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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시작 1,1-4.5ㄴ; 2,1-5ㄱ>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
2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곧 자기가 본 모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3 이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는 이와 그 말씀을 듣고 그 안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4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5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나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2,1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3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4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8,35-43>
35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36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37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38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39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0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셨다.
41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그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42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43 그가 즉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
군중도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복음은 예리고의 눈먼 거지(바르티메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다른 이들의 꾸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을 쓰듯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39)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는 이사야 예언서(11,1)의 말씀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가까이 오자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예수님께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 않으시고, 그의 믿음을 유도하고 고백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물으십니다.
곧 당신께 대한 믿음을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청원기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곧 첫째는 믿음으로 청하는 일이요, 둘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청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진정 청해야 할 바를 청하는 일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는지 빤히 아시지만, 당신께 대한 믿음을 보고자 하십니다.
거지 장님은 신뢰와 의탁으로 청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루카 18,41)
그런데 대체 무엇을 보아야 ‘다시 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보다’(anablefo)라는 단어는 ‘위를 쳐다보다’, ‘새로운 것을 보다’, ‘다시 보다’, ‘시력을 회복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이 눈을 뜨기 위해서는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쳐다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그분의 사랑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사랑을 보는 눈’이 다시 보는 눈이요, 새로운 눈이요, 영적인 눈인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눈을 치유 받는 것을 넘어서, 영혼의 눈을 뜨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다시 보게 하고 구원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루카 18,42)
이제는 보려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태어나면서 물질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면, 이제는 ‘믿음’을 통해서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는 일이요, 지금 우리의 길을 동행하고 계시는 그분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제 '길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주님을 '따라' 따라나서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18,41)
주님!
제가 보지 못함은 태양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고 있는 까닭입니다.
눈을 뜨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 때문입니다.
성전 휘장을 찢듯, 제 눈의 가림막을 걷어 내소서!
완고함의 겉옷을 벗기시고, 깊이 새겨진 당신의 영혼을 보게 하소서!
주님!
제가 볼 수 있음은 눈을 뜨고 있어서가 아니라 빛이 저를 비추는 까닭입니다.
제 안을 비추는 당신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벌어진 당신 구원을 보게 하소서.
제 안에 선사된 당신을 보게 하시고,
제가 바라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해주고 싶은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칭찬과 나무람과 권고>
오늘부터 한 주간은 묵시록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오늘은 에페소 교회에 전하는 말씀인데 칭찬과 나무람과 권고가 있습니다.
칭찬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사도라고 자칭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너는 그들이 거짓말쟁이임을 밝혀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칭찬의 내용은 악한 자들과 거짓 사도들을 잘 밝혀내어 용납하지 않고 싸운 점과 주님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음에도 인내심이 있어서 지치지 않은 점입니다.
나무람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수고 참 많이 했고 인내심도 대단하지만, 처음의 사랑을 저버린 것은 치명적인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모든 수고와 잘한 것을 다 덮어버리는 잘못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아무리 악과 싸우는 데 지치지 않았어도 처음의 사랑을 저버린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 잘못이라는 나무람입니다.
이것은 즉시 저의 잘못을 떠오르게 합니다.
전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다시 말씀드리면, 제가 환갑이 되던 해는 서품 30주년이기도 하고, 서원 35주년이고, 입회 45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살았나 돌아보게 되었는데, 오늘 에페소 교회처럼 수고 많았고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은 아니라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이 아닌 삶은 열심히 저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노 저은 것과 같은 거지요.
그랬습니다.
저는 엄청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수고도 참 많았으며 인내심을 가지고 그것을 견뎌냈습니다.
그럼에도 잘 살았다고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느님 사랑으로 그 많은 것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열성과 힘으로 했으며, 사랑이 없지 않았지만, 그 사랑이 매우 인간적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잘못되었고, 게다가 저는 매우 교만하고 독선적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많이 상처 줬습니다.
이런 저에게 오늘 묵시록의 마지막 권고 말씀은 딱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어디에서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그것을 찾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고, 그래서 저는 프란치스코의 초기 삶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으로 가리봉으로 가 막노동을 하며 우선 제게 묻은 찌든 때를 씻어내려 했습니다.
현재 저는 찌든 때를 씻어냈는지, 다시 또 다른 때가 묻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또 성찰하고, 다시 또 시작해야겠지요?
아무튼, 저나 여러분이나 에페소 교회에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칭찬과 나무람과 권고를
귀담아듣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8,38)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유다인들의 표현으로 자비라는 것은 애간장, 애타는 심정을 말합니다.
호세아서에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11.8)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애간장이 녹는 안타까움!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이며 사랑입니다.
눈먼 이는 바로 그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 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나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하게 합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이번 생이 너무나 막막하고 힘겹더라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리코의 눈먼 이’는 가장 가련한 사람 중의 가련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장 낮은 도시 예리코에 사는 사람 가운데서도 눈까지 멀었으니, 이 보다 더 가련한 사람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 한방이라고, 그 가련한 사람이 기적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순식간에 인생 역전을 이뤄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해 있었는데, 예리코의 소경이 인생 역전을 이뤄낸 비결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보십시오.
예수님을 향한 그의 호칭은 어느새 ‘주님’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눈먼 이’에게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을 넘어, 이스라엘의 왕을 넘어,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그래서 자신의 삶과 죽음, 인생 전체를,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당신 손에 쥐고 계시는 ‘주님’이 된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곰곰이 살펴보니 여러 측면에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비록 눈을 뜨고 있었지만, 정작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소중한 것들, 아름다운 것들, 정말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네 인생 수백 수천 번 되풀이 되는 윤회의 삶이 아니라,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는 금쪽같이 소중한 인생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당당하게, 떵떵거리며, 자신만만하게 살아가지만, 사실은 잠시 머물다 사라져가는 뜬구름 같은 존재임을, 이 보잘 것 없고 유한한 존재의 실체를 볼 수 있는 눈을 볼 수 있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이번 생이 너무나 막막하고 힘겹더라도 잘 견디고 넘겨, 언젠가 이 삶이 지나가면 그림같이 아늑하고 따뜻한 하느님의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미리 볼 줄 아는 눈을 청해야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바르티매오>
‘어떤 눈먼 이’의 이름은 ‘바르티매오’입니다(마르 10,46).
눈이 멀었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
(마태 4,16)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
(요한 1,4.9)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바르티매오는 어둠 속에서 살면서 ‘생명의 빛’을 갈망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그분이 바로 ‘생명의 빛’이신 분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바르티매오를 어둠 속에서 빛을 찾다가 예수님이라는 빛을 만나서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된 신앙인들을 상징하는(또는 대표하는) 인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시여’ 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생명의 빛으로) 믿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같은 말입니다.
여기서 ‘부르짖었다.’ 라는 말과 ‘더욱 큰소리로 외쳤다.’ 라는 말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앞서가던 이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은 것은 ‘다윗의 자손’이라는 호칭을 공공연하게 사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고, 바르티매오가 몇 푼의 돈을 구걸하려는 것으로 오해해서, 예수님의 길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 준 사람들과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은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일까? 다른 사람들일까?
아마도 다른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셨을 때 그를 예수님에게 데려간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준 그 사람들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가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과 바르티매오를 연결하는 중개인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연결을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는 말에는 많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다시 보게 해 달라는 것,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달라는 것, 구원과 생명을 얻게 해 달라는 것 등.
오늘날의 우리도 미사 때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할 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만일에 바르티매오가 간절하게 부르짖지 않았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르티매오의 사정을 모르신 채로 그냥 지나가셨을까?
바르티매오와 예수님의 만남은 우연일까? 섭리일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우연이 아니니까 섭리입니다.
섭리라면,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부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바르티매오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바르티매오가 큰소리로 예수님을 부른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데려오라고 분부하신 일은 ‘바르티매오의 응답에 응답하신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스스로 믿음을 고백하라는 뜻으로, 또 당신이 주시는 것을 능동적으로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으로 일부러 물으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말은 “저는 주님을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저를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겸한 말입니다.
믿으니까 청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예수님은 빛으로 오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다시 보아라.” 라는 말씀은 “어둠에서 벗어나서 빛을 향해서 나아가라.”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은 시각장애만 고쳐 주는 의사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과 인생 전체를 어둠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말씀은 병자 치유 이야기에 자주 나오는 말씀인데, 치유가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이제 믿음을 가지고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라.” 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다시 보게 된 그가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 수난을 향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에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 참여한 것입니다.
만일에 그가 새 직업을 찾아서 예수님을 떠났다면 이 이야기는 평범한 치유 이야기로 끝났을 것이고, 어쩌면 기록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을 따랐다.' 라는 말은 이 이야기를 특별한 이야기로 만들어 주는 말이면서,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촉구하는 가르침이 됩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개안開眼의 여정 - 무지無知에 대한 답答은 주님과의 만남뿐이다>
오늘 복음은 읽을 때마다 새롭고 반갑습니다.
상징들로 가득한 소복음서라 칭하는 복음입니다.
강론 제목 역시 예전처럼 똑같이 ‘개안의 여정’입니다.
개안의 여정, 제가 참 좋아하는 말마디입니다.
산티아고 순례후 참 많은 강론 제목에 ‘여정’이란 말마디가 들어갑니다.
개안의 여정, 날로 눈이 열려가는, 눈이 밝아지는 영적 삶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이란 말마디와도 일맥상통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참나의 탐구와 주님의 탐구는 함께 갑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알아가면서 참나를 사랑하고 알게 되며 날로, 점차 주님을 닮아 겸손해지고 지혜로워지는 우리들입니다.
점차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지혜의 빛, 주님의 빛 가운데 살게 됩니다.
인영균 글레멘스 신부의 <나는 산티아고 신부다-한 수도승 선교사의 순례 여정>이란 책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 중 순례자들의 인사말입니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순례길 되세요.”
그러나 옛 순례자들은 이와는 다른 말로 서로 인사하고 격려했습니다.
한 순례자가 먼저 “울트레야!(Ultreia!)” 하고 인사하면, 다른 순례자는 “엣 수에야!(Et Sueia!) 대답합니다.
‘울트레아!’ 는 ‘더 앞으로’, ‘엣 수에야!’는 ‘그리고 더 위로, 드높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책 말미에, ”부엔 카미노! 울트레야! 엣 수에야!” 인사말은 ‘좋은 순례길 되세요! 정진하라! 상승하라!”라는 순례 여정 중 도반간의 참 좋고 적절한 인사말입니다.
개안의 여정을 통해 날로 정진과 더불어 상승하는 영적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개안의 여정에 한결같은 사랑의 열정은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런 사랑은 베네딕도 성규에서 말하는 좋은 열정의 사랑, “아몰amor”입니다.
“카리타스caritas”와는 다른, 개인이 전 존재를 잡고 있는 활력 넘치는 사랑을 함축하는 열정적 사랑이 “아몰amor”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좋은 열정의 사랑이, 하느님을 위한 좋은 열정의 사랑이 “아몰amor”입니다.
개안의 순례 여정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열정적 사랑입니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가도 이런 열정적 사랑의 ‘아몰amor’이 식어선 안됩니다.
제1독서 묵시록에서 에페소 교회에 경고하는 말씀도 바로 이런 좋은 열정의 사랑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에페소 교회는 물론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사랑의 열정에 다시 불붙혀 초발심의 자세로, 열정적 사랑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읽은 1950년생 정호승 프란치스코 시인의 인텨뷰 기사에도 공감했습니다.
“나이 70이 되니 화들짝 놀랐어요.
60에서 70이 된 10년 동안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매년 뭘 했는지 생각해 봐도 잡히는 게 없어요.
10년이 1년처럼, 1년이 한 달처럼 지났어요.”
이렇게 말하는 시인에게 기자는 “시의 웅덩이는 다시 차오르고 있나요?” 물었고 이에 대한 진솔한 대답이 시적詩的이자 절창絶唱입니다.
“밀물이 들어와 수평선이 되는 때는 지났어요.
저는 썰물이예요.
썰물의 끝자락을 붙들고 있는 거죠.
샘은 물을 퍼내면 다시 고이잖아요.
한때는 저도 샘물이 고이듯이 샘을 퍼내면 다시 물이 고였는데 지금은 퍼내면 언제 물이 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가슴 속에 시의 샘물이 있으면 빨리 쓰려 해요.”
사랑의 열정이 메말라가는 것, 역시 자연스런 노화 현상일지 모르겠지만, 영원한 현역의 수도자들은 여전히 맑게 샘솟는 열정의 옹달샘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가 바로 마르지 않는 열정의 옹달샘이 되는 것입니다.
25년 전 풋열심이 왕성하던 49세에 쓴 ‘옹달샘’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누가 뭐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불암산의 옹달샘으로 머무르리라
확장도 개발도 홍보도
그 무슨 인위의 장식도 없이
자연 그대로의 옹달샘으로 머무르리라
주님안에 숨어사는
옹달샘으로 머무르리라
목마른 이들에게 샘솟은 물이 되리라”
- 1997.4.3
바로 오늘 복음의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눈먼 무지의 걸인은 한결같은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사랑의 열정이 깨어있게 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오매불망 진리이신 주님을 찾는 열정에 깨어 있었기에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라는 말을 듣자 그는 전광석화 신속히 반응합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플어 주십시오.” 부르짖습니다.
주변의 꾸짖음과 만류에도 체면불구하고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송 기도를 바치듯 그렇게 부르짖습니다.
그대로 걸인의 주님 향한 열정적 사랑의 표현입니다.
자비송으로 미사를 시작한 우리들, 그대로 눈먼 걸인을 닮았습니다.
걸음을 멈추신 예수님은 가까이 다가온 눈먼 걸인 구도자에게 묻습니다.
마치 선문답禪門答처럼 간단명료합니다.
삶이 간절하고 절실하면 말도 짧고 단순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눈먼 걸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평생 화두와 같은 근본적 물음입니다.
눈먼 걸인의 대답이 만고불변의 명답입니다.
이것 하나뿐입니다.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지혜의 빛, 주님의 빛속에서 살게 해달라는 간청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단 하나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주님의 지체없는 응답 역시 짧고 단순합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는 즉시 믿음의 눈이 열려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군중 역시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적이 장면인지요!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무지의 눈이 열린 걸인이요, 이제 길이자 진리이신 주님을 따라 개안의 여정에 오른 눈뜬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라 있는 '눈'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발'임을 깨닫습니다.
한 두 번의 개안이, 한 두 번의 따름이 아니라, 날마다, 평생 개안의 여정, 따름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미사를 압축하고 있는 참 아름답고 은혜로운 복음입니다.
육안은 날로 어두워져도 영안은 날로 밝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한결같은 열정의 사랑을 선물하시어 개안의 여정에 항구하게 하십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아이티에서 선교하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생생한 현장감입니다.
이번 글의 주제는 ‘왜 나만’이었습니다.
매일 50여명의 환자들을 돌보는 것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 파도처럼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새로운 입소자를 데려가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기쁜 마음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이번에는 망설여졌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치안이 워낙 불안하고, 몇 달 전에는 강도를 만나서 죽을 뻔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환자를 데리러 갈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은 면허가 없고, 그렇다고 수녀님들이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차를 몰고 비포장도로를 5시간 달려서 환자를 데려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하던 환자는 차를 타면서 아기처럼 잠이 들었고, 도착해서는 성가를 부르는데 가슴이 뭉클해졌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아이티에서 전쟁과 같은 선교를 하는 신부님의 ‘왜 나만’이라는 말은 불평과 불만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나만’이라고 말하는 신부님을 특별히 사랑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부님에게 천국에 쌓을 보화를 미리 마련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삶으로 실천하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강의를 듣는 중에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삶은 고통이 가득했습니다.
어려서 소아마비가 왔고, 평생 한 쪽 다리가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꽃다운 나이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생겼습니다.
그녀는 다리, 허리, 갈비가 부러지는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30번 이상의 수술을 해야 했고,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왜 나만’이라는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생생한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녀의 작품은 모두 멕시코의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프랑스 르부르 박물관에도 소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억압과 탄압에 맞서는 혁명가였으며, 낡은 관습과 제도를 벗어나는 자유인이었으며, 고통 앞에 굴복하기보다는 고통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열정의 여인이었습니다.
작품의 삼분의 일이 그녀의 자화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에 애정이 있었고, 자신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열정과 저항정신은 그녀가 살아있을 때에도 멕시코인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멕시코인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살면서 ‘왜 나만’이라는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이라고도 합니다.
시험을 볼 땐 꼭 자신이 공부하지 않고 지나친 곳에서만 문제가 출제 됩니다.
물건이 없어져 한참을 찾다가 결국 같은 물건을 사고 나면 찾게 됩니다.
기계가 고장 나서 기술자를 부르면 갑자기 잘 됩니다.
세차하면 비가 옵니다.
예전에 엠피쓰리를 잃어버린 줄 알고 새것을 샀는데 나중에 가방에 들어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소경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경은 ‘왜 나만’이라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날 수 있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소경은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네가 한 일과 너의 노고와 인내를 알고, 또 네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너는 인내심이 있어서,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저항과 열정, 인내와 신념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처음에 지녔던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회개입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조금 전에 들은 것도 금방 잊어버린다면서 치매 초기가 아닐까 걱정하는 분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꼭 나이가 들어서 자주 깜빡깜빡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우리 기억의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작가 마크 빅터 한센에 의하면, 들은 것의 64%는 하루 안에 사라지고, 98%는 일주일 안에 없어진다고 합니다.
즉 잊어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지만, 기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의사 맥스웰 몰츠는 같은 생각을 열일곱 번 이상 반복하면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기억의 한계.
이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반복해서 생각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잘못된 점은 잊어버려야 할 것을 계속 생각하면서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각 자체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남에 대한 미움, 부정적인 생각들….
분명히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열일곱 번 이상 반복해서 생각하기에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한 번만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끝인 것처럼 생각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해서 잊어버립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감사의 마음을 전혀 갖지 않아서 잊음의 관계만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결과는 주님과의 관계조차 잊어버리게 됩니다.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복음은 전해줍니다.
이 소경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는 모습은 이제까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지요.
이제 그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만히 있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장애물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 것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꾸짖습니다.
예수님을 불편하게 하지 말라고, 또 죄인인 주제에 왜 큰소리를 지르냐고 꾸짖었겠지요.
이런 장애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기에 자기 구원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외칩니다.
계속된 그의 외침을 떠올려 봅니다.
이 외침의 반복을 통해, 그는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이 마음속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믿음의 외침으로 어두움을 걷어내고 빛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은 계속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벗어나게 하는 모든 것은 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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