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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3,1-6.14-22>
나 요한은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1 “사르디스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말한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2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나는 네가 한 일들이 나의 하느님 앞에서 완전하다고 보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내가 도둑처럼 가겠다.
너는 내가 어느 때에 너에게 갈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4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5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 흰옷을 입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고, 내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6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14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 창조의 근원인 이가 말한다.
15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16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7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18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9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는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20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21 승리하는 사람은, 내가 승리한 뒤에 내 아버지의 어좌에 그분과 함께 앉은 것처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2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3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5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6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7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8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9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위에 걸린 죄인 세리 자캐오와 나무 아래 있는 예수님 사이에서 드러납니다.
마치 그것은 십자가 아래 있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치 이곳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알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누구인지를 구원을 얻는 장소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로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10)
그렇습니다.
이제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나무 위에 달리셨던 그분이 먼저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캐오는 ‘일어서서’(부활하여!) 말합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하고 고백하고,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됩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곧 “얼른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루카 19,5)
주님!
당신은 저를 훤히 아십니다.
교만과 탐욕의 나무 위에 올라 허영과 가식으로 몸을 가리고 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그릇된 저의 모든 행실을 아시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받는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이 가련함도 훤히 아십니다.
바득바득 기어 올라간 교만과 허영에서 얼른 내려와 당신 발아래 엎드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 앞에 부복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구원, 열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어제, 오늘 우리는 예리고에서 일어난 구원 사건을 듣습니다.
눈먼 이가 보게 되면서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얘기를 어제 들었고, 오늘은 자캐오가 구원을 받는 얘기들 듣는데, 자캐오의 경우는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집안이 구원받는 얘깁니다.
헌데, 구원받은 집이라면 구원받기 전에는 어떤 비구원 상태일까요?
추측컨대 세 가지로 비구원의 상태였을 것입니다.
가족 간의 불통이 그 하나이고, 이웃과의 불통이 그 두 번째이며, 하느님과의 불통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안의 불통과 비구원과 불행의 진원지는 자캐오였을 겁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가정에서 가장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자캐오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소설을 쓴다면, 그가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는 것과 세관장이었다는 것에서부터 우리는 실마리를 풀어볼 수 있을 겁니다.
작은 키의 열등감을 그는 세속적인 성공으로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키 작은 자기를 무시할 수 없도록 그는 돈을 많이 벌기로 작정했을 겁니다.
그런데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어떤 때는 더러워도 참아야 하고 심지어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만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벌기 위해 거짓말도 해야 하고, 사기도 쳐야 합니다.
어떤 때는 돈을 걷어들이기 위해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리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직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이고, 이것이 자기가 해야만 하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쳐 집에 들어오면 그는 집안일에는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고,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으면 짜증을 부리고 막 화를 냈습니다.
그럴수록 아내와는 자주 다투고, 아이들은 무서워서 슬슬 피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은 친하게 지내는데 자기만 점점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돈만이 이 세상에서 자기를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가족들만이 유일한 사랑이고 의미였기에 거기서 위안을 받으려 했는데, 그래서 남을 짓밟고, 하느님마저 모르는 체 오직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가족이 이것을 몰라주니 너무 야속하고 삶의 회의가 왔습니다.
이 인생 최대의 위기에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예수님께서 예리고에 오셨고, 풍문으로 들은 것이 정말인지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 작은 그가 군중에 가려 주님을 볼 수 없으매 주님이 지나가실 길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에 오릅니다.'
그의 키 작음이 나무를 오르게 하고, 나무에 오르는 열망과 열성이 그를 주님 눈에 띄게 하였습니다.
작기 때문에 더 열심히 산 것, 어쩌면 이것이 그가 일생 살아온 거였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는 역시 무시하지 않고 올려다보실 뿐 아니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고까지 하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허용치 않고 아무도 드나들지 않던 문이 열립니다.
이렇게 한 번 문이 열리자 마음이 열리고, 곳간 문도 열립니다.
하늘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 이웃으로 향하는 문도 열리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이렇게 꽝꽝 닫혔던 문이 활짝 열리는 것입니다.
오늘따라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이 마음에서 메아리칩니다.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비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내보내지 못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루카 19,9-10)
자캐오가 구원을 받은 것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예수님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예수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1티모 1,15)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누가 희망이 되는 사람인가?>
오늘 복음은 자캐오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캐오는 키가 작았습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사람을 표현할 때 키가 작고 크고의 내용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키가 작다는 표현은 분명 열등감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키가 작은 콤플렉스를 땅을 정복하며 풀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 콤플렉스라고도 합니다.
자캐오는 아마도 돈으로 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돈을 추구하는 마음이 행복이 아니라 고통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지만 한 번 빠진 집착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영재발굴단에서 아이들이 부모의 강요로 고통받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는 희망을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어서 절망만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겐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줄 희망이 필요합니다.
자캐오는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 여긴 인물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무 위에까지 올라갑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집에 들어가 묵으십니다.
자캐오는 예수님 덕분으로 재산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만약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았다면 우리를 찾는 이들은 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권력에 대한 욕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잘 안되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당연히 돈을 좋아하지 않고 절제를 즐기고 겸손하면서도 행복한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고 그 사람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책으로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찾고 있었습니다.
자캐오가 추구하던 것을 똑같이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성당 성물방엔 많은 책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제자처럼 사는 삶이 더 행복할 것이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모시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속-육신-마귀를 끊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면 지나가는 예수님이 보이고 그분은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처음엔 하느님을 받아들였다가 차차 하느님을 멀리하게 된 세 명의 왕들이 나옵니다.
사울은 키가 크고 잘 생겼습니다.
하지만 열등감이 있었고 그것이 권력욕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예언자 사무엘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혼자 결정하여 제사를 지냅니다.
더 인기가 좋은 다윗을 시기합니다.
그러다 결국 하느님의 사랑을 잃고 더 길 수도 있었던 짧은 왕의 생을 마감합니다.
다윗도 하느님을 받아들인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색에 빠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까지 죽이게 됩니다.
이것 때문에 그의 집안엔 풍파가 잔잔할 날이 없었습니다.
아들에게서까지 도망치고 아들에게 아내들까지 욕을 보이는 수치를 당합니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혜로웠고 하느님께 성전을 지어 봉헌하기까지 했지만, 돈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정략결혼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까지 섬기게 되어 죄를 짓습니다.
돈은 결국 우상숭배가 됩니다.
그렇게 나라는 둘로 쪼개지게 됩니다.
이러한 예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하며 투덜거리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세속-육신-마귀에게서 전혀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가는 것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변할 마음이 전혀 없어서 예수님을 몰아내며 동시에 자신들에게 오시지 않는다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세 살 때 최혜연 아이는 어머니가 잠깐 가게 일을 하는 사이 사고를 당해 팔꿈치 아래의 팔을 잃습니다.
부모도 지켜주지 못해 고통스럽고 아이도 자신을 팔을 감추려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열두 살이 된 지금은 다릅니다.
피아노를 아주 잘 칩니다.
물론 한쪽 팔은 손가락이 아니라 팔꿈치로 칩니다.
건반을 겹쳐 누르는 일도 없습니다.
그래도 상도 많이 받았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쟁이가 되었습니다.
혜연이의 삶을 바꾸어 준 것은 책 한 권이었습니다.
바로 손가락, 네 개로 피아노를 치는 이희아 씨의 『네손가락의 피아니스트』라는 책입니다.
이희아 씨는 심한 선천성 사지기형 장애인으로 태어나 양손에 손가락 두 개씩뿐이었습니다.
손가락 힘을 키우기 위해 어머니의 추천으로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루에 열 시간씩 연습하는 부단한 노력 끝에 1993년 전국 장애인예술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피아니스트로 데뷔하였습니다.
2018년 1월 2일에는 청와대 영빈관으로 초청된 각계 인사 240명 앞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연주한 뒤 아파서 참석 못한 가수 강산에를 대신해 ‘넌 할 수 있어’를 불렀습니다.
이희아 씨의 세례명은 히야친타입니다.
필요한 사람이 되면 필요로 하는 사람이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진 것이 없어도 몸이 고통스러워도 자랑할 것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군가가 나무 위에 올라와서 나를 찾을 것입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말하고 배가 고파 힘들다고 말하고 사람들이 무시해서 짜증 난다고 하는 사람은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가난하고 절제하고 낮은 자리를 차지합시다.
그리고 행복합시다.
이때 나를 가장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가면 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 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 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 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자캐오>
자캐오의 이야기는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자캐오의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그가 먼저 예수님을 보려고 애썼고, 예수님께서 그의 소망에 응답하신 이야기로 보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자캐오를 부르셨고, 자캐오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부르셨는지는 모릅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을 때, 또는 예수님이 예리코를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캐오의 마음과 영혼에 ‘부르심의 은총’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떤 사람을 부르실 때, 직접 나타나셔서 부르시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부르심’은 마음을 움직이는 방식으로 주어집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세관장이고 부자인 사람은 ‘기득권층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캐오의 경우에는 당시 사회에서는 ‘소외계층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소외계층 사람은 아니지만, 세리이면서 부자인 사람은 유대인 사회에서 따돌림 당하고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심리적인 소외계층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군중에 가려’는 뜻으로는 ‘군중이 가려’입니다.
(군중이 의도적으로 그를 밀어내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을 것입니다.)
자캐오의 키가 작았다는 말은 실제로 그의 키가 작았음을 전하는 말이겠지만, 그의 열등감을 상징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는 말은 그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냅니다.
만일에 그의 키가 컸다면?
또 만일에 그의 직업이 세리가 아니었다면?
또 만일에 그가 부자가 아니었다면?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질문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캐오의 이야기에서, 그가 부자였고, 세관장이었고, 키가 작았다는 것이 두드러지게 보이기 때문에, 반대 상황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자캐오의 키가 컸다면 나무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자캐오의 키가 크거나 작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간절함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자캐오의 직업이 세리가 아니었더라도, 그리고 그가 부자가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구원받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받으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벳자타 못 가의 병자’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병자의 상황만 보면, 정말로 간절하게 구원받기를 갈망했을 것 같은데, 그가 원한 것은 ‘구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못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습니다(요한 5,7).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셔서, 그가 청하지 않았는데도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던’ 그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요한 5,8-9).
그런데 그는 자신의 치유를 기뻐하지도 않았고, 하느님을 찬양하지도 않았고, 예수님께 고마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안식일 율법 문제로 박해를 받을 위기에 처하자 곧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거부한 것과 같습니다.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치유가 곧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해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몸의 건강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자캐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6절의 “자캐오는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자캐오의 기쁨은 “예수님을 집에 모시는 일은 감히 청하지는 못하지만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기뻐하는 자캐오의 반대쪽에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들이 있습니다(7절).
그 사람들은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위선자들’이고, 자기들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회개한 죄인들을 모두 받아주실 때, “저런 죄인들이 들어가는 곳이라면 나는 안 들어가겠다.” 라고 말하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안 들어가면 못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집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내가 할 일은 기뻐하면서 얼른 문을 열어 드리는 일입니다.
세속 일에 정신이 팔려서, 또 세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만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못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어도,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다시 오시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예수님께 문을 열어 드리는 일은 한 번만 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평생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어제 했다고 오늘 안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고, 오늘 했다고 내일 안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회개의 여정 - 갈망, 만남, 회개>
어제 복음이 예수님의 예리코에 입성전 무명의 눈먼 걸인과의 만남이 주제라면,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리코에 입성후 자캐오와의 만남이 주제입니다.
어제처럼 오늘의 복음도 소복음서라 할만큼 읽을 때마다 참 새롭고 은혜롭습니다.
부질없는 물음이지만, 어제의 경우 눈먼 걸인이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또 오늘의 경우 만약 자캐오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마찬가지 우리가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는 현재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요?
새삼 우연은 없고, 어제 무명의 눈먼 걸인이, 오늘의 자캐오가, 또 우리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참으로 하느님 은총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 안에서 서로 만나 수도공동체를 이뤄 사는 것도, 또 이렇게 함께 교회 안에서 주님의 자녀가 되어 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놀라운 기적에 은총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도저히 우연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회개의 여정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함으로 주님을 알고 참나를 알게 됨으로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 참나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와 겸손입니다.
제가 동방영성에서 배운 것 중 참 중요한 것이 무지입니다.
무지한 인간이란 것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병, 무지의 죄입니다.
참으로 무지할 때 사악하고 추악하고 무능하고 기괴할 수 있습니다.
인생 광야 여정, 부단한 회개로 주님을 닮아 참나의 성인도 될 수 있지만, 무지의 어둠에 머무를 때 괴물이나 폐인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은 참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은 회개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 역시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할 때 첫 일성이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역시 회개의 촉구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도 대부분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으로 그대로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대림시기를 앞둔 연중 마지막 시기 위령성월에 걸맞은, 무지한 인간에 대한 경고이자 회개의 촉구입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
깨어 있어라.
그러므로 네가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들었는지 되새겨, 그것을 지키고 또 회개하여라.
네가 깨어나지 않으면 도둑처럼 가겠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잘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그러니 무지에서 벗어나 참사람이 되기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은 부단한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병의 치유에 결정적인 처방은 회개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 역시 참회와 더불어 자비송으로 시작합니다.
날마다 미사를 통해 ‘회개의 생활화’를 이루어 주는 미사은총이 참 고맙습니다.
수도원의 일과표보다 더 좋은 회개의 시스템도 없을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에서 회개에 앞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우선입니다.
어제의 눈먼 걸인처럼, 오늘 자캐오의 갈망도 대단합니다.
얼마나 소외되고 고립된, 외롭고 고독한 처지의 세관장 자캐오였겠는지요!
부자라지만 키도 작고 초라한 외관에 누구에게도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던 자캐오였습니다.
그러나 자캐오의 위대함은 결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외로움은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전환하여 열렬히 주님을 갈망하며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적은 전제 요소가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기도가 없을 때 실상 살아 있다 하나 죽어 있는 삶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제는 평범함의 쓰레기 통에서 산다”라고 교황 성하의 말씀인데 어찌 사제뿐이겠습니까?
그러나 자캐오는 달랐습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에 깨어 있었습니다.
갈망이 있을 때 영혼은 깨어 있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열렬히 주님을 찾게 되며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에 경청할 것을 촉구합니다.
“귀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입성하여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자캐오는 즉시 주님을 찾아 나섭니다.
키가 작아 군중에 가린 예수님을 뵐 수 없자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갑니다.
궁즉통(窮則通)입니다.
눈이 열려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하니 돌무화과나무 역시 우연적 존재가 아닌 섭리적 존재였음을 깨닫습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 오너라.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주님과의 만남이란 절정의 장면입니다.
주님께서 자캐오의 이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제 나이 먹으니 내 이름을 불러 주실 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이제 주님 한분만 남았습니다.
불러 주라 있는 이름입니다.
아마 생전 이렇게 부드럽게 자캐오란 자기 이름을 불러주신 분은 예수님뿐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은 당신을 찾는 자캐오를 만나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자캐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묵시록의 다음 말씀이 주님을 갈망하여 깨어 경청하던 자캐오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저절로 자연스럽게 뒤따라 오는 회개입니다.
갈망에 이어 만남이요, 만남에 이어 회개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주님을 만나 참 자기를 발견함이 바로 회개입니다.
주님 자비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죄스런 모습을 발견한 자캐오의 회개의 실천이 그의 회개의 진정성을 입증합니다.
주님은 선입견도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자캐오를 사랑으로 받아들이니, 생전 처음 사람 대접을 받고 감격한 자캐오의 자발적 회개입니다.
참으로 사랑의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참나의 회복입니다.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일어서서’ 바로 회개를 통해 부활하여 새롭게 태어난 자캐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랑의 구체적 나눔과 실천의 결행을 통해 자캐오의 회개의 진정성이 입증됩니다.
주님을 만나 참으로 회개함으로 무지의 탐욕에서 해방된 자유인 자캐오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뻐 환호하시는 모습은 바로 잃었던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우리 하나하나가 모두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이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어제 복음처럼 오늘 복음도 이 거룩한 미사의 축소판처럼 생각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주님을 만나 참된 회개를 통해 참나를 찾음으로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빛의 자녀로, 자유인으로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오늘 하루도 주님과 함께 구원의 기쁨을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름다운 구원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루카 19,3)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부자 세관장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합니다.
부자에다 권력까지 지녔지만 율법으로 그는 죄인일 뿐이니, 구원의 문제는 그에게 숫자처럼 딱 맞아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그가 오늘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힘껏 달려가 체면도 잊고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메시아로 소문난 이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자캐오의 모습은, 성취를 위해 오르고 또 오르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오름을 성공으로, 내림을 실패로 규정한 세상의 시각에 맞춰 대부분의 사람들이 높은 곳을 추구하지요.
정작 중요한 건 낮은 곳에,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19,5)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무 위의 자캐오에게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하늘 자리를 버리시고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려와야 합니다.
여기에 주님이 계시니까요.
죄인들 틈으로 오셔서 죄인으로 취급당하신 그분을 만나고 차지하려면 우리는 위가 아니라 아래를 택해야 합니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루카 19,6)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신이 나서 예수님을 집에 맞아들인 자캐오는 누가 뭐라지 않았는데도 희사와 보상을 선언합니다.
부유한 세관장으로 철면피처럼 산 듯하지만, 하느님께 대한 죄책감과 동포에 대한 부채의식이 마음에 돌덩이처럼 얹혀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과거 죄의 고리를 끊고 새로이 거듭나겠다고 고백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자세를 권고합니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묵시 3,15)
세상살이에서는 무난해야 무탈하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영적 삶은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은 너무 차거나 너무 뜨거우면 입에서 뱉지만, 주님은 오히려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영적 삶은 선과 악의 긴장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집중하는 여정입니다.
하느님 반, 세속 반의 양다리는 없습니다.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상태일 뿐이지요.
혹 누가 믿음이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만 믿고 어느 정도 불신하는 게 아니라, 그저 온전히 믿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악에게 한 영혼을 반반씩 나누어 가지자고 하지 않으시니까요.
하느님과 악은 공존할 수 없고, 또 하느님은 당신께서 사랑하는 영혼을 단 한 부분이라도 결코 악에게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안전지대에 머물고 싶어하는 건 믿음으로 자신을 던지길 두려워해서 인간적 보루를 남겨두려는 인간의 미지근함 때문입니다.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묵시 3,19)
주님 향한 사랑 때문에 체면도 잊고 자신을 던진 적이 있는 이라면 알아듣는 말씀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도 그러했고, 세속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순교자들과 성인들 역시 주님 향한 '열성'으로 회개하고 사랑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헝가리의 왕녀 엘리사벳이 그랬고 또 우리가 만난 자캐오 역시 그 표본이지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마치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마음을 들려주는 듯합니다.
자캐오는 자신의 집 문은 물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젖혀 주님을 맞아들였고, 그분과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친교가 가난한 이들에게 축복으로 열매를 맺었지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루카 19,9)
우리 중 누가 자캐오를 손가락질하고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어둠을 벗어버리고 빛 한가운데로 나온 사람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열렬한 갈망으로 주님을 맞아들여 죄의 그늘로 음울했던 거처를 구원의 장소로 바꾸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을 맞아 그분과 먹고 마시는 사이 구원이 우리 안에 들어올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도 축복이니, 더욱 뜨겁게, 더욱 열렬히 갈망하고 사랑하길 축원합니다.
오늘 주보 축일을 지내는 재속 프란치스칸들을 기억하며 축하를 드립니다.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예전에는 겨울이 가까워지면 ‘월동준비’를 했습니다.
긴 겨울 식탁에 올라올 ‘김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따라 시장엘 간 적이 있습니다.
리어카에 싫은 배추를 뒤에서 밀기도 했습니다.
김장은 어머니 혼자서 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사시는 아주머니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김장을 하면서 수육을 삶아 배추에 속을 넣어서 먹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도 김장을 하였습니다.
구역장님들이 모여서 긴 겨울에 먹을 김장을 하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수육을 삶자고 했고, 김장을 하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형제님들은 성당 뒤뜰에 구덩이를 파고 구역장님들이 만든 김장을 묻었습니다.
이 김치는 만두의 재료가 되기도 했고, 구수한 김치찌개가 되기도 했습니다.
월동준비는 계절의 변화가 있기에 필요했습니다.
삭막한 겨울을 지내기 위한 조상들의 지혜입니다.
마당의 창고에는 겨울에 쓸 연탄을 쟁여 놓았습니다.
연탄이 가득한 창고를 보면 기분이 좋았습니다.
요즘 우리는 굳이 월동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마트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탄 대신에 가스가 집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자연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아닌 것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어쩌면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서로 기대며 살아가는 감각을 잃어버리고 누가 우리를 숨 쉬게 해주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엄청나게 공부하고 대단한 학위를 받아도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배울 수 없다면 헛된 지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월동준비’를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10처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월동준비를 잘 했던 슬기로운 처녀들은 신랑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월동준비를 못했던 어리석은 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비유에서도 월동준비를 잘 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에 함께 한다고 하셨습니다.
월동준비를 못했던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정화의 과정을 지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서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세상을 떠난 영혼들에게 위로가 됨을 믿습니다.
언젠가 우리들 또한 세상을 떠날 것을 생각하며 ‘월동준비’를 잘 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옮겨감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죽음이라는 여행을 떠나는 ‘티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살아 있던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내가 울면 거울 속의 나도 웁니다.
내가 찡그리면 거울 속의 나도 찡그립니다.
내가 웃으면 거울 속의 나도 웃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은 내 삶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월동준비를 잘 했다면 죽음이라는 거울은 우리를 천국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월동준비를 적당히 했다면 죽음이라는 거울은 우리를 연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월동준비를 하지 못했다면 죽음이라는 거울은 우리를 지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기 위한 여정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월동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무 위로 올라갔던 자캐오는 ‘월동준비’를 잘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갈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누고, 빚진 것은 4곱절로 갚는 것이 자캐오의 월동준비였습니다.
그리고 구원자로부터 구원받았습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 대한 갈망으로 ‘월동준비’를 잘 하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 가는 것들을 튼튼하게 만들어라.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남학생에게 짝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와 학교에 있을 때 계속해서 이 여학생이 생각났고, ‘연인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이 여학생은 학교에서 퀸카로 통했고, 자신은 보통 남자아이보다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못생기고 뚱뚱했습니다.
얼마 뒤, 이렇게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던 이 남학생은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글쎄 자기와 제일 친한 친구와 여학생이 서로 사귀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친구와 자신은 비슷하거나 오히려 자기보다도 못한 것 같았습니다.
키도 작고, 공부도 못하고, 외모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친구에게 어떻게 사귀게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합니다.
“‘좋아한다’라고, ‘사귀자’라고 고백했지.”
생각만으로는 자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정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몇 마디를 못 해서 후회만 남기는 것입니다.
용기 있는 말과 행동이 필요합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은 어떤 것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도 이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아직은 아니다.’, ‘내 체면에….’ 등의 말을 하면서 용기 내지 못합니다.
큰 후회를 남길 것입니다.
자캐오는 예리코 세관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와 재산 상태는 구원받고 못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구원의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원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세관장이며 부자인 그가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간다는 사실을 상상해 보십시오.
채신머리없다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뵈옵기를 바라는 마음에 체면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체면을 모두 내려놓고 용기 있게 주님 앞에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자캐오는 주님을 모시기 위한 준비로 무엇이 필요한지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에 대한 애착심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약속합니다.
회개의 표시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하면 네 곱절로 갚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율법의 규정보다도 훨씬 더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율법의 규정은 자선은 재산의 20%, 부당하게 얻은 재산은 5분의 1일을 배상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만큼 그는 진심으로 회개했던 것입니다.
이런 그의 진심에 구원받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진심으로 주님을 뵈려고 노력하고 있을까요?
용기 없이 주님을 뵙지 못하는 이유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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