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희의 ‘그러나 사랑은 남는 것’
“여러분은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말을 하십시오.”(에베소 4 ; 1)
수업준비 때문에 성경을 들추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말이다. ‘이로운 말, 듣는 이에게 기쁨을 주는 말 – 내가 하는 수많은 말 중에 어느 정도가 그런 말에 속하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주변에서도 어디를 가나 함부로 생각없이 내밷는 말, 누구에겐가 아부하는 말, 천박한 말, 자극적인 말, 폭력적인 말, 남을 모함하고 해꼬지하는 말이 난무한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은커녕 들어서 불쾌한 말, 의심이 가는 말, 입에 발린 말, 말도 안 되는 말만 자꾸 들린다.
하지만 남을 탓할 것 하나 없다. 매일 살아가면서 무심히 내가 한 말이 남의 마음에 비수가 되어 꽂히기도 하고, 쓸데 없는 말, 해서는 안될 말을 해놓고는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한다.
간혹 이제 내 삶이 다하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 생애 마지막 말, 즉 나의 유언이 된다면 어떤 말을 할까를 생각해본다. 모르긴 몰라도 고르고 골라 좋은 말, 예쁜 말, 유익한 말, 누군가의 마음에 깊이 남을 수 있는 말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말을 통한 자기 표현을 입으로 하는 작가들의 유언은 무얼까. 문득 궁금해서 일부러 찾아본 적이 있다. 의식적으로 준비해두었다가 한 말인지 아니면 어쩌다가 마지막 말이 되었는지, 게다가 정말 그것이 마지막 말이었는지 여러 가지 의구심이 생기지만 그래도 통설로 알려진 바로 몇 개의 유명한 유언이 있다. 예컨대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써서 인간애를 주장한 헤리엇 비쳐 스토아 부인은 자신을 돌봐주는 간호사들에게 ’사랑합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빨간 무공 훈장‘을 쓴 스티븐 크레인은 자기 죽음의 순간을 마치 중계방송 하듯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넘게 마련인 경계선에 도달했을 때, 생각만큼 끔직하지 않다. 좀 졸리고, 그리고 모든 게 무관심해진다. 그냥 내가 지금 삶과 죽음 중 어느 세계에 있는가에 대한 몽롱한 의구심과 격정, 그것 뿐이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말했고,. 마찬가지로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임종시 이모가 ’죽기 전에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느님과 싸웠는데?‘ 하고 반문했다. 작가들의 유언 중에 가장 유명한 말은 괴테의 ’좀 더 빛을‘이라는 말일 것이다.
작가 자신의 유언은 그렇다 치고, 영미 문학 작품 속에서 가장 유명한 유언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오지‘에 나오는 키르츠가 한 말이다. 원주민을 게몽하고 문명을 전한다는 위대한 명분을 갖고 ’암흑의 오지‘ 콩고로 간 키르츠는 결국 상아와 권력의 유혹에 빠져 타락한다. 인간 속에 내재해 있는 탐욕과 위선에 대해 ’끔직하다 끔직해‘라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작중 인물의 유언은 헨리 제임스(1843-1916)의 ’여인의 초상‘에 나온다.
생기발랄한 22세의 미국 처녀 이자벨 이처는 부모가 죽고 난 후, 런던에 사는 친척 타쳇씨 집에 살게된다. 타쳇의 아들 랠프는 병약한 몸으로 이미 죽음을 예고하고 있지만 이자벨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 이지적이면서도 상상력이 넘치는 그녀가 좀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그는 자기가 상속받을 유산의 절반을 준다. 이자벨은 미국의 실업가인 굿우드의 영국 귀족 하버튼 경의 구혼을 거절하고 이탈리아에서 자유롭게 예술적 삶을 즐기는 오즈몬드와 결혼한다.
그러나 이자벨은 곧 자신의 결혼이 중매인 멀 부인과 오즈몬드가 돈을 노리고 꾸민 책략임을 알게 되고,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랠프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영국으로 오게 된 그녀는 다시 오즈몬드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랠프의 권유도, 다시 구혼하는 굿우드도 뿌리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의붓 딸 팬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이자벨은 결국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결정에 책임지고 사랑을 줄 줄 아는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랠프는 자신의 유산을 나누어 준 것이 화근이 되어 이자벨이 불행해진 데 대해 통한을 느낀다. 죽어가는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그를 위해 대신 죽을 수 있다고 흐느끼는 이자벨에게 랠프는 말한다.
“아자벨, 삶이 더 좋은거야 왜냐면 삶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야. 죽음은 좋은 것이지만 사랑이 없어. 고통은 결국 사라져. 그러나 사랑은 남지. 그걸 모르고 왜 우리가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려하는지 모르겠다. 삶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있고, 그리고 나는 아직 싫어-----.”
너무나 많은 것이 있다는 삶, 사랑이 있는 삶을 나는 매일 쓸데없는 말, 마음이 담기지 않는 말, 진실이 아닌 말로 낭비하는 것은 아닌지. 아무리 큰 고통이라 할지라도 고통은 결국 사라지지만 사랑은 남는 것--- 내가 사라져버린 후에도 이 지상에 남을 수 있는 사랑을 만들기 위해 오늘 무슨 말, 무슨 일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