 목숨을 구했다고 하겠는가. 빠져나와 귀순하는 자는 평민으로 대해주어 본업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무엇보다 안타까운 점은 구덩이를 메우게 된 기민(飢民)이 몇천 몇백 명이나 되는지 모르는 것이니, 우리 백성들이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흉악한 변을 당한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
아, 너희 감사와 수신은 애통해하는 나의 말을 체념하여 마음을 다해 진휼해서 반드시 살려냄으로써 나로 하여금 천명(天命)과 민심(民心)에 거듭 죄를 짓지 않게 하라. 아, 너희 서쪽 지방 백성들아! 너희들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내가 임금된 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이렇게 어지럽고 놀라운 환란을 겪게 하였으니, 내가 실로 너희를 저버린 것이다. 내가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
하였다.
12년(임신, 1812)
○ 1월.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는데, 왕대비의 보령이 육순이었기 때문이었다.
○ 적이 정주성(定州城)을 차지하고 또 병력을 나누어 서쪽을 겁탈하여 청북(淸北)의 여러 고을 및 여러 산성이 모두 적의 소굴이 되었다. 감사가 아뢰자 상이 순무사를 재촉하여 전진하게 하였다.
○ 적도가 박천(博川) 송림(松林)의 동네 어귀에 모여서 안주(安州)를 침범하려 하였는데, 목사 조종영(趙鐘永)이 죽음을 맹세하고 대중을 격려하여 성첩을 더욱 굳건히 지키자 적도들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병사(兵使) 이해우(李海愚)가 우후 이해승(李海昇), 함종 부사(咸從府使) 윤욱렬(尹郁烈), 순천 군수(順川郡守) 오치수(吳致壽), 곽산 군수(郭山郡守) 이호식(李祜植)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치게 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져서 달아나 정주성으로 들어갔다. 첩보가 이르자 상이 감사와 수신에게 하유하기를,
"소추(小醜)가 황지(潢池)에서 장난질하는 것은 본래 평정할 거리도 못 되지만, 태평한 날이 오래 계속되던 중 갑작스럽게 변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감영과 군영에서 승리를 제압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어서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런데 처음의 교전(交戰)에서 이미 승전보가 있었으니, 장수와 군사들이 분발하여 명을 따랐다는 것을 알겠다. 이것은 경들의 조처와 계획이 적절했던 덕분이기에 매우 가상히 여기고 있다. 그러나 작은 승리에 도취하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두려워하는 일이다. 경들은 더욱 삼가고 신중히 하여 좋은 계책으로 승리를 거두어 기필코 적을 즉시 소탕하도록 하라."
하였다.
○ 서울의 각사와 각영의 돈 10만 민을 빌려주어 균역청으로 하여금 곡식을 사들이게 해서 관서의 진휼 밑천을 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또 자궁(慈宮)이 안에서 내린 곡식 3000여 곡을 특별히 관서에 지급하여 진휼 곡식에 보태게 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해를 맞이하여 사모하는 소자의 아픈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하겠는가. 건릉(健陵), 현륭원(顯隆園), 화령전(華寧殿)에 영명위(永明尉) 홍현주(洪顯周)를 보내어 봉심하라."
하였는데, 이해가 정종이 탄생한 회갑년이기 때문이었다.
○ 어사 김계온(金啓溫)을 보내어 해서의 진휼을 감독하게 하였다.
○ 정시(鄭蓍)에게 병조 판서를 가증(加贈)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앞서 정시에게 아경(亞卿) 직책을 증직하고 제사를 지내주고 그 후손을 녹용하고 관곽(棺槨)과 장례 도구를 지급하고 그 처자를 도타이 돌보아줄 것을 명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감사가 정시의 용맹스러운 행동을 가지고 아뢰기를,
"적의 변란이 처음 일어나자 이민(吏民)이 놀라 흩어졌습니다. 정시가 그의 아버지와 동생과 함께 촛불 아래에 앉아서 순영과 병영에 보고할 글을 초안하고 있을 때 적병이 크게 소리치면서 돌입하여 정시를 붙잡아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창칼로 협박하면서 항복시키려 하였는데, 정시가 큰소리로 나무라다가 마침내 해를 당했습니다. 적이 또 정시의 아버지를 끌어내어 칼로 마구 찌르자 정시의 동생이 자신의 몸으로 아버지를 보호하면서 대신 죽여달라고 하였지만, 정시의 아버지는 끝내 죽고 정시의 동생은 기절하였다가 깨어났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늠름한 충의(忠義)가 마치 그 사람을 보는 듯하므로 더욱 측은하여 마음이 아프다. 아, 얼굴을 모르는 지방관인 점에서는 당(唐) 나라 안진경(顔眞卿)과 무엇이 다르며, 조용히 의리에 나아간 점에서는 우리 조정 송상현(宋象賢)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더구나 그의 한 집안 부자 형제가 화를 당한 것은 변씨(卞氏)의 두 세대에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으니, 어쩌면 그리도 굳세단 말인가. 그 아비에게도 관직을 증직하고 아울러 시호를 하사하라. 그 동생은 삼년상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조용하라. 그의 관(棺)이 돌아와 서울을 지나는 날에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라."
하였다. 곧이어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후에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정시는 바로 선정(先正) 정구(鄭逑)의 후손입니다. 선정이 윤리를 밝히고 의리를 바로잡는 학문을 후손에게 남겨주었으니, 정시 부자의 충절(忠節)은 그 유래를 가지고 논하면 선정의 공입니다. 특별히 사제(賜祭)하소서. 정시의 아버지 정로(鄭魯)는 일찍이 정시가 협박당하고 있을 때에 경계하기를, '너의 부모를 생각하지 말고 반
하니, 따랐다.
○ 이때 해서의 병영에서 군사를 징집하여 방어하고 있었는데, 상이 입방군(入防軍)과 정예병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혁파하여 보내도록 명하였다.
○ 윤욱렬(尹郁烈)촹이호식(李祜植) 등이 전진하여 적을 쳐서 곽산(郭山)과 선천(宣川)을 수복하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이 의병장 김견신(金見臣)과 영군장(領軍將) 허항(許沆)을 보내어 용천(龍川)촹철산(鐵山)및 여러 산성을 수복하였다. 이에 곽산 이북에 직로(直路)가 마침내 통하게 되었는데, 정주(定州)의 적만은 산성에 의거한 채 나오지 않았다. 순무 중군 박기풍(朴基?)이 관군을 거느리고서 성밖 달천포(?川浦)에 진을 치니, 소모 제장(召募諸將) 및 의주의 장사(將士)와 북관(北關)의 친기위(親騎衛)가 모두 순무사의 휘하에 들어갔다.
○ 허항을 우림위장에, 김견신을 선전관에, 최신엽(崔信燁)을 내금위장에, 최치륜(崔致倫)을 영장에 제수하라고 명하였는데, 최신엽과 최치륜은 의주부 장교로서 적을 토벌하는 데 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서 하교하기를,
"김견신은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여 의주를 온전하게 하였고, 허항은 전투에 앞장서서 청북의 대로를 한 번만에 소탕하였으니, 의당 순차적으로 포상하는 은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견신은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킨 공이 있다고 해서 특별히 관서수령에 제수하였다.
○ 김익순(金益淳)촹이장겸(李章謙)촹정경행(鄭敬行)촹정성한(鄭聖翰)이 복주(伏誅)되었다. 김익순과 이장겸은 지방관으로서 적에게 항복한 자이고, 정경행과 정성한은 철산의 무신으로서 적을 따라 반란을 일으킨 자이다.
○ 관군이 성을 공격하는 때에 소모장(召募將) 제경욱(諸景彧)과 전봉장(前鋒將) 김대택(金大宅)이 육박하여 앞장서서 성에 오르다가 탄환에 맞아 죽었다. 모두 2품 절도사를 증직하고 정려(旌閭)하고 후손을 녹용할 것을 명하였다. 곧이어 제경욱에게 통제사를 가증하고 김대택에게 남병사를 가증하도록 명하였으며, 호조로 하여금 충장공(忠壯公) 제말(諸沫)의 시호를 맞이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게 하였다. 제경욱은 제말의 후손이다.
○ 여러 도의 기민을 진휼하고 도성 백성의 곤궁함을 구휼하는 정사에 대해 신칙하였다. 하교하기를,
"한데서 비바람을 맞고 굶주려서 부황이 든 관서 병민(兵民)의 고생스럽고 근심스러운 실정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대소 장령들은 고락을 같이 하고 있으며, 감사와 수령은 구제하는 방도에 정신을 쏟고 있는가? 여러 도에서 진휼 정사를반드시 이미 시행하였을 것이지만, 가엾은 저 굶주린 백성들이 과연 구덩이와 골짜기에서 뒹구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는가? 너희들의 성의와 힘을 다 기울여서 우리 백성들을 살려냄으로써 밤낮으로 근심하는 나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하라. 이때에 도성 백성들의 군색스럽고 다급한 상황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발매(發賣)하게 하고, 공계원(貢契員)과 시전(市廛) 상인에게 편리하고 보탬이 될 방도를 묘당이 호조와 선혜청의 당상과 함께 강구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 관서의 감사, 수신, 수령에게 하유하기를,
"정주성의 남은 적들이 목숨을 부지한 채 교활한 짓을 하는 것은 실로 근심할 것도 못 된다. 다만 내가 안타깝고 근심스럽게 여기는 것은 평민들이 죄없이 억울하게 화를 당하거나 강압에 못이겨 적을 따른 자에게 주벌이 마구 가해지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적의 우두머리, 또 그들을 추종하여 기쁜 마음으로 함께 악한 짓을 한 자들은 필시 몇 놈에 불과할 것이다. 이 밖에는 모두 어리석고 무지한 백성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사납고 포학한 정치에 몰려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죄수를 보고서 눈물 흘리고 새 잡는 그물을 보고서 기원한 성인의 마음으로 미루어 보면 실제로 불쌍히 여겨야지 노여워해서는 안 된다. 용서하고 위로해주면 모두 윗사람을 친애하여 관장(官長)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우리의 양민이 될 것이다.
내 비록 덕이 없지만 어찌 감히 살리기를 좋아하는 하늘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겠는가. 지난 역사를 보면 장
하였다.
○ 부수찬 박효성(朴孝成)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오늘날 난리를 부른 데에 어찌 이유가 없겠습니까. 조정에서는 무리를 나누고 당을 수립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공무를 받드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나라를 근심하는 것이 도리어 자신의 몸을 도모하는 것에 미치지 못합니다. 수령들은 백성을 구휼할 줄 모르고 전조(銓曹)에서는 사람을 가려 뽑지 않으며, 창고는 텅 비어 진휼하지 못하고 기계는 썩고 녹슬어 공격하지 못합니다. 전하께서 바른말을 들으려 하시고 신하들이 선의 단서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지금 해야 할 일인데, 천하태평으로 시일만 보내고 전철을 고치지 않으니, 신은 근심의 단서가 단지 서북 지방에만 있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이유명(李惟命)을 관서 감진사(關西監賑使)로 삼았다.
○ 홍우섭(洪遇燮)을 관동 위무사로, 이서(李?)를 북관 위무사로 삼고, 모두 감진사를 겸하게 하였다. 별도로 윤음을 내려 가서 선포하고 위휼하게 하였다.
○ 선전관을 보내어 북도의 친기위(親騎衛)를 철수해서 보내게 하고, 이어 경향(京鄕)의 군사들을 위로할 것을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경향의 장사(將士)들이 오랫동안 한데서 비바람을 맞고 있으니, 어찌 굶주림과 목마름이 없겠으며, 어찌 질병이 없겠는가. 나의 이러한 뜻을 가지고 각별히 위로하고 호궤하도록 하라. 북도의 친기위는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폐단을 생각해서 철수하여 보내도록 하였는데, 천릿길을 갔다가 돌아오는 괴로움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니, 위로하고 호궤하는 절목을 마찬가지로 거행하라. 그런 다음 감사와 수령을 신칙해서 밭갈이하는 자는 식량을 보조하여 경작을 권면하고, 죽은 자는 찾아내어 시체를 묻어주며, 전쟁에서 죽은 자는 별도로 구휼하고 그 처자는 도타이 어루만지며, 경미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즉시 풀어주게 하라."
하였다.
○ 2월. 상이 서쪽 지방에 기근이 들고 병력이 출동한 것 때문에 또 자신을 탓하는 하교를 내렸다. 구제하는 방도로써 감사와 수신에게 신칙하고, 이어 진헌 등에 관련된 명목으로 백성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풍년이 들 때가지 감면할 것과 정퇴한 묵은 환자곡을 모두 탕감할 것을 명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군포(軍布)는, 이미 그 힘을 쓴 이상 신역(身役)까지 중첩되게 징수해서는 안 된다. 징병한 고을의 신포를 모두 감면하라. 백성의 일로서 보고할 만한 것은 격례 밖이라도 조목조목 나열하여 치계하라."
하였다.
○ 해서촹호남의 삼세(三稅)와 경기의 극심한 읍진(邑鎭)의 각종 징납을 모두 정퇴하도록 명하였는데, 두 도에 기근이 들고 해서에는 징발하는 소요까지 겹쳤기 때문이었다.
○ 선전관을 보내어 진중(陣中)의 장졸을 위로하고 나서 호궤하게 하였으며, 의주(義州)의 의병장을 별도로 위유하게 하였다.
○ 순무 중군(巡撫中軍) 박기풍(朴基?)을 삭직하고 유효원(柳孝源)으로 대치하였다. 이에 앞서 박기풍이 성을 공격하는 때에 몇 번씩이나 불리한 형세에 처하였으므로 옥당이 상소하여 논핵하고 재략(才略)이 있는 사람을 다시 보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묘당이, 박기풍은 실로 토벌을 지체하여 적에게 우롱당한 죄가 있지만 진중
○ 영변(寧邊) 군사 양동(梁同)이 곽산(郭山)의 전투에서 적에게 잡혔는데, 욕을 하며 굴복하지 않자 적이 칼로 세 번 그의 목을 찍어 땅에 쓰러뜨렸다. 적이 죽은 줄 알고는 버리고 갔는데, 양동이 거의 죽었다가 소생하였다. 감사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급복(給復)하고 특별히 변장에 제수할 것을 명하였다.
○ 훈련도감 군사 이장갑(李長甲)은 덕산의 승호 포수(陞戶砲手)로, 자원하여 정벌에 따라 나섰던 자이다. 성을 공격하는 날 앞장서서 먼저 성에 오르다가 탄환에 맞아 상처를 입었고, 남문(南門)의 싸움에서 또 하루 종일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일이 보고되자 변장을 증직하고 가족들을 도탑게 구휼하도록 명하였다.
○ 3월. 선혜청 및 각영의 돈 21만 민을 내어 관서와 해서로 나누어 보내었다. 이것으로 곡식을 사서 환자곡에 보태게 하였는데, 두 도의 군향(軍餉) 조발과 기민 진휼을 위한 것이었다.
○ 각 고을의 의병을 감사와 수신으로 하여금 위로하고 호궤하게 하고 모집한 장사와 군관은 각별히 더 마음을 써서 돌보아주게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청남(淸南)촹청북(淸北)의 13개 고을에 있는 의병이 모두 1250명이었다.
○ 한성 판윤 김이익(金履翼)이 상소하여 도성의 유민(流民)을 모집하여 죽을 나누어주기를 청하니, 비답을 내려 윤허하였다. 오부(五部)에 명하여 유민을 뽑게 한 다음 진휼청으로 하여금 툭 트이고 넓은 공해(公?)에 유민을 불러모아 죽을 쑤어서 나누어주게 하였다. 이어 양식과 노자를 넉넉히 지급하고 차원(差員)을 정하여 가까운 도의 진휼을 설치한 고을로 데려다가 맡겨서 같은 예로 진휼하게 하고, 보리가 익을 때가 되면 본토로 돌려보내어 각각 예전의 생업을 회복하게 하였다. 뽑은 경향의 기민이 모두 3000여 명 이었다.
○ 성 안팎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에 대해서는 매장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도록 명하고, 병이 들었는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자는 각별히 돌보아주게 하였다.
○ 적이 성을 나와 목책(木柵)을 위협하였는데, 허항(許沆)이 앞장서서 적진으로 돌입하면서 손에 든 칼로 적을 쳐서 죽이자 눈앞에서 적들이 쓰러져갔다. 적이 뒤에서 말을 찔러서 말이 꼬꾸라지자 허항이 걸어다니면서 사방의 적을 죽이다가 마침내 상처를 입고 죽었다. 하교하기를,
"허항이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곧바로 전진하여 적을 죽였으니, 그 충위가 늠름하다."
하고, 통제사를 중직하고 그 마을에 정려하고 아들을 녹용하고 제사지내줄 것을 명하였다. 싸우다 죽은 군졸들은 모두 두터이 염습(殮襲)하여 돌려보내어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를 넉넉히 돌보아주게 하였다. 허항의 처 김씨(金氏)가 지아비의 용맹스러운 죽음에 대해 듣고는 마음속으로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고 있다가 장례를 치른 다음에 곡기를 끊고 죽었는데, 일이 보고되자 그 마을에 정문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 이때 웅악 부도통(熊岳副都統)과 봉황성 수위(鳳凰城守尉)가 황지(皇旨)로 군사들을 거느리고 중강(中江)에 이르러 성원(聲援)하였는데, 여덟 곳에서 징발한 군사의 수가 수천 명이라고 하였다. 상이 안주 목사(安州牧使) 조종영(趙鐘永)을 보내어 노고를 묻고 그 군사를 호궤하였다.
○ 상의 병환이 오랫동안 낫지 않아 약원이 윤직(輪直)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전히 회복되었다. 예조가 진하(陳賀)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이 아뢰기를,
"이렇게 큰 경사를 위로 종묘에 고하고 아래로 백성에게 선포하는 것은 조금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선 적이 토평될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라."
하였다. 며칠 후에 대신이 또 등연하여 극력 청하자 비로소 허락하였다.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전후의 진하와 관련하여 여러 도에서 올리는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모두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4월. 신유일(19일)에 대군(大軍)이 정주성을 수복하였다. 유효원(柳孝源)이 장수들에게 계책을 지시하여, 동성(東城)에 거인(距?)을 쌓아 가리우고 북성(北城)에 땅을 파서 지하도를 만들어 화약을 묻어두었다가 옆의 구멍으로부터 불을 붙이게 하였다. 잠시 후에 화약이 폭발하면서 성이 무너지자 성첩의 적이 모두 깔려 죽고
"관군이 오랫동안 한데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 것 때문에 밤낮으로 근심하던 차에 승전보가 문득 이르렀다. 너무도 통쾌하고 다행스러우며, 여러 장수들의 공을 지극히 가상하게 여긴다. 난이 평정된 후에는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한 일이니, 백성과 고을을 회복시키는 정사와 공을 논하여 상을 시행하는 조처에 조금도 빈틈이 없어야만 서쪽 백성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 묘당으로 하여금 감사와 수신에게 신칙해서 방안을 강구하여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적을 평정한 데 대한 진하를 인정전에서 거행하고, 중외에 교지를 반포하였다.
○ 5월. 시임촹원임 대신을 불러 보았다. 이시수(李時秀) 등이 아뢰기를,
"미리 저위(儲位)를 세우는 것은 역대(歷代)에서 급선무로 삼았던 일입니다. 원자께서 점차 자라시어 군주로서의 자질이 일찍이 이루어졌으니, 지금 저위를 정하는 것은 실로 예전(禮典)에 합당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들어가서 자전과 자궁에게 고하였다. 하교하기를,
"원자가 점차 장성하고 있으니 왕세자로 책봉할 길일을 택해 들이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책봉 때는 도감을 설치하는 것이 규례이다. 그러나 절대로 크게 벌이지 말라."
하였다.
○ 정축일(6일)에 순무 중군 유효원(柳孝源)의 군사가 돌아왔다. 순무사, 병조 판서, 각 영의 대장에게 명하여 맞이하여 위로하고 호궤한 다음에 교장(敎場)으로 가서 적의 수급(首級)을 두루 살펴보도록 하였다. 또 승지를 보내어 출정한 장사들에게 내호궤(內?饋)를 베풀었다. 순무사 및 중군을 불러 보았다. 상이 유효원에게 묻기를,
"군병 가운데 다친 사람은 많지 않은가?"
하니, 유효원이 아뢰기를,
"다친 사람이 조금 있기는 하지만 원총(元摠)에 비해 보면 그다지 줄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전 장령 한호운(韓浩運)은 정주인(定州人)인데, 서울에 있다가 서쪽으로 내려가서 곧바로 성문 밖에 이르러서는 역순(逆順)의 뜻으로 적을 타일렀다. 적이 성안으로 끌고 들어가서 협박하여 항복시키려 하였는데, 한호운이 노하여 적을 꾸짖으니, 적이 마침내 목을 베었다. 정주의 사인(士人) 백경한(白慶翰)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을 맞이하려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는데, 적이 혹독한 형벌을 마구 가하였으나 백경한이 크게 욕하면서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들 모두에게 아경(亞卿)을 증직하고 정려하고 아들을 녹용하였다. 안주인(安州人) 임지환(林之煥)은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의 후손이다. 자원하여 싸움에 나가서 비밀 격서를 가지고 군사를 모집하였는데, 용천(龍川)촹의주(義州)로 몰래 갔다가 적에게 붙잡혔다. 임지환이 큰 소리로 꾸짖기를,
"나는 충신의 후손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로 굴복할 수 없다."
하자, 적이 목을 베게 하였다. 임지환은 위로 하늘의 해를 바라보아야 한다면서 드러누운 채로 발길질을 하고 끊임없이 욕을 하였고, 상처를 입고도 한층 더 노기를 띠었다. 일이 보고되자 하교하기를,
"죽음이 눈앞에 있는데도 굴복하지 않았으니, 그 늠름한 기상은 적의 간담을 놀라게 하고 보고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였다. 처음에 병조 참의를 증직하였다가 또 마을에 정문을 세우고 그 가족을 돌보아주고 제사를 지내주었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종2품 직책을 가증(加贈)하라고 명하였다.
○ 6월. 처음에 상이 녹훈(錄勳)을 명하였을 때 이요헌(李堯憲)을 원훈(元勳)으로 삼았는데, 이요헌이 전쟁터에서 싸운 공로가 없다는 이유로 극력 사양하였다. 상이 곧이어 녹훈의 명을 취소하고 묘당으로 하여금 논상
○ 하교하기를,
"난리가 처음 일어난 것이 비록 내 부덕함의 소치였지만, 감사와 수령들이 만약 성의를 다해서 백성을 사랑하였다면 흉악한 괴수가 어떻게 생업을 즐거워하는 평민들을 선동하였겠는가. 풍속의 사치와 수령의 탐람은 어느 때건 징계하여 그치게 해야 하는 것이지만, 지금 큰 난리가 막 평정된 날에 백성들의 생업을 회복하는 일이 전적으로 여기에 달려 있으니, 더욱더 두렵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 무당, 점쟁이, 잡술(雜術) 등 민속을 그르치는 부류들도 아울러 일체 금단해야 하겠다. 백골징포(白骨徵布)와 황구충정(黃口充丁)은 너무나도 불쌍하고 가련한 일로서 위로 하늘의 화기(和氣)를 침범하기에 충분한 것이니, 아울러 팔도의 감사, 수신, 수령에게 거듭 신칙하라.
이번에 순절한 사람의 자손의 나이와 거주지를 자세히 조사해서 책자로 만들어 올려보내어 참고할 수 있게 하라. 순절한 사람의 자손과 관서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문관은 승문원에 분관(分館)하고 무관은 선천(宣薦)으로 통융(通融)할 것이며, 청족(淸族)으로서 재능과 행실이 택하여 쓸 만한 사람도 이와 같이 하는 것을 영원히 규정으로 삼으라. 경향의 장교와 군졸로서 수고한 자도 모두 공로를 갚는 차원에서 수용해야 하겠으니, 망단(望單)에다 실적을 주(註) 달아서 들이도록 하라.
오늘날 국가의 일은 참으로 이른바 '기근에다가 병력의 출동까지 겹쳤다. '는 것이다. 국가의 경비가 고갈되어 실로 절약해서 써야 할 때이니, 일을 담당한 신하는 일상적으로 쓰는 물품의 공급을 중대하다고 해서 구애되지 말고 체계적으로 줄이도록 하라.
난이 평정된 이후에는 민생의 근심이 난이 평정되기 전보다 더 심한 법이니, 매번 생각이 미치면 좋은 옷과 맛있는 음식도 달갑지가 않다. 지금 이렇게 누누이 하교하는 것은 바로 지난날을 거울삼아 앞으로 삼가기 위한 나의 대강령(大綱領)이다."
하였다.
○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서쪽 지방 사람들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관장(官長)을 위해 죽을 줄 알게된 것은 바로 청남(淸南)촹청북(淸北) 의사(義士)들의 공이고, 의사들이 이렇게 의로운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임진년에 네 충신이 창도한 때문이었습니다. 선정신 조조헌(趙憲),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촹김천일(金千鎰)촹곽재우(郭再祐)의 영령을 봉안한 곳에 향을 내려 사제(賜祭)하고 그 후손을 녹용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충청 병사 김현신(金見臣)을 불러 보았다. 상이 그의 나이를 묻고, 또 노모(老母)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하교하기를,
"그대가 국가를 위해 큰 공을 세운 것을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특별히 그대를 곤외(?外)의 직임에 제수하였으니, 가서 반드시 직무를 잘 수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견신이 물러간 뒤에 또 하교하기를,
"나라가 어려운 때에 신하가 힘을 바치는 것은 고금의 병이(秉?)이다. 그러나 실로 충성과 용기가 아니었다면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고, 전결과 노비 및 의물(衣物)을 하사하였다.
○ 윤대(輪對) 관원을 불러 보았다. 한성부 낭관이 민간의 사치 폐단에 대해서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치 풍조를 금하는 것은 바로 조종조의 법제(法制)이니, 지금 비록 별도로 신칙하더라도 어찌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상하가 각자 준수하여 감히 어기지 말고, 범하는 자는 법관이 그 법으로써 처리하라."
○ 도목정사를 행하였다. 전관(銓官)에게 하교하기를,
"탐람한 풍조를 징계하고 백성들의 고충을 돌보아주는 것은 난리를 평정한 후의 중대한 새 정사이다. 지금부터 장오죄를 범한 것으로 암행어사나 감사의 논핵을 받아 파직된 자는 일체 수령 직임에 의망하지 말라."
하였다.
○ 7월. 인정전에 나아가 왕세자를 책봉하였다. 백관의 진하를 받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하교하기를,
"좋은 날 좋은 시각에 세자 책봉의 예가 이루어졌으니, 이는 황천과 조종이 돈독히 보우하여 나라에 경사를 쌓아주신 것이다. 위로는 자전과 자궁께 기쁨을 드리고 아래로는 신민들의 기뻐하는 마음에 답하였다. 더구나 모든 의식 절차를 기묘년(영조 35, 1759)과 경신년(정조 24, 1800)의 전례에 따랐으니, 나 소자의 미치지 못할 슬픔은 경신년 책봉 때 내리셨던 성교(聖敎)와 같다. 여러 도의 묵은 환자곡 10만 곡, 공인(貢人)의 유재(遺在) 1만 곡, 시민(市民)의 요역(?役) 2개월, 반인(泮人)의 요역 30일치를 탕감하고, 기사년 이후로 흉년을 만나 정퇴(停退)한 여러 도의 군포와 돈을 수를 나누어 견감(?減)할 것이며, 결전(結錢), 승역(僧役), 세전(稅錢), 공전(貢錢)을 일체 적절히 감면하라. 이는 바로 나 소자가 큰 경사를 우러러 계술하여 감히 그때보다 더 많지 않게 하려는 뜻이다."
하였다.
○ 사폐(辭陛)하는 수령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의당 불러 보아야겠으나 비가 쏟아져서 하지 못하겠다. 각자 내려간 후에 마음을 다해 공무를 수행하여 직분을 다하도록 힘쓰라는 뜻으로 정원에서 일일이 타이르라."
하였다.
○ 대신을 보내어 영희전(永禧殿)의 작헌례(酌獻禮)를 대리로 행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성조(聖祖)께서 창업하여 왕의에 오르신 지 여덟 번째 회갑이 되는 때이다. 창업을 도운 여러 훈신(勳臣)들을 제사지내지 않을 수 없으니, 개국 일등 공신(開國一等功臣) 여러 사람에 대해서, 해조로 하여금 그 사판(祠版)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관원을 보내 치제하도록 함으로써 이 날을 맞은 큰 감회를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주청 정사(奏請正使) 이시수(李時秀)가 사폐하였으므로 상이 불러 보았다. 이시수가 성체(聖體)를 보호하고 유신들을 자주 접하라는 내용으로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왕세자를 가르치는 방도는 전적으로 성상께서 몸소 가르치시는 데 달려 있습니다. 거처하시는 때에 온갖 일을 검약한 쪽으로 따르시는 것도 바르게 기르는 방도가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8월, 주강하였다.《시경》갈담편(葛覃篇)을 진강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갈담은 바로 후비(后妃)가 직접 여자의 일을 하는 내용이다. 어떻게 하면 후세에서 검약을 숭상하는 풍속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하니, 옥당 정원용(鄭元容)이 아뢰기를,
"이것은 임금이 어떻게 솔선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갈담의 아름다움 또한 문왕(文王)의 교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 중신(重臣) 이면응(李冕膺)촹이면긍(李勉兢)촹한만유(韓晩裕)가 졸서(卒逝)하였다. 하교하기를,
"한 달 사이에 중신 세 사람이 연달아 졸서하여 조정의 위에 노성(老成)한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으니,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듯이 내 마음이 허전하다. 나의 이런 마음으로 볼 때 노인을 우대하는 법에 의당 특별한 예가 있어야 하겠다. 대신촹경재(卿宰) 가운데 70세 이상 된 사람에게 의관(醫官)을 보내어 질병이 있는지 없는
하였다. 의관이 서계(書啓)함에 미쳐서 병이 있는 사람에게는 내국으로 하여금 약물을 지급하게 하고, 그 밖에는 호조로 하여금 찬물(饌物)을 하사하게 하였다.
○ 9월. 대신이 관서 백성의 실정을 연석에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서쪽 지방 백성들을 걱정하는 마음을 밤낮으로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있는 판에 어찌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는가. 의당 윤음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관서에서 환자곡을 받은 백성들이 병란(兵亂)에다가 기근과 전염병까지 겪었으니, 불쌍한 저 사망자는 논하지 않더라도 살아남은 이 백성들에게 어찌 차마 이웃과 친척의 몫까지 바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는가. 절호(絶戶)가 받은 신구(新舊) 환자곡을 모두 탕감함으로써 관서의 산 백성과 죽은 백성 모두가 조정의 혜택을 입게 하라."
하였다.
○ 관서 감사가 적을 추종한 죄인들을 조사해서 아뢰었다. 상이, 고문으로 인해서 억울하게 걸려드는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묘당에 하교하여 재차 심리하도록 신칙하였고, 곧이어 감사가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소민(小民)은 무지하므로 그들이 순종하고 거역하는 것은 모두 위에서 이끄는 데로 따르는 것일 뿐이다. 어찌 지난번 협박에 못이겨서 추종한 부류들을 사람마다 충의(忠義)로써 꾸짖어 귀양보내고 죽일 수 있겠는가. 감사는 당 헌종(唐憲宗)이 채주(蔡州) 사람들을 용서해주고 송 태조(宋太祖)가 강남(江南) 사람을 용서해준 뜻만을 따라서 신중히 심리하는 도리로써 소결하라. 만일 이 명을 어긴다면 후세에 나를 어떤 임금으로 평가 받게 하는 것이겠는가. 감사가 직접 죄수의 문건을 가지고 속히 소결하여 풀어주도록 하라."
하였다.
○ 암행어사를 나누어 보내어 호남, 영남, 해서, 관서, 북관을 살펴보게 하였다.
○ 관서 백성으로서 유망(流亡)하여 각도에 흩어진 자들을, 곡식이 지급하여 본토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 상이 장차 건릉(健陵)에 행행하고자 하여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대신이 조용히 조섭하시던 중이라고 하면서 상차하여 취소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려 윤허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이해를 만난 소자의 정리(情理)로 볼 때 어찌 전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다가 자전과 자궁이 간절히 청하면서 함껏 만류함으로 인해서 마침내 취소하고, 22일에 선원전(璿源殿)에서 작헌례를 직접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을 맞고 보니 소자의 그리워하는 마음이 갈수록 더욱 미치지 못하겠다. 처음에는 선침(仙寢)에 배알하여 조금이라도 정리를 펴자고 하였으나 일의 형세에 구애되어 예를 행하지 못하였다. 멀리 능침을 바라보면 아프고 서운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하고, 화성 유수에게 명하기를,
"진남루(鎭南樓) 앞뜰에 사민(四民)을 모아 쌀을 하사하고, 61세가 된 사람에게는 쌀과 포를 지급하라. 경내의 유생과 무사들을 별시의 규례대로 시장(試場)을 설치하여 시취하고, 수석한 사람은 사제(賜第)하라. 본부 시민(市民)의 요역을 1개월간 감면하라."
하였다.
○ 한성부에 명하여 조관(朝官)으로서 61세가 된 사람을 뽑아 아뢰게 하고, 경재(卿宰)에게는 한성부 낭관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일찍이 정종조에 시종신과 선전관을 지낸 자는 가자하고, 그 밖에 문관촹무관촹음관은 모두 해조로 하여금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 관서의 어세(漁稅)촹염세(鹽稅)촹선세(船稅)의 4분의 1을 감면하고 봉진마(封進馬)를 면제 하도록 명하였다.
○ 10월.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는데, 흉년이 들었다 하여 모든 책응(策應)을 힘써 절약하
○ 인정전에서 하례를 행하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는데, 혜경궁의 환우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연래로 경사를 만나 작질을 올려주는 것이 너무 중첩되고 빨랐습니다.
그리하여 열흘 사이에 삼사로부터 곧바로 아경(亞卿)에 이른 자가 있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작상(爵賞)을 신중히 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 용산방(龍山坊)의 민가에 불이 났으므로 선전관에게 명하여 가서 살펴보고 위무하게 하였다.
○ 11월. 뇌변이 있었다. 반찬 수를 줄이고 바른말을 구하였다. 대신 김재찬 등이 연명으로 상차하였는데, 그 대략에,
"우리 전하께서 명철하신 자질로 어렵고 큰 사업을 이어받아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구휼하는 데에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니, 이는 바로 크게 해볼 만한 때입니다. 그런데 유독 일을 처리하는 때에는 관용을 주로 하고 정령을 낼 때에는 용단이 크게 부족하니, 이 어찌 선정(先正)이 이른바, '지극한 다스림을 이르게 할 기미가 보이는데도 머뭇대면서 나아가지 않는다. '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 가지 교화의 근원에 한 번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나라의 터전을 공고히 하는 것이 전적으로 이로부터 말미암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 소자가 상제(上帝)를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실로 하늘이 자상하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나의 부덕함으로 인해서 전에 없던 재변을 해마다 거듭 만나게 되었다. 경들이 정성스럽게 한 말은 깊이 생각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들도 대양하는 데 더욱 힘을 써야 할 것이니, 이것이 또 내가 밤낮으로 바라는 것이다."
하였다.
○ 홍문관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어제 강연(講筵)을 열었다가 오늘 강연을 정지하는 것은 재변을 만나 수성(修省)하는 뜻이 아닙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마침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미처 불러서 만나지 못한 것이다. 며칠 기다려서 강연을 열겠다."
하였다.
○ 대신이 아뢰기를,
"내년 계유년은 왕대비의 보갑(寶甲)이 거듭 돌아오는 해입니다. 하례 의식을 거행하고 풍정(?呈)을 올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전께 우러러 여쭙겠다."
하였다. 그리고 나서 하교하기를,
"소자가 안에서 누누이 우러러 진달드렸으나 자전께서 강경하게 거절하고 들어주지 않으시니, 뜻을 봉양하는 소자의 정성으로 보면 받들 수밖에 없겠다. 또 흉년으로 기근이 든 것 때문에 자전께서 더욱 완강히 거절하시니, 마음은 섭섭하지만 진찬(進饌)은 그만두고 하례 의식만을 거행하여 경축하는 정성을 펴도록 하라."
하였다.
○ 12월. 삼남(三南), 양서(兩西), 관동(關東), 심도(沁都)에 기근이 들었다. 호서에 곡식 8000곡, 호남에 3만 5000곡, 영남에 9만 곡, 관서에 2만 6000곡, 해서에 1만 곡과 돈 1만 5000민, 관동에 7000곡, 심도에 1200곡을 지급하여 진휼하였다.
79권 순조조 4
13년(계유, 1813)
○ 1월. 인정전에 나아가 왕대비전에 진하하였다. 이어 전에 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61세가 되는 조신(朝臣)으로서 문신 시종, 음직 목사, 무신 변어(邊禦) 이상을 가자하고, 그 밖에는 음식물을 하사하였다.
○ 4월. 왕세자의 사부(師傅)와 빈객(賓客)에 대한 상견례를 행하고 서연(書筵) 을 열었다. 상이 대신을 불러 보았다. 김재찬(金載瓚)촹한용귀(韓用龜) 등이, 몸소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가르치고 궁료(宮僚)를 신중히 택하라는 내용으로 진달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김재찬이 이어 열성조에서 일찍 깨우치게 했던 방도를 진달하고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하교를 기다려서 서연을 열도록 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날마다 삼강(三講)을 할 필요는 없더라도 하루에 한 번 강연을 여는 것을 상례로 삼고, 강연 이외에 입직한 춘방과 계방을 자주 불러서 날마다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 말을 옳게 여겨, 날마다 서연을 행하고 자주 궁료를 접하도록 명하였다.
○ 자작(自作)촹어면(魚面)촹강구(江口)촹신방(新方)촹묘파(廟坡)의 5개 진(鎭)을 혁파하고 별해(別害)를 독진(獨鎭)으로 삼았다. 5개 진과 별해가 본래 삼수부(三水府)에 속해 있었는데, 후주(厚州)에 진을 설치함에 미쳐서는 5개 진이 후주의 내지(內地)에 있으면서도 관방(關防)에 무익하였기 때문이었다.
○ 하교하기를,
"이 달 19일은 서적(西賊)을 평정한 날이다. 작년에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에게 지방관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라. 군공(軍功)이 있는 자를 수용하라고 신칙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것은 의분(義憤)으로 떨치고 일어난 공로를 생각해서였다. 양전(兩銓) 으로 하여금 자리가 나는 대로 녹용하게 하라."
하였다. 또 허항(許沆)의 가족에게 다달이 쌀과 면포를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 양정재(養正齋)를 수리하고 수호(守護)하는 일에 대해 신칙하였다. 양정재는 바로 고 재신 조희일(趙希逸)의 사제(私第)로서 인원왕후(仁元王后)가 탄생한 곳이다. 영종이 일찍이 행행하고 정종이 어가를 수행하여 나아갔으며, 문미(門楣)에는 정종의 어필이 게시되어 있다.
○ 5월.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경기의 농사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 6월. 원주(原州) 백성 중에 아버지를 대신해서 거짓으로 살인했다고 자복한 자가 있었다. 가두어 놓고 추궁한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 그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감사가 실상을 알아내어 보고하였다. 상이 용서하라고 명하고서 이르기를,
"아버지 대신 자복하여 한 번 말한 것을 바꾸지 않았으니, 그 참된 효성은 풍교(風敎)를 수립하기에 충분하다."
하였다.
○ 전주부(全州府)에 남고산성(南固山城)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고 별장을 두었다. 성은 만마곡(萬馬谷)에 있는데, 남로(南路)의 요충지에 해당되고 전주의 요해처가 되는 곳이다. 감사 이상황(李相璜)이 계획하고 쌓기 시작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 하교하기를,
"이달을 맞이하고 보니 간절한 그리움을 억제하기 어렵다. 선대왕의 어제(御製)를 경신년 이후에 즉시 받들어 인쇄했어야 함에도 지금까지 미처 하지 못했으니, 사체(事體)와 정리(情理)에 모두 부족함이 있다 하겠다. 내각은 날을 택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이어 내탕고의 저축을 내려주어 책을 간행하는 비용으로 쓰게 하였는데, 국가의 경비를 축내지 않으
○ 청성위(靑城尉) 심능건(沈能建)을 보내어 육상궁(毓祥宮)의 작헌례를 대리로 행하게 하였는데, 봉원(封園)한 구갑(舊甲)의 해와 달이기 때문이었다.
○ 9월. 문임(文任)에게 명하여 정주(定州)에서 전사한 장사(將士)의 기적비문(紀蹟碑文)을 짓게 하고, 평양(平壤)의 민충단(愍忠壇), 동래(東萊)의 의사총(義士塚)의 예에 따라서 비 옆에 단을 세우게 하였다. 매년 성을 격파한 날에 제사를 설행하여 영령을 위로하는 것을 상례로 삼게 하였다.
○ 해골을 묻어주는 정사에 대해서 관서에 신칙하였다.
○ 10월. 고 순무 중군 유효원(柳孝源)에게 정경의 직책을 중직하였는데, 영의정 김재찬(金載瓚)이 연석에서 아뢴 말을 따른 것이었다.
○ 11월. 뇌변이 있었다. 3일 동안 반찬 수를 줄이고 음악을 거두었다.
○ 하교하기를,
"자전의 보령이 회갑을 맞아 탄생하신 경사로운 날이 가까이 다가왔으니, 하루하루 가는 날을 아까워하고 산처럼 장수하기를 비는 나 소자의 마음을 어떻게 형용하겠는가. 대신이 진하(陳賀)와 진연(進宴)을 청하였는데, 이는 바로 우리 집안의 전례(典禮)인 동시에 나 소자가 정성을 펴고 기쁨을 빛내는 도리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전께서는 여러 지방에 거듭 흉년이 든 것을 생각하시고 누누이 완강하게 거절하셨다. 겸양하시는 지극한 덕과 백성을 걱정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이 자상하고도 간곡하시니, 뜻을 봉양하는 소자의 도리로 보면 받들어 따르는 것이 큰 일이고 기쁨을 빛내는 것은 도리어 작은 일이라 하겠다. 진연은 그만두고 안에서 음식상을 올려 보잘것없는 정성을 표시하겠다."
하고, 이어 진하할 때 각도의 방물(方物)과 물선(物膳)을 자전에게만 올리라고 명하였다.
○ 12월. 인정전에 나아가 왕대비전에 진하하였다. 이어 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제주 백성 중에 섬을 근거지로 하여 난을 일으키려고 몰래 모의한 자가 있었는데, 지방관이 그 괴수를 체포하여 아뢰었다. 하교하기를,
"난민(亂民)이 변란을 도모한 것에서 본연의 양심을 잃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전후의 장리(長吏)가 교화를 밝히고 노고를 위로하였다면 사람들은 윗사람을 친히 하고 관장(官長)을 위하는 의리를 알고 고을에는 가혹하게 긁어모으는 정사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이런 변괴가 일어나기까지 했겠는가. 첫째도 조정의 잘못이고 둘째도 조정의 잘못이니, 어찌 어리석고 미련스러운 난민들만 처벌하겠는가. 한편으로는 다스리고 한편으로는 품어 보호해 주어야겠다. 협박을 받아 따른 무리는 모두 개과천선하게 하고, 평민들에 대해서는 그 질고를 살펴서 위엄과 은혜가 어긋나지 않고 병행되게 하라. 그래야만 탐라 한 지방이 위태로움을 벗어나서 안정을 되찾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찰리사(察理使) 이재수(李在秀)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위유하게 하고, 유생과 무사를 시취하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과 행실이 탁월한 사람을 찾아내게 하였다.
○ 경기촹호서촹영남촹관동촹관북에 기근이 들었다. 윤음을 내려 위유하고, 경기에 곡식 3000곡, 강화에 1200곡, 호남에 1만 곡, 영남에 2만 3000곡, 관동에 1만 6600곡, 관북에 3만 5000곡을 내려 진휼하였다.
14년(갑술, 1814)
○ 1월. 인정전에 나아가 혜경궁에 진하하였다. 이어 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이는 자궁의 보령이 팔순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 선원전에 나아가 작헌례를 행하였는데, 영종이 탄생한 두 번째 회갑년이기 때문이었다.
○ 4월.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고 상신 민정중(閔鼎重)촹민진원(閔鎭遠)의 사판(祠版)에 치제하였는데, 인현왕후(仁顯王后)가 복위(復位)한 지 두 번째 회갑이 되는
○ 5월. 날씨가 가물었다. 경외 감옥의 죄수를 심리하라고 명하였다.
○ 6월. 충헌공(忠獻公) 박재원(朴在源)의 사판에 사제(賜祭)하였다.
○ 내각이 정종의 어제(御製) 《홍재전서(弘齋全書)》100권을 인쇄해 올렸다. 또 시문(詩文) 각 편을 열성의 어제에 합편한 것이 22책이었으며, 또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예제(睿製) 3책을 받들어 인쇄하였다. 이를 봉모당(奉謨堂), 주합루(宙合樓), 경모궁의 망묘루(望廟樓), 화령전(華寧殿), 문헌각(文獻閣), 다섯 곳의 사고(史庫), 외규장각(外奎章閣)에 보관하였으며, 교정하고 감인(監印)한 신하들에게 차등 있게 상을 베풀었다.
○ 7월. 여러 지방의 농사가 재해를 입었으므로 미리 대비하는 정사를 강구하였다. 경외에 저축된 돈을 내어 호조와 선혜청으로 하여금 양서(兩西)의 곡식 10만 곡을 사게 하고, 또 북관의 교제곡(交濟穀)과 관동 각 고을의 곡식을 미리 준비하였다가 봄이 되면 배로 운송하게 하였다. 이것은 영의정 김재찬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8월. 영남의 여러 고을에 큰물이 졌다. 상이 교지를 내려 감면하고 구휼하게 하였으며, 윤음을 내리고 승지 서춘보(徐春輔)를 보내어 재해 입은 백성들을 위유하게 하였다.
○ 12월. 도성의 가난한 백성을 뽑아서 발매(發賣)하도록 명하였다. 또 돌아다니면서 구걸하는 자들을 뽑아 죽을 쑤어 먹이되 달별로 차례를 배정하는 것으로 규정을 삼고, 질병에 걸린 자는 구료하고 죽은 자는 거두어 묻어 주도록 명하였다.
○ 경기와 삼남에 큰 흉년이 들고 관동과 관북에도 기근이 들었다. 경기에 곡식 3만 3000곡, 수원에 4200곡, 강화에 2000곡, 광주에 1800곡, 호서에 4만 8000곡, 호남에 7만 곡과 돈 7만 민, 영남에 25만 곡과 돈 6만 민, 관동에 7400곡, 관북에 5700곡을 지급하여 진휼하였다. 영남과 호남의 삼명일(三名日)의 방물과 물선, 절선(節扇), 갑주(甲?)를 정봉(停封)하여 진휼에 보태도록 명하였다. 윤음을 내려 여러 도의 기민을 위유하고, 내탕고의 은자(銀子) 5000냥, 단목(丹木) 8000근, 호초(胡椒) 500두를 내려 여러 도에 고루 나누어 주었다.
○ 도목정사를 하였다. 청북(淸北) 칠의사(七義士)의 후손을 찾아서 수용하도록 명하였다.
○ 상의 기후가 9월부터 편치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회복되었다.
15년(을해, 1815)
○ 1월. 인정전에서 하례를 행하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는데, 혜경궁의 보령이 구순을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상의 기후가 회복된 데 대한 진하를 인정전에서 거행하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불러 보았다. 영의정 김재찬이 아뢰기를,
"오늘 빈대는 바로 성상의 환후가 속히 회복되신 후에 처음 보시는 정사입니다. 봄추위가 아직 매서우니 의당 조심해서 조섭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매달 여섯 번의 빈대(賓對)와 하루 세 번의 강연은 비록 규례대로 하지 못하더라도 반드시 편전과 침실 안에서 자주 대소 신하들을 접하시어 군국의 계책을 물어보시고 때로 유신들을 불러 경사(經史)를 강독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치법(治法)과 정책에 보탬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김재찬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강학(講學)을 몇 달 동안 중지하고 있습니다. 더욱 힘쓰도록 권면하시고, 산림(山林)의 숙덕(宿德)을 돈소(敦召)하여 서연에 출입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도성의 거지 가운데 외방에서 온 자들은 차원(差員)을 정하여 원적지(原籍地)에 인수시키고, 원래 서울에 살던 자에게는 진휼청에서 매일 마른 양식을 지급하다가 보리가 익으면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 3월. 춘궁(春宮)의 서연은 재계일을 만날 경우 소대(召對)로 하되 빈객이 법강(法講)의 규례에 따라 들어가 참석하고, 능묘(陵廟)를 수개(修改)하는 날을 만나면 수개의 시각을 넘겨서 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영종과 정종의 성교(聖敎)를 준행한 것이었다.
○ 배에 실어서 남쪽으로 운반하던 관동과 관북의 곡식 2만여 곡이 전복되었다. 상이 크게 놀라, 영남 순영과 고을에 있는 은(銀)촹전(錢)촹포(布) 및 경사에 바칠 전촹포를 가지고 곡식을 사서 그 수를 충당하게 하였다. 이어 두 도의 선격(船格)에 대해서는 죽었건 살았건 따지지 말고 바쳐야 할 어세(漁稅)촹염세(鹽稅)를 모두 탕감하라고 명하였다.
○ 5월.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별도로 여제(?祭)를 설행하도록 명하고, 도성의 병든 백성은 활인서와 혜민서로 하여금 구료하게 하였다.
○ 오랫동안 날씨가 가물었다. 의금부와 형조의 도류안(徒流案) 및 포도청의 문안을 들이라고 명하고, 역옥(逆獄)과 사학(邪學)에 관련된 자 이외의 유배 죄인들을 모두 풀어 보냈다. 또 형조 관원에게 명하여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 광릉(光陵) 능 위의 사초(莎草)에 불이 났다. 대신과 예조 당상을 보내어 봉심하였으며, 사흘 동안 변복(變服)하고 정전(正殿)을 피하고 반찬수를 줄이고 음악을 거두었다.
○ 사관을 나누어 보내어 사교(四郊)의 강수량과 농사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 10월. 인정전에서 하례를 행하고 종묘에 고하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는데, 혜경궁의 환후가 회복되었기 때문이었다.
○ 대신을 보내어 영희전(永禧殿)의 작헌례를 대리로 행하게 하였는데, 태조가 탄생한 구갑의 해와 달이기 때문이었다.
○ 12월. 혜경궁이 별세하여 복제(服制)를 대공(大功)으로 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및 《상례보편(喪禮補編)》에는 각 전궁(殿宮)의 복제에 대해 근거할 만한 글이 없으니, 이는 국조(國朝)에서 처음 있는 변례(變禮)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유현(儒賢), 관각 당상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다. 영의정 김재찬은 의논드리기를,
"한 선제(漢宣帝)가 도원(悼園)에 대한 예(禮)를 정한 것을 두고 정자(程子)가 논단하기를, '남의 양자가 된 자는 자신을 낳아준 분을 백숙부모(伯叔父母)로 불러야 한다. 그러나 낳아준 의리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크니, 비록 정통(正統)에 전적으로 의미를 두어야겠지만 어떻게 사은(私恩)을 모두 끊어버릴 수야 있겠는가. 복제를 강등하고 통서(統緖)를 바로잡으면서도 모두 재최부장기(齊衰不杖朞)로 하여 구별한 것은 다른 백숙부모와 같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 하였습니다. 주자(朱子)가 이것을 정사(正史)에 특별히 써서 후세에 분명한 가르침을 남겼으니, 이는 방례(邦禮)와 사례(私禮)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인조조(仁祖朝)에 계운궁(啓運宮)의 복제를 조정 신하들에게 내려 논의하게 하였을 때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이 말하기를, '백숙부모라고 부르고 부장기(不杖朞)의 복을 입어야 한다, '고 하였는데, 성조(聖祖)께서 이를 즉시 따르셨습니다. 본생 부모에 대한 복이 이와 같다면 본생 조부모에 대한 복은 이에 비추어서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시수(李時秀)는 의논드리기를,
"예전에 우리 선조(先朝)께서 처음 즉위하셨을 때 근본을 둘로 할 수 없다는 윤음을 특별히 내리시고 궁원(宮園)의 축식(祝式)을 정숙자(程叔子)의 정론대로 따랐습니다. 대개 통서에 엄하면서도 혐의를 분별하여 깊은 뜻을 밝히기로는 정자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정자의 논에 이르기를, '남의 양자가 된 자는 자신을 낳아주신 분을 백숙부모라 부르고 자최부장기의 복을 입는다. ' 하였으니, 이는《의례(儀禮)》의 '남의 양자가 된 자는 본생 부모를 위하여 보복(報服)한다. '는 것을 가리킨 말입니다. 《의례》에 실려 있는 것은 비록 사례(士禮)이지만 정자의 논의는 바로 방례입니다. 이번의 상례가 만약 선조께서 재위하시던 때에 있었다면 또한 틀림없이 정자의 정론을 그대로 따랐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복제에 대해서는 변경할 수 없는 예(禮)가 있는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 한용귀(韓用龜), 우의정 김사목(金思穆), 오은군(鰲恩君) 이경일(李敬一), 내각 제학 서영보(徐榮
"본생에 비추어 복제를 강등하는 것은 상하가 마찬가지이다. 비록 예에는 없더라도 오늘의 망극한 정리와 지난날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보면 의당 뜻을 드러내어 복제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정자와 주자의 정론이 있고 대신과 관각(館閣)의 뜻이 또 이와 같으니, 본생 부모의 복제에 비추어 강등시키는 것으로 마련하라."
하였다.
○ 은 3만 냥을 안에서 내렸다. 총호사(摠護使)에게 하유하기를,
"예전에 거룩한 효성으로 갑자년(순조 4, 1804)의 경비에 쓰기 위하여 비축해 두셨던 것이다. 이 은을 오늘의 대사(大事)에 쓰는 것은 실로 다 펴지 못한 성심(聖心)을 드러내어 계술하는 것이다."
하였다.
○ 대신과 예조 당상에게 전교하기를,
"내가 상복(喪服)을 입고 있는데 조정 신하가 화복(華服)을 입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위의 복제가 끝날 때까지 조정 신하들이 천담복(淺淡服)을 입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대신 이시수 등은 의논드리기를,
"상께서 시사(視事)할 때 상복(常服)을 입지 않으시는데 신하들이 공무를 볼 때 곧바로 길복(吉服)을 입는 것은 윗사람을 따른다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조정 신하들이 천담복을 입는 것은 복제와는 차이가 있으므로 예절에 장애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예조 판서 정상우(鄭尙愚)와 참판 윤노동(尹魯東)의 의논도 이와 같았으며, 참의 권비응(權丕應)은 의논드리기를,
"중전과 춘궁의 복제는 다섯 달과 세 달 후에 모두 길복을 입으며 나아가 뵐 때만 옥색(玉色)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옷을 받은 전궁(殿宮)도 다시 길복을 따르는데 옷을 받지 않은 조정 신하가 그대로 천담복을 입는다면 도리어 경중(輕重)이 맞지 않는다는 탄식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대신의 의논을 따랐다.
○ 암행어사를 나누어 보내어 삼남과 북관을 살피게 하였다.
16년(병자, 1816)
○ 1월. 예조가, 빈궁(殯宮) 졸곡(卒哭) 전의 태묘(太廟) 대향(大享) 때 제15실에 음악을 쓰는 것이 옳은지를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청하였다. 이시수(李時秀)등이 의논드리기를,
"신을 맞이하고 제수를 올리고 변두(?豆)를 거두고 신을 전송하는 때에 등가(登歌)와 헌가(軒架)를 으레 모두 각실에 합주(合奏)하면서 헌작(獻爵)할 때 당실(當室)에만 정지한다고 해서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사(郊祀)와 묘사(廟祀)에 있어서 이르게 하고 흠향하게 하는 데에는 음악이 중요하니,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제사를 지낸다면 음악을 써야만 하고, 음악을 쓴다면 또 당실에만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 내소상(內小喪)의 경우 공제(公除) 후에 여느 때와 같이 제사를 지낸다는 조항이 《상례보편(喪禮補編)》과 수교(受敎)에 실려 있는데, 영묘 신미년의 일은 바로 자부(子婦)의 상이었으니, 소상으로 인하여 대향을 정지하는 것이 성조(聖祖)의 마음에 두려웠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의 처지는 성조 신미년의 일과는 크게 다릅니다. 더구나 제15실을 아울러 제사지낼 때 희생을 바치고 음악을 연주한다면 반드시 성상의 마음에 두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인정(人情)에 온당하지 않으면 신의 도리에도 온당하지 않다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어쩔 수없이 대향을 정지해야 할 듯합니다. 15실의 제향을 정지하게 되면 각실의 제향도 아울러 정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졸곡 전에 15실에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온당하지 않지만《오례의》에 실려 있는 옛 법이다. 그러나 대신의 의논이 모두 이와 같으니 삼가 그대로 시행하라."
○ 곡식 1만 5000곡을 지급하여 영남의 5개 고을 기민을 진휼하였다.
○ 좌빈객 심상규(沈象奎)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3일 공제(公除) 후에 길복(吉服)으로 강연에 임하고 빈료가 천담복으로 입대(入對)하는 것은 윗사람을 따른다는 뜻에 한 당(堂)의 상하 모두가 위배되는 점이 있습니다.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시수는 의논드리기를,
"세자의 복제는 바로 석 달 동안 입는 시마복(?麻服)입니다. 비록 공제 후라 할지라도 평소 거처할 때나 강연에 임할 때 곧바로 순전한 길복을 입어서는 안 될 듯하니, 나아가 뵐 때만 천담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고, 영의정 김재찬은 의논드리기를,
"삼가 보건대, 전하께서는 편전(便殿)에서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실 때 베로 만든 포대(袍帶)로 연석에 임하시는데 유독 세자가 서연(書筵)에 나가 강연에 임할 때만 길복을 입는 것은 윗사람을 따르는 제도가 아닙니다."
하고, 좌의정 한용귀(韓用龜), 우위정 김사목(金思穆)의 의논도 이와 같으니, 상이 따랐다.
○ 3월. 헌경혜빈(獻敬惠嬪)을 현륭원(顯隆園)에 부장(?葬)하였다.
○ 8월. 상이 복제 때문에 헌가(軒架)와 고취(鼓吹)를 철거하였다. 예관(禮官)이 장고(掌故)에 근거하여 말하기를,
"제복(除服) 후에는 악기를 설치해 놓고 연주해야 하며, 혼궁(魂宮)에 행례하기 위하여 대궐을 나가고 들어올 때만 설치해 놓은 채 연주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니, 상이 부궁(?宮) 후까지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예조 당상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예(禮)에 있어서 중도를 얻지 못한다면 예를 잃는 것이 됩니다. 헌현(軒懸)을 부궁할 때까지 설치하지 않는 것은 예의 중도에 맞지 않은 듯합니다."
하고, 옥당도 연명으로 상차하여 간쟁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소상(小祥) 후에 이르러서 예조 판서가 또 등연하여 극력 청하자 그제서야 허락하였다.
○ 이에 앞서 예조 참판 김굉(金?)이 상소하기를,
"선정신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앞장서서 정학(正學)을 밝힌 덕분에 명유(名儒)와 석사(碩士)가 대대로 끊이지 않고 가르침을 펼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지역 사람들이 편파적이고 지나친 말에 동요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선대왕께서는 선정의 가르침에 크게 감동하여 특별히 사제(賜祭)를 명하셨습니다. 오늘날 영남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절개를 지킨 것은 모두 선왕께서 일으키셨던 교화 덕분이니, 지금 사학(邪學)의 옥사를 다스리는 때에 선조의 고사를 따르도록 하소서. 또 고 참의 이상정(李象靖)은 성리학을 연구하여 사문(斯文)을 홍기시켰으니, 별도로 특별한 은전을 베풀어 풍성(風聲)을 수립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러운 뜻의 비답을 내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때에 이르러 문순공의 사판(祠版)에 치제하고 이상정에게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 10월. 정주(定州) 유호(流戶)의 환자곡 5900곡을 탕감하였다.
○ 11월. 수원 유수 서영보(徐榮輔)가 임종을 앞두고 상소하여 원량(元良)을 보필하기를 청하였다. 아뢰기를,
"예전에 선왕들이 바르게 길러 성인(聖人)을 만들던 방법이 《보부전(保傅傳)》한 편에 상세히 실려 있습니다. 정자(程子)가 이른바 '현사(賢士)와 대부(大夫)를 접하는 때는 많고 환관과 궁첩을 접하는 때는 적다. '는 것이 바로 덕을 진취시키는 요결(要訣)입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절실하다는 말로 유시하였다.
17년(정축, 1817)
○ 2월. 종묘와 경모궁에 나아가 전배하였는데, 왕세자가 따라가서 묘알례(廟謁禮)를 행하였다.
○ 건릉(健陵)과 현륭원(顯隆園)에 나아가 직접 제사 지냈다. 본부의 유생과 무사들을 시취하고, 부로(父老)를 불러 보고 쌀을 하사하였다.
○ 3월. 왕세자가 문묘(文廟)에 나아가 알성(謁聖)하고 입학례(入學禮)를 행하였다.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교지를 반포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시수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우리 춘궁 저하께서 선성(先聖)에게 작헌하고 경(經)을 지니고 강석(講席)에 임하셨는데, 읍양(揖讓)하고 진퇴(進退)하는 때에 예의(禮儀)가 훌륭하였습니다. 수시로 힘쓰고 날로 새로워지는 공부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니, 방정(方正)하고 문학에 뛰어난 선비를 선발하여 날마다 강연을 열고, 외방에 있는 유신(儒臣)을 더욱 돈독히 불러들이소서. 사물을 대하여 가르치고 일에 앞서 미리 인도하는 것은 오직 전하께서 몸소 가르치는 데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7월. 삼남(三南)에 수재가 나서 떠내려간 집과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감사의 보고가 연달아 이르니, 감사에게 명하여 넉넉하게 구휼하게 하고, 수재 입은 민호(民戶)의 환자곡과 신포(身布)를 특별히 견감하였다.
○ 양양(襄陽) 공삼(貢蔘)의 절반을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18년(무인, 1818)
○ 2월. 개성(開城)에 있는 고려 왕릉들이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황폐해져서 경작하고 땔나무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가 하면 구역 안에 침범하여 장례 지내는 사람까지 있었다. 상이 듣고 하교하기를,
"전조(前朝)의 능침을 높이 받들던 열성조의 전례는 지극한 것이었다. 또 제왕의 능묘를 침범하여 장례 지내는 것은 양심상 할 수 없는 행위이다."
하고, 유수 및 경력(經歷)을 엄히 문책하고 그들을 파직하였다. 예관을 보내어 봉심하고, 예관이 3년에 한 번 봉심하는 규례를 거듭 밝혔다. 또 매년 가을에 경력이 두루 봉심한 후에 보고하게 하고, 고양(高陽) 등지의 고려 왕릉은 예조 낭관이 일체 봉심하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왕씨 자손 가운데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없으니, 해조에서 찾아내어 조용함으로써 왕씨를 잊지 못하는 조정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판돈녕부사 이만수(李晩秀)가 상소하여 궁료(宮僚)의 직함을 사임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경은 바로 옛날에 나를 가르친 사람이다. 그런데 또 원량을 보도하게 되었으니, 어찌 드문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 경외(京外)에 명하여 옥안(獄案)을 심리하게 하였다.
○ 6월. 시강원에 명하여 열성조의 《보감》및 지장(誌狀) 중에서 모훈(謨訓)과 요어(要語)를 뽑아서 춘궁의 예람(睿覽)에 대비하게 하고, 책이 완성되자 《모훈집요(謨訓輯要)》라고 이름 붙였다. 이는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9월. 경연관을 선발한 다음 서연관(書筵官)을 겸임시켜서 연영문(延英門)과 동룡문(銅龍門)의 강석에 출입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정부와 전조(銓曹)가 오희상(吳熙常)과 이우신(李友信)을 천거하였는데, 상이 하유하여 부르고 돈독히 신칙하였으나 오희상과 이우신 모두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르지 않았다. 상이 비답을 내려 반드시 초치하겠다는 뜻으로 유시하였다.
○ 10월. 판중추부사 한용귀(韓用龜)가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고 의주 부윤(義州府尹) 조흥진(趙興鎭)은 지난해 적변(賊變) 때 죽음을 맹세하고 성을 수비하였고 의사(義士)를 모집하여 적을 토벌하였으니, 포증(褒贈)의 은전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 11월. 우의정 남공철이 아뢰기를,
"성균관 대사성과 예조 참의는 통청(通淸)이 두 갈래로 나뉘어 집니다. 선조(先朝)의 성의(聖意)는 전적으로 문학과 정사에 대해 각각 장점을 취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속의 숭상이 옛날 같지 않아서 요직(要職)에 나가는 것을 영예로운 길로 여기기 때문에 대사성이 도리어 기피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옛 규례대로 경연관을 이조 참판의 계제로 삼고 대사성을 이조 참의의 계제로 삼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19년(기묘, 1819)
○ 2월. 왕세자의 관례(冠禮)를 경현당(景賢堂)에서 행하였다. 상이 숭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하교하기를,
"국가에 큰 경사가 있는데도 은혜가 백성에게 미치지 않는다면 누가 함께 기뻐하겠는가."
하고, 공계원(貢契員)과 시전(市廛) 상인 및 여러 도의 묵은 환자곡을 차등 있게 견감해주도록 명하였다.
○ 4월. 종묘, 선원전(璿源殿), 경모궁(景慕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왕세자가 따라가서 예를 행하였는데, 관례 후에 처음 전알하는 것이었다.
○ 윤4월. 이해는 바로 가순궁(嘉順宮)이 쉰 살이 되는 해였다. 처음에는 탄신일에 진하하라는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하교하기를,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기 때문에 간절한 정성을 펴고자 하였는데, 자궁께서 편치 않아 하시면서 누차 말씀을 하셨다. 겸양하시는 덕을 어찌 흠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억지로 행하는 것은 아름다운 덕을 드러내고 뜻을 따르는 도리가 아니니, 하례 의식을 권정례(權停禮)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 6월. 증 승지 양산숙(梁山璹)에게 정경(正卿)의 직책을 가증(加贈)하고 시호를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양산숙은 세상에서 일컫는 진주(晉州) 삼장사(三壯士) 중의 한 사람으로, 호남 어사 조만영(趙萬永)이 청한 것이었다.
○ 7월. 호서에 큰물이 져서 민가 2000여 호가 떠내려가거나 무너졌다. 승지 정원용(鄭元容)을 위유사로 삼아 공주(公州) 등 8개 고을의 재해 상황을 두루 살펴보게 하고, 별도로 조세를 견감하고 구휼하였다. 그 밖에 39개 고을과 진영은 비변사 낭관을 보내어 일체 위유하게 하였다. 이어 윤음을 내리고, 내탕고의 돈 1500민, 단목(丹木) 1000근, 백반(白礬) 200근을 내려 재해 입은 민호에게 나누어 주었다.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거두어 묻어준 후에 지방관으로 하여금 각별히 여단(?壇)에서 제사를 설행하게 하였다. 복명(復命)함에 미쳐서 상이 정원용을 불러 보고 여러 고을의 재해 정도에 대해 상세히 묻고, 이어 명하기를.
"재해 입은 고을의 환자곡과 군향(軍餉)을 수를 나누어 견감하고, 경사(京司)에 바칠 면포를 수를 나누어 돈으로 대신 상납하게 하며, 포구 백성의 어세(漁稅)와 염세(鹽稅)를 견감하라. 특별히 쌀 2000곡을 지급하여 재해 입은 백성에게 먹이고, 호남의 가을보리 2000곡을 옮겨서 때맞추어 파종하게 하라."
하였다.
○ 9월. 전조(前朝)의 직제학 김약시(金若時)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명하였는데, 자취를 감추고 절개를 지켰기 때문이었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반찬수를 줄이고 바른말을 구하였다. 대신이 연명으로 상차하여 권면하는 내용으로 진달하니, 답하기를,
"나 소자가 어리석고 부덕하여 하늘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신민의 마음을 위로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나마 경들의 보좌하는 힘 덕분으로 오늘날까지 유지해 왔는데, 지금 하늘이 위엄을 드러내어
하였다.
○ 조씨(趙氏)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숭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11월. 상이 종묘, 선원전, 경모궁에 나아가 전알하였는데, 왕세자와 세자빈이 따라가서 예를 행하였다.
○ 12월. 호남의 곡식 1만 곡을 호서로 옮겨 진휼 밑천을 삼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
20년(경진, 1820)
○ 4월. 집의 오희상(吳熙常)이 상소하여 예학(睿學)을 보도(輔導)하는 방책을 진달하니,
답하기를,
"지금 정대한 군자를 찾고자 한다면 그대처럼 시골에 있는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누구이겠으며, 직접 서연에 출입하면서 그 말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하였다.
○ 7월. 개천군(价川郡)에 큰물이 졌다. 직각 정기선(鄭基善)을 위유어사로 삼아 두터이 구휼하게 하였다. 또 본도에서 진공하는 녹용의 반을 정지하여 그 비용을 재해 입은 백성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 10월. 형조가 아뢰기를,
"허필(許珌)의 비부(婢夫)가 허필의 아비를 몰아세우며 욕보이다가 끝내 때려서 상처를 입히기까지 하자 허필이 막대기로 그 비부를 쳐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고공(雇工)을 때려 죽인 데 대한 율을 적용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비부가 손찌검한 것은 풍화(風化)에 관계되는 일이다. 허필이 막대기를 휘두른 것은 아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형추한 후에 풀어주라."
하였다.
○ 11월. 하교하기를,
"내년은 우리 자전께서 혼인한 지 60년이 되는 해이고 삼간택(三揀擇)한 지 회갑이 되는 해이니, 기뻐하고 경축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내후년의 경하는 감히 우러러 청하지 못할 점이 있으니, 내년 정월 상일(上日)에 혼인하신 지 60년이 되는 것으로써 진하하고 직접 표리(表裏)를 올리고 위에 고하고 아래에 선포하여 간절한 뜻을 펴고자 한다."
하였다.
21년(신사, 1821)
○ 1월. 상이 인정전에 나아가 치사(致詞)촹전문(箋文)촹표리(表裏)를 왕대비전에 올렸는데, 왕세자가 따라가서 예를 행하였다. 백관의 하례를 받고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 3월. 기미일(9일)에 왕대비 김씨가 승하하였다. 상이 슬퍼하고 그리워하기를 경신년과 같이 하였으며, 휘호를 의논하여 '예경자수(睿敬慈粹) '로 올리고, 시호를 '효의(孝懿)'라고 하였다. 예로 보면 의당 건릉(健陵)에 부장(?葬)해야 하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영돈녕부사 김조순(金祖淳)이 상소하였다. 대략 이르기를,
"신은 건릉의 자리와 관련하여 항상 근심과 두려움이 가슴에 맺혀 있습니다. 옛날 송 나라 주 문공(朱文公)이 영부릉(永阜陵)에 대해서 논의한 상소에, '의당 좋은 땅을 얻어서 장례 지내어 후손에게 영원히 무궁한 복을 내려주어야 합니다. '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장지(葬地)를 택할 때는 반드시 먼저 주세(主勢)가 강한지 약한지,
하니, 답하기를,
"대행대비께서 평소에 이 일을 크게 염려하셔서 누차 소자에게 하교하셨다. 지금 경의 소를 보게 되니 숨이 막히는 듯한 안타까움과 송구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즉시 대신(大臣)과 경재(卿宰)에게 의견을 물어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의견을 아룀에 미쳐서 하교하기를,
"뜰에 가득한 신하들의 의견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고, 연석에 올라 일제히 아뢰면서 모두 속히 결정하라고 청하니, 이것이 이른바 대동(大同)인 것이다. 천장하는 예를 이미 경건히 결정하였으니, 응당 행해야 할 모든 절차는 새 능의 자리가 잡히기를 기다려서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예조가 천릉 때의 거애(擧哀)와 성복(成服)등 절차를 대신에게 의논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천장하는 예는 왕조(王朝)에 이미 옛 제도가 없기 때문에 단지 사대부의 예를 끌어다 사용하고 있다. 일찍이 듣건대, 사대부 집안에서 이장할 때 옛 묘소를 파내는 날부터 개장하는 날까지가 3개월 이내이면 거애와 성복을 옛 묘소를 파내는 날에 거행하고, 만약 앞으로 수 개월 혹은 해를 넘겨서 비로소 개장하게 되면 단지 사유만을 고하고 무덤을 파고 거애와 성복은 관을 꺼내는 날에 하는 것이 바로 통행 되는 예라고 하였다. 사대부와 왕조는 실로 다를 것이 없다. 더구나 여러 논의가 이와 같으니, 지금부터 천장에 있어서 능을 여는 날부터 천장하는 날까지가 그다지 멀지 않으면 거애와 성복을 하고, 사이가 멀 경우에는 이번의 예를 쓰도록 할 일을 등록(謄錄)에 기록하라."
하였다.
○ 5월. 이에 앞서 청 나라에서 새로 편찬한 《통고(通考)》를 연경의 서점에서 사 온 사람이 있었는데, 거기에 기재된 본조 신축년의 네 대신의 일은 무함된 것으로서 사실이 아니었다. 행 호군 윤명렬(尹命烈)이 상소하기를,
"신축촹임인년의 화란을 차마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네 대신이 죽음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저위(儲位)를 세우는 큰 계책을 도와 이루지 않았더라면 400년 종묘 사직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 수 있었겠습니까. 저위를 처음 세웠던 때에 흉도(凶徒)들이 관망한 의도는 오로지 주청이 요행히도 비준되지 않아서 저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신이 이미 일을 마치게 되자 궁지에 몰린 도적은 계책이 다급해져서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서를 꾸며 내어 충현(忠賢)을 모두 죽이고 저위를 거의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죄를 교묘하게 꾸며 내어 한때의 무안(誣案)을 만들었으며, 역적 유봉휘(柳鳳輝)가 주본(奏本)을 짓고 역적 이명언(李明彦)이 사신으로 가서 반드시 천하에 전파하고 후세를 속이려 하였습니다.
영묘께서 즉위하신 후에 의리가 비로소 밝혀져 숨겨져 있던 억울함이 드러나자 무고하여 주문(奏聞)한 내용을 해명하여 바로잡자는 논의가 금새 조정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성조(聖祖)의 마음은 참는 것을 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냥 두고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성조께서 만약 오늘날 중국에 이와 같은 책이 있을 것을 예상하셨다면 어찌 그 사실을 해명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겠습니까.
의릉(懿陵)과 원릉(元陵) 두 조정이 왕위를 주고받은 밝은 의리는 마치 하늘에 떠 있는 해와도 같이 동방에 크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한 책에 잘못 기재된 것으로 인하여 만에 하나라도 천하 후세에 의혹을 남긴다
바라건대, 대신과 경재에게 물으신 후에 특별히 한 명의 사신을 달려 보내어 사정을 다 진달하고 고쳐 간행하기를 청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어제 경의 소를 본 후에 원서(原書)를 가져다 보자니 저절로 몸이 떨렸었다. 해명하는 주문을 올리자고 청한 경의 말이 옳지만, 두 성조(聖朝)께서 신중히 하셨던 일이므로 감히 급하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다. 시임촹원임 대신, 구경(九卿), 관각(館閣), 육조 당상, 삼사의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게 하라."
하였다. 이어 무함을 해명하는 주문을 짓도록 명하고 사신을 파견하였는데,이듬해에 진주 정사 이호민(李好敏) 등이《통고》의 개정본을 가지고 왔다. 이에 태묘에 고하고, 네 대신의 사판에 치제하였으며, 사신을 모두 가자하였다.
○ 동궁의 법강(法講)을 소대(召對)로 대신하였는데, 시강원이 인산(因山) 전에 개강하는 것은 열성조의 전례가 이미 있다고 하면서 우러러 청하였기 때문이었다.
○ 6월. 내탕고의 은 1만 냥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기유년(정조 13, 1789)에 현륭원을 옮길 때 모든 공사 비용을 일체 내탕고의 저축분으로 내려주셨으니, 이는 선조의 무궁한 효성으로서 성의(聖意)를 붙인 것이기도 했었다. 이번의 천장하는 예는 일의 체모가 기유년과는 다르지만, 과거에 화성(華城)과 관련된 일로 조금이라도 백성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던 성상의 마음을 우러러 상상하면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 예조가, 구릉(舊陵)을 옮겨 신릉(新陵)에 합장할 때 시복(?服)과 최복(衰服) 중 어느 것을 입어야 하는지를 여러 대신과 관각 당상에게 문의하기를 청하였다. 영중추부사 이시수는 의논드리기를,
"두 재궁(梓宮)의 하궁(下宮)을 같은 때에 하므로 주선하며 옷을 갈아입을 겨를이 없습니다. 일의 체모나 예의 뜻으로 보아서 면복(緬服)이 중합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서용보(徐龍輔)는 의논드리기를,
"우리 동방 선현의 논의에는 대부분 이르기를, '면복이 비록 가볍지만 참최(斬衰)를 입은 뒤이므로 변경하지 못한다.' 하였으니, 이 설에 근거하여 면복으로 예를 행한다면 높은 분을 높이는 뜻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여러 의견도 이와 같았다. 대신의 의논대로 따르라고 명하였다.
○ 선전관을 보내어 사교(四郊)의 농사 형세 및 도성 민가가 붕괴되지 않았는지를 두루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 큰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 7월. 큰물이 졌다. 상이 이르기를,
"재변을 당하여 형옥(刑獄)을 살피는 데에 어찌 수재와 한재의 차이가 있겠는가."
하고, 형조에 신칙하여 세 당상이 관아에 나가 소결하게 하였다. 또 경외의 중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 8월. 이때 일종의 괴질(怪疾)이 관서에서 발생하여 해서 및 경성에까지 크게 번졌다. 그 증상은 급성 위장병과 유사하였는데, 병에 걸리면 10명 중 8, 9명은 죽었다. 상이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고 크게 놀라서 하교하기를,
"금년의 수재는 관서 지방이 가장 혹심하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살아갈 길이 없는 판국에 사악한 기운이 또 전염병을 만들어 사망자가 끝없이 나오고 있다. 이는 모두 부덕한 내가 위에 있으면서 화기(和氣)를 부르지 못하여 천재(天災)가 유행하도록 만든 것이니, 부끄럽고 송구하여 침식(寢食)도 편치가 않다. 나라에 큰 재앙이 있으면 기도하는 것이 예이다. 평양부의 여단(?壇) 및 모란봉(牡丹峯)촹대동강(大洞江)에 향과 축문을 내리고, 영변 부사(寧邊府使) 정원용(鄭元容) 및 감사와 도내의 품계가 높은 수령을 헌관으로 삼도록 하라. 영변 부사는 위유사를 겸하여 제사를 행한 후에 여러 백성들을 위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 열흘 사이에 도성의 사망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상이 크게 염려하여 돌보아 주는 정사를 널리 시행하였
○ 장차 건릉(健陵)의 현궁(玄宮)을 꺼내려 할 때 상이 능에 행행하겠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중외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으므로 시임촹원임 대신이 상차하여 성명(成命)을 취소하기를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질병은 앞으로의 가능성을 미리 염려한 것이고, 정리(情理)는 자식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어찌 드러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예를 폐하겠는가."
하였다. 결국 대신들이 청대하여 극력 청한 것으로 인하여 명을 거두었다.
○ 9월. 건릉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천장하고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부장(?葬)하였다. 이때 봉표(封標) 구역을 두루 봉심하여 끝내 현륭원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서 길지(吉地)를 찾아내었는데, 모두 아뢰기를,
"신리(神理)와 인정에 실로 합당합니다."
하였다. 급기야 구릉(舊陵)을 열자 과연 수환(水患)이 있었다. 모두 아뢰기를,
"하늘의 뜻은 실로 우연한 것이 아니니, 이는 바로 성상의 효성에 감응한 것입니다."
하였다.
○ 영남의 여러 고을에 별도로 여제를 설행하도록 명하였는데, 전염병이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 길가의 시체를 진휼청에서 묻어 주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 10월. 뇌변이 있었다. 하교하기를,
"한밤중의 천둥 번개는 여름철에도 드문 것이다. 재변은 공연히 생기지 않고 반드시 불러들이게 된 원인이 있는 것이다. 더구나 지난번의 전염병이 이미 전에 없던 변고인데다가 가뭄과 장마가 이어져서 큰 기근까지 들었는데, 지금 또 경고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두려운 마음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지금부터 5일 동안 반찬수를 줄이도록 하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여러 관료에 이르기까지 각각 숨김없이 생각을 진달하여 바로잡는 방도와 재앙을 그치게 하는 계책이 되게 하라."
하였다.
○ 12월. 관서에 진휼 곡식 4000곡을 지급하여 진휼 밑천에 보태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