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따뜻해지는 이야기 (편의점 아저씨)
25년을 잘 다니던 회사가 금융 쓰나미에 무너지면서 명퇴를 하였습니다.
직장생활 할 때는 나름 잘 나간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막상 나와 보니 등기부등본 하나도 뗄 줄 모르는 바보천치로 20여년 이상을 살았더군요.
꼬박꼬박 타던 월급봉투에 중독이 되어서인지 돈 백만 원 정도는 한자리 밥값으로 써보기도 했는데
요즘 돈 100만원 벌기가 이토록 피땀이 나는지 세상 다시 사는 기분 입니다.
배운 게 책상 앞에서 글 쓰는 재주와 윗사람에게 잘 보일려고 아부하는 것 밖에 몰랐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남들 다하는 편의점 사업이라고 생각하며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넘어가는군요.
요즘 아고라에 심심찮게 편의점 이야기가 올라오던데 대부분이 어려운 이야기뿐이어서
저는 각도를 달리한 그간의 이야기를 써 보려고 합니다.
편의점 이용 손님을 하루 1,000명이상 대하다 보면 별별 손님이 많습니다.
그 중 진상손님도 많지만 정말 오래 이야기 하고 싶은 귀여운(?)손님도 많습니다.
그 중 기억에 남는 다음 열 명의 고객을 추천합니다.
1. 동양화 찾는 비구니 스님
어느 날 모습이 고우신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들어오시더니 조용하게 동양화도 파냐고 허더군요.
그래서 편의점에서는 그림은 팔지 않는다고 했더니 잠시 머뭇거리시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큰스님은 왜 이런 걸 나보고 사오라고 하신지 모르겠어요.
쪽 팔리게."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재차 물어보니 나지막하게 "화투 안 파나요?" 하더이다.
화투 사가시면서 저한테 성불하라고 하시던 모습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2. 버스약 찾으시는 할머니
어느 날 80세가 넘어 보이시는 할머니께서 들어오시더니 다짜고짜 "버스약 있어요?“ 하더이다.
그래서 저는 멀미약 찾으시는 줄 알고 "저 옆 약국으로 가셔야 할 것 같은데요." 했더니 티머니 카드를 내놓으시네요.
버스약도 모르는 제가 어찌나 송구스러운지 그래서 요구르트 하나 서비스로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 "복 받겠구먼 " 하시데요.
3. 볼펜 의 용도
어느 날 잘 차려 입으신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오시더니 볼펜을 찾으시데요.
그래서 가장 흔한 300원짜리 볼펜을 드렸더니 그 자리에서 볼펜심을 빼서 저한테 줍니다.
"이건 아저씨 쓰세요" 하더니 볼펜껍데기로 비녀를 만들어 머리에 꽂으시면서 "이제야 좀 살겠네" 하데요.
볼펜의 용도는 참 여러 가지네요.
4. 교통카드 의 환불
꽤나 세련되어 보이는 아가씨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교통카드를 달라내요.
"2,500원입니다" "충전은 아무편의점에서나 하세요" 했더니 아가씨 왈 “이거 가지고 지하철 타면 얼마씩 빠져나가나요?"
대답을 어떻게 할까 생각중인데 "남은 돈은 어디서 거슬러 받나요?"
나중에 이야기 들어보니 서울에 처음 와서 교통카드를 처음 써 본 울산아가씨랍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순수하던지......
5. 소녀시대의 출근
매일 아침 빵과 우유를 사러오는 여자 손님이 많습니다.
이런 손님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사는 "웃는 모습이 소녀시대 같으시네요." 했더니
이 인사 받으려고 현재 고정손님이 약 20명입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이야기가 요즘 실감 납니다.
6. 라이손과 레종
아주머니 한분이 들어오시더니 아저씨 갖다 준다고 레종불루 한 갑을 달라네요.
그래서 드렸더니 담배 값을 한동안 보시더니 "라이손 말고 레종으로 주세요"
제가 봐도 RAISON을 왜 레종이리고 읽어야 되는지 이해가 안갑니다.
요즘 담배 종류가 하도 많아서 대략 80여종 되는데 젊은 친구들은 담배이름을 전부 줄여서 이야기하니 저도 헷갈립니다.
말보레(말보르레드) 말보라(말보르라이트) 말보울(말보르울트라) 헷갈립니다.
디플과 디스도 구별할 줄 알아야 되고 에쎄도 무려 12가지입니다.
편의점 하려면 담배이름부터 외어야 합니다.
7. 건망증
세상이 각박해지고 복잡다난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건망증이 심합니다.
만 원짜리 잔돈 바꾸기 위해 껌 하나 사면서 돈만 9,500원인지 열심히 확인하고 껌은 놓고 간 손님이 하루 평균 몇 명은 됩니다.
세상 살기 힘들어도 정신 줄은 놓지 말고 삽시다.
어떤 분은 껌은 가져가고 지갑을 놓고 간 분도 있습니다.
바로 쫓아 나가보면 왜 그렇게 동작이 빠른지...
대부분 다시 찾아는 갑니다.
한번은 봉투 사러 오신 분이 빈 봉투는 가져가시고 축의금이 든 봉투는 놓고 가신 분도 있었습니다.
8. 할머니의 돈나물
나물 중에 돈나물이 있습니다.
저녁 11시경쯤 되면 할머니 한 분이 이 돈나물을 팔러 가게에 오십니다.
이 나물 사면 돈 잘 번다고 하면서 하루는 할머니가 돈나물 무침을 해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맛을 보니 옛날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나물맛 바로 그 맛입니다.
이 할머니는 요즘 저희 가게뿐 아니라 근처 모든 가게에 반찬 대주시는 직업이 생겼습니다.
고마우신 할머니가 오래오래 사셨으면 합니다.
9. 스타벅스와 공주병
컵 커피 중에 제일 비싼 것이 스타벅스(1,800원)입니다.
대부분의 컵 커피가 1,200원인데 왜 그리 비싼지 저도 모릅니다.
근데 이 커피를 사서 마시는 분은 거의가 공주병 기질이 있습니다.
"이 커피는 모델들이 주로 마시던데 혹시 모델이세요?"
이 말 한마디면 대개가 계속 이 커피만 마십니다.
1,200원짜리와 똑 같다는 것을 알려 드립니다.
10. 49제
곱게 차려 입으신 할머니 한 분이 오시더니 양초를 달라고 합니다.
촛불시위가 한참일 때여서 "어디 집회에 가십니까" 했더니 사고로 죽은 아들 49제에 가시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캔 맥주 2개까지 사셔서 보자기에 싸시고 나가시면서 살아생전에 좋은 일 많이 하라고 하시네요.
쓸쓸한 걸음걸이로 나가시던 할머니 모습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