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어김없이 가을바람이 분다. 그토록 길고도 후덥지근하고 끈끈한 공기는 어디로 밀려간 것일까. 이 신선함 바람은 친근한 것과 만나는 기분을 만들어 준다. 이내 쾌적한 그리움이 회복된다.
지난 토요일에는 텃밭 농장에서 '가을배추 모종과 쪽파 구근'을 나누어 주는 행사가 있었다.
아침 8시 30분에 텃밭농장 잔디밭에 모였다. 사방에서 잔디 밭으로 걸어오시는 텃밭 이웃들이 보인다. 우리는 늘 새롭게 만나듯이 인사를 나누었다. 바로 일을 시작하였다. 배추 모종판을 24개씩 잘랐다. 165개의 텃밭에 텃밭 당 24개의 배추 모종과 한 움큼씩의 쪽파 구근을 나누어 준다.
4월에 상추 모종을 나눌 때는 박농민이 나 대신 일찍 나가서 모종 상판 자르는 것을 거들었다. 박농민은 내가 이번에도 늦게 갈까 봐 애가 타나 보다.
"걱정 마셔! 이번에는 안 늦을 거임!"
그 전날 밤 건강검진 후 피곤해서 초저녁에 잠을 잤고, 새벽에 일어났다. 이때부터 안 자면 되니까, 배주 모종 나눔에 늦을 일은 없었다. 박농민은 안심이 되는지 느긋하게 토요일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서면서, '이렇게 일찍 텃밭에 가본 적은 별로 없었네!'라고 중얼거렸고, 경쾌하게 걸었다.
모종판을 자르는 일은 여러 손이 같이 하니까 금방 마무리되었다. 어린 모종 다칠까 봐 조심조심 잘랐다. 모종판 나누어 주는 일에 대해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다 같이 나누어 주면 헛갈리니까, 접수받는 분 한 분, 나누어 주는 분 한 분, 모종이 비면 채워주는 분 한 분, 그 뒤에서 테이블에 모종 올려놓고 전달해주는 분 한 분, 이렇게 정하고 나머지 인원은 그 주변에 앉거나 서 있었다. 모종 나누어 주는 곳에 운영위원회 분들이 다 모여 있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역시 부부가 함께 와서 돕는 풍경들이 있었다. 보기에 좋았다. 봄에는 박농민이 나보다 일찍 나와서 도왔으니, 이번에는 푹 쉬시오!'했는데 얼마 안 되어 캐리어 끌고 나타나서, 거름과 석회를 받아다 놓았다. 집에서 가져온 거름&상토를 텃밭에 뿌려주었다(내가 미리 섞어 놓았었다).
어느 분의 지인들께서 커피를 사 오셔서 시원하게 한 잔 마셨다. 천막 그늘 밑에서 마시는 아이스 커피는 달짝지근하였고 점차로 강렬해지는 태양 빛은 얼음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배추 모종을 받으러 텃밭주인들이 한 분 두 분 나오시기 시작하였다. 봄날 상추 모종 때는 시간 맞춰 한 번에 거의 다 오시더니, 이번에는 드문드문 나오신다. 봄은 지금 생각해봐도 묘한 흥분이 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린 직후라 어떤 생동감이 샘솟는다. 그러니 모두 밖으로 빨리 나와서 빨리 상추 모종을 받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가을 초입은 나름대로 여름을 지나오면서 어떤 생동감은 많이 빠져나가고 약간의 탈진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강렬한 태양 빛에 의해 느려짐이 있는 것이다. 빛 알갱이가 공간을 떠도는 권태도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이 공간에 한 사람씩 등장하듯이 165개의 텃밭 주인들이 드문드문 나타나서 배추 모종과 쪽파 구근을 받아가는 것이다. 이 풍경은 봄날의 상추 모종 나누기와 대비된다. 봄날에는 사람들이 한 번에 몰려 나눔이 다소 정신이 없었다면, 이번에는 드문드문 오는 분들을 일일이 안내하여 질서 정연하게 나눔을 하였다. 두어시간 동안의 일이었지만, 한낮의 시간대에는 태양 빛이 발산하는 권태로움이 있다. 게다가 사람들 역시 드문드문 온다. 운영위원들은 모두 천막 아래에서 같이 그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다. 이 권태로운 태양 빛의 시간을 같이 보내는 그 자체가 바로 '일'이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한데 어울려 같이 있다는 바로 그것이 '에너지'였다. 사람들이 드문드문 와도 아무렇지 않게 지나갈 수 있고, 같이 즐겁게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 그리고 바로 이것이 텃밭 농장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는 것도. 모여 있는 이들 자체가 즐거우면 되는 것이고, 그 에너지가 빛에 의해 퍼지는 것. 이내 각각의 텃밭에 사람들이 모종을 심었다. 사람들은 드문드문 오지만 어느새 텃밭에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것.
정오가 되었다. 머리 위에서 태양은 빛나고 있다. 모종 나눔이 마무리되었다. 배추 모종과 쪽파 구근 나눔이 완결되었고 우리는 점심을 먹으로 바닷가 쪽에 위치한 '정가네'로 향하였다. 오래된 미래 탑이 철거 중이었다. 이곳은 광장이 될 예정인가 보다. 아마도 월곶 축제 때 이 자리에 무대가 들어설 것이다.
텃밭 운영위원들 점심 회식시간이다. 운영위원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같이 모여 있으니까 그 자체로 어떤 든든한 배경이 되는 풍경이었다. 텃밭 대장님의 경험담을 빌리자면, 사람이 없으면 모두 각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셨다. 딴은 그렇다. 그것은 개인들의 잘못은 아니다. 어떤 일이라도 중심 코어가 약하면 저절로 흔들리고 흔들리기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언성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텃밭 운영위원회가 있으니, 이런 행사들에 필요한 일이 저절로 잘 진행된다. 서로가 어떤 일을 그 시간 동안 같이 하는 그 자체에서 운영의 묘는 드러난다. 그냥 거기에 빠지지 않고 모두 참여한 그 자체로 일은 잘 굴러갔다.
간혹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왜 서로들이 만나서 밥을 같이 먹을까! 사람들은 왜 밥을 같이 먹는 것을 좋아할까?' 텃밭대장님은 '월곶텃밭은 따로 무엇을 사서 나눠주거나 그러지 않고, 밥 먹는 걸로 끝낸다. 그게 제일 좋다'고 하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는 공적인 일을 했고, 아침 8:30 ~ 12:00까지 자원봉사를 했다. 그리고 식사비용은 텃밭운영비로 텃밭대장님이 지급하시는 거다. 운영비를 사용할 권한은 텃밭대장님에게 있다. 그 돈을 어떤 형태로 사용하는가에 대해서는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내가 관심 가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공적인 일을 했을 때 공금으로 밥을 먹는 이것이 나는 마음에 든다는 것이다. 사적으로 누군가 쏴도 좋겠지만, 규칙적인 일들에 대해서는 규정된 틀이 중요하다. 공적인 일에 사용할 운영비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자원봉사를 하고 밥을 집에 와서 먹어도 그만이지만, 공적인 비용으로 공적인 일을 한 후에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과 그 비용이 누군가의 사적 돈이 아니라는 것이 더 큰 매리트다. 마음이 가볍기 때문이다.
어떤 모임이든지 거의 사람들은 각자가 자기비용을 내고 모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임 안에서 어떤 공적인 일을 하고 나면, 공적으로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운영비를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까? 아닐까? 여기에 생각이 이내 미치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정도만 되어도 일의 형태나 모임이 잘 굴러가는 것은 당여지사일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모여서 구실 삼아 밥만 먹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문제일 것이다. 반면에 현장에서 실제로 활동하며 그 활동성이 뒷받침되는 운영위원회라면, 이렇게 모여서 같이 밥을 먹는 것은 그 자체로 이끌고 가는 데 동력이 된다. 동력을 만들어 내는 같이 '밥 먹기'이다. '텃밭 가을 운동회'를 구상 중이시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월곶에 온 이래로 참 많은 행사들을 보았다. 동네는 그리 크지 않은데 참 다양한 일들이 많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나는 해안 산책로만 걸었다. 이곳도 다른 도시들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바다가 있는 것을 제외하면. 그러다 문득 얼떨결에 텃밭 신청을 했고 당첨이 되었고, 그 후로 정말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어떤 계획표처럼 일상 스케줄 표가 저절로 짜졌다. 그리고 동네 커뮤니티는 텃밭이 되었다. 텃밭을 하면서 중심을 관통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또 생각해 보게 되었다. 텃밭을 하면서 식물을 가꾸면서 식물의 중심과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느낌들이 좋았다. 그러다 또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자원봉사를 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보이지 않는 공동체의 중심 감각이 다시 작동하는 것을 느꼈다. 세상! 공부 아닌 것은 없다는 말은 맞는 말 같다.
이러한 것은 누가 가르쳐 주는 공부도 지식도 아니다. 그 자신만이 아는 것. 아마도 이러한 것은 철학이리라. 니체는 근면한 사람과 친구 하라고 말했다. 그 자신의 것에 관심을 쏟는 사람이 타인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리고 나와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이 텃밭을 하는 분들 중에도 꽤 될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세상은 바로 이러한 구조가 복제되어 중첩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 역시 이러한 구조를 복제하며 그 중첩에 중첩으로 중첩되어 있다. 이것은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전반에 걸쳐져 있는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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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한 사람만을 친구로 사귈 것 -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자는 친구들에게 위험한 사람이다. 그 이유는 단지 그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이 하는 일과 하지 않는 일에 대해 논하고, 마침내 그 일에까지 개입해서 자신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근면한 사람들과만 우정을 맺는 것이 현명하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제1장 260절에서,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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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근면함'이라는 문구는 현시대에서는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문맥을 따라서 생각해 보자면, '어떤 사람에게 그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 일을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경계와 영역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자기 일도 아닌데 끼어들어 갑론을박하지 않고, 불필요하게 개입하여 자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책 원문에는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여기서의 '근면함'을 따져본다면, 아마도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니체는 학자적 삶의 태도를 지향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공부에는 사색도 포함되고 산책도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품고 있는 것을 좇는 삶의 방식도 포함될 것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니체가 말하는 '근면한 사람들과의 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해진다. 분명 그 자신의 것을 하다 보면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그 제한은 그 자신 스스로의 제한이지 족쇄는 아니다. 자기 것을 묵묵하게 해나가면 그것이 바로 그 자신의 힘이다. 내적 에너지이다. 결국, 이것이 엔트로피를 높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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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한 자들의 위험 - 너무 좁은 욕망의 기초 위에 삶을 세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 지위, 명예, 동료, 쾌락, 편안함, 예술이 가져오는 기쁨을 포기해버린다면, 이렇게 포기함으로써 지혜 대신 삶에 대한 염증만 이웃으로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제1장 337절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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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텃밭들이 모여 하나의 공원처럼 보이는 농장이 만들어진다. 이러면 이런대로 저러면 저런 대로 식물들이 내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 아주 약간만이라도 인간의 미적 시도가 가미되면 그 풍경에서는 묘한 울림을 받게 된다. 이 작은 멈춰선 떨림이 그 자신 안에 울려 퍼지는 파동을 만드는 것이다. 이 작은 울림을 만드는 일은 너무 좁은 욕망 위에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건 모두 안에서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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