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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기사의 꿈을 안고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포로가 된 그는 아버지가 낸 보석금으로 풀려난 뒤에도 예전처럼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1204년 중병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고 회복된 그는 청년 시절의 해이한 생활에서 돌아서서 아버지의 재산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굳게 매달렸다. 가난을 받아들이고 복음적 생활을 하면서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그에게 젊은이들이 모여들자, 그들과 함께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를 세우고 복음적 가난을 실천하였다. 그는 1224년 무렵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받았는데, 이 오상의 고통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226년에 선종한 그를 2년 뒤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고,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본기도
하느님,
복된 프란치스코를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이끄시어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저희에게 보여 주셨으니
저희도 성자를 따라 복음의 길을 걸으며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 차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제1독서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저를 제 조상들의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느헤미야기의 말씀입니다.2,1-8
1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 제이십년 니산 달,
내가 술 시중 담당이었을 때, 나는 술을 가져다가 임금님께 올렸다.
그런데 내가 이제까지 임금님 앞에서 슬퍼한 적이 없기 때문에,
2 임금님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어째서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느냐?
네가 아픈 것 같지는 않으니, 마음의 슬픔일 수밖에 없겠구나.”
나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3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를 빕니다.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은 폐허가 되고 성문들은 불에 타 버렸는데,
제가 어찌 슬픈 얼굴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4 그러자 임금님께서 나에게,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기에,
나는 하늘의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고, 5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그리고 이 종을 곱게 보아 주신다면,
저를 유다로, 제 조상들의 묘지가 있는 도성으로 보내 주셔서,
그 도성을 다시 세우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6 그때에 왕비께서도 옆에 계셨는데, 임금님께서는 “얼마 동안 가 있어야 하느냐?
언제면 돌아올 수 있겠느냐?” 하고 나에게 물으셨다.
임금님께서 이렇게 나를 보내시는 것을 좋게 여기셨으므로,
나는 임금님께 기간을 말씀드렸다.
7 나는 또 임금님께 아뢰었다. “임금님께서 좋으시다면,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관들에게 가는 서신 몇 통을 저에게 내리게 하시어,
제가 유다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이 저를 통과시키도록 해 주십시오.
8 또 왕실 숲지기 아삽에게도 서신을 내리시어,
하느님의 집 곁 성채의 문과 도성의 벽,
그리고 제가 들어가 살 집에 필요한 목재를 대게 해 주십시오.”
내 하느님의 너그러우신 손길이 나를 보살펴 주셨으므로,
임금님께서는 내 청을 들어주셨다.
복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57-62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57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5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59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0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61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잘못된 선택으로 계속 후회가 된다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세 명의 새로운 제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한 명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얼마나 험난한지 심각하게 고려해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시며 견딜 수 있는지 다시 한번 고려해보라고 하십니다.
한 제자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아직 세상의 시선에 사로잡힌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편의는 물론 세상에서도 완전히 죽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겠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은 무언가 선택을 하기 전에 꼼꼼히 숙고해보고 결정하라는 내용일까요? 물론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을 많이 하면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뇌가 피로해지기 때문입니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압 데익스테르후이스(Ap Dijksterhuis)는 선택에 관한 많은 실험을 통해 복잡한 조건이 많은 선택일수록 오랜 심사숙고가 오히려 많은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결과를 입증하였습니다. 만약 몇 가지 조건만 살펴보면 금방 좋은 차와 나쁜 차를 구별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 숙고하는 시간이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차의 품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 숙고를 많이 할수록 시간이 지난 뒤 후회하는 확률이 커졌습니다. 다른 차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기에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커진 것입니다.
반면 무의식적으로 게임을 하다가 갑자기 골라야 했을 경우는 자신의 선택에 만족도가 컸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많이 고려하지 않은 덕분으로 내가 이것을 선택하여 잃게 되는 저것의 장점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 옳을 것이라는 편향이 있습니다. 그래야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이든 얻는 이득이 있고 잃는 고통이 있습니다. 대학을 선택한 것도, 학과를 선택한 것도, 직업을 선택한 것도, 배우자를 선택한 것도, 자녀를 더 낳기로 선택한 것도, 덜 낳기로 선택한 것도 후회가 될 수도 있고 잘했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결과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믿음에서 옵니다. 그러나 많은 고려를 하고 선택한 경우는 지금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결함이 크게 느껴지고 내가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장점들이 크게 여겨져서 선택에 후회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사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많은 이들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하고는 합니다. 그러면 왜 이 길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이런 것일 줄 몰랐다!”라고 말합니다. 신중히 고려해보지 않고 선택한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안 좋은 것은 사제를 선택해서 얻는 행복보다 그것을 선택하지 않아서 얻을 행복에 대해 너무 잘 알고 크게 여기는 데 있습니다.
인간의 사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냥 나의 선택이 잘 된 선택이었다고 믿으면 그만입니다. 저는 25살까지는 사제가 될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25년 이상은 이 길을 선택한 것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소에 신중했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저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렇게 결심하면 됩니다.
시인 정호승 씨가 기자 생활을 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성철스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성철스님은 성격이 완고하여 어린이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성철스님은 다른 스님들이 먹고 설거지가 끝난 후 하수구로 내려가기 직전에 걸려있는 밥풀들을 이쑤시개로 하나하나 찍어서 드시던 분이었습니다. 그를 만나려면 부처님께 먼저 1,000배를 해야 했습니다. 또 그분에게 사진을 찍자고 자세를 취해달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정호승 씨는 운 좋게도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사진을 찍는 것도 허락 받았습니다. 해인사에서 설법을 마치고 백련암 방향을 가던 중 백련암 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해주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사진기를 마구 눌러대는데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그래,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
정호승 씨는 이 말씀이 농담인 줄 알았으나 있는 필름을 다 쓸 때까지도 아무 불평 없이 원하는 포즈를 다 취해주었다고 합니다.
(참조: ‘사진을 찍으려면 1,000번을 찍어라’, 정호승의 새벽 편지 중)
성철스님은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정호승 씨를 만나겠다고 한 것이 후회스럽지 않았을까요? 분명 약간은 그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후회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만나기로 한 순간부터 자신의 결정에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매사에 후회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나의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 선택에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런 마음이 왔는지 모르지만,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마음이 언제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많은 실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런 잘못에 후회가 없습니다. 발전하는 기회로 주님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냥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고백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후회 없는 삶을 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넜지만, 그 이후로는 해충도 많고 물도 부족하고 만나도 맛이 질리고 고기도 먹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향하면서도 자꾸 이집트 쪽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탈출시켜 준 모세에게 불평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막에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회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 십자가를 지시겠다고 하신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 선택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선택은 아버지의 선택 안에 있기 때문에 후회가 없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 길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던 후회 없는 선택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고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주님 뜻 안에 머물며 주님 안에서는 나의 모든 선택에 후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믿으면 됩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무십시오. 그러면 모든 선택에 있어서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나의 선택이 하느님 선택 안에 머묾을 믿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는 운전해서 낯선 지방에 갈 일이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지도를 보고서 경로를 미리 확인해야 했습니다. 만약 조수석에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수시로 지도를 보면서 길을 확인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종이 지도를 보지 않습니다. 보험회사에서도 이제 보험 가입할 때 지도를 선물로 주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적의 정보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 있기 때문이지요. 초창기에는 검색 속도가 느려서 그냥 종이 지도 보는 것이 더 편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당연히 빠르게 안내해 주는 내비게이션이 편합니다. 심지어 대중교통도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가장 빨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경로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하지 않는 사람을 보기가 더 어렵습니다. 아마 그만큼 내비게이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때, 불안해하지도 또 의심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내비게이션을 신뢰하는 정도는 될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쪽으로 가라고 하는데, 그 길은 아니라며 자기 편해 보이는 반대편으로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마음 가는 대로만 살겠다면서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안내를 무시하면 하느님 나라가 아닌 엉뚱한 곳에 가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첫 자리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에 가장 정확하게 갈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라.”면서 함께하도록 부르십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해달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충분히 허락할 수 있는 이유처럼 보입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 작별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걸린다고 이 정도도 허락하시지 않을까요? 세상의 어떤 것도 주님을 따르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혈육의 정을 초월하는 결단을 가져야 할 정도로 중요하고 긴박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긴박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믿음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에 정확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주여, 이제 나의 회상과 고백을 원하시오니 이 마음을 굽어보소서. 그토록 차지던 죽음의 끈끈이에서 빼 주신 내 영혼, 이제 당신께만 붙게 하소서(성 아우구스티노). 사진설명: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