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카탄반도에서 생긴 일 외 1편
권기만
리빙스턴은 잠깐 쉬었다 가야 도착하는 곳
그늘에서 강물에 발 담그면 몸속 거인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과 갈매기의 안내를 따라가면
사탕수수 숲을 일군 가리푸나족이 사는 곳
아프리카와 섬 사람이 전통을 섞어서 만든 푼타
남자는 악기를 연주하고 여자는 춤을 추는 곳
음악과 춤으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이 최고라며
이렇게 엉덩이를 돌리면 된다는 춤교사
근심을 털어버리는 게 춤이라는 걸 언제 알아버린 것일까
바다가 가까워 예쁜 해변을 애인처럼 끼고 산다며 웃는다
비도메로티브, 당신정말예뻐요
인사는 이런 것
난방이 필요 없어 방음도 필요 없는 곳
마라카스를 들고 흔들면 영혼은 푼타가 된다며
가난해도 백만장자로 살고 싶다면 와봐야 한단다
파도는 신과 같은 존재
마야인들이 남긴 벽화에 아직도 살고 있는 영혼의 필체
유구한 붉은색은 영혼의 온도
초콜릿과 함께 먹으면 더 맛있는 마카다미아
3천 원어치로도 과달라하라에 닿을 수 있다며
한 움큼 친절을 건넨다
명소를 방문한다며 초대한 어머니집
차려낸 수공예품 같은 깐뚜와마네
이렇게 밝은 명소는 처음이다
뻬똑 두나 한입에 한 식구가 되는 곳
걸음의 목적은 온전한 따뜻함을 만나보는 것
내가 사는 법
백 년 후가 궁금해 푸른 이끼로 돋았다
말라도 다시 살아나는 우기에 한껏 몸 부풀리는 건
마르고 쪼그라들어도 머나먼 깊이에 생명을 숨겨둘 수 있어서다
그러니 눈곱만큼의 그늘은 남겨두시라 약한 먼지 한 톨 날리지 않아도
나는 무사하다 장미의 5월은 견디므로 깊어진 내 물관에서 피어난 꿈
농작물도 아니고 풀도 아니어서 나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
방치해도 된다는 안심이 나의 생존법, 내 몸이 거적때기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 물이 많으면 되레 썩는다 황량과 폐허가 달의 근간을 가리고
서성이는 체온이 바이칼호수 그 깊이 모를 수심에 닿아 있다
잔디도 아니고 넓게 번식하지도 않는다 기생식물처럼 나무 그늘 밑이나
바위틈에 산다 먹어보면 씁쓰름해서 뱉어낼 뿐 화분의 덮개나 물 마름
방지가 고작인 나는 무관심을 양식으로 삼아 인간보다 더 멀리 살아남을
것이다 건기가 세상 전부가 되어도 나는 목마르지 않다
수확되거나 뽑혀 버려진 적 없는 나는 귀하지도 않지만 흔하지도 않다
위기 식물도 보호종도 아니다 끈질김은 내 모습에선 찾아볼 수 없다
건들면 너무 쉽게 부서지고 쪼개진다 먹장구름 반나절 분의 입술을 숨겨
마른 공기에서도 습기를 핥을 수 있는 나는 몸속 수분이 마르면 깊은
잠에 빠진다
내가 웃을 때 가장자리에서 물소리 흐른다 이슬 한 방울이면 하루가 너끈
하다 어디서나 나는 평평하다 돌출은 시도한 적 없다 견딤을 적셔주는
미량의 수분이 공기 중에 등불처럼 떠 있다 흙더미에 숨어 있는 물이 흘러간
자취만으로도 나는 걱정 없다 적게 먹고 덩치를 키우지 않는다 엎드려
끈질기게 백 년 후를 바라볼 수 있어야 지구의 한 축이 될 수 있다
다투어 피느라 눈 밑이 까만 풀꽃이 나를 비웃고 있다
권기만
2012년 시산맥 등단.
시집으로 발 달린 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