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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5-01 (첫째주 수요일 /흐림/비)
느닷없이 공주 공산성이 생각이나 늦은 시간에
카메라만 챙겨서 훌쩍 떠나본다. 서부터미널→공주 구터미널에 내려서
산성동/금성동/옥룡동에 위치한 공산성(供山城) 나들이를 시작
오후들면서 바람도 불고 구름이 많이 끼며 소나기성 비도 내리며
변덕스런 날씨에 주춤거리며 공산성을 돌아보며 강건너
신관동쪽 아파트 사이로 무지개를 보는 영광 과
서쪽 하늘에는 해넘이 변덕스러운 날씨지만
동쪽에는 비가 쏱아붙고 서쪽은 무지개라...
공산성은 사적 제12호로 공주시 금성동, 산성동, 옥룡동에 걸쳐 있는 백제시대의 토성 400m, 조선시대 석성 2,260m 성곽으로 둘레 2,660m, 면적 21만㎡이며, 남으로 시가와 연결되고, 북으로는 금강의 연안에 접해있는 해발 110m의 분지형 야산에위치 하며, 동서의 길이가 약 800m. 남북의 길이는 약 400m의 포곡형 형태를 띠고 있다. 원래는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임진왜란 직후에 석성으로 개축한 것으로 보이며 동쪽과 서쪽에 보조산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성 안에는 웅진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 북문인 공북루 등이 남아 있다.
동문과 서문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며 주변에는 유유히 흐르는 금강과 울창한 숲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공산성은 역사와 문화가 함께 정이 깃든 수려한자연이 있기 때문에 더욱 가치있게 보여지고 있다. 가족 단위, 부부, 연인들이 금강을 바라보며 한가롭게 산책할 성벽길이 있고 우거진 숲과 숲사이의 산책로가 있다. 계룡산과 차령산맥이 한눈에 들어오고 비단결 같은 금강이 발 아래에서 찰랑거린다.
걸어본 공산성 지도 ▼
시외버스 승차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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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으로 가면서 한컷 찍어보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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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을 오를려면
입장료 1.200원을 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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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고대 성곽 공산성
백제의 고대 성곽. ‘웅진성’(백제때), ‘공산성’(고려때), ‘쌍수산성’(조선때)으로도 불렸다. 백제 문주왕 원년(475)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후, 성왕 16년(538)에 다시 부여(사비성)로 천도할 때까지 백제 웅진시대의 도성이었다. 고려, 조선시대에도 지방행정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해발 110m의 능선에 있고, 북쪽으로는 금강이 흘러 천연의 요새이다. 원래 흙으로 쌓았으나 조선시대에 대부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백제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각 시대별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성 안에는 임류각, 연지, 쌍수정, 명국삼장비, 공북루, 진남루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선행을 베푼 훌륭한 분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들
옛날의 비선거리는 지금의 중동 1번지부터 중동교차로 쪽으로 길가에 죽 이어진 비석들이 서 있었던 거리였었는데, 도로의 확장으로 지금의 금서루 입구로 옮겨 온 것으로 추정된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의 비석들은 주로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비석들로 공주시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송덕비와 제민천교영세비 등 모두 47기가 서 있다.
목사김효성비(牧使金孝城碑)
김효성은 조선조 광해군 때의 학자로 성격이 매우 강직했다. 그는 이이첨 일파가 인목대비를 해하려 하자 이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다 유배를 당하게 된다.
그 뒤 그는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의금부 도사를 거쳐 공주의 목사로 부임하게 된다. 그는 재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목사 김효성비는 김효성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공덕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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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김효성비(牧使金孝城碑)와 제민천교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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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천교영세비(濟民川橋永世碑)
제민천교영세비는 조선조 순조 때 공주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제민천이 홍수로 범람하여 다리가 붕괴하자 이를 재건립한 사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공덕비가 아니라 복구에 필요한 자금의 출처와 조달방법 그리고 10여 명의 자원봉사를 한 민간백성의 이름도 적어 넣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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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루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길래찍어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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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금서루(錦西樓)
금서루는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위치한 문루였으나 흔적만 남아있어 성내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최근 문루와 함께 새로운 형태로 문루의 복원이 이루어져 있다. 복원된 문루는 공산성 서쪽 성곽선에 연결되게 성선을 연결하면서 성의 입구를 개구식으로 내면서 그 위에 문루를 올린 상태이다. 더불어 본래의 문지는 성 내의 출입 시설로 사용되고 있으며 복원된 문루는 외형만 겸비하고 출입시설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본래 공산성 서문 문지의 복원은 이미 1975년에 성곽에 대한 보수 공사를 겸하여 실시한 바 있다. 그러나 1975년의 보수에서는 양단의 기단만을 축석하였을 뿐 누정은 복원되지 않은 채 남겨 놓았었다. 당시 복원된 기단부는 높이 4.4m에 너비 5∼6m, 그리고 길이는 각각 17m로 조성하였는데 좌우 양단간의 간격은 7m의 범위였다. 본래 서문지의 형태는 정확한 확인이 어렵다. 문의 형태에 대하여 <<여지도서>>에서는 동, 서문은 각각 3칸이란 기록을 남겨 놓고 있다. 서문지의 복원은 1990년에 이르러 본래의 문지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3칸 규모의 고주 형태의 문루가 축조되었다. 비록 최근에 새로이 조성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문루 양식을 충실히 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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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루 와 강건너 신관동 주변이 보이네요 ▼
백제 큰다리 모습도 보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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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3품 나무 터에 지은 쌍수정(雙樹亭.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49호)
공산성 진남루 서쪽 쌍수정사적비 바로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인조는 높은 곳에 있는 두 그루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인조는 두 나무에 정삼품인 통훈대부의 벼슬을 내렸고 성의 이름도 ‘쌍수산성’으로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영조 10년에 세운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다 1970년에 전체적으로 해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그 후 영조 10년(1734)에 관찰사였던 이수항이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인조를 기리는 정자를 짓고 ‘삼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 정자가 지금의 쌍수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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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 왕궁지(推定 王宮池)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되는 곳.
공산성 내 서쪽의 표고 85m의 정상부, 종래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약 6,800㎡의 면적이 추정 왕궁지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임류각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980년에 조사된 임류각지에서 서쪽으로 왕궁이 입지할 수 있는 위치는 이곳 밖에 없다는 논거로 1985년부터 1986년에 걸쳐 조사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적은 건물지를 비롯하여 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연못과 목곽고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고 이들 유구나 또는 출토된 유물들이 백제시대로 편년되어 왕궁지의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확인된 건물지로는 반지하식 건물지, 굴건식 주공을 사용한 건물지,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 2개소와 연지, 저장혈, 목곽고 등이 있다.건물지는 굴건식 건물지까지는 백제가 웅진으로 남천하기 이전의 유적으로 보고 적심석을 사용한 건물지는 남천 후, 즉 왕궁지의 시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가운데 적심석 검물지는 각각 24칸, 10칸 규모였다.
수습된 유물은 대체로 기와류인데 막새기와는 백제의 8엽, 10엽 연화문을 비롯하여 파상문 수막새 기와이고, 10엽 연화문 수막새 기와는 연꽃의 끝부분 반전이 심하게 이루어진 백제 초기의 것으로 공주 공산성에서 주로 출토되는 전형적 형식이다. 이외의 평기와 중에는 웅천(熊川) 혹은 관(官)자의 명문이 찍힌 것을 비롯한 각종의 도장문이 나왔다. 토기는 백제토기로 등잔을 비롯하여 개물이나 삼족토기 등이며 특수 유물로 봉황형 금동향로가 수습되었는데 이는 부식이 심하고 출토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조사된 건물지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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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 ▼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35호)
금서루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몇 번이나 물어서 관광코스에 대한 안내를 그런대로 받고, 금서루 오른쪽 성벽 따라 걷는 길이 아닌 잘 닦여진 오른쪽 큰길을 따라 시원한 숲길을 걸어가다가 보니 쌍수정 안내판이 있다. 오른쪽으로 경사진 비탈을 올라가니 쌍수정사적비, 쌍수정, 인절미의 고향 공주, 추정왕궁지, 공산성연못 등이 있다. 제일 처음 맞이하는 곳이 쌍수정 사적비이다.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는 공산성 진남루 서측에 위치한다. 조선 인조 2년(1624)에 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성에 머물렀던 사실을 기록하여 숙종 34년(1708)에 석비를 건립하였다.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남천(南遷)에 대한 내력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7일 동안의 행적, 그리고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비신은 방형의 오석이며 너비와 두께는 거의 같은 크기이다. 4면에 걸쳐 각자하였고, 비머리 위에는 보주가 있다. 비문은 우의정 신흠이 찬하고 중추부사 남구만이 서(書)하였으며, 영의정 최석정이 두전(頭篆) 하였는데 후에 송시열의 음기(陰記)가 있다.
☞ 두전[頭篆] 비석 몸체의 머리 부분에 돌려 가며 쓴 전자(篆字)
공산성 진남루(鎭南樓. 충남 문화재자료 48호)
쌍수정사적비를 지나 큰길을 따라 조금 가면 임류각으로 가는 삼거리가 있다. 조금 더 직진하면 공주 공산성(公山城)의 남문이자 공주시내에서 공산성으로 출입하는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인 공주성 진남루가 있다. 조선 전기에 공산성을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석성으로 고쳐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진남루도 그 때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높은 석축기단을 좌우로 대칭시켜 조성한 후, 두 석축기단에 걸쳐 건물을 세워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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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수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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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돌아본 쌍수정 가는길 ▼
강건너 신관동 방향의 아파트를 담아보았네요 ▼
동쪽의 성벽을 담아보았네요 ▼
공주대교가 보이네요 ▼
신공주대교도 보이구요 ▼
임류각 과 명국삼장비 모습도 보이고 ▼
광복루 ▼
공산성 광복루(光復樓. 충남 문화재자료 50호)
광복루는 공산성 매표소에서 가장 먼 곳(금서루에서 걸어서 20분 정도)인 공주 공산성의 동쪽 최고봉(해발 110미터)에 있는 누각으로 공산성 안에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門樓)였으나 광복 이후 8∙15해방을 기리는 뜻으로 광복루라 불렀다. 광복루 바로 아래에 동문인 영동루가 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모든 면이 개방되어 있으며, 왼쪽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층계를 만들어 두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광복루는 원래 공산성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현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이라 불렀다가 1946년 4월에 백범 김구(金九)와 성재 이시영(李始榮)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고쳐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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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영동루(迎東樓)
공산성의 가장 동쪽에 있고 문밖에 만아루지가 있으며, 임류각을 지나 광복루로 가는 오르막길이 아닌 오른쪽 방향의 내리막길에 있다. 즉 광복루 아래쪽에 있다. 영동루에서는 공주시내는 옥룡동 옛 활터, 영명중고등학교, 수원골, 봉화대 등이 잘 보인다고 한다.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설치된 문이다.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하부 구조를 확인하였다. 성문의 넓이는 2.3m였고, 문 옆 양쪽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문지석을 원래 모습대로 찾아냈다. 발굴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 10)에 펀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 2층 문루를 복원하였다. 잊혀진 문루의 명칭은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영동루 라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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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루에서 ▲▼
영동루에서 바라본 서쪽방향 ▲▼
임류각입니다 ▼
공산성 장대지(將臺址)
진남루를 뒤로하고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큰 길을 다리를 건너면 경사가 심한 좁은 지름길과 큰 길이 있다. 좁은 지름길을 따라 올라가면 강당지와 장대가 있다. 가운데가 볼룩하게 튀어나온 워킹샌들을 신을 상태라 큰길을 따라 올라가니, 중앙에 임류각 좌측에 장대지터, 그 아래에 강당지, 오른쪽에 명국삼장비가 있다.
장대지는 백제시대의 유적이 아니고, 조선시대 장대가 있었던 터이다. 장대는 성안에서 군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다. 1980년 발굴 조사 때에 건물의 기둥을 놓았던 주춧돌 자리가 확인되었다. 공산성 안에 있었던 군사시설 중의 하나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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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임류각(臨流閣)
임류각(臨流閣)은 서기 500년(백제 동성왕 22년)에 왕궁 동쪽에 지은 건물로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공산성 발굴 조사로 임류각터를 발견하고 1993년 거의 정방형에 가까운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 및 현실의 벽돌에 있는 무늬를 많이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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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 삼장비(明國三將碑. 충청남도유형문화제 제36호)
임류각 오른쪽 평지 공산성 광복루 아래에 있다. 이 비는 정유재란(1597)때 충주에 주둔하면서 왜적의 위협을 막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을 평안하게 하였던 명나라 장수 이공(李公), 임제(林濟), 남방위(藍芳威)의 사은 송덕비이다. 임진왜란 시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 와서 행패를 많이 부린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하여 이곳 공주 주방에만 유독 그들의 송덕비가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그들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1599년(선조 32년)에 금강 변에 비석을 세웠는데, 홍수로 비석이 매몰되어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자 1713년(숙종 39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일제 침략기에 일인들이 왜구(倭寇) 등의 글자를 지워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었던 것을 1945년에 발굴하여 현재 위치로 옮겼다.
유격장 남방위의 비에는 일인들에 의해 자행된 심한 탄흔과 ‘왜구’등의 글자가 깎인 채 남아 있다. 비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 지붕이며, 각칸마다 1기씩을 안치시켰다. 3비는 모두 기단석을 간단히 갖춘 규형비(圭形碑)인데 망일사은비는 충청도 관찰사 송정명이 찬서하고 제천현감 이진유가 전(篆)을 하였다. 위관 임제비는 성균진사 이식이 찬하고 유격장 남방위비(藍芳威碑)는 성균진사 정습이 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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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삼장비 ▼
산성끝에 오리가 나라가고 있네요 ▼
하늘이 컴컴해지네요 ▼
서북쪽은 흐리기만 한데 ... ▼
윗쪽 백제큰다리 아래쪽 금강교 모습이 보입니다 ▼
금강교
금강교는 1950년 6·25전쟁 당시 파괴되었다가 복구되었는데, 1986년 공주대교가 건설되기 이전까지는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던 유일의 교량이었다. 공주시는 2002년 3월 27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노후화로 인한 안전 사고 방지와 공주 공산성과 연계한 관광 명소로 조성하기 위해 금강교 교량 상판과 난간 교체 등의 복원 공사에 착공하여 2003년 3월 완공하였다.
길이는 513.5m, 총 폭은 6.5m, 유효 폭은 5.8m, 높이는 12m이다. 경간 수는 14개, 최대 경간장은 67m이다. 상행과 하행 각각 1차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교는 1932년 일제강점기 하에서 충청남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할 때 제공된 여러 건의 보상물 가운데 하나로 건립되었다.
금강교의 통행 차량은 12인승 이하, 1톤 이하 차량으로 신관동→산성동으로 일방통행만이 가능하며 통행 속도는 시속 30㎞이다. 2003년 정안천교 확장 공사로 인한 차로 폭 축소와 교통 사고 다발 지역인 전막사거리와 공주농업고등학교 사거리의 교통 사고와 혼잡을 해소하기 위해 금강교 차량 일방 통행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금강교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연결 기능은 금강교를 사이에 큰백제다리와 공주대교가 대행하고 있다
윗 다리는 신공주대교 아래는 공주대교 모습 ▲▼
다람쥐도 찍어보았구요 ▼
무지개가 환영해주고 있네요 ▲▼
만하루(晩河樓) 가 보이네요 ▼
공산성 연지(蓮池. 충청남도기념물 제42호)
공산성 안쪽 영은사(靈隱寺)의 앞에 있는 동서가 긴 평면 장방형의 연못터로 단을 둔 석축을 정연하게 쌓았으며 동서 양축에 넓은 통로를 둔 것이 특징적이다. 호안석축은 단을 두어 쌓았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위를 넓게 하고 아래를 좁혀 쌓아 9층 석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태와 매우 비슷하다. 서쪽호안이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 통로를 두었다. 이 통로는 호안석 상계단에서 아래로 4m 되는 지점에서 북쪽으로 직각으로 한번 꺾이어 제단이 설치되어 연지의 바닥까지 출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바닥은 판석으로 깔았고 연지 둘레의 동서벽에서 북쪽 금강변 호안으로 배수로가 설치되어 현재도 석루두(石漏頭)가 남아 있다. 북쪽과 금강 호안 사이의 대지에서 앞면 4칸, 옆면 3칸의 8각 고주가 발굴되었는데, 옆면 중앙에 누각으로 올라갈 수 있는 승가대석(昇架臺石)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누각 건물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어 왔음을 시사하고 있고 특히 암문을 통해 연지에 닿을 수 있는 완전한 유적을 발굴한 것은 산성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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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사 약수물 ▼
영은사(靈隱寺)/영은사대웅전(靈隱寺大雄殿. 충남 문화재자료 51호)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내려가니 입구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고, 옆의 언덕 밑에는 옹이투성이의 이상한 모습의 고목이 있다. 바로 앞에 금강이 흐르고 있고, 그 앞에 공산성에 현존하고 있는 두 번째 연못인 공산성 연지(蓮池. 충청남도기념물 제42호)와 공산성 만하루(晩河樓)가 있다.
영은사대웅전는 공주 공산성(公州 公山城) 안의 북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영은사의 법당 건물이다. 영은사는 1458년(세조 4)에 지은 사찰로, 1616년(광해군 8)에는 이곳에 승장을 두어 전국 8도의 사찰을 관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원통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기둥 위에는 보를 받치고 장식도 겸해 새날개 형태의 부재(部材)를 짜맞춘 익공계의 맞배지붕이다. 지금의 건물은 1933년 12월에 보수하였고 내부 불단에 관음보살 좌상이 모셔져 있다. 관일루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 공포를 기둥 위에만 배치한 주심포 계통의 팔작지붕이다.
영은사는 임진왜란때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이곳에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 전투에서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 영은사 부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되어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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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만하루(晩河樓) 와 연지(蓮池)
조선 영조 때 건립된 건물이다. 영은사 앞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자리 잡은 누각은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평상시에는 아름다운 금강의 경치를 구경하는 명소이다. 홍수로 붕괴되어 땅속에 묻혀 있다가 1982년 발굴조사로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1984년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건물을 복원하였다. 8각으로 다듬어진 기둥 받침돌과 기단 디딤돌 등을 원형 그대로 이용하였다. 누각에서 바라본 금강의 경치가 일품이다. 이곳에서 부추전과 막걸리 한잔을 들이키면 꿀맛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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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하루(晩河樓) 와 연지(蓮池)가 보이네요 ▼
비가 억수로 쏱아집니다 ▲▼
서쪽방향은 햇볕이 드는데 ... ▼
공산정 모습이구요 ▲▼
공산성 공북루(拱北樓) 시도유형문화재 37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拱北樓)’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공북루는 송시열이 쓴 기록을 비롯해 여러 글이 걸려 있어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해ㅅ님이 넘어가네요 ▼
공산성 공산정(公山亭)
공산성에서 조망지로 가장 좋은 정자이다. 사방이 탁트인 높은 언덕위에 자리잡아 금강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 신관동에서 공산성을 바라볼 때 가장 눈에 잘 띄는 정자, 금강교에 가장 가까운 정자, 아직도 정자에 대한 해설판이 없는 정자, 공산성과 이름이 비슷한 정자, 금서루에서 가장 가까운 정자, 금강교가 잘 내려다보이는 정자, 사방팔방 전망이 가장 좋은 정자, 이름이 없다가 공산정이란 이름이 최근에 붙은 정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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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대를 펴고 찍어봅니다.
어깨에 삼각대집 뒤에는 카메라가방 앞에는 카메라본체가방 ㅋㅋㅋ ▼
공주 구터미널에서 17:30분차로 귀가합니다 ▼
보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상세설명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이다.
“인조가 이름 붙인 ‘인절미’”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피해 피난을 나선 인조가 공주 우성면 목천리 근방을 지날 때 임씨라는 농부가 떡을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인조는 콩고물을 묻힌 떡을 아주 맛있게 먹고 난 후 처음 먹어보는 떡의 이름이 궁금하여 물었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에 인조는 임씨가 만든 맛있는 떡이라는 뜻으로 ‘임절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임절미’란 떡 이름은 세월이 흐르며 ‘인절미’로 변했다.
첫댓글 그리운 공주산성 사진 잘보고갑니다.
공주시에서 개최되는 축제에 여러번 참석하면서
저도 공산성를 몇번 둘러봤는데 역시 멋지군요.
최근 보기 힘든 무기개도 기가 막히게 카메라에 잘 잡으셨네요.
아이들과 소풍간 기억이 나네요
자세히는 둘러보지는 않앗지만 도시락 먹고 온기억뿐인데 오늘 사진으로 잘보고 갑니다
찬구들과 다시한번 가봐야 겟습니다
공산성을 한번에 감상했습니다..
지금 DMZ 폴리스로 군 생활하는 막내가 돌때쯤
승용차 공산성에 주차하다 앞 범퍼 망가진 생각이 납니다..
공주시에서 만든것 같으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 ~~~
아쉬웠겠네요.
나즈막 하면서도 산성위를
걸으며 금강과 주변에 구 시가지 와
신 시가지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드라구요.
축재때도 가보았고 이번에는 입장료를 내고 들어같는데
공무원 퇴근시간이면 입장료를 안내도 되드라구요. 퇴근하고 사람이 없네요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구석 구석
쉬며 놀며 다녀도
1시간30분 ~2시간 사이면 되는것 같네요.*^***
사진 잘 보고갑니다 언제 한번 가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