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방송국 1927년2월16일 개국..
'민족의 성쇠는 과학에 달렸다'
경성방송국은 1927년2월16일 정규방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민간 첫 시험방송은 조선일보가 1924년 12월17일~19일 우미관과 경성공회당에서 실시한 라디오 방송이었다. 사흘간 7000명의 청중이 몰렸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근세 과학의 일대 경이(驚異). 몇백 몇 천리를 격한 곳에 흔적 없이 전파되는 방송무선전화의 신기막측한 비밀을 보라.’(‘근세과학의 일대 경이’,조선일보 1924년12월17일)
한국인이 주관한 이 땅의 첫 라디오 방송이 전파를 탔다. 조선일보는 1924년12월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라디오 시험방송을 내보냈다. 경성방송국이 정규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1927년2월16일보다 2년 3개월 앞섰다.
방송은 수표동 신문사 사옥 이상재 사장실에서 진행됐다. 경성 도심의 우미관 극장에 대형 확성기를 설치했다. 극장 안팎 인파가 몰렸다. 조선일보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가 사회를 봤고, 이상재 사장이 개회 연설을 했다. 이어 이동백 명창의 판소리가 울려퍼지자 박수가 쏟아졌다. 청중들은 수표교 조선일보사에서 관철동 우미관까지 소리가 들린다고 신기하게 여겼다. 18일~19일 시연회는 경성공회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흘간 7차례 열린 라디오 시험방송에 7000명이 몰렸다.
◇신문이 라디오 소개 앞장서
라디오 방송은 신기한 오락, 그 이상이었다. ‘현대인의 세계 문명은 구주인의 문명이오 또는 과학문명이다’(‘생활의 현대화와 조선인’, 조선일보 1924년 12월17일)로 시작하는 이 날짜 사설은 의미심장하다. ‘금일의 일국가 일민족의 성쇠는 어느 의미로는 그의 과학과 기계문명에 대한 조예의 심천(深淺)으로써 측도(測度)하는 것이다’라고 한 뒤, ‘조선인은 유래로 물질에 담박하였고 따라서 기계와 기술에도 등한한 바 많았었다. 즉 과학에 등한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 결과는 산업적 부진 및 쇠퇴를 오게 하였다 할 것이다’고 진단했다. 과학에 등한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근대 문명의 첨단 기기인 라디오 방송을 선보인 것이다. 언론학자 김영희는 ‘새로운 매체인 라디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그 기능을 이해시키는 데에 기존 매체인 신문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점이 주목된다’고 썼다. 당시 신문은 라디오를 경쟁 매체로 보지 않고, 민중을 계몽하는 협력자로 간주했다.
조선일보 1927년12월17일자에 실린 라디오 수신기 광고. 일본의 일화무선전화전신기계제조소가 제품 이름과 가격을 설명하고 사진으로 모양을 소개했다. 국내 최초의 라디오광고였다.
◇일본인이 주도한 경성방송국 개국
1927년 2월16일 경성방송국이 JODK라는 호출부호로 정규방송을 시작하면서 본격적 라디오 방송시대가 열렸다. 일본인이 주도하는 방송이었다. 채널 하나로 일본어와 한국어 방송을 내보냈다.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에 따르면, 대략 3대1로 일본어 방송이 압도적이었다. 개국 직전인 1927년2월3일자 조선일보는 경성 방송국 청취계약자는 1115명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인이 895명인데 비해, 조선인은 212명뿐이었다.
◇라디오 한대가 샐러리맨 연봉
초창기 라디오는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다. 요즘 수신료격인 청취료만 월 2원이었고, 라디오 가격도 비쌌다. 진공관식으로 확성기를 이용해 듣는 라디오 세트는 40원~100원이었고, 전지식 진공관 수신기는 100원~500원이나 했다. 경성방송국 기술직 신입사원 월급이 21원이었다고 하니, 라디오 한 대 값이 연봉에 맞먹을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고급 승용차 한 대 값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귀에 대고 듣는 광석식 수신기는 안테나 포함 10~15원 정도였다.
◇'문명이 운다, 라디오가 운다’
그러다 보니 1926년 12월 한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그러나 돈 없는 동무여!당신네들은 80~90전을 내고 신문을 보듯이 그만한 돈을 내고 그 대신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낮에는 신문이고 밤에는 유성기인 라디오를 들을 수가 있을까요?’(승일, ‘라듸오, 스폿트, 키네마’, ‘별건곤’2, 1926,12) 필자는 ‘문명이 운다, 서러워한다, 라디오가 운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소연했다. 그리곤 ‘조선의 라디오!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세계의 라디오-문명-그것은 정복자의 전유물이다...있는 사람의 장난거리가 되고 말아버린 문명의 산물! 참으로 우리는 과학에 대해서 면목이 없다’고 썼다.
1924년12월17일~19일 조선일보 라디오 시험방송을 알리는 社告. 윗 사진은 청중들이 모인 관철동 우미관 극장. 사흘간 7000명의 청중이 몰렸다. 조선일보 1924년12월17일자
◇1940년 청취자 20만, 조선·일본인 청취자 비슷
개국 첫해 청취자가 좀처럼 늘지 않자, 그해 11월 청취료를 1원으로 낮췄다. 청취자는 1930년 10월 말 1만명을 넘어섰다. 1933년 4월26일 한국어방송이 제2방송으로 분리되면서 조선인 청취자가 늘었다. 1933년 7월 말, 청취자는 2만4126명(조선인 3812명, 일본인 2만197명, 외국인 117명)이었다. 그래도 조선인은 여전히 일본인의 19%밖에 안됐다.
라디오 방송에 날개를 달아준 건 전쟁이었다. 시작은 1931년 만주사변이었다.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10월, 청취자 10만을 돌파했다. 이듬해 4월 청취료도 75전으로 인하했다. 1940년 8월엔 청취자가 20만에 육박했다. 무엇보다 조선인 청취자가 9만5153명으로 일본인 9만6027명과 비슷해졌다.
◇이발소, 상점서 라디오로 호객
뉴미디어인 라디오를 틀어주면서 손님을 끄는 상점들도 나타났다. 경성 중심가 상점들이 먼저 나섰다.
‘박덕유(朴德裕) 양화점에서 일백십여원짜리, 조선축음기상회에서 백여원짜리 확성기를 점두에 놓고 손님에게 들려주기 시작하니까 남대문통의 백(白)상회에서도 사백여원짜리 라디오를 놓았다. 다 상당한 생각이라 할것이거니와 이발소, 목욕탕, 식당 같은 데에서 사오십원짜리로도 훌륭하니 라디오를 손님에게 들려준다면 정해놓고 손이 많이 꼬일 것이요,더욱 술파는 집에서 그렇게 하면 술이 더 팔릴 것이다.’(경성탐보군, ‘商界閑話’, ‘별건곤’5호, 1927, 3)
◇라디오 편성표 매일 실어
당시 신문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이 매일 실렸다. 요즘 TV프로그램 편성표가 실리는 것과 비슷했다. 초창기엔 뉴스와 기악연주, 만담, 강연, 소설 낭독, 외국어 강좌, 라디오 연극, 국악 등으로 꾸몄다. 연예 분야는 전통 음악이 자주 연주됐는데, 기생들이 주로 출연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스포츠 중계 방송도 인기를 누렸다. 야구 중계가 많았고, 축구, 육상, 럭비, 농구 경기도 중계했다.
한국어 제2방송이 생기면서 방송시간도 하루 8시간45분에서 15시간5분으로 늘어났다. 교양 프로그램이 다채로워졌다. 1935년 11월21일자 라디오 프로그램을 보면, ‘톨스토이 25주년 기념제’로 오후6시25분 ‘톨스토이의 생애’(전영택), 오후7시30분 ‘톨스토이의 사상과 예술’(이광수) 강의가 방송됐다. 이어 오후8시엔 톨스토이 ‘부활’을 라디오 연속드라마로 만들어 내보냈다.
◇'너저분한 기생들의 소리는 그만두시오’
방송 프로그램 수준을 문제삼는 비평도 있었던 모양이다. ‘소리라든지 강연 같은 것을 좀 들을 만한 것을 방송하였으면 감사한 중에 더 감사하겠어. 강연사도 말마디나 하는 양반을 초빙하고 기생도 소리마디나 할 줄 아는 것을 초빙하여야지 개짓는 소리라도 기생이라면 모두 불러다가 시키니…지금부터는 너저분한 기생들의 꿈꾸는 소리라든지 18세기의 소학교 수신교과서 같은 것은 제발 고만두시오.’( ‘휘파람’, 조선일보 1927년 7월28일)
◇戰時 군국주의 선전 매체로 전락
하지만 농촌에서 라디오 구경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총독부는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농촌에 라디오 무료보급 사업을 폈지만, 성과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1941년12월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군국주의를 고취하고, 황국신민화 교육을 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1942년12월 단파수신사건이 적발되면서 라디오의 운명은 더 위태로워졌다. 이듬해 6월 한국어채널인 제2방송부가 폐지되고, 일본어로 방송하는 제1방송만 운영됐다.
첫댓글 초창기
라듸오 청취료가 2만원
매우 놀람입니다..
라디오 시절 부자들 전유물.
이란 말씀 백배공감합니다
귀한정보 잘 읽고 갑니다
라디오 역사 유래소식 재밌게 잘 들었습니다
제가 아주 어려서기억하는 라디오 연속극 방송은 강화도령 철종 임금 방송을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즐겨 들었고
원로가수 박재란이 연속극 주재가를 시작할때 끝날때 기가 막히게 잘 불러서
동네 아저씨들이 막걸리 드시며 박수치며 좋아 했던 기억이 남니다 후후껄껄 소중한 역사 희귀 자료 전파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