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법은 마음을 쉬고 번뇌망상을 잠재우는 수행의 초문(初門)에서 해 들어가는 방법인데, 그 방법으로는 아무리 오래 해도 결국 조사스님이 말씀하신 고도의 높은 선(禪)의 의지는 꿈에도 보지 못하고 해결이 안된다. 관(觀)을 오랫동안 하다 보면 정신이 맑아지고 큰 힘도 나오게 된다. 조그마한 콩을 달아 놓고 오랫동안 들여다 보고 앉아있으면 호박만하게 커지고 나중에 집채만해지고 끝에 가서는 허공계에 꽉 찬다는 거다. 그래서 활을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 맞는 그런 힘이 나온다는 거다. 그러나 그렇게 한 그 공부는 결국 ‘중생심’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중생심에 의해 그런 걸 하고 중생심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데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그런 신통변화라는 신비한 재주에 대해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자 스승이 말하길 “그대는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쓸려고 하는가?” 어디에 써야 되는가? [대중] 중생의 이익을 위해서 써야 합니다. [대원스님] 중생을 위해서? 허허. 그건 말 안한 건만 못한데. 여기 보살, 거사님들이 그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대변하는 말인가? 결국 선을 위해서 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중생들한테 선하게 쓴다는 말인데, 중국의 손빈(손자병법저자)과 방연은 스승 귀곡선생 문하에서 함께 병법을 배운 사이인데, 각각 제나라, 위나라의 대장군이 되어 마주 붙게 되었다. 결국, 각자는 좋은 일 한다고 한 건데, 서로 적이 되고 전쟁을 해서 무수히 죽이고 죽었다. 선행을 한다 하면 선행의 상대가 있을 것이고, 상대방은 거기에 반대되는 다른 의견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것 저것 싸움할 필요없이 통일이 되려면 마음의 세계에서 생각이 같으면 되는데, 중생들은 생각이 다르다. 학자들도 같이 토론을 하면 다 생각이 다르다. 나중에는 누가 선을 한 건지 누가 악을 한 건지 분별이 안된다. 선(善)이라고 내세우면 벌써 틀렸다는 거다. 누구를 보고 선행을 하느냐는 거다. 반드시 반대가 있고 악한 게 있어야 선을 내세우는데, 상대방을 악이라고 하면 상대방은 그걸 받아주는가? "내가 선인데 나를 악이라고 해?" 하고 싸움이 벌어진다. 그러니 어느 게 선이고 악인가? 결국 그러한 신통 재주 부려봐야 거기에는 중생심을 가지고 중생의 업보를 쌓은 것 밖에 안 남는다. 그러니까 스승이 ‘네가 그걸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이렇게 묻는 한마디에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선한데 쓴다.’ 하면 이게 벌써 그만큼 눈이 어두운 거다. 그러니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할 때, 액면 그대로 ‘하나’, ‘돌아가는 것’ 이것만 생각하면 늘 푼수가 없는 거다. 그 말 했을 때 그 말만 따라 갈게 아니고 그 이면에 큰 의미가 있는데 그걸 바로 보면, ‘너 이 신통을 배워서 어디에 쓰려고 하느냐?’ 물었을 때 단박에 방하착이 된다. 그런데 방하착이 안되고 ‘이것 배워서 선하게 쓰면 안되겠느냐’ 하면 이게 문제다. 선을 지키고 펼려고 하면, 상대가 말 안 들으면 신통을 써서 제압을 해야 하고 무수한 사람을 죽여야 된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한 스승 밑에서 배웠지만 서로 적이 된다. 결국 해봐야 중생의 욕구, 욕망 그것 충족하는데 쓰다가 큰 업만 짓고 죽는 거다. 그래서 그런 신통 재주 부리는 것은 중생의 업만 더 짓는 허망한 것이다. (‘19.1.20 학림사 대원스님 소참법문) ‘19.1.20일 학림사 일요 소참법문 모습 : 주말 철야정진에 많은 동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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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활속불교에서 삶의 지혜를 배웁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귀의삼보하옵고 생활속 불교에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_()()()_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