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지(2)
- 여강 최재효
3
경수는 아가씨가 내실 쪽으로 걸어가자 얼른 안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냈다.
한 달 전 업무차 홍콩에 갈 때 산 베르사체 제품으로 은은하면서 세련된 도회지풍의
중년에게 잘 어울리는 갈색 톤이 배인 안경으로 착용한 사람의 품격을 한층 높여
주었다. 만일 여주인이 정말로 미연일 경우 첫눈에 자신을 알아보고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이 연출될 수 있을 거란 배려가 작용했다. 경수는 선글라스를 끼고 거울
속의 중년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내라도 언뜻 보아서는 전혀 자신을 알아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
보았다. 파마기계를 뒤집어 쓴 중년 여인들이 선글라스를 낀 경수를 힐끗힐끗 쳐다
보면서 피식 웃기도 하고 안 보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경수의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경수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창피해서 얼른 의자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경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눈을 떼지 못했다. 훤칠한
키에 반듯한 외모의 중년사내가 미용실에 들어 온 것도 기이한 일이지만, 갑자기
선글라스를 꺼내 쓴 남자의 행동에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다음에는 또 무슨 재미난
행동이 이어질까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카키색 점퍼에 보라색 티셔츠를 입은 경수에게 갈색 톤의 선글라스는 묘하게도
잘 어울려보였다. 마치 홍콩의 영화배우 주윤발이 앉아 있는 것 같았다. 경수의
모습에 혼이 나간 여인은 커피를 마시다 그만 가슴에 쏟고 말았다. 그 광경을 엿보던
경수는 속으로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땀이 나올 지경이었다. 5분이 지나도 여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여주인이 뒤 늦은 식사를 하든지 아니면 머리와 옷매무새를 만지며
‘어떤 중년의 남자가 자신을 불러달라고 했을까?’ 온갖 상상의 나래를 피며 가슴에
잔잔한 파도가 일고 있는 것을 진정시키느라 잠시 커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드디어 내실의 불투명한 유리문이 열리면서 여인이 나왔다. 여주인이 분명했다.
그런데 여인은 보라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걸어
오더니 앰프시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잠시 무엇인가를 찾는 것 같았다.
흥겹게 흘러나오던 원더걸스 노래를 정지시키고 오디오에 새로운 시디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패티김의 ‘초우’의 음률이 은은히 울러 퍼지며 실내를 서서히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경수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패티김의 ‘초우’였다.
가슴속에 스며드는 고독이 몸부림 칠 때
갈 길 없는 나그네의 꿈은 사라져 비에 젖어 우네
너무나 사랑했기에 너무나 사랑했기에
마음의 상처 잊을 길 없어 비 소리도 흐느끼네
‘아, 이 노래는, 이 노래는 분명 내가 미연이와 음악다방에서 자주 듣던 노래인데.
어떻게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거지? 거참 이상하다.’
경수는 눈을 감고 패티김의 초우를 감상하기로 했다. 노래가 끝났지만 경수는 마치
미친 사람처럼 속으로 초우를 부르고 또 부르며 잠시 추억의 여행을 하였다. 경수가
미연이와 만나면 강가를 찾았다. 조약돌을 수집하고 하얗고 예쁜 조약돌을 발견하면
교복에 쓱쓱 닦아서 미연이에게 건네면 미연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경수
덕분에 미연이는 데이트가 있는 날이면 가방 속에는 조약돌로 가득했다.
“오빠, 고마워요. 그런데 제가 조약돌을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응, 미연이 하얀 치아와 예쁜 볼이 마치 조약돌 같은 것으로 보아 좋아할 것
같아서.”
“피이-, 거짓말.”
“정말이야. 이 조약돌은 나와 미연이의 영원불변의 사랑을 약속해주는 증거가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증거야 이 조약돌이.”
경수의 뇌리에는 마치 70년대 어쩌다 동네 한번 들어와 동네 사람들의 가슴을
들뜨게 하는 활동영화처럼 옛 영상이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돌아가고 있었다.
“미연아, 이제 들어가. 진눈깨비가 너무 많이 내리잖아.”
“전 괜찮아요. 오빠 예비고사에서 부디 좋은 점수를 얻으셔 야해요. 오늘밤은 제가
밤새도록 오빠의 행운을 위하여 부처님과 예수님 그리고 알라신에게 기도드릴거
에요.”
“부처님? 예수님? 알라님에게까지? 하하하하하......”
“오빠, 왜요?”
“난 분명히 최고
점수인 340점 만점을 딸 거야. 미연이가 그리 기도를 해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세분 신들께서 가만 안 계시겠지.”
“호호호호호호......”
“하하하하하하......”
경수의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엷게 배어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잠시 숨을
고르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얼른 눈가를 닦아내고 다시 초우를 속으로
되뇌었다.
“어머나, 안녕하세요? 마담입니다. 저희 미용실에 처음 오신 분 같아요?
그런데 너무 미남이시다? 방금 영화촬영장에서 오신 거 맞죠? 호호호호호......”
여주인이 예쁜 웃음소리에 미용실의 중년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경수가 있는
곳으로 집중되었다. 경수는 가슴이 벌렁거리며 얼굴이 빨개졌다.
“......”
경수의 빨개진 얼굴을 보자 마담은 하얀 치아를 거의 드러내 보이며 활짝 웃었다.
가슴선이 깊게 패인 보라색드레스 사이로 농염한 여체가 살짝 드러났다. 경수는
얼른 눈을 감아버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눈을 질끈 감아보았지만 마담의 미소는
변함이 없었다.
농익은 여체에서 은은하게 풍겨져 오는 향수에 경수는 금방 몽롱한 상태가 될 뻔
했다. 정신을 바싹 차리고 눈을 살며시 떠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손님, 어떻게 커트해 드릴까요? 너무 미남이시라서 잘못 커트하면 제가 혼날 것
같아서요?”
“그, 그냥 알아서 그냥 커트해 주세요.”
경수는 거의 모기소리 만하게 응대를 하고 주눅 든 자세로 실눈을 뜨고 여인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똑한 콧날과 반달눈썹이 분명 첫사랑 미연이 분명했다. 불혹을 넘긴 여체라기
보다는 삼십 초반의 여인처럼 약간 통통하면서도 분명한 S라인에서 색기(色氣)가
흐르고 있었다. 여주인이 미연이라면 얼굴의 윤곽은 예전의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마담이 경수의 뒷머리를 전동카타기로 깎고나 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경수는 자꾸 자신의 얼굴을 살피는 마담을 예의 주시하면서 왜 그럴까
궁금해 했다. 마담은 경수의표정을 살피며 뒷머리만 매만졌다.
그러나 겉모습만 보고 미연의 실체를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세상에 기연(奇緣)도
많고 비슷한 사람도 많기 때문에 경수는 자신의 머리를 다듬고 있는 농염한 여인이
확실하게 미연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저어, 실례하지만 마담님 고향이 어디신지요? 그리고 현재 몇 살이나 되었어요?
혹시 박경수라고 하는 남자를 알고 계시는지요? 또한 조약돌을 좋아했는지요?
차암, 25년 전 마담님이 박경수란 남자에게 핑크색 종이에 자주 연서(戀書)를 써서
보냈던 기억이 나시는 지요?’
입안에서 뱅뱅 도는 말이 금방 튀어날 올 것 같았다.
“저어, 손님.”
“......”
“손님.”
“아, 네네?” “선글라스를 벗어주실 수 없으신지요? 귀밑머리를 커트할 수
없어서......”
‘아차, 그렇지. 머리 깎으러 오면서 선글라스 낀 바보는 나 밖에 없을 거야. 차암,
그런데 선글라스 낀 의도는 마담이 행여 나를 알아 볼까해서 낀 건데 어쩌나?’
“손님, 잠깐만 선글라스를 벗으시면......”
“죄송합니다만 머리 부분은 그냥 두고 뒷머리와 앞머리 그리고 귀밑머리만 살짝
다듬어 주시면 안 될까요?”
“......”
“제가, 안경을 벗으면 환한 실내에서는 사물이 잘 안보여서요. 약간 색맹이거든요.
죄송해요.”
경수는 목소리까지 바꿔가면서 간신히 대답하였다. 마담은 경수의 답변에 의아해
하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느새 홀리오이글레시아스의 Hey에 이어
스모키의 Living next door to Alice가 미용실 안을 채우고 있었다.
Sally called when she got the word She said
"I suppose you've heard about Alice"
Well I rushed to the window
And I looked outside
Well I could hardly believe my eyes
As a big limousine rolled up into Alice's drive
“손님, 다 되었어요. 마음에 드세요?”
“아, 네네. 마음에 듭니다.”
경수 자신이 보아도 약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헤어스타일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평소에 다니던 회사 근처 미용실이나 이발소에서 이렇게 커트를 했다면
불호령이 떨어졌을 것이다. 마담이 직접 경수의 머리를 감겨주기 위하여 세면대로
경수를 데리고 갔다. 마담은 다시 한 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어 손님, 머리를 감아야 하는데 안경 좀 ......”
“아아, 아니에요. 머리는 집에 가서 감으면 됩니다. 그냥 진공흡입기로 머리와
옷에 묻은 머리카락이나 없애주세요. 머리 두피에 염증이 있어 집에 가서 특수
샴푸를 써야하거든요.”
경수는 한숨을 쉬면서 경우 머리와 옷에 묻어 있는 머리카락만 털고 의자에서 일어
났다.
“손님, 너무 멋지세요. 혹시 이 근처에 사시면 저희 미용실을 자주 이용해주세요.
다음번에는 더욱 최고의 서비스로 손님을 맞을게요. 저희는 최신식 기계로 파마는
물론 남성들의 숏커트까지 모든 서비스를 저렴한 가격으로 모시고 있어요. 다음에
꼭 들려 주실 거죠?”
“네. 그리하겠습니다.”
“참, 이 명함 한 장 드릴게요. 우리 업소에는 두 가지 명함이 있는데 이 명함은
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분에게만 드리는 명함이에요. 혹시 저희 업소의 위치나
출장 미용을 필요로 하실 경우 연락 주세요.”
“고맙습니다. 잘 간직하였다가 위치를 모르거나 하면 연락드릴게요. 오늘 너무
고마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4
미용실을 나온 경수는 허탈해 했다. 외모는 미연이 분명한데 벙어리 냉가슴 앓듯
30여분을 마주하고도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가슴을 쳤다. 그렇다고
두고 온 물건도 없는데 다시 그 미용실을 찾아갈 수는 없었다. 다시 찾아간다하여도
명분 없이 불쑥 미용실을 들어간다면 마담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으로 볼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경수는 휴대폰이나 수건 혹은 소지품중 하나를
빠트리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회사를 조퇴하고 일부러 첫사랑의 여인을 확인하기
위하여 서울서 왔는데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를 타고 전철역전으로 오면서 마담이 건넨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010-9987-9*** 전화번호가 밤알처럼 커보였다. 순간 경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마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발신 버튼을 누르려다 멈추었다.
‘마담이 정말로 미연이가 아닐 수도 있어. 여인들은 팔색조와 같아서 얼굴을 살짝
성형하거나 화장을 진하게 하면 남자들은 잘 알아보지 못해. 괜히 전화 걸었다가
나만 우스운 남자가 되면 큰 망신인데......’
서울행 전철 티켓을 끊고 플랫폼에서 전철을 기다리며 경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갈바람이 힘차게 불더니 어디서 날아왔는지 낙엽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며 마치
비행기에서 뿌린 삐라같이 지상을 향해 팔랑거리며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다.
‘아, 이대로 그냥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바보, 바보, 바보. 나는 바보야. 30여분을
그녀와 함께 있으면서 고향도 물어보지 못하다니. 세상에 나 같은 바보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경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플랫폼을 나왔다. 서서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역 광장을 나와 지하도를 건너자 호프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무작정 문을
밀치고 호프집 안으로 들어서자 40초반의 여인이 빨간 립스틱을 번쩍거리며 경수를
맞았다.
"하이코, 어서오시와요. 우리낭군님이 오데갔다 이제서 나타났노?“
“......”
“아주머니, 1,000씨씨 한잔 하고 마른안주 하나 주세요.”
경수는 만약 이대로 서울로 돌아가면 첫사랑을 영영 찾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25년 전 헤어진 이후 늘 가슴을 억눌러온 미연이 였다. 왜 헤어졌는지,
무슨 이유에서 연락 한번 주지 않았는지 언젠가 미연이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가슴에만 묻어놓은 사연을 밝힌다는 것은 어쩌면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과 같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열지 말고 그냥 그리워하면서 가슴
속에 묻어 두면 좋을 것을 괜히 열어서 번뇌만 더한다면 피차에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화를 걸어봐? 아니면......’
경수는 마담이 건네준 명함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였다.
‘에라 모르겠다. 사내가 전화도 못 건다면 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그래 걸어
보는 거야. 무조건 걸어보는 거야. 무조건.’
혹시 몰라서 상대방 휴대폰에 발신자 번호가 뜨지 않도록 *23#을 누르고 아라비아
숫자 11개를 차례로 눌렀다. 번호를 누르는 경수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간신히 11개 숫자를 다 누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상대방의 음성이 들렸다.
“경수 오빠? 경수 오빠 맞죠? 저, 저 미연이에요. 오빠를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25년 전 꾀꼬리봉 아래 우미기에 살던 이미연이라고요.”
여인의 목소리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 계속 -
첫댓글 늘 감사합니다.
잘~~고맙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