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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 베란다에 있는 건조대에 걸어놓은 젖은 교복 치마와 블라우스 자락에서 물이 똑, 똑 하고 떨어졌다.
지난번 젖은 신발을 오늘에야 세탁기에 돌리느냐고 세탁기를 비워두지 못해서 교복을 가져와 그의 집 세탁기를 빌려 사용했다. 교복을 세탁기에 집어넣는 건 내 손으로 했으나, 내가 문제집을 푸는 동안 그가 가져와 옷걸이에 걸어 베란다에 널어놓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좋은 날씨에 그가 베란다 문을 열어 놓았다.
성큼 다가온 가을의 바람은 살랑 살랑 불어 젖은 교복을 지나 소파 앞에 앉아 샤프를 쥐고 있는 나의 앞머리를 살짝 건드리곤 스쳐 지나갔다. 내 교복 블라우스도 바람에 따라 흔들거렸다.
그를 만난 게 여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라니. 시간 한 번 지독히도 빨리 간다.
옆집아저씨
First Love
written by 김간호사
episode 8. 놓칠 수 없는 소소한 일상
“공부가 잘 안 돼?”
샤프를 든 채 베란다 건조대에 걸린 교복만 바라보고 있던 내게, 그가 과일을 깎아 가지고 오면서 물었다.
“아니 그냥요.”
“좀 쉬었다 해. 과일도 좀 먹고.”
“네.”
과일을 집어 든 내가 문제집 귀퉁이에 그림을 그렸다. 과일을 먹으며 책을 보고 있는 그를 슬쩍 슬쩍 곁눈질로 쳐다보면서 말이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는 참 잘생겼다. 성격도 그렇긴 하지만 반듯하고 착실해 보이는 이목구비에 하얗고 뽀송뽀송한 피부. 속눈썹도 빼곡하고 새까맣고 코도 곧게 잘 뻗어있다. 또 입술 선은 얼마나 섹시한 지. 나는 그를 세심하게 하나씩 쳐다보며 그와 같이 그리려고 노력했다.
완성된 ‘그’ 라고 그린 그림을 보니 꽤 비슷했다. 나름 잘 그린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그린 것 치고 정말 잘 그렸잖아? 난 좀 짱인 듯. 고3은 공부 빼고 모든 것이 재미있어진다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맞았다.
“설마 그걸 나라고 그린 건 아니지?”
그가 내 그림을 본 모양이었다.
“어, 딱 알아보시네요.”
딱 알아보다니. 역시. 내가 좀 잘 그렸나봐. 내가 뿌듯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와, 그걸 어떻게 나라고 할 수 있어?”
그러나 그의 반응은 똥이었다. 똥. 이 잘난 얼굴을 그렇게 밖에 못 그리냐는 둥, 너무 잘생겨서 못 그리는 거냐는 둥 자기는 잘생겼는데 왜 그림은 그따구냐는 그런 반응을 내뱉는 아저씨였다. 참나, 자기 입으로 잘났다고 잘도 말하네(잘나긴 했지만). 전에도 여러 번 느낀 건데, 그는 자기가 잘생겼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이다.
“왜요 아저씨도 딱 알아보셨잖아요.”
내 말에 그가 다 안다는 말투로 말했다.
“나 그린다고 슬쩍슬쩍 쳐다보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았어?”
에이 딱 걸렸넹.
아, 들켰어요?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자기 입으로 자기 얼굴 맘에 든다고, 잘생겼다고 그러냐? 아저씨 좀 자뻑 쩔어요. 아니 나는 겸손해 지려고 하는데 사람들이 자꾸 잘 생겼다, 잘 생겼다 하는 걸 어떡해? 나도 어쩔 수 없이 인정한거야. 만약에 내가 아니야 내 얼굴 맘에 안 들어. 잘 생기진 않았어. 라고 하면 너는 뭐라고 할껀데?
……저 아저씨가 지금 누구 약올리나…라고 할 것 같았다. 내 표정을 읽은 그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체. 참 잘났다.
“너, 수능 가까워지는데 자꾸 논다. 이럴 때 일수록 더 긴장해야지.”
“아 몰라요, 그냥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 버리지 뭐.”
“야, 수험생이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공부하면 안 되지!”
“알겠어요. 근데 왜 아저씨가 수험생인 것 처럼 그래요?”
정작 수험생인 나보다 그가 더 열을 내는 그를 보며 내가 키들거렸다. 그는 내 물음에 이렇게 대꾸했다.
“원래 어른들은 다 그런 거야.”
별 게 다 어른이다.
옆집아저씨
“아저씨는 고등학생 때 어땠어요?”
“응?”
“공부만 하고 그런 아이였어요? 날라리였어요?”
고등학생 때의 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지금의 얼굴로 교복을 입은 모습을 상상해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그때는 지금 보다 좀 더 풋풋했겠지? 그에게 질문을 하면서 고등학생인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가 고등학생이었다면 내가 내 마음을 전하기에 좀 더 쉽지 않았을까.
그가, 아니면 내가, 조금만 더 늦게, 일찍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더니 나를 바라보던 눈을 천천히 내리 깔며 입을 열었다.
“평범했어. 그냥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공부했고,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지.”
“대학은 어디 갔어요?”
“S대.”
“헐 우와. 아저씨 공부도 엄청 잘했구나.”
그는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라 공부까지 잘하는 사람이었다.
“학교는 공학이었어요, 남고였어요?”
“남고였어.”
“와 다행이다.”
“응?”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입이 주책이지. 이러다가 한번 멍 때리고 그에게 내 마음을 말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황급히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돌렸다.
“에? 아니에요. 남고여도 인기 많았겠네요. 지금 보다 훨씬 젊었을 때니까.”
뭐? 훨씬 젊어? 나 아직 그렇게 나이 안 많다니까. 그가 발끈하자 내가 키득거렸다. 그는 내 말 좀 잘 들어보라며 나를 설득 시켰다. 그는 액면가에 비해 많은 나이가 그의 약점인 듯 했다. 하기야, 그는 얼굴만 보면 20대 초반으로 보이니까. 고등학생이라고 하기엔 성숙한 느낌이 있었다.
“뭐, 학원을 다녔었는데. 한 달에 두 번 이상 여자애들이 고백을 하긴 하더라.”
헐. 두 번 이상이라니. 그의 고백 횟수에 내가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는 그 때 당시를 회상하는지 위로 눈을 굴렸다.
“인기 폭발이었네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가만히 둘 수 없는 얼굴이더라고.”
참 자기 잘생긴 걸 잘 안다. 그의 자뻑에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또 물었다.
“그래서 사귄 사람도 있었어요?”
“있기야 했지. 그때는 그냥 사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싶어서 사귄 거여서 다 금방 헤어졌어.”
“아…….”
“난 고등학교 때 별로 특별한 기억이 없어서. 그냥 그래.”
그가 빙그레 웃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공부는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거지.”
에? 뭐야 그게? 이상한 결론을 내고는 그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밥 먹자.”
옆집아저씨
나는 그를 따라 식탁으로 쪼르르 가서 앉았고 그는 서서 요리를 시작했다. 한참을 가만히 요리하는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그가 요리를 언제 부터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요리는 언제 배운 거예요?”
그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나도 너처럼 고등학교 다닐 때도 자취 했었거든. 사실 더 오래됐지. 그 전부터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거든.”
“……”
“부모님이 항상 바쁘셔서 잘 못 챙겨줬어. 사 먹으라거나 아줌마 같은 불러서 밥을 챙겨주긴 했는데. 맛이 없는 거야. 그때는 그냥 맛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사실 혼자 먹으니까 그랬던 것 같아.”
머릿속에 저절로 그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만큼, 혹은 나보다 더 어린나이의 어린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영화처럼 보였다. 나와 별로 다르지 않게 살았겠지. 내 머릿속의 어린 그의 모습은, 나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래서 요리책을 하나 사서 나 혼자 해보기 시작했어. 항상 부모님이 재료 값 걱정 안 되게 돈은 넉넉히 주셨거든.”
“……”
“거의 10년을 넘게 하다 보니 실력이 이만큼 늘게 됐네.”
그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다시 내게 등을 보인 그가 말했다.
“처음 내가 이사 온 날, 널 부른 건.”
“……”
“혼자서 먹는 밥이 얼마나 맛없는 지 아니까.”
듣기 좋은 그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 귀를 쓰다듬었다.
그를 만나는 것은 거의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아침 먹고 공부하고 점심 먹고 공부하고 저녁 먹고 공부하다 집에 가는 것. 가끔 그와 티비를 보기도 했고 책을 읽기도 했고 수다도 떨었지만 패턴은 거의 비슷했다. 어째서 단 한 번도 지루하다고 느껴진 적이 없는지 모르겠다. 매번 똑같은 일상인데도. 그냥 당연했다. 그가 내 곁에 있는 것이. 그를 만난 것이 얼마 되지도 않은 일인데 아득하게 느껴지고 오랫동안 알아온 느낌이 들었다. 이미 그는 내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들어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나중에 깨달은 건데 지루할 틈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이렇게 좋아하는데 말이다.
“자. 오늘은 카레야.”
그가 만든 카레의 향이 코끝을 찔렀다. 그가 이곳에 오고 나서 나는 집 밥을 먹고 있었다. 집에서 만든, 어릴 때 정말 까마득히 어릴 때 엄마가 해주었던 그런 밥.
“잘 먹겠습니다!”
옆집아저씨
쓰던 샤프심이 다 떨어져서 잠깐 집으로 돌아왔다. 많이 쓰다 보니 사러가기도 귀찮고 해서 한번 한 곽을 째로 샀었다. 어디에 뒀더라. 책상 서랍 여기저기를 뒤지다 오랜만에 구석에 짱 박혀 있던 엠피쓰리를 발견했다. 아이 팟 클래식. 얼마 만에 꺼냈는지 살짝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아마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손을 대지 않았던 것 같다.
오랜만의 엠피쓰리를 접할 때의 느낌은, 뭐랄까 오래된 친구를 한 동안 안보다가 다시 만난 느낌이었다. 하기야, 한시도 떼어 놓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나는 엠피쓰리에 꼽혀있는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가장 마자막에 재생한 노래를 다시 재생 해 보았다. 내가 마지막에 재생했었던 노래는 ‘Jazztronik’ 의 ‘room#204’ 였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꽃은 채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디 갔다 왔어?”
긴 소파에 누워있는 그가 고개만을 돌려 물어왔다.
“아, 샤프심 떨어져서 집에 잠깐요.”
돌아온 나는 풀다 만 문제집 앞에 자리를 잡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재생 목록을 쳐다보며 다음은 어떤 곡을 들을까 고민하며 스크롤을 내렸다. 그가 긴 소파 위에서 엎드려 나를 내려다 보면서 물었다.
“뭐 들어?”
나는 그를 향해 잠깐 뒤를 돌아보고는 도로 고개를 돌려 엠피쓰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냥 가사 없는 노래요.”
“가사 없는 노래?”
“네. 전 가사 없는 노래만 들어요.”
오, 그렇구나. 가사 있는 노래는 있어? 가사 있는 노래도 있긴 한데 정말 소수뿐이고, 취향이 강해서 다 비슷비슷해요 노래가. 그가 몸을 틀어 소파 위에서 조금 더 가까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내 엠피쓰리를 구경하려고 그런 듯 했다.
“왜 가사 있는 노래는 안 들어?”
고개를 내려 나와 같이 내 엠피쓰리 목록을 바라보던 그의 물음에 내가 코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뱉고는 입을 열었다.
“그냥 아무생각도 안 하고 싶어서요.”
“아무 생각도 안하고 싶다고?”
내가 고개를 소파에 기대어 그를 슬쩍 쳐다보다 천장의 하얀 조명으로 시선을 옮기곤 말을 이었다.
“가사가 없는 노래를 들으면, 맘이 편안해져요. 아무생각도 안하게 되니까.”
“……”
“가사 있으면 자꾸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잖아요.”
“……”
“난 아무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그랬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다. 혼자 있을 때, 이것저것에 대해 생각하는 건, 나를 더욱 쓸쓸히 만들었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가사 없는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우연히 블로그 에서 가사가 없는 노래들을 알게 된 나는 곧장 부모님께 말씀드려 엠피쓰리를 장만했다.
그리고 한곡, 한곡 씩 엠피쓰리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잘 때나, 학교 갈 때나, 집에 있는 시간은 모두 엠피쓰리와 같이 보냈다. 물에 빠진 것처럼 외로움에 버둥대는 그 때의 나에게 가사가 없는 곡들은 내게 한 줌의 지푸라기나 다름없었다.
“너답다.”
“……”
“곽다혜 다워. 생각이.”
그가 빙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나는 마냥 부끄러웠다. 나답다니, 나다운 게 뭐지? 나도 모르는 난데, 그는 나답다고 했다. 조명에서 다시 시선을 옮겨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큰 그의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있어요, 곽다혜 다운 그런 게.”
그의 말이 내 입 꼬리를 위로 잡아 당겼다. 살짝 웃음도 흘러나왔다. 정말 소소했다. 그와 함께하는 일상은 정말 다르지 않았다. 내가 늘 꿈꾸어 왔던 그런 소소한 일상. 이 생활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이 행복한 생활을 놓치기 싫다. 놓칠 수 없다. 절대로.
갠카: 미키 & 미니 (http://cafe.daum.net/mickeynminnie)
아아아 삼일 만이네요ㅠㅠ 매일매일 올리기로 해놓구 너무 정신이 없어서
늦었습니당ㅠㅠ 다음편도 내일 이시간에 올려드릴께요!
댓글 달아주신 초복님 감사합니다♥
첫댓글 재밌게 봤습니당
헝헝 감사합니다 ㅠㅠㅠㅠ 9편이 업데이트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