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군 장준하와 만주군 출신 백선엽
물론 ‘만주군 중위 출신의 대통령’이란 해방 직후 신생 대한민국에 썩 어울리는 그림은 아니었다. 항일투쟁 경력이야말로 정치적 정당성이 컸다. 바람 잘 날 없었던 친일파 논란에는 이런 아픔이 묻어난다.
그 점에서 박정희는 이런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설적인 인물이다. 2차 대전 이후 등장한 제3세계 지도자 중 박정희와 비슷한 이력을 가진 이는 없다. 유례없는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도 박정희가 거의 유일하다.
“박정희는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만주군 장교가 되어 우리의 광복군에 총부리를 겨눴다.”
박정희에게 퍼부어진 그런 공격은 광복군 출신 장준하로부터 나왔다. 장준하는 학도병 징집 6개월 만에 광복군에 합류해 김구 진영에서 활동하다가 잡지 ‘사상계’를 운영했다.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 지지연설을 계기로 반박정희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하지만 그건 사실에 근거를 둔 비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공격이었다. 이진화씨가 이번에 증언을 결심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본래 이씨는 박정희가 제1군사령부 참모장(소장)이던 1958년 6월을 전후해 박정희 사람으로 활동했다. 1군 산하의 병력 30만 명에게 제공되는 부식(반찬)에서 핵심이 되는 콩나물·두부공장을 맡은 사연도 그 맥락이다. 5·16 이후 중앙정보부 부산 부책임자로 내려간 이유도 마찬가지다. 당시 “중정을 보는 여론이 좋지 않아 다른 데서 근무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런 풍토를 바꿔라”며 강권했다.
결정적으로 그의 기여는 부산지역 밀수품을 근절한 점이다. 이순희·이진화씨 둘의 증언은 거의 기억의 물리적 한계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살아있는 화석’으로 평가될 만큼 정교한 이 증언을 신뢰할 경우 청년 박정희의 삶의 ‘결정적 고비’에 숨겨진 진실 파악에 요긴해지며 진실은 의외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 때문에 20대 시절 박정희의 선택을 기회주의적이라고 비판하거나, ‘박정희=식민화된 군인’이라고 단정하는 게 얼마나 무모한가를 보여준다. 그런 그가 왜 하필 만주행을 고집했을까? 사실 만주군관학교 조선인 생도 대부분은 만주 출신이었다. 이북 출신 약간 명을 빼고 이남 지역 출신은 박정희가 거의 유일하다.
사범학교 출신으로 군관학교에 입학한 케이스는 한국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이다. 그는 평양사범을 나온 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3년간 의무적으로 교단에 서야 한다는 규정을 무시했다. 이 경우 재학 시의 장학 혜택을 현금 500원으로 환산해 반납하라는 최후통첩까지 받았다. 백선엽은 당시 은행원·교사 등의 1년 연봉이 넘는 큰돈을 학교에 낸 다음 만주행을 선택했다. 그만큼 흔치 않은 기회였다. 최근 여러 차례 만났던 백선엽은 이렇게 말했다.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를 친일파라고 합니다. 일제시대 한복판에 한창 젊은 나이였던 우리 세대 중 몇몇 사람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배웠다면서 그걸 탓하는 모양새인데, 우리가 그렇게 배우려 했던 건 알고 보면 참 눈물 나는 과정이었습니다. 중국어·일본어·영어 등 어학과 군사지식을 배우지 않았던들 해방 이후 어떤 전문가가 남아있었을까요?”
[필자는 문화평론가이며 ‘박정희, 한국의 탄생’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