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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4,1-11>
나 요한이
1 보니 하늘에 문이 하나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들었던 그 목소리, 곧 나팔 소리같이 울리며 나에게 말하던 그 목소리가, “이리 올라오너라. 이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너에게 보여 주겠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2 나는 곧바로 성령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또 어좌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어좌에는 어떤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3 거기에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4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5 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6 또 그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7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8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9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10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11 “주님, 저희의 하느님, 주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셨고 주님의 뜻에 따라 만물이 생겨나고 창조되었습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11ㄴ-28>
그때에
11 예수님께서는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신 데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나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2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13 그래서 그는 종 열 사람을 불러 열 미나를 나누어 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하고 그들에게 일렀다.
14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15 그러나 그는 왕권을 받고 돌아와, 자기가 돈을 준 종들이 벌이를 얼마나 하였는지 알아볼 생각으로 그들을 불러오라고 분부하였다.
16 첫째 종이 들어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7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일렀다.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가져라.’
18 그다음에 둘째 종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주인은 그에게도 일렀다.
‘너도 다섯 고을을 다스려라.’
20 그런데 다른 종은 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주인님, 주인님의 한 미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21 주인님께서 냉혹하신 분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시기에, 저는 주인님이 두려웠습니다.’
22 그러자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내가 냉혹한 사람이어서 가져다 놓지 않은 것을 가져가고 뿌리지 않은 것을 거두어 가는 줄로 알고 있었다는 말이냐?
23 그렇다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넣지 않았더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돌아왔을 때 내 돈에 이자를 붙여 되찾았을 것이다.’
24 그러고 나서 곁에 있는 이들에게 일렀다.
‘저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 이에게 주어라.’
25 ─ 그러자 그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 ─
2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27 그리고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28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을 걸어가셨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겨울의 길목입니다.
바퀴를 달고 달아나는 가을의 뒷모습이 을씨년스럽고, 길가에 군데군데 몰아다 놓은 가을의 노고, 가을의 땀방울이 쓸쓸합니다.
그런데 잎이 떨어지고 꽃도 떨어지고 나면, 그 나무가 속이 꽉 찬 나무인지 속 텅 빈 나무인지가 훤히 드러나 보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의 몸을 치장하고 있던 가식과 허영의 옷들을 벗어버리고, 우리의 속내를 들여다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인 '미나의 비유'는 겉보기에는 마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사실 이를 주의해야 합니다.
곧 결과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결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심을 많이 맺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결실을 내는 나무가 되는 데 있습니다.
곧 결실을 통해서 나무의 본질을 보는 데 있습니다.
결국 어떤 나무가 결실을 낼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보고 선과 악을 구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루카 6,44-45)
그렇습니다.
열매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나무에 대한 비유입니다.
곧 ‘착한 종’은 선물과 선물을 주신 분에 대한 믿음으로 성실하여 열매를 맺게 되었지만, ‘악한 종은’ 주인에 대해서 “냉혹한 분이어서 가져다놓지 않는 것을 가져가시고 뿌리지 않는 것을 거두어 가시는 분”(루카 19,23)으로 여겼기에, 결국 그에 따른 결과를 낳았음을 말해줍니다.
결국 믿는 이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불신한 이는 불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빛은 빛의 열매를 맺고 어둠은 어둠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우리의 인격을 다듬어야 할 일입니다.
열매에 치중하다 자신을 그르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주인의 선물을 악용하지도 말아야 할 일입니다.
선물(미나)을 주신 분에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간직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루카 17,6)
사실 이처럼 믿음은 능력이요, 불신은 무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이 힘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할 일입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활동하신 분의 힘을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필리 4,13)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미나를 나누어주며, 내가 올 때까지 벌이를 하여라.”
(루카 19,13)
주님!
당신께서는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듯 사랑과 신의의 표시로 저에게 ‘미나’를 맡기셨습니다.
잘 간직하라고가 아니라 잘 열매 맺으라고 씨앗으로 선사하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신의를 땅에 묻어버리고 제 신변 안전만 바라는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게 하소서.
믿음과 사랑이 꽉 찬 열매를 들고 당신 앞에 나서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하느님은 내게 어떤 분? 나의 사랑은 어떤 사랑?>
오늘 루카 복음은 미나의 비유로서 마태오 복음의 탈란트의 비유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비유입니다.
탈란트의 비유에서는 탈란트를 더 받기도 덜 받기도 하는 데 비해, 미나의 비유에서는 똑같이 한 미나를 열 사람이 받습니다.
이 비유에서 미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누구나 똑같은 사랑을 받았다고 이해하고, 저는 오늘 비유를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이 비유를 대입시키니 인생 결산이 떠올랐습니다.
너는 내가 준 사랑 한 미나를 일생 어떻게 관리했냐고 주님께서 비유의 주인처럼 물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저를 성찰해 보니 아버지 없어서 가난하고 고생한 것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한 사춘기 때를 빼고는 한 번도 비유의 마지막 사람처럼 하느님을 냉혹한 분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반대로 사랑의 하느님으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렇게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입버릇처럼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겠다며 사랑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봉사자들과 하루 식당을 여는 기도를 바칠 때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가득히 부어주시어, 저희가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해 이웃과 나눔으로써 당신 복음이 이 지역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
그런데 이렇게 지향을 두고 입으로는 그렇게 사랑하려고 하지만, 실제를 보면 저의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할 때가 많음을 보고, 반성이랄까 후회를 하곤 했는데 오늘은 이런 반성이 되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너도 비유의 마지막 종과 같이 한 미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어!'
저는 비유의 그 종처럼 주님을 냉혹한 분으로 알고 있지 않고 사랑의 주님으로 알고 있고, 그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 사랑으로 사랑치 않고 내 사랑으로 사랑한 것이 바로 받은 한 미나를 수건에 싸 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왜 주님의 사랑을 받고는 그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고, 그 사랑을 고이 수건에 싸 두는가?
그 사랑을 뭣에 써먹으려고 그렇게 고이 간직하고 있는가?
혹시 나만 그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은 아닌가?
마치 형제와 나누라고 부모가 준 돈을 형제들과 나누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쓰려고 지갑에 또는 금고에 숨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제게 그럴 마음은 결단코 없지만 주님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음은 결과적으로 주님 사랑을 수건에 싸 둔 것이 되겠지요.
저는 오늘 이것을 묵상하고 반성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느님은 여러분에게 냉혹한 분입니까? 사랑이십니까?
사랑의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계시는지요?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작은 일에 충실해야>
하느님의 나라, 천상의 축복은 믿는 이들이 바라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습으로 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환상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릇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이야기해 주십니다.
각자는 자기 맡은 일에 충실하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은 사람들이 있었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각자의 탈랜트대로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 충실하게 힘들여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협력의 강도는 분명히 다릅니다.
열 개도 있고, 다섯도 있습니다.
그림과 같은 호숫가에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모험을 강행하는 담대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수동적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미나를 그냥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입니다.
그는 은총의 삶과는 멀리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활용해야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희망한다면 무엇인가 해야 했습니다.
눈먼 거지는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자캐오는 먼저 달려 나무에 올라 기다렸습니다.
철은 녹이 슬고, 용수철도 느슨하게 풀어집니다.
깨끗한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았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잘 써야지!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지 말고 하느님의 은혜에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적극적인 것처럼 보이는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인이 ‘한 미나를 가진 자에게서 그 한 미나를 빼앗아 열 미나를 가진자에게 주어라.’하고 말하자 주인에게 ‘주인님, 저이는 열 미나나 가지고 있습니다.’하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얘기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것만 가지고 따지고 대드는 사람입니다.
순명하지 않고 이유를 대는 그들은 결국 마지막에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는 물론 이웃을 망가뜨립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탈랜트가 있고 그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는 용기와 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사용한 대로 그만큼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노의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인과법칙을 피할 수 없으니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를 뿌리고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실까?’를 소중히 여기는 하루를 기대합니다.
어떠한 큰일도 작은 것에서 시작되니만큼 작은 것이 결코, 작지 않음을 일깨워야 하겠습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은 다 다르고 그것은 단순 비교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주어진 것을 분수에 맞게 쓸 수 있으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많이 이룬 것도 중요하지만 이루기 위한 과정을 귀히 여기는 주님이시니 하나를 가지고 열 개를 늘렸건 다섯으로 늘렸건 그것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를 위한 땀과 노력과 정성, 희생이 값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하도록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도록 부르셨습니다.’
옛말에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산다.”고 했습니다.
젊어서 열심히 노력하면 나중에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듯이 주님을 뵙고자 노력하면 만나게 되고 열매도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면 지금은 힘들고 고달프겠지만 그만큼 보람도 기쁨도 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19,26) 하신 말씀은 노력한 정성과 수고는 크게 이룰 것이요, 그렇지 못함은 결국 잃는다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 빼앗아가기도 전에 잃고서는 남의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욕심을 부리지 말고 지금 주어진 일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를 잃게 되는 심판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신자들이 신앙심이 없다고 넋두리하고 예전 같지 않다고 말하기 전에 신앙을 키워주지 못하고 일깨워 주지 못한 저의 잘못을 자책하는 오늘입니다.
대접을 받기에 익숙해지고 독불장군으로 고착되는 오늘을 봉헌합니다.
작은 일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내 안에서 자라나는 하느님 나라 형성 단계>
오늘 복음은 소위 ‘미나의 비유’입니다.
한 미나는 약 100 데나리온의 가치입니다.
그러니까 한 1,000 만원 정도라고 보면 됩니다.
이 비유는 화폐의 단위만 다른 탈렌트의 비유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한 탈렌트는 6,000 데나리온으로서 약 6억 원의 가치가 있습니다.
탈렌트의 비유는 다섯, 둘, 한 탈렌트를 주는 것과는 달리, 미나의 비유에서는 모든 종에게 동일하게 한 미나씩 맡깁니다.
이는 동일한 구원의 씨와 같습니다.
구원은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것을 키우는 것에 따라 각자 다른 심판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한 미나는 그래서 우리 구원을 위해 뿌려 주시는 말씀의 씨앗, 성체의 씨앗이라고 보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크게 세 부류의 종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주인이 임금이 되려고 떠나는 것도 탈렌트의 비유와 다릅니다.
첫째 부류는 주인이 임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백성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한 미나를 땅에 묻어 놓은 종이고, 마지막 부류는 그것으로 주인을 영광스럽게 한 부류입니다.
오직 마지막 세 번째 종들만이 구원에 이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임금이 되어주시는 것에 우리가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분이 나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나는 자아의 압제, 어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멍에를 메지 않는다면 나는 못된 선장의 배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그분이 임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임금이 되어 돌아온 주인은 그들을 처형하라고 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그분을 임금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는 이것이 선악과를 봉헌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야곱은 불콩죽을 에사우에게 봉헌하는 것으로, 또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이사악에게 봉헌하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바치고 심지어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주님이 주님 되심을 표현하였습니다.
이것이 없다면 그분을 임금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예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 내게서 자랄 수 없습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고 신학교에 들어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멈추면 안 됩니다.
한 미나를 땅에 묻어둔 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은 한 탈렌트를 받았던 종처럼 주인을 냉혹하고 두려운 분으로 여겼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씨앗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키우지 않았습니다.
주인만 좋은 일 시킬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씨앗을 키우기 위해서는 항상 ‘감사’가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지 못하면 어떤 구원의 씨앗도 자라지 않습니다.
많이 말씀드린 이야기지만, 저는 신학교에 들어와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로 간신히 못된 종에서 벗어나게 된 것 같습니다.
불만이 가득했을 때는 나의 불만을 채우는 데 급급했지만, 감사가 나오니 그분의 뜻을 따라주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구약의 야곱은 어떻게 했을까요?
자기의 불콩죽을 드시고 가죽옷을 내어주어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게 된 야곱은 이제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에사우가 살았듯이 삽니다.
에사우가 맺어야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20년 동안 갖은 고생하며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에사우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때 그분이 맺으셨을 법한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분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2020년 3월 카자흐스탄 국적 20대 이주노동자가 알리 압바르 씨가 23일, 밤늦게 귀가하다가 자신이 사는 강원도 양양 원룸 건물 2층에서 불이 난 걸 목격했습니다.
곧바로 서툰 한국말로 소리치며 이웃과 함께 입주자 10여 명이 대피하도록 도왔습니다.
이어 불이 난 2층 방에서 50대 여성이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것을 안 알리 씨는 망설임 없이 건물 밖 가스 배관을 타고 올라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성은 끝내 숨졌고 알리 씨도 등과 목 등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다쳐서 일을 못 하다 보니 치료비는 물론 고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매달 보내던 생활비도 막막해졌습니다.
딱한 사정을 접한 한 이웃이 앞장서 모금한 덕에 지금까지 병원비 700여만 원은 간신히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입니다.
병원에서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난 후 당장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현장이 수습되면 자신이 불법체류자임이 드러날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화마 속에서 손길을 내밀고 있는 생명이 훨씬 더 소중했습니다.
이런 사연이 알려지면서 알리 씨에게 영주권을 주자는 국민청원이 잇따라 올라왔고 양양군도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청구를 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된 이들과 소식을 접한 수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의 체류를 인정해달라는 청원을 했고, 결국 의인상 수상과 함께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주권을 받을 때 불법체류자로 살던 어려웠던 삶의 기억에 눈물을 흘렸고 이제는 가족과 한국에서 함께 사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러한 순서로 이어집니다.
그분이 먼저 당신을 주님으로 인정해 달라고 우리의 것을 조금 요구하십니다.
내가 그것을 드리면 그분은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그러면 그분 안에 거하게 됩니다.
야곱이 베텔에 머물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은 하느님 나라 백성을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취급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미나가 하나의 영혼이라 하면 다른 영혼들도 한 미나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른 영혼을 소중히 여기고 구할 줄 알아야 비로소 영주권을 얻게 됩니다.
만약 야곱이 열매 없이 에사우에게 돌아갔다면 에사우가 받아들여 주었을까요?
그 앞에 나설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합당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기간입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영광스럽게 변모된 구성원들이 하느님 어좌 앞에 모여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하느님 나라>
심오하고 난해하기로 유명한 요한 묵시록에는 다양한 상징들이 등장하는데, 그 상징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게 되면, 성경 말씀들이 더욱 큰 은혜와 축복으로 다가옵니다.
환시에 사로잡힌 요한에 하늘나라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제일 먼저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어좌’와 어좌에 앉아 계신 ‘어떤 분’이었습니다.
어좌라 함은 왕이 앉는 자리를 말합니다.
당연히 만왕의 왕이신 하느님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앉아 계신 분을 하느님이라 칭하지 않고 ‘어떤 분’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유다 관습 안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차원에서 그분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좌에 앉아 계신 하느님은 하늘의 중심 인물일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 인류의 중심이십니다.
요한은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모습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분은 온 세상을 두루 비추는 강렬한 빛, 너무나 눈이 부셔 쳐다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빛 속에 거처하십니다.
그분에게서 발산되는 엄청난 빛은 절대적인 신적 권위와 권능, 신적 본질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어떤 분’에게서 발산되는 강렬한 빛은 값진 보석의 빛깔과 비유됩니다.
벽옥(碧玉)은 여러 가지 빛을 내는 흰 다이아몬드이거나 무지개빛깔을 발산하는 단백석(蛋白石, opal)으로 추정됩니다.
홍옥(紅玉)은 아마도 진홍색의 루비(ruby)일 것입니다.
어좌 둘레에 무지개처럼 펼쳐진 취옥(翠玉)은 에메랄드를 지칭합니다.
이처럼 묵시록의 표상들이 주는 하느님의 이미지는 영광스럽고 전능하시며, 한없이 평화롭고 신비스런 느낌입니다.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묵시록 4장 4절)
스물넷이라는 숫자는 열둘에 열둘을 더한 숫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원로 스물넷이라 함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대표자요, 더 나아가서 하느님 백성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된 구성원들이 지존하신 하느님 어좌 앞에 모여 앉아, 그분께 영광과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모임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어좌에서 터져 나오는 번개와 천둥소리는 시나이산에서 있었던 하느님의 계시를 연상시킵니다.
어좌 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 다시 말해서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요한은 네 생물을 봅니다.
그 모습이 꽤나 기괴합니다.
각각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같이 생겼는데, 다들 온몸에 눈이 가득 달려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습니다.
섬뜩한 모습입니다.
네 생물은 온 세상에 살아가는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수많은 눈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그들이 느끼는 황홀함과 놀라움, 감탄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요한이 들여다본 하느님 나라는 창조주이신 하느님, 엄위와 영광으로 가득한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 구원된 하느님의 모든 백성들뿐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모든 피조물들이 한자리에 모여, 하느님께 영광과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범 우주적인 전례가 거행되는 자리였습니다.
언젠가 우리 역시 성령에 이끌려 하늘나라로 인도될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하느님 어좌 둘레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속되는 거룩한 전례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내가 올 때까지>
11월 16일의 복음 말씀에는 두 가지 비유가 섞여 있습니다.
하나는 박해자들이 받게 될 심판에 관한 비유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인들이 받게 될 심판에 관한 비유입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나라 백성은 그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사절을 뒤따라 보내어, ‘저희는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
(루카 19,12ㄴ.14)
“내가 저희들의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은 그 원수들을 이리 끌어다가,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루카 19,27)
여기서 ‘어떤 귀족’은 ‘예수님’이고, ‘먼 고장으로 떠난 일’은 ‘승천’이고, ‘왕권을 받고 돌아온 일’은 ‘재림’입니다.
백성이 그를 미워해서 “이 사람이 저희 임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받아들이든지 안 믿고 거부하든지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예수님은 메시아로 오신 분이고, 종말의 날이 되면 심판관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27절의 ‘그 원수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고 죽인 자들입니다.
“내 앞에서 처형하여라.” 라는 말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과 처벌 권한을 모두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뒤에, 그의 아들 아르켈라오스가 왕위를 계승하려고 로마 황제를 찾아갔을 때, 당시 유대인들은 아르켈라오스가 왕이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해서 로마 황제가 그를 왕으로 임명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절충안으로 아르켈라오스를 유다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만 다스리는 영주로 임명했습니다.
아르켈라오스는 귀국한 다음에 반대자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습니다.
마태오복음 2장 22절을 보면,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서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요셉이 유다로 돌아가기를 두려워했고,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아기 예수님과 마리아를 데리고 갈릴래아 나자렛으로 갔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잘 기억하고 있었던 그 일을 당신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비유의 소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 기회가 없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과 복음을 전해 주는 이가 없어서 신앙생활을 못했던 사람들은 심판 때에 어떻게 될까?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기준이 다르게 적용될 것입니다.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믿기를 거부한 사람들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과 처벌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알 기회가 없어서 모르고 살았지만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착하게) 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들 가운데에도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 많을 텐데, 모르고 살았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죄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준 돈은 신앙인들이 받는 은총과 은사, 탈렌트(재능) 등을 상징합니다.
종들이 그 돈으로 벌이를 하는 것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하느님 나라 건설과 인류 구원 사업에 동참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라는 말은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이 ‘아주 작은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나중에 받게 될 구원과 생명이 엄청나게 큰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나중에 얻게 될 큰 결실을 생각하면, ‘아주 큰 일’이고 ‘위대한 일’입니다.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받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통치권에 참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20절에 나오는 세 번째 종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드러나게 표시 나는 죄를 짓지는 않았더라도,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을 세 번째 종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루카 10,31-32).
그 두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것은 ‘하느님의 법’으로는 ‘큰 죄’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결과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첫 번째 종과 두 번째 종이 칭찬받는 것은 결과 때문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에 나오는 세 명의 종 말고도, 정말로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했는데도 결과를 전혀 얻지 못한 경우나, 또 벌이를 하기는커녕 원금을 손해 본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도 주님께서는 그 노력만 보면서 칭찬하실 것이고, 의기소침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26절의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가진 자’는 ‘노력하는 사람’, ‘가진 것이 없는 자’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더 받고’는 ‘구원을 받고’이고,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는 “전에 받은 은총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될 뿐만 아니라 구원을 받지도 못한다.”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반대로,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삶은 선물膳物이자 과제課題입니다>
오늘 강론은 이런저런 묵상 나눔으로 시작합니다.
요즘 제 물음은 “계속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한 물음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니까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 종신서원 미사 강론 시 제가 한 강론 제목입니다만, 만 30년이 지난 지금도 세상이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우니 여전히 떠나지 않는 물음입니다.
그당시 제 나이 44세였는데 지금은 74세이니 많이 지났습니다.
아주 오래전 수도원을 방문했던 목사님들 중 한분이 물었습니다.
예전에는 목사님들도 많이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신부님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잘 살다가 잘 죽는 것입니다.”
대답에 지극히 흡족했고 지금 묻는대도 이 대답 하나뿐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다 오늘 지금부터 잘 사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잘 죽는 선종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의지대로 되는 죽음이 아니기에 그렇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베네딕도 성인은 물론 사막 수도승들의 공통적 충고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였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바로 이런 절박한 상황에서 탄생한 것이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자작 좌우명 애송 고백기도입니다.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막바지입니다.
우리 인생 여정이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는지 점검해봐야 하는 계절입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 여정 후 자주 상기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을 일일일생 하루로 압축하면 오전, 오후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가?
또 봄, 여름, 가을, 겨울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시점의 계절에 위치해 있겠는가?
피정 오는 분들 대부분이 가을, 특히 지금같은 만추의 계절에 속한 분임을 자주 확인하곤 합니다.
이렇게 우리 삶의 시점을 확인할 때 환상이나 거품은 걷히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을 조용히 성찰할 수 있는 계절의 흐름과 잘 어울리는 교회의 전례력이 참 고맙습니다.
11월 위령성월이 끝나면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의 기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회색빛 어둠은 걷히고 기다림의 환희로 빛나는 대림시기입니다.
요즘 만추의 날씨가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어제 예수성심자매회 모임 시 밝게 빛났던 자매님들의 아름다운 모습도 잊지 못합니다.
11월 위령성월은 11월 1일 모든 성인의 대축일로 시작되었기에 저는 우리의 희망인 성인들을 기리는 11월은 희망성월, 성인성월로 부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제 회개의 여정이란 제하의 강론을 하면서 회개성월이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정말 우리 영혼의 고질병인 무지에 대한 최고, 최선의 처방은 참된 회개뿐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1월은 성인성월로 부르고 싶습니다.
성인이 되라 부름받은 우리 모두를 위한 성인성월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부르는 짧은 기도 노래가 모든 성인의 대축일 저녁 성무일도시 부른 마리아의 노래 후렴입니다.
요한 묵시록에 근거한 가사로 곡도 깊고 아름다워 잔잔한 위로와 기쁨을 선사합니다.
“성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기뻐하는 그 나라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따라가는도다.”
11월은 성인성월답게 성인축일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서울 베네딕도 수녀원의 주보성녀로 베네딕도회 수녀였던 13세기 독일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 성녀 대 젤투르다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이었고, 영성사에서 에수성심의 신학자, 예수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첫 사도로 여겼습니다.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젤투르다는 만46세 선종 시 아름다운 임종어,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우리의 ‘영원한 희망’의 천상예배 장면입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 옥좌와 하늘나라 예배가 영적 삶의 마르지 않는 샘이되고 영적 활력의 원천이 됩니다.
지상 삶이 마지막이 아니라 천상 삶에 대한 열린 희망이 우리 영혼의 아픔을 치유하고 위로하면서 영원한 기쁨의 삶을 살게 합니다.
특히 천상예배를 반영하는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바치는 지상예배인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은총이 우리 순례 여정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평생 매주간 화요일 저녁성무일도 찬미가 앞 두 구절은 바로 오늘 묵시록의 천상예배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당신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릴 만한 분이시나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만물은 당신 뜻에 의해 생겨났고 또 존재하나이다.”
(묵시 4,11)
또 지상전례인 미사 시 ‘거룩하시다’도 천상전례의 거룩하시다를 그대로 연상케 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그러니 천상전례를 그대로 반영하며 맛보게 하는 이 지상전례인 미사은총이 우리 순례 여정의 삶을 더욱 희망차고 역동적이 되게 합니다.
삶은 하느님의 선물이자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오늘 복음의 ‘미나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우리 모두 똑같이 한 미나의 인생 선물을, 똑같이 하루하루의 선물을 받습니다.
어떻게 인생선물을, 하루하루의 선물을 잘 활용하고 선용하는가는 우리 손에 달린 과제입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인생이 됩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내일의 걱정은 안해도 됩니다.
복음의 종들이 똑같은 하나의 미나를 선물받았듯이 우리는 똑같은 하루를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나 활용과 선용에는 개인차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 허무하게 시간과 정력을 탕진하고 낭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알뜰히 요리하며 알차고 꽉차게 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자기 능력껏 일해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이와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이는 똑같이 주인으로부터 “잘하였다,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말씀과 더불어 큰 책임의 선물을 받습니다만, 한 미나 그대로 바친 종은 “이 악한 종아, 나는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심판한다.” 호된 질책과 더불어 완전 퇴출됩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 영성생할에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풍요로운 영적 삶을 위해 한결같은 항구하고 충실한 노력과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용감히 앞장서서 파스카의 신비가 이루어질 예루살렘 등정 길에 오르십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받은 선물에 대해 주님께 바쳐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 너무 늦습니다.
하루하루 바치며 사는 것이 안전하고 확실합니다.
이래야 죽음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날마다의 삶을 바치는 은총과 구원의 시간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최근에 쉽게 수락하기 힘든 제안이 있었습니다.
웬만하면 남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편이지만 이번에는 고민이 컸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일도 빨간 불이 켜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면서 홍보를 못 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홍보를 다니고 있습니다.
뉴욕에 있는 ‘가톨릭방송’을 맡으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가톨릭방송도 형편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팬데믹은 가톨릭방송이라고 특별히 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교구에 문의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도, 가톨릭방송도 미국에 있는 한인 사제들과 신자들의 관심과 지원이 없으면 운영이 쉽지 않습니다.
신문을 구독하고, 방송을 시청하며 지면과 방송의 내용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35년 역사의 가톨릭평화신문과 30년 역사의 가톨릭방송이 앞으로도 미주지역의 한인 신자들에게 영적인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하나는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입니다.
몇몇 뜻있는 신자들이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좋은 강의를 소개하고 싶어 했습니다.
요즘 ‘스타트 업’ 기업들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많은 자본과 조직이 없어도 참신한 아이디어와 산뜻한 기획이 더해지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몇몇 뜻있는 교우들이 참신한 아이디어와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와 저명한 강사들이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래서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을 개설하였고, 저명한 강사 사제들과 수도자를 섭외하였습니다.
신부님들과 수도자들은 취지에 공감했고 기꺼이 강의를 수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기보다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 맡아주면 좋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줌으로 하는 신앙특강’의 주최가 되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습니다.
미주지역의 가톨릭신자들에게 영적인 도움이 된다면 저명한 강사들의 강의를 줌으로 들을 수 있다면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이 함께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앞으로, 솜사탕, 별’과 같은 동요를 남겨준 작곡가 이수인 선생님은 2021년 8월 23일 별세했습니다.
선생님은 생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화, 문학, 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동요와 가곡을 자주 접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동요와 가곡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가 성공, 명예, 권력, 재물이라는 바벨탑을 쌓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정신이 황폐해지면 곧 사라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동요와 가곡은 누가 빼앗아 갈 수도 없고, 도둑맞을 일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묵시록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길을 충실히 따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손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고, 다른 하나는 남을 돕는 데 사용하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발이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눈이 둘인 것은 하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을 아름답게 보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귀가 둘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의 어려움을 들어 주라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의 재능과 능력은 본인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지만 그 반은 남을 위해서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우리들의 선행과 우리들의 봉사가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희망의 별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젊은 부부는 자기의 아기가 태어날 때, ‘기적’ 같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닮은 아기, 그래서인지 온갖 정성을 아기에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팔다리를 많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운동 신경이 너무 좋다고 말하고, 엄마 아빠를 빠르게 말했다면서 ‘천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렁찬 울음소리에 성량이 좋아서 노래 잘 부를 것으로 예측합니다.
마구 휘저은 낙서를 보면서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부부는 이렇게 자주 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 아기 운동선수 시킬까?
아니야. 머리가 좋으니 교수를 시키자.
노래도 잘할 것 같은데? BTS 같은 아이돌 가수는 어때?”
우리 아이는 커서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가질 수 있으며,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었을 때, 부모의 생각을 충족시켜 줄까요?
아마 적당한 선에서 머무르는 삶을 살 것입니다.
우리 뜻대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 뜻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 뜻대로 살지 않는 우리라는 것입니다.
열정적인 노력보다는 편안한 삶을 선택하려고 하기에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자기 뜻대로는 절대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입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의 뜻을 말입니다.
미나의 비유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십니다.
어떤 귀족이 왕권을 받아 오려고 먼 고장으로 떠나면서 종 열 사람에게 한 미나씩을 나눠주지요.
미나는 1탈렌트의 1/60에 해당합니다.
1탈렌트가 6,000일 치의 노동자 임금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1미나는 100일 치의 임금임을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적지 않은 돈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이지만, 주인이 냉혹하다는 것을 알기에 두려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만 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 한 미나 마저 빼앗기고, 가장 많은 미나를 벌은 사람은 그 빼앗긴 미나를 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열 미나를 벌은 사람은 재능을 많이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미나를 벌은 사람은 첫 번째 사람보다 조금 덜 재능을 발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수건에 싸서 보관한 사람은 재능을 전혀 발휘하지 않고 딴전만 부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능을 발휘하지 않았으면서도 자기 잘못 탓보다는 주인에게 그 원인이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마음이 주님 뜻보다는 자기 뜻을 내세우는 사람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절대로 제대로 살기 힘들다는 것을 주님께서도 이야기하시지요.
여러분은 어떤 뜻을 따르면서 열심히 살고 계십니까?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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