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진학후 나는 광주 서석동에서 하숙을 했다. 하숙집 부근의 후배가 어느날 나랑 교회에 가보자고하여 주일날 머리를 식힐겸 따라 니섰다. 나자렛 교회라는 곳이었다. 찬송을 하며 손바닥두드리며 혼란스럽게 예배보는 모습에 나는 돌아서서 예배도 끝마치기전에 교회밖으로 나와 버렸다. 적성에 맞지않았다. 신앙의 혼돈기이기도 한때였다. 내머리속에는 . 하느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인간이 죄를 범할것도 알았을 것인데 왜? 인간이 죄를 범하도록 좌시하셨는지 궁금해 하던 때였다. 흡족한 답을 찾지못하고 그냥 해메던 시잘이기도 하다.
당시에 나는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생활을 해오던 시기이기도 하다.
영광 남천리에서 주유소를 하던 아버지가게 윗쪽에 방앗간에서 큰불이 일어나서 아버지 가게에도 영향을 미쳤고 당시만해도 보험이 지금처럼 일반화 되지 않은 때이라 여러가지 요인으로 가게와 도동리 안집을 정리할 정도로 가세가 갑자기 기을기 시작했었다. 그러가운데 아버지는 홧병으로 몸져누으셨고 할아버지대에 이룬 전답을 팔아가며 나의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 나는 많은 고민속에 빠져 들었고 급기야 가출하여 서울로 갔었다. 교복을 입은채 당시 직업소개소에 들려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모래내에 있는 신촌 제과의 아이스케키와 주스등을 만든 공장에 취직을 해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옥상에 판자 가건물에 기슥사에서 킬잠을 자며 일을 해오다. 두달여지나서 사촌형집에 갔다가 결국 고향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얼마후 담임 선생님에게 혼나고 나서 학교에서는 전학을 가라 나에게 권했다 나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고. 합격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려 영광 문화원 도서관(당시 영광극장터에 건축)에서 공부를 하는 도중에 도동리 우리집아래 살던 친구 박 스테파노를 다시 만나게되었다. 물론 그 때는 세례명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