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포함해서 A4로 22장 분량입니다.
저희가 답사 다니는 순서대로 자료집을 엮었습니다.
답사 참가자 전원에게 자료집 제본해서 나눠드리겠습니다. 자료집 공부 많이 하십시요. 퀴즈상품은 자료집에서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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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문경 답사 자료집
일 시: 2005. 5. 14.(토) 장 소: 상주, 문경 일대
07:00 서울 압구정동 공용주차장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 08:30 문경철로 자전거 탑승 (70명 예약) 10:30 문경 대정숲 걷기 11:30 천혜의 비경 쌍용계곡 12:00 장각폭포 13:00 상주신의터농원 (숯불바베큐와 된장찌개) 14:30 효자 정재수기념관 15:30 상주 자전거 박물관 16:30 상주 남장사 17:30 상주출발 20:30 서울도착 예정 * 상기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동 가능합니다.
1호차 이종원/신데렐라/ssera/adapilot/헤리/기찬/비움/다정이/다사/일모도원/고든이/효창동/포비/코난/은피리/고병준/ANNA/오승희/겨울이좋아/아이1/아이2/namyouni/김강한/김슬온/관조/관조짝/이재경/까만돼지/에스페로/딸/독수리/이정모/이슬어지/따봉/청한/심주현/심승현/박연옥/퉁가리/정성윤/해찬들판/심초록/심지훈 (총 44명) * 1호차 대장: 이종원 (016-219-6001)/도우미: 다사( 018-233-4784 )
2호차 홀로여행/둘이여행/핑크빛향기/맹꽁이/한연숙/심상기/들바람/곱슬미녀/나눔/두물머리/jasmin/김은희/인덕원참새/정혜엘리사벳/명수기/찬비/최창배/소양강/좋은억새/예쁜여우/갈다/러운편지/승리/호수/청정행/천상재회/까만놈/비상/구슬붕이/happy4u/helio/뚜리/김미연/영수기/가람가람/휘영청/subin/가바다/가바다동생/노란장미/세인트/apiril/행복통신/새신/다슬이 (총 45명) *2호차 대장: 인덕원참새 (016-360-7920)/ 도우미: happy4u(010-2462-3791)/가바다(010-5556-0711)
개별차량 불량공주/동행인/웃는돌/조아/노자/까불이/미니공주/달새/김경화/남편/딸/귀여운 여인/추교행/박한태/신영웅/헤라/한진/카라/반야낙조/다크호스 (총 20명) *개별차량 대장: 웃는돌(011-9223-0443)
문경 개요
면적은 912.15㎢, 인구는 8만 3955명(2002)이다. 동경 127°52′∼128°22′, 북위 36°30′∼36°52′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으로 충청북도 단양군·제천시·충주시, 동쪽으로 예천군, 남쪽으로 상주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괴산군과 접한다. 동쪽의 태백산맥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나온 소백산맥의 중앙부에 속하는 험준한 지형으로, 동북부는 험산준령이 둘러 있고, 중부에서 남부에 걸쳐 분지상으로 평지를 이루며, 동남부는 석회암 지역으로 카르스트지형이 발달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산세가 험준하고 고도가 높아서 대략 700m 이상의 기복 차를 나타낸다. 주요한 산령들은 남에서부터 오정산·부운령·단산·조항령·운달산·마전령·대미산·황장산·사불산·천주봉 등으로 이 산령이 형성하고 있는 산맥은 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대체로 이 능선은 아치형의 분수령을 형성하여 문경분지를 이룬다. 북·서부에는 황연산·주흘산·백화산 등의 산지가 있다. 수계는 총연장 35㎞인 영강과 32㎞인 금천으로 크게 이루어져 있으며, 영강은 점촌 남쪽에서 이안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되고, 금천은 영순면 달지리에서 내성천과 만나 삼강에서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하천은 산계를 따라 발달하였으며, 속리산에서 발원한 영강은 농암의 쌍용계곡을 거쳐 가은읍 왕능리에서 양산천과 합류하고, 마성면 신현리에서 조령천과 합류하여 점촌 도심지역의 경계를 흐르면서 연안에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낙동강으로 유입된다. 금천은 동로의 황장산에서 발원하여, 운달산과 사불산에서 시작되는 대하천과 산북면 대하리에서 합류하여 산북·산양면을 관류하여 영순면 달지리 삼강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한편 동로면 면전리 명전천과 가은읍 관장리 불란지천이 충주댐으로 함유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지질은 화강암 및 편마암계가 대부분이며 무연탄·석회석·철 등의 매장량이 많아 경상북도 제1의 광업산지이다. 현재는 석탄산업의 사양길로 그동안 광산개발로 훼손된 자연환경 등을 복원하고 폐광지역에 관광휴양시설을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영강과 각 하천 주변은 충적지가 발달하여 전작지로 이용된다. 기후는 연평균기온 11.6℃, 최고기온 34.2℃, 최저기온 -12.4℃이고, 강수량은 1,084mm, 평균 적설량은 215mm로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문경시 연혁
신라 진흥왕 때 상주의 호측현에 속했다가 757년(경덕왕 16) 호계현으로 개칭하면서 고령군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인 983년(성종 2)에는 상주목에,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는 문경현에 병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현감제를 폐지하고 군수제를 실시하였다. 1896년 23부 체제가 다시 13도로 개편되고 문경군이라고 하였다. 1906년 예천군의 동로면과 화장면이 문경군에 편입되었고, 상주군의 산서·산남·산동·산북·영순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용궁군의 서면, 함창읍의 동면 일부를 편입하였고, 1933년 신북면이 문경면에 통합되었다. 1956년 7월 8일 호서남면이 점촌읍으로 승격하고, 1963년 1월 농암면 삼송리가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으로 편입되었다. 1973년 7월에는 문경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가은면과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합쳐 가은읍이 되었다. 1986년 1월 점촌읍과 문경군 호계면 별암리 일부가 합쳐져 점촌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9년에는 상주군 함창읍 윤직리 일부를 편입하였다. 1995년 1월 점촌시와 문경군이 합쳐 도농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다. 1996년 산북면 거산출장소, 동로면 수평출장소를 폐지하였다. 2003년 현재 문경읍·가은읍을 비롯해 영순면·산양면·호계면·산북면·동로면·마성면·농암면과 점촌동·중앙동·신흥동·신평동·모전동 등 2읍 7면 5동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문경새재도립공원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소백산맥을 넘는 길 중의 하나가 새재이다. 새재를 넘어 연풍과 수안보를 지나 충주에서 한강을 끼고 서울로 가는 길은 영남에서 서울에 이르는 지름길이었다. 원래 삼국시대의 길은 신라가 북으로 진출하려고 개척한 죽령과 새재 사이에 있는 계립령으로 이곳은 고구려, 신라, 백제가 북진과 남진을 되풀이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새재에 길이 열린 것은 조선조 초기로 도로망을 정비하면서 곳곳에 역(驛)과 원(院)을 설치하였다. 새재는 하도 험하고 높아 대낮이라도 혼자서는 넘지 못하고 반드시 사람이 모이길 기다렸다가 넘었으며, 날이 저물었을 때는 밑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에나 넘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새재는 임진왜란을 치르면서 중요한 요충지로 여겨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전부터 산세가 험한 새재에 성을 쌓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실행되지 않았고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신립 장군은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이 싸움에서 신립 장군은 목숨을 바쳐 싸웠으나 결국 대패, 왜군은 곧장 서울로 진격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인 1594년 성을 쌓고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을 세웠으며 숙종때는 고개 정상 가까이에 제3관인 조령관과 문경에서 새재를 넘는 초입에 제1관인 주흘관을 세우고 성을 쌓았다.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새재는 사람 의 발길이 뜸해지다, 1925년 이화령에 도로가 뚫리면서 완전히 길손이 끊기고 말았다. 지금은 이화령을 관통하는 터널이 생겨 이화령을 넘는 것도 옛날이야기가 되고 있다.
-주흘관 主屹關: 문경 새재를 넘으려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제1관문으로 1708년에 세웠다. 3개의 관문중 가장 옛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여궁폭포 女宮瀑布: 제1관문을 들어서서 새재 산장이 있는 계곡을 따라 1㎞쯤 올라간 계곡에 있는 폭포로 높이 20m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가 장관을 이룬다. 이 폭포를 아래에서 쳐다보면 마치 여인의 하체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여궁, 또는 여심폭포라고 부른다. -혜국사 惠國寺: 여궁폭포에서 산으로 20여분 거리에 있다. 846년 보조국사가 창건한 절로 고려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에 행재소를 정한 곳이기도 하다. -조령원터 鳥嶺院址: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2관문인 조곡관과의 중간 지점에 돌담이 둘러쳐진 곳을 말한다. 이곳은 새재를 오가던 관원들과 나그네들이 숙식을 제공받았을 뿐만 아니라 영남지방과의 물물 교역 장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이다. -산불됴심비: 조선시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제2관문 조금 못미친 지점 길가 오른쪽에 서있다. 일반 서민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한글로 새긴 글씨중 조심을 됴심으로 표현한 것이 눈길을 끈다. -조곡관 鳥谷關: 조령 제2관문인 조곡관은 1594년에 세우고 1708년 중창했으나 불타버려 홍예문만 남았던 것을 1975년 성과 누각을 복원한 것이다. 조곡관 부근에는 영천약수가 있으며 이곳부터 위로 4㎞에 걸친 계곡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경승지이다. -조령관 鳥嶺關: 조곡관에서 3.5km 산을 오르면 정상에 제3관문인 조령관이 있다. 1708년에 성을 쌓고 세웠으나 불타버리고 홍예문만 남았던 것을 1976년 복원한 것이다.
●주흘산 主屹山
조령산(962m), 월악산(1097m)과 더불어 소백산맥의 주축을 이루면서 영남 3관문을 지키는 수문장 역할을 해온 문경의 진산이다. 산행은 산 자체의 웅자함을 보는 즐거움도 있지만 정상의 시원한 조망이 일품이다. 정상에 오르면 운달산, 백화산, 희양산, 조령산, 월악산이 눈에 들어오고 날씨가 맑은 날은 멀리 소백산이 보인다. 등산로: 제1관문 -여궁폭포 - 혜국사 -정상 -제2관문 (9krn-4시간 소요)
●봉암사 鳳巖寺
문경시 가은윰 원북리, 희양산(998m) 아래에 자리잡은 봉암사는 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인 희양산문이 열린 절이다. 신라 헌강왕 5년(879년) 도헌 지증대사가 창건하였으나 후삼국시대에 폐허가 되어 극락전만 남았다. 그후 임진왜란과 1907년의 화재로 고찰다운 옛모습을 찾을 수 없고 지금은 1992년에 새로 지은 대웅 보전과 금색전, 조사전과 옛건물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극락전이 있으며 보물 제1137호 지증대사적조탑, 보물 제169호 삼층석탑, 보물 제171호 정진대사오원탑 등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봉암사는 1982년부터 특별수도원으로 지정돼 참배하러 오는 봉암사 신도 이외에는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으나 일년에 하루, 사월초파일에만 일반에게 경내를 공개한다.
*백두대간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동쪽 해안선을 끼고 남으로 맥을 뻗어내리다가 태백산을 거쳐 남서쪽의 지리산에 이르는 국토의 큰 줄기를 이루는 산맥이다. 이 산줄기를 이루는 주요 산은 백두산(2,744m)을 기점으로 포태산(胞胎山:2,289m), 두류산(頭流山:2,309m) 등 해발고도 2,000m 내외의 고봉으로 이어져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을 양분한다. 산줄기는 다시 남쪽으로 차일봉(遮日峰:1,743m), 철옹산(鐵瓮山:1,085m), 두류산(頭流山:1,324m), 추가령(楸哥嶺:752m)으로 이어진다. 또한 동해안을 끼고 금강산(金剛山:1,638m), 진부령(陳富嶺:529m), 설악산(雪岳山:1,708m), 오대산(五臺山:1,563m), 대관령(大關嶺:832m), 두타산(頭陀山:1,563m)을 거쳐 태백산(太白山:1,567m)에 닿는다. 여기서 방향을 남서쪽으로 돌려 소백산(小白山:1,421m), 죽령(竹嶺:689m), 이화령(梨花嶺:548m), 속리산(俗離山:1,508m)으로 뻗어내린다. 이로부터 추풍령(秋風嶺:221m), 황학산(黃鶴山:1,111m), 삼도봉(三道峰:1,177m), 덕유산(德裕山:1,614m), 백운산(白雲山:1,279m), 지리산(智異山:1,915m)로 이어지면서 산줄기는 끝이 난다. 신경준의 《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한국의 산맥은 1개 대간과 1개 정간(正幹) 및 13개 정맥(正脈) 체계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산줄기[山經]의 개념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제일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대간, 두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정맥, 세번째 굵은 선으로 표시한 것은 지맥, 기타는 골짜기를 이루는 작은 산줄기 등으로 나타냈다. 이렇듯 대간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 산줄기들은 지역을 구분짓는 경계선이 되었으며, 삼국의 국경과 조선시대의 행정경계를 이루었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자연적 상징이며 동시에 한민족의 인문적 기반이 되는 산줄기라고 할 수 있다.
가은읍
신라전기에는 가해현이라 호칭되어 오다가 통일신라 경덕왕(7 50년경)때에는 고령군(현 함창)에 예속되었고, 고려 현종(1020년경)때에는 가은현 이라 개칭하여 상주군의 속현이 되었다.고려 34대 공양왕 2년(1390년)에 문경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909년에는 가동,가북,가현,가남,가서등 5개면이 가동,가북,가현으로 폐합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정리시 위의 3개면을 통합하여 가은면이라 호칭하고 소재지는 왕릉리에 두었다. 1973년 7월 1일 가은읍으로 승격되면서 상주군 이안면 저음리를 편입시켜 관할 이동수는 29개리 135개 반이다. 전형적인 미곡중심의 농업에서 일제시대때 일본인에 의해 개발된 광업소를 인수 1960년대 경제개발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전성기시 22천여명에 이르던 인구가 석탄산업합리와 정책에 따라 은성광업소가 1994년도 폐광 하면서 5천6백여명으로 감소하였다. 현재 은성광업소 부지에 석탄박물관을 건립 석탄산업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관광객이 연 32만여명에 이른다.
기차 레일 위로 자전거가 씽씽-문경 철로 자전거
한때 문경은 전국에서 내노라 하는 탄광도시였다. 경기가 좋았을 때는 지나가는 강아지도 만원짜리 지폐를 입에 물고 다닐 정도로 돈이 넘쳤던 곳이다. 그러나 난방연료가 연탄에서 기름으로 대체되면서 문경은 경제적으로 쓰라린 아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90년대 중반에 가은의 은성광업소마저 문 닫으면서 문경의 탄광업은 역사 속에 묻혀야만 했다. 일거리가 없어지자 탄광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때 16만명의 인구는 오늘날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람만 가버린 것이 아니다. 탄가루를 휘날리며 희망을 가득 실었던 탄차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무성한 잡초 속에 간신히 얼굴만 내민 철로만이 묵묵히 옛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주력 산업이 무너지자 문경사람들은 절망했다. 이대로 주저 않기엔 너무 아쉬웠다. 다행히 문경엔 때묻지 않는 자연환경이 있었고 문경새재, 김룡사, 대승사등 역사를 가득 머금고 있는 유적지도 있었다. "그래. 관광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태조 왕건 촬영지를 유치했고 문경온천도 개발했던 것이다. 그러나 뭔가 허전했다. 확실히 문경을 각인 시킬만한 히트상품이 없을까? "그래. 폐광을 활용하여 문화상품을 만드는 거야." 그 첫번째 작품이 문경관광사격이다. 폐광을 정비하여 그곳에 훌륭한 사격장 건물을 올린 것이다. 일반인들이 쉽게 즐길 수 있도록 가격도 낮추었다. 공기총 뿐 아니라 실제 권총도 쏠 수 있게 했고 귀족스포츠라 불리우는 클레이사격을 부담 없이 즐기게 했다. 경치 좋은 곳에 MTB경기장도 만들었고, 수려한 산하를 만끽하며 하늘을 날 수 있도록 활공 랜드도 만들었다. 이렇게 문경은 레포츠/체험 도시로 거듭난 것이다. 뭐니뭐니해도 문경 최고의 히트상품은 철로자전거다. 작년 6월경 문경시청 홈페이지에 시민의 글이 하나 올라 왔다. "폐철로를 이용하여 철로자전거를 운영하면 어떻습니까?" "바로 이거다." 싶었다. 곧바로 외국의 사례를 수집,정리했고 드디어 미국에서 철로자전거 두 대를 도입하여 시험운행에 나선 것이다. 다른 지자체가 300km로 내달리는 고속열차 역사를 유치려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때 문경은 오히려 30km도 못되는 저속열차에 승부를 건 셈이다. 분명 상품 가치가 있었다. 국내 자전거 제작업체에 의뢰하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우리 철로에 적합한 철로 자전거 30대를 만들어 냈다. 브레이크를 장착했고, 경사를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3단의 기어까지 달았다. 그러다 보니 한 대의 제작비가 무려 4백만원에 달한다고 한다. 2004년 4월 1일. 드디어 무료 시범운행에 들어갔다. 기차의 추억에 자전거 타는 상쾌함까지 가미되어 신기한 자전거를 타려고 사람들이 몰렸고 진남역은 일약 전국적 명소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철로자전거는 문경사람들의 처절한 생존의 산물이다. 그들은 절대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절망을 기회로 삼은 것이다. 한때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석탄열차는 뽀얀 연기를 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는 그 자리에 철로자전거에 대신하여 미래의 꿈을 싣고 달리고 있다. 이래서 나는 문경사람이 좋다.
철로자전거는 3단 기어가 달려 있어 오르막길을 쉽게 오를 수 있고 내리막길에는 패달을 밟을 필요가 없다. 철로를 달리는 바퀴와 레일 이탈방지용 보조바퀴를 포함하여 총 8개의 바퀴가 움직인다. 탑승가능인원은 총 4명이며 어른 두 명이 양쪽에 앉아 패달을 밟고 가운데 아이들 둘을 앉힐 수 있다. 앞 자전거와 충돌을 막기 위해 브레이크까지 장착했다. 현재는 왕복 6km로 40여분이 소요된다. 하반기에는 주변에 테마파크를 꾸미고 본격적으로 노선을 늘려나갈 예정이다.
철로자전거의 재미는 단순히 폐달을 밟는 것에 있지 않다. 철로 따라 펼쳐진 웅장한 산세를 둘러보는 맛도 그만이며 철로 주변에 아스라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야생화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이어지고 캄캄한 터널도 자전거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경북팔경 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진남교반을 스쳐 지나갈 때면 탄성이 절로 난다. 산줄기가 이어지고, 강물이 흘러가고, 차가 내 달린다. 그리고 철로 위에는 내가 달리고 있다.
철로 자전거는 대당 4백만원에 이를 정도로 고가의 자전거다.8개의 바퀴를 움직여야 하고 철로의 길이에 맞게 제작되었다. 자전거처럼 기어(3단)와 브레이크도 가지고 있다. 1단으로 출발하고, 평탄길에 들어서면 2,3단으로 조정할 수 있다. 어른 2명이 폐달을 밟고 아이 2명은 보조석에 앉게 된다. 종착역에 들어서면 안내원들이 자전거를 회차시켜 준다. 주행중에는 절대 내려서는 안되고 앞 뒤 간격을 충분히 유지해야 한다. 교량과 터널을 지날때느 속도를 줄여야한다. 주말이면 대략 2천명이 철로자전거를 타러 오기 때문에 일찍 진남역을 찾아 예약하는 것이 좋다. 진남역에서 당일분만 예약 받기 때문에 승차권을 교부 받은 후 문경의 다른 명승지를 둘러보고 시간에 맞춰 철로 자전거를 탑승하는 것이 좋다.
진남역 만약 내가 영화감독이라면 진남역같은 작은 곳에서 연인들의 만남을 찍을 것이다. 간이역은 작지만 아늑함이 묻어 있어 좋다. 역은 서 있건만 역에 근무하는 철도원은 보이지 않는다.몇 년 전 감동 받은 일본영화 '철도원'이 그려진다. 고집스런 철도원은 병든 딸을 안고 병원으로 가는 아내의 열차를 출발시켰고 딸의 시신을 싣고 눈밭을 달려온 열차를 맞이하기도 했다. 그 아픔이 일본에만 있었겠는가? 가은의 은성탄광이 석탄합리화정책으로 마지막 문을 닫게 되자 2000년 12월 31일 기어코 가은선도 폐선이 되고 말았다. 진남역 역시 더 이상 철도원이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마지막 열차를 보내면서 진남역 철도원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쏟아 냈을까?
고모산성 철로자전거를 타다보면 멀리 천혜의 요새인 고모산성을 보게 된다.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이 한양까지 치고 올라갈 때 멀리서 성벽의 보고 움찔하여 진격을 멈추고 만 하루동안 동태를 살필 정도로 단단한 요새였다. 만약 신립 장군이 탄금대에 배수의 진을 치지 않고 여기서 항전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역사의 가정은 늘 아쉬움이 따른다. 6.25때는 남진하는 북한군과 가장 격렬하게 전투가 벌여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시간을 벌었기에 국군은 낙동강에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문경은 한양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전쟁이 일어나면 깊은 상처를 겪어야 했던 곳이다.
진남교반 진남역 바로 앞에 경북 제일의 절경인 진남교반이 자리잡고 있다.'S'자로 굽이 도는 물줄기를 따라 하늘로 치솟는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이 펼쳐진다. 여름이면 많은 피서객들이 다리 밑에서 야영을 하며 더 위를 식힌다. 물이 깊지 않아 아이들 물놀이하는데 좋다. 진남교반에서 레프팅도 가능하다.
소백산맥의 마지막 비경-쌍용계곡
농암면 내서리에 위치한 쌍룡계곡은 위치상 점촌에서 2.9㎞ 떨어진 상주시 함창읍 시가지에 있는 농암방면 육교를 건너 국가지원 지방도 32번(구. 지방도992호)을 이용, 뭉우리재를 지나서 농암교가 끝나는 지점에서 좌회전하여 가는 편이 마성면, 가은읍을 지나 농암으로 가는 길보다 14㎞정도 거리가 단축된다. 농암교를 지나 나오는 동네가 농암면 종곡리로 속리 천과 농암천이 합류되어 흐르는 계곡가에 수백년생 아름드리 노송이 수백그루 울창하게 들어선 대정공원(大井公園)이 있으며, 종곡리 뒷산에는 교송(喬松)숲이 있어 언제부터인가 백로가 무리지어 서식하여 왔는데, 대정숲에서 바라보는 백로의 비상은 한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 장관을 이룬다. 쌍룡계곡은 속리산봉(俗離山峰) 동쪽 골짜기따라 흐르는 물이 낙동강으로 합류하기전 농암천 상류쪽 도장산(道藏山 828m) 기슭 4㎞ 구간에 펼쳐놓은 계곡으로 태백준령에서 내륙 깊숙히 서남쪽을 향해 달려온 소백산맥이 마지막 힘을 모아 빚어 놓은 비경이다. 도장산과 불일산(佛日山)의 기암괴석과 층암절벽등 조물주의 작품들이 천고의 신비를 간직한채 병풍처럼 둘러싸고 옥계수가 구비구비 휘감아 돌며 부딪쳐 깨어지며, 수천년 세월속 에 거대한 암석을 갈고 쪼아내서 훌륭한 예술품으로 조각한 걸작들을 이곳 저곳에 펼쳐놓아 보는이로 하여금 환성을 울리게 한다. 내서3교 밑 계곡입구에는 그 옛날 네 사람의 다정한 선비가 전국의 명승을 찾아 유람하다 이곳에 이르러 풍광이 너무나 좋아 정자를 세우고 영원히 변치않을 우정을 다짐한 사우정(四友亭)이 있다. 사우정을 지나 2㎞쯤가면 문경시에서 63억원을 투자하여 '97년 3월 준공 한 400m 길이의 쌍룡터널이 눈앞에 나온다. 이 터널을 지나 그대로 지나치면 쌍룡계곡의 절경을 놓칠 수 있다.
예로부터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의 사랑을 받아왔고,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을 머물게한 유적들이 수 많은 전설과 함께 전해오는 쌍룡계곡은 용추에서 청룡 황룡이 살았다하여 쌍룡계곡(雙龍溪谷)이라 불리우고, 달 밝은 밤이면 하늘나라 선녀들이 은하수(銀河水)보다 맑고 사람의 발자취가 드문 계곡으로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는 선녀탕(仙女湯), 유유히 흐르던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며 물안개를 피워 올리는 암반 아래에 명주실 한타래가 들어 간다는 깊은 용소가 있다. 이곳에 살던 용왕의 아들이 심원사(深源寺)에 머물던 윤필거사(潤弼居士)와 의상대사(義湘大師)에게 글을 배웠다는 전설이 있으니 글을 배운사례로 월겸(月鎌) 월부(月斧) 요령을 선물받아 현재 요령만 원적사에서 보관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행방을 알 수 없다 한다. 계곡의 마지막지점 암반에는 용이 놀다간 흔적인 용의 군상(群像)들이 계곡바닥에 누워 있어 『용유동(龍遊洞)』 이라하며 도로변 높은 암반 위에는 조선조 영조(英祖)때의 학자로 이름난 역천 송명흠(宋明欽 1705∼1768)의 아버지 묵옹(默翁 宋堯佐)이 숙종 29년에 세운 병천정(甁泉亭)이라는 정자가 위치하고 있다.
쌍룡계곡은 아직도 세속에 오염되지 않아 태초의 원색을 지니고 있으며 산천에는 머루 다래가 영글고, 산채 약초의 보고이며, 티없이 맑은 물에는 담수어(淡水魚)가 무리지어 서식하며 멀지 않은곳에는 도장산 심원사와 청화산 원적사(圓寂寺)가 있고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청화산을 가리켜 병화가 미치지 못하는 땅이라 예찬하였으니 1300년도 넘는 고찰이 이곳에 세워져 있음은 당연한 일로 받아지기도 한다. 그 외에도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한 견훤의 왕궁터 성지(城址) 말바위(馬岩) 등의 견훤과 얼킨 유적지가 도처에 있다.
주자의 무이구곡
무이구곡은 송나라 주자가 살았던 무이산 무이계곡의 절경 9곳을 일컫는 것으로 9계곡을 노래한 무이도가와 함께 조선시대 이황, 이이, 송시열 등 성리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자신이 살던 지역을 중심으로 무이구곡을 표방해 구곡원림을 경영하고 구곡시가를 지었으며 대표적인 것이 이황의 도산구곡, 이이의 고산구곡 등으로 모두 경치가 빼어난 계곡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구곡원림은 수려한 계곡과 학식 높은 유학자를 함께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흔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경관이 뛰어난 문경지역에는 4곳이나 있다. 무이구곡은 남송 때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자가 지금의 중국 복건성 무이산(武夷山) 계곡의 아홉구비(九曲) 경치를 노래한 것이다. 주자는 무이구곡 제 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가를 지었는데, 첫 수를 제하고는 무이구곡의 산과 물의 경치를 묘사하고 있으며, 자연묘사가 주가 되지만 그 이면에는 도학(道學:성리학)을 공부하는 단계적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경문일치.
쌍용구곡 쌍용구곡 원림은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에 자리하며 해발 828m 도장산 기슭의 4km에 걸쳐 전개된다. 도장산, 불일산, 청화산의 기암괴석과 그 가운데로 흐르는 내서천, 쌍용천이 서로 어우러져 선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 용들이 이곳에 놀았다 하여 용유동(龍遊洞) 이라고 하여Tr 이 동천의 깊은 용추에 두 마리 용이 살았다고 하여 쌍용계곡이라고 하였다. 쌍용구곡의 원림은 민우식이 설정하여 경영한 구곡원림이다. 홀어머니 아래에서 집이 가난하여 머리 유학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사숙으로 학문에 나아가 스스로 힘쓰고 게으로지 않았다. 민우식은 상주에서 문경 화산으로 옮겨와 살았는데 이 대에 그의 부친인 민영석을 위하여 쌍용의 용강 위에 사우정을 세우고 내서천과 쌍용천에 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였다. 대부분의 구곡원림이 한 시내에 순차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것과는 다리 쌍룡구곡은 두 시내에 아홉굽이를 나누어 설정하였는데 제 1곡에서 제 6곡까지는 쌍룡천에, 제 7곡부터 제 9곡까지는 내서천에 설정하였다. 그는 9개 굽이의 공간을 통하여 그가 지향했던 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유가의 성현들이 지향했던, 즉 일상에 존재하는 평상의 도였다. 1곡부터 출발하여 제 9곡에 이르러 이러한 도의 세계가 전개되는 경지의 과정을 말하고 있다.
雙龍九曲詩-민우식
一幅龍岡四友亭 한폭의 용강에 사우정이 자리한데 三山會合兩溪최 세 산이 모이고 두 시내 돌아 흘러가네 此地溪山藏九曲 이 땅의 산과 시내 아홉 굽이 감추니 天敎形勝最丁寧 하늘의 경치를 가장 아름답게 하였어라.
사우정 주변은 층암절벽을 누비며 흐르는 맑은 내가 곳곳에 소를 이루고 울창한 식물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비경을 이루고 있다. 사우정의 四右는 고산(高山), 유수(流水),명월(明月), 청풍(淸風)이다. 민우식은 이 네 사물을 벗으로 사귀며 한가롭고 편안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쌍용구곡 1곡 입문(入門)..道門에 들어가는 것 2곡 지도(志道).. 도에 뜻을 두는 것 3곡 우연(于淵).. 4곡 여천대(여천대) 5곡 방화동(방화동)..大而化之 6곡 안도(안도)..도에 편안함 7곡 낙경대(낙경대)..안빈낙도 8곡 광명암(광명암)..천하에 명덕을 넓히는 것 9곡 홍류동 (홍류동)..세사을 피하는 도원
* 3곡 우연(于淵) 우연은 용강의 끝자락 바위 아래 부분에 자리하며 인공으로 만든 못이 아니라 자연스레 형성된 못이다. 시내가에 움푹 파인 바위에 쌍룡천의 맑은 물이 들어와 만들어진 우연은 물고기가 오고가며 노닐고 있었다. 주위에는 산들이 둘러 있고 맑은 시내가 흘러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민우식은 이 못의 오고가는 물고기를 보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다. 2곡에서는 바위의 불변석을 통해 도에 뜻을 품었고 3곡의 연못에서는 청정성을 느끼게 한다. 연못의 수면은 잔잔하고 맑다. 수면이 잔잔하고 맑기 때문에 자신의 모습을 드리울 수 있다. 즉 도에 나아가는 유학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비춰보는 공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사우정 뒤에는 느티나무가 서 있는 정자 앞의 푸른 물에 그림자가 드리워 신비한 느낌을 가지게 하고 정자 옆으로 절벽과 높은 산이 솟아 있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었다.
도장산
도장산은 경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와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의 경계를 이루는 숨은 명산이다. 경북 서북부에 백두대간 자락의 마지막 비경지대다. 이곳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여 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하며, 빼어나게 아름다운 고을에서 사는 주민들 은 밤낮으로 대하는 풍경에 신경이 둔화되어 산골 풍경이 모두 그러려니 할 테고 또, 도심지에서 등산을 즐기는 이들도 문경이라고 하면 희양산과 주흘산 정도의 명산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문경시와 상주시 사이에 숨어 있는 도장산은 비경지대인 쌍룡계곡과 더불어 앞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유는 「택리지」에도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에 화양구곡과 쌍용·용유계곡이 있고 또한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에 경치 좋고 사람살기 그만인 복지가 있다"라는 문구가 있다는 사실이다. 문경시에서 관광코스는 문경새재, 봉암사, 선유계곡, 용추계곡, 대정숲에 이어 마지막 명소로 쌍룡계곡을 자랑하고 있고, 상주시에도 동관 대궐터, 장각폭포, 칠층석탑, 견훤산성, 오송폭포, 오량폭포에 이미 마지막 비경인 용유폭포(쌍룡계곡)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도장산 쌍룡계곡으로 가는 길은 문경시청이 소재한 점촌에서 농암행 버스를 옮겨 타고 새롭게 포장된 구불구불한 뭉어리재를 넘으면 대정숲에 이른다. 이곳에서 2㎞ 거리에 천연기념물 292호로 지정된 삿갓모양의 반송을 감상하고 말끔히 포장된 도로를 따라가면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반은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계곡에는 풍파에 힘겨워 감자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패어 내린 물길로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옥수가 세차게 흘러내리며 그 아래로 아름다운 담을 이루고 있다. 산행이 시작되는 심원골 입구는 너럭 바위에서 담으로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 양쪽으로 용을 닮은 두 개의 기암이 하류 쪽으로 엎드린 듯 자리하고 있는데 남쪽에 자리한 바위가 암룡이고 북쪽에 자리한 두툼한 바윗가 숫룡이다. 담 아래로 뛰는 듯한 암룡과 숫룡을 닮은 기암이 있는 너럭 바위는 백척 단애와 협곡 초입을 가로 막는 기암에 10여 그루의 노송이 분재인 듯 뿌리를 내리고 있어 보기 드문 절경이다. 심원골로 들어서 출렁다리를 놓아진 계곡을 건너면 산길이 뚜렷하다. 일명 저승골로 불리는 심원골도 예사 계곡이 아니다. 지옥으로 들어가는 첫 관문을 일컫는 말인 너북등을 뒤로 하고 가팔라지는 산길을 따라 1㎞ 들어서면 오른쪽 깊은 계곡 아래로 15m 됨직한 수직 폭포가 나타난다.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휘도는 숲터널 산길을 따라 10분 거리에 이르면 심원사가 나타난다. 단풍나무, 상수리나무 등 잡목숲이 사찰 둘레를 감싸고 울창한 짙푸른 산등성이가 잡목숲 뒤로 병풍을 둘러친 듯한 심원사는 비록 초라한 건물이지만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심원사는 신라시대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그 후 고승인 윤필과 의상대사가 있었던 사찰이라 전해진다. 이 사찰은 1958년 화재로 전소된 후 196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심원사에는 옛날 윤필과 의상 두 대사가 청화산 기슭 용추 속의 용왕 아들인 동자승에 글을 가르친 후 동자승의 간청으로 용추 속 용궁으로 안내되어 용왕으로부터 극진한 예우와 함께 병증, 월겸, 월부, 요령 등의 선물을 받고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심원사를 뒤로 하고 남쪽 작은 계곡으로 들어서면 폐쇄된 표고밭 터에서 산길이 뚝 끊어진다. 그러나 표고 밭터에서 서쪽 지능선 위로 올라서기만 하면 뚜렷한 능선길이 다시 나타난다. 남쪽으로 뻗어 오른 지능선길은 햇살이 송림위로 번쩍이고 소나무 아래 서면 온몸에 송진내가 묻어 나는 제법 가파른 지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절도 천마공행의 서정을 만끽하게 되는 도장산 정상이다. 1979년에 재설한 삼각점 옆에 문경시청 등산회 표지기가 나무기둥에 펄럭이는 정상에서의 조망은 과연 경탄해 마지 않을 수 없다. 능선 서쪽 멀리로는 속리산이 삐죽 삐죽한 봉우리들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이고 북으로는 청화산과 시루봉이 쌍룡계곡을 감싼 듯 한 자태로 건너다 보인다. 속리산과 청화산 사이로는 백악산·도명산·군자산 줄기가 송면 계곡과 함께 시야에 와 닿고 고개를 돌려 청화산 오른쪽을 보면 둔덕산 너머로 희양산과 백화산·주흘산·운달산이 고개를 내민 듯 바라보인다. 정상에서의 하산은 내서리 쌍룡마을로 내려올 수도 있고 능선을 다라 조금 내려오면 삼거리에서 심원사 아래 계곡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그 외 하북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다. 사람의 발길이 드물어 뚜렷한 길이 없는 것이 흠이다. 앞으로는 이 쌍룡계곡에 도로가 완공되면 드라이브 코스로 더욱 각광 받을 것이다.
상주
위치 상주시는 경상북도 서북쪽의 내륙에 위치한 도농복합형 도시로서 동쪽으로 구미시와 의성군, 서쪽으로 충북 보은·옥천·괴산군, 남쪽으로는 김천시와 충북 영동군, 북쪽 으로는 문경시와 예천군으로 접해 있는 북부지역의 교통요충지이다. 양극 지점간의 연장거리는 동.서간 43.3km, 남.북간은 49.0km이다. 면적 상주시의 총면적은 1254.82㎢ 로 남한면적(99,274㎢ )의 1.3%를 차지하고 경상북도 면적(19,022㎢ )의 6.6%를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서울특별시의 2배 크기의 면적으로 전국 기초지방자치단체중 여섯 번째로 넓은 지역이다.면적별 구성요소는 소백산맥의 천황봉, 문장대, 백화산, 갑장산, 노음산을 비롯하여 견훤산성등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임야가 840.94㎢ 로서 67%를 차지하고, 논면적이 15%인 188.33㎢ , 밭면적이 7%인 91,05㎢ , 도로 하천등 기타면적이 134.64㎢ 로 11%를 차지하고 있다. 기후 우리지역이 경상북도 서북부 내륙지방에 위치한 관계로 대륙성 기후에 접근하고 있으며, 삼한 사온이 뚜렷하다. 연평균 기온은 12~13℃정도로 최한월 1월과 최난월 8월의 평균기온이 -3℃ , 26℃내외로 서북부 산간지대로 갈수록 겨울철 기온이 낮아진다. 연간 강우량은 1,050㎜내외로 낙동강 유역 대부분의 내륙지방이 1,000㎜ 정도에 비하여 다소 높은 편이다. '98년도에는 1,873㎜ 를 기록하여 극심한 기상재해를 입었다. 천기일수 현황을 살펴보면 최근 10년간 맑은 날이 연 평균 156일에 달하고 있으며 넓은 평야와 적정한 강우량, 여름철 높은 기온, 많은 일조량등 농작물 재배에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용유계곡 "돌은 구유통과 같고, 작은 솥과도 같고, 닭과 개와도 같아서 지극히 기이하다. 그리고 물은 빙빙 돌고 돌며 흘러가고, 혹은 가득 넘치고…."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용유계곡을 '천하의 기이한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용유계곡 중 가장 기이한 풍경을 이루는 곳으로 병천을 꼽는데, 여기서 이름이 유래된 계곡 주변의 병천마을이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조성해 놓았다. 상주시 관계자는 "병천 마을은 정감록에 삼재(三災)불입의 십승지중의 하나인 우복동으로 기록될 만큼 속세와 격리돼 있을 뿐만 아니라 청화산, 도장산, 승무산 등의 높은 산과 계곡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며 "도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속리산 앞면의 모든 계류가 강선대에 모여 도장과 청화 두산 사이를 흘러 산 밖으로 나가 는 수구가 용유계곡이다. 용유계곡은 천하의 가관이라 돌하나 나무 한그루 모두가 가경이다. 한마디로 기암괴석 청담, 옥폭의 전시장과 같은 곳이다. 용유계곡 입구에 강선대가 있다. 강선대는 그 이름이 말해 주듯이 신선이 내릴만한 곳이다. 기암과 괴석이 층층이 쌓아 올려 봉과 대를 이루고 노송과 잡수가 수림을 이루어 철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기봉과 층대가 대하의 청류에 비추어 달밤에 무늬를 이루면 그야말로 선경을 이룬다 희고 깨끗한 반석 위에는 언제든지 신선이 내려 놀고, 맑고 깊은 물에는 곧 신선이 목욕하고 나오는 것 같다. 입장료는 무료이다.
견훤산성
입구에서 도보로 30분정도 땀 흘리며 올라야 견훤산성을 만날 수 있다. 삼국시대 민초들이 돌을 머리에 이고 정상까지 날랐을 것을 생각하니 아찔할 따름이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지만 막상 산성위에서 바라본 경치는 발품을 보상받고도 남는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 이 곳이 천연요새임을 알 수 있다. 속리산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이고, 화북면 소재지의 민가들이 오밀조밀하게 보인다. 경치로 따지면 군사적 요지가 아니라 멋진 별장 같은 기분이 든다. 백제의 견훤이 쌓았다고 해서 견훤산성이라 부르지만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견훤이 이웃동네 문경 가은 출신이기 때문에 이 고장사람들이 견훤의 이름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구전에 의하면 견훤은 이곳에 성을 쌓고 세력이 강성해져 근거지를 전주로 옮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성벽은 보은의 삼년산성처럼 넓은 돌을 쌓고 내외에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아찔할 따름이다. 총길이 약 650m, 면적 35,702㎡이다. 계곡을 이룬 곳은 높이 쌓아 성벽의 높이가 15m 이상이 되는 곳도 있으며 자연암석 위에 쌓은 지점은 4~5m로, 자연지형물을 최대한 이용하였다.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加恩邑) 출신인 까닭에 상주지역의 옛 성들과 자주 연관되어 언급되는데, 현지에서는 견훤이 이곳에 웅거하며 북쪽 지방에서 경주로 향하는 공납물을 모두 거두어들였다고 전해진다. 상주에서 속리산을 가로질러 보은.괴산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49번 지방 도로는 본래 삼국시대 때부터 신라가 북으로 오르내리는 통로였으니 견훤 산성이 그 길목을 지키는 요지로 얼마나 중요한 곳이었는지 미루어 짐작 할 만하다. 말굽형의 돌출된 망대가 설치되어 있어 적의 동태를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북쪽으로는 속리산 문장대가 한 눈에 펼쳐진다.
속리산 문장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에 위치한 속리산은 주봉인 천황봉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에 있으며 절경을 이룬 문장대는 화북면 장암리에 자리잡고 있다. 속리산은 동식물의 보고이기도 하여 동물 580종이 서식하고 식물 672종이 생장하고 있다. 동물 중에는 조류 160종, 수류 240종, 곤충류 180종이 있고 특색 있는 것으로는 큰갓새, 붉은가슴갓새, 사향노루, 날다람쥐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 중에는 천연기념물인 망개나무, 고산 식물인 등대미호, 희귀식물인 백색 진달래 주목 및 금낭화 등이 있다. 우리 나라 중심부에 우뚝 솟은 속리산은 일견 하나의 정기로 뭉쳐진 느낌을 준다. 험준하면서도 수려하고 유수하면서도 명결함이 곧 그것을 상징한다. 쌓아올린 듯한 기암괴석이 구름 위에 높이 솟아 있는가 하면 길게 뻗어 내려 계곡을 이루고 적고 큰 봉만이 병풍처럼 둘러 처져 대와 악이 우뚝 우뚝 용립한 양상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봉마다 각기 특징이 있고 계곡마다 느낌이 각각 다르다. 오르면 오를수록 더 오르고 걸음을 멈추면 떠나고 싶지 않는 곳이 속리산이요 장관에 도취되어 호연한 남아의 기개를 용솟음치게 하고 대자연의 포근한 가슴에 묻혀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곳이 또한 속리산이다.
속리산은 낙동강, 한강 그리고 금강 삼파의 분수령이다. 산은 석산이요 계곡 또한 석천이라 물은 거울처럼 맑고 그 소리는 금곡처럼 아름답다. 천황봉의 원출은 장각폭포를 이룬 다음 갈령와 피홧재에서 흐르는 물과 합류하여 옥녀봉의 허리를 안고 돌며 문장대의 원출은 오송폭포의 장관을 자랑하면서 서출동류 승무산 기슭에 이르러는 늘티물과 짝하고 강선대에서는 천황봉 물과 모두 만나서 도장산과 청화산 사이로 용유와 병천의 절경을 이루면서 쌍룡 30리 곡구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백악산 보굴 원출은 옥량폭포를 날으듯 떨어져 늘티 서북쪽 원출과 갓티재 원출 삼파수가 합하여 절승 선유동 물을 흡수 화양구곡의 절경을 이루면서 유유히 흐르면 문장대 관음봉의 원출과 궁티와 용화온천물이 합류하여 한강 상류를 형성한다. 천황봉과 형제봉의 서북쪽 원출은 삼가 저수지로 모여 묘막 원출과 더불어 금강의 연원이 된다. 이와 같이 산과 물이 서로 상부하여 조화를 이루니 가는 곳마다 명소요, 보는 것마다 절경이다. 대체로 속리산의 전면 상주지역은 자연이 스스로 절경을 이룬 보고로 천황봉 입석대, 신선대, 문장대, 관음봉, 형제봉, 도장산, 청화산, 강선대, 사모봉 등의 봉만과 오송, 장각, 복호, 옥량, 쌍룡 등의 폭포가 절승을 이루는 반면 배면의 충북지역은 법주사를 비롯하여 복천암, 중사자암, 상환암, 상고암 등 사찰에 국보와 보물이 보존되어 있어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써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다 할 수 있다..속리산은 말이나 글이나 그림 그 어느 것으로도 형용을 불허하는 절묘와 신비의 영산이다. 이 산에 들어가면 누구나 총욕이나 물욕이 없어지고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꺾거나 짐승한 마리를 잡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대자연의 장엄과 신비 앞에 숙연해진다. 이 산은 신령하고 웅장하고 정기가 있어 인간의 세속으로는 따를 수도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에 예로부터 세속을 떠난 산, 즉 속리산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장각폭포
장각폭포는 특이하게도 산속에 있지 않다. 폭포라 하면 모두가 높은 산 좁다란 계곡속 바위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를 연상케 되지만 이곳 장각폭포는 너른 들판 한켠 언덕에서 5미터의 물줄기를 쏟아내고 있다. 폭포 위에는 금란정이라는 정자가 그림처럼 세워져 있고 옆으로는 울창한 소나무숲이 있어 한층 더 운치를 돋운다. 폭포 위 금란정에 올라서면 너른 상주 들녘이 한눈에 들어와 이색적인 풍광을 보여주기도 한다. 장각폭포에서 시내를 따라 위로 계속 오르면 속리산 천황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이어진다. 다만 등산시간이 길어 이용에는 불편이 많다. 장각폭포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 한 것은 몇 곳의 드라마에 모습을 보이면서다. 문경의 드라마 촬영장이 가까워 폭포장면 촬영이 쉬웠던 탓이다. 태양인 이제마의 촬영이 있은 이후로 낭만자객과 이순신의 어린 시절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특히 낭만자객에서는 귀신으로 출연했던 네 명의 여배우가 실제 전라의 모습으로 폭포 속에서 촬영에 임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고 했고, 이순신에서는 원균이 서당의 아이들을 데리고 병정놀이를 하면서 아이들을 뛰어내리게 하던 폭포다. 이곳에 참가했던 이순신이 결국은 뛰어내리지 못하던 곳. 드라마 이순신 중 가장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던 장소가 바로 장각폭포다.
효자 정재수를 아십니까?
청산면 법화리. 일명 버구실에서 보은군 마로면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고개가 있다. 이 고개가 "효자고개"이고 고개 정상에는 정재수 효자비가 있다. 정재수가 경북 상주군 화서면 사산초등학교 2학년때 일이다. 고향은 청산면 법화리이고 그의 조부모와 큰아버지가 살고 있었으며, 재수 어린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상주군 화서면에 살고 있었다. 평소 어린이답지 않게 과묵하고 침착했으며, 예의 바른 어린이였다. 1974년 1월22일은 설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이었다.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연일 계속 내려 쌓였고, 폭설주의보가 내려 혹한이었다. 이렇게 춥고, 눈이 많이 내려 쌓이는 날,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고향인 청산면 법화리 할아버지댁에 설을 세기 위하여 떠났다. 상주군 회북면에서 옥천군 청산면을 가자면 보은군 마로면을 거쳐서 효자고개를 넘어야만 하는데 길이 험준한 산고개 길이라서 걸어서 가야만 했다. 정재수 부자는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험한 산길을 혹독한 강추위와 싸워 가면서 걷고 있었다. 이윽고 화북면을 거쳐서 마로면에 왔을 때 눈보라는 더욱 기승을 부려 더이상 갈 수가 없어서 이들 부자는 어느 술집에 들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술집에서 정씨는 꽤 많은 술을 마셨고, 술에 많이 취한 정씨는 술기운에 추위도 모르고 오직 내일이 설이니 오늘밤에 꼭 고개를 넘어서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여러사람의 만류도 뿌리치고 혹한과 눈보라 속을 뚫고 정재수 부자는 청산을 향하여 길을 떠나고 말았다. 길을 잃어 버리기를 몇 번, 눈이 무릎위까지 빠지는 산길을 술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밤이 꽤 깊어서야 고개마루까지 오게 되었다. 그때 정씨는 "이제 더 못 가겠다"하더니 푹 쓰러지고 마는게 아닌가!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 아버지!"부르면서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꼬마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재수 어린이는 술 취해 쓰러진 아버지를 위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 아버지를 덮어 주고, 극진히 보살폈지만 그 혹독한 추위 앞에서 그들은 동사하고 말았다. 이튿날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된 이들 부자의 시체는 차마 눈뜨고는 못볼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어린 재수군이 아버지를 죽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 자기도 죽게 된 그 상태가 너무도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후 정재수 어린이의 효행을 길이 교훈 삼고자 그리고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산마루 위에 「정재수 효자비」를 학생들의 정성으로 세워서 지금도 전하며 그후 이 고개를 "효자고개"라 부르고 있다.
비석에 새겨진 글귀 전문을 옮겨본다. 『서기 1974년 1월 22일 밤 정재수 이곳에 잠들었으며 이는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소곡리에 태어났다. 십 세의 어린 나이로 혹한의 눈보라 속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출하고자 못다 핀 생명을 바쳤으니. 아! 아버지의 영혼을 엎어주던 그 맑은 효행은 뭇 사람의 심금을 울려 길이 후세에 흐르라』
자전거박물관
우리 나라 최초 자전거 박물관이 경상북도 상주시에 생겼다. 쌀과 곶감, 누에로 유명한 고장인 상주는 평소 자전거가많기로 소문난 곳이며 환경을 오염시키는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이용해 등하교 및 출퇴근을 하거나 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자전거 역사를 한눈에... 상주 자전거 박물관은 말 그대로 자전거의 모든 것이 담긴 "자전거 천국"이다. 전시되어 있는 40여대가 자전거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으며, 자전거 전시실인 "만남의 장" 외에도 체험 전시실인 "체험의 장", 자전거 문화에 대해 소개하는 "공감의 장", 상주 자전거 축제를 소개하는 "축제의 장", 자전거와 관련된 상품을 판매하는 "결실의 장"이 있어 여러 가지경험을 한꺼번에 할 수 있다.
- 전시내용 초기 자전거(7점), 이색자전거(13점), 현대자전거(10점)자전거 체험관(7식), 홍보관(자전거부품전시, 자전거바로타기, 자전거와 건강)상주관(전국자전거축제, 상주와 자전거, 자전거관련자료) 뮤지엄샵(청동자전거모형, 기념품 판매)
전시실보다 재미있는 자전거 체험관 -보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마음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그 짜릿한 맛을 체험하는 자전거 체험관 1)자전거하이킹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면 하부의 콘베이어가 같이 작동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핸들을 조작하여 야외에서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연출한다. 2)자전거발전기 - L.E.D램프 자전거위에 올라 앉아 페달을 돌리면 관람자 앞의 L.E.D전광판의 램프가 속도에 따라 켜진다. - 공놀이 자전거위에 올라앉아 페달을 돌리면 자전거바퀴의 속도에 따라 관람자앞의 공이 올라간다. 자신의 페달 돌리는 힘을 관찰한다. 3) 골격운동장치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면 우측 내부에 조명이 정등외며 골격의 움직임을 관찰한다.골격의 움직임은 관람자의 페달 작동과 동기 되어 인체 골격의 움직임을 체험할 수 있다. 4) 자이로스코우프 자전거의 페달을 돌리며 핸들을 좌·우로 돌리면 자전거의 몸체가 핸들의 조작에 따라 좌·우로 회전한다. 흥미와 자이로 스코우프를 이해하도록 한다. 5) 동력전달장치 핸들 손잡이를 돌리면 자석판이 회전하며 음극의 판이 자력으로 돌게된다. 동력의 전달과정과 자력의 이해를 돕는다. 6) 시소놀이 각기의 양쪽의자에 앉아 시이소놀이를 하면 시이소의 내려가는 방향으로 가운데 축의 자전거 휠이 작동하여 관람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입구의 170년된 돌장승, 왕방울 눈.주먹코..사람의 심장을 꿰뚫는듯 삼악(三嶽), 사장사(四長寺). 상주의 명산과 명찰을 총칭하는 말이다. 상주의 명산 삼악은 상주 서편의 노악(노음산), 남쪽의 연악(갑장산), 북쪽의 석악(천봉산)을 일컫는다. 사장사는 노음산의 남장사와 북장사, 갑장산의 갑장사와 승장사를 말한다. 상주를 대표할 만한 산과 이름있는 절이 제대로 짝을 지었다. 남장사의 당초 이름은 장백사였다. 노음산도 원래 장백산으로 불렸다. 산 이름이 노음산으로 바뀌었다가 중국식 3악의 이름을 갖게 되고 종국에는 노악산으로 굳어졌다. 노악산 등산은 남장사 아래 저수지 옆에서 시작되는데, 등산로 입구에 서있는 돌장승이 등산객들의 눈길을 끈다. 왕방울 같은 눈과 주먹코,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익살스럽게 삐져나온 송곳니, 그리고 전체적으로 삐뚜름한 얼굴 구도가 우스꽝스러운 인상을 준다. 만화책에 나옴직한 유머스러운 모습이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부리부리한 두 눈이 살아있는 듯 사람의 심중을 꿰뚫어보는 것 같다. 조금 떨어져서 보면 고개를 비스듬히 꼬고 혼자 서 있는 모습이 볼수록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남장사 입구에 서서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영락없는 절 지킴이다. 장승 왼쪽의 기록에 의하면 1832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현존하는 석장승으로는 형태가 특이한 우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승의 코를 갈아서 물에 타 먹으면 아들을 낳는다는 설 때문에 큰 코가 뭉툭하도록 닳았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저토록 거칠게 다듬어진 돌이 동적인 느낌과 친근감을 갖게 하는 게 이상하게 비친다. 산속 조용한 곳에서 만나면 좋을 듯한 인상이다.
梵唄의 첫 전래지 불교문화 보고-남장사
남장사 옆 남장계곡은 웬만한 가뭄에도 맑은 물이 흐른다. "물 참 좋다. 옛날에는 물이 다 이렇게 맑았는데…." 등산복 차림을 한 초로의 남자가 짧은 탄식을 흘렸다. 등산복 차림을 한 그는 남장사(南長寺) 옆 남장계곡을 가로지르는 나한교 난간에 두 손을 얹고 서 있다. 이 남자는 생각에 잠긴 듯 그저 아래쪽으로 시선을 깔고 있다. 염색을 한 듯 새카만 머리에 빛 바랜 등산조끼 차림의 그는 무슨 생각에 젖어들었을까. 초점 흐린 그의 눈에는 무엇이 비칠까. 수 천년을 그렇게 흘렀을 맑은 물이 눈길을 잡고 있을까. 오랜 세월 흐르는 물의 노랫소리에 취해 저 깊은 속살까지 내어놓은 단애를 보고 있을까. 100년도 채 못 갈 육체를 빌려 태어났으면서도, 억겁을 헤아리려는 스님들의 치열한 정진을 생각할까. 아니, 어렸을 적 마을 앞 개울물에 마음놓고 풍덩 뛰어들어 함께 멱감던 옛 고향 친구들을 생각할까. 상주시내에서 남장사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에 불과하다. 입구의 남장동과는 바로 이웃해 있다. 거리로 따지면 같은 동네이다. 남장사는 그만큼 세속과 가까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감나무 울창한 남장동을 지나 남장사로 향하노라면 어느새 깊은 산중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완만한 경사에 비스듬히 꺾인 길이 울창한 숲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남장사는 그렇게 세속과 이웃해 있으면서도, 세속을 멀리 벗어나 있다. 남장사로 걸어들어가는 길은 소나무숲 사이로 열려있다. 맨발로 걷고 싶은 흙길 양쪽에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입구에서부터 천년 고찰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높이 자란 소나무들은 붉은 색을 띤 적송(赤松)이다. 춘양목처럼 무릎쯤부터는 붉은 빛을 낸다. 그 빛은 나이를 먹을수록 진해지고, 주변의 활엽수가 푸름을 더할수록 점점 더 두드러진다. 날이 어두워질수록 밝은 빛을 발하는 가로등처럼. 남장사의 일주문 앞에 서면 왜 절의 대문은 일주문(一柱門)일까, 저렇게 큰 지붕을 이고 있어야 되는데 양쪽에 기둥 한 개씩만을 고집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장사의 일주문은 팔작 합각 지붕에 3단의 장식을 하고 있다. 웬만한 집의 지붕만하다. 이 지붕을 아름드리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 그러나 양쪽 하나씩 세운 기둥이 아무리 굵다해도 제대로 지탱하기 어렵다. 때문에 기둥 양쪽에 보조기둥을 세우고, 네 귀퉁이에 다듬은 돌로 주추를 놓고 기둥을 받쳐 놓았다. 결국 열 개의 기둥이 지붕을 이고 있는 셈이다. 이것을 보면 또 다시 왜 일주문이어야 하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진리는 하나다. 법은 하나다. 그리고 일주문은 세속과 법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다. 일주문이어야 하는 이유다. 남장사는 832년 신라 흥덕왕 때 진감 국사 혜소 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진감 국사는 중국에서 범패와 선을 공부했다. 불교음악인 범패가 진감 국사를 통해 남장사에서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다. 범패가 남장사를 통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것은 이 절이 불교 음악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목각 후불 탱화와 철불 좌상 등의 보물이 남장사의 불교미술에 있어서의 중요성을 말해 준다. 보광전 비로자나불 후불 탱화(보물 922호)와 관음선원 관세음보살상 후불 탱화(보물 923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각탱인데다 작품성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돼 1987년 동시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쇠로 만든 보광전의 비로자나불(보물 990호)은 상주의 향토역사서 '상산지'에 '천년이나 된 철불이 있어 병란이나 심한 가뭄이 들면 스스로 땀을 흘린다'고 기록될 만큼 불자들의 숭배를 받아왔다.
남장사 목각탱 ( 보물 922호)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불화를 그려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그림인데, 이 탱화는 종이나 비단이 아닌 나무를 조각해서 만든 목각탱이다. 이 목각탱은 가로 236㎝, 세로 226㎝, 두께 10∼12㎝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보광전의 후불탱화로 사용되고 있다. 길쭉한 나무판 8장을 연결하여 연꽃 위에 앉아있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 4단씩 3열로 10대보살과 10대제자, 사천왕을 계단식으로 배치한 독특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보살상들은 모두 머리에 보관을 쓰고 꽃가지를 들고 있으나 한 분만 합장하고 있으며 관음과 대세지 보살은 연꽃 위에 앉았고 다른 인물들은 서거나 무릎을 꿇고 있다. 각 인물들 사이에는 연꽃과 꽃봉오리 등으로 장식하였고 가운데 있는 본존의 머리 위에는 상서로운 구름이 솟아올라 2줄기로 갈라져 있다. 몸에 비해 큰 사각형의 각진 얼굴과 가는 눈, 작은 코, 넓은 귀 등은 오려 부친 듯 묘사되었고 앞으로 숙인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명문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불화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으로 회화적이면서도 조각적인 매력을 간직한 귀한 작품이다.
남장사관음선원목각탱 (보물 923호)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불화를 그려 족자나 액자형태로 만들어 거는 그림으로, 대개 사찰 전각 안의 본존불 뒤에 위치한다. 이 작품은 특이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것으로, 관음전의 주존인 관음보살상 뒷편에 부조로 새겨져 있으며, 가로 184㎝, 세로 165㎝이다. 사각형의 판목 중앙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네 보살이 배치되었고 그 주위로 2대 제자인 아난·가섭과 사천왕을 배열한 구도이다. 하단의 연꽃 줄기에서 나온 연꽃이 대좌를 이루어 본존불과 두 보살이 앉아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은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고 협시보살들은 손에 연꽃가지를 잡거나 합장한 모습이다. 불상들의 얼굴과 신체 등이 모두 네모난 형태로 비사실적 인체 표현이 드러나 있으며 이와 함께 두꺼운 옷에 간략화된 주름은 당대의 불상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목각후불탱은 목각탱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17세기 작품을 대표하는 수준작으로 뛰어난 목조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상주남장사철불좌상 (보물 990호)
경상북도 상주시 남장사 보광전에 모셔진 철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지금은 불신만 남아있다. 얼굴은 단아하며 어깨에 닿을 듯 긴 귀는 목에 3줄로 새겨진 삼도(三道)와 잘 조화를 이루어 위엄을 자아낸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부드럽게 흘러내려 양쪽 무릎을 덮고 있는데, 주름은 팔과 다리의 끝부분에만 나타났을 뿐 대담하게 생략하고 단순화시켰다. 손은 오른손 검지를 왼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상과 비교하여 손의 위치가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엄숙한 얼굴 표정, 치마를 묶은 띠매듭, 왼쪽 어깨에 드리워진 U자형 옷자락, 단아한 얼굴, 장대한 체구 등은 조선 초기의 불상임을 알려주는 것으로 조선 철불상의 귀중한 예로 높이 평가된다.
정기룡장군 사당- 충의사
바다에 이순신이 있다면 육지에 정기룡장군이 있었다. 임진왜란때 신립의 휘하에 들어가 수 많은 전공을 세우며 이름을 높였다. 금산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고 거창에서 왜군을 격파했고 왜군의 호남진출을 막은 가장 큰 수훈감이다. 왜군과 격전끝에 상주성을 탈환했으며 정유재란때도 큰 승리를 이끌어 냈다. 사당과 충의재 그리고 전시관에는 유품인 교지와 관복,옥대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보물 669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달리 삼층석탑 (보물 117호)
3번국도를 타고 가다보면 상주땅 사방이 분지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가히 한 왕국의 수도가 있을 만한 자리다. 그 드넓은 땅에서 자란 쌀은 품질이 뛰어나 임금님 진상품으로 사용되었을 정도란다. 연꽃같은 산줄기 한가운데 꽃밥처럼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화달리 삼층석탑이다.
석탑은 9세기경으로 추정되며 하층기단의 면석이 없는 것은 문경,상주등 이 지방에 분포된 탑의 특징이기도 하다. 1층 몸돌에 목없는 불상이 모셔져 있다.
사벌왕릉
화달리 삼층석탑 바로 옆에 사벌왕릉이 모셔져 있다. 상주에 있었던 소국 사벌국의 왕릉으로 전해진다. 이 주변에 삼국시대 고분이 많이 분포된 것은 이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거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성산 박씨의 시조인 신라 경명왕아들 박원창이 신라말에 사벌군으로 책봉되어 후삼국 동란기에 사벌국을 세웠고 이 능이 박원창의 능이라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다. * 충의사에서 경천대 가는 쪽에 있다.
경천대
상주의 최고(最古) 사찰이라는 남장사를 들렀다면 이 곳 최고(最高)의 경승이라는 경천대(擎天臺)를 빼 놓을 수 없다. 깎아지른 절벽, 굽이쳐 흐르는 강물, 우거진 노송 등 천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하늘이 만들었다고 해 자천대(自天臺)라고도 한다. 경천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까지는 300여 개 되는 목조 계단을 올라야 한다. 늘어선 돌탑들로 담을 두른 계단길은 절반이 황토 바닥의 발맛사지 코스다. 봄소풍 나온 유치원생들이 맨발로 황토길에 뛰어 들었다. 어기적 어기적. 여섯 살 아이의 걸음새가 영락없이 80대 촌로를 닮았다. 서로 지지 않으려 애쓰는 사이에 얼굴은 이내 빨갛게 일그러졌다. 전망대에 섰다. 돌로 지은 3층짜리 팔각정이다. 건물은 볼품없지만 경치는 그만이다. 낙동강이 커다랗게 굽이친다. 안동 하회나 예천 회룡포의 물길이 산하를 부드럽게 감싼다면 이 곳은 힘이 넘쳐 휘몰이 장단으로 흐른다. 강 건너 중동면 회상들판은 봄볕으로 한껏 에너지를 충전시키는 중이다. 모내기 때가 머지 않았다. 전망대 아래로 10여분 내려가면 낙동강 1,300리 물길중 가장 경치가 빼어나다는 경천대다. 벼랑 위로 바위가 기묘한 모양으로 올라서 있다. 전망대 보다는 멀리 보이지 않지만 바로 눈앞 절벽에서 휘감겨 돌아가는 시퍼런 강물이 이마를 식혀준다. 바로 옆은 큰 멋 들이지 않은 정자, ‘무우정’이다. 병자호란때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갈 때 동행했던 우담 채득기 선생이 만년에 은거했던 곳이다. 드라마 ‘상도’ 세트장으로 이어지는 솔숲 산책로는 조용하고 아늑하다. 강을 굽어 보는 벤치에 앉아 가슴과 머릿속 호흡을 고르고 있으니 건너편에서 트랙터 소리가 들려왔다. 봄 가운 가득한 대기를 뚫고 오는 규칙적 기계음이 음악으로 들린다.
신의터농원
* 광고 (자료집에 광고 들어가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아마 단지님도 제가 이렇게 광고하는 걸 아시면 무척 화를 내실 겁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품질은 제가 보장합니다. 제가 먹어 보았거든요...내용은 홈페이지 참조했습니다.)
1)꼬꼬지 된장 해발 350m 백두대간의 중간기점인 신의터 재가 꼬불거리는 마을 어귀 소나무로 사방이 둘러 쌓인 양지바른 언덕에 천연 유약을 발라 구운 넉넉한 자태의 항아리 속에서 바람과 햇볕과 정성으로 익어가고 있습니다. 콩은 고랭지에 준하는 화서, 화북 인근 지역에서 생산되는 토종 햇콩만을 고집합니다. 소금은 남해안의 질 좋은 소금을 구입하여 2년 이상 간수를 뺀 천일염을 사용합니다. 물은 오염원이 없는 청정지역인 이곳의 물은 끓이지 않고서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는 1급수 임을 자랑합니다. 콩을 8시간 불려 가마솥에서 푹 삶아 메주를 만들고 무공해 볏짚을 이용하여 하나하나 매달아 건조를 한 후 시렁을 맨 구들방에서 약 2개월간 발효를 하여 메주가 완성됩니다.이렇게 만든 메주는 천연 유약을 발라 구운 항아리 속에서 2년 이상 발효를 시킵니다. 전 과정이 사람 손만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한정된 양만을 만들어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장맛을 재현하고 그 맛을 앞으로도 계속 지켜나가겠습니다 가격: 꼬꼬지된장 1kg 12,000원 /3kg 36,000원 /5kg 56,000원
2)꼬꼬지 찰고추장 메주 만들기 불린 현미쌀을 가루내어 삶은 콩과 같이 시루에 찐다음 주먹만하게 메주를 빚어 짚으로 매달아 한 달간 띄운다. 조청 만들기 현미쌀을 가루내어 시루에 쪄낸 후 엿기름물에 8시간 정도 삭힌 후 베보자기에 눌러 짠 후에 4시간 가량 달여서 조청을 만든다. 고추장 만들기 찹쌀 가루를 반죽하여 경단을 빚어 삶아 건진 후 꽈리를 쳐서 메주가루와 고춧가루를 섞어가며 고루 치댄다. 달여 놓은 엿물을 부어가며 소금과 간장으로 간을 한다. 가격 : 0.5kg 10,000원/1.0kg 18,000원
3)꼬꼬지 간장 2년 이상 햇볕에 달인 간장은 신의터 농원의 가장 큰 자랑거리입니다 가격 : 0.9리터 9,000원
4)정성으로 만든 곶감 이야기 백두대간이 남으로 달리다 잠시 쉬어가는 곳, 상주. 지장산 자락이 꼬리를 담그는 작은 호수 아래 첫 동네에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한 농부가 살고 있습니다. 이 티없이 맑은 산골에 가을이 찾아오면 농부는 꼬박 열흘이 넘도록 높은 감나무에서 곡예를 하듯 빨갛게 익은 감을 한 알 한 알 따 내립니다. 이렇게 힘들게 딴 감이기에 농부의 아낙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으로만 깎아야 한다며 고집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하여 정성을 다하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만들어야 한다고요... 신의터농원 곶감은 끝이 뾰족한 둥시감으로 단맛이 감 중에서 으뜸이고 육질이 좋아 곶감으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특히 말랑말랑한 반건시는 '속은 홍시요, 걷은 곶감이라' 두가지 맛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비타민 C가 귤 못지 않게 들어있고 비타민 A도 풍부해 노약자나 어린이, 수험생에게 좋은 영양 간식입니다. 사람의 온기가 서려있는 우리 먹거리, 상주 '손으로 깍은 곶감'.
신의터 농원
홈페이지 주소: http://sinfarm.com 집주소 : 경북 상주시 화동면 선교리 552 집전화 : 054- 533-9292 손전화 : 011-9859-7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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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직 아무것도 자신있게 내 놓을 수가 없는데 우짜꼬 ~ 모놀 가족 오시면 부끄러워 저의 볼이 철쭉처럼 붉어질것 같아요. 저한테 귀뜸이라도 해 주시지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이렇게 귀중한 자료집 저도 한권 받아 보고 싶어요 ^.^
두번째보는 답사자료집이네요..만드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감사히 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