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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상상력과 통찰
동양인들은 자연을 일종의 유기체로 간주하여 천지만물이 나와 더불어 한 몸이라는 사상을 갖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은 그것이 낱낱의 개체로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상관되어 있다고 믿어왔기에 온 우주는 한 몸이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모든 현상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 의해 연속적이고 순환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연기론적 인식이다.
시(詩)에서 흔히 보게 되는 기상(奇想)과 역설의 배경에도 이러한 연기론적 인식이 그 기저에 깔려있다. ‘구름’이 ‘비’가 되고, 그 ‘비’가 ‘얼음’이 되고, 그 ‘얼음’이 녹아 나무의 뿌리에 스며들어 ‘꽃’이 되고 ‘열매’를 맺는 끊임없는 변신, 그러나 동일성(同一性)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그리 놀라운 변신이나 기상(奇想)도 아닌 불일불이(不一不二)의 다른 모습들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얼음(氷)’을 보고 이것이 ‘물(水)’이라고 아는 것이 견성(見性)이다. 변하지 않는 것이 성(性)이고, 인연(조건) 따라 변하는 것이 상(相)이다. 그러고 보면 견성이란 끊임없이 변해 가는 상(相)을 보고 그것의 본성(本性)을 알아차린 통찰력이다. ‘얼음’과 ‘물’처럼 모양(相)은 달라도 그 근성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변화란 공간적·정태적 개념이 아니라 시간적·역동적 개념이다. 이러한 연기(緣起)의 망(網)을 깨닫는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고 통찰력이다. 그러므로 문학적 발상의 핵심은 연기론(緣起論)과 그에 따른 깨달음, 곧 견성(見性)과 통찰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물은/ 나뭇가지로 기어올라 / 파란 잎과 예쁜 꽃을 / 피게 하고/ 사과 알을 굵게 한다./ 이슬 되어/ 풀잎에 앉아 쉬고 / 거미줄에 달려서 / 대롱대롱 그네 뛰다가 / 따스한 햇살 타고 / 하늘로 오르면 / 구름 되어 어디론지 / 훨훨 날아간다. ―김종상, 「물」 부분, (1964)
이 시에서도 불교의 연기론적 인과(因果)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이같이 원인과 결과의 연기적 이법(理法)에 의해 서로 이어지고 융합되면서 ‘’물이 ‘수증기’가 되었다가 ‘구름’이 되었다가 ‘비’가 되어 땅으로 스며들어 그 모습[相]을 달리하고 있다, 구름이 나뭇가지로, 나뭇가지에서 꽃으로, 때로는 ‘붉은 사과 알’의 모습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끊임없이 변전해가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러나 물리적 현상세계에서 보면 ‘물’은 ‘나뭇가지’도 아니요, ‘꽃’도 아니다. ‘사과 알’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다양한 공간에서 인(因)과 연(緣)에 의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한, 그러나 어디까지나 본성에서 벗어남이 없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론적 불이(不二)의 모습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상주법계(常住法界)의 세계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천둥은 먹구름 속에/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인제는 돌아 와 거울 앞에선 /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국화 옆에서」 전문, 1955년
한 송이 국화꽃을 중심으로 우주의 순환과정을 불교의 연기론을 바탕으로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하고 있다. 하찮은 생명이라도 그 탄생을 위해서는 우주적 참여가 있어야 함을 국화꽃 한 송이를 통해 보여 주면서 그게 바로 우주 자연의 모습이요 어느 날 시인이 오득한 견성의 세계다. 그러기에 간 밤 무서리 속에서도 피어난 저 ‘한 송이 국화꽃’은 흙과 구름과 햇빛, 소쩍새와 천둥이 함께 참여하고 역사하는 우주적 연기(緣起)의 화엄장이라 하겠다.
/김동수 시인
사) 전라정신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