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랑 길에서 만난 보령의 오천항
어딜 가거나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그 땅을 살다간 사람들이 있다.
“장소가 회상시키는 힘은 무한히 크다. 우리는 어디를 걷든지,
역사의 유적 위에 발을 디디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였던 키케로의 말이다.
또한 “인간의 역사는 발걸음의 역사다”라는 말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며 만나는 이 땅의 역사와 문화,
지나고 나니, 서해랑 길은 아름다웠다.
“갈매못 성지에서 조금 바닷가를 따라 걷자 오천면 영보리에 이르고 그곳에 충청수영이 있었다.
<택리지>를 지은 이중환은 충청도에서 “보령의 산천이 가장 훌륭하다”라고 하였는데 그 무렵 보령의 서쪽 오천성 안에 충청도 수군절도사 군영이 있었다.
조선 제 11대 임금인 중종 5년(1510)에 돌로 쌓은 이 성은 둘레가 3,174자에 높이가 11자가 되며 성안에 우물 네 개와 연못이 있었고 영 안에 영보정永保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호수와 산의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활짝 트여 있어서 명승지로 이름이 높았던 이 정자는 수군절도사 군영과 함께 지었다고 한다. 이 정자를 두고 조선 중종 때의 학자였던 박은(朴誾)은 <영보정永保亭>이라는 아름다운 기문(記文)을 남겼다.
“땅은 절박해 다하여도 천경(千頃)의 바다는 궁하지 않아서, 산을 열어 오히려 한 머리의 조수를 받아들이고 있구나. 빠른 바람이 안개를 쫓으니, 물은 거울 같은데, 파도가 밀려 다호는 곳(주저洲渚)에 사람 없이 새들만이 노래를 부른다. 나그네 길에 맑은 경치 만나면 매양 한탄을 일으키는 법, 해(임금) 있는 곳 바라보고 다시금 고향이 먼 것을 깨달았다. 고심苦心해 읊으며 떠나지 못해도 새로운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떨어지는 해 먼 하늘 가로 빠지는 것을 수심에 찬 채 바라보고 있노라.(...)
땅의 형세는 탁탁 치며 곧 날아오르려는 날개와 같고, 누정(樓亭)의 모양은 한들한들 매여 있지 않은 돛대와도 같다. 북녘으로 구름에 쌓인 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로 향하려는 것이냐, 남방으로 오면 둘러싸인 산천이 이곳이 가장 웅장하구나. 바다 기운은 안개를 빚어 인하여 비를 이루고, 파도의 기세는 하늘을 뒤집을 듯 스스로 바람을 일으킨다. 어두운 속에서도 새들이 서로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듯하여, 앉아 있는 사이에 지경이 함께 비어 있음을 완전히 깨달았노라.
아름답지 않은가. 내가 아침에 홀로 와서 글 읊는 곳에, 한 낚싯대만큼 솟아오른 첫 아침 해가 발을 비쳐주네. 바람 돛대는 언제나 조수와 함께 올라오고, 어민의 집들이 모두 굽어보고 있으니, 언덕이 기울려 한다.(...).“
조선 시대의 한 선비가 먼 타향에 와서 느끼는 고독과 외로움을 주변에 펼쳐진 풍경을 통해 노래했던 그 감상을 칠백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는 나그네들은 또 어떤 마음으로 오천항을 굽어보고 있는지,
아름다운 곡선의 홍예문, 푸르름을 자랑하던 팽나무, 남아 있는 진휼청과 사라져 버린 영보정과 눈시울 적시며 박은 선생이 바라보았던 포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져 버린 보령을 두고 정대는 다음과 같은 기문을 남겼다.
“땅이 협소하고 서해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새로 지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누각 영보정에서 바라보는 오천항은 한 폭의 그림과 같다. 마치 나폴리나 이국의 어느 해안가 도시 같이 배들이 줄지어 서 있고, 갈매기는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풍경, “세상은 있는 그대로가 내 마음에 드는구나.” 라고 노래했던 <파우스트>의 린세우스의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곳이 영보정에서 바라보는 오천항이다.
신정일의 <서해랑 길 인문기행> 보령 편에서
2024년 7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