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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춘천중도문화유적지보존범국민운동협의회 원문보기 글쓴이: rjflrja73
1월 월례학술회의, 일시: 2015.01.28.14:00, 장소 국가인권위원회 8층, 주최 한민족사중앙연구회, 강의초록
춘천의 상고사 algorithm과 역사문화 콘텐츠의 개발
노중평
춘천고조선유적지보전협의회 공동대표 문화위원회 위원장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반도에 제일 먼저 나타난 인농은 풍주 배곡(적봉 홍산)을 출발한 풍이족風夷族과 조이족鳥夷族이다.
1. 風夷族와 鳥夷
『扶蘇譜書』 昔有赤帝諱復解號曰祝融 爲‘桓國之帝’開於己卯 都於風州倍谷 取‘鳥夷’之女姮英 爲后生九子封九州...始出太夏公 卽赤帝祝融之六十一孫也 彼卽‘風夷人’
조선사국도朝鮮四國圖. 한반도가 막조선으로 불리기 전에 두지주豆只州로 불렸다.
해석
*‘桓國之帝’開於己卯 都於風州倍谷 娶‘鳥夷’之女姮英
한국의 제가 기묘년에 풍주 배곡에 도읍하고 조이의 여자 항영을 비로 삼았다.
(참고, 한국시대에 홍산과 적봉 일대를 풍주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인이 제가 되어, 이 고장에 도읍하였다. 한인을 배출한 풍이족과 항영을 배출한 조이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 爲后生九子 封九州
한인과 항영이 혼인한 후에 아들 아홉을 낳아 9주에 봉했다. 이 시대에 이미 한국의 행정구역을 9주라 하였다.
(참고, 한족桓族을 후에 구황족九皇族(풍이족의 장자족長子族), 구한족九桓族(풍이족의 지손족支孫族)이라 부르게 되는 근거가 된다.)
* 始出太夏公 卽赤帝祝融之六十一孫也 彼卽‘風夷人’
태하공 즉 적제 축융의 61세 손이다. 그가 풍이인이다.
(참고, 그는 적제 축융인 한인천제의 61세손이다. 그는 전욱고양顓頊高陽과 제곡고신帝嚳高辛이 불주산不周山 에서 싸울 때 하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욱고양이 패하는 바람에 전욱고양의 편에 섰으므로 단국檀國의 2세 홍제洪帝에게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홍제에게 귀순하자마자 홍제8년에 제곡고신이 단국의 국도가 있는 수분하綏芬河(황하의 지류)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물리쳐 그 공으로 홍제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賜姓하였다. 그가 진주소씨晋州蘇氏의 시조가 되 는 분인데, 진주소씨의 족보 서문인 『부소보소扶蘇譜書』에 그를 풍이인風夷人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한인천제가 풍이족의 조상이 된다는 뜻이다. 곤오는 청동정靑銅鼎과 곤오검昆吾劍을 발명하여 치우, 황제와 함께 청동기시대의 3 인으로 불리고 있다. 중원에 곤오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2, 鳥夷 《集解》云:“郑玄曰鸟夷,东方之民”,泛指东方边远地带的居族;
清代大学者 胡渭则以今日本、朝鲜等地当之
정현이 “조이는 동방의 민족으로 동방의 변두리 멀리 떨어진 지대에 사는 민족”이라고 지적했다. 청대의 대학자 호위는 “즉 지금의 일본, 조선 등지가 조이임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출전,《禹贡》“鸟夷”的考古学探索 王青)
(참고, 동방지민東方之民은 산동반도에 사는 동이족과 한반도에 사는 동이족의 총칭이다. 그래서 그들이 사는 곳을 화이華夷가 동방변원지대東方邊遠地帶라 하였던 것이다. 청대의 학자 호위는 이들이 일본과 조선 등지에 사는 민족이라 하였다.)
3. 豆只州
풍이와 조이가 사는 땅을 막조선, 조선반도, 한반도로 부르기 전에 두지주라 하였다.
한 대와 삼국시대 13주의 역사변동과 왜곡과 말살. 조선은 번조선이 서주徐州와 청주靑州 쪽에, 진조선이 연주兗州와 유주幽州 쪽에, 막조선漠朝鮮이 한반도에 있었다. 진번군 추론은 『사기 조선열전』을 근거로 한 것이다.
『단군세기』 3세 가륵 무신10년 (BC 2173) 두지주의 예읍이 (본국의) 명을 거역하니, 여수기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 땅을 일러 소시모리라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이 되다. 그 후손에 협야노라는 자가 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에 웅거하며 스스로 천왕이라 한다.
(『檀君世紀』 三世 嘉勒 戊申十年 豆只州濊邑叛命 余守己斬其酋素尸毛犂 今轉音爲牛首國也 其後孫有陜野奴者 逃於海上據三島 偕稱天王)
동평국 위치도
두지주豆只州: 豆之州。豆: 콩, 祭器。州: 朝鮮 九州의 하나, 구주의 유습은
한인천제 때 아들 9명을 9주에 봉하며 시작되었다. 따라서 조선의 전신이 되는 나라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檀國일 가능성이 있다.
콩의 산출이 많았을 것이다, 제기를 만들기 위하여 토기를 많이 구었을 것이다. 두지주는 조선 9주의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막조선이 되기 전의 명칭이 두지주였다고 볼 수 있다.
예읍濊邑: 『呂氏春秋』 濊 東海濱 朝鮮之地。東海는 渤海남쪽 바다。산동반도 남쪽바다。邑은 州의 州都。즉 두지주의 주도。
중국의 삼국정립시대三國鼎立時代의 지도. 번조선이 일어난 동해빈이 동해를 끼고 있는 산동반도의 남쪽이다. 당시에 진에게 조선이 멸망한 후라, 지금의 한반도韓半島를 조선반도朝鮮半島라 하지 않고 예맥濊貊이라 하였다.
華夷가 한반도에 사는 인종을 島夷나 鳥夷라고 했는데, 도이와 조이의 주거지가 예읍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이는 동이에서 ㅇ자가 탈락된 발음일 수 있다. 즉 동이의 변음으로 보는 것이다. 조이는 홍산 출토유물을 생산한 주인공으로 볼 수 있다. 조이 출신의 항영을 비로 맞은 한인천제를 배출한 풍이족이 조이족과 이웃하여 있었다.
반명叛命: 반명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명령을 듣지 않은 것이다. 叛자는 절반만 반란을 일으켰다, 즉 군대를 일으키지 않은 항명을 하였다는 뜻이다.
무엇에 항명하였을까?
두지주는 콩이 많이 나는 곳이고 제기가 생산되어 제기에 콩을 담아 동쪽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제사지시를 어겼다고 볼 수 있다. 제사의 대상은 한국의 한인천제, 배달나라의 한웅천왕일 수 있다.
소시모리素尸毛犂: 제관은 소시모리이다. 소시모리가 누군가를 사사로이 제사지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단서는 소시모리에 있다. 쇠머리를 올려 제사지냈기 때문에 소시모리라 불렸을 것이다. 그 이유로 소시모리가 화를 자초했다고 볼 수 있다.
소시素尸는 흰옷을 입은 치우천왕이라는 뜻이다. 치우천왕처럼 백장삼白長衫을 입고 제사지냈기 때문에 소시라 하였다고 볼 수 있다.
모리毛犂는 쇠머리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여수기余守己: 余는 중여곤衆余鯀이다. 수守는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뜻이다. 기己는 중여가 기성己姓 집안 출신이라는 뜻이다. 여수기는 기성 출신의 중여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마 중여곤의 후손일 것이다.
감기추斬其酋: 추장의 목을 베다. 소시모리를 예읍의 추장이라 하였다. 예읍의 총수가 추장으로 호칭되었던 것이다. 이때는 두지주가 막조선漠朝鮮으로 호칭되기 이전이었다. 중여곤의 후손 여기수가 소시모리의 목을 베었다.
여기수가 전욱고양시대의 제관이었던 중여곤의 후손이라면 그도 또한 조선의 제관이었다고 볼 수 있다. 두지주의 제관인 소시모리를 조선의 제관인 여기수가 처형하였다면, 그것은 국가제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금전음위우수국야今轉音爲牛首國也: 지금은 음이 변하여 우수국이 되었다. 그러니까 소시모리(쇠머리)가 우수가 되었다는 뜻이다. 왜 그랬을까? 조선의 가림토 문자를 한자로 바꾸어 썼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한자는 조선이 진秦에게 BC 283년에 멸망하기 전에 썼던 문자이므로 조선의 문자라 볼 수 있다.
소를 바쳐 제사지낸 사람은 복희伏羲였다. 그가 소를 제물로 바쳐 제사지내면서 복희伏犧라 부르게 되었다. 즉 우가牛加 집단의 제사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물고기와 양을 바쳐 제자 지냈다. 소를 바쳐 제사지냈기 때문에 반명叛命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군왕검은 조선을 건국한 무진 BC 2333년에 단국 국도 수분하에서 조선 국도 아사달로 천도하였다. 조선에 12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3한 3국, 남북 2옥저, 동,북 2부여, 예, 맥, 고이, 시라, 고례 12국이었다.
그후손其後孫: 그 후손은 소시머리, 즉 우수의 후손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후손을 말한다. 우두천왕牛頭天王이 그이다.
유협야노자有陜野奴者: 협야노는 일본의 스사노미코토, 즉 일본인의 시조이다.
도어해상逃於海上: 바다건너로 도망쳤다. 즉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뜻이다.
삼도三島: 일본
4. 濊
단군왕검은 단국의 국도 수분하를 출발하여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길림)에 와서 BC2333년에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곳이 3조선에서 진조선지역이다.
1). 濊: 『呂氏春秋 侍君賢』에서 예濊는 東海之濱 朝鮮之地이라는 지명을 의미하였다. 『三國志전 扶餘傳』은 부여가 통치한 지역이 본래 예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부여강역 중 동남부에 속했다. 『三國志 東夷傳』에서 예는 한반도 동북부에 있었다고 하였다. 『後漢書 武帝紀』는 인구가 28만여인万餘人이라 하였다. (최무장의 예맥) 이곳 예는 예濊(어민漁民)가 아니라 예獩(유목민遊牧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명설
《呂氏春秋》侍君賢, 예濊는 동예지빈東海之濱에 있는 조선의 땅朝鮮之地이다.
* 이곳은 번조선이 도읍한 곳이다. 최초의 지명설이다.
* 《삼국지三國志》 부여전은 부여가 통치한 지역이 원래 예의 땅이었다고 하였다.
* 《삼국지三國志》 동이전은 예는 한반도 동북부에 있었다고 하였다.
원주민설
1). 《逸周书·王会解》 濊人,为东北和朝鲜半岛的土著民族。
예인은 동북과 조선반도의 원주민이다.
(참고, 토저민족土著民族은 본래부터 거기에 살았던 사람들, 원주민이다.)
2). 《太平御览》卷 939 引 《魏略》称“濊国出班鱼”和《说文解字》称魵鱼“出濊邪头国”以及段玉裁注,认为濊人曾经建立了自己的国家,“濊邪头”可能是
东夷人本族语言的国名,
『위략』 예국은 반어에서 나왔고, 『설문해자』 분어는 예사두국에서 나왔다고 단옥재가 주를 붙였다. 예인이 자기의 국가를 세웠다고 인정할 수 있다. ‘예사두’는 동이인 본족의 언어로 표현된 국명일 수 있다.
*『위략』은 예국濊國이 반어班魚에서 나왔고, 『설문해자』는 예가 사두국邪頭國인 분어魵魚에서 나왔다고 하였다.(段玉裁注) 예인이 일찍이 자기의 나라를 세웠다고 인정된다.
(참고, 나라의 정체성의 상징인 나라의 문장이나 종족의 아이콘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 조선朝鮮의 선鮮자에 들어 있는 어魚자에 “예濊가 나왔다는 반어班魚와 분어魵魚의 의미”가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중원인(번조선인)이 약어로 부르는 예국이라는 설(中原人简称之为濊国)
3). ‘濊邪头国’的主要居民是东夷人,后来才将国名引伸为族名。
* ‘예사두국’의 주요 거주민은 동이인이다. 후에 나라 이름이 족명이 되었다.
(참고, * 예사두국에서 사두국은 탈락하고 예만 남아 종족 명칭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나라 이름을 등치가 크고 종류가 다양한 반어(분어)에 비유하여 큰 나라라는 뜻으로 ‘예사두’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다.
* 장자가 조선의 크기를 곤鯤에 비유하여 말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4). 濊人也就是没有迁往海岱留在东北的一部分东夷人。
* 예인이 해대海岱로 가서 살면서 동북 쪽 거주자의 일부가 동이인이 되었다.
(참고, 해대는 내륙에 있다. 그 일부가 동이인이 되었다고 했는데, 예는 인종적인 명칭이고, 동이족은 문화적인 명칭이므로 그 의미를 다르게 보아야 한다.)
5). 只有单单大岭以东的濊人,没有改
* 지금 동이에 속한 예인은 백두산에 있다. 변한 것이 없다.
5. 맥貊
1). 西周时,貊为北国之一。韩国中部城市春川市,即古代貊国的古都
*중국의 Baidu百科는 서주 때 맥은 북쪽에 있던 나라 중의 하나라 하였다.
* 한국 중부 성시인 춘천시가 맥국의 고도였다고 소개한다.
2). 貊国 《山海经》 海内西经记载,古国,中国神话中的国家,貊国,
在汉水东北。
*『산해경』 해내서경에 기록하였다. 옛 나라, 중국 신화에 나오는 국가 맥국이다. 한수 이북에 있었다.
(참고, * 예국은 동해빈에 있었고, 맥국은 한수 동복 쪽 연나라 부근에 있었다. 연에 멸망하였다. (地近于燕,灭之。)
* 맥국은 북발北發이라 하였다. 관자管子는 발發을 동이東夷라 하였다. 발에는 족足과 족族의 뜻이 있다.)
* 멸망한 이후에 종족이동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때의 맥국은 진조선에 속한 맥국으로 볼 수 있다. 곽박은 다음과 같이 주를 달았다. “부여국은 옛 맥국의 땅에 있다. 장성의 북쪽에 있으며 현토로부터 천리되는 곳이다.”
3).『山海经』의 「海内西经」 孟鸟在貊国东北,其鸟文赤、黄、青,东乡。
맹조가 맥국의 동북쪽에 있다. 그 새의 색채는 적, 황, 청이고, 동쪽을 향하고 있다.
(참고, 『山海经』의 「海内西经」 맹조: 효梟(올빼미)로 볼 수 있다. 올빼미는 단군왕검의 아이콘이다. 맹조가 맥족을 몰아간다고 볼 수 있다.)
4). 『山海经』 「海内西经」 貊国,在汉水东北。地近于燕,灭之。
맥국은 한수 동북쪽에 있다. 연나라 부근에 있다가 연에게 멸망하였다.
5). 貊,古代汉族称对东北方少数民族的一种称呼,先秦时期北方民族。
맥은 고대 한족이 칭하기를 동북방 소수민족 중의 한 종으로 호칭하였다. 선진시기先秦時期에 있었던 북방민족이라 하였다.
6). 貊字古多作“貉”,往往与“胡”连称“胡貊”,泛指貊和北方民族。
貊자의 고자는 맥貉자로 많이 만들었다. 왕왕 호胡를 붙여 호맥胡貊이라고도 한다. 백과 북방민족을 지적하는 것이다.
(참고, 貊자의 고자는 맥貉자이다. 왕왕 호胡를 붙여 호맥胡貊이라고도 한다. 백과 북방민족을 지적하는 것이다.)
6. 濊貊
濊貊[wèi mò] 濊貊是东北的古老的地区民族,又称貉、貉貊或藏貊,古文献称之为“白民”,“毫人”或“发人”。濊貊族是由濊人和貊人汇合而成,以农业城栅为特点,不同于游牧族。(以下 百度)
예맥은 동북쪽에 상고시대에 살았던 옛 종족이다. 맥, 맥맥 혹은 장맥이라 칭한다. 고문헌에서 칭하기를 백민, 호인, 혹은 발인이라 칭했다. 예맥은 예인과 맥인을 합쳐서 부르는 호칭이다. 농사를 짓고 성책을 두르는 특징이 있다. 유목민족과는 다르다.
예맥이라 한 이유는 진에게 조선이 멸망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예족은 예족 대로, 맥족은 맥족 대로 따로 불렀다. 그러다가 예족과 맥족을 합쳐 예맥이라 하였다. 그러게 부르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 진조선과 번조선이 멸망하여 조선의 백성이었던 예족과 맥족이 자연스럽개 합치게 되었다.
(2). 요서에 살았던 진조선족인 맥족과 산동에 살았던 번조선족인 예족을 추방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도착한 곳이 한반도였다.
(3). 맥족을 예獩족으로도 불렀다. 예濊족은 물고기를 잡고 염전을 하고 바닷가에 사는 인종이라는 뜻이고, 예獩족은 요동과 만주의 내륙에 살면서 목축을 하는 인종이라는 뜻이다. 예穢족이라 할 때는 농사를 짓는 인종을 의미하였다. 농사를 짓고 성책을 두르는 인종을 예穢족으로 볼 수 있다.
『山海经』의 「海外西经」 白民[bái mín]:神话中古国名。『山海经·海外西经』:“ 白民之国 ,在 龙鱼 北,白身披发。” 郭璞 注:“言其人体洞白。”
『산해경∙해외서경』은 백민은 중국신화에 나오는 옛 나라 이름이라 하였다.
『산해경∙ 해외서경』은 백민의 나라를 용어龍魚의 북쪽에 있고, 몸의 흰 피부색은 발인(동이족-예족)으로부터 나누어 받은 것이다. 곽박은 주를 달았다. 그들의 몸의 색깔이 물가에 있는 동굴에 살았기 때문에 희게 보이는 것이라고.
아마 백민은 백인이라는 뜻으로 쓴 말일 것이다. 한국인은 대부분 피부 색깔이 백민에 속한다.
歷史分布
濊貊族在夏商之际广泛分布于南起辽东半岛北至松花江流域中游的广大地区,濊貊主体在关东,周灭商后逐渐迁至其他东部地区,另有一部分濊貊人迁至古朝鲜半岛北部,最远到汉江南北两岸都有濊貊人的足迹 (바이두에서 인용)。
역사분포
예맥족(조선족)은 상나라 때에 요동반도 북쪽에서 일어나 송화강 유역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널리 분포하여 살았다. 예맥의 주거생활의 주체는 관동지방이다. 주가 상을 멸망시킨 이후에 점차 동부지구로 쫓겨갔다. 일부분만이 예맥인으로 남아서 고조선반도의 북부에 살았다. 최근에는 멀리 한강 남북에도 대안에 예맥인의 생활 흔적이 남아 있음이 발견된다. (바이두에서 인용)
요동반도북辽东半岛北: 요동반도북쪽은 옛날 유주였던 요서로 볼 수 있다.
송화강유역松花江流域: 단군왕검이 정착한 아사달(길림)이다.
예맥주체재관동濊貊主体在关东: 아사달에서 예맥의 주체는 이주민인 예족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맥족이다.
주멸상후축점우지기타도우지구周灭商后逐渐迁至其他东部地区; 주가 상을 멸망시킨 이후에 주, 진, 한 3대에 걸쳐 예맥족 추방정책을 시행하였다. 추방당한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맥이라는 이름으로 정착하였다. 이미 그곳인 평양에 북막이 있었고, 춘천에 막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유일부분예맥인천지고조선반도북부另有一部分濊貊人迁至古朝鲜半岛北部: 일부분이 남아서 옛 조선반도북부에서 생활하였다.
최원도한강남북양안도유예맥인적족적最远到汉江南北两岸都有濊貊人的足迹:최근에 예맥인의 생활 흔적이 한강을 끼고 양쪽에서 발굴이 되는데, 춘천 중도유적이 그 대표적인 집단주거유적지이다.
7. 惠漠
惠漠: 公元前约1800年,肃慎以南的惠(濊)、漠(貊)两族逐渐迁徙在喜都(今长春)融合成为惠漠(濊貊)部族),为了纪念两大部族融入肃慎王国,肃慎王遂改国号为德惠(得濊),改“喜都”为“合龙(合隆)城”。西汉时期建立扶余国,渐与中原东汉文化交流。
혜막: BC 1800년, 숙신 이남의 혜)(예), 막(맥) 두 인종이 점차 희도(지금의 장춘-진조선의 국도 길림 가까이에 있다)로 옮겨가면서 섞이게 되어 혜막(예맥)부족이 되었다. 양대부족이 융합하여 숙신국을 세워 기념하였다. 숙신왕은 국호를 혜덕(득예)으로 고쳤다. 부여국이 건립하였고, 점차 중원의 동한문화와 교류하였다.
1). 예맥을 혜막이라고도 하였다. 막조선이 있었기 때문에 막조선의 일원으로 존립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2). 숙신 이남을 예(예)라 하였다. 희도를 고쳐 합룡성(합융성)이라 하였다.
8. 漠朝鮮
1). 『太白逸史』 檀君王儉立都阿斯達 今松花江也 始稱國爲朝鮮 三韓, 高離,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夫餘, 濊與貊, 皆其管境也
『태백일사』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초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삼한, 고이,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 모두가 조선의 관경 안에 있다.
2). 3조선병립기
*1기: 『朝鮮紀(李固善)』 第4世 檀帝 夫婁 辛丑元年...九月封 仲弟夫餘于遼西曰茫球王 封三弟夫宇于東海濱曰東平王 封四弟夫蘇于綏芬河曰句麗王
제4세 단제 부루 신축원년...9월에 중제 부여를 요서에 봉하여 망구왕이라 하였고, 3제 부우를 동해빈에 봉하여 동평왕이라 하였고, 4제 부우를 수분하에 봉하여 구려왕이라 하였다. (그림1 조선4국도 참조)
*2기: 『한단고기桓檀古記』三月十六日築壇祭天 遂卽位藏唐京 改國號爲大夫餘 改三韓三朝鮮 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臨理之制
3월16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장당경에 가서 즉위하였다. 국호를 대부여로 고쳤다. 3한을 3조선으로 고쳤다. 스스로 3조선이 하나와 같이 3조선의 체제를 받들었다.
(참고, * 이때의 삼조선은 한반도를 포함한 眞朝鮮, 番朝鮮, 漠朝鮮이었다.
*『한단고기』는 3조선에 대하여 기록하였으나 『조선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 丘勿에 대하여 기록에 차이가 있다. 『한단고기』는 44세라 하였고, 『조선기』 는 46세라 하였다. 46세가 된 것은 단국檀國의 천일태제天一泰帝를 조선의 1세 로, 지일홍제地一洪帝를 조선의 2세로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조선을 대부여大夫餘로 호칭을 변경한 해를 『한단고기』는 구물 신축원년 BC 2240년이라 하였 고, 『조선기』는 구물 을묘11년이라 하였다.
막漠은 조선을 3조선으로 나누었을 때, 진조선眞朝鮮, 번조선番朝鮮, 막조선莫朝鮮 중에서 막조선을 말한다. 『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에 나오는 막조선漠朝鮮의 漠은 막莫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즉 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 때 병진 원년(BC 425년) 3월 16일 단군 구물이 장당경에서 즉위하고,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 고치고, 삼한三韓을 삼조선
三朝鮮이라 바꾸어 불렀다. 이는 막조선이 역사에 등장하는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을 위서로 몰아 버린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사서에 漠이 나오기 때문이다.
檀君朝鮮의 疆域 : 『경패經稗』 3권에 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城 “조선 구려 등 여러 나라가 실제로 모두 청주지역에 이었다.”고 하였다. 진시황 8년에 조선이 멸망하여 47세 고열가단군이 구월산에 몸을 숨긴 후에, 한무제가 진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청주)에 현토와 낙랑 2개 군을 설치하였다. <오례통고五禮通考>201권에, “한무제가 설치한 현토, 낙랑 2군이 다 옛 우이嵎夷의 땅으로 청주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옛 우이 땅이었던 청주지역은 산동성,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해당한다. 후대에 와서 신라와 백제를 우이에서 나온 나라로 인정하였다.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춘추金春秋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으로 삼았던 것이다. (심백강 설)
부록
제 안 서
춘천의 중도는 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3조선 중에서 막조선의 국가군장의 도읍지를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로서, 이 유적지의 훼손을 방지하여 보존하고, 조선의 역사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국가미래문화의 창달은 물론 관광수입의 증대를 기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문화 콘텐츠 활성화 운동을 벌이기를 제안한다.
내용
단군왕검청배 굿거리 부활
우리 전통굿에 반드시 단군왕검을 감응신령으로 청배해야 하는 굿이 있으므로 이 굿을 재현하여 잠자는 조선의 혼령을 깨워드리도록 한다.
1. 감응청배(산천거리, 도당거리)
2. 제석거리(삼신칠성거리)
3. 별성거리(한인천제청배거리)
4. 창부거리(부루단군청배거리)
5. 성조거리(성조대신청배거리)
6. 대감거리(단군왕검청배거리)
2. 삼성제례
삼성은 한인, 한웅, 단군왕검을 지칭하는 조선왕조시대의 호칭으로, 황해도 구월산에서 조선의 마지막 단군인 제47세 고열가 단군 때부터 시행해 오던 국가제례로서, 제안자 노중평이 1998년부터 서울 삼각산에서 복원하여, 현재는 국가지원사업으로 10월 3일 개천절에 삼각산 솔밭공원에서 시행하는 강북구민의 제사가 되어 있음.
삼성제례를 막조선의 국가유적지인 중도에서 종묘제례에 준하여 시행하기로 한다.
3. 단군조선 역사문화 콘텐츠 개발 시행
예술인들을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 보존 및 개발저지 범국민운동본부 사업에 동참시키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문화 콘텐츠 개발사업을 시행한다.
대한민국의 예술을 열린 시각으로 다양하게 포용하고 있는 문학지 『인간과 문학』에 단군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고 시행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문화콘텐츠를 위촉과 공모를 병행하여 1차로 원작을 확보하게 하고, 강원도와 춘천시는 예술인들과 공동으로 이를 재제로 하여 2차 공연물을 만들어 누구든지 접할 수 있도록 한다.
조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와 조선시대 전후로 한다.
작품의 지리적 배경은 중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막조선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야 한다.
예술 장르에는 성역을 두지 않는다.
원작의 경우에 집단창작도 가능하다.
창작을 위한 역사자문기구를 구성한다.
4.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 보존 및 개발저지 운동본부 발전적 해체와 콘텐츠 역사학의 개척
1. 관학과 차별화할 수 있는 콘텐츠 역사학을 개척한다.
2. 콘텐츠 역사학은 콘텐츠 제공을 목적으로 기술한다.
3. 콘텐츠 역사학은 주제별 역사, 시대별 역사, 유사 사건별 역사, 고대사규명, 인물사, 인접국과의 관계사 등으로 한다.
4. 제공된 콘텐츠는 제공된 역사의 사용된 부분, 정사 부분, 추론한 부분, 추리한 부분, 변경된 부분, 왜곡된 부분 등을 구분하여 기술한다.
5. 스토리 텔링이 가능한 역사.
6. 전자출판과 종이출판을 하도록 한다.
춘천 중도 고조선 유적지 보존 및 개발저지 운동이 성사되어 종료된 후에 역사문화 보존 및 개발 상설기구로 개편하여 존속하도록 한다.
2014. 12.
제안자 노중평
첫댓글 춘천에 맥국의 흔적이 많은데 오래전부터 연구하는 선배가 있는데 아주 실감나는 이야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