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에 대한 데생 / 강인한
초승달이 떠있다.
달은 내가 끄는 카트 속에서 출렁거린다.
누구는 스푼으로 커피를 저으며 인생을,
나는 월요일 밤 쓰레기를 분류하며 세월을 느낀다.
해묵은 개인적 감정을 버린다.
중학교 1학년 미술시간에 연필로 그린 내 왼손을
버린다. 오래 망설이다가
가라, 돌아오지 마라.
더러운 애착처럼 멀리 내던진다.
오래된 스크랩과
대학 시절 습작노트,
백과사전보다 두터운 총동창회 명부,
유치한 일기장, 눈 시린 추억들은
손잡이 헐거운 부재의 서랍으로 옮긴다.
초승달을 버리고 다음 주엔
보름으로 가는 달을 박스째 출렁출렁
기억의 서랍에서 망각의 서랍으로 옮겨야 한다.
한때는 기쁨으로 빛나던 나를
망각의 강에 내다버린 젊은 연인이여,
놀라지 마라.
두근대는 당신 가슴을 점자처럼 더듬는 건
스케치북을 찢고 뛰쳐나온 내 소년의 손이다.
**************************************
지나간 시절의 명징한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아니 잊을 수
없다. 초승달 속에 떠 있고 보름달 속에 떠 있다가 하현달로
점점이 사그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일 뿐, 또 다시 반복되는 일상으로 새롭게 되살아난다.
외부의 세계가 내부의 세계와 교차한다. 기쁨과 슬픔으로
묻어나오기도 하는 것처럼 ‘분류’라는 잠깐의 느슨함이
그것을 쪼이기도 한다. 이 시의 화자는 초승달이 떠 있는
월요일 밤 쓰레기를 분류하며 해묵은 개인적 감정을 정리한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초승달 눈썹만큼이나 예리하고
단호하다. 늘 그렇듯이 해가 바뀌어갈 즈음이면 꿈틀대는
마음 속 감정이 예사롭지 않다.
밤하늘의 달로 떠 있다. 어린 시절 꿈꾸었던 일들을 되짚어보면
중학교 1학년 미술시간에 연필로 그린 왼손이 선명히 떠오른다.
그 땀띠 나던 푸르던 날이 어쩐지 낯설다. 그 때의 기억은 이젠
“가라!”고 외쳐도 오래도록 망설인다. 달이 출렁거리듯이.
그리고 대학시절 눈 시린 추억들을 손잡이 헐거운 부재의
서랍으로 옮긴다. 보름으로 가는 달엔 기억의 서랍에서 망각의
서랍으로 옮겨야 한다는 말에서 어쩐지 화자의 오른손이
쓸쓸함을 느낀다. 잊고 싶다는 것은 한때의 기쁨으로 빛나던
기억을 쉬 잊지 못한다는 것일 것이다. 그 기억들이 있기에
지금의 존재가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두근거리는 그때 그 시절을 점자처럼 천천히 더듬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성찰은 얼마나 하면서
지금에 이르렀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한 투쟁적
데생은 또 얼마나 해봤을까.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뜻하지 않은 고난의 길 위에서 크고 작은 염증도 많았으리라.
망각의 강에 내다버리고 싶었던 때가 더러 있었을 것이다.
이 시를 읽은 후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이 더더욱 극심해짐은
왜일까.
/ 이강하 시인
[출처] 강인한 시인 15|작성자 동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