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반동과 반계 유형원,
부안군 보안면에 우동리가 있다. <한글학회>에서 펴내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본래 부안군 임하면의 지역으로 우반동의 동쪽이 되므로 우동리라 하였다.” 라고 실려 있는 부안 우반동에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이 조선 숙종 때의 실학자인 반계 유형원이다.
유형원은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하였다. 서울에 살던 그가 우반동에 내려와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에 집안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형원의 7대 조인 유관은 조선 시대 청백리 중의 한 사람으로 개국공신으로 책봉되어서 이곳에 토지를 왕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당시 과전법 체제 하에서 유관은 경기도 이외의 사패지賜牌地는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이곳의 토지는 후손들 중 누군가가 황무지를 개간한 뒤 관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형원의 선조인 유관은 어떤 사람인가?
우산각골(우산각리, 우선동)은 동대문구 신설동과 보문동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세종 때 정승 하정夏亭 유관柳寬이 청렴결백하여, 작은 오두막집에서 살았다. 하루는 비가 오자 방안에서 우산을 받고 있던 부인이 말했다.
“우리 집은 명색이 정승 집인데, 비만 오는 이런 집에서 살아야 하나요.?” 그 말을 들은 유관이 그 부인에게 답했다.
“우리는 우산이라도 있어서 새는 비를 피하지만, 우산도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겠소.”
자기 자신도 새는 집에서 살고 있으면서 어려운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였다 해서 이 마을을 우산각골, 또는 한자로 우산각리라 하였으며, 그 말이 변하여 우선동이라고도 한다.
그는 죽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내가 남길 유산이랄 것이 없으니, 청빈을 대대로 자손들에게 물려주기 바란다.”
한나라의 정승을 지내고 있으면서도 집은 주룩주룩 비가 새는 생활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것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삶의 자세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중에 살기가 어려운 백성들을 걱정했다는 유관의 후손이 유형원이었다.
유형원이 <반계수록>은 지은 우반동은 어떤 곳인가?
“변산의 동남쪽에 있는 우반동은 산으로 빙둘러 있으며, 가운데에는 평평한 들판이 있다. 소나무와 회나무가 온 산에 가득하고 봄마다 복사꽃이 시내를 따라 만발한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동국여지지>에 실린 글이고.
“변산의 남쪽에 우반동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아름다운 포구와 산수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권극중權克中의 글이다.
이렇게 경치가 빼어난 곳에 터를 잡고서 살았던 사람이 유형원의 조부인 유성민이다. 그는 이곳의 토지를 개간하여 후손들이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도록 하였다.
나중에 부안 김씨의 현조顯祖중의 한 사람인 김홍원이라는 사람에게 농장의 일부를 매매하면서 매매문서를 작성해 주었는데, 그 매매문서에 우반동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대저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앞이 탁 틔여 있으며, 조수가 흘러들어 포구를 이룬다.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데, 마치 두 손은 공손히 마주 잡고 있거나 혹은 고개를 숙여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으며, 혹은 나오고 혹은 물러나 그 모습을 변화무쌍하다. 아침이 구름과 저녁의 노을은 자태를 드러내면 이곳은 진실로 선인仙人이 살 곳이요, 속객俗客이 와서 머무를 곳은 아니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장천이 북에서 흘러나와 남으로 향하니 이로 말미암아 동서가 자연히 나뉘는데 이 장천이 또 하나의 절경을 이루고 있다.“
”높은 산 동쪽 끝 제포엔 볕이 들고,
대숲 그윽한 곳엔 매화 향시롭다.
한가한 서재에서 책 덮으니 소일거리도 없고,
꿈에 솔 바람 소리 듣노라니 봄날이 길어라.”
이곳에 살면서 <반계 죽당의 봄날>이라는 시를 남긴 유형원보더 더 먼저 이곳에서 살고자 했던 사람이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다. 함열로 유배를 왔을 무렵 허균은 이매창을 자주 찾았고, 이 지역을 사랑했던 그는 아예 눌러 살고자 하였다.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파면된 뒤에 이곳 우반동愚磻洞으로 왔다. 그는 김청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우반동 골짜기에 지은 정사암靜思菴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때 〈정사암중수기靜思菴重修記〉를 지으면서 우반동의 수려한 경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해변을 따라서 좁다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서 골짜기로 들어서니 시냇물이 옥구슬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졸졸 흘러 우거진 덤불 속으로 쏟아진다. 시내를 따라 채 몇 리도 가지 않아서 곧 산으로 막혔던 시야가 툭 트이면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좌우로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들이 마치 봉황과 난새(상상의 새)가 날아오르는 듯 치솟아 있는데,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동쪽 등성이에는 소나무 만 그루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서쪽에는 삼림이 무성하고 서림사(西林寺)가 있는데, 승려 몇이 살고 있었다. 계곡 동쪽을 거슬러 올라가서 옛 당산나무를 지나 정사암이라는 데에 이른다.
암자는 겨우 방이 4칸이고 깎아지른 듯한 바위 언덕에다 지어놓았는데, 앞에는 맑은 못이 굽어보이고 세 봉우리가 마주 서 있다. 폭포가 푸른 절벽에서 쏟아지는데, 마치 흰 무지개처럼 성대하였다.
시내로 내려와 물을 마시며 우리 네 사람은 머리를 풀고 옷을 벗은 후 못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가을꽃이 막 피기 시작하였고 단풍잎이 반쯤 붉게 물들었다. 저녁노을이 서산에 걸리고 하늘 그림자가 물 위에 드리워졌다. 물을 내려다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시를 읊고 나니 문득 속세를 벗어난 기분이었다. ……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다행히 건강할 때 관직을 사퇴함으로써 오랜 계획을 성취하고 또한 은둔처를 얻어 이 몸을 편케 할 수 있으니, 나에 대한 하늘의 보답도 역시 풍성하다고 여겼다. 대체 관직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감히 조롱한단 말인가.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나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5세에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7세에 《서경》 〈우공기주편禹貢冀州編〉을 읽자 사람들이 매우 감탄하였다고 한다. 외숙인 이원진과 고모부인 김세렴을 사사한 그는 문장에 뛰어나서 21세에 《백경사잠百警四箴》을 지었다.
효종 2년인 1651년 할아버지 상을 마친 뒤 평생의 지병인 폐병(폐결핵)으 얻어 부안의 우반동에 와서 요양과 저술활동을 하다가 1653년(효종 4)에 아예 부안현 우반동으로 이사를 왔다.
내가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은 열흘 동안 문을 닫아 걸고 혼자 지내며, 고요히 수양하는 것이다. 그러면 묵은 병이 차츰 나을 뿐만 아니라 뜻과 생각을 오로지 고요히 한 까닭에 학문에 있어서도 자뭇 얻는 바가 있다.“
제자들이 병문안을 오면 했던 유형원이 했던 말이다. 그는 이듬해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전심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나라 곳곳을 유람하였다.
“이에 가솔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봉래산에 있는 반곡으로 들어갔다. 계곡 중간에는 평평한 땅이 펼쳐져 있고, 냇물 하나가 흐르고 있었으며, 복사꽃이 길 가득히 피어 있고, 소나무와 회나무가 하늘에 닿았다. 공은 이곳에 몇 칸 남짓의 초가집을 짓고 집 뒤에는 큰 대나무 천 그루를 가꾸었다. 시렁에 만 권의 책을 비치해 두었다, 산은 깊고 땅은 외져 산 밖의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반계유고>에 실린 유형원이 그 당시 보았던 우반동의 모습이다. 그 뒤 1665, 1666년 두 차례에 걸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농촌에서 농민을 지도하는 한편, 구휼을 위하여 양곡을 비치하게 하고, 큰 배 4, 5척과 마필馬匹 등을 갖추어 구급救急에 대비하게 하였다.
유형원은 그의 저서인 《반계수록》을 통하여 전반적인 제도 개편을 구상하였다. 중농 사상에 입각하여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있도록 전제田制를 개편, 세제·녹봉제의 확립, 과거제 폐지와 천거제 실시, 신분·직업의 세습제 탈피와 기회 균등의 구현, 관제·학제의 전면 개편 등을 주장하였다. 그의 사상은 훗날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게 이어져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강가 꽃은 비단 같이 붉고,
강물은 안개처럼 푸르구나.
흥이 지극해 내 마음 가는 대로 놀고,
봄날 맑아 이번 해에 즐겁기 그지없다.
산은 병풍 속 그림 같이 펼쳐 있고,
사람은 강물에 비친 하늘 속에 있다.
천천히 높여 읊다가 취해 잠들지 못하네.“
우반동에서 가까운 <왕포王浦에서 놀다>라는 유형원의 시 한 편이다. 지금 우반동 일대는 그가 살았던 당시의 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우반동 저수지가 들어섰고, 변산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개설되었으며, 많은 부분의 농토들이 간척이 되어 그 자취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우물과 서당 집 한 채, 그리고 유형어 선생의 초장지만 남아 있다. 하지만 반계 유형원 선생이 이곳 우반동에 묻혀 살면서 남긴 학문이 조선 중기의 이익과 정약용을 비롯한 수많은 실학자들에게 이어져 오늘의 대학민국을 일군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