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소사 전나무 숲길을 지나 내소사에 이르다.
문득 가고 싶은 곳이 있고, 다녀오고 나면 다시 가고 싶은 곳, 내소사가 그런 절이다. 절 초입의 당산나무도 마음을 사로잡지만, 월정사 전나무 숲같이 울창한 전나무 숲이 길손을 반긴다. 이런 나무 숲길을 걸을 땐 한 꺼풀 한 꺼풀 입었던 옷들을 벗을 일이다. 삼림욕이 아니라도 잣 내음 같은 솔잎향내 같은 이 냄새에 온몸을 내맡겨볼 일이다. 전나무 숲이 끝나기도 전에 들어오는 붉게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 뒤편에 내소사 전경은 아름답기 이를 데 없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거대한 당산나무가 눈 안에 들어온다. 나이가 천년쯤 되었을 것이라는 이 나무는 할아버지 당산으로 일주문 바로 앞에 선 할머니 당산나무와 한 짝이라고 한다. 나라 안 수많은 절 집중에서도 정월대보름날에 금줄이 쳐진 후 정월대보름 당산제가 열리는 절은 아마도 이 내소사 뿐일 것이다. 해방 전만 해도 제물을 차리고 독경을 하며 줄다리기를 한 후 그 줄을 이 당산나무에 걸어놓기도 했다는데… 당산나무를 지나면 가인봉, 능가산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인 내소사 경내에 범종각, 봉래루, 삼층탑, 설설당, 대웅보전 등의 건물들과 요사 채들이 그림처럼 서있다. 부안군 진서면 석포리에 위치한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년(633) 혜구두타가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 ‘대 소래사’와 ‘소 소래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내소사는 예전의 ‘소 소래사’라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 11)에 청민선사가 중건하였고 1902년 관해가 중창한 뒤 오늘에 이르렀다. 소래사가 내소사로 언제부터 바뀌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고려 때 빼어난 시인인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제변산 소래사題邊山蘇來寺>라는 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정지상이 변산에 왔던 시절만 해도 소래사로 불렸음을 알 수가 있다.
적막한 맑은 길에 솔뿌리가 얼기설기, 하늘이 고대, 두우성斗牛星을 숫제 만질듯, 뜬 구름 흐르는 물 길손이 절간에 이르렀고, 단풍잎 푸른 이끼에 중은 문을 닫는구나. 가을바람 산들 산들 지는 해에 불고 산달이 차츰 훤한데 맑은 잔나비 울음 들린다. 기특도 한지고, 긴 눈썹 저 늙은 중은 한 평생 인간의 시끄러움 꿈 조차 안꾸누나. 위의 시로 보아서 중국의 소정방이 석포리에 상륙한 뒤 이절을 찾아와서 군중재를 시주하였기 때문에 내소사로 바뀌었다는 말은 그냥 전해져 오던 전설이 맞을 듯 싶다. 내소사는 선계사, 실상사, 청림사와 더불어 변산의 4대 명찰로 불렸지만 다른 절들은 전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내소사만 남아있다. 보물 제 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내소사來蘇寺 고려동종高麗銅鐘은 1222년(고종 9년) 변산의 청림사에서 만든 종으로 청림사가 폐사되면서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은 1857년(철종 4년) 내소사로 옮겼다. 높이가 1.3m에 직경 67cm인 전형적인 고려 후기 작품으로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종구가 종신보다 약간 넓고 정상에는 탑산사종의 용과 비슷한 용뉴龍鈕와 구슬이 붙어있고 용통甬筒이 있다. 종신의 중간에는 활짝 핀 연꽃이 받치고 있는 구름 위에 삼존 상이 네 곳에 주조되어 있으며 본존상은 좌상이고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입상이고 모두 두광이 있고 머리 위에는 수식이 옆으로 나부끼는 보개가 공중에 떠있다. 범종각을 지나 봉래루를 지나면 대웅보전 앞에 다다른다. 조선 인조 11년(1633)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내소사 대웅보전大雄寶殿은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위에 낮은 기단과 다듬지 않은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집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유행했던 다포계 건물로서 공포의 짜임은 외 3출목과 내 5출목으로서 기둥위에는 물론 주간에도 공간포를 놓은 다포계 양식이다. 법당 내부의 제공 뒤뿌리에는 모두 연꽃 봉우리를 새겨 우물반자를 댄 천장에 꽃무늬 단청이다. 내소사 대웅보전 건물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운 맞춘 건물로도 유명하다. 내소사를 중창할 당시 대웅보전을 지은 목수는 삼년 동안을 나무를 목침덩이만 하게 토막 내어 다듬기만 했다고 한다. 나무 깎기를 마친 목수는 그 나무를 헤아리다가 하나가 모자라자 자신의 실력이 법당을 짓기에 부족하다며 법당 짓기를 포기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사미승은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내놓았지만 목수는 부정한 나무토막은 쓸 수 없다며 끝내 그 토막을 빼놓고 대웅보전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 연유로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안 천장은 왼쪽에 비해 나무토막 한 개가 부족하다고 한다. 또 법당 내부를 장식한 단청에도 한군데 단청이 그려지지 않은 곳이 있는데 그 전설을 미당 서정주는 아름다운 시 한편으로 남겼다. 내소사 대웅보전 단청 서정주 내소사(來蘇寺) 대웅보전(大雄寶殿) 단청(丹靑)은 사람의 힘으로도 새의 힘으로도 호랑이의 힘으로도 칠 하다가 칠하다가 아무래도 힘이 모자라 다 못 칠하고 그대로 남겨 놓은 것이다. 내벽(內壁) 서쪽의 맨 위쯤 앉아 참선하고 있는 선사(禪師), 선사 옆 아무 것도 칠하지 못하고 너무나 휑하니 비워둔 미완성의 공백을 가 보아라.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대웅보전을 지어놓고 마지막으로 단청사(丹靑師)를 찾고 있을 때, 어떤 헤어스럼제 성명도 모르는 한 나그네가 서로부터 와서 이 단청을 맡아 겉을 다 칠하고 보전 안으로 들어갔는데, 문고리를 안으로 단단히 걸어 잠그며 말했었다. “내가 다 칠해 끝내고 나올 때까지는 누구도 절대로 들여다보지 마라.” 그런데 일에 폐는 속(俗)에서나 절간에서나 언제나 방정맞은 사람이 끼치는 것이다. 어느 방정맞은 중 하나가 그만 못 참아 어느 때 슬그머니 다가가서 뚫어진 창구멍 사이로 그 속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나그네는 안 보이고 이쁜 새 한 마리가 천장을 파닥거리고 날아다니면서 부리에 문 붓으로 제 몸에서 나는 물감을 묻혀 곱게 곱게 단청(丹靑)해 나가고 있었는데, 들여다보는 사람 기척에 “아앙!” 소리치며 떨어져 내려 마루바닥에 납작 사지를 뻗고 늘어지는 걸 보니 그건 커다란 한 마리 불 호랑이었다. “대호(大虎) 스님! (大虎) 스님! 어서 일어나시겨라우!” 중들은 이곳 사투리로 그 호랑이를 동문(同門) 대우를 해서 불러댔지만 영 그만이어서 할 수 없이 그럼 내생(來生)에나 소생(蘇生)하라고 이 절 이름을 내소사(來蘇寺)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 단청(丹靑)하다가 미처 다 못한 그 빈 공백을 향해 벌써 여러 백년의 아침과 저녁마다 절하고 또 절하고 내려오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내소사의 제일가는 아름다움은 내소사 대웅보전의 정면 3칸 여덟 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일 것이다. 연꽃과 국화꽃이 가득 수 놓여 진 문짝은 말 그대로 화사한 꽃밭을 연상시키며 원래는 형형색색으로 채색되어 있었을 그 꽃살문이 나무 결로만 남아있는 것이 오히려 더 아련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한곳 한곳을 지극한 정성으로 파고 새긴 옛 사람들의 불심에 새삼 고개 숙여지는 이 문살의 꽃무늬는 간살 위에 떠 있으므로 법당 안에서 보면 꽃무늬 그림자가 보이지 않은 채 단정한 마름모꼴 그림자만이 보일 뿐이다.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 마치 가물 현(玄)자의 의미처럼 가물가물한 그 아름다움을 보는 듯하다.
2024년 7월 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