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명은 재면(載冕). 흥친왕으로 봉해지면서 희(熹)로 개명하였다. 자는 무경(武卿)이고 호는 우석(又石)이다. 고종의 형이며, 영선군 준용(永宣君 埈鎔)의 아버지이다.
1863년 사용(司勇)의 직을 맡았다가, 이듬해 정시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규장각시교(규장각시교)와 예문관 검열관(예문관 검열관), 승정원 주서(승정원 주서) 등을 거쳐 1865년 동부승지(동부승지) · 대사성(대사성) · 이조참의(이조참의) · 부제학(부제학) 등을 지냈다.
1866년 도승지, 이듬해에는 직제학, 곧 이어 이조참판으로 승진하였고, 1878년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올랐으며, 이듬해 종1품에 특서되었다.
1880년 병조판서, 이듬해에는 금위대장, 이어서 판돈녕부사로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예조판서를 지냈다.
1882년 6월 임오군란 때 무위대장(武衛大將)으로 사태수습에 힘썼고, 호조판서·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훈련대장을 겸하였다.
그 해 12월, 이미 7월에 청나라에 호송되어 톈진(天津) 보정부(保定府)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한 뒤 이듬해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가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였다.
1885년 4월 귀국하였다가 아버지를 잊지 못하여 세번째로 청나라에 가서 8월 흥선대원군이 환국할 때 이를 배종하였으며, 그뒤 약 10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이 집정하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동문사당상경리사(同文司堂上經理事)가 되었다가 제1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때 보국숭록대부로서 궁내부대신이 되었다.
1900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된 뒤 1907년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0월 육군부장(陸軍副將)이 되었다. 11월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다녀왔고, 1909년 대훈금척대수장(大勳金尺大綬章)을 받았으며, 1910년 흥친왕(興親王)에 봉해졌다.
흑백이지만, 그 당시의 사진 자료들이 남아있군요... 설마, 포토샵 등으로 왜곡/날조된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궁금한 것인데... 이희(父: 1919년 사망)-이척(子: 1926년 사망), 이재면(父: 1912년 사망)-이준용(子: 1917년 사망)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들이 지금 어딘가에 생존하고 있나요? 실제로 누구를 촬영한 사진들이었는지 '검증'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고 보이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현존하는 대원군의 자손들은 거의 유일하게 의친왕계 자손분들 뿐입니다...의친왕이 상해 임정으로 탈출하려다...뭔 간호산지 기다린다며 떼를 쓰셔서...시간이 지체되어 다음날 출발한 관계로 단동역에서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단 ..어설픈 독림운동(?) 기록 빼고는..그저 그의 자손들이 어설프게 구전하는 일본놈들 싫어하셨단 내용밖엔 없는 현실이니...
저의 객관적 분석으론...황제 자신도...황태자 신분도 일제에 해가돼면 독살이 기도돼던 당대에...이미 일제가 다 먹은 조선에서...황제직계도 아닌 친왕가의 반일 자손들이 온전히 존속됐을 리가 만무한데...유일하게 고종의 직계중 의친왕만 자손이 번성하고...반 고종 계열 이재면의 집안으로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가 양자로 들어감을 보건데...의친왕은 아무 개념이 없이...그저 영친왕이 황태자가 됀 것에만 반감을 사서 돌발행동을 잠시 하려다 포기한 걸로 보이며...
참고로, '안중근'이 지적한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의 15가지 죄 중에서, 마지막 15번째는 "일본왕(명치왕=明治王)의 아버지(효명왕=孝明王)를 시해한 죄"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몇몇 일본의 선구자들이 주동하여 효명왕(孝明王)을 암살한 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일제(日帝)가 저질렀던 "조선 왕족들에 대한 수작들"도 거의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위키백과(한국어)>를 지금 검색하여 보니까... "독살설"이 나옵니다. (처음에 제가 본 자료는 아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황국주의가 자리잡아 독살설은 일본 사회에서 금기가 되었지만, 안중근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등이 '코-메이'왕='효명'왕(孝明王)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하라구치 키요시'(原口 清)가 간호기록 등을 토대로 천연두에 의해 자연사했다고 주장하여 두 주장이 크게 맞서게 되었다."
지금은 명치왕(明治王)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있는 일본의 학자들도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일본열도에 주둔한 맥아더 사령부에 어떤 사람이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와 가계도(家系圖)를 지참하고 찾아와서, 자기가 "일본의 정통 왕"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와 가계도(家系圖)가 진짜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첫댓글 정말이지 홍선생님 글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그동안 궁금했던것이 눈녹듯 해소가 됩니다.
감사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지나치신 칭찬...새해선물로 너무 과분합니다...김선생님...새해 더욱 건승하실 겁니다...ㅡ. .ㅡ
흑백이지만, 그 당시의 사진 자료들이 남아있군요... 설마, 포토샵 등으로 왜곡/날조된 것은 아니겠지요? (하하하)
궁금한 것인데... 이희(父: 1919년 사망)-이척(子: 1926년 사망), 이재면(父: 1912년 사망)-이준용(子: 1917년 사망)의 얼굴을 직접 본 사람들이 지금 어딘가에 생존하고 있나요?
실제로 누구를 촬영한 사진들이었는지 '검증'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고 보이는데...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현존하는 대원군의 자손들은 거의 유일하게 의친왕계 자손분들 뿐입니다...의친왕이 상해 임정으로 탈출하려다...뭔 간호산지 기다린다며 떼를 쓰셔서...시간이 지체되어 다음날 출발한 관계로 단동역에서 발각되어 미수로 그쳤단 ..어설픈 독림운동(?) 기록 빼고는..그저 그의 자손들이 어설프게 구전하는 일본놈들 싫어하셨단 내용밖엔 없는 현실이니...
저의 객관적 분석으론...황제 자신도...황태자 신분도 일제에 해가돼면 독살이 기도돼던 당대에...이미 일제가 다 먹은 조선에서...황제직계도 아닌 친왕가의 반일 자손들이 온전히 존속됐을 리가 만무한데...유일하게 고종의 직계중 의친왕만 자손이 번성하고...반 고종 계열 이재면의 집안으로 의친왕의 둘째아들 이우가 양자로 들어감을 보건데...의친왕은 아무 개념이 없이...그저 영친왕이 황태자가 됀 것에만 반감을 사서 돌발행동을 잠시 하려다 포기한 걸로 보이며...
그 자손들이 증언하는 내용도...상당부분 할아버님에 대한 예우로...포장됐다 보이니...현존하는 유일한 황손 가족들인 의친왕계 자손들의 증언만을 진실로 수긍함은...오히려 객관성이 많ㅍ이 떨어진다 사료됍니다.
아참...김선생님 새해 더욱 건승하십시오.
홍진영 선생님,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고(古)지도, 고(古)사진에 관한 안목을 활용하시어 관련 자료들을 검증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올해에 기대하신 소원을 꼭 성취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안중근'이 지적한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의 15가지 죄 중에서, 마지막 15번째는 "일본왕(명치왕=明治王)의 아버지(효명왕=孝明王)를 시해한 죄"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몇몇 일본의 선구자들이 주동하여 효명왕(孝明王)을 암살한 후에 명치유신(明治維新)을 성공시켰다고 합니다.
일제(日帝)가 저질렀던 "조선 왕족들에 대한 수작들"도 거의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메이지 시대의 진실은 찾아내기 어려운데 어디서 보셨는지요?
제가 예전에 일본의 인터넷 포털에서 여러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충 읽고 지나간 자료였는데, "효명왕(孝明王) 암살 의혹"에 관한 내용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그 자료를 다시 찾게 되면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위키백과(한국어)>를 지금 검색하여 보니까... "독살설"이 나옵니다. (처음에 제가 본 자료는 아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인하여 황국주의가 자리잡아 독살설은 일본 사회에서 금기가 되었지만, 안중근을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이와쿠라 토모미'(岩倉 具視) 등이 '코-메이'왕='효명'왕(孝明王)을 독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하라구치 키요시'(原口 清)가 간호기록 등을 토대로 천연두에 의해 자연사했다고 주장하여 두 주장이 크게 맞서게 되었다."
지금은 명치왕(明治王)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있는 일본의 학자들도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일본열도에 주둔한 맥아더 사령부에 어떤 사람이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와 가계도(家系圖)를 지참하고 찾아와서, 자기가 "일본의 정통 왕"이라고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그 삼종(三種)의 신기(神器)와 가계도(家系圖)가 진짜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자료입니다 이 부분 자료가 희귀 한데 좀 더 구할 수 없나요
"명치왕(明治王='메이지'왕)의 정통성"에 관한 자료도 일본의 역사 관련 인터넷 사이트에서 읽어본 것입니다. 제가 지금 기억하고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더 자세한 자료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건강하시고 새해에도 좋은 일들이 많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고종말년 어진은 품격이 너무 떨어집니다. 필법자체가 정식 궁중화가의 것이 아닌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