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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요한 묵시록의 말씀 10,8-11>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나 요한에게
8 말하였습니다.
“가서 바다와 땅을 디디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진 두루마리를 받아라.”
9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10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11 그때에,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하는 소리가 나에게 들려왔습니다.
✠ 복음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 19,45-48>
그때에
45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46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47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48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맨 먼저 찾아가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면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루카 19,46)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나의 집, 곧 당신의 집’으로 말씀하십니다.
곧 '성전'을 당신이 머무는 곳이요,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는 곳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성전을 당신과 만나고 대면하는 ‘기도의 집’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성전이 장사와 환전이 행해지는 불결하고 부정한 곳,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새롭게 정화하시는 일을 맨 먼저 하십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교회 개혁의 표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교회가 항상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을 드러내고, 주님의 생명과 사랑에 응답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쪼개시고, 성전의 장막을 두 갈래로 가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성전에 갇히지 않으시는 당신의 몸을 성전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하느님 현존의 성전이 되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잘 깨우쳐줍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1코린 3,16)
참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주신 거룩한 품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비록 질그릇 같은 깨지기 쉬운 몸이라 할지라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값진 보화를 간직한 거룩한 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현존하시며 활동하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안에 계시고 활동하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주님의 성전인 우리의 몸이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몸으로 그분의 영광을 드러냄이란 우리 몸을 잘 보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몸을 다른 이들을 위해 내어주는 데 있습니다.
이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 12,1)
그렇습니다.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때, 곧 우리 자신을 타인과 세상을 위해 내어놓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우리 자신은 ‘기도의 집’이 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루카 19,46)
주님!
기도하게 하소서.
제 행실이 당신의 성전임을 증거 하게 하시고, 제 몸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제 영혼이 언제나 당신이 머무는 당신의 집이 되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따로 또 같이 하느님을 만나는 곳>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어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고 눈물을 흘리신 주님께서 오늘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정화는 빗자루 들고 청소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곳에서 장사하던 자들을 과격하게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느님의 집이어야 할 성전을 자기들의 집으로 만들고, 기도하는 곳이어야 할 성전을 그들이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느님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전이 우리가 모이는 곳 곧 집회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하느님 없이 우리만 모인다면 성전이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고 만나야 하지만 성전은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특전적인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없는 우리끼리 만남은 있을 수 없고, 반드시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만남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따로 또 같이’ 입니다.
먼저 성전은 따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어야 하는데, 따로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 자기 집이나 한적한 곳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우리가 하느님을 성전에서 따로 만나야 할 이유는 성체조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개신교와 달리 성당인 이유는 성체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고, 이것이 우리가 교회라는 명칭보다 성당이라는 명칭을 고집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성체조배 모습을 우리의 성당에서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의 내밀한 친교요 기도인 성체조배 없이 어떻게 가톨릭 신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문이고 걱정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성전에서 함께 하느님을 만납니다.
함께 하느님을 만나는 곳을 교회라고도 하고 성당이라고도 하는 거지요.
사실 성전이 있어야 할 더 큰 이유는 함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성체조배 이외에 혼자 하느님을 만나는 곳은 골방으로도 되지만, 함께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로서의 성전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란 모임 곧 교우들의 모임이고, 성전은 교우들의 모임 장소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뿔뿔이 흩어진 양들을 하느님 목장으로 모으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성전은 이 하느님의 목장이요 하느님의 우리인 셈입니다.
이곳에서 주님 중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친교가 이뤄지고, 함께 하느님을 찬미하는 기쁨을 우리가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임에는 계 모임도 있고, 동호회 모임도 있습니다.
계 모임 장소는 식당일 것이고 동호회 모임은 등산의 경우 산이고, 조기 축구의 경우는 운동장일 겁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모임이 이 계 모임이나 동호회 모임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친교가 이뤄지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지, 하느님을 함께 찬미하는 기쁨이 세속 합창단의 기쁨보다 더 기쁜지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 작은형제회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을 지킵시다>
태국의 왕궁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은 관광객에 떠밀려 겉모양을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화려한 수공예 작품으로 꾸며진 왕궁을 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며 존중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짧은 치마를 입은 사람은 무릎 밑으로 내리는 긴치마를 빌려 입어야 하고 슬리퍼를 신은 사람은 다른 신으로 갈아 신어야 할 정도로 국왕에 대한 예의를 챙겼습니다.
왕궁의 곳곳에 그려진 벽화는 규모나 섬세함이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벽화를 복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인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들락거려 소란스러운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온갖 정성을 들여 붓을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몇몇 한국인들이 눈에 뜨여 아주 반가웠습니다.
한국사람은 사원이나 왕궁 등 역사적인 장소를 찾기보다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을 즐겨 찾는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들이 달리 보였습니다.
국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왕궁은 보호되겠지만, 관광객으로 넘쳐 나는 왕궁은 아마도 돈벌이의 장소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잘 포장된 과일바구니를 봉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봉헌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기가 무섭게 바구니는 치워지며, 이미 판매되었던 과일 바구니를 다시 판매하는 모습을 보면서 봉헌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왕궁의 덕분으로 백성이 사는구나 하는 마음입니다.
모쪼록 왕궁이 돈벌이의 장소가 되지 않고 백성을 살리는 곳, 곧 기도의 집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가끔은 마음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 마음에 끌리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상충할 때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고민이 됩니다.
마땅히 주님을 따라야 함에도 말입니다.
육적인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면 몸은 고달플지라도 마음의 자유를 누립니다.
그러나 육적인 욕망을 따르면 당장은 즐겁고 기쁘지만, 주님을 따르지 못한 안타까움에 마음이 걸립니다.
사실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 마음이 강도의 소굴입니다.
우리의 몸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았고, 하느님의 숨을 받았으며, 주님을 모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몸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상태가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루의 끝맺음에 늘 “허물로 누벼놓은 이 날 하루를 주님의 자비로 지켜주소서.” 하고 기도를 하지만, 일관된 마음으로 주님을 따르기엔 여전히 힘에 겹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혀에 감미로운 자는 기도의 집이요, 육의 욕망을 따르는 자는 강도의 소굴이거늘,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없애 버릴 방도를 모색하였습니다.
설사 그들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진리 안에 자유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끝내 ‘강도의 소굴’을 ‘기도의 집’으로 회복시키지 못한 채 죽음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오늘도 여전히 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기도의 집을 복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신 것은 성전은 이익을 남기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을 예배하고 사람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장터였다면 그들을 쫓아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밑지고 파는 장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은 당연히 이익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셈을 하고 이권이 살아있는 곳이 세상입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성물방이나 카페가 물질적 이익의 창구가 된다면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우리 삶의 자리는 주님을 모시는 성전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을 잘 지킬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일 먼저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이권과 체면을 지키려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예수님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함께 하는 행복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지킵시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내덕동 주교좌 성당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힘들이지 않고 기도 오래 할 수 있으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 19,46)
성전은 분명 ‘기도하는 집’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오늘은 어떻게 우리 내적 성전에서 기도가 충만해질 수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어떤 분들은 사는 게 기도이니 특별히 기도 시간을 낼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아무리 기도하려고 해도 내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가 있다면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됩니다.
예수님도 이런 욕구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새벽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먼저 내가 기도의 집이 되려면 우선 기도를 오래 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쇠붙이가 자석에 오래 붙어 있어야 자기에게도 자성이 생깁니다.
쇠를 풀무 불에 잠깐 넣었다 빼면 속까지 뜨거워지지는 않습니다.
기도가 오래 가 결국 모든 삶이 기도가 되면 그제야 삶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로 한 시간을 합니다.
그래도 어떤 때는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런데 이전의 기도를 생각해보니 내가 하느님의 뜻을 묻는 기도가 아닌 내 뜻을 하느님이 아시게 하는 기도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들을 청하면 기도가 길어질 수 없습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졌는데 어떤 신자분이 저를 붙잡았습니다.
굉장히 외로운 삶을 사시는 할머니셨습니다.
저와 면담하자며 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성당 직원분은 신부님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면담할 시간은 안 될 것이라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꾸리아 강복을 주고 점심에 맞춰 올라오는데 그 자매님이 저를 잡았습니다.
면담하고 싶은데 점심을 드셔야 해서 안 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보아하니 특별한 내용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을 해 보시라고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간으로 치자면 10분도 안 되었습니다.
저는 알고 있었습니다.
잘 들어주기만 하면 오래 당신 말씀을 하지 못하실 것을.
고해성사에 들어오셔서 1.4 후퇴서부터 말씀을 시작하셔도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오래 하지 못하십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면 이렇게 금방 지칩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여섯 아이를 키우는 부모와 자녀 간의 회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머니가 말하고자 하는 것, 거짓말 안 하기, 음식물 방으로 가져가지 않기, 형제간의 서열 지키기 등 몇 마디 하니 회의가 끝났습니다.
하지만 금쪽 처방받고는 오래 회의가 지속되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들으려 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지 눈치를 보며 아주 천천히 말합니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는 데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마음을 받아들이자 오랜 대화가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 그리고 형제들 간에도.
기도를 오래 하려면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집중하면 됩니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수학자처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이미 다 아시고 계신다고 가정하고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그 한마디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아무리 길어져도 지치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 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발표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기적과 같은 결과였습니다.
이들이 무사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히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상대의 희망에 내 희망을 걸 때 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기도는 그래서 깊어질수록 말하는 것에서 듣는 것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오래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해서 자신이 먼저 제사를 지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왕위에서 쫓아내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까지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동안 내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사람이 되도록 나의 뜻을 봉헌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의 구체적인 뜻을 알아듣지 못해도 주님의 기도만 바쳐도 굉장히 유익합니다.
내가 이야기하면 금방 끝납니다.
하지만 상대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하면 밤을 새워도 모자랍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섀클턴을 기다렸던 선원들이 기다리던 나를 살리는 한마디여야 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빨리 무너지고 재건되어야 할 교회의 모습>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오늘 너희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는 예수님의 경고 말씀이 오늘 제게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 여파로 사무실 직원도 없다 보니, 피정 신청 전화도 직접 받습니다.
씁쓸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제가 먼저 ‘누굽니다’ 라고 밝히지 않은 잘못도 있지만, 전반적인 통화 분위기가 아랫사람 다루는 듯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저런 사무실 직원들, 감정 노동자들의 기분과 마음이 어떠할지 생생히 체험할 때도 있습니다.
피정 비용이 큰 관심사다 보니 정확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최근 물가상승을 고려해서 1박 2일 세 끼 얼마고 2박 3일 여섯 끼 얼마입니다.”
그런 안내에 깜짝 놀라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래서 또다시 곰곰이 성찰을 하게 됩니다.
‘그래 누군가에게는 그 돈이 얼마나 큰 돈인데.’, 하는 생각에 즉시 꼬리를 내리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그렇죠. 너무 비싸죠?
요즘 유류비, 식자재비 폭등으로 저희도 어쩔 수 없이 가격을 인상했답니다.
그렇지만 부담스러우시면 내실 수 있는 만큼만 내시면 됩니다.”
“저희 피정 센터 절대 저희 소유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집이고, 하느님 백성의 집입니다.
특히 가난한 분들의 집입니다.
비용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 편히 오시기 바랍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태도는 사뭇 의아합니다.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보통 사람들의 처신과는 크게 차별화됩니다.
당시 제한적이었지만 세속의 권력자였던 헤로데 왕궁을 찾아가지도 않으십니다.
빌라도 총독과의 면담 스케줄도 잡지 않으십니다.
가장 먼저 보여주신 행동은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성소요 하느님을 찬양하는 기도의 장소였던 성전은 당시 완전히 본질을 망각한 채 크게 타락해있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세속화의 극치를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막대한 권리금을 상인들로부터 받고 성전 마당에서 이런 저런 물건들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상인들은 성전 마당에 가판대를 쭉 늘어놓고 큰 목소리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환전상들도 이에 뒤질세라 여기저기서 말도 안 되는 시세로 돈을 바꿔주고 있었습니다.
경건하고 거룩해야 할 성전은 시끌벅적, 티격태격, 옥신각신, 바글바글...
마치도 재래시장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우스꽝스런 성전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평소와는 다르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그저 분노에 그치지 않습니다.
밧줄로 채찍을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 죽치고 있던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내리치시며 밖으로 쫒아내십니다.
이어서 던지신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뼈아프게 들려옵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루카복음 19장 46절)
오늘 우리 교회의 내면을 들여다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의 호된 채찍질을 피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오늘 우리 교회 역시 크게 한번 정화와 쇄신이 필요한 상황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입니다. 저는 하느님 크신 자비 없이 단 한순간도 홀로 설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겸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여기서 나 보다 더 잘 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라고 외쳐대는 교만이 판을 치는 교회는 심각한 쇄신이 필요한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애지중지하셨던 중죄인들, 극빈자들, 상처 입은 자들, 중환자들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정도로 문턱이 높은 교회는 지금 당장 정화가 필요한 교회입니다.
구성원 간의 격의 없고 활발한 소통의 문화가 사라진 교회, 일방통행식, 일인독재식의 전근대적인 공동체 문화가 아직도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는 낡은 교회는 빨리 무너져야 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시대 또 다른 예수님의 고통스런 절규에 귀를 막고 그들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면서 우리끼리 높디높은 담벼락을 쌓고 그 안에서 화사하게 웃으면서 지내는 무늬만 성전인 그런 교회는 첫 번째 정화의 대상입니다.
- 살레시오회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을 정화하시다.>
오늘 복음에서 ‘강도들의 소굴’이라는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요한 10,1)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요한 10,10)
예수님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려고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분입니다(요한 10,15).
그러나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고 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종교가 타락해서 ‘나쁜 권력’으로 변질되고, 목자 직무를 맡은 자들이 ‘도둑이며 강도’로 전락한 일은 구약시대 때부터 있었던 일이고, 우리 교회의 역사에서도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고 큰소리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에 대해서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신 뒤에,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 완전히 근절되었을까?
‘강도들의 소굴’로 변했던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 복구되었을까?
실제 상황을 보면,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일이 근절되지도 않았고, 성전이 ‘기도의 집’으로 복구되지도 않았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 일은 그냥 일회성 사건으로 끝난 일입니다.
(장사꾼들과 사제들의 화만 북돋은 일이 되었습니다.)
사실 물건을 파는 이들을 성전에서 쫓아내는 일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탐욕을 없애는 일이 근본적인 해결책입니다.
탐욕을 없애는 방법은 회개밖에 없습니다.
회개는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단순히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못하게 막으신 일이 아니라 회개하라는 가르침이고,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성전 정화’는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한 자들에게는 ‘성전 정화 사건’은 어쩌다가 우발적으로 한 번 일어난 일회성 사건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 뒤에도 여전히 성전에서 장사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탐욕에 사로잡혀서 마음을 닫고, 눈과 귀를 막고 있었던 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억지로 시킬 수는 없습니다.
새롭게 변화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성전 정화’에 대해서 이런 의문도 생깁니다.
“물건을 파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물건을 사는 이들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성전에서 물건을 파는 일만 막을 것이 아니라 사는 일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사꾼들만 쫓아낼 것이 아니라 ‘사는 이들’도 쫓아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성전에서 물건을 사는 이들은 피해자일까? 공범일까?”
‘사는 이들’ 가운데에는 ‘파는 이들’과 한통속인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민들은 종교 권력의 위세에 눌려서,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아주 비싼 값으로 그 물건들을 사야만 했던 피해자들이었습니다.
사실 가장 큰 피해자는 하느님이십니다.
‘성전에서 파는 물건들’은 모두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용 물품들이었는데,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그것을 팔면서도, 이익금을 하느님께 바치지 않고 자기들이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환전상들은 외국 돈을 이스라엘 돈으로 바꿔주는 일을 했는데, 그것도 역시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금 준비를 돕기 위해서’ 라는 명목이었지만, 이익금은 하느님께 바치지 않고 자기들이 차지했습니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는 말은 그들이 회개하기는커녕, 회개하라고 가르치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고, 어떻게 죽여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 그 방법을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 자체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그들의 권위에 치명상을 입힌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방도를 찾지 못하였다.” 라는 말은 백성의 여론을 자기들 편으로 만들 방법을 찾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득권층 사람들은 하느님은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의 여론만 두려워한 자들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여론을 따른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온 백성이(대부분의 서민들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또 백성들은 종교 권력의 동조자나 추종자들이 아니라 피해자였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에서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연상됩니다.
대부분의 백성이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지지한 것은 사제들과 장사꾼들이 결탁해서 ‘기도의 집’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음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들 자신들은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지만, 백성들은 그 일이 명백하게 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 전주교구 금암동성당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성전 정화 - 날마다, 기도와 말씀, 그리고 성사의 수행으로>
제 주변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성인처럼 사는 아름다운 분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저는 주저함 없이 성인이, 성녀가 되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습니다.
어제는 이렇게 성녀처럼 사시는 분이 부탁대로 제 졸저 두 종류의 책을 수도원 피정집에 비치할 수 있도록 충분히 제본해다 주었고, 또 한 권의 책도 제본을 부탁했습니다.
모두가 사제생활 초창기 90년대 전후에 썼던 강론집에서 좋은 부분을 발췌하여 좋은 분들이 협력하여 내 준 책들로, 수도원 피정집 방마다 비치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습니다.
새삼 진리는 변함이 없이 늘 반짝이는 빛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0년 전 강론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된 책들인데 지금도 끊임없이 찾기에 제본을 실행한 것입니다.
기존의 책보다 책도, 글자도 커서 돋보기 없어도 볼 수 있어 너무 흡족한 마음에 어제는 하루 내내 행복했습니다.
책 세 권의 제목이 근본적 물음에 대한 답같아 잊혀지지 않습니다.
1.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2. “둥근 마음, 둥근 삶”
3.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
바로 다시 피정집에 비치할 책 제목들인데, 참 재미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이 ‘둥근 마음, 둥근 삶’에 ‘사랑밖엔 길이 없었네’가 되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지막 한 권의 책을 출판한다면 제목은 무조건 제 좌우명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로 하고 싶습니다.
정말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기 만 34년 하루하루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 것입니다.
이렇게 살다가 이렇게 죽을 것입니다.
정말 하루하루 삶을 단순히 집중하여 오늘 지금 여기를 살 때 환상이나 거품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삶입니다.
모두가 하루하루의 삶에 공감을 표하며 동의하곤 합니다.
예수님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충실했음을 봅니다.
루카 복음의 예수님 삶에 자주 나오는 말마디가 '날마다'입니다.
‘날마다 일용할 주십사’라는 주님의 기도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라는 말마디를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에도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희 두고 살라’는 말이 나옵니다.
제 좋아하는 기도문 중 ‘날마다’와 ‘하루하루’ 두 말마디가 들어 있는 대목을 소개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강론에도 얼마나 많이 인용했는지, 그러나 인용할 때 마다 새롭고 좋고 감동적입니다.
사실 고백성사 후 보속으로 이 두 기도문을 소리내어 읽게 하면 많은 분들이 읽는 도중 목이 메어 읽지를 못하는 경우도 수없이 목격했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순수하다는 증거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범한 일상에 한결같이 충실하는 것이 구원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예루살렘을 보시며 그 타락상에 우시던 예수님은 나약한 이상주의자가 아니었음이 오늘 삶의 현장에서 입증됩니다.
강렬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였음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마자 성전정화의 행동에 돌입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시어 물건을 파는 이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천둥같은,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자 세상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은,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해야 할 하느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말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이 속화되는 것보다 큰 재앙은 없을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구체적 성전정화를 실행하십니다.
본연의 말씀 가르치심에 전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이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의 수행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배움에 더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기도를 바치고 성사를 거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성전정화도 없을 것입니다.
보이는 성전만이 성전이 아니라 건물 성전의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전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한 몸 공동체의 성전, 그리고 하나하나 각자가 주님의 거룩한 성전이기도 하니 말그대로 성전의 삼중적 차원입니다.
바로 날마다의 말씀수행, 기도수행, 성사수행이 한결같이 동시에 이 세 차원의 성전을 정화하고 성화한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정화와 성화는 물론 우리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같은 존재가 됨으로 저절로 존재론적 복음 선포가 되어 세상을 날로 정화하고 성화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성전정화의 최선, 최상의 길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성사 수행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수행과 더불어 저절로 기도의 생활화, 회개의 생활화도 이뤄질 것이니 성전은 늘 깨끗하고 거룩할 것입니다.
이래서 성전에서의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 수행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적대적인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반응에는 아랑곳 없이 자신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십니다.
빛과 어둠처럼 인생에는 이런 어둠만이 있는 게 아니라 빛도 늘 우선함을 깨닫습니다.
민심은 천심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호하는 빛처럼 온 백성이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으니 적대자들도 어찌하지 못합니다.
세상은, 우리 인생은 빛과 어둠, 단맛과 쓴맛이 함께 합니다.
이런 현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평범한 일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바로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묵시록의 요한의 신비로운 영적체험이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작은 두루마리가 상징하는 바, 바로 말씀입니다.
요한이 말씀의 두루마리를 천사에게 선물로 받을 때 천사의 말입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요한이 천사의 손에서 작은 말씀의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니, 그것이 입에는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다 합니다.
이어 요한에게 주어지는 복음 선포의 명령입니다.
바로 단맛과 쓴맛,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인생이요 세상이요 이런 인생을, 세상을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임을 깨닫습니다.
말씀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시편의 화답송 고백도 위로와 힘이 됩니다.
“당신 말씀 제 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
달콤한 꿀맛같은 말씀맛이, 말씀의 힘이 인생 쓴맛을 상쇄하며 우리 모두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며 살게 합니다.
말씀을 모시고 말씀과 하나되어 산다해도 어둠과 쓴맛의 세상은 여전할 것이나, 우리는 파스카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으로 이들을 돌파해갈 것입니다.
결코 세상에 속화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이자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할 말씀의 힘,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자 주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세상을 정화하고 성화하는 세상의 소금으로,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성전으로 살게 합니다.
아멘.
-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
♠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전의 본래 모습을 봅니다.
"나의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루카 19,46)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 성전의 본질을 일깨우십니다.
성전이 거래와 잇권의 장이 되면서 그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은 물건 파는 이들을 쫓아내시는 거친 행동을 하시면서까지 성전의 성전다움을 되찾으려 하십니다.
이 일은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 그리고 백성의 지도자들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지금의 성전 모습은 그들의 기득권이나 재산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온 백성이 그분의 말씀을 듣느라고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카 19,48)
하지만 예수님을 참 예언자 또는 메시아로 여기는 백성들이 그분 곁에 머무르고 있으니 적대세력들은 예수님을 붙잡을 기회를 좀처럼 얻기 어렵습니다.
말씀이신 분 곁에 모여든 백성들을 관상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지요!
그분 입에서 흘러 나오는 진리의 가르침이 백성들의 영혼을 적시고 있습니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분께 집중하고 있는 이들은 온 존재로 듣는 중입니다.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와 백성들 안으로 스며들며 공유됩니다.
과연 그들 모두는 말씀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전이 성전다워집니다.
하느님의 거처인 기도의 집은 영혼들을 말씀으로 엮어 주는 안식처입니다.
성전이 이 본질을 지킬 때 세상 모든 사물도 자기 자리와 제 질서를 찾습니다.
피조물다움, 사람다움이 회복되는 것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요한 묵시록 저자의 놀라운 체험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묵시 10,10)
그는 천사가 명한 대로 두루마리를 받아 삼킵니다.
주님을, 말씀을 입으로 받아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입에는 달고 배는 쓰리게 합니다.
말씀은 힘 주어 전하는 이의 입을 즐겁게 하지만 육신은 고달프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묵시 10,11)
말씀을 받아 먹은 그는 예언자의 소명을 이어가야 합니다.
그동안 충실해 해온 대로 듣고 본 말씀을 받아 적고,이를 전하는 일입니다.
그는 말씀을 받아 먹은 이, 말씀을 품은 이, 말씀을 전달하는 이입니다.
이미 그 자신이 성전입니다.
그를 살게 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주님이신데, 그분이 곧 말씀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기도를 주님께 뭔가 졸라대고 간청하는 것으로 국한시켜 생각하지만, 기도는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듣고, 그분을 생각하고, 그분을 사랑하는 존재적 상태가 곧 기도입니다.
이처럼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이는 기도하는 사람이고, 성전입니다.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들으려 이곳을 찾으시는 벗님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주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관상하고 기도하는 동안, 우리의 성전다움이 차츰 회복됩니다.
그리고 그런 우리를 통해 공동체와 세상도 조금씩 더 자기다움을 회복해 가는 것이지요.
말씀이신 주님을 모시고 세파와 격랑을 헤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응원합니다.
함께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전이 되신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 작은형제회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의 묵상글
2014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에 참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많은 승객들이,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는데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차갑고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세월호 사고 8년이 지난 10월 29일 토요일 또 다시 슬픈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울 이태원에서 할로윈 축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부분이 20대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부모님들은 피우지 못하고 떨어진 꽃이 되어 버린 자식들을 또 다시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안전 불감증에 의한 사고였고, 안전조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더 큰 사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분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슬픔에 잠겨있는 유족들에게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하시어 위안을 얻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억울한 죽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노라.
너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에 관하여 다시 예언해야 한다.
나를 부르면 너희 기도를 들어 주고, 사로잡힌 너희를 모든 곳에서 데려오리라.”
성장과 발전도 필요하지만 정부는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서 제도를 만들어야 합니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인디언 할아버지와 손녀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 왜 우리의 마음은 착한 생각을 하기도 하고, 나쁜 생각을 하기도 해요?
아픈 친구를 보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 배고픈 친구를 보면 나눠주고 싶기도 해요.
그런데 나보다 예쁜 친구를 보면 샘이 나기도 하고, 좋은 걸 가지고 있는 친구를 보면 뺏고 싶기도 해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두 마리의 늑대를 키우고 있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와 나쁜 마음을 주는 검은 늑대란다."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겨요?"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말합니다.
"응, 그건 네가 먹이를 자주 주는 늑대가 힘이 세지기에 이긴단다.
착한 마음을 주는 파란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잘 돌보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두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하는 기도의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남의 걸 빼앗는 강도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디언 할아버지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2022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면 좋겠습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내 집은 기도의 집이 될 것이다."
- 미주가톨릭평화신문 사장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파리에 가보고 싶다는 분이 많습니다.
파리의 야경, 센강, 루브르 박물관, 에펠탑….
볼거리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파리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래 파리는 상하수도 시설이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왕궁에조차 제대로 된 화장실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길가에 아무 곳에서나 일을 보았습니다.
여성들의 치마가 펼쳐진 우산처럼 되어 있는 이유는 아무 데서나 일을 보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습니다.
양산을 들고 우아하게 서 있는 부인이 사실은 일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상하수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파리.
그래서 전염병이 시작되면 계속된 확진으로 언제 그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파리였지만, 나폴레옹 3세 황제 명령에 따라 대대적인 구조 개혁이 시작되면서 현재의 아름다운 파리가 완성되었습니다.
하긴 우리나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 어렸을 때만 해도 수세식 화장실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재래식 화장실 이용은 도저히 못할 정도가 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인데 우리 각자는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요?
좋은 쪽으로,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변화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 예수님의 폭력행위를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얼마나 화가 나셨으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셨던 분이 폭력을 쓰셨을까요?
기도하는 집이 아닌 장사하는 집이 되어 있었고, 사랑이 충만한 곳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향한 불의와 차별이 있는 강도들의 소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근본적으로 자기 죄를 숨기려고 합니다.
성전에서 죄를 짓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인정과 지지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었고,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된 말로써 백성을 속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군중은 예수님께로 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그들의 죄가 점점 환하게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처럼, 점점 그들의 죄가 확대되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변화를 위해서도 십자가를 피하지 않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죄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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