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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7일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제1독서 : 1코린 15,1-11
복 음 : 루카 7,36-50
그때에
36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37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38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39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40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41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42 둘 다 갚을 길이 없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44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45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46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47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4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49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부활 은총의 삶
-사랑, 만남, 회개, 용서, 구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세상에서 떨어져 불암산 기슭 수도원에서 33년째 머물러 정주하고 있지만
세상 중심 한복판에 살고 있는 듯 생각됩니다. 혼자 유리된, 고립단절 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편해야 저도 편하고 세상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합니다.
바로 수도자의 마음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게 되고 최선을 다해 매일 강론을 나누게 됩니다.
어제 받은 세 통의 카톡 메시지가 새삼 이런 진리를 확인하게 합니다.
“며칠 전 수도원에 다녀온 이후로 참말로 매사 매순간 감사를 느끼며 지냅니다.
우리 가정 식구 모두가 무탈하게 세끼 식사하며 가정 기도를 매일 같이 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한거예요.
신부님 기도 덕분이라고 느껴지네요.
세상적으로 보면 최하위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편안함을 잠시 하고 있는 것 자체가
주님께서 주신 휴식인 것 같아요.
자존심의 꽃이 다 떨어져야 인격의 꽃이 편다고 하더니 조금은 이해가 되네요.”
“신부님, 저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요?
자연 이치대로 순행하며 사니까 아픔도 고통도 슬픔도 덜한 것 같아요.
신부님 만나고 나서 제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겨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기도 덕분에 이경자씨가 기적처럼 깨어 나셔서 중환자실에서 하루 만에 일반병실로 내려 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이분 위해 15일 미사봉헌과 기도 부탁드립니다.”
모두가 주님을 만난 분들의 고백입니다.
구원은 언젠가 밖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가까이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 구원의 삶, 부활 은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먼저 사랑의 손길을 뻗으십니다.
어제 저녁 식사전 수도형제들을 줄 복숭아를 오토바이에 싣고
싱글벙글 웃으며 오는 한 수사님의 모습이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습니다.
그대로 구원과 부활의 기쁜 삶을 사는 모습입니다.
사랑의 주님과 만날 때 회개요 용서요 구원이요,
늘 우리를 찾아오시는 사랑의 주님을 환대함이 그렇게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의 생생한 증거가 주님 부활의 증인이요, 부활의 구원의 기쁨을 사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도의 겸손한 고백이 참 아름답고 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맨 마지막으로 팔삭둥이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이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바오로의 겸손한 고백이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마치 후반부는 그대로 저의 고백처럼 느껴집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사랑의 은총을 만날 때 회개요 겸손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은총이 우리를 회개시켜 겸손하고 아름다운, 매력적인 구원과 부활의 참 삶으로 이끕니다.
바오로와 쌍벽을 이루는 은총의 여인이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죄녀입니다.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너무나 매력적인 여인입니다.
예수님의 감동과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갑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미 죄녀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며
하여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 사랑의 주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향유의 사랑! 그대로 죄녀의 회개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열렬한 사랑으로 표현된 죄녀의 회개입니다.
죄녀의 회개를 촉발시킨 예수님의 사랑이 이미 선행했음을 느낍니다.
회개해서 사랑이 아니라 사랑해서 회개입니다.
그러니 누가 회개하지 않는다 꾸짖을 것이 아니라 사랑하며 기다리십시오.
때가 되면 회개할 것입니다. 죄녀와 예수님의 만남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연상케 합니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오늘 복음중 절정의 장면입니다. 말 그대로 회개와 사랑, 감사와 찬미의 눈물이자 행위입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로 미사전례에 참석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주님은 한 순간에 죄녀의 전부를 알아챘습니다.
죄녀의 예상치 못한 행위에 놀란 바리사이 시몬과는 너무 판이한 주님의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은연중 죄녀와 바리사이 시몬을 빗댄,
빚을 많이 탕감 받은 자와 적게 탕감 받은 자에 대한 적절한 예를 들면서 시몬을 직격直擊합니다.
바로 우리를 깨우쳐 회개에로 이끄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인간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죄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수록 즉시 회개하고 주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할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회개하고 사랑할 때 순수요,
죄가 없어 구원이 아니라 회개할 때 하느님 사랑의 은총으로 구원입니다.
사랑과 죄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람 안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사랑의 빛 앞에 사라지는 죄의 어둠처럼 말입니다.
죄녀가 그 순간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그녀는 죄인일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몬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그의 죄의 개념이 순전히 율법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 죄의 개념은 관계적입니다.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사라지는 죄의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를 짓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보다
‘어떻게 사랑할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백배 유익하고 낫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복음의 죄녀는 물론 마치 오늘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랑의 회개로 표현된 죄녀의 아름답고도 슬픈, 깊디깊은 믿음에 감동, 감격하신 주님의 구원 선언입니다.
아, 이제부터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 함께 구원의 삶, 부활 은총의 삶을 살게 된 죄녀입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본격적 우정의 여정에 오른 죄녀요 주님과 사랑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회개한 과거는 불문에 붙이고 다시 묻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어제나 내일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나를 보십니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만나고 가까이 있는 이웃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처벌이 아니라
우리를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려 노력하십니다. 처벌은 파괴합니다.
하느님의 소망은 우리 모두가 온전해 지는 것이며
내적 평화와 조화를 체험하며 구원과 부활의 기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시편118,1).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한 뒤, 77세에 은퇴하여 조용한 삶을 보내고 있었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은퇴 후의 삶은 무료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술을 10주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81세에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그가 바로 미국의 샤갈이라 불리는 ‘해리 리버만’입니다.
그는 101세에 22번째 개인전을 열었고 103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80세가 넘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지요.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아무것도 않고 있다가, 2~30년을 지나고 나서는 어떨까요?
아무것도 하지 못했음에 너무 억울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지 못할 장애를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사람은 모든 것이 완벽하게 주어졌을 때가 아닌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진정한 성공은 성공을 위해 끝까지 시도하는 용감한 사람의 몫입니다.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죄 많은 여인 역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기 힘들었던 여인이었습니다.
특히 자신을 경멸하는 바리사이의 집까지도 찾아갔습니다.
주님만이 자신의 죄를 진정으로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떤 장애물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 발에 향유를 부어 바를 수 있었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예수님께서 예언자이심을 알아보지만 바리사이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 여인은 믿는 사람이지만 바리사이는 믿는 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서 확실하게 죄를 용서받지만,
바리사이 시몬은 여인으로 말미암아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한 것은 바리사이 시몬이 아니라 여인입니다.
시몬은 그분을 사람으로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발에 기름을 부어 바른 여인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당신께서 마지막 예언자, 곧 종말론적 예언자임을 시몬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메시아임을 알지 못한 시몬이나 다른 바리사이들과 달리,
큰 빚을 탕감 받은 여인은 큰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은 더 많이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나아갔기에 가능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 때 있었던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 하나가 있었는데,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루카 7,37-38)
이 자리에서 ‘죄 많은 여인’이 영광을 입습니다.
죄 많은 그녀는 감히 예수님의 앞쪽에 나서지도 못하고
뒤쪽 발치에서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셨습니다.
자신의 머리 위에 간직한 가장 고귀한 머리카락으로
땅에 붙이고 있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그 발에 당신 입을 맞추고 그 발에 자신의 전부를 쪼개어 부수고 깨뜨려
그 발에 붙고 발라드렸습니다.
하여, 그 옥함의 사랑의 향기는 온 집안, 온 고을로 퍼져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이 ‘죄 많은 여인’을 교회에 비유합니다. 성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교회 말고는 누구도 그런 향유를 만들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몸소 죄인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교회가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루가복음 해설)
이러한 “창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교회”의 모습이
아름다움은 뒤에 나오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향기를 뿜습니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가 있는 우리 집, 우리 공동체 안에는
‘죄 많은 여인’(교회)이 부은 사랑의 향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나는 왜, 공동체에 파고 든 그 향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내게 사랑이 없어, 사랑의 향기를 맡지 못하는 까닭이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내 형제들은 예수님을 섬기며 발을 닦아드리느라 여념이 없는데도,
그들의 땀과 눈물을 닦아주지 않는 것은 결코 닦아드릴 머리카락이 없어서가 아니라,
머리를 수구려 발까지 자신을 낮출 줄 모르는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향유를 나를 치장하기 위해 쓰고 있는 까닭이 아닐까요?
값비싼 것을 낭비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물질에 애착하고 있는 까닭은 아닐까요?
사실, 오늘도 ‘죄 많은 여인’인 교회는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사랑이 쏟는데
아직 내가 그 사랑을 보지 못함은 아직도 구린내를 담고 있는 나를 깨부수지 못한 까닭이 아닐까요?
아직도 자신을 감추어 둔 채, 다 부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 아닐까요?
그러나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온 집안, 온 공동체를 사랑의 향유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러니 이제는 온 집안에 가득 퍼진 이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종일토록 취할 일입니다.
내내 토록 찬미할 일입니다.
그 향기 온 몸에 묻혀, 바다소라처럼 그 향 되어 날릴 일입니다.
오늘 하루 이 그리스도의 향기에 흠뻑 취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향기가 되어 세상에 뿜으시길 바랍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의 불순한 입이 당신의 발에 입 맞추고 거룩해지게 하소서!
저 자신을 깨뜨려 형제들의 발에 입 맞추는 사랑의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카 7,47)
주님!
제 영혼의 막힌 코를 뚫으소서!
옥함을 깨뜨려 향유를 쏟듯
제 온몸에 쏟아지는 숨 가쁜 당신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저를 부수어 진한 향기의 피가 흐르게 하고
부서질수록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온 집안에 베인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를 내내 토록 찬미하게 하소서.
많이 용서 받았기에, 많이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을 이야기하였고,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17년 전에 저는 교구 사목국에 있었고 사목국의 사제들은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한국어 제목은 성공하는 사람의 일곱 가지 습관이지만
원 제목은 “The 7 Habits of Highly Effective People"입니다.
성공이라는 말은 없고 삶을 효과적으로 사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성공’이라는 말을 좋아하고,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사목국에는 ‘교육, 전례, 선교, 가정, 복음화, 직장사목, 기획’을 담당한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각자의 업무에서 주어진 일을 하지만, 사목국 차원에서 함께 협력하고 연대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구는 ‘시노드(교구사목회의)’를 통해서 교구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교구장님은 ‘2020’을 말씀하였습니다. 2020년에는 가톨릭 신자가 20%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열심히 했는데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이어달리기에서 다음 사람에게 배턴을 넘겨주듯이 저희는 후배 사제들에게 사목국의 일을 넘겨 드렸고,
지금의 사제들은 코로나19의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영상으로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습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제자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물과 배는 제자들에게 소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소중한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높은 자리와 권력을 달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을 따르면서 더 높은 자리와 권력을 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도들은 소중한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소중한 것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전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잡는 일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는 일이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율법의 가치를 무너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체험하였고, 이제 소중한 것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박해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가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지금 죽는 것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에서 미사를 부탁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께서 건강이 여의치 않아서 몇 달간 자리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사제에게 미사는 소중한 직무입니다.
신문을 만들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소중한 직무이지만, 공동체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소중한 일입니다.
본당신부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매 주일 공동체를 위한 미사에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지난 8년 동안 본당을 떠나서 교구에서 지냈습니다.
모처럼 공동체와 함께 미사를 봉헌하니 제게도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 가장 소중한 일은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거 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발라드린 여인은 소중한 일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오늘 하루 소중한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소중한 일을 찾았다면 행동으로 옮기면 좋겠습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루카 7, 47)
한상우 바오로 신부
눈물로
용서와 사랑을 배우게 된다.
먼저
나 자신을 들여다본다.
용서의 열매는
쓰라린 사랑의 열매이다.
아픈 용서가 참된 사랑이다.
아프지 않는 사랑과 용서는 없다.
죽지 않고서는 부활이 없듯이
죽을만큼 아파야
용서하시는 주님을 보게 된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용서의 삶이다.
예수님의 용서로
죄 많은 우리가 아름다워진다.
용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이다.
주님께
내어드리는 사랑이 용서이다.
향유같이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고 깨뜨려져야
가장 향기로운 사랑이 된다.
용서의 향유는
아프기에 모두를 향기롭게 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허물을 닦아주는 것이다.
용서는
죄의 치유이며 관계의 치유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이
용서와 사랑이다.
용서가 있는 곳에 사랑이 있다.
용서에
빚진 죄인임을 깨닫는다.
많이 용서받은 사람은
큰 사랑을 드러낸다.
사랑의 열매는
용서의 여정을 거친
가장 향기로운 눈물의 열매이다.
부모에게 감사하지 못하며 하느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전삼용 요셉 신부
사랑과 가장 가까운 단어는 무엇일까요?
이 단어를 넘지 못하면 사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감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이 감사할수록 더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오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과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 중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더 많이 탕감 받아 더 감사하니까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가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이 지금까지 저를 극도의 교만에서 구해주고 있으니 분명 주님의 음성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때 들었던 생각은
‘단 한 순간도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그것 자체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죄구나!’였습니다.
부모에게 무언가 잘못을 해서 죄가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면 죄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께 무엇을 잘못해서 죄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죄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매 순간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 자신이 더 해주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행실이 바르지 않은 여자가
향유를 깨뜨려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을 눈꼴사나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그를 깨우치십니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 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 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께 무언가 더 해주고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으로 여기고 감사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리사이 시몬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예수님께서 자신의 초대에 응답해 준 것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대한 감사가 바로 일어나기는 힘이 듭니다.
예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는 먼저 감사하려고 노력해야 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주는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모든 율법을 다 지키는 바리사이가
세리와 창녀, 죄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지 못하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감사를 찾을 수 있느냐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님께로부터 받은 상처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큰 반감을 갖습니다.
영화 ‘똥파리’(2008)는 그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조차 잔인한 한 깡패와 한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원하지 않았지만, 가족이 되어야 했고 그 가족이 원수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둘은 서로 아는 것이 없지만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자신은 바람피우면서도 여동생과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병원으로 업고 뛰어야 하는 남자 주인공, 죽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에게 잘해주려 하는데
오히려 어머니를 죽인 사람으로 오해받고 박해받는 여주인공.
그러나 잔인하고 안 됐지만, 이들은 ‘아버지’라는 이름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하느님이 싫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 먼저 사랑하지 못하면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하는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선물을 좋아하지 않으면 선물을 주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선물이 싫으면 주는 사람도 싫은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 부모에 대한 용서와 감사를 찾아내지 못하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사랑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해집니다.
따라서 바리사이 시몬은 먼저 자신의 집에서 이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도록
용기 있게 찾아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준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찾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찾아내고,
더 나아가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에게서 감사를 찾아내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에게 고문하는 이들에게도 감사를 찾아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주는 도구로 쓰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먼저 감사를 찾아내려 노력할 때,
그런 선물을 주신 주님께 더 감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에게 감사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주님께 대한 감사로 가는 유일한 다리입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이 알로이시아 수녀
죄인인 여자가 바리사이 사람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께 받았던 용서와 큰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의 상황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있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용서와 사랑의 힘 입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살아가면서 저는 저의 옥합의 들고 예수님께 다가가려 합니다.
옥합이 못생겨도 괜찮습니다.
옥합 안에 든 향유가 다른 사람의 것 보다 향기롭지 못하여도 괜찮습니다.
오직 당신 앞에 나아가 용기를 내어 저의 향유를 부어드릴 수 있다면
오늘 하루도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