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1968년부터 군 사목에 종사하고 있는 군종 사제를 비롯하여 군인 성당, 국군 장병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물질적으로 돕고자 해마다 10월 첫 주일을 ‘군인 주일’로 지내 왔으며, 2023년부터는 10월 둘째 주일에 지내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22년 추계 정기 총회).
오늘 전국 각 본당에서는 군의 복음화를 위한 특별 헌금을 봉헌한다.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제1독서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의 집안이다.>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1-7
1 내 친구를 위하여 나는 노래하리라,
내 애인이 자기 포도밭을 두고 부른 노래를.
내 친구에게는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이 하나 있었네.
2 땅을 일구고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네.
그 가운데에 탑을 세우고 포도 확도 만들었네.
그러고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들포도를 맺었다네.
3 자 이제, 예루살렘 주민들아, 유다 사람들아
나와 내 포도밭 사이에 시비를 가려 다오!
4 내 포도밭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더 해야 했더란 말이냐?
내가 해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바랐는데 어찌하여 들포도를 맺었느냐?
5 이제 내가 내 포도밭에 무슨 일을 하려는지 너희에게 알려 주리라.
울타리를 걷어치워 뜯어 먹히게 하고 담을 허물어 짓밟히게 하리라.
6 그것을 황폐하게 내버려 두어
가지치기도 못 하고 김매기도 못 하게 하여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올라오게 하리라.
또 구름에게 명령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7 만군의 주님의 포도밭은 이스라엘 집안이요
유다 사람들은 그분께서 좋아하시는 나무라네.
그분께서는 공정을 바라셨는데 피 흘림이 웬 말이냐?
정의를 바라셨는데 울부짖음이 웬 말이냐?
제2독서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4,6-9
형제 여러분, 6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7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8 끝으로, 형제 여러분, 참된 것과 고귀한 것과 의로운 것과
정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은 무엇이든지,
또 덕이 되는 것과 칭송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9 그리고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을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
복음
<주인은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33-43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34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35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36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37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38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39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40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41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은 감사하는 이만 파견한다
이탈리아 카시아에서 성체 기적이 있었습니다. 성체가 종이에 피로 변해서 스며든 것입니다. 그 종이는 감실에 모셔져 있습니다. 감실은 하느님 나라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성체가 그 사람 안에 살아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이가 아니기에 성체를 모셔도 그분을 우리 안에서 죽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그렇습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주인의 외아들을 죽였습니다. 만약 우리도 못된 소작인들처럼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바치지 않으면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그렇게 죽이게 됩니다. 소출의 일부를 바치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주인이 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두 주인을 모실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자기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면 아무리 성체를 영해도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살아계실 수 없습니다.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에서 자기 원수 같은 후배 직장 상사와 바람을 피우는 아내에게 주인공 남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랬니? 너 지석이 엄마잖아. 애 엄마잖아. 너 그 새끼랑 바람피운 순간 너 나한테 사망선고 내린 거야. 박동훈 넌 그런 대접 받아도 싼 인간이라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그냥 죽어버리라고.”
아내는 남편에게 파견받습니다. 자녀를 잘 키우라고. 물론 파견할 때 그 능력도 함께 받습니다. 남편은 밖에서 돈을 벌어 아내에게 다 가져다줍니다. 파견받음은 나의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그 파견을 거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생각해 봅시다. 그물은 어부에게 파견받습니다. 그래서 그물이 조금이라도 뜯어지면 어부는 고이 손질합니다. 물고기가 거기로 빠져나갈 수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그물이 자신에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파견받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그러나 그 파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법이 있습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감사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흐를 수 없게 합니다. 그러면 사랑해도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돈을 벌어다 주며 파견하는 남편에게 사형선고 내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구약과 신약에서 다 하느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먼저 에덴동산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땅 소출의 일부, 곧 선악과를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라고 파견받을 수 없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걸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파라오의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소출의 일부를 받아오라고 보낸 주인의 외아드님도 죽였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주님께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결국 서로를 사랑할 능력도 잃고 주님의 것이 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일본 작가 ‘오에겐 자부로’의 『사육』에 그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한 일본 산골 마을에 미군 비행기가 추락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와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묶어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년은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는 덫을 풀어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어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입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소년의 아버지가 휘두른 도끼에 맞아 죽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감사의 선악과를 봉헌하지 않으며 그렇게 주님을 내 안에 인질로 잡아놓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이와 같습니다.
아기 돼지가 엄마를 잃었습니다. 오갈 데 없는 돼지의 엄마가 되기 위해 코끼리 아줌마가 엄마로 불러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기 돼지는 코가 긴 코끼리 아줌마를 엄마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 코끼리 아줌마는 자기 코를 잘라 돼지코로 만들었습니다. 아기 돼지는 피가 뚝뚝 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자기 모습과 같은 아줌마를 엄마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기 돼지가 엄마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랑하며 파견하신 분께 감사의 봉헌을 조금이라도 드릴 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마크 배터슨(Mark Batterson)이 쓴 ‘올 인(All In)’이라는 책에는 선교사 밀른(A.W.Milne)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제도의 원주민들이 사는 곳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사실 이곳은 원주민들이 앞서 파견했던 선교사 모두를 살해했던 곳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떠난 것입니다. 그에게는 주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혀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이미 죽었다면서 자기 관을 싸 들고 갔다고 합니다. 결과는 35년 동안 원주민에게 살해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함께 잘 살았습니다.
35년의 삶을 마치고 주님 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 후, 원주민들은 그를 마을 한가운데에 묻고 다음과 같은 비문을 남겼습니다.
‘그가 왔을 때 빛이 없었다. 그가 떠났을 때 어둠이 없었다.’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은 세상에 주님의 빛을 비추고 있느냐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사랑의 대상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한다면, 또 미워하고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면 빛이 아닌 어둠을 더 넓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선교사 밀른(A.W.Milne)의 35년 삶을 평가한 원주민들의 평가를 보며, 나의 삶을 모두 마치고 나서는 하느님께서 어떤 평가를 하실까를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나의 삶이 후회되지 않는 삶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못된 포도밭 소작인들의 비유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맡겼지만, 소출을 주인에게 주지 않습니다. 소출을 받으러 온 종을 매질하고 또 죽이기까지 합니다. 더 많은 종을 보내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자기 아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없으면 상속 재산을 차지할 수 있다면서 죽여버립니다.
이렇게 위험한 곳에 아들을 보내는 부모가 있을까요? 그리고 부모의 명령이라고 위험한 곳이라도 기꺼이 가는 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포도밭 주인도 또 그의 아들 역시 사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맡기셨지만, 그들은 하느님의 계획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을 잡아 죽였지요. 심지어 외아들이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만듭니다. 결국 소작인인 임금들과 사제들과 원로들을 내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밭을 맡기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뜻에 맞게 이 포도밭을 가꾸고 있나요? 혹시 자기 욕심만을 채우려는 생각에 주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못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랐던 외아들 예수님처럼, 우리도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순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이신 주님께 인정받습니다.
오늘의 명언: 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공자).
사진설명: 오늘은 군인주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