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제1독서 : 지혜 3,1-9
제2독서 : 로마 8,31ㄴ-39
복 음 : 루카 9,23-26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26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구원의 여정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103위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중 절정의 날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거의 1세기 동안 일만여 명이 순교하였으니 교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순교자 성월 9월에 맞이하는 한국 순교자 성인 대축일,
아마 주일이 아녔더라면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에서 오늘 의무기념미사를 봉헌할 것입니다.
이날이 되면 17년 전 2003년 잠시 미국 생존 수도원에 머물 때 축하받았던 일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이날은 독서기도 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서간이 영어로 낭독되었고,
한국 순교 성인들 기념 미사 후 여러 수도자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을 때
우리 순교성인들이 참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늘 입당송 성가는 아쉽게도 부르지 못했지만
영성 깊으신 시인 최민순 신부 작사에 이문근 신부 작곡의 두 대표적 성가가 생각납니다.
언제 불러도 감동적인 한국 순교 성인들을 기리는 성가,
‘순교자 찬가(283)’와 ‘병인 순교자 노래(289)’를 각각 1절씩만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시간되면 이 두 장의 성가 마지막절까지 깊이 음미하시며 꼭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장하다 순교자 주님의 용사여/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아래 스러져 백골은 없어도/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순교자여/승리에 빛난 보람 우리게 주옵소서”-
-“피어라 순교자의 꽃들아 무궁화야/부르자 알렐루야 서럽던 이 강산아
한목숨 내어던진 신앙의 용사들이/끝없는 영광속에 하늘에 살아있다”-
구구절절 우리에게 순교열정을 고무, 고취시키는 참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참 자랑스러운 한국 천주교 순교 성인들입니다.
오늘 미사 중 감사송도 이에 화답하는 듯 아름답고 깊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 선조들을 복음의 빛으로 불러 주시어,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게 하셨으며,
그들의 갖가지 빛나는 덕행을 갖추고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죽기까지 신앙을 지켜,
마침내 아드님의 승리를 함께 누리게 하셨나이다.”
참 축복받은 한국입니다.
이건 제가 2014년 안식년 때
전국에 산재한 순교성지들 중 일부 성지를 방문하며 절감했던 사실입니다.
마치 한국 땅 전국토가 하느님의 거룩한 땅 성지처럼 느껴졌습니다.
한국 가톨릭 교회는 참 보물인 순교 성인들에 순교성지를 지닌
진짜 영적 부자 교회구나 하는 자부심도 들었습니다.
한국은 순교성인들의 전구로 하느님의 가호 하에 번영할 수밖에 없겠구나,
결코 망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핏 눈에 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하상 바오로 평신도의 생몰 연대도 충격입니다.
전 언제나 성인축일을 지낼 때 마다 생몰生沒 연대를 확인해 보며
저보다 더 살았나 적게 살았나 살펴보곤 합니다.
성 대건 안드레아는 고작 25세의 꽃다운 청춘에 순교하셨고,
성 하상 바오로는 한창 중년의 나이인 고작 44세에 순교하셨으니 우리에겐 또 충격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겠는가?’ 하는 부끄러움과 더불어 분발심을 갖게 하는 순교성인들입니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역시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축일입니다.
사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순교 성인들의 순교 영성의 DNA를 지니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니 분발하면 우리 모두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 첫 구절이 명쾌하게 그 성인이 되는 길을 보여줍니다.
비범한 성인이 아니라 누구나 결심하고 실천하면 될 수 있는 평범한 구원의 여정에 성인의 길입니다.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자 보람은 우리 모두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3)-
주목할 말마디가 ‘모든 사람’, ‘누구든지’입니다.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참 삶의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입니다.
이 길 말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이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 모두 성인들이라 믿습니다.
어느 시인의 독백 같은 고백이 생각납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돌아갈 곳이 있고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고단한 삶의 무게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생시켜 주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바로 우리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돌아갈 영혼의 고향집 같은 교회가 있고, 돌아갈 분, 바로 파스카의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여 그렇게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고향집 같은 수도원을 찾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생명에 이르는
순교영성을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바로 날마다 하루하루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영성을 일상화, 생활화하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비우고, 제 책임의 십자가, 제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씩씩하고 기쁘게 한 결 같이 도반들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교할 것도 원망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서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제 좌우명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바로 제1독서 지혜서가 이런 우리를 격려합니다.
그대로 우리를 두고 하시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참으로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충실히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끝까지 돌보신다.”
그러니 분발하여 다시 십자가의 길 여정에 오르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 그 원동력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샘솟는 힘의 원천입니다.
주님을 열렬히 항구히 사랑하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이 참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늘 읽어도 감동입니다.
도대체 이런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 앞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힘이 우리 모두 구원의 여정에,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바로 이런 사랑을 우리 모두에게 선물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은혜로운 사랑의 약속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성 정하상 바오로는 그는 누구인가?
류해욱 요셉 신부
우리가 한국 순교자 대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이 대축일의 정확한 명칭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왜 이렇게 이름이 깁니까?
그냥 한국 순교자 대축일 하면 더 쉬울 텐데, 왜 굳이 두 분의 이름을 명칭에 넣었겠습니까?
오늘은 성 김대건 신부와 함께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의 대표인 성 정하상 바오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신유박해로 불리는 대박해로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종, 홍교만, 최필공, 김현우 등
교회 지도자들이 대거 잡혀서 참수되고 전국적으로 박해가 치열하여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성 정하상은 한국 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정열적으로 일하다가
순교의 영예를 안은 분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평신도들에게 사표가 되기에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더불어 평신도로서 순교 성인의 대표로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정하상은 아버지 정약종과 어머니 유 소사 사이에 1785년 출생하여
1839년 서소문 형장에서 44세의 일기로 순교를 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 정약종은 한국 천주교회 창설에 참여한 초기 평신도 지도자로
명도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주교요지’라는 교리서를 저술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천주교 교리를 접할 수 있도록 했던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 정약종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하였고,
삼촌들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조 시대의 가장 탁월한 저술가인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을 한국 천주 교회사를 쓴 달레는 이렇게 서술합니다.
“박해로 인해 추방되고 파산을 하고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와 같은 교를 계속해서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의 집안 식구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방해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비범한 성품의 아버지와 뛰어난 부덕을 지닌 어머니의 영향으로
정하상은 일찍부터 두각을 드러내면서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열정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고
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습니다.
달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의 위대한 마음은 결혼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고,
그의 고귀한 심경은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박해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교회를 다시 살리기 위해 20세도되기 전에
1816년 북경을 다녀온, 정하상은 그 후 본격적으로 천주교회 부흥 운동만을 위해
전 생애를 바치게 됩니다.
우선 성직자 영입을 위해 교황과 북경에 눈물로 편지를 썼는데
특히 유진길과 더불어 한국교회의 대표로서 정하상이 쓴 교황님께 올린 편지는
조선 교회의 비참한 실정을 소상히 기록하였고, 절망의 심연에서 그들을 구해 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으로 교황청의 심금을 울리게 됩니다.
그 결과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들과 앵배로 주교를 모실 수 있었습니다.
또한 모방 신부가 한국에 도착한 즉시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보낼 때
그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정하상은 모셔온 신부님들을 집에 모셨고
그분들의 비서, 곧 오늘날의 사무장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신자들의 지도자였으며 대표이었습니다.
그의 동료 순교자인 이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합니다.
“나와 모든 신자들이 증언할 수 있는 바이지만, 그는 참으로 덕성스럽고 굳세었으며
충직한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무척 밝고 놀라울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이러한 재능과 덕 때문에 신자들은 그를 진정으로 장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정하상은 당시 재상에게 올리는 글인 상재상서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어떤 신앙을 지녔으며
그의 하느님과 한국교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털끝 만 한 것도 다 하느님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고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은 그만두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무한하여 비할 데 없으니
우리가 마땅히 일생을 다하여 어떻게 받들어 섬겨드려야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1839년 기해년 6월 정하상은 체포되어 순교의 월계관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라 한국천주교회의 부흥을 위해 애쓰던 그는
결국 순교로서 신앙의 탁월한 증거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성 정하상의 어머니 유 소사 체칠리아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서울대교구 절두산 순교성지 순교자 박물관에 그림이 걸어져 있습니다.
바로 성 유소사 체칠리아, 성 정정혜 엘리사벳, 성 정하상 바오로의 영정입니다.
성녀 정정혜 엘리사벳과 성 정하상 바오로는 남매지간이고,
성녀 유소사 체칠리아는 그들의 어머니입니다.
1898년 9월 1일 세상을 향해 여성의 권리를 외쳤던 북촌의 이소사, 김소사처럼
이름이 없는 수많은 ‘소사(召史)’들과 관련됩니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주어진 시대의 여건과 상황은 상당히 다르지만,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무모할 정도로 비장하게 외쳐야 했고
쓸쓸하게 잊혔다가 되살아난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많이 닮아 있습니다.
17세기 초에 소사의 한글 음은 ‘조이(助吏)’ 혹은 ‘조시(助是)’로 읽히기도 하여
여자 노비 이름을 지칭하는 호적자료도 등장합니다만,
17~19세기에 성을 붙여 양민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 되었습니다.
19세기를 지나 개화기에 사용된 용례로 보자면,
당시의 신문들은 소사가 ‘쇼’로 음독되었음을 확인해주는데요.
소사는 양반가 부녀자를 부르는 씨(氏)와 동등한 의미로 쓰이다가 사라졌고,
현재는 ‘결혼한 여자를 높여 부르는 말’인 여사(女史)에서
소사의 형태적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성녀 유 소사 체칠리아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스무 살 되던 해인 1801년의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유명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누스의 아내가 됩니다.
그녀는 그의 남편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하였습니다.
서울에서 큰 박해가 일어나서 남편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녀도 세 아이와 함께 붙잡혀 들어갔다가 다행히 풀려 나왔습니다.
가산은 모두 몰수되어 그녀는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어려운 처지에 살 길이 막연했던 체칠리아는 마재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 요한의 집에 가서 도움을 청했습니다.
하지만 친척들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여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밤 유 소사 체칠리아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러니 생활이 어렵더라도 참아 받으시오.
그리고 꼭 우리를 만나러 오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그 꿈은 그녀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한창일 때 그녀의 조카 한 사람이
시골에 집까지 장만하여 주며 피신하기를 권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늘 순교하기를 원하였는데 이제 그 기회가 왔으니
아들 바오로와 함께 순교할 생각이다.”하며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그해 7월 11일에 아들이 체포되고, 이어서 7월 19일에는 그녀도 체포되었습니다.
유 소사 체칠리아는 포장 앞에 나가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처음 다섯 번 문초를 당하는 동안에 태형을 2백 30대나 맞았습니다.
그녀는 당시 79세였습니다.
기운이 쇠약한 체칠리아였으나 끝까지 참아내며
자세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태연자약한 태도를 보여 주어 형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유 소사 체칠리아는 참수당하기를 바랐으나 나라 법률에 노인에 대한 참수를 금하였습니다.
체칠리아는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맡기고 모든 고통을 참아냈고, 마침내 기운이 다하여
옥 바닥에 누워 마지막으로 “예수 마리아!” 하고 소리 내어 부르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면서 순교의 의미와
오늘날 우리가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순교는 무엇보다도 신앙에 대한 증거입니다.
하나 뿐인 목숨을 바쳐서까지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을 지니고 그것이 바른 행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것은 참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우리는 얼마만큼 내가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을 지니며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고자 애쓰는가 반성하게 됩니다.
순교는 참으로 커다란 사랑과 용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결단입니다.
자기의 목숨보다도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마음,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용기는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또한 하느님의 은총 없이 불가능한 행위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돌아보며 더 큰 사랑을 지닐 것을 다짐하며
순교 성인들의 전구를 청해야 할 것입니다.
순교 정신은 한마디로 희생정신이라 하겠습니다.
희생이란 자기를 나누고 남을 위해 기꺼이 자기를 버리는 행위입니다.
오늘 순교 성인들의 축일을 지내며 우리가 하느님과 교회,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해 나는 무엇을 희생할 수 있는지,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되는 이 시대에
나는 내가 지닌 무엇을 나눌 수 있을 것인지 함께 생각해 봅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신부님! 저는 열등감도 많이 느끼고요, 살면서 무력감과 초라함도 많이 느낍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나요?”
조금의 열등감 없이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약간의 열등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자신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고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존감이 약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건강한 자존감은 부정적인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공감이 갑니다. 부정적인 마음을 없는 상태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그런 부정적인 마음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채워져야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생긴다고 해서 부정적인 마음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어쩌면 지금 주님과 함께 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많은 순교자 덕분에 지금 우리가 편안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순교자의 삶은 끔찍해 보이기도 합니다.
부귀영화를 가져다주는 것도 아닌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을 것입니다.
순교자들은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얻게 되는 기쁨에 집중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어야만 행복하리라 생각하지 않고,
박해 시대임에도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지요.
순교자들은 자신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 역시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따르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의 지혜서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용광로 속의 금처럼 그들을 시험하시고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순교자 대축일인 오늘,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기쁨을 찾고 있는지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부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긍정적인 마음에는 오래 머물러야 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국 천주교회의 103위 성인대축일입니다.
1784년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후부터 1886년에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기까지,
약 100년 동안에 1만여 명의 순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 11위의 성직자와 92위의 평신도, 모두 103위께서 1984년 5월 6일에 시성되셨습니다.
사실, 순교자들이 살았던 그 당시의 법은 부정부패와 약자에 대한 횡포를 방관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하느님의 질서, 곧 정의와 자비와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그 당시의 인간과 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부조리를 한 순간에 걷어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는 일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이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그들의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울로는 말씀하십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우리의 순교자들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그 믿음을 굽히지 않고, 모진 형벌을 당하고,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분들은 죽음을 넘어 하느님을 향해 떠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자신을 버려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셋째>는 진리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순교자들이 바로 그 길을 걸었습니다.
<첫 번째의 길>인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자신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다’의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라는 뜻으로,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곧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의 길>인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지 고통을 받아들여 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못 박는 사형도구이기에, 그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진다’는 원어의 뜻이 ‘어머니가 애기를 가슴에 품듯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는 것’이기에,
죄의 용서를 소중히 맞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 날마다 죄의 용서를 품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겉으로는 고통 중에 있어도 안으로는 자비와 사랑의 십자가를 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의 길>인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 지향이 오로지 예수님께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선조 순교성인들이 바로 그렇게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지만,
살아있는 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 사실은 이미 순교현장에서 드러났습니다.
곧 우리 순교자들의 기록에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이 더러 일어났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전번 문초 때에 형리였던 사람이 다음 번 문초 때는 피고석에서 문초를 받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들은 순교의 현장에서 천주교교리를 순교자들로부터 배워 알게 되고
어느덧 신자로 돌변하여 자신들이 휘두르던 칼날에 자신들의 목숨을 내어놓게 된 것입니다.
곧 심문 받는 형장이 바로 전교지요, 신앙의 증거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순교자들의 죽음은 죽음의 현장에서부터 이미 다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 안에서도 죽었지만 살아있는 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부 떼르뚤리아누스는 “순교는 믿는 이들의 씨앗”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악마들을 묶어버리는 쇠사슬이며 악마의 목덜미를 조이는 족쇄이다”
순교대축일을 맞이하여 순교자들 삶과 복음을 돌아다보면서 깨닫게 됩니다.
사랑은 고통을 당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함께 사랑하는 데에 있다는 것을!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사랑하시고 고통을 통하여 사랑하신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우리 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살아계시고,
우리 앞에 서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것을!
오늘도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동행하시며,
고통 속에서 함께 고통당하시면서 사랑하기를 가르쳐주고 계신다는 것을!
그러기에 순교자들은 비록 겉으로는 고통의 십자가를 지면서도
마음속에서는 믿음의 승리의 십자가를 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음을 당하면서도 안으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박해하는 이들마저 사랑으로 품고 벅찬 기쁨으로 십자가를 끌어안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희망이 아니라, 그분의 희망에 희망을 걸고서 말입니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신앙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바쳐야하는 순교를 강요하지는 않을지 모르나,
여전히 하늘나라의 정의와 진리를 위한 투신의 삶은
시대와 세속정신을 거슬려 박해를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전히 하느님을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봉헌하고 자신의 뜻을 바치는 백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하고,
진리와 이웃을 위해 매일의 삶 안에서 자신을 나누는 봉사와 사랑으로
녹색순교의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순교정신을 되살려 순교(martyr;증거)라는 말 뜻 그대로,
우리의 삶의 현장이 신앙을 증거 하는 장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게 하소서!
고통을 피하지 않으며, 없애버리거나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극복하거나 초월하려 하지도 않으며, 타협하거나 무관심하지도 말게 하소서!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듯이 가슴에 품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흔연히 십자가의 사랑을 끌어안게 하소서!
죄의 용서를 끌어안고, 빠스카를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루카 9,23)
주님!
제 자신을 따르지 않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을 붙잡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붙잡고 가게 하소서!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제시한 길을 가게 하소서!
당신을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따르게 하소서!
그 무엇을 하든,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제가 있는 뉴욕의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1973년에 시작하였습니다.
부르클린 교구로부터 정식으로 본당으로 인정된 것은 1974년입니다. 곧 50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본당 사무실로 들어가는 벽에는 역대 신부님들의 사진이 액자로 걸려있습니다.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의 사진이 제일 앞에 걸려있습니다.
퀸즈의 교우들은 지금도 초대 사제이신 정욱진 토마스 신부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뉴욕에서 가장 큰 한인 공동체로 성장한 퀸즈 성 정하상 바오로 성당은
초대 사제와 교우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시작하였고
벽에 걸려있는 후임 사제들과 공동체의 노력으로 오늘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은 교회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지만 유럽의 교회는 1,000년이 넘는 교회가 많습니다.
본당 신부님들의 초상화가 벽에 한 가득인 경우를 보았습니다.
그 중에는 성인품에 오르신 분도 있고, 주교님이 되신 분도 있었습니다.
로마의 성 바오로 성당에는 입구에 바오로 사도의 동상이 있습니다.
성당 안에는 역대 교황님들의 초상화가 걸려있습니다.
지금 교황님은 266대 교황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에 266명의 교황님이 있었으니 평균 8년 정도 교황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박해의 시기에 순교한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신앙의 모범으로 성인품에 오른 교황님도 많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구교’라고 하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한 세대를 30년 잡으면 150년가량 됩니다. 대략 1810년가량 됩니다.
한국 천주교회가 1784년에 시작되었으니 교회가 시작되고
30년가량 지나서 저의 조상들이 신앙을 시작하였습니다.
구교 집안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하였습니다. 박해를 피해서 도망 다녔기 때문에 재산의 기본이 되는 땅이 없었습니다.
지역과 혈연으로 이루어지던 사회였기 때문에 낯선 곳에서 변변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교우들이 모여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마땅한 교육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겨우 자리를 잡아도 박해가 시작되면 다시 다른 곳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구교 집안은 늘 가난하였습니다.
둘째는 신앙교육이었습니다.
재산도 버리고, 벼슬도 버리고, 이웃과도 헤어져서 선택한 신앙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철저했습니다. 기도문을 외워야 했고, 매일 기도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멀어도 주일에는 성당엘 가야 했습니다.
신자가 아닌 집안과는 혼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아닌 배우자는 먼저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신앙이 먼저였습니다.
기일(忌日)에는 가족들이 모두 모여 연도를 바쳤습니다.
친척들이 모여도 먼저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
성당에 연미사를 신청하였고, 가족들이 함께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어르신들은 자녀들 중에 한명은 사제나 수도자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저의 집도 저는 사제가 되었고, 동생은 수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도, 형수도 먼저 세례를 받고 결혼하였습니다.
코로나19를 지내면서 서울대교구에서는 신앙생활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였습니다.
공동체 미사가 중단되면서 가장 아쉬운 점이 무엇인지 질문하였고,
교우들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점은 미사를 봉헌하지 못하고, 성체를 모시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심단체 및 소공동체 모임에 참석하지 못해 생기는 고립감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좋았던 점은 영상을 통해서 미사를 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교구는 영상을 이용한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사목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제작하겠다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가진 신앙의 가치가 무엇인지,
신앙이 주는 기쁨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신앙의 가치를 안다면, 신앙의 기쁨을 안다면 코로나19는
결코 우리를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발자취를 닮기에도 멀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고 있을까요?
‘다음에 하지 머’라는 게으름.
‘남들도 다 그러는데’라는 자기 합리화.
‘나는 할 수 없어’라는 열등감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우리가 지닌 신앙을 우리 삶의 액세서리로 생각한다면,
신앙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날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만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선조들의 순교자적인 삶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생활은 조그마한 신앙의 시련에도 견디지 못하는 신앙이 될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본기도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인류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느님,
이 땅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선택하시어 오묘한 방법으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신앙 고백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자라게 하셨으니 저희도 죽기까지 복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우리의 목숨과 마주하는
은총의 시간이다.
십자가와 죽는 밀알을 통해
목숨의 가야할 길을 보게 된다.
되돌려 드려야할
우리의 목숨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복음의 발자국이다.
순교의 발자국은
생활의 봉헌이다.
생활의 봉헌은
버려야 할 것과
나누어야 할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다.
순교는
신앙과 사랑을 위한
믿음의 간절한 결단이다.
신앙과 순교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순교의 피는
여전히 뜨겁다.
순교는 비뚤어진
우리시대의 믿음을 바로잡아준다.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간 이들의
숭고한 목숨의 승리이다.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신비로운 일치의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사랑의 뜨거운 결정체이다.
순교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뜨거운 고백이다.
생명의 빛을 향해 걸어간 이들의
전적인 삶의 투신을 배워야 할 때이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아는 것을
우리 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이다.
생활은 순교로 깊어지고
순교는 생활을
참으로 가치 있게 만든다.
하느님을 위한
순교이며 목숨이다.
목숨을 위한 봉헌이다.
연습의 종교인가, 실전의 종교인가?
전삼용 요셉 신부
저는 가끔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로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그것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이 된 것은 아니다”,
“감히 인간이 어떻게 그리스도가 되고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라고
따집니다. 저는 이때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교리서에 있는 것을 그대로 말하는데도, 교회 내에서 오히려 그 교리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밀떡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리스도로 불릴 수 있다면,
그 성체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우리도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면 또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빌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라고 말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보내주신 이 은혜를 이해하십니까?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또,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되게 하시려고 인간이 되셨다.’
‘하느님의 외아들은 당신 신성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려고 우리의 인성을 취하셨으며,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460)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교회는 이 믿음을 신자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과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이 큰 차이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에 불과하다’는 믿음이 있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 안에는
‘나의 정체성이 인간을 넘어서서 하느님 본성에 참여한다’는 믿음이 들어있습니다.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가지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은 의미를 잃습니다.
정체성이 바뀌어야 본성이 바뀌는 것입니다.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가 그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바꾸지 않으면
인간의 본성으로 올라올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수많은 다중 인격 속에서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는
자신이 개인지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도 나옵니다.
22세의 의대생이었던 스티븐 D.는 약물중독으로 거의 완벽한 개의 경지까지 갔었습니다.
개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꿈을 깨고 나니 개의 모든 감각,
특별히 후각이 인간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향수의 냄새를 다 구별하게 되었고, 환자들을 눈을 감고 냄새로 다 구별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간 길을 다시 냄새로 되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3주 동안 이 일을 겪고 나서 약물을 끊고 신경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또 어떤 분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자녀에게 개 짖는 소리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정말 자신이 믿는 정체성대로 되어 갑니다.
사람 흉내를 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이라 믿어야 사람인 것입니다.
가톨릭교회가 만약 이 믿음을 주지 못하면 교회는 그저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는 훈련만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로 믿게 만들면 훈련이 아니라 실전을 시키는 종교가 됩니다.
어떤 종교가 진짜 종교일까요?
한국 가톨릭교회는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다른 나라들은 선교사들이 주체가 되어 소극적인 선교지역 사람들을 설득하는 방향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학자들이 먼저 천주교를 연구하여 받아들이는 쪽이
더 적극적으로 교회를 불러들였습니다.
처음 천주교를 접하고 연구했던 이들은 대부분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었습니다.
실학자들은 당시 조선 시대 성리학의 공리공론에 지쳐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에 진저리가 나서
더 실용적인 학문을 찾다가 서학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는 성리학보다 천주교가 더 실용적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천주교를 통해 어떤 이익을 보려고 했던 것일까요?
성리학이 그들에게 해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일까요?
성리학은 사물의 생성과 소멸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고 말합니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 ‘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 법칙이 되기도 합니다.
좀 복잡하게 들리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이(理)는 ‘진리’를 나타내고, 기(氣)는 ‘힘’을 나타냅니다.
진리는 말씀이고, 힘은 성령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성리학에서도 이와 기를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 학문이 실용적인 면을 잃었던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실용적인 면을 잃게 되는 이유는 ‘실전’을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무술의 창시자들은 당대 엄청난 무술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창시한 무술들은 시간이 지나며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실제 대련은 소홀히 하고 그 형식에만 치중하기 때문입니다. 연습만 하는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에서 마을 사람들이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고 부자인 마윈도 태극권을 신봉하고 뛰어난 무술로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태극권 무술 고수와 격투기 선수와 시합을 하였는데
몇 초도 안 돼서 쓰러져 정신 못 차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상들이 유튜브에 엄청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무술의 창시자들은 분명 뛰어난 무공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끊임없는 실전을 통해 발전하지 않으면 그저 실전에는 쓸모없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리학도 그렇게 처음에는 모든 이들에게 실용적으로 삶에 적용될 수 있는 학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양반과 상놈을 나누는 데 이용되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데는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므로 성리학이 탁상공론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리학이 창조와 운동, 소멸의 원리였다면
그것이 그것을 공부하는 이들 각자 안에서 실용적으로 적용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
연습만 하고 실전에 쓰이지 못하면 시간과 함께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에 한국의 실학자들은 오히려 하느님께서 말씀과 성령을 통해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 주는 천주교가 더 실천적이요, 실용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받아들여 보니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이기고
더 높은 경지로 오를 수 있게 해 줌을 삶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천진암에서 천주교를 연구했던 이벽과 정도전과 같은 분들은
철저한 자기를 이기는 삶을 수련하였고 천주교가 실전에서 매우 실용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천주교는 사제가 없는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키는 도구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 그렇게 순교자가 많이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종교가 하나의 연습의 도구가 아니라 실전의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재는 어떻습니까? 약간은 당시 성리학과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살게 만들려고 연습만 합니다.
하지만 자신을 그리스도로 믿으면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지 못하게 만들려고 하는 이들은
아직도 연습만 하고 자신을 죽이거나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내가 그리스도라고 믿어야 진짜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리스도가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명확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의 모든 순교 성인들은 평소에 자신과 싸우지 않고
순교 때에 한 번의 결정으로 순교하였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더 큰 전투에서 승리하려면 작은 전투에서 끊임없이 실력을 다져왔을 것입니다.
나와 싸우지 않는 종교는 이제 실전에서 아무 의미도 없는 껍데기로 남게 됩니다.
나와 진정으로 싸우려면 내가 곧 그리스도임을 완전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실전이 시작되고 내가 믿는 종교는 실전의 종교가 됩니다.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 하느님의 정원
이 릴리안 수녀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의 십자가가 왜 이렇게도 무거운지.. 저는 투덜대기만 하였습니다.
혼자서 끌고 가야 하는 것이 외롭고도 험난하게 느껴질 때,
문득 위를 쳐다보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나보다 더 큰 십자가를.. 혼자서 묵묵히 지고 계십니다.
'아..나는 혼자가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졌고
나의 십자가 또한 함께 들어주고 계셨음을 느꼈습니다.
내가 힘들고 아파할 때 함께 아파하시고 계셨음을.....
내가 넘어져 일어서고 싶지 않을 때
곁에서 힘을 주시고 일으켜주시려 하셨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그분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이기에
그분께 믿음을 가지고 의탁하며 살아야겠습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원 http://www.benedictine.or.kr-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