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
[백] 성 요한 23세 교황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제1독서
<네가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법: 어린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대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바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 또 기도를 배우려 할까요?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각자가 바치는 각자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합니다. 옆집 아이가 할 수 있는 말과 내 자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곧 기도문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만큼 높은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신 분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었습니다. 그 말을 가르쳐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정체성의 확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의로움과 하느님 나라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를 가장 잘하는 존재가 아기들입니다. 아기들은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부모가 누구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신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저녁마다 성당에 기도하러 들르십니다. 그런데 10초도 안 돼 다시 나오십니다. 본당 신부님은 매일 너무도 짧게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를 ‘기도할 줄 모르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좋으세요?”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답하십니다.
“예,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몰라서 매일 성당에 들러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매일 오셔서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가 된 행복이고 그분의 의로움은 그분께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음입니다. 위 할아버지는 다른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자격은 예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에 나와 있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있습니다. 당시 여러 버전의 주님의 기도가 있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마태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말이 단순해집니다. 아기들이 “엄마, 엄마, 엄마…” 하는 기도가 더 셀까요, 아니면 많은 말로 부모를 설득하는 자녀의 기도가 더 셀까요? 부모를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 안에는 부모에게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엄마라는 말을 반복하는 아기가 부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습니다.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 혹은 자비의 기도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러한 기도가 더 힘이 강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는 기도보다는 기도가 단순해질수록 더 높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다 높은 수준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처럼 그 단순한 “엄마!”란 말에 자기 온 감정을 집중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주님의 기도라도 한 기도 말에 오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과 접하지 않은 한 섬에 선교를 들어갔다가 시간이 없어 주님의 기도만 알려주고 나왔습니다. 3년 뒤에 그 선교사가 그들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 주민들은 물 위를 걸어서 선교사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선교사에게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저희가 선교사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반복해서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불가능한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 위를 걸어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 말이 단순하다는 말은 그 말 안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반복하는 “엄마, 아빠!”란 말엔 아기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습니다. 점점 어린이처럼 기도가 단순해질 때 기도는 더 높아집니다.
저는 성체조배 할 때 주님의 기도만을 바칩니다. 보통 주님의 기도를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할 때 호흡에 맞춰 숫자를 셉니다. 잠이 안 올 때 상상으로 양의 숫자를 세는 것과 같습니다. 숫자를 세면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분심이 되면 어디까지 숫자를 셌는지 잊어버립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끊어가며 바치고 그 의미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70번 호흡을 셉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 한 번 바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기도를 하며 성경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기도 말 안에 깊이 스며들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녀 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까지 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목적이고, 부모에게 아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넣어 “엄마 엄마!,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 말 안에 아이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는 것처럼 기도가 단순해질 때 기도는 더 높아집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다음 네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1) 나도 알고, 남들도 아는 나의 모습.
2) 나는 알지만, 남들은 모르는 나의 모습.
3) 나는 모르지만, 남들은 아는 나의 모습.
4) 나도, 남들도 모르는 나의 모습.
대부분 첫 번째와 두 번째 모습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가 제일 잘 안다고 여기며, 그중에 어떤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며 불평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안에 세 번째와 네 번째 모습도 있음을 인정합니다. 즉, 자기도 모르는 새로운 나의 모습이 있고, 때로는 남들이 나에 대해 더 잘 알수도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들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려 하기보다 자기 모습을 더 잘 알기 위해 노력합니다. 반대로 어리석은 사람은 다른 이가 바라보는 자기 모습에만 더 큰 관심을 두기에 늘 거짓과 위선 속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실로 지혜롭기를 원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지혜롭다고 인정받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등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위선자’라는 표현으로 꾸짖으시며, 이런 거짓된 지혜로움에서 벗어나길 바라십니다. 위선자란 자기를 세상에 숨기고 더 나아가 하느님께도 숨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된 나를 숨기지 않는 참된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나를 잘 알 수 있도록 깊은 묵상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십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매 미사 때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그 시작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길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가 낮아져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에는 ‘하느님’이라고도 함부로 부를 수 없었는데, 이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하느님과 우리의 간격을 좁혀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모두 잘 알고 계시고,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분임을 ‘아버지’라는 표현으로 강조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으로 가까이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사랑에 대답해야 할까요? 자기를 숨기는 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겸손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겸손함은 반짝이는 빛이다. 정신이 지식을, 마음이 진실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킨다(폴린 드 뮐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