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예전이라면 생각도 못했을만한 싸늘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파일로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지나가던 커다란 구름 뒤로 숨바꼭질 하듯 모습을
감추어버린 밝은 달에 훤하게 세상을 비추던 빛이
사라져 칩임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파일로는
검은 형상만으로 그 들이 둘이라는 것과 여자라는
것을 알아 챌 수 있었다.
그 들 중 하나는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란 듯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으며 다른 하나는 소리 없이 파일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암살자?'
대륙의 연맹들은 확실히 믿을 수가 없는 존재였기에
이럴 가능성도 적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호의적인 척 하면서 뒤로 암살을 계획하는
일들이 대륙에서는, 그것도 특히 연맹같이 커다란
단체에서는 더더욱 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파일로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파일로의 예상은 숨었던 달이 다시
까꿍하고 얼굴을 내밀면서 멀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환한 달빛에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파일로의
검은 눈동자와 허공에서 부딫혔다.
그 소녀의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 다른 금발의 소녀와는
달리 자줏빛 머리의 그 소녀는 파일로를 덤덤히 마주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가히 당당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파일로의 입장에서는 남의 방에 몰래 침입한 주제에
그렇게 떳떳한 그녀의 행동이 맘에 들리 없었다.
"뭐지?"
파일로의 흑안이 소벨리아와 엘레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내렸다.
"어……"
당당한 모습의 소벨리아도 이런 파일로의 대답에는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얘가 너 보고 싶대서.' 이건 너무 의리 없는 짓이다.
그렇다고 '달빛에 홀려서 그만.' 이라는 미친 소리를
할 수도 없는 일이라, 소벨리아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고개를 돌렸다.
"뭐냐고 묻잖아."
파일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돈이나 처바른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뭐
공주 쯤 되는 분들인 거 같은데, 이런 밤 중에 남의
방에 침입해서 뭐하시냐고."
엘레나는 이미 정신을 반쯤 놓아버린지 오래라 무슨
반응을 기대할 수 없고, 그나마 제정신인 소벨리아는
빈정거리는 파일로의 말에 갑자기 욱한 기분이 들어
다시 그의 까만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몰라, 어쩌다보니 오게 됬어. 그래, 침입이다.
미안해. 됐어? 해적왕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해서 왔더니, 이거 뭐 별것도 아닌게 성격도
재수없잖아."
소벨리아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래 어디한번 뭐라
떠드나 들어나 보자, 라는 듯한 파일로의 모습에
첫 대면이라는 것과 공주로서의 위엄이나 예의 같은것은
다 말아먹어 버린 채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모두 내뱉어버렸다.
"그럼 나가."
자신의 할 말을 마치고 씩씩대는 소벨리아에게
파일로가 한 말은 고작 이 것이 다였다.
"뭐?"
"해적왕이라는 인간이 궁금해서 왔다며, 이제 볼 거
다 보고 감상도 다 마쳤으니 볼 일 끝난 거 아닌가?
귀찮으니 나가줬으면 하는데."
귀찮다는 듯이 아예 몸을 돌려 침대에 누울 듯한
기세인 파일로의 반응에 소벨리아는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화를 한숨으로 몰아내며 아직까지 아무말도
못하는 엘레나의 손을 잡고 주문을 외웠다.
"모우브."
낮게 깔린 화난 음성이 들리는 가 싶더니, 파일로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을 때는 이미 소벨리아는 사라진
후였다.
파일로는 아무 감흥 없이 그녀들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덮어 써 버렸다.
* * *
"그래서 요점이 뭐죠?"
베이지 색의 벽지로 치장 된 깔끔하고 커다란 방 안의
붉은 색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있는 황갈색 머리의 여자가
날카롭게 물었다.
유닌의 오층에 놓여진 페렌스에는 흔하지 않게 유닌의
회원이 아닌 다른 자가 참석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실제로 회원이 아닌 누군가가 페렌스에 참석 했다는 것도
수백년 유닌의 역사 중에 손에 꼽힐 정도였다.
베르시는 감히 페렌스에 당연하다는 듯이 편하게 앉아 있는
파일로를 바라보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프레시를 비롯한 다른 회원들은 어린 소년이 해적들의
왕이라는 사실에 아직도 넋이 나가 있어 멍하니 파일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간단합니다. 연맹국 중의 하나로써 군사적인 지원을 부탁하는 것."
타키안은 이런 파일로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보다 몇 살은 어린 것 같은 아이가 흉폭하기 짝이 없는
해적들의 왕이라는 사실에다가 생각보다 영리하기도 한 것도 같고
게다가 지금 황당한 말까지 하고 있으니 흥미롭지 않을 수 없었다.
"해적들의 싸움에 군사 지원을 해달라는 겁니까?"
베르시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렇죠."
파일로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타닥타닥 두들기며 대답했다.
타키안은 그런 파일로를 보며 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파일로는 반란이 일어나 귀찮은 상태에 놓였다며 군사적인
지원을 요구했다.
이 말은 즉슨, 지금 해적들은 둘로 나뉘어진 상태라는 말이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수많은 나라가 분란이 일어난 상태에서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한 일은 적지 않게 일어났다.
실제로 하나로 단결되지 않은 나라를 공격해 차지하기란 참
쉬운 일이었다.
작은 거짓 정보 하나만 흘려주어도 크게 부풀어 자신들끼리
전쟁을 하다가 커다란 손해를 본다던가, 스파이를 심어 꼬드긴다던가,
누워서 떡 먹기라는 말은 딱 그럴 때를 위해 만들어 진 것처럼
아무런 손해나 피해없이 다른 나라를 점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딱 지금의 해적들 처럼 반란이 일어나 서로 나뉘어진 상태인 것이다.
그런고로 지금 연맹이 군대를 일으켜 해적들을 쓸어버린 다면
더 없이 좋은 찬스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사실을 그 해적들이, 그것도 그들의 왕인
파일로가 알려주었다는 것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거지.'
웃는 듯 아닌 듯 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파일로는 아무래도
멍청해서 그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마치 공격할 테면 해봐라, 라는 듯해 보이는 파일로의
모습에 타키안은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타키안이 숨겨 놓은, 연락만 하면 바로 파일로를 붙잡을 수
있는 많은 수의 병력을 아래 층에 숨겨놓고도 선뜻 허락을
내리지 않는 프레시도 타키안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파일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그 녀석의 세력이 강해지면 많은 항구도시들은 예전처럼
큰 피해를 입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하는 여러분들이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해적이니까요."
파일로는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이라는 부분에 은근히 강세를
주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제가 진압에 실패해서 해적들이 모두 그 자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면 연맹에도 적지 않은 피해가 갈 것입니다.
저는 연맹국 중 하나의 지도자로써 경고와 함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뭐, 결정은 알아서 해주세요."
마지막의 파일로의 발언은 마치 도움을 주던지 말던지, 라는
태도였다.
당신들이 도움을 주면 주는거고 안줘도 별 상관은 없어 랄까.
이런 파일로의 말에 베르시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흥, 그렇다면 우리는 도움을 주지 않겠어요. 보아하니 그렇게
절실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파일로는 그런 베르시에게 묘한 웃음을 보이며 일어났다.
"잘 생각해보시고 대답은 내일 다시 듣도록 하죠.
그럼 이만."
고개를 살짝 까닥여보인 후에 아그렌과 함께 페렌스 밖으로
파일로가 나가버리자 그제서야 조용하던 페렌스 안이 시끄러워졌다.
물론 시작은 베르시의 짜증과 함께였다.
"뭐 저런 건방진 게 다있어? 그냥 없애 버리자구요!"
"저래 뵈도 연맹국의 왕인데 어떻게 함부로 없앱니까?"
"해적따위가 무슨 연맹국이라고! 그딴 거 무시하고 이 참에
싹 쓸어버립시다."
"그래요! 마침 반란도 일어났다지 않소?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요!"
각 나라의 사신들이 한마디씩 하며 도움을 주자, 도움은 무슨
그냥 없애버리자, 라는 등 열띠다 못해 시끄러운 회의를 벌이는
것을 지켜보던 타키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제상 유닌의 제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베르시와 맞먹는 권력과
능력을 지닌 타키안이 일어나자 침을 튀기며 서로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향하자, 타키안은 그의 갈색머리를
살짝 흔들어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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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꼬릿말은 저에게 힘이 됩니다.
첫댓글 잘 보고가여 해여
감사합니다 하핫
재밌어요^^과연 어떻게 될지...
감사합니다!
ㅎㅎㅎ 오랜만. ㅋㅋㅋㅋㅋ 아 너무 재밌는 거아니에요 ㅋㅋ 파일로가 너무 멋져졌어 +ㅁ+ ㅋㅋㅋㅋㅋ
하하 감사합니다
ㅎㅎ잘봣어요^^ 작가님 건필하세요 ~
감사합니다
끄악 무슨 일인거지요○_○빨리 다음편으로 가야 겠습니다~
tha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