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출소, 지구대, 다시 파출소
사라진 거리의 풍경이 어디 하나 둘인가. 팽팽 돌아가는 변화의 속도 앞에선 봐도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무엇이든 자세히 보아야 비로소 보인다. 찬찬히 둘러보니 동네마다 있었던 파출소가 보이지 않는다. 기억 속의 파출소는 대개 성냥갑처럼 보이는 작은 독립건물이기 십상이다. 조각 타일을 붙여 외관을 치장했고 출입문 위엔 경찰의 독수리 마크가 선명했다. 창문엔 간혹 철창살을 덧붙여 놓은 곳도 있어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못 나올 분위기도 연출했다. 이런 곳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악법이라도 지키는 선량한 시민임이 분명하다.
어릴 적 어머니는 내가 울 때마다 "순사가 잡아가니 뚝!" 하고 을렀다. 뜻도 모르는 '순사'의 위력은 대단했다. 눈치를 보니 순사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사람인 줄 알겠다. 알아서 울음을 멈추는 게 착한 아이의 도리 아니던가. 할아버지는 생전에 어린 손자를 앉혀놓고 "고반소(파출소를 뜻하는 일본어) 들어갈 일을 벌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순사와 고반소, 이들은 만나서 좋을 것 없고 들어가서 즐겁지 않은 대상이 분명했다.
돌이켜보니 당시 어머니는 스물 다섯 남짓, 할아버지는 오십을 조금 넘긴 나이였다. 그야말로 애가 애를 낳았고 젊은 할아버지였던 셈이다. 일제 치하에서 어린 시절과 청년기를 보냈을 뿐인 어머니와 할아버지다. 도대체 순사와 고반소는 무슨 짓을 벌였고 어떤 곳일까. 해방 이후 20여 년이 흐른 뒤에도 악몽을 떠올리는 소시민의 공포는 여전했다. 나의 가족사에 머무르지 않는 일제의 공포정치 후유증은 생각보다 깊고 넓다.
달갑지 않은 순사의 기억은 당연했다. 일제의 경찰제도는 식민지 탄압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초기 경찰의 우두머리인 경무총장은 헌병사령관 몫으로 돌아갔다. 지방 각 도의 경무부장 또한 헌병대장이 맡게 된다. 처음부터 경찰의 기능은 오로지 우리나라 강점을 위한 침략수단이었을 뿐이다.
헌병과 경찰의 통합제도는 꽤 오랫동안 유지된다. 일제는 무단정치를 펴 나가며 헌병경찰의 관할구역과 근무방법을 조율해 나갔다. 경찰관 수를 늘렸고 관할구역을 세분화시켰음은 물론이다. 당시 폭력과 억압을 일삼았던 헌병경찰의 위세가 상상된다. 학교 선생들도 제복에 칼을 차고 다녔던 시절 일반 백성이 제일 겁내는 순사의 위용은 얼마나 당당했을까. 긴 칼 휘두르며 이 땅에서 군림했던 오만방자한 일본의 하급경찰들은 그야말로 신났을 것이다.
3·1운동을 계기로 무력만을 앞세운 통치 한계는 문화정치로 돌파구를 찾는다. 새 조선총독이 된 사이토 마코토(齊藤實)는 '문화의 발달과 민력(民力)의 충실'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경찰 부문은 종전의 헌병경찰을 보통경찰로 바꾸어 억압적 분위기를 완화시켰다. 그러나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보통경찰의 수는 배로 늘렸고 헌병제도는 교묘하게 경찰과 밀착했다. 이유는 뻔하다. 독립운동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의 수법이었을 뿐이니.
식민지 백성들이 우선 마주치게 되는 순사와의 악연을 피할 도리가 없다. 사사건건 참견하고 감시의 눈을 부라리는 순사에게 좋은 감정이 남아있을까. 기세등등한 순사가 휘두르는 몽둥이와 패검의 위협은 잔혹했다. 힘 없는 식민지 백성이 맞설 방법이란 소극적 반항과 항거의 몸짓이 전부 아니던가. 마주치지 말고 잡혀갈 짓을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불법비디오도 순사만큼은 못했다. 꿋꿋하게 살아내 내일을 맞을 민초들의 희망은 이십여 년이 더 지난 뒤에야 찾아왔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대학가는 연일 시끄러웠다.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았던 탓이다. 77학번인 나는 정규 수업일수를 채워본 적이 없다. 최루탄 연기가 뽀얀 교정은 연일 독재타도의 함성과 진압경찰의 대치로 휴강일수는 늘어만 갔다. 제대로 수업을 받아보지 못한 우리 학번 동기들은 선배들의 의식화 교육을 더 쉽게 받아들였다. 강의실 대신 지하의 선술집과 친구들의 하숙방을 전전할 수밖에.
그날도 종로2가 뒷골목 순댓국집에서 시국을 걱정하는 젊은 혈기는 뜨거웠다. 독재 타도의 방법을 토의했고 화염병 제조 기술을 공유했다. 내 목숨 하나 바쳐 민주화가 이루어진다면 기꺼이 데모대의 앞장에 설 귀여운 각오도 다졌다. 순간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술자리에 있던 일행 여섯 명은 영문도 모른 채 파출소로 연행당했다.
종로경찰서 부근의 파출소였을 것이다. 연행해간 경찰은 대뜸 "이 빨갱이 새끼들"을 외쳤고 파출소 한쪽에 우리들을 무릎 꿇려 앉혔다. 연행의 이유를 안 것은 취조의 순간이었다.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순댓국집 주인의 신고 때문이다. 졸지에 불온분자들이 된 일행은 뜨악했다. 쓰발! 술자리 대화까지 미주알고주알 귀담아 챙겨 듣는 오지랖 넓은 인간들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
처음 파출소에 끌려간 일은 큰 사건이다. 먹은 술이 단박에 깼음은 물론이다. 덜컥 겁이 났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갈 일을 만들지 말라던 '고반소'에 내가 있다. 중년의 파출소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담당 순경은 대뜸 주사파(NL)인지 민중파(PL) 계열인지를 물었다.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난 NL도 PL도 아닌 피 끓는 청년이었을 뿐이었으므로.
우리 일행은 바로 종로경찰서로 옮겨졌다. 시국 담당 형사의 취조는 한 명씩 이루어졌다. 창문도 없는 한 평 남짓의 작은 취조실에 들어선 순간 온몸의 털이 쭈뼛하게 섰다. 빛바랜 회벽의 벽면엔 군데군데 네 줄의 핏자국이 보였다. 피 묻은 손가락으로 벽면을 짚은 흔적이다. 방 가운데엔 철제 책상이 놓여있고 양 옆엔 접이식 의자 두 개가 놓여져 있다. 방안을 비추는 60W 백열전구의 불빛은 침침했고 간간이 흔들렸다. 없는 죄도 지어 불어 낼 만큼 기괴스럽고 공포 넘치는 분위기는 여전히 또렷하다.
담당 형사가 방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공포에 질려 의자에 앉아있는 내게 아무 말 없이 뺨을 갈겼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진 주먹세례는 영원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평생 이 정도 많이 맞아본 적은 없다. 이어 물었던 형사의 질문은 간단했다. "개새끼, 배후가 누구야?" 아무리 캐도 배후가 있을 턱없는 나는 하룻밤을 새우고 풀려났다.
'경찰서 근처는 다시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은 바로 무너졌다. 전투경찰이 되어 강남경찰서에 배속되었기 때문이다. 모두 연애 탓이다. 희망하는 근무지 배속과 외출·외박이 쉽다는 유혹은 강렬했다. 7.9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자원입대한 결과는 만족이다. 서울에서 군 생활을 마칠 수 있었고 짬짬이 이어간 여자와의 데이트는 결혼으로 이어졌으니.
전투경찰 신분으로 경찰관의 보조 근무를 하게 된다. 1970년대 말 강남 일대의 파출소 풍경이 선하게 떠오른다. 경위 계급의 파출소장 아래 대여섯 명의 경찰관들이 배속된다. 동네를 돌며 순찰했고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민원전화를 받아야 했다. 애써 달려 가보면 때론 거짓 신고에 허탕을 쳤고 애꿎은 화풀이를 경찰관에게 하는 이도 있었다.
한낮의 파출소란 대개 한가한 모습으로 비치기 일쑤다. 길을 묻는 사람들이나 화장실이 급해 파출소를 찾는 이들이 드나든다. 행정 처리를 하는 말단 순경의 독수리 타법 타이핑 소리만이 좁은 파출소를 채우는 경우도 있다. 본서의 행정명령을 수령하기 위해 출동하는 125㏄ 대림 오토바이의 모습도 보인다.
밤이 되면 파출소 안은 시끌벅적해진다. 10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버글거리는 서울에서 무슨 일인들 일어나지 않을까. 부부싸움이 격해져 여전히 머리채를 쥐어 잡고 흔드는 아줌마에서부터 술 취한 취객의 도 넘은 주정까지. 밤 12시가 넘으면 통행금지에 걸린 이들로 북적였다. 파출소엔 온갖 군상들이 각자의 사연과 사건을 풀어 놓아 풍성하다. 속이 문드러진 '민중의 지팡이' 경찰관들은 지치지도 않고 이들을 상대한다.
파출소에 끌려온 사람 치고 큰소리 치지 않는 사람 보지 못했다. 자신은 정당했고 잘못한 일이 없으며 민원을 처리하는 경찰관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범법행위로 들어온 이들의 하나같이 공통적인 뻥이 있다. "야!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전화 한 통화면 니들은 전부 모가지야, 전화 좀 줘봐…."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전화 한 통화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윗분의 정체란 과연 무엇일까.
경찰의 치안수요는 언제나 넘친다. 경찰조직이 바뀌어 지구대로 흡수된 파출소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지금 볼 수 있는 파출소의 모습이란 얼마나 든든한가. 순사가 순경으로, 추레한 건물이 현대식 시설의 멋진 건물로 바뀌었다. '민중의 지팡이'를 자처한 경찰은 문턱을 더 낮추어 만화가 이현세가 만들어낸 포돌이 포순이 캐릭터로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렇게 훌륭한 아이디어를 낸 인물은 경찰청장을 지낸 김석기다. 백성에게 군림했던 순사의 이미지는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요즘의 경찰은 시민들에게 맞기도 한다. 때리는 경찰에서 맞는 경찰로 바뀐 변화만 보자면 환골탈태의 진심을 믿을 만도 하다. 이 말을 내게 들려준 이가 바로 김석기 전 경찰청장이다. 나도 큰소리 한번 쳐봐야겠다. 내가 누군 줄 알아? 경찰청장을 전투경찰 선배로 둔 사람이라고….
윤광준 글쓰는 사진가
첫댓글 하하하 재밌네요 글 쓴분이 폴리스에 대해 잘 아는분이군요 저도 감회가 새롭습니다 저도 폴리스 출신 입니다 32년 봉직하고 퇴직 하였습니다 정의사회구현 국법질서확립 완벽치안실현 민중의 지팡이 최선을 다하는 친절봉사 사명감에 불타는 수도 경찰 범죄 없는 사회 만들기 사회악 일소 범죄와의 전쟁 조폭 일제 검거 등등 퇴직한지 벌써 14년이 지났네요 한번 경찰은 자랑스런 영원한 경찰이다 하하하ㅡ
오모낫
선배님..폴리스인지 몰랐습니다
좋은 직장 다니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