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잘 사는건데.
대학 동기회의 총무를 맡았다. 졸업한 지가 39년 6개월이 되었을 때이다.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후반기 동기회 운영에 관하여 임원진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임원진이라야 겨우 3명이고, 동기회 업무라야 몇 번 만나는 일이 전부다. 동기회 운영은 핑계이고, 술이나 한 잔 하자는 속셈이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막걸리 맛이 소문난 집이고, 된장 우거지 국에 비빔밥도 일품이라고 하였다. ‘난 양식보다 이런 집이 좋더라.’ 전화기를 통해 들려온 그의 목소리이다.
회장인 그는 졸업하고 바로 미국으로 가서 전문의가 되었다. 10년 쯤 머물다 모교의 교수로 온 친구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이야기는 자연히 미국에 있는 동기들의 근황이었다.
미국 동기들에 대한 나의 기억은 거의 20년 쯤 전에 미국에 정착한 친구네 집을 방문하였을 때다. 그때의 기억이 강렬한 색채의 그림으로 남아 있다. 마치 동화책에 나오는 성곽과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미국 동기와 한국에서 초청받아 간 동기 부부 약 60여 명이 파티를 가질 만큼 홀이 너른 집이었고, 카페, 당구장, 노래방까지 갖춘 집이었다.
이날 저녁에, 나는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미국의 동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다닐 때 고향의 시골에서 온 유일한 친구라서 아주아주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다. 나는 그의 전화를 받자말자 대뜸 ‘우와, 너네들 미국에 와서 성공했더구나. 집이 어마어마하구나,’라며 부러움을 토했다. 그때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온 친구의 목소리가 지금 가슴 속을 싸아하게 해준다.
“그렇게 보이나. 우리가 이 정도라도 자리를 잡기 위해서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은지 모를거야.”
그때 그가 왜 그런 말을 하였는지 모른다. 그때는 우리가 머문 친구의 대 저택만이 부러웠을 뿐이고, 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회장더러 물어보았다.
“너는 미국에 머물지 않고 왜 한국으로 돌아왔어?”
“난 잘 왔다고 생각해. 여기 생활이 얼마나 좋은데, 생각이 나면 오늘 저녁처럼 친구를 불러내서 만날 수 있지. 눈치를 보면서 부대끼지 않아도 되지. 가슴 속에 품은 말을 주저 없이 털어내도 이해해주는 사람들이 살고 있잖아. 어쨌거나 여기가 좋아.”
“그곳은 안 그래.”
“사람사는 곳인데 별 곳이야 있겠냐마는, 우리와는 문화가 다르니까 적응하기에 힘들어 하는 사람도 있어.”
“그래도 무지하게 잘 살던데.”
“그럴거야, 그래도 나는 여기가 더 좋더라. 그 친구들마냥 부자는 못 되었지만 한 번도 후회한 일은 없어. 오늘처럼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면서 속말까지 털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잘 사는 일이 아니냐.”
“맞다. 이게 잘 사는 것이 맞다.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대학을 다닐 때 나와 아주 친했던 그 친구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회장은 작년에 뉴욕에 들렸을 때 그의 집을 찾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의 집에 설치해둔 노래방에는 한국의 유행가만이 저장되어 있더라고 했다. 그것도 때 지난 노래들이었고, 그 친구는 뽕작 유행가를 아주 잘 부르더라고 했다.
미국 생활이 외롭다던 그는 벌써 여러 해 전의 겨울에 유명을 달리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아서 한국에 살고 있는 그의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미국 형은 목 디스크에 우울증으로 약을 복용하잖아요. 아마도 약을 과용하셨나봐요.”
목 디스크며, 약간의 우울증이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나와 전화도 더러 했고,내가 미술을 좋아하는 줄 알고 책도 여러 권이나 사서 보내주었다. 그는 아들을 미국의 의사로 만들었고, 며느리도 의사라면서 자랑했다. 딸은 뉴욕에서 변호사를 한다. 성공한 이민자의 생활이다. 그런 그가 ---
‘우울증으로 --’ 울먹거리던 동생의 말은 나의 뒤통수를 쳤다. 나에게 잘 사는 것이 무엇인데, 라는 풀 수 없는 화두를 남겨주었다.
바깥에는 장맛비가 주룩거리고 있었다. 마음씨 좋은 식당의 사장은 우산까지 내어주었다. 나는 우산을 들고 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밖으로 나왔다.
“우리 한 잔 더 하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이야기나 실컨 하자.”
“그럼, 그럼, 이게 잘 사는거야. 잘 사는 게 뭐 별 것 있어.”
우리는 비틀거리면서 술집 ‘풀하우스’에 갔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모른다. 무엇이 잘 사는건지를 쥐뿔도 모르면서 호기를 부렸다.
이튿날 나는 속이 쓰려서 종일토록 방에 누워 있었다.
첫댓글 공감합니다.
'아침에 쓰린 배'가 가장 인상적인 반전이었습니다.
늘 청안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